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e1d3f, #3e1d3f 40%, #3e1d3f 60%, #3e1d3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border-radius:5px;" {{{-2 {{{#!folding [ 1 ~ 4기 멤버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ff,#fff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tablewidth=100%> | ||||
1968 | 1968 | 1969 | 1970 | 1971 | |
1972 | 1973 | 1974 | 1974 | 1975 | |
1984 | 1987 | 1990 | 1993 | 1996 | |
1998 | 2003 | 2005 | 2013 | 2017 | |
| TBD | ||||
2020 | 2021 | 2024 |
리치 블랙모어의 수상 이력 | |||||||||||||||||||||||||||||||||||||||||||||||||||||||||||||||||||||||||||||||||||||||||||||||||||||||||||||||||||||||||||||||||||||||||||||||||||||||||||||||||||||||||||||||||||||
|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 | |||
| |||
<colbgcolor=#4C4C4C><colcolor=#fff> 본명 | 리처드 휴 블랙모어 Richard Hugh Blackmore | ||
출생 | 1945년 4월 14일 ([age(1945-04-14)]세) | ||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웨스턴슈퍼메어 | |||
국적 |
| ||
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 ||
소속 | 딥 퍼플, 레인보우, 블랙모어스 나이트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C4C4C><colcolor=#fff> 부모님 | 부 루이스 블랙모어 모 바이올렛 블랙모어 | |
배우자 | 마그릿 볼크머 (1964 – 1969) 에이미 로스먼 (1981 – 1983) 캔디스 나이트 (2008 – ) | ||
자녀 | 위르겐 블랙모어, 로리 블랙모어, 어텀 블랙모어 | ||
신체 | 179cm, 76kg | ||
종교 | 무종교 (유신론)[1] | ||
활동 기간 | 1960년 – 현재 | ||
사용 악기 |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만돌린, 만돌라, 드렐라이어 | ||
장르 | 하드 록, 블루스 록, 메탈,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 바로크 음악, 포크 음악 | ||
레이블 | Polydor, BMG, Edel, SPV, Ariola, Frontiers | ||
링크 | |
1. 개요
| |
<rowcolor=#fff> 전성기 시절(1970년대)의 모습 | 2018년의 모습 |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리프를 가진 곡, Smoke on the Water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데뷔 이전
|
10대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2] |
그의 집은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다, 당시 영국의 폭력적인 교육 현장에 의해 그는 언제나 선생들에게 매를 맞을 정도로 시달렸으며, 동시에 공부에 매진하면 할수록 본인이 경멸하는 교사들처럼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4] 이는 그가 더욱 기타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그는 15살에 학업을 그만두기로 한다. 리치 인터뷰에서 당시의 본인이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듀언 에디, 더 쉐도우즈같은 로큰롤 아티스트들에게 크게 빠져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또한 1961년에 사우스 홀 뮤직 센터(South Hall Community Center)에서 개최된 네로 앤 더 글레디에이터즈라는 인스트루멘탈 록 그룹이 그리그의 산왕의 궁전에서를 연주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게 본인이 클래식 음악에 기반한 기타 연주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곧 학교를 그만둔 뒤,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견습 라디오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 첫 번째 일렉트릭 기타[5]를 구입하기도 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빅 짐 설리반(Big Jim Sullivan)에게 기타를 배웠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그는 이후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던 프로듀서 조 믹(Joe Meek)의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당시 영국 대중음악계의 다양한 아티스트들[6]의 곡을 녹음하거나 그들의 라이브에 참가하였다. 같은 시기 레드 제플린에서 활동하게 되는 지미 페이지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둘 다 본인들만의 밴드를 하기 전에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7]
2.2. 딥 퍼플 시절
| |
<rowcolor=#fff> 1기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 (좌측 첫 번째) | 2기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 (좌측 첫 번째) |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딥 퍼플#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딥 퍼플#|]][[딥 퍼플#|]]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딥 퍼플은 영국의 팝 드러머 크리스 커티스가 영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실력 좋은 연주자들을 모집하여 지금으로 치면 슈퍼 밴드를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탄생하였는데, 리치는 이 때 키보디스트 존 로드와 함께 가장 먼저 라인업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1968년 딥 퍼플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리치는 이 당시부터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리치는 특유의 날카롭고 꽤 잘생긴 외모를 가졌던데다, 기타 실력 또한 동시대 다른 밴드들 대비 엄청난 편이었기에, 결성 당시부터 수많은 팬을 거느리며 한순간에 슈퍼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전성기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딥 퍼플과 투어활동을 돌던 시기 어느 날 리치가 감기에 걸려 공연을 하루 쉬고 대타를 내보냈는데, 관중들이 리치가 보고싶다고 난리를 피워서 아예 공연 자체가 중단되기도 할 정도였다.
다만 딥 퍼플 활동 당시 다른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인간성 부분에서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멤버들마다 일일이 공연 시 그들이 위치해있을 자리를 정해주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다른 멤버들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루머도 있고, 자신의 성격을 늘상 다 받아주는 존 로드에게 버럭 버럭 화를 내거나[8] 작사가이자 보컬인 이안 길런이 라이브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면 리치 블랙모어가 "가사를 왜 틀리냐"며 큰소리로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9][10] 결국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저런 놈이랑 더 이상 같이 못 해먹겠다"며 딥 퍼플을 나오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Ritchie Blackmore's Story를 보면 음악적 견해 차이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리치나 이안 길런이나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리드하길 원했고, 서로 타협을 잘 못봤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안 길런이 리치에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불러주겠다고 하면, 리치가 방향성을 내놓고, 그러면 이안은 "그건 블루스 스타일이잖아, 난 그런거 부르기 싫어!" 이런 식이었다.
다만 이렇게 자신의 밴드 멤버들과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협업이 끝난 후에는 그들에 대한 험담보다는 그들의 음악성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더 많이 했던 것으로 보아, (딥 퍼플을 포함하여) 들어가는 밴드들마다 멤버들과의 갈등을 겪는 것에는 인간성 부분에서의 결함이 있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완벽성을 병적으로 추구하는 성격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리치 블랙모어도 후임으로 들어온 데이비드 커버데일, 글렌 휴즈와 음악적 갈등으로 로니 제임스 디오와 그가 활동하고 있던 엘프라는 밴드의 멤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밴드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를 결성하고 밴드를 나오게 된다. 하지만 휴즈나 커버데일이나 인터뷰에서 리치에게 많은 것을 배웠었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자주하였다.
2.3. 레인보우 시절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레인보우(밴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4. 재결합한 딥 퍼플
|
딥 퍼플 재결합 당시의 리치 블랙모어 (사진 우측 첫 번째) |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의 모금활동을 위해 Rock Aid Armenia에 이언 길런과 같이 참여하여 퀸[12], 러시[13], 블랙 사바스[14], 아이언 메이든[15]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16] 등 영국의 내로라하는 록 밴드의 멤버들과 함께 Smoke on the Water를 합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안 좋은 소문만 알고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곡을 손대는 것을 맘에 안들어할 것 같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본인도 인정하는 프로들[17]이 연주한 자기곡을 들으면서 상당히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에이전시 쪽은 다시 이안 길런을 데려오기로해서 데모 테잎을 보내서 보컬 부분만 녹음해서 듣게 했는데 'Perfect Strangers' 때와 더 악화된 목소리 때문에 이안과 일을 못하겠고, 무대에 서더라도 BGM 마냥 구석에 박혀있을것이라고 했는데, 에이전시쪽은 이안과 같이 일만 해준다면 돈도 계속 주고 구석에서 연주를 하던 상관없다고 했다. 최강의 패조차도 먹히지 않아서 결국 이안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속 일을 하게 된다.
재결합 3번째 앨범인 'The Battle Rage On...' 때 이안과 리치의 갈등이 더더욱 안 좋아졌는데, 스파게티 사건이 그 중 하나다. 직원 중 하나가 식사 때 리치가 먹을 소스 없는 스파게티(치즈와 허브로 이뤄진 것)을 가져왔는데, 리치가 아직 안 온 사이에 이안이 거기다가 케첩으로 도배를 하는 짓을 저지른다. 리치가 이 때문에 빡쳤고 이안은 웃으면서 자기가 했다고 하자 그대로 스파게티를 얼굴에 던젔다고 한다.[18]
아무튼 투어에서 이안 길런과는 더 이상 일을 같이 못하겟다고 느낀 리치는 1993년 11월 17일 헬싱키 공연을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Good Bye"라는 말만 남기고 밴드를 떠나버렸다.[19] 딥 퍼플이 아닌 레인보우 같은 솔로 활동이야 말로 자신의 적성에 맞다고 다시 실감한다. 이 레인보우의 앨범은 원래 솔로 앨범으로 기획 되었지만, 음반사의 강요로 레인보우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두기 화이트를 보컬로 내세운 레인보우의 마지막 앨범인 Stranger In Us All을 낸다.[20]
2.5. 블랙모어스 나이트, 뉴 레인보우
|
리치 블랙모어(좌)와 캔디스 나이트(우) |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블랙모어스 나이트#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블랙모어스 나이트#|]][[블랙모어스 나이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뉴 레인보우|뉴 레인보우]][[레인보우(밴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재결합한 딥 퍼플 마저도 뛰쳐 나온 리치는 당시 여자친구였던[21] 미국인 보컬리스트 캔디스 나이트(Candice Night)와 블랙모어스 나이트(Blackmore's Night)라는 밴드를 결성,[22] 바로크 음악과 포크 음악에 심취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23]
프로듀서였던 펫 리건은 리치가 스튜디오에서 재밍을 하고 있었는데, 기존의 메탈 곡이 아닌 동화에나 나올법한 포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그냥 "별일이네~"하고 넘겼는데 결국엔 리치는 쭉 이 노선으로 가면서 포크송 앨범들을 연이어 내게 된다. 리치 또한 인터뷰에서 블랙모어스 나이트에서 활동하면서 심리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느꼈으며, 관객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자신 역시 하드 록이나 메탈보단 이러한 음악들이 더욱 괜찮다고 생각하여 계속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24]
헤비 메탈 팬덤에선 리치의 이러한 행보에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받았지만, 퀸의 브라이언 메이나 키스의 진 시몬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엄청 헤비한 음악만 하다보면 나중엔 지쳐서 결국 어릴 적 처음 접했던 유들한 음악을 하게 된다고 하는데, 리치는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을 하면서 캔디스가 알던 인맥들과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시절 때와 달리 "과격한 관객"들이 아닌 유순한 관객들을 상대하다보니 이 시절 때 성격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순해졌다고 한다.[25] 캔디스 나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치 블랙모어는 자신의 대표곡인 Smoke on the Water 등 딥 퍼플, 레인보우 시절 곡들을 들으면 그 밴드들에서 활동할 다시의 본인이 가지고 있던 나쁜 기운들이 다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까지 했는데, 이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메탈 음악을 거의 안 한 근본적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리치의 이런 행보에 대해 매우 부럽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자신은 일 때문에 때문에 계속해서 팬들이 원하는 앨범들을 만들어야 했지만, 리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 해왔기 때문이었다. 리치 블랙모어를 보고 기타리스트가 된 조 새트리아니는 늘 해오던 음악과 다른 음악 장르를 하고 싶으면 과감하게 바꿔버리는 리치 같은 성향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가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밴드 활동 시작으로 하드 록/헤비 메탈 팬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종종 후배들과 같이 공연을 하면서 계속 얼굴을 내비치는 퀸 멤버들이나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아에 다른 세계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록/메탈 쪽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졌다. 그나마 가끔 딥 퍼플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 때 대중에 얼굴을 내비치긴 한다는 것이 위안.
|
2017년의 뉴 레인보우 라인업 (좌측에서 두 번째) |
2020년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대면 라이브 등 활동이 완전히 중단되고 마찬가지로 블랙모어스 나이트, 레인보우 활동도 제한되었었기 때문에 별 다른 대외 활동 없이 가족들과 자체격리를 했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활동도 안 한 것은 아니며, 인터넷이나 각종 21세기 미디어물에 전혀 관심이 없던 리치 블랙모어가 아내의 권유로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공연 생중계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옛날엔 TV 매체에 꽤 나오긴 하였지만 이런 인터넷 방송은 처음인지 라이브 시작 당시에는 매우 어색해하였지만 의외로 금세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 연주 스타일 및 평가
<rowcolor=#fff> 딥 퍼플 시기 Smoke on the Water 라이브 (1972년 연주) | 레인보우 시기의 Kill the King 라이브 (1977년 연주) |
<rowcolor=#fff> 딥 퍼플 재결성 시기의 Highway Star 라이브 (1984년 연주) | 뉴 레인보우 시기의 Burn 라이브[27] (2019년 연주) |
지금 기준에서는 워낙에 연주자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어 그의 플레이가 별로 특별하게 와닿지 않을 수 있으나, 록 1세대 기타 테크니션 중에선 실력 면에서 최상위권에 존재하는 기타리스트였으며,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에디 밴 헤일런, 랜디 로즈, 제이크 E 리, 타카사키 아키라, 잉베이 말름스틴[29] 등 수많은 1970, 1980년대 슈퍼 기타리스트들의 탄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니 그야말로 개척자 격인 인물. 거의 동시대에 활약한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 같은 거물 조차도 리치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 1970년대 말, 에디 밴 헤일런의 등장 이전까지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 함께 기타키즈들의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대표적인 완벽주의자로, 리치는 녹음 당시에 녹음의 완벽함을 위해 동료 밴드 멤버들의 관리까지 철저하게 시켰다고 하며,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즉흥성, 유연성보다는 계획성과 반복 훈련이 우선했던 클래식 베이스 음악가들의 정체성이 크게 드러나던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점은 직계 후임자라 볼 수 있는 잉베이 말름스틴에게까지 이어진다. 둘 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한 반복 훈련, 그리고 속주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 까지도 유사하다. 거기다가 동시대에 활동한 라이벌 지미 페이지가 워낙에 막장스러운 사생활에 마약 중독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과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마약은 고사하고 사생활에조차 단 한 번의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크개 비교된다.
위대한 기타리스트임이 틀림 없지만 굳이 단점을 들자면 딥 퍼플 당시에는 톤 다이내믹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프레이즈가 비슷비슷하다. 사전에 작곡한 부분들이나 몇몇 염두에 두고 배치한 멜로디들은 인상적이지만, 거의 모든 솔로 연주에서 손버릇에 가까운 3연음을 지겹게 들을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 빠르다는 칭송을 받은 프레이즈를 들어보면 같은 패턴의 3연음 런 주법이나 한 줄 트레몰로 피킹이 거의 고정적으로 나오는걸 들을 수 있다. [30]
4. 사용 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 |
ES-335 TD를 연주하는 리치 블랙모어 |
|
깁슨 커스텀 샵 1961 ES-335 리이슈[31] |
| |
스트라토캐스터를 연주하는 리치 블랙모어 |
|
펜더 커스텀 샵 1968 스트라토캐스터[32] |
리치는 이후로도 다양한 스트라토캐스터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74년식 올림픽 화이트/로즈우드 지판 스트라토캐스터가 있다. 이 기타는 리치가 처음으로 스캘럽[33]작업을 시도한 개체로, 리치는 인터뷰에서 기타 지판에 이러한 작업을 한 이유에 대해 과거 오랜 연주로 지판이 움푹 패이다시피 한 클래식 기타를 여럿 연주해 보았는데, 이것이 의외로 평평한 지판을 가진 기타들보다도 본인의 손에 매우 잘 맞았고, 일렉기타들에도 이러한 작업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사포를 들고 무려 3일 동안 꾸준하게 갈아내어 개조를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알려진 바로는 지판에 스캘럽 작업을 한 거의 최초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다.[34] 이 스트랫 외에도 1970년대에 생산된 선버스트 색상 스트랫 두 대[35], 무대에서 기타 부수기 퍼포먼스용(...) 및 신제품 테스트용으로 애용되었던 올림픽 화이트 색상 스트라토캐스터 여러 대[36], 검정색 픽가드가 적용된 로즈우드 지판 올림픽 화이트 스트라토캐스터[37]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시키듯 왼손잡이용 스트라토캐스터들도 몇 개를 추가로 구입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4.1.1. 시그니처 모델
|
펜더 멕시코 리치 블랙모어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 |
이후 2009년부터는 펜더 멕시코에서 리치 블랙모어의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가 재생산되기 시작했으며, 2025년 기준으로 계속해서 신품이 생산되는 중이다. 해당 모델의 대부분의 사양은 위의 펜더 재팬제 시그니처와 거의 동일하나, 바디 목재가 좀 더 전통적인 엘더 바디로 바뀌었으며, 픽업이 기존 싱글 코일 픽업 3개 조합에서 미들 포지션에 더미 픽업이 삽입된 넥, 브릿지 2 싱글 코일 픽업 구성으로 바뀌었다. 픽업 또한은 펜더에서 자체 제작된 스톡 픽업이 아닌, 시모어 던컨의 쿼터 파운드 플랫 싱글 코일 픽업[38]이 사용되어 기존 스트랫 픽업 대비 훨씬 강한 출력을 내어주도록 설계되었다. 지판에도 마찬가지로 스캘럽이 적용돼있으나, 마찬가지로 스캘럽 된 지판으로 출고되는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에 적용된 만큼 깊게 파여있지는 않다.
펜더의 하이엔드 커스텀 라인업인 펜더 커스텀 샵에서도 2013년에 펜더 커스텀 샵 트리뷰트 시리즈를 통해 리치 블랙모어가 사용하던 1968년식 메이플 지판 스트라토캐스터 개체를 복각하여 생산한 이력이 있다. Smoke on the Water의 녹음에 사용된 그것과 같은 개체이다. 관련 영상
4.2. 일렉트릭 기타/이펙터
4.3. 기타 앰프
4.4. 그 외 악기
5. 가족 관계
5.1. 부모
아버지는 루이스 J. 블랙모어, 어머니는 바이올렛 블랙모어이다.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고, 그 유명한 "열심히 연습 안 하면 기타로 머리를 후려치겠다."라고 말한다.[39] 그 후 그는 일주일에 2-3번정도 기타 강습을 받으러 자전거를 타고 4마일 밖에 있는 곳에 왕복을 하곤 했다.
그가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다만 부모님은 그가 기타로 돈벌고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부모님을 공연에 처음 모셔왔던 건 딥 퍼플과 관현악단의 합동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이 거대한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주목을 받고있고, 관객들은 5천명 넘게 온 것을 보고 "아들놈이 확실히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있구나~"라고 실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는데 아버지와는 안 좋은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부자지간의 정까지만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부모들이 아이에게 대놓고 '사랑한다'라는 등 애정표현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아들에게 애정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였지만, 아버지는 좀 반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리치를 엄격하게 대한것도 아니었다. 뭐라 혼내려고 하면 큰 잘못이 아닌 이상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그러는거 아니다'라고 쉴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5.2. 현 가족
- 위르겐 블랙모어(아들)
위르겐 블랙모어(좌)와 리치 블랙모어(우)
첫 부인인 독일인 여성 마르기트 폴크마와의 사이에서 19세 라는 이른 나이에 위르겐 블랙모어 라는 아들을 낳았고, 위르겐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레인보우의 보컬 이었던 조 린 터너가 결성하였던 레인보우의 트리뷰트 밴드 오버 더 레인보우[40]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행적만 보면 위르겐은 원래 아버지가 있어야할 자리에 아버지가 참여를 안하거나 못한 자리에 대신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을 넘지 못하는 듯.
위르겐이 어쿠스틱으로 연주한 Smoke On The Water
딥 퍼플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딥 퍼플의 멤버들과 Smoke On The Water을 합주하는 위르겐
오버 더 레인보우 공연에서의 위르겐, 연주하는 곡은 조 린 터너 시기의 레인보우의 대표곡인 Street Of Dreams 이다.
- 캔디스 나이트(아내)
리치 블랙모어의 현 아내이자 리치와 같이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보컬로 활동 중이다. 캔디스는 1971년생으로, 1945년생인 리치와는 나이가 26살이나 나고, 리치의 장남인 위르겐보다 7살 연하다. 남편과의 슬하에 로리 다타냔 블랙모어, 어텀 에스미얼다 블랙모어을 두고 있다.
리치와 캔디스가 처음 만난 건 1989년의 한 축구 경기장이었는데, 리치는 축구를 하고 있었고, 캔디스는 그 시합을 보러 왔었다고 한다. 당시 캔디스는 뉴욕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행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음악, 여행, 역사, 유령(...)[41] 등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금세 친해졌고, 급기야 1991년 부터 동거하다가 결혼까지 한다. 이후로는 성질이 좀 죽은듯한 모습도 보인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바로크 음악과 포크 음악이 원류다. 실제로 70년대 부터 이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락보다 더 많이 듣고 연주했다고 한다. Under A Violet Moon 뒤로 조금씩 성격이 유해졌고. 자녀를 가진 후부터는 정상인이 된 듯하다.[42]
여담이지만 블랙모어스 나이트 결성 당시 국내의 한 음악 잡지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리치 측에서 내건 조건이 '캔디스 나이트도 함께 인터뷰 할 것'이었다고 한다. 캔디스 나이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기자들은 유일한 자료인 그녀의 사진들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인터뷰 시간까지 대기하였는데, 인터뷰가 시작되자 "내가 어렸을때 노래하면 새들이 몰려 들어와 듣곤 했다.", "내 목소리는 하늘이 내려준 천사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등 주옥 같은 공주병 어록을 쏟아내어 기자를 괴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행을 좀 보여주지만 실력있는 보컬리스트라서 그런지 인재를 보는 눈이 있는데, 캔디스에 의해 발굴된 인재가 구 레인보우 마지막 기수의 보컬인 두기 화이트고 그 다음이 신 레인보우의 보컬 로니 로메로다. 두기 화이트는 자잘한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를 하다가 뿌려뒀던 데모 테이프가 캔디스의 손에 들어가 레인보우에 발탁이 되었고, 로니 로메로는 본인이 올려둔 유튜브 영상을 본 캔디스가 리치 블랙모어에게 들려주면서 무명이었던 로메로를 메이져로 끌어올렸고 리치로 하여금 다시 레인보우를 하게 만들었다.
결혼식 때 리치가 턱시도 대신 전통 중세시대 옷을 입고 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언 길런 역시 결혼식 때 전통 조지아 복장을 입고 결혼했다.
5.3. 전 부인들
리치는 현재의 부인인 캔디스 나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총 2번 결혼하고 2번 이혼하였다.19살때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였던 독일인 마거릿 볼크머(Margrit Volkmar)가 있었고 그녀 사이에서 장남인 위르겐 블랙모어를 낳았다. 1964년부터 1969년도까지 짧은 기간만을 부부로 함께하였다.1974년부터 1975년 까지 1년 간, 쇼산나 페인스타인이라는 소프라노와 동거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레인보우의 첫 스튜디오 앨범 'Ritchie Blackmore's Rainbow'에 백킹 보컬로 참여했고, 'Catch The Rainbow' 와 'Still I'm Sad' 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7년 6월 한 웹진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인터뷰를 하였고, 그녀는 리치에 대해 여러 썰들을 풀었다.그 다음 에이미 로스맨이란 여성과 1981년도에 결혼했었지만 1983년도에 2년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6. 기타
- 나이가 들면서 뱃살이 엄청 붙었다. 축구를 매일 하는데도 액슬 로즈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후덕하게 보인다. 그래도 얼굴은 젊었을 때의 날카로운 느낌과 간지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편이다.
- 80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주 한 번씩 축구를 하고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축구광이다. 캔디스 나이트도 축구 하다가 만났다.[43][44]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음악의 음반들을 무려 2,000여 장이나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 바이에른 뮌헨 서포터다.
- 브라이언 메이는 리치 블랙모어가 지미 헨드릭스 이전부터 존재했던 록 기타리스트이며, 락/메탈 장르의 개척자 중 한 명인데도 그가 왜 대중적으로 잘 언급되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하였다. #
- 라이브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고 불을 붙인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는데, 딥퍼플 MK 3기 시절의 California Jam 1974 공연에서는 기타를 바닥에 비비고 발로 긁어대고 위로 던져서 내동댕이치는 것도 모자라 관중석에 부서진 기타를 던지고 액션캠에 쳐대고 엠프에 불을 붙여 터뜨렸다.[45] 레인보우 라이브때도 기타를 많이 부쉈지만 이때처럼 엠프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보이지는 않았다.[46] 후일담에 의하면 뒤에서 촬영하는 방송국 사람들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게 짜증나서 그랬다고 한다.[47] 또한 앞차기를 무대 퍼포먼스에 도입한 장본인. 그리고 이 앞차기 퍼포먼스는 잉베이 말름스틴으로 계승되었다.
- 딥 퍼플 재결합 이후부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리치 블랙모어는 여타 유럽인들 처럼 얼굴 하관에 수염이 골고루 나는 타입이다. 한때는 콧수염과 턱부분을 모양을 다듬으면서 길렀는데 귀찮았는지 콧수염만 기르는 중.
- 영국과 독일에서 거주하다 레인보우 결성 이후 아예 미국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데, 인터뷰에서 "독일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독일은 세금을 너무 많이 걷는다" 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골수 독빠다. 그러나 옥토버페스트는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 젊은 날엔 미신을 엄청 믿는 타입이었다. 앨범 준비할 때는 외딴 곳의 집을 빌려서 합숙을 하였었는데,[48] 집에 이상한 기운이 있다고 느낀 리치는 방안에 온같 부적 같은 것을 만들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십자가가 직빵일꺼라 생각해서 온 멤버들에게 십자가를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방에서 잠자던 로저 글로버가 잠결에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햇는데 일어나기 귀찮았던 로저 글로버는 저리 가라고 했었는데, 십자가가 정말 급했던 리치는 소방용 손도끼를 가져와서 문을 쪼개고 들어가 십자가를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존 로드의 말에 의하면 로저 글로버는 엄청나게 젠틀한 성격이라서 리치가 뭐라 하던 화를 거의 내는 법이 없었는데 이 때만큼은 엄청 화를 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 제작한 앨범은 fireball이다.
- UFO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심지어 두 번이나 직접 UFO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스티브 바이한테 악보도 제대로 못 읽는다고 모욕 당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스티브 바이의 인성을 보더라도 말도 안되는 악성 루머이다. 무엇보다 리치 블랙모어는 원래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사람이고 악보를 읽을 줄 안다. 그 예중 하나로 딥 퍼플 시절 때 오케스트라 합동 공연 때 악보 보면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2015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The Ritchie Blackmore Story가 나왔다. 리치와 주변 뮤지션들의 인터뷰들로 이뤄진 영상이다. 나무위키의 상당수의 정보들이 이 영화를 기반으로 대폭 수정이 되었다.
- 어린 시절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한 경력이 있고, 기타와 관련된 이펙터, 기타 앰프 등등 음향기기를 다루는데도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그 외의 현대 문물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
- 성격만 보면 다른 기타리스트들을 엄청 깔볼 것 같지만, 잘하는 사람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브라이언 메이나 에디 밴 헤일런[49]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극찬을 했고, 딥 퍼플에 자기 후임으로 들어온 스티브 모스에 대해서도 극찬을 하였다.[50] 상당히 완벽주의적이고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 인터뷰에 따르면 딥 퍼플을 다시 나오고 시간이 수십 년이 흐른 후에 팬들과 추억을 위해 딥 퍼플 2기 멤버들과 같이 한 번이라도 같이 공연을 하고 싶었고, 다른 2기 멤버들도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바램과 달리 메니지먼트와 에이전시가 관여하게 되면 엄청 복잡해진다고 하는데, 2기 멤버들의 공연은 엄청난 돈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무산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리더였던 존 로드는 2012년에 2기 멤버들 중 가장 먼저 타계하였고, 다음엔 누가 또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같이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딥 퍼플쪽의 매니지먼트의 간섭 때문에 리치 블랙모어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때 일부러 참여도 안 했고, 팬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리치와 같이한 딥 퍼플 공연을 못 보게 되었다.
- 택틱스 오우거의 히든던전인 망자의 궁전 최종보스의 이름이 블랙모어이고 클래스가 리치다. 디렉터 마츠노 야스미가 록덕후다 보니 나온 말장난. 후에 영문 스펠링을 블랙무어로 바꾸었다.
- 고집불통인 이미지와 달리 다른 록 장르에 대해 편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딥 퍼플 시절 레이 콜먼이라는 멜로디 메이커가 펑크 록 풍의 음악을 들고왔는데 리치 본인은 꽤나 새롭고 독특한 음악이라 흥미로워했는데, 이와 반대로 이안 길런은 엄청 디스를 해댔다고 한다. 섹스 피스톨즈라던가 다른 펑크 록 밴드들이 심플하지만 이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이안 길런은 이것을 왜 싫어하는지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리치 블랙모어의 음악적 행보를 보면 그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음악적 편견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클래식 음악과 헤비 메탈의 결합이라는 본인의 스타일을 계승한 잉베이 말름스틴의 음악에 대해선 아직도 뭘 하려고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 2022년 7월에 유튜브 공식 채널을 만들었다. 어떤 컨텐츠를 다룰지는 본인도 아직 잘 모르고 과거 공영 영상 위주로 올리는 듯. 아마 인터넷 매체에 친숙한 아내 캔디스 나이트가 채널 관리를 할 듯 하다.
[1] 종교는 없으나 신을 믿는다고 한다.[2] 들고 있는 기타는 호프너의 클럽 50 일렉트릭 기타이다.[3] 이렇게 악기가 아닌 것들로 연주를 하던 것은 스키플이라는 장르의 특색이었다.[4] 2015년에 진행된 인터뷰를 포함하여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학창 시절이 기억이 그다지 좋지 못했음은 확실한 셈.[5] 위 사진에 있는 호프너 클럽 50 일렉트릭 기타가 그것이다.[6] 대표적으로 닐 크리스찬, 스크리밍 로드 서치 등이 있었다.[7] 리치 블랙모어의 인터뷰에 의하면 둘은 알고보니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며, 1962년 'Teen Age' 시절에 서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치는 지미가 훌륭한 뮤지션이었을 뿐 아니라 스타성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자신만만했지만, 결코 오만해보이지는 않았다고 극찬했다.[8] 리치가 아무리 성격이 더러웠어도 존이 4살 연상이기도 하고 워낙에 호인이라 다 받아주었기 때문에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의 관계는 좋았다.[9] 심지어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놈이 무대에서 Smoke on the Water의 가사를 틀릴때 마다 기타로 머리를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라면서 이안 길런을 까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리치와 이안의 관계는 썩 좋지 않다.[10] 정작 리치 본인도 Smoke on the Water의 솔로를 다르게 연주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기에 "본인도 다르게 연주해놓고?"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록 계통 쪽 기타리스트들은 매번 곡마다 동일한 연주를 하는 것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매번 앨범과 같은 연주를 한다면 밴드 라이브를 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보자.[11] 존 로드, 이안 페이스는 그렇다치고 로저 글로버의 반응이 의외였다고 한다. 로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레인보우를 같이했고 조 린 터너와도 같이 호흡을 맞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저는 이안 길런과 딥 퍼플 가입 이전 에피소드 식스 시절부터의 친구이기 때문에 단순 팀 동료 이상의 의미가 있다.[12]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13] 알렉스 라이프슨[14] 토니 아이오미[15] 브루스 디킨슨[16] 데이비드 길모어[17] 브라이언 메이나 토니 아이오미 같은 경우는 리치가 직접 칭찬을 한 일도 있었을 정도.[18]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나, 이안과 리치의 증언이 엇갈린다. 이안 길런은 스파게티에 케첩을 뿌린 건 자기가 아니었으며, 이를 오해한 리치가 해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스파게티 그릇을 얼굴에 박아버렸다고 한 바 있다.[19] 인사를 받은 건 이안 페이스뿐이었고, 존 로드는 또 충격 먹고 방으로 달려갔다고 한다.[20] 원래 레인보우가 아닌 솔로 활동을 위해 두기 화이트를 썼다고 한다. 레인보우를 할 것이었으면 조 린 터너를 염두에 두고 곡을 썼을 것이라고 한다.[21] 이후 2008년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22] 블랙모어의 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내의 성이 나이트인 것으로봐서 블랙모어의 나이트라는 의미도 가지고있다. 즉 부부의 성을 밴드명으로 한 것.[23] 사실 어떻게 보면 이쪽으로 노선을 옮긴 것이 리치의 음악가 커리어에 있어서는 더 다행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도 초까지는 하드 록, 메탈에 있어 가히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펑크 록/얼터너티브 록/이모코어같은 신 장르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그 딥 퍼플 또한 재결성 후 예전 같은 히트를 친 적은 거의 없었다.[24] 아예 과거에 하던 음악들을 접은 것은 아니다.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곡들 중에서는 캔디스의 스타일에 맞게 작곡된 메탈풍의 곡들도 몇몇 있다.[25] 블랙모어스 나이트 공연을 보면 대부분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가족들과 같이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연장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무대 혹은 숲에 둘러 쌓인 야외 공연장들이다. 과격한 관객들과 함께 시끄럽고 공격적인 음악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니 사람이 심리적으로 유들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26] 뉴 레인보우 결성 당시 리치의 나이는 무려 70세였으며, 당연히 전성기 시절인 20대, 30대 시절의 연주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이 정도 고령에도 전성기 수준의 연주를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27] 이미 이 당시 나이가 70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느린 템포로 연주되었음에도 힘에 부치는 게 들린다. 나이 앞에 장사 없는 셈.[28] 리치 블랙모어가 이러한 장르들에 블루스와는 차별화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부여하였다면, 이 둘을 아예 분리해버린 사람이 바로 에디 밴 헤일런이다.[29] 이 분야에서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잉베이조차도 리치 블랙모어 앞에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한 양이 된다. 데뷔 초 잉베이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등 많은 부분에서 리치를 그대로 따라할 정도였다.[30] 피지컬을 필요로 하는 이런 연주는 이후 존 사이크스나 게리 무어의 해머링 & 풀링 6연음 또는 그에 기반한 각종 속주 릭, 프레이즈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31] 깁슨에서 1961년에 생산된 ES-335의 사양을 재현, 복각하여 생산한 리이슈 모델이다. 위 사진 및 영상에서 리치가 연주하는 악기는 후술하듯 픽가드가 제거되고 브릿지가 교체되는 등 여러 부분 개조가 되어있기에 해당 사진 속 모델과는 사양 차이가 일부 있음을 알 수 있다.[32] 펜더에서 1968년에 생산된 스트라토캐스터의 사양을 재현, 복각하여 생산한 리이슈 모델이다. 피니쉬가 까진 것은 레릭 처리된 것.[33] 지판의 프렛 사이 목재를 둥글게 파내는 작업. 이 작업을 하게 되면 현을 눌렀을 때 손가락이 지판에 닿지 않고 현을 누른 채로 공중에 떠있게 된다.[34] 그가 이렇게 지판에 스캘럽 작업을 해놓은 스트랫을 애용하였다는 점은 이후 그의 직계 후계자로 간주되는 잉베이 말름스틴에게로 전승된다.[35] 이 중 메이플 지판이 사용된 한 대는 1972년에 촬영된 Highway Star 뮤직비디오에서 볼 수 있다.[36] 리치 본인은 이 올림픽 화이트 스트랫들을 어떠한 애정도 없다는 듯 매우 험하게 다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래에 나올 펜더 재팬, 멕시코 생산 시그니처 모델이 이 외관을 기준으로 제작되었다.[37] 미들 픽업을 더미 픽업으로 교체하는 개조가 처음 시도되었던 개체이기도 하다.[38] 더욱 심이 굵은 알니코 자석을 사용하여 출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위 사진도 잘 보면 픽업 폴피스 자석이 매우 두꺼운 걸 볼 수 있다.[39] 이 일화가 훗날 자기가 그레이엄 보넷을 기타로 후려쳤다고 와전됨.[40] 레인보우의 멤버 였던 사람들로 이뤄졌는데, 이들이 레인보우에 있었던 시기는 각각 달랐고, 유럽에서 투어를 몇 번 돌다 해체되었다. 이후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멤버들의 갈등으로 엄청 싸워서 본인은 탈퇴를 했고, 남은 멤버들은 조 린 터너를 대신할 보컬로 두기 화이트와 그레이엄 보넷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아 결국 밴드가 해체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개성과 성격이 엄청 쎈 멤버들을 다뤘던 리치의 카리스마를 알 수 있는 부분.[41] 참고로 리치 블랙모어는 보기보다 미신같은걸 꽤 잘 믿는 사람이다. 밑에서도 서술되지만, 딥 퍼플 시절에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베이시스트 로저 글로버와 싸우는 일도 있었다.[42] 이 부분은 후배인 잉베이 말름스틴에게도 계승 중이다. 잉베이도 오랫동안 메탈만 연주하다가 시골 같은데서 포크송을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43]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고 나서 베켄바워와 독일 축구의 팬이 되었었다고 한다.[44] 2015년 7월 파리에서 한 인터뷰에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파리 생제르맹을 언급하기도 하였지만, 인터뷰 장소가 파리고,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였던 지라 립서비스라고 봐도 된다. 어쨌건 축구에 열광하며 최근의 축구도 보고 있긴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즐라탄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고, "그 파리에서 뛰고 있는 스웨덴 애." 이렇게 말했다.[45] 이 장면은 딥 퍼플 'Anthology' 앨범의 커버로 사용된다.[46] 그리고 이런 기타부수기는 후계자 잉베이 말름스틴이 그대로 따라한다. 리치 본인도 똑같이 기타부수기를 한 지미 헨드릭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47] 딥퍼플 재결합 당시의 공연때도 무대위에 올라와 찍고잇는 카메라맨에게 옆에있던 플라스틱 음료수컵을 던지고 "꺼져!"라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48] 어떤 곳이냐면 영화 007 스카이폴에 나오는 스카이폴 주택 같은 곳이었다.[49] 정작 에디 밴 헤일런이 어린 시절 리치 블랙모어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싸인을 요청했을 때, 욕설을 섞어가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50] 스티브 모스는 리치 블랙모어에 대해 이야기할때 오른손에 리듬감과 박자감이 있어야 제대로 칠 수 있어야 해서 본인도 연습하기 어려웠다고 한다.[51] 더욱 대단한 것은 70년대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코카인은 마약으로 취급받지도 않던 시대였을 정도로 마약 복용이 만연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리치 블랙모어는 로버트 프립, 프랭크 자파와 더불어 마약을 혐오했던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여담으로 세 사람은 음악적으로 완벽주의자라는 점까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