말콤 엑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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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1b><colcolor=#fff> 말콤 엑스 Malcolm X | |
본명 | 이슬람 개종 전 말콤 리틀 Malcolm Little |
수니파 귀의 후 엘하지 말리크 엘샤바즈 el-Hajj Malik el-Shabazz[1] | |
출생 | 1925년 5월 19일 |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 |
사망 | 1965년 2월 21일 (향년 39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이슬람 운동가, 시민운동가, 인권운동가 |
신장 | 192cm |
가족 | 배우자, 슬하 6녀 |
종교 | 개신교(침례회) → 이슬람(NOI → 수니파) |
서명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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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급진적 흑인 민족주의 사상가.2. 생애
2.1. 유년기
네브래스카주 동부 오마하시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흑인들은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침례회) 목사였고, 도리어 이런 아버지의 죽음이 백인에 대한 증오로 그를 몰아간 감도 있다. 당시 흑백분리 운동을 주도한 마커스 가비 목사는, 흑인이 꼴도 보기 싫은 백인들의 암묵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대차 때문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면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어머니[2]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엑스의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루이즈 리틀(Louise Little)과 아버지 얼 리틀(Earl Little).
그래도 보호시설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럭저럭 착실히 학교생활을 했고, 반의 수석이자 반장이 되는 인간 승리를 이뤘다. 머리 하나는 타고났던 모양. 이런 면모 때문에 학교 교사에게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교사에게 "현실적으로 생각하거라. 목수가 되는 게 어떠니?"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이 당시 진로상담을 받으러 온 백인 학생들은 대부분 '농부가 되고 싶다'는 등의 꿈을 말했는데, 정작 그들에게 이 교사는 "꿈은 더 크게 가지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한다. 엑스는 이 교사를 학창 시절 가장 인간적으로 여겼기에 실망감을 느꼈다. 사실 이때 교사가 한 말은 "뭐? 검둥아. 네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흥!"이란 식의 말투까진 아니고 당시 흑인의 대우를 상기시키며 "꿈은 크다만 현실적으로는..."란 완곡한 어감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물론 그 교사가 살던 시기는 흑인은 아예 인간으로 쳐주지 않는 백인우월주의스러운 사회분위기가 지배했던 시기였다. 특히 해당 지역은 촌동네라서 흑인과 백인이 전부 가릴것 없이 밑바닥 계층이 밀집되었기에 최대한 엄혹한 현실을 반영하여 말콤에게 '너무 큰 꿈을 품었다간 절망도 클 것이다' 라는 마인드로 현실적인 조언을 한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라서 더 충격이 컸을 충고였다.
당시 흑인들에게 허용된 직업은 요리사, 목수, 청소부, 벨보이, 카센터 및 3D업종 정도였고 아주 운이 좋아야 가수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운동선수도 당시에는 흑인경기와 백인경기가 따로 개최되었을 정도로 차별받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을 갖고 싶어도 학교에서 흑인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포기해야 했다. 설사 힘들게 의사나 변호사 직업을 갖거나 가수나 운동선수로 성공해도 병원과 로펌은 흑인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가수와 운동선수로 성공한 흑인도 호텔이나 식당,병원,공공기관에는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뒷문에 출입하는 것도 힘들었으며 심지어 미국정부가 대놓고 성공한 유색인종 출신들에게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감옥에 수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쨌든 이 말이 큰 상처가 되었는지 뒷날 엑스는 "그때 선생이 격려해줬으면, 난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을 텐데"라고 회상했다. 다만 그가 성공한 변호사가 되지 않은 대신 흑인 인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죽어서도 역사를 움직이고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튼 그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아 1939년,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백인들에게 박해당하면서 자라온 그의 이런 경험은 뒷날 인권운동노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백인이었던 강간범 외조부 때문에 그는 머리가 붉은 빛이었고, 어릴 적엔 Detroit Red라 불리기도 했다. 몇 안 되는 그의 컬러사진이다.
청소년기에는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의 미국 북동부를 전전하며 구두닦이, 샌드위치 판매원 등의 일들을 하며 소일했고, 뉴욕 철도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소일할 무렵엔 빌리 홀리데이와도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녀와 식사도 같이 하고 사진도 찍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1943년에는 징병사무소에서 그에게 징병 통지서를 발송했는데, 징병검사에서 "총만 있다면야 당장 크래커(Cracker) 몇명을 죽이겠죠"라고 징병검사관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징병검사관은 "정신상태가 군복무에 부적합"이라고 기록해 4-F 등급[3]을 받았다. 마약 밀매나 강도, 포주에도 손을 대며 백인 여성 두 사람과 동업해서 총기 강도 범죄를 저지르던 끝에 체포되어 절도범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매사추세츠에서 복역했다. 이 형량에 대해 본인의 자서전에는 당시 배심원들이 감히 선량한 백인 여성을 나쁜 길로 사주했다는 일종의 괘씸죄가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도리어 역으로 그가 이들의 권유로 이런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은 쉽사리 훈방되었다. 이것이 1945년의 일이다.
이 교도소에서의 삶이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학으로 공부한 동료 수감자 존 빔비라는 사람의 권유로 그 역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흑인민족주의 종교단체였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알게 되고 그 조직의 지도자인 일라이자 무하마드(Elijah Muhammad, 1898–1975)[4]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2년에 가석방되었을 때 무하마드를 만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무렵에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샤바즈(Shabazz)'[5]라는 성을 쓰다가 얼마 안지나 '엑스(X)'로 성을 바뀌었는데, X로 한 이유는 '리틀이라는 본래 성은 백인 악마, 백인 노예주가 붙인 성이므로,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조상의 본래 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2.2.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의 활동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몸담으면서 뛰어난 수완과 연설 실력을 발휘해서 1952년 500여 명에 불과했던 작은 종교조직을 1963년 무렵 25,000명에 달하는 거대조직으로 성장시켰다.
당시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의 운동노선과는 반대로, 그의 노선은 이른바 '흑인국민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로 압축될 수 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면 또 다른 차별만이 있을 것이니, 흑인들이 실력을 길러서 백인들 사회에서 분리된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플레이 보이>와의 인터뷰에선, 미국의 영토 일부를 할양받아 흑인들만의 자치구역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또한 선동적이고 과격한 연설로 당시 흑인 하류층의 분노를 고발하고 백인 주류 사회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서 백인과의 공존과 타협을 지향한 킹 목사의 인권운동노선 역시 강력하게 비난했다.[7] 오히려 흑백통합노선의 인권운동을 "백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그렇다고 킹을 싫어한 건 아니고 나름대로 존중했다.
특히 1957년의 힌튼 존슨 사건은 그를 크게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존슨이라는 흑인 이슬람교도가 뉴욕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실을 안 흑인 8백여 명이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엑스와 접촉을 했다. 말콤은 교섭 끝에 존슨을 치료할 것과 폭행한 경찰을 처벌할 것을 약속받고 이를 경찰서 앞에 모여 있던 흑인들에게 전달하고 흑인들을 순식간에 해산시켰다. 이 장면은 그 유명한 영화 <Malcolm X>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흑인인권운동 노선의 대세가 백인과 흑인의 통합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으며, 그가 인기를 끈 이유도 흑백분리 주장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백인 주류의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인 면이 더 강했다. 말하자면 "저 사람 말빨 쫌 쩌는 듯", "내 속이 다 시원하네"란 의미가 더 강했다는 것.[8]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당시 그가 직접적으로 흑인민권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대외적으로 교리상 신도에게 종교활동 이외의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표방했다. 그의 활동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대변인으로서 했던 선교활동에 그쳤다고 하며, 흑인민권운동과 관련된 행진, 시위나 서명 등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한다. 그러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교리의 목적은 애초 백인에 대한 악마화, 흑백분리국가의 수립 및 흑인사회의 도덕 재무장과 계몽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3.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의 결별, 그리고…
1963년, 메카 성지순례 여행 중에.
스파이크 리가 감독한 말콤 엑스의 전기 영화 <말콤 엑스>(1992)에 그려진 말콤 엑스의 메카 순례.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자 이에 대해 "자업자득"이란 식으로 발언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9][10] 논란이 되자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엑스에게 근신처분을 내렸고 이듬해 1964년 엑스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고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것에 대해서는 1. 무하마드가 엑스의 명성과 능력을 시기했다는 것과 2.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무하마드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3. 무하마드의 도덕적 이중성, 특히 성적 문란 의혹에 대해 엑스가 실망했던 것 등 여러 원인이 겹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무하마드의 아들 워리스 딘 모하메드(Warith Deen Mohammed, 1933–2008)가 엑스에게 그런 말을 했고, 무하마드 역시 공개석상에서 부하들에게 금욕을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11]
탈퇴 후 말콤 엑스는 이슬람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1964년 4월 13일부터 19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메카로 성지순례 여행을 했다. 성지순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자 종교적으로는 '성지의 수호자'인)이던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와 제다에서 만나 잠시 대담을 가지기도 했다. 파이살 왕 측에서 말콤을 국빈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 나세르나 바트당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범아랍 민족주의에 맞서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범이슬람주의의 기치를 세우고자 했던 파이살 왕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말콤은 성지순례를 계기로 종교신앙과 인권운동노선이 크게 바뀌었다. 사실 이전까지 그가 몸담고 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이슬람교의 용어만 차용해 왔을 뿐 교리는 이슬람과는 큰 연관이 없었다. 종교보다는 차라리 SF 소설과의 연관점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으며, 흑인 우월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니파 정통 이슬람교'를 접하고 말콤 엑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During the past eleven days here in the Muslim world, I have eaten from the same plate, drunk from the same glass, and slept in the same bed (or on the same rug)ㅡwhile praying to the same God--with fellow Muslims, whose eyes were the bluest of blue, whose hair was the blondest of blond, and whose skin was the whitest of white. And in the words and in the actions in the deeds of the 'white' Muslims, I felt the same sincerity that I felt among the black African Muslims of Nigeria, Sudan, and Ghana.
We were truly all the same (brothers)--because their belief in one God had removed the white from their minds, the white from their behavior, and the white from their attitude.
I could see from this, that perhaps if white Americans could accept the Oneness of God, then perhaps, too, they could accept in reality the Oneness of Man--and cease to measure, and hinder, and harm others in terms of their 'differences' in color.
이곳 무슬림 세계에서 지난 11일 동안, 나는 같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고, 같은 물잔으로 마시고, 같은 침대(또는 같은 양탄자 위)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백인' 무슬림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는 나이지리아, 수단 공화국, 가나의 아프리카 흑인 무슬림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진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로 똑같았는데, 왜냐하면 유일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마음에서 백인을 제거했고, 그들의 행동에서 백인을 제거했으며, 그들의 태도에서 백인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아마도 미국 백인들이 주님의 유일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들도 실제로 인간의 유일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We were truly all the same (brothers)--because their belief in one God had removed the white from their minds, the white from their behavior, and the white from their attitude.
I could see from this, that perhaps if white Americans could accept the Oneness of God, then perhaps, too, they could accept in reality the Oneness of Man--and cease to measure, and hinder, and harm others in terms of their 'differences' in color.
이곳 무슬림 세계에서 지난 11일 동안, 나는 같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고, 같은 물잔으로 마시고, 같은 침대(또는 같은 양탄자 위)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백인' 무슬림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는 나이지리아, 수단 공화국, 가나의 아프리카 흑인 무슬림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진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로 똑같았는데, 왜냐하면 유일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마음에서 백인을 제거했고, 그들의 행동에서 백인을 제거했으며, 그들의 태도에서 백인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아마도 미국 백인들이 주님의 유일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들도 실제로 인간의 유일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스파이크 리의 영화에서 독백 형식으로 나오는 메카에서 쓴 편지(1964)에 따르면 평생 인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미국에서 살다가 정통 무슬림들이 종교, 언어, 인종을 넘어 같은 영적 체험을 나눈 것에 신선한 충격을[12] 받았다고 한다. 말콤 엑스는 성지순례(하지)를 하면서 흑인은 물론 황인과 혼혈인, 백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국적과 민족에 상관없이 한데 어우러져서 같이 숙식을 하고, 같이 손을 씻으며, 같이 카바를 돌고, 같이 짐잠 우물물을 나눠 마시는 것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알바니아와 보스니아 등지에서 온 백인계 무슬림과도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면서, 비록 무겁긴 하지만[13] 인종의 굴레를 넘은 공통적인 인류애라는 걸 제대로 느꼈다고 한다.[14]
You may be shocked by these words coming from me. But on this pilgrimage, what I have seen, and experienced, has forced me to re-arrange much of my thought-patterns previously held, and to toss aside some of my previous conclusions. This was not too difficult for me. Despite my firm convictions, I have always been a man who tries to face facts, and to accept the reality of life as new experience and new knowledge unfolds it. I have always kept an open mind, which is necessary to the flexibility that must go hand in hand with every form of intelligent search for truth.
당신들은 내가 지금 하는 말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례길에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많은 사고 패턴을 재정리하고 내가 전에 내렸던 결론의 일부를 버리게끔 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사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지식이 펼쳐지는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나는 언제나 열린 마음을 유지해 왔는데, 이는 진리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적인 탐구'와 함께 가야 하는 '유연성'에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당신들은 내가 지금 하는 말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례길에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많은 사고 패턴을 재정리하고 내가 전에 내렸던 결론의 일부를 버리게끔 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사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지식이 펼쳐지는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나는 언제나 열린 마음을 유지해 왔는데, 이는 진리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적인 탐구'와 함께 가야 하는 '유연성'에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그리고 성지순례(하지)를 마치고 나서는 그동안 자신이 주장해 왔던 '백인은 악마'라는 사상의 한계를 인정했다. 이름도 무슬림식 이름인 엘하지 말리크 엘샤바즈로 개명하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떠나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말콤 엑스의 가족들은 '샤바즈'를 성으로 쓰고 있다. 메카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이슬람이 인종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America needs to understand Islam, because this is the one religion that erases from its society the race problem. Throughout my travels in the Muslim world, I have met, talked to, and even eaten with people who in America would have been considered 'white'--but the 'white' attitude was removed from their minds by the religion of Islam. I have never before seen sincere and true brotherhood practiced by all colors together, irrespective of their color.
미국은 이슬람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슬람은 그 사회에서 인종 문제를 지우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무슬림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에서는 '백인'으로 여겨졌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함께 식사하기도 했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의해서 '백인'이라는 태도는 그들의 마음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인종이 함께 진실하고 참된 형제애를 실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미국은 이슬람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슬람은 그 사회에서 인종 문제를 지우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무슬림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에서는 '백인'으로 여겨졌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함께 식사하기도 했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의해서 '백인'이라는 태도는 그들의 마음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인종이 함께 진실하고 참된 형제애를 실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메카에서 쓴 편지(Letter from Mecca), 1964년#
다른 인권운동 단체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도시 흑인 빈민들의 주택,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또한 흑인들의 단결을 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AAU)를 창설했으며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간 평화를 역설했고 백인의 박해로부터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주장했다. 킹 목사와 선거권 문제에서 연대하면서 그 유명한 "투표권 아니면 총알이다!"를 외친 것도 이 때이다.
그러나 말콤 엑스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4. 암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이후 무하마드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들의 전화 협박 등에 시달렸고 급기야 1965년 2월 14일 집에 방화가 일어났다. 이때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미 그때 그는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매일 준비하고 있었겠지만.자택 방화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가의 오두본볼룸에서 연설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당시 청중 4백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검둥아! 내 주머니에서 손을 빼!"라고 외쳤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엑스는 "진정하십시오! 형제들이여, 흥분하지 말고 냉정해집시다!"라고 외치며 군중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그 남자가 주머니에서 산탄총을 꺼내 엑스를 저격했고, 엑스가 쓰러지자 두 남자가 나와서 엑스에게 연속해서 총을 발사했다. 당시 무려 16발의 총알을 맞았고 콜롬비아 장로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과다출혈로 절명한 뒤였다. 그의 당시 나이 39세였다.
암살범들은 체포되었다가 1980년대에 2명은 석방되었으며 마지막 1명은 2010년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소속 조직원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마틴 루터 킹과 마찬가지로 엑스의 암살에 대해서도 배후가 있다는 등 많은 음모론이 뒤따르고 있다. 말콤 엑스 본인도 죽기 전, 아니 탈퇴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들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과 높으신 분들이 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들의 수법은 자신이 알지만 자신을 노리는 자들은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2.4.1. 은폐된 진실
‘맬컴 X 암살범’ 55년만에 누명 벗어…20여년 복역 후 1명은 사망말콤 엑스가 암살당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2021년 11월 18일, 뉴욕 맨해튼 지방 검찰청은 당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3명 중 2명에 대하여 혐의를 취하한다고 밝혔다. 재판 당시에도 범인 중 한 명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머지 두 사람은 무고를 주장했었는데, 그 주장이 이제서야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무하마드 아지즈는 83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지만, 누명을 썼던 다른 한 명인 칼릴 이슬람은 이미 2009년에 사망한 뒤였다.
유족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가졌다.#
3. 평가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이 사진 말고도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찍은 사진은 꽤 많다.
마틴 루터 킹은 1950 ~ 6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지만, 말콤 엑스는 그에 비해 대접을 좀처럼 받지 못하는 편이다. 그 이유로는 흑백의 통합과 공존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도 인종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마틴 루터 킹에 비해 말콤 엑스는 성지순례 이전까지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론을 지나치게 주장했던 탓이 크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들어가서 급진파로서 활동한, 다소 과격한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킹에 비해서 엑스는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도 꽤나 적은 편이다. 사실 그때 당시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정부적인 인종차별과 심각한 린치로 인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지만[15] 급진적인 주장이었기에 후속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의 급진론은 여러 흑인 무장투쟁 단체에 영향을 많이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흑표당이 있다.
그의 주장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해 결과적으로 흑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총체적이고 대국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물론 흑인이슬람주의 운동의 순수성에 집착한 것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격한 흑인우월주의의 씨앗은 말콤 엑스가 뿌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그의 인생 후반기에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연대론과 포용론을 주창하기 시작하는 등 인권운동 노선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그의 남은 생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거기에다가 말콤 엑스가 급진적인 운동을 전개한 이유도 흑인과의 공생을 거부하고 대화조차 차단하던 당시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 탓도 컸다. "평등하지만 다르게"란 명목으로 미국 사회는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를 오랜 시간동안 격리하고 분리시켰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사상과 인물들이 희박했던 탓에 결국 말콤 엑스의 폭력적이고 흑인우월주의적인 혁명론보다는 평화주의적이고 인종주의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집중했던 마틴 루터 킹의 인권운동론에 더 기울였다.
그래도 나름의 긍정적인 면을 언급하자면 열등감과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흑인들에게 흑인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고 대도시 빈민가 흑인의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모순점에 대해 지적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20세기 초반 부터 소수의 흑인 신비주의 계열 지식인들이 간접적으로, 어설프게나마 이슬람과 접촉하면서 발달시켜 온 북미 흑인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흑인 대중에게 설파하며 북미 흑인이 스스로를 본격적으로 또 하나의 민족으로 여길 수 있는 자긍심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그의 활동이 지속되었다면 구 전통시대의 제한된 정보에서 비롯된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면을 완전히 벗겨내고 실제로 하나의 성숙하고 자각심 있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흑인 무슬림들이 더욱더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을 거란 평가도 있다. 또한 킹의 후반기 운동이 더 적극적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현대에 와서 두 인물 양쪽 다 각자의 방식으로 걸출한 위대한 민권 운동가이자 해방자였다는 평가가 대두되면서 킹과 말콤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양쪽 다 말년에 갈수록 서로 공감하고 어느 정도 노선을 공유하게 되는 공통점에 더 주목을 두고 있다. 말년의 킹은 민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이념을 확고히 하며 비폭력적이만 확실하게 미국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적인 면과 단절하는 사회적 혁명을 주장했고, 말콤 엑스 또한 사망 전엔 단순한 백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전인류적 인종간의 연대를 부르짖었다.
배우 오시 데이비스는 추도사에서 엑스를 "빛나는 검은 왕자"라고 표현했으며, 유명한 복싱 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는 말콤 엑스가 당시에 펼친 이슬람 운동에 영향을 받고 감화받아 이름을 무슬림식으로 바꾼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다만 무하마드 알리는 말콤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떠나고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비난하자 사이가 벌어져 교류가 끊긴 적이 있었으나 훗날 말콤 엑스의 사망 후 그의 진정성을 깨닫고 오해를 풀었다고 했다. 유시민은 자신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차별의 한계에 너무나도 높이 날아간 "검은 이카루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말콤 엑스는 연설 중에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여 싸운 한국의 학생들을 언급하며 여러 번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그가 아직까지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청렴하고 깨끗한 사생활이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활동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열성추종자들을 거느렸지만, 어떠한 추문도 없었고 대부분의 수입을 교단에 기부했다고 한다. 말콤 엑스가 죽고 난 후 가족에게 남긴 돈이 없어 거주하는 집이 경매에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는데, 추종자들이 돈을 십시일반 모아 막았다. 종교 지도자는 부패에 빠지기 쉬운 자리다.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인 루이스 파라칸만 해도 말콤 엑스가 빠진 후 위기에 빠진 종단을 부흥시켰다며 몇 개의 호화 주택과 수대의 고급 자동차, 거액의 현금을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그 인격자 마틴 루터 킹조차도 몇 건의 불륜 의혹 때문에 FBI에게 협박을 받기도 했다. 반면 말콤 엑스에게 이런 사례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말콤 엑스의 재평가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백인 권력층을 비호하며 보수주의를 내세운 레이건과 부시 아래 미국 밑바닥에서 박탈감을 느끼던 흑인들이 말콤 엑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기 영화가 나온 이유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한다.
4. 마틴 루터 킹과의 비교
1964년 워싱턴 의회 입구에서 만난 흑인 인권운동의 두 거인. 이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만남이다.
출신이나 성장과정, 인권운동 노선이 달랐던 탓에 여러 모로 킹 목사와 비교되기도 하고 라이벌로까지 몰아가기도 하며 두 사람은 서로 인권운동노선에 비판을 많이 가하기도 했지만, 정작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다. 그나마도 단 5분도 되지 않았으며 진지한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인사하고 허허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것 정도가 전부다.
어쨌든 당대의 맞수로 몰아가기도 했고, 서로 비판을 많이 가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운동노선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말년에는 각자의 노선 방향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인권운동 노선을 모색하고 서로 단결하고 노력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으며 말콤 엑스도 백인을 무조건 적으로 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고 킹 목사의 인권운동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이념적으로도 킹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으며, 맬컴 X도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이후에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말년의 엑스 역시 그런 점을 직접 지적하기도 했다.
"나의 운동과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항상 같다. 그 목표는 백인이 무방비상태의 흑인에게 저지르는 만행과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이런 풍토에서, 흑인 문제에 대한 '두 극단적 접근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 즉, '비폭력'의 킹 목사인지, 이른바 '폭력적'이라는 나인지는 -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의 앞선 흑인운동 선배 격이었던, 당대에는 과격하다고 평가받은 이상주의자 W. E. B. 듀보이스와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부커 T. 워싱턴이 연상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그 둘도 매우 대립하는 사이였다. 사실 사상적인 측면으로 보면 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공유하는 점이 더 많아졌던 킹-엑스 보다 저 한세대 전의 흑인 계몽운동 지도자 둘은 본격적인 사상적 갈등도 심했다. 부커 워싱턴의 경우 소위 '실력 개량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큼 상업과 교육을 통한 흑인들의 '실력 양성'을 추구했고 정치적 평등운동은 배격했던 반면, 두보이스[16] 같은 경우 말콤 엑스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사상적 대부라 부를 만큼 정치적, 민권 평등 투쟁 자체에 적극적이었으며, 사회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급진 좌파, 세계적 반제국주의 운동과도 연관이 깊었다.
두 사람은 묘한 부분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기도 하는데, 엑스는 사생활이 깨끗했던 데 비해서 마틴 루터 킹은 간음 등 여자 관계에 대한 루머가 좀 있었던 편이다. 그래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말콤 X>에서는 엑스와 그 아내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던 FBI 요원들이 킹 목사에 비하면 성인군자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부분이 있다. 마틴 루터 킹은 측근 및 자서전의 저자조차도 실드 쳐주지 못할 만큼 난잡한 성생활 및 불륜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반면에 말콤 엑스는 평생 아내만을 사랑하였으며 불륜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환경에 있었음에도 단 한 차례의 추문에도 휩싸인 적이 없었다.
이런 부분 말고도 서로가 대상으로 했던 흑인 내부 집단 또한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킹 목사는 전통적인 대규모 농업 중심으로 먹고 살고, 노골적으로 같은 화장실, 식수대, 버스 좌석도 못 쓰게 하던 인종 차별 법안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남부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으며, 그에 따라 그가 선택한 방식도 자연스럽게 여전히 남부에서 인종을 초월하여 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였다.
반면 말콤 X는 소수라지만 한창 미국의 공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수 많은 흑인들을 끌어 모으며, 그중에서 적게나마 교육받은 중산층도 존재했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하긴 했지만 남부처럼 대놓고 같은 화장실도 못 쓰게 법으로 해놓지는 않았던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북부의 도시 노동자 흑인들을 대상으로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좌파 혁명론과 접목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양적인 면만 두고 킹 목사가 더 중요했다, 엑스가 더 중요했다 갑론을박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 게, 엑스가 기반으로 두고 활동한 세속화된 도시 프롤레타리아도 물론 중요한 사회 집단이긴 하지만 숫적으로 보면 흑인 대이동을 겪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미국 흑인들이 많은 지방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이기 때문이다.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비교 분석한 서적으로는 제임스 콘이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지은 <말콤 엑스 VS 마틴 루터 킹>(원제: Martin & Malcolm & America)이 읽어볼 만하다. 킹과 말콤의 일생과 인권 운동을 함께 서술한 평전이라서 킹 목사와 엑스의 일생과 사상, 미국 흑인인권운동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 뿌리의 작가이자 말콤 X의 자서전을 구술한 알렉스 헤일리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흥미있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당시 헤일리는 엑스의 측근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인권 운동 관련 사안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만날 기회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킹 목사는 헤일리를 만날 때마다 '말콤 형제가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며, 엑스 역시 헤일리가 킹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킹 목사가 나에 대해서 뭔가 한 이야기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알렉스 헤일리에 의하면 활동 후반기의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양 쪽 모두 상대방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에서 말콤 엑스에 대해서 그의 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철학적 전제조건을 재평가하고 비폭력운동과 일반적인 백인들에 대한 경직적인 태도를 개선하던 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끝내 유능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상당히 아쉽다는 표현을 했다.
둘은 죽음조차 3년의 차이는 있지만 암살로 같았다. 말콤이 4살이 더 많기에 둘 다 40세가 되기 직전에 죽었다.
일반적으로 마틴 루터킹은 비폭력적이고, 말콤 엑스는 폭력적이란 인식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틴 루터 킹은 유복한 집안에서 모범적인 성장기를 보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터 독방에 투옥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은 반면, 말콤 엑스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며 유년시절 감옥에 밥먹듯이 드나들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턴 단 한번도 투옥 혹은 체포된 적이 없었다.
5. 영화화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 2010년 등재 |
인물이 인물인지라 영상화 구상은 여러번 되었다. 최초의 작품은 1981년 TV 드라마인 <Death of a Prophet>으로 모건 프리먼이 말콤 역을 맡았다. 처음 나온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이기보다는 시나리오의 탈을 쓴 철학적 고백록이었고 이후 영화에 걸맞게 대폭 수정되었다.
이 새로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한 스파이크 리 연출, 덴젤 워싱턴이 말콤 X를 연기한 1992년 영화 <Malcolm X>가 유명한데, 기본적으로 젊은 시절의 워싱턴이 워낙 엑스와 닮은 데다 명배우이다 보니 정말 실제 엑스와의 미칠 듯한 싱크로율과 환상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 쿠란의 파티하 장을 암송하는 장면은 꼭 보자. 러닝 타임이 3시간이 넘어가서 상당히 긴 영화이고 보기에는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전기를 읽는다고 생각하고 보면 몰입해서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서 방황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대해 한 번 훑어볼 수 있고,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사회에 저항하던 한 혁명가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볼 수 있다. 덴젤 워싱턴은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17] 하지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배우 오시 데이비스[18]가 말콤 엑스의 장례식 당시 실제로 했던 추도사이며, 영화 속의 내레이션 목소리 또한 데이비스의 목소리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깜짝 출연하여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에 대해 말해준다.
원래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노만 주이슨이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리가 강력하게 자신이 연출하고 싶다고 나서며 주이슨을 찾아가 설득하는 통에[19] 리가 연출하게 되었다. 다만 마찰보다는 노먼과 각본가 사이에 이견이 있어서 하차했다는 게 정설이다. 스파이크 리 발언에 따르면 노먼은 스파이크를 존중해줬다고 한다. 덴젤 역시 주이슨의 인맥으로 캐스팅되었다.
도중에 제작비 문제로 제작에 차질이 있자 흑인 유명인들에게 호소하여 제작비를 얻어 기어코 완성했는데, 이때 제작비를 대준 유명 흑인에는 마이클 잭슨이나 마이클 조던 같은 전설적인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리는 해당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의외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어 말콤 엑스 신드롬까지 생긴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1993년에 수입하여 개봉되었다.
- 참고할 만한 자료
정은임 라디오 소개 및 해설
2008년 개봉한 제이슨 스타뎀 주연의 미국 영화 뱅크 잡에는 그를 잇겠다는 마이클 X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실존 인물로 역시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흑백혼혈이었으며, 말콤의 오른팔이자 사촌동생인 하킴 자말이 말콤 사후 이 사람과 어울렸다. 그러나 자말은 마이클에게 자기 백인 애인인 게일 벤슨(이명 할레 킴가)을 잃기도 한다. 마이클 X는 이 때문에 1975년 사형당한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윌 스미스 주연의 2001년 영화 '알리'에서는 마리오 반 피블스가 말콤 엑스 역으로 출연했다. 이 배우도 외모가 실제 말콤 엑스와 꽤 흡사한 편.
마틴 루터 킹을 다룬 2015년 영화 셀마에서는 나이젤 새치(Nigel Thatch)가 말콤 엑스 역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이쪽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킹이 구금된 사이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킹의 부인인 코레타 스콧 킹을 찾아가 본인이 킹을 대신해서 연설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급진주의자로 유명한 본인이 대중을 선동할 것을 두려워하여 주 정부에서 그나마 '말이 통한다'고 판단하는 킹을 석방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둘은 서로를 거세게 비판해왔던지라 이를 수락한 부인에게 킹이 '어떻게 그런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냐'며 잠시 자제심을 잃고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20] 영화에서 킹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대표적인 장면. 그리고 석방된 킹의 연설에서 그가 얼마 후 암살당했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6. 자서전
이 영화의 토대가 된 말콤 엑스의 자서전은 그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 당시로서는 무명 작가인이던 알렉스 헤일리가 1965년 엑스가 사망한 뒤 출간한 것이다. 헤일리는 미합중국 해안 경비대 출신이고 그때부터 습작을 했으며 엑스와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말콤 엑스는 헤일리를 백인의 첩자 취급하며 마음을 열지 않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엑스가 흑인 이슬람국의 높으신 분들과 싸우고 와서 화가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헤일리가 별생각없이 던진 "당신 어머님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 한마디에 말콤 엑스는 자신의 과거를 상세히 얘기하기 시작한다.말콤 엑스는 헤일리에게 "이거 출판될 때 나 살아 있을까요?"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하는데 정말로 출판되기 전에 암살당해 버렸다. 헤일리 역시 말콤 엑스에게서 얻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으로 유명한 걸작 (및 본인의 대표작이 된) 뿌리를 완성했다. 후기에 나온 자서전판에서는 엑스의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한 느낌. 엑스 암살 전후에 대한 헤일리의 소고 등이 실려 있다. 뿌리만큼이나 헤일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창작과 비평사에서 상, 하로 나눈 번역판이 출간되었는데 초판이 1978년이라는 너무 오래전 책이라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렵다. 읽어 보고 싶은 사람은 헌책방을 한 번 수소문해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자. 아니면 지역 도서관에 비치되었을 수도 있다. 대학 도서관이라면 찾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국판은 번역도 좀 미흡하고 원작에 등장하는 구질구질한 욕설 같은 맛이 전혀 없다. 영어가 되신다면 원작을 보기로 하자. 실제로 감정이 격해지는 부분에서는 자서전에 육두문자가 그대로 노출되는 등 말콤 엑스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선 유시민이 쓴 베스트셀러인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 '검은 이카루스 말콤엑스'란 명칭으로 수록되면서 알려졌다. 말콤 엑스의 일생을 책의 한 단락에 간략하게 축약해놓았기 때문에 자서전이 너무 두꺼워 읽기 부담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보자. 단 저 책의 각 장이 월간지 연재 정도의 짧은 분량인 데다 정보를 쉽게 수집하기 어렵던 25년쯤 전에 나온 유시민의 초기작이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에, 개괄 정도로 읽는 것이 좋다. 다른 단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정보가 공개된 지금 해당 이슈의 현재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 참고로 유시민은 2021년 위 책을 완전히 다시 쓴 개정판을 출판했고 말콤엑스에 대한 부분도 시간이 흐른 만큼 내용을 채우고 추가했다. 말콤 엑스에 대한 유시민의 평가는 초판본에서는 '검은 이카루스'라고 표제어를 썼지만 2021년판 개정판에서는 '검은 프로메테우스'라고 쓴 데서 드러난다. 어찌보면 저돌적 무모함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이카루스에서 선지자이자 인류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 현자이며 그로 인한 희생자의 이미지를 가진 프로메테우스로 평가를 바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7. 여담
- 박사 학위 소지자였던 킹 목사와는 달리 말콤 엑스는 학력은 좋지 못했으나, 지식은 풍부했다. 교도소에서 이슬람교를 접하면서 학문에 눈을 떴고 그 후 시간만 나면 차내에서건 집에서건 수불석권했다. 여가엔 항상 도서관에 들렀고 할렘가에서 노닥거리는 청년들에게 "내가 너희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을 텐데"라는 말로써 나무란 적도 있다. #
- 청년 말콤 엑스는 교육을 잘 받지 못해 어휘력이 좋지 않았는데 말콤 엑스는 이것을 해결하고자 사전을 통째로 외웠다. 두꺼운 백과사전 한 권을 모두 필사했다. 나중에 그는 어휘력이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미국 역사 전체에서도 꼽아주는 명언제조기, 연설가, 달변가가 되었다.
- 말콤 엑스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그가 한참 자신 및 가족들과 관련된 협박을 받던 1964년에 찍힌 사진이다. 오른손에 M1 카빈 소총을 든 채 자택에서 창문 밖을 경계하는 장면으로, 현장에 같이 있던 라이프 잡지 사진기자가 촬영하였다. 평생에 걸쳐 미국 사회에 대항하고 투쟁했던 그의 삶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는 결국 사진이 촬영된 다음해인 1965년에 살해되었다. 워낙 유명한 사진이라 오마주도 많은데 부기 다운 프로덕션의 By All Means Necessary 앨범 아트가 이 사진을 오마주했다.[21]
- 많은 미국 미디어 창작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온건파였던 루터 킹과의 방법론적 대립 구도가 상당히 인상깊었기 때문에 여러 크고 작은 캐릭터들의 대립 구도에서 모티브가 되어주기도 한다. 마블 코믹스 엑스맨의 뮤턴트 우월주의자이자 反인류를 외치는 매그니토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매그니토의 친구이자 경쟁자인 프로페서 엑스는 마틴 루터 킹을 모티브로 삼았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 팬서의 에릭 킬몽거는 말콤 엑스를 오마주했다.
- 기업 코멕스의 기업명이 말콤엑스 에서 따온것으로 알려진다.
- 프로레슬러 몬텔 본테비어스 포터의 왼쪽 가슴에 말콤 엑스 얼굴 문신이 있다. 이거 때문에 몬텔은 상체를 전부 가리는 경기복을 주로 입어 왔다.
- 마우콩 시우바의 아버지가 이 사람을 기리면서 아들에게 Malcolm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네브래스카주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 가족들의 이후 삶이 비극적이기로 유명하다. 부인인 베티 샤바즈는 1997년 뉴욕 자택에서 방화로 발생한 화재의 후유증으로 숨졌는데 불을 지른 범인은 당시 12세였던 손자 말콤 샤바즈였다. 이 일로 그는 소년원에서 5년을 보냈다. 그리고 28세였던 2013년 멕시코의 한 술집에서 계산서를 놓고 다투다가 사망했다. 막내딸 말리카 샤바즈의 경우 겨우 56세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식중독으로 추정된다.
8. 어록
"I don't see any American dream, I see an American nightmare."
"나는 그 어떤 아메리칸 드림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메리칸 악몽만을 보았습니다."
킹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와 대비되는 "나는 오늘도 악몽을 꿉니다" 발언
"나는 그 어떤 아메리칸 드림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메리칸 악몽만을 보았습니다."
킹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와 대비되는 "나는 오늘도 악몽을 꿉니다" 발언
"Nobody can give you freedom. Nobody can give you equality or justice or anything. If you're a man, you take it."
"여러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평등과 정의, 그 외 어떤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이라면, 스스로 쟁취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평등과 정의, 그 외 어떤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이라면, 스스로 쟁취해야만 합니다."
"By any means necessary!"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인들이 단결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의를 실현하며 '자기방어'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다. 영화 말콤 엑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인들이 단결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의를 실현하며 '자기방어'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다. 영화 말콤 엑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흑인들을 전혀 폭력적으로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2,300만의 흑인들이 압제자에 맞서 분연히 궐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미친 생각이다. 지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백인은 본 적이 없었다. 백인은 단지 마틴 루터 킹을 이용해서 백인 사회가 아닌, 흑인 사회에 비폭력을 조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지 말라.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라."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2쪽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2쪽
"자신에게 굴욕을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주된 목표인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일 수가 없다. 흑인에게 스스로를 방어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지도자는 종족의 반역자이고, 흑인의 적인 백인의 도구가 틀림없다."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3~184쪽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갑인공방(갑인미디어)/ 183~184쪽
"예수가 지금 여기 미국에 있었더라면 백인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백인은 압제자입니다. 그는 탄압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하찮은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무시받고 경멸 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이른바 미국의 흑인으로 왔을 것입니다!"
"나는 누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 비인간적인 대접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범죄라고 믿고 있다. 만일 기독교 철학이 그렇게 해석되고 간디의 철학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바라면, 나는 그것들을 범죄의 철학이라고 부르겠다."
"백인은 악마다! 그렇다. 그 악마는 우리의 적이다!"
The Ballot or the Bullet!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22]'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Liberty or death!)"에 빗대 확실한 흑인 투표권[23]을 주장한 연설이다. 여기서 총알은 무장봉기를 의미한다. 이 연설이 있었던 1964년 다음해, 그가 죽은 이후 미국 법원은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주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크게 주목하던 단체가 아직까지는 본격 IRA 중심의 무장투쟁에 들어가진 않았고, 비폭력 노선이 주류였던 북아일랜드의 카톨릭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말콤 X의 투표권 or 총알 발언은 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훗날 IRA 중심 무장투쟁에 들어갔을 때도 IRA 지도부는 바로 따온 "Ballot box and armalite"라는 무장투쟁과 선거 참여라는 폭력-정치 양면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22]'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Liberty or death!)"에 빗대 확실한 흑인 투표권[23]을 주장한 연설이다. 여기서 총알은 무장봉기를 의미한다. 이 연설이 있었던 1964년 다음해, 그가 죽은 이후 미국 법원은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주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크게 주목하던 단체가 아직까지는 본격 IRA 중심의 무장투쟁에 들어가진 않았고, 비폭력 노선이 주류였던 북아일랜드의 카톨릭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말콤 X의 투표권 or 총알 발언은 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훗날 IRA 중심 무장투쟁에 들어갔을 때도 IRA 지도부는 바로 따온 "Ballot box and armalite"라는 무장투쟁과 선거 참여라는 폭력-정치 양면전술을 사용하게 되었다.
"Black is Beautiful."
"검은 것이 아름답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 하고 생각한다. ...(중략)나는 아마도 '이슬람'의 일원에게,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아니면 그들에게 고용된 무지한 흑인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하루의 목숨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의 언론에서 나를 '증오'의 상징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죽은 나를 이용할 것이다. 두고 보라. 나는 잘해야 '무책임한' 흑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책임감 있다'고 치는 '흑인지도자' 치고 흑인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자는 없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더 세차게 공격할 때마다 내가 미국의 흑인을 위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신념을 더욱 더 확고히 느낀다. 만일 내가 미국이라는 몸에서 '인종차별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도려내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죽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하고,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 말.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 말.
(흑인 민권 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
(흑인에 도움된 백인이 정말 없냐는 질문에) "굳이 말하면 두 사람이 있는데, 히틀러와 스탈린이다."
이들이 벌인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에 의해 울며 겨자먹기로 백인들이 방위산업, 특히 사무직과 전문직에 흑인을 고용했다는 냉소이다. 할렘가의 식당주인, 하숙집 주인조차 백인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벌인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에 의해 울며 겨자먹기로 백인들이 방위산업, 특히 사무직과 전문직에 흑인을 고용했다는 냉소이다. 할렘가의 식당주인, 하숙집 주인조차 백인이던 시절이었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선조가 못된 뱀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에게 뱀에게 물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예 시절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아마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백인들은 우리를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오늘날 엉클 톰[24]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지 않았다. 이 현대적인 20세기 엉클 톰은 이제 실크햇[25]을 쓰고 있다. 그는 옷도 잘 입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세련된 교양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때때로 예일이나 하버드 악센트로 말을 한다. 교수님, 박사님, 판사님, 목사님이거나 무슨무슨 주교님에 박사님을 더할 수도 있다.[26] 그들은 흑인 몸뚱이에 백인 머리를 달아 놓은 친구들이다."
마틴 루터 킹 같은 중산층 흑인들 중심의 민권운동을 비판한 말이다.
마틴 루터 킹 같은 중산층 흑인들 중심의 민권운동을 비판한 말이다.
"우리는 당신보다 더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와 '격리'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든 가는 곳마다 온통 '민권운동의 진전'이란 말을 떠들고 있다. 백인은 흑인들이 '할렐루야!'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400년 동안이나 백인은 우리의 등에 1피트 짜리 칼을 꽂아두었다가 이제 그 칼을 6인치 정도 빼내어 흔들어대고 있다.[27] 우리더러 감지덕지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칼을 다 뽑아 낸다고 해도 상처가 남을 것인데!"
“I can’t turn around without hearing about some ‘civil rights advance’! White people seem to think the black ought to be shouting ‘hallelujah’! Four hundred years the white man has had his foot-long knife in the black man’s back – and now the white man starts to wiggle the knife out, maybe six inches! The black man’s supposed to be grateful? Why, if the white man jerked the knife out, it’s still going to leave a scar!”
“I can’t turn around without hearing about some ‘civil rights advance’! White people seem to think the black ought to be shouting ‘hallelujah’! Four hundred years the white man has had his foot-long knife in the black man’s back – and now the white man starts to wiggle the knife out, maybe six inches! The black man’s supposed to be grateful? Why, if the white man jerked the knife out, it’s still going to leave a scar!”
"더 많은 도시에서 더 많고 더 악화된 폭동이 폭발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이유는 그 폭동의 원인인 인종주의의 악성 질환이 너무나 오랫동안 도외시되어 왔다는 데 있다."
"여러분은, 자유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적들에게 알림으로써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태도를 취하면 저들은 여러분에게 ‘미친 흑인’이라는 딱지를 붙일 것입니다. 아니 ‘미친 깜둥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 아니 극단주의자나 전복세력, 선동분자, 빨갱이, 급진파라고 부를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발언으로 감동적이라고 평가받는다.
마지막 순간의 발언으로 감동적이라고 평가받는다.
"나는 과거 '양심적인 백인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흑인 조직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은 현실 도피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곳은 흑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동료 백인 사회 속이다. 나는 양심적인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 함께 일하자; 각자가 자신의 인종 속에서..." # 출처들
"시간은 오늘날 피압박자의 편에 있다. 시간은 압박자를 반대한다. 진실은 오늘날 피압박자 쪽에 있다. 진실은 압박하는 자를 반대한다. 그 밖에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식물이 무성해지려는 데에는 정글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토양은 기름지고 기후도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정한 계절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권력은 결코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큰 권력으로 향할 뿐이다."
"태평하라, 예의바르라, 법을 준수하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 그러나, 누군가 너에게 손을 대거든 그를 무덤으로 보내라."
"우리는 인종 차별 시대의 흑인이다. 우리는 정치 기구와 사회제도가 인종 차별주의에 뿌리박고 있고, 또 경제 기구가 인종 차별주의에 의해서 길러진 사회에 살고 있는 흑인 대중이다."
[1] 아랍어: الحاج مالك الشباز(al-ḥajj Mālik ash-Shabāzz). '엘하지'는 성지순례한 무슬림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2] 외할아버지는 백인이다. 즉 외할아버지가 흑인 가정부를 강간해서 태어난 아이가 엑스의 어머니이다. 엑스가 백인과 비슷한 붉은 머리색을 가진 게 이런 이유이다. 엑스는 평생 이 백인 외조부를 증오했고, 그를 강간마이자 "붉은 머리의 악마"라고 불렀다.[3] 4-F 등급은 미국 징병제에서 군복무가 적합하지 않은 상태일 때 나오는 등급으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전과자일 때 나오는 등급이다.[4]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이 단체를 발전시키긴 했지만 창시자는 아니고 창시자인 월리스 파드 무하마드(Wallace Fard Muhammad)가 1934년에 실종된 이후 이어 받았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공식 초상화에서도 밝은 피부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알라의 현신으로 믿어진다. 미스테리한 인물인 파드는 자신이 메카에서 태어났으며 흑백혼혈이라고 추종자들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까지의 연구는 몇 가지 불일치한 기록이 있지만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인도-유럽계 혼혈 이주민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몇번의 전과기록의 발견으로 보아 부적응적인 생활을 하며 흑인 계층에 감정이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파드는 Moorish Science Temple과 같이 이미 이슬람의 레토릭을 차용하고 있던 흑인민족주의 종교단체에 가입해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만나게 되고 '백인은 악마'라는 흑인우월주의에 기반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교 교리를 전해주게 되었고, 뉴질랜드 피지섬에 아흐마디야 이슬람 선교가 이루어진 1934년에 미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워리스 딘 모하메드를 포함해 일부가 후일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들어와 교단을 주류 수니 이슬람으로 전향시키는 데 영향을 끼친, 인도에서 태어나 뉴질랜드 피지섬에서 활동한 아흐마디야 이슬람 선교사 출신의 무함마드 압둘라를 정체를 숨기고 다시 나타난 파드로 믿기도 하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5] 샤바즈(아랍어 표기로 شباز / Shabāzz)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아랍어로 '사람'을 의미하는 شعب(sha‘b)와 '힘' 또는 '영광'을 의미하는 عز(‘azz)가 합쳐진 조어라고 하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교리에서는 흑인의 조상인 잃어버린 종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때문에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신도나 말콤 엑스처럼 신도였던 인물, 그외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이 이름을 성으로 택하는 경우가 있다.[6] 이런 주장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도 하던 주장이었고, 실제로 라이베리아 건국 과정에서도 이런 논리가 뒤따랐다. 물론 "분리"된 흑인들이 본토 아프리카에서 '노예 출신 자유흑인 > 본토출신 흑인'이란 깽판을 벌였다는 것은 흑역사.[7]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과격한 노선 때문에 일반 대중이 당시에 사실 급진적이었던 킹 목사의 노선을 온건하게 받아들이게 된 면이 있다.[8] 당시 미국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지도자가 누구냐는 설문에 대다수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택했고, 말콤 엑스는 8%에 그쳤다. 그러나 훗날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느낀 흑인들은 전투적인 지도자들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쪽으로 여론은 반전되며, 이때부터 말콤 엑스가 주목받기 시작한다.[9]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도 몇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흑인들의 사회 진출 허용도 대부분 그의 임기동안 이루어졌다. 말콤 X 눈에는 그냥 백인 대통령 A로 보였을지 모르나, 객관적으로 보면 거한 자책골이었던 셈이다.[10] 케네디 대통령은 아일랜드계로 아일랜드계의 이민사도 흑인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만 하인인 계약제 하인의 형태로 비슷하게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WASP에게 '하얀 흑인' 취급받으면서 천대받고 살았다. 이런 경솔한 발언은 서로 연합할 여지가 있는 집단과 대립하는 꼴이 된 것이다.[11]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자신의 여비서를 겁탈해 임신시킨 전력이 있는데, 이 사실이 말콤 엑스의 전기 영화에서 묘사된다. 말콤 엑스 본인이 직접 찾아갔던 무하마드의 전직 여비서는 그의 아이를 혼자서 키우던 중이었고, 이를 본 말콤 엑스는 무하마드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12] 말콤 엑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교도소에서 막 출소해 바깥 사회의 모습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었다고.[13] 무슬림이라고 인종차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이쪽도 사실 옛날에는 사하라 횡단 아프리카 노예 무역 등 흑인을 상대로 한 인종 차별의 역사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하지 같은 평생의 한번급 성지순례에선 자연스럽게 인종을 초월한 같은 무슬림이라는 통일감이 더 증폭되기 마련이다. 종교에 상관없이 과거나 현대나 성지순례 갔다온 여행기, 회고 문학 등을 관통하는 주제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그 많은,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느낀 영적 일치감이기도 하고. 게다가 백인 무슬림이라 하면 보통 현대 알바니아인, 보슈냐크인 같은 남동부 유럽인들이 많으며, 특히 이 당시에 그러한 지역에서는 공산당 정권 치하에서 신앙의 탄압을 받기도 했던 만큼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은 시련은 이들에게도 익숙한 주제이기도 하다.[14] 메카에서는 심지어 최악의 앙숙인 수니파와 시아파도 원칙적으로 다툼을 벌여서는 안 된다. 심지어 1990년대 후반 한겨레 정문태 기자가 탈레반 지도자를 만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메카에도 테러를 저지를 수 있나?"라는 질문을 했더니만 세상에 별 미친 질문을 다 한다는 식으로 벌레 보듯 경멸하는 눈으로 "거기 갈 때는 무기도 가지고 가면 안 된다"며 더 말도 하기 싫다고 피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훨씬 막나가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경우 대놓고 메카를 노리겠다는 발언을 한 적 있다.[15] 당장 백인이 재미삼아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을 죽여도 죄가 안되었고 무슨 사건이 터지면 경찰들은 현장 조사보단 근처에 사는 흑인과 아시아인종을 잡아서 조사를 빙자한 고문을 하고 법원에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이 전원 백인인 재판에서 무조건 유죄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고 유색인종은 사무직, 과학자, 장교, 경찰 같은 직종은 허용이 안되었다. 무엇보다 성공한 흑인이나 아시아 계통은 미국 정부가 직접 꼬투리를 잡아서 몰락시키는 등 공권력 자체가 인종차별을 공공히 하였다.[16] 첨언하자면 발음상 프랑스식 '뒤 부아'가 아니라 무조건 영어식 '두 보이스'로 발음된다. 본인이 살아 생전부터 사람들이 헷갈려 했으며 일부로 "난 미국에서 자란 영어 모어화자니깐 두 보이스가 맞습니다"라 쓰인 친필 성명서까지 남겼을 만큼 미국 현지에서도 헷갈려 한다.[17] 1993년 오스카는 여인의 향기 프랭크 중령 역 알 파치노의 손을 들어주었다.[18] 스파이크 리의 대표작인 똑바로 살아라에서 주정뱅이 노인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다.[19] 당시 흑인 사회에서는 흑인 감독이 맡는 게 좋겠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20] 부인의 경우 말콤 X가 변화했음을 킹에게 말하긴 했다. 그러나 그 둘이 사이가 안좋았던걸 보면, 킹이 화를 낸건 당연한 걸지도[21] 아래에 적혀있듯 제목부터 말콤 X의 명언이다.[22] 투표권을 뜻하는 Ballot {|bælət}과 총알을 뜻하는 Bullet {|bʊlɪt}의 발음이 비슷함을 이용한 명연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Ballot_or_the_Bullet 위키피디아에 단독 항목이 있을 정도.[23] 남부 몇 개 주에선 주어지지 않았고, # 연설 전문 말마따나 북부에선 그저 백인들의 대결이었을 뿐이다.[24]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유래한다.[25] 엉클 샘의 상징.[26] 다만 흑인 판사는 1930년대에 나온 상황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항목 참조.[27] 1피트 = 12인치이므로, 박힌 칼을 반쯤 뽑고 마는 것처럼 생색만 낸다는 비유이다.[28] 말콤 엑스가 살아서 활동했던 1960년대에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사회 전반이 완전히 마비되어 경제가 파탄 상태였다. 그런 상황의 중국을 보고서 장차 중국의 부흥을 미리 예견했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식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