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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ffff,#ffffff> 지미 헨드릭스 Jimi Hendri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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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제임스 마셜 헨드릭스 James Marshall Hendrix[1] | ||
출생 | 1942년 11월 27일 | ||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 |||
사망 | 1970년 9월 18일 (향년 27세) | ||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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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 ||
소속 | King Kasuals (1962 - 1964) Jimmy James And The Blue Flames (1966) The Jimi Hendrix Experience (1967 - 1969) Band Of Gypsys (1970)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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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가필드 고등학교 (퇴학) | ||
신체 | 180cm[2], 70kg | ||
종교 | 무종교[3] | ||
병역 | 육군 제101공수사단 의병 제대 | ||
장르 |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애시드 록, 하드 록 | ||
사용 악기 | 보컬, 일렉트릭 기타 | ||
활동 기간 | 1962년 - 1970년 | ||
레이블 | 수, PPX, RSVP, 트랙, 바클레이, 폴리도르, 리프라이즈, 캐피톨 | ||
링크 |
1. 개요
Shake my left hand, man, it's closer to my heart.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 |
2. 상세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기타리스트에는 차이가 있지만, 가장 높은 음악적 성취를 거둔 기타리스트가 지미 헨드릭스임에는 전문가 대부분 이견이 없다.1960년대 후반에 주로 활동하였으며,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록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기타리스트, 메인 보컬리스트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기타리스트이지만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영국에서 했던 활동이 시작이었고, 초창기에는 활동도 영국에서 더 많이 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난 곳도 영국 런던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3.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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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평가와 영향력
지미 헨드릭스는 틀림없이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입니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의 범위과 어휘를 그 어떤 음악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확장했습니다. 그의 무한한 추진력과 뛰어난 기교, 그리고 이펙트의 창의적인 활용은 로큰롤의 소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
일렉트릭 기타는 1950년대 당시 어쿠스틱 기타의 부족한 소리를 메꾸기 위해 발명된 악기였고, 따라서 오랫동안 '마이크 단 어쿠스틱 기타'나 '소리 큰 어쿠스틱 기타'라는 취급이 강했다. 대중적으로 처음 성공한 일렉트릭 기타를 만든 회사 Fender 역시 록 보다는 깔끔한 소리가 요구되는 컨트리 기타리스트를 위해서 작업했다. 일렉트릭 기타 특유의 소리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했고, 악기가 발명된지 10년이 넘어가도 이미 존재하던 어쿠스틱 기타의 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 록의 선두주자라고 불리던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를 들으면 기타의 대중적인 소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지미 헨드릭스였다. 현대 록 밴드에서 요구되는 '더티/크런치' 사운드는 그가 사용하였던 마샬 앰프의 진공관이 과열되며 나오는 왜곡된 사운드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에 막 개발되었던 퍼즈(Fuzz), 와우 페달(Wah Pedal), 유니바이브(Uni-Vibe) 등의 기타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개성적인 일렉트릭 기타만의 톤(음색)을 만들어냈다. 이후 톤 메이킹[7] 실력도 모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연주 중 피드백 사운드나 격렬한 아밍으로 음정을 벗어난 음, 기타를 앰프 스피커에 부딪히거나 마이크 스탠드에 비벼서 생기는 소리조차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정확한 음이 아닌 노이즈도 강렬한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레코딩에서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8]
이렇듯 헨드릭스의 음악은 이전에 들어볼 수 없던 기상천외한 사운드로 흔히 기억되지만 사용하는 코드들, 블루스 특유의 송 폼, 펜타토닉 스케일과 블루스 스케일에 바탕을 둔 솔로 즉흥 연주 등 음악 이론적으로는 철저히 블루스를 지향했다. 따라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분류되며, 만들었던 음악의 형식 등으로 스스로를 블루스 음악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록에 걸맞은 빠르고 스타일리시한 주법은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헨드릭스의 스타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9] 이처럼 선배 음악가들의 결과물을 자양분 삼아 끝없는 상상력을 실천하면서 블루스를 더욱 더 공격적이고 거칠게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시도와 결과물은 블루스를 넘어 록 음악, 특히 본인은 하지 않은 후대의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같은 여러 장르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헨드릭스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드 록과 헤비메탈의 정체성 중 하나인 '귀를 거칠게 찌르는 고주파의 굉음과 현란한 연주로 청중들을 압도하는 사운드를 뿜어내는 기타리스트의 음악'이라는 정의는 훨씬 늦게 자리잡고, 지금과는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왼손잡이였던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연주했는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타와 한 몸이 된 듯 신기에 가깝게 연주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헨드릭스는 1960년대에 새로운 기타 연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기타를 넘어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 위대한 아티스트들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시대 일반인들이 일렉트릭 기타하면 떠올리는 '좡좡좡' 거리는 거친 찢어질듯한 소리를 이펙터 사용을 통해 거의 최초로 도입하고 이를 전기 소음이 아닌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온 다음, 이런 소음을 가지고 어떤 음악을 만들지까지 비전을 만들어놓은 인물. 이러한 사운드는 헨드릭스를 통해 음악으로 새로 탄생했고 그의 시도에 영감을 얻은 동시대 기타리스트와 후배들이 발전시켜 나가면서, 일렉트릭 기타로만 할 수 있는 장르까지 새롭게 생겨나면서 이제는 상술한 어쿠스틱 기타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자적인 악기로 독립할 수 있었다.[10] 그의 진취적인 음악으로 인하여 비단 일렉트릭 기타 뿐만이 아닌,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27년이라는 그의 짧은 일생 중 마지막 4년 동안[11]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27세의 나이에 요절한 헨드릭스는 심지어 15세에 정식으로 기타를 시작하였으며,[12] Are You Experienced를 제작한 것은 그가 기타를 배운 지 9년이 된 해였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이 대부분 10세 전후에 기타를 처음 접하는 것을 감안하면 헨드릭스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13]
Jimi Hendrix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Live) |
위의 동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첫 번째 곡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자신만의 하드 록 스타일로 커버했다. 심지어 발매된지 3일 만에 저러한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원곡자 폴 매카트니도 이를 듣고선 헨드릭스의 뛰어난 재해석 및 독창적인 소화 능력을 칭찬하였다.[15][16] 또한, 밥 딜런의 곡인 All Along the Watchtower는 오히려 원곡보다도 헨드릭스의 커버 버전이 더 유명하다.[17]
여러 매체에서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순위를 정하는 자리를 가질 때 2위부터는 순위 변동이 다소 잦지만[18] 1위는 언제나 지미 헨드릭스이다. 무엇보다 흑인이 아직 많은 차별을 받던 시대[19]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인해서 영국이 음악 시장을 주로 점령하고 있던 시대에 현재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영국계 백인 밴드인 롤링 스톤즈, 비틀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타덤에 오른 흑인 미국 아티스트였다.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기존의 흑인 블루스 연주자나 팬들한테는 상당히 멸시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유는 '흑인 음악인 블루스를 가져다가 백인 음악이었던 록 음악에 결합해 백인에 아첨하는 음악만 만들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1960년대의 블루스 리바이벌 당시 고전 블루스를 한창 재해석하던 에릭 클랩튼, 피터 그린 등의 영국의 기타리스트들을 정통 블루스 음악가들은 '테크닉은 있지만 블루스의 느낌을 재현하지 못하는 외국인의 모방'으로 평가받았고, 이는 당시 백인 블루스 아티스트들에게는 일종의 컴플렉스로 작용했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이 당시의 브리티시 블루스를 고전 흑인 블루스에 영향을 받아 나타난 별개의 장르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흑인들의 선천적 감성과 필을 모르는 백인들이 헨드릭스의 시도를 자신들의 눈으로 해석해 블루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블루스와 록의 결합이었고, 이를 갈고 닦은 것이 지금의 록 음악, 나아가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헤비메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 블루스계의 노력은 미국의 정통 블루스의 입장에서는 흑인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영국인들의 변화구, 사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헨드릭스는 미국 출신의 흑인 기타리스트였음에도 정통의 블루스 어법 뿐 아니라 자신만의 창의적인 어법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블루스 록 음악을 완성했다. 이는 에릭 클랩튼을 위시로 한 영국 블루스 록 음악계에서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지만, 미국의 정통 블루스 음악인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는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팬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업적 덕분에 블루스와는 전혀 관계 없는 뿌리에서 태어난 영국 바깥의 클래식계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 같은 후대 음악가에게 있어서도, 헨드릭스가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를 든 이상 안토니오 비발디, 니콜로 파가니니 같은 거장의 사이에 자리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헨드릭스는 이러한 평판을 어느 정도 신경쓰고 있었다고 하며,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해체 이후 흑인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 오브 집시스를 결성하며 보다 펑크와 소울 음악 등 흑인 음악에 경도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헨드릭스가 사망하면서 밴드 오브 집시스의 이후 행보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위와 같은 비판적인 시각은 점차 줄어들었는데, 일단 헨드릭스 이전의 정통 블루스 뮤지션들은 이미 노환으로 사망했거나 음악계를 은퇴한 것도 있고, 헨드릭스가 후대에 남긴 영향력이 워낙 거대하기에 위와 같은 비판 의견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에 가깝다. 실제로 헨드릭스가 일부에서 이러한 멸시를 받을 무렵에도 이미 비비 킹, 마일스 데이비스, 조지 클린턴과 같은 선배격인 흑인 음악의 거장들은 창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헨드릭스의 혁신성을 알아보고 그에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였고, 이후 재즈, 소울 음악, 펑크 등 흑인 음악계도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아들여 큰 발전을 이룩했다. 아티스트의 영향력 하나만으로 보기 드문 선순환을 이뤄낸 셈. 그래서 현재는 미국/흑인 음악계에서도 전설로 평가받는다.[20]
여기에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후대의 마이클 잭슨 같은 인물들처럼 뮤지션으로써 흑백의 통합을 이뤄낸 인물이다. 백인으로써 흑인 음악을 메인스트림에 받아들일 수 있게한 엘비스와는 반대로 흑인으로써 한계를 넘어선 음악을 해, 백인들의 음악을 진보시킨 인물이다. 그러니 음악의 한계를 넘고 문화 통합을 이끌어낸 사람을 단순한 뮤지션이라고 보면 안된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라는 기계로 하나의 컬처를 새로 만들어낸 문화의 선도자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헨드릭스를 통해 하드 록, 헤비메탈의 정체성이 확립된 이후로 정작 헨드릭스의 뒤를 이을 흑인 하드 록, 헤비메탈 뮤지션이 거의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헨드릭스 이후에 나왔던 전설적인 흑인 음악 뮤지션들은 대다수가 펑크나 디스코, 더 길게 보자면 R&B나 힙합 쪽의 음악을 했다. 그로 인해 하드 록, 메탈씬은 다소는 백인 위주의 문화로 다시 분리되었고 아직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기타 실력이 너무나 부각되어 살짝 가려진 감이 있지만, 프론트맨으로서의 역량 또한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으며, 프레디 머큐리, 믹 재거, 짐 모리슨 등과 함께 록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으로 평가받는다. 공연때마다 수준급의 퍼포먼스를 유감없이 보여줬으며, 그 유명한 몬터레이 콘서트나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에서 그의 퍼포먼스와 무대 매너를 잘 확인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빌보드 선정 25대 위대한 록 프론트맨에서 3위에 오른적 있다.#[21]
그에 대한 평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기타리스트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도 제일 위대한 거목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어가는 현재까지도 일렉트릭 기타의 주요한 주법들 중 대부분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항상 1위로 선정될 만도 하다. 굳이 기타에 국한되지 않고 음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줬는데, 그의 주 장르인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재즈 뮤지션[22]들도 그의 독특한 화성 방식이나 주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후대 등장한 하드 록,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는 헨드릭스를 통해 지금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사실상 후대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는 장르를 불문하고 무조건 그의 발자취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헨드릭스가 현역이던 시절 에릭 클랩튼[23], 제프 벡,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 퀸의 브라이언 메이[24] 등 지금에서는 올타임 레전드라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조차 헨드릭스의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혁신적인 사운드와 그것을 활용하는 경이로운 연주력, 이것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본 후에 '기타를 접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선구자들이 늘 그렇듯 기타의 선구자인 헨드릭스의 스킬과 곡 해석력, 감성을 따라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갖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영국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록 음악이 발전을 할 수 있었다.
5. 사용 장비
5.1. 일렉트릭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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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헨드릭스는 펜더가 CBS에 인수된 이후인 1968년에 나온 라지헤드 사양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매우 선호했는데[25], 헨드릭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라이브 중 하나였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도 올림픽 화이트 색상의 라지헤드 스트라토캐스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26] 헨드릭스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 사진 왼쪽에서 연주 중인, 블랙 뷰티(Black Beauty)라는 이름을 붙여준 검은색 스트라토캐스터를 가장 아꼈다고 한다. 심지어 사망 바로 전날에 찍은 마지막 사진에서도 해당 기타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래 스트라토캐스터는 컨트리 뮤직이나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로큰롤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일렉트릭 기타 모델이었으나[27], 헨드릭스 같은 거장이 이 악기를 통해 그 전까지는 들을 수 없던 온갖 혁신적인 사운드를 들려준 이후, 에릭 클랩튼, 데이비드 길모어, 리치 블랙모어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헨드릭스의 뒤를 이어 스트라토캐스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스트라토캐스터에 지금과 같은 록 음악의 이미지가 붙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당연히 펜더도 지미 헨드릭스라는 거장이 사용했다던 이 네임벨류를 놓칠 수가 없었는지, 헨드릭스 사후 반백년이나 흐른 현재까지도 다양한 관련 모델들을 생산중이다. 이미 헨드릭스가 활발하게 활동중이던 1970년에 헨드릭스 본인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바디와 넥 거의 전체를 로즈우드로 만든 특수한 스트라토캐스터를 제작하였다가 헨드릭스가 이걸 받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적이 있었으며관련 기사,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1997년부터는 정식으로 지미 헨드릭스의 아티스트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 모델을 생산하고 있다. 펜더에서 생산하는 지미 헨드릭스 시그니처 모델들은 그가 생전 오른손잡이용으로 생산된 스트라토캐스터를 뒤집어서 연주했을 때의 모양처럼 헤드스톡 또한 일반적인 스트라토캐스터의 반대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브릿지 픽업도 원본 스트라토캐스터와는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티스트 시그니처 모델 외에는 펜더 멕시코에서 생산된, 헨드릭스가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불태웠던 그 기타를 복각한 모델도 있는데, 이 모델은 존 메이어가 본인의 라이브에서 사용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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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깁슨 커스텀 샵에서 헨드릭스가 사용했던 1967년식 깁슨 SG 커스텀을 시그니처 모델로 복각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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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많고 많은 기타들 중 플라잉 V를 채택한 것은 바디가 거의 완전한 대칭형이기 때문에 오른손잡이용 기타임에도 왼손으로 연주했을 때 거의 동일한 연주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5.2. 기타 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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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가 주로 사용했던 앰프는 마샬의 1959 슈퍼 리드 "플렉시" (1959 Super Lead "Plexi") 였는데, 헨드릭스는 이 앰프에 거대한 12x4 사이즈 마샬 캐비넷을 함께 매칭시킨 콤보 세 대를 무대에 놓고 사용했다. 거기에 더해 이 앰프들을 진공관이 터질 수준으로 볼륨을 올려 사용하였으며, 이 세 대의 앰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왜곡된 사운드는 이후 헨드릭스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록 기타리스트들이 애용하는 시그니처 격 음색이 된다.
5.3. 이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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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의 이펙터 세팅 (A) VOX V846 (B) 로저 메이어 옥타비아 (C) 댈러스 아비터 퍼즈 페이스 (D) 신-에이 유니바이브 |
- VOX V846 (와우 페달)
와우 페달은 필터 계통 이펙터로, 세게 밟아 작동시킨 뒤 페달을 앞뒤로 까딱까딱거리면 강조되는 음역대가 이동하며 "와우와우"하는 소리를 낸다. 복스에서 이 와우 페달을 처음 발매했을 때만 해도 (개발사인 복스 본인들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 이펙터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였으나, 헨드릭스가 본인의 라이브와 레코딩에서 이 와우 페달을 사용한 연주를 선보인 뒤로 에릭 클랩튼을 포함한 다양한 기타리스트들이 뒤이어 와우 페달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와우페달은 지금처럼 대중적인 일렉트릭 기타 이펙터의 한 종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헨드릭스의 대표곡인 Voodoo Child (Slight Return)의 인트로에서도 와우 페달의 사운드를 들어볼 수 있다.
- 댈러스 아비터 퍼즈 페이스 (퍼즈)
스피커 캐비넷이 고장나거나 진공관이 심각하게 과열된 기타 앰프 특유의 왜곡된 사운드를 재현하기 위해 설계된 퍼즈 페달로, 초창기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톤은 마샬 앰프의 과열된 사운드와 이 퍼즈 페이스 이펙터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다만 퍼즈 페이스는 태생부터가 일종의 보급형 퍼즈 이펙터였던 데다[28], 내부 회로에 사용된 게르마늄 트랜지스터가 온도를 포함한 주변 환경에 대단히 큰 영향을 받는다는 특징 때문에 개체별 뽑기도 매우 심했으며[29], 연주하는 공간의 상황에 따라 소리가 바뀌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기에 헨드릭스는 이후 본인의 전담 테크니션이었던 로저 메이어라는 인물에게 의뢰하여 아래의 옥타비아 이펙터를 제작하여 사용하게 된다.
- 로저 메이어 옥타비아 (퍼즈)
지미 헨드릭스의 라이브 및 레코딩에서 전담 테크니션을 맡았던 로저 메이어(Roger Mayer)라는 인물이 설계한 퍼즈 페달로, 헨드릭스는 이 인물이 제작한 로저 메이어 옥타비아와 위의 퍼즈 페이스를 함께 들고 다니며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헨드릭스는Purple Haze의 기타 솔로를 녹음할 때 옥타비아 페달을 사용했다. 헨드릭스 사후 그가 밴드 오브 집시스 앨범 녹음에 사용했던 옥타비아 퍼즈 페달은 경매에서 무려 70,400달러(한화 약 9,600만 원)에 낙찰되어 한때 가장 비싼 기타 이펙터라는 타이틀을 가지기도 했다.[30]
- 신-에이 유니바이브 (바이브)
레슬리 스피커 특유의 웅웅대며 떨리는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설계된 페달로, 처음에는 목적대로 하몬드 오르간 연주자들을 위해 설계되었으나, 헨드릭스가 이 페달을 사이키델릭하고 몽환적인 기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하면서 기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데이비드 길모어, 로빈 트라워 같은 기타리스트들이 헨드릭스의 뒤를 이어 유니바이브 이펙터를 사용한 기타 연주를 들려주게 된다. 헨드릭스가 밴드 오브 집시스 활동 당시 만든 곡인 Machine Gun에서 유니바이브 특유의 사이키델릭하게 진동하는 기타 톤을 들어볼 수 있다.
6. 디스코그래피
Are You Experienced (1967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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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is: Bold as Love (1967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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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ric Ladyland (1968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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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nd of Gypsys (1970)
헨드릭스는 생전에 정규 음반 3장과 라이브 음반 1장을 남겼다. 그러나 사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미공개 녹음, 라이브 음원, 컴필레이션들이 쏟아져나온 바 있으며, 심지어 2000년대 들어서도 매년 몇 장씩은 계속 발매되고 있다.
2010년 3월,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지미 헨드릭스의 새로운 앨범 'Valleys of Neptune'이 공개되었다. 2009년 8월, 계약 기간 만료로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서 소니 뮤직으로 판권이 이적되어 발매되었다.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명의로 낸 앨범들도 모조리 딜럭스 에디션으로 발매. 대한민국에서도 살 수 있다.
2013년 3월 5일, 마찬가지로 미공개 녹음 12곡을 담은 'People, Hell And Angels'가 전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2018년 3월 9일, 'Both Sides Of The Sky' 앨범이 발매되었다.
7. 창작물
- 일본 만화 나루토에 등장하는 구름 마을의 초대 라이카게가 지미 헨드릭스처럼 생겼다. 작가가 딱히 언급한 적은 없지만 구름 마을에는 헐크 호건을 닮은 닌자가 있는 등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그린 듯한 캐릭터가 있다[31].
- 일본의 록 밴드 MAN WITH A MISSION은 지미 헨드릭스의 실험체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 영국 밴드 배드 컴퍼니의 대표 곡인 'Shooting Star'는 술과 약물에 찌들어가 죽어간 젊은 가수의 일생을 다룬 내용인데, 헨드릭스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라고 밝혔다. 정확히는 헨드릭스 말고도 재니스 조플린과 짐 모리슨 등 약물로 요절한 가수들에게서 영감을 따왔다고 한다.
- 일본 만화 봇치 더 록!의 등장인물 고토 히토리의 반려견 지미헨은 아버지인 고토 나오키가 이 가수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다. 애초에 내용 대부분이 주로 기타리스트들에게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한 것들이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의 등장인물인 J는 지미 헨드릭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나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로 등장하며 그 유명한 미국 국가 연주장면도 미국 독립을 바라는 저항곡이 된다.
-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8기 폭풍을 부르는 정글의 메인 악역인 파라다이스 킹의 모티브로 보인다.
- 강경수의 첩보 액션 책 코드네임 시리즈의 바이올렛의 기타가 지미 헨드릭스 한정판이다.
- 카에서는 레디에이터 스프링스 주민인 상사[32]가 매일 아침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재생하며 경례를 하는데, 필모어는[33] 반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지미 헨드릭스 버전의 같은 곡을 재생한다. 상사는 그 쓰레기 좀 끄라고 뭐라 하고, 필모어는 이거 클래식이야, 헨드릭스 거라고 티격태격하는 개그를 보여준다.
- 나무집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8. 여담
- 트레이드마크는 아프로 헤어스타일이다. 이 헤어스타일은 당시 흑인 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독한 약품을 써가며 곱슬머리를 억지로 펴서 백인식 헤어스타일을 따라하던 것이 아닌 흑인 고유의 곱슬머리도 멋지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헤어스타일은 곧 수많은 미국의 젊은 흑인들에게 퍼졌으며,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흑인 셀레브리티도 아프로 헤어를 함으로서 흑인 민권 운동에 힘을 보태주었다.
- 당시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그랬듯 그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 등 선배급 로큰롤 아티스트와 블루스의 세 거장인 3킹(앨버트 킹, 비비 킹, 프레디 킹)에게도 영향을 심하게 많이 받은 인물이나, 그의 연주 주법이나 와우 페달, 옥타비아, 퍼즈 박스 등의 이펙터의 적절한 사용과 놀라운 퍼포먼스는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록이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꼭 빠지지 않는 록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다.
- 기타 연주 실력관 별개로 보컬에는 핸디캡이 있었는지, 자신을 '백만 달러짜리 기타 실력과 5달러짜리 보컬 실력을 가진 뮤지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34] 보통 지미 헨드릭스의 노래 대부분은 지미 헨드릭스가 보컬을 맡았는데, 그의 말과는 달리 보컬도 나쁘지는 않은 축이었다.[35]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보컬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자타공인으로 보컬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뜬 밥 딜런이 있어서 묻힌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노래는 안하려고 했으나,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저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못 할 게 뭔가'라고 생각해서 보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 헨드릭스는 록 음악과 R&B의 보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했다고 평가되는 리틀 리처드의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으며, 보컬을 겸한 선배격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이 보컬적인 역량으로써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컬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나, 딜런의 노래를 듣고 보컬에 있어서 기교보다 표현력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보컬을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 시대를 앞서간 기타 연주 실력과 이펙터 사용, 그리고 록 역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 덕분에 지금도 기타리스트 중에 존경하지 않으면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며, 기타 매거진에서 다른 록 기타리스트를 인터뷰할 때, 다소 식상한 질문인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가 누군가요?'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하나다.
- 현대 기타리스트에 있어서 록의 첫 번째 혁명은 그가 일으켰다고 해도 좋을 만큼 록 음악의 대부, 혹은 시초라 불린다. 록 음악 이외에 흑인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에도 재즈계의 거물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헨드릭스를 위시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같은 후배 록 뮤지션의 음악을 듣고 삘받아서 재즈 펑크를 창시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Bitches Brew에서 재즈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에게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로 연주해줘"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 SF 장르를 좋아했다.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UFO를 목격한 뒤로는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는 여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처럼 좌파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출생해야 비로소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논지로 낙태에 대해서 옹호했다.[36]White-collar conservatives flashing down the streetPointing their plastic finger at me.They're hoping soon my kind will drop and die,But I'm gonna wave my freak flag high화이트칼라 보수주의자들이 길가에서 번쩍거리고 있어그들은 플라스틱 손가락을 나에게 겨누지그들은 우리 종족이 모두 꺼지고 죽어버리기를 원해하지만 난 내 미친 깃발을 높이 날릴거야
또한 'If 6 Was 9'에는 화이트칼라 보수주의자들과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가사가 실려있기도 하다. - 아직도 살아있는 대부분의 전설적인 기타 연주자들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기타를 시작한 이유의 대부분이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은 실로 무서울 정도다.
- 그의 영향력이 대단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실제로 5년도 안 되는 활동 기간에 이 모든 걸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정규 앨범은 고작 세 장에 라이브 앨범 한 장뿐이지만 하나하나가 다 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대우받는 걸작이며, 기타리스트라면 꼭 한 번쯤은 들어봐야 할 불후의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타 연주를 1970년대도 아니고 무려 1960년대 말에 해냈다. 참고로 이 시기 대한민국은 아직 유신 정권도 되기 전이다.
- 대표곡은 'Purple Haze', 'All Along the Watchtower'[37], 'Foxy Lady', 'Little Wing', 'If 6 Was 9', 'Crosstown Traffic', 'Hey Joe', 'Third Stone from the Sun', 'Voodoo Child (Slight Return)', 'Wild Thing' 등이다.
- 헨드릭스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1967년에 개최된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무대에 서면서부터였다. 당시 무대에서 엄청난 고출력 사운드와[38] 핵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발적인 연주와 기타를 불태우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39] 여담으로 재니스 조플린도 이 페스티벌에서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또한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의 미국 국가 연주는 전설로 회자된다. 유명 잡지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국가 공연에서 일개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초반에는 정상적으로 연주한 듯한 미국 국가 멜로디가 나오는 듯 싶더니 기타 음을 최대한 왜곡시켜서 전투기 소리 같은 전장의 소음을 연출하여 당시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진 미국 정부를 풍자했다.[40] 이건 60년대 미국 히피 문화를 넘어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반체제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 사실 그의 퍼포먼스는 혁신적이긴 하나, 기타를 박살내고 태우는 정도의 광기 어린 짓을 많이 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뭔 미친놈이 저 좋은 기타에 휘발유를 뿌려서 태우나' 할 정도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몇몇 록 매니아들은 이것도 그의 연주기법 중 하나로 분류한다. 확실히 기타가 탈 때 특유의 소리가 나긴 하지만 이 행동은 약물과도 관련이 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무대에 오르는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당시 매니저들은 흑인인 헨드릭스를 차별대우를 하거나, 출연료를 받으면 술과 마약을 사서 헨드릭스에게 주고 나머지 돈은 꿀꺽하는 막장 행보를 보였다고. 참고로 기타를 박살내는 건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가 원조다.[41] 하지만 다른 퍼포먼스를 보면 기타를 단순히 연주하는 게 아닌, 쇼맨십에서도 매우 훌륭한 프론트맨였다는 걸 알 수 있다.[42]
- 사생활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술과 약물 중독에 중독되어 가정을 파탄 낸 부모처럼 지미 헨드릭스도 술과 약물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특히 술과 약물에 취하면 난폭하게 변해 이로 인해 폭력을 일삼아 경찰에 수도 없이 체포 당했다. 친구 폴 루카소를 때려서 체포당하고 연인 카르멘 보레로를 눈 위를 꿰매야 할 정도로 심하게 때려 체포 당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소속사들과의 갈등이 매우 컸으며 벌어들인 돈을 그가 저지르는 폭력 사건의 보석금과 위자료로 많이 써야 했다.
- 참고로 치아 연주도 바로 지미 헨드릭스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중 하나로, 1967년 스톡홀름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43] 록 음악 기타리스트의 상징적인 퍼포먼스. 참고로 함부로 따라하지 않는 게 좋다. 이거 기분이 굉장히 더럽고 무엇보다 잘 안 된다. 게다가 라이브에서 하면 튜닝도 다시 해야 하니 그냥 쇼맨십으로 하는 것이다.[44] 사실 치아로 줄 퉁기는 게 아니라 손가락만으로 풀링 오프를 하는 것이다.
- 롤링 스톤즈에서 초창기 핵심 멤버였던 브라이언 존스를 천재 뮤지션이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같은 롤링 스톤즈의 멤버인 믹 재거를 굉장히 싫어했다.
-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에 재즈 록 밴드 시카고의 멤버 중 기타리스트 테리 카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로스앤젤레스 위스키 고고(Whisky go go)에서 헨드릭스가 시카고(당시엔 시카고 교통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함)의 연주를 감상하고 난 후 시카고의 색소폰 연주자 월터 페러자이더와 대면하여 그에게 테리 카스를 "당신 밴드의 기타주자가 나보다 나은것 같다."라고 말해주었다.
- 지미 헨드릭스가 모 토크쇼에 나와서 "세상에서 가장 잘 치는 기타리스트가 된 기분이 어때요?" 라는 질문을 받자 "그건 로리 갤러거한테 가서 물어봐"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루머이고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TV쇼에서 그런 질문을 받긴 했으나, 헨드릭스는 이에 대해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선 가장 잘 치는 기타리스트겠죠."라며 겸손한 답변을 내놨다.
- 유달리 앨범 아트에 곡절이 많았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앨범은 영국판 커버가 마음에 안 들어 미국판은 새로 커버를 만들었고, 두 번째 앨범도 앨범 커버를 마음에 안 들어했고[45], 세 번째 앨범은 폴 매카트니와 결혼하게 되는 린다 매카트니[46]가 센트럴 파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상에 애들 앉혀놓고 찍은 사진을 원했다가 빠꾸 먹었고, 영국판으로 나온 벌거벗은 여자들 커버는 싫어했다.[47] 어째 영국판 앨범 커버하고는 악연인 듯.
-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 쓰던 기타 중 하나는 생전에 녹음실 음향기사에게 줬다. 이게 여러 사람을 거쳐 2015년 한 경매 관련 프로그램에서 해당 기타와 판매자를 방영하여 감정 결과 완벽한 진품이 인정되었다. 해당 방송에서 판매자는 75만 달러 정도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경매로 가서 160만 달러에 팔렸다.
- 에피소드도 많고, 워낙 미친듯한 퍼포먼스로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사생활에선 오히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정도 많은 성격이었다. 비비 킹이나 버디 가이 같이 만나서 협주도 해본 뮤지션들은 한결같이 약간 쑥쓰러워 하지만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가정생활 면에서도 좀 불행한 의미로 전형적인 불안정한 흑인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유명인이 돼서도 가족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재혼한 새엄마쪽 의붓, 이복형제 자매들도 따뜻하게 챙겨줬다. #
-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흑인이면서 백인에게 아첨하는 배신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따라서 흑인을 위한 음악을 방송하던 라디오에선 그의 음악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헨드릭스가 선배 기타리스트 하울링 울프(흑인)와 함께 공연했을 때, 울프는 헨드릭스를 "백인과 짜고 돈벌이를 하고있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헨드릭스는 울프의 발언에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고한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살아있었을 때부터 헨드릭스을 높이 평가했던 흑인 아티스트도 존재한다.
- 지미 헨드릭스가 영국에 오기 전, 당시 유명한 세션맨이었던 지미 페이지에게 프로토타입격의 로저 메이어 퍼즈박스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 한 번은 영국의 명문대인 임페리얼 대학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재학 중이던 스마일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만난 적이 있다. 브라이언이 해당 공연의 스텝 중의 한 명으로 참여했다. 훗날 브라이언은 지미 헨드릭스를 매우 쿨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현란한 기타 솜씨를 보고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8.1. 왼손잡이
왼손잡이로 유명하다. 오른손잡이였다는 설도 있지만 여러 출처[48]를 참조한다면, 그는 원래 왼손잡이였지만 이후 오른손잡이로 교육받았고, 이로 인해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게 된 사례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원래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잡이 기준 운지법으로, 기타 연습을 하던 중 오른손으로는 도저히 피킹이 안 돼서 왼손 기타리스트로 돌아온 사례가 많다.
이는 그의 기타 톤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기타를 보면 스트라토캐스터의 브릿지 픽업이 살짝 기울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높은 현(1번 줄)의 높은 소리를 픽업하고, 낮은 현(6번 줄)의 낮은 소리를 픽업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지미 헨드릭스는 오른손잡이 기타를 거꾸로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운드 쉐이핑이 반대로 된다.
또한 스트라토캐스터의 헤드를 보면 6개의 헤드머신이 일렬로 되어있다. 즉 제일 저음인 6번줄이 브릿지-헤드머신의 거리가 제일 짧고 최고음인 1번줄이 제일 길다. 하지만 헤드가 뒤집힘으로서 반대로 저음줄이 더 길어지고 고음줄이 더 짧아져서 저음이 좀 더 타이트해지고 높은 음을 연주할 때 텐션이 낮아 테크니컬한 연주가 용이해진다.
지미 헨드릭스와 대조되는 기타리스트가 바로 딕 데일. 그도 왼손잡이였지만 처음에는 오른손잡이 기타를 뒤집어 들고 연주했다.[49]
8.2. 대한민국에서의 인지도
그가 주로 활동하였던 영미권을 포함한 전세계가 공인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음과는 대조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어느 정도 있다 하더라도 그 음악이나 스타일의 소비하는 정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밴드 음악을 좀 알면 모를까. 그가 활동했던 당시 유행했던 사이키델릭 록 자체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하고 마이너한 장르라는 점도 있고, 그의 생전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사망하였던 1970년 당시의 대한민국은 대중음악 검열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터라 국민들은 이러한 장르의 음악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다. 결정적으로 대한민국은 미8군을 통해 건너온 스탠다드 팝 시절 이후로는 미국처럼 로큰롤, 브리티시 인베이전, 사이키델릭 록 같은 요소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당시 유행하던 관련 요소들이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슬금슬금 소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단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와 관련된 음악 요소들이 아예 통째로 들어내진 채 들어온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이걸 가장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영미권에선 한창 1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일어나며 영국 출신의 블루스 록, 하드 록 밴드들과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 등 사이키델릭 록 밴드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을 1960년대 무렵,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제일 인기 있던 해외 뮤지션은 클리프 리처드, 폴 앵카, 앤디 윌리엄스, 톰 존스 등이었을 정도로 당시 대한민국의 음악 씬은 바깥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조차도 정작 최전성기였던 1950년대 후반 ~ 60년대 초반엔 한국에서는 큰 인기가 없었고, 최전성기가 지난 후인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중반의 라스베가스 시절[50]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에서도 인지도를 얻었다. 그나마도 당시 한국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이 후기 엘비스의 이미지를 흉내낸 덕에 덩달아 인지도가 높아졌을 정도.
물론 대한민국에서 영미권 록 음악이 불모지 시기였던 1960년대에도 미8군을 통해 들여온 음반을 불법복제한 소위 빽판이 암암리에 소량 유통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발품 팔며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구해 들었던 극소수 매니아급 음악팬들(오늘날 표현으로 치면 첨단 유행을 달리는 힙스터들)의 이야기기일 뿐이고, 행여 음반이 있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 상 음반을 틀 전축을 갖춘 집도 드물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만약 그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 음악이 제대로 들어왔더라도 한국에서는 크게 인기를 얻었을 가능성은 적다. 특히 음악 감상에 있어서 대체로 기악 파트보다 보컬의 영향력을 더 크게 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거기다 헨드릭스 특유의 느낌 가는대로 연주해버리는 자유분방한 연주 스타일은 다소 보수적이었던 당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음악 취향을 충족시키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51]
그럼에도 여러 곳에서 레퍼런스되고 언급이 되어온 것이 있는 덕인지 지미 헨드릭스라는 이름 자체를 어딘가에서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문제는 록 음악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경우, 극단적으로는 얼굴에 무서운 분장을 하고 뾰족뾰족한 일렉 기타를 휘두르며, 악마를 숭배하는 음악을 하는 등 여러 매체들을 통해 심각하리만치 과장된 록 음악의 이미지를 씌워다가 생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실제 지미 헨드릭스와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며, 이런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가 실제로 어떤 음악을 했었는지를 들려주면 의외라며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는 사람, 혹은 사이키델릭 록이나 블루스 록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미 헨드릭스라는 이름과 그의 스타일은 매우 익숙할 것이다. 전술한 대로 기타 이펙터들의 활용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활용법을 만들어낸 사람이니. 그래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존경하는 캐릭터가 나오고, 앨범도 라이센스 발매되는 등, 위대함 대비 인지도가 낮은 것이지, 기타 다루는 사람들마저 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존 본햄과 더불어 지식채널 e에 등장하기도 했다. #
라디오 스타에서 김구라가 김태원을 한국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헨드릭스 사인이 '마약 중독'이라고 언급하며 김태원에게 한 방 먹였다.[52]
9. 둘러보기
지미 헨드릭스의 주요 저널·여론조사 선정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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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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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이름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JIMI HENDRIX EXPERIENCE |
헌액 부문 | 공연자 (Performers) | |
멤버 | 지미 헨드릭스, 노엘 레딩, 미치 미첼 | |
입성 연도 | 1992년 | |
후보자격 연도 | 1992년 | |
후보선정 연도 | 1992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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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2004년 헌액 |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1960년대: 비틀즈 1970년대: 밥 말리 1980년대: 마돈나 1990년대: U2 | |
2004년 헌액 | |
50년대: 클리프 리처드 & 섀도우즈 60년대: 롤링 스톤스 70년대: 퀸 80년대: 마이클 잭슨 90년대: 로비 윌리엄스 | |
2005년 헌액 | |
핑크 플로이드 유리드믹스 아레사 프랭클린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조이 디비전 / 뉴 오더 더 후 킹크스 블랙 사바스 오지 오스본 | |
2006년 헌액 | |
제임스 브라운 레드 제플린 로드 스튜어트 브라이언 윌슨 본 조비 프린스 더스티 스프링필드 조지 마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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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음악 심볼.jpg 음악 | ||
입성날짜 | 1991년 11월 14일 | ||
위치 | 6627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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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명은 조니 앨런 헨드릭스(Johnny Allen Hendrix).[2] #[3] 자신의 종교는 음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4] 당시 프립은 이전에 결성한 밴드인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Giles, Giles and Fripp)'이 실패하면서 무명 상태였고, 이후 결성한 킹 크림슨은 아직 데뷔 앨범을 발매하기도 전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프립[5] 이는 헨드릭스의 선배이자 거장인 척 베리, 비비 킹 같은 기타리스트보다 더 높은 위치로, 일렉트릭 기타 뿐만 아니라 '기타'라는 악기가 생긴 뒤에 등장한, 블루스 록부터 헤비메탈까지 모든 장르의 기타리스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6] 가장 영향력이 큰 음악 잡지인 '롤링 스톤'에서는 1위이나, 가장 저명한 기타 전문 잡지인 '기타월드'에서 독자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선정한 순위에서는 1위가 에디 밴 헤일런이고 헨드릭스는 4위에 위치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 투표를 한 독자들에게 '지미 헨드릭스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다'라고 말해도 딱히 반박은 없을 정도로 헨드릭스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7] 연주자만의 개성적인 톤을 만드는 것.[8] 그렇게 만들어진 사이키델릭 풍의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는 록 음악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9] 참고로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배울 때 기초적인 백킹(오픈 코드/하이 코드/파워 코드의 운지법과 스트로크, 아르페지오 등 리듬 표현법 등)을 떼고 본격적인 멜로디 연주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펜타토닉 스케일이고, 그 스케일 활용의 예시로 헨드릭스와 다른 고전 록 기타리스트들의 프레이즈들을 다룬다. 헨드릭스가 록의 문법 내에서 집대성한 펜타토닉 스케일(+ 블루스 스케일) 프레이즈들은 일렉트릭 기타의 교과서로 자리 잡은지 오래이다.[10] 헨드릭스 이전의 일렉트릭 기타 소리는 지금의 재즈 기타, 초창기의 일렉트릭 블루스, 엘비스 프레슬리나 척 베리 등의 초기 로큰롤 사운드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11]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결성 시기인 1966년부터 사망할 시기인 1970년까지이다.[12] 한국 나이로 중학교 3학년 때 기타를 처음 배운 것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아주 늦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유명 기타리스트는 훨씬 이른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잭 화이트의 경우 헨드릭스와 비슷한 나이에 기타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하여 테크닉을 내세우는 연주보다는 간단하고 중독성 있는 리프를 개발하는 데 능하다. 그런데 헨드릭스의 연주는 간단한 리프보다는 새로운 기법과 화려한 연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만일 10년만 더 살아있었어도 그의 작품 세계에 걸맞는 음반들이 더 많이 탄생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13] 대다수 기타리스트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구력을 가지고 나서 서서히 메인스트림에 올라오며, 20년은 쳐야지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수준까지 가는 것을 감안하면 9년만에 일렉트릭 기타라는 악기의 거의 모든 기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헨드릭스는 단순히 기타라는 악기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하나이다.[14] 사실 훌륭한 커버란 그런 것이다. 만일 그냥 똑같이 복사해내는 것에 머문다면, 데뷔 전 아마추어 밴드의 연주 연습은 될 수 있어도 기성 아티스트로서는 타 뮤지션의 흉내내기에 불과하니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15] 참고로 매카트니는 헨드릭스가 데뷔 전 영국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눈여겨 본 뒤 헨드릭스의 데뷔 및 미국 공연 진출 등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16] 헨드릭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커버 공연에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 헨드릭스가 이 곡을 연주할 때 본인 연주의 특성상 과격할 정도로 트레몰로 암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연주를 선보였다. 문제는 워낙 과격하게 한 탓에 기타의 튜닝이 완전히 나가버렸고, 무엇보다도 해당 곡이 그 공연의 첫 번째 곡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공연장에 있던 관객들은 "이제 뭘 어떻게 할 작정이지?"라는 생각으로 헨드릭스를 보았고, 헨드릭스는 관객석에 있던에릭 클랩튼을 불러 "나 이거 줄 좀 맞춰주라."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참조[17] 이로 인해서 밥 딜런은 후일 공연에서 그 곡의 지미 헨드릭스 버전을 부르기도 했다.[18] 당장 제일 존경받는 기타리스트들 중에선 앞 세대 중에선 비비 킹, 척 베리 등이 있고, 동 세대 중에서만 따져도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 키스 리처즈, 피트 타운젠드 등이 있다. 물론 이들 역시 헨드릭스를 제외하고 보자면 올타임 레전드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이다.[19] 물론 40년대 후반에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성공과 60~70년대에 무하마드 알리가 복싱계를 호령한 덕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많이 호전되었지만, 당시에도 많은 차별을 받던 건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인종차별은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Thriller 앨범 발매 이후부터 제대로 나아졌다.[20] 비슷한 시기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와 함께 소울이나 힙합 쪽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모스 뎁은 그의 곡 'Rock & Roll'에서 헨드릭스를 언급했고 커먼은 Jimi Was A Rock Star라는 헌정곡을 발표하기도 했다.[21] 여담으로 1위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며 2위는 프레디 머큐리이다. 위 둘이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공연을 많이 선사했던 전설적인 프론트맨임을 감안하면 헨드릭스 역시 위대한 프론트맨임을 알 수 있다.[22] 예를 들자면 그 마일즈 데이비스. 심지어 마일즈 데이비스는 1926년생으로 헨드릭스보다도 나이가 무려 16세나 많은 데다가 헨드릭스가 유년기였던 1959년, 이미 Kind of Blue라는 역대급 모달 재즈 명반을 발매한, 이미 전설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었다.[23] 헨드릭스와 생전에 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사람은 블루스 록의 선구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에 헨드릭스를 제외하고 항상 들어가는 수준의 전설이다.[24] 대학교 시절, 스마일 소속 당시. 이 때에는 퀸이 아직 결성되기 전이다. 이들의 헨드릭스에 대한 평가는 브라이언 메이의 회고가 대표적인데, 다음과 같다. '분명 저건 기타고, 저건 앰프가 분명해. 그런데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는 거지?'[25] 초창기인 1950년대 초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생산된 펜더의 악기들은 그 품질과 사운드 덕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1964년에 미국의 방송 기업인 CBS에 인수된 이후에는 그 품질이 급격하게 떨어져 별로 평가가 좋지 못했다.[26] 저 때 사용되었던 올림픽 화이트 색상의 스트라토캐스터는 일명 이자벨라(Izabella)라고 불렸다.[27] 실제로 헨드릭스 이전에 스트라토캐스터를 사용했던 아티스트들은 버디 홀리처럼 지금의 과격한 록 음악의 이미지와는 영 딴 판이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28] 1962년에 판매된 최초의 퍼즈 이펙터인 마에스트로 퍼즈-톤(Maestro Fuzz-Tone) 이펙터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제로 당시 퍼즈 페이스의 판매가는 마에스트로 퍼즈-톤의 불과 1/6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했다.[29] 이 탓에 헨드릭스는 이 퍼즈 페이스 이펙터를 여러 개 사서 소리가 좋은 개체를 선별하는 작업을 한 적까지 있었다.[30] 이후 2022년에 열린 경매에서 커트 코베인이 사용했던 DS-1 페달이 무려 75,000달러(한화 약 1억 원)라는 가격에 낙찰되며 이 기록은 경신되었다.[31] 여담으로 헐크 호건은 지미 헨드릭스의 곡 ‘Voodoo Child’를 테마곡으로 썼던 일이 있다.[32]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애국심을 중시하는 구세대를 상징하는 캐릭터다.[33] 히피, 반전주의를 상징하는 캐릭터다.[34] <Electric Ladyland>를 녹음할 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뒤돌아 서서 녹음을 했다는 후문이 있다.[35] 물론 기타리스트 중 노래를 가장 잘 부르기로 정평난 에릭 클랩튼. 데이비드 길모어, 존 메이어보다는 덜하다. 앞의 셋은 보컬도 상당히 두드러지는 축에 든다.[36] 위의 종교관 링크에서는 지미 헨드릭스가 '낙태에 반대했다'라는 논지로 헨드릭스가 다소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다고 쓰여져있는데, 이는 사실 관계에서 상당히 어긋난다.[37] 원곡은 밥 딜런.[38] 무대에서 앰프의 게인을 한계가 넘어설 정도까지 사용하곤 했다. 연주를 마치고 나면 무대에 셋팅된 음향장비가 모두 맛이 가버리곤 해서 페스티벌 등에선 대부분 마지막 순서였다.[39] 다만 연주 후에 기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는 언론 노출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 유명 뮤지션들의 이런 기행이나 퍼포먼스 중에는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매니저의 지시인 경우도 많다. 출연료 대신 마약을 사다주면서 기행을 부추긴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 이야기도 있다.[40] 덧붙여 이것은 지식채널e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FPS 게임 스펙 옵스: 더 라인의 오프닝 BGM으로도 쓰이는데, 같이 나오는 화면의 성조기는 뒤집혀진 채 너덜너덜해져있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기존 콜 오브 듀티나 배틀필드류의 FPS 게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게임이다. 현대판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려보라. 정의인 줄 알았던 것이 광기의 모습을 드러내가는 게임에 걸맞은 BGM.[41] 피트 타운젠드가 공연 중에 기타를 높이 들었는데 천장에 닿아 부숴지자, 일부러 그랬다는 듯이 모두 때려 부숴버린 것이 시초다.[42] 당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에는 고정 1위로 선정되어 있을 뿐더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에서도 5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현재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겸 보컬로 평가받는 록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가장 존경한 퍼포머 중 한 명이 지미 헨드릭스였다. 같은 팀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의 증언에 따르면, 헨드릭스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본 적도 있다고 한다.[43] 이때 연주했던 곡은 'Purple Haze'.[44] 한국에서는 N.EX.T 1기 멤버인 기타리스트 정기송이 라이브에서 간간이 보여주었다. 해당 영상에 단 1초 동안만 등장한다. 또 같은 N.EX.T의 3기 멤버인 기타리스트 김세황도 공연중에 자주 선보였었다.[45] 좀 더 아메리칸 원주민 풍으로 원했다.[46] 둘은 굉장히 친한사이였다. 당시엔 사진작가였고 록 뮤지션들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린다가 폴 매카트니와 친해진 것도 사진 촬영이 계기가 됐다.[47] 다른 버전인 지미 헨드릭스 본인 얼굴 사진에 대한 코멘트는 알려진 게 없다.[48] 링크 1, 링크 2, 링크 3[49] 때문에 줄 순서를 변경하지 않고 가장 얇은 줄이 위로 올라오게 하여 연주했다.[50] 살이 찌고 구레나룻을 많이 기르고 트레이드마크 같은 큰 칼라를 바짝 세운 점프슈트를 입고 나왔던 바로 그 시절[51] 위 생애 문단에서도 읽을 수 있듯, 사실 헨드릭스가 영국에서 금방 인정받은 것도 마침 그 시기가 영국에서 로큰롤 부흥이 한창이던 때라 미국의 블루스 등 루츠한 사운드에 관심있던 영국 뮤지션들이 헨드릭스의 재능을 빨리 간파했기 때문에 매우 빨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헨드릭스는 저 전술한 보수적인 청자들이 주류였던 모국 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채, 영국에서 우선 유명세를 얻은 뒤에야 뒤늦게 미국에서도 뜰 수 있었다.[52] 실제 사인은 마약 중독이 아닌 수면제 과다복용 후 수면중 토사물로 인한 질식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