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22 13:05:56

리치 블랙모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e1d3f, #3e1d3f 40%, #3e1d3f 60%, #3e1d3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border-radius:5px;"
파일:딥 퍼플 로고.png


{{{-2 {{{#!folding [ 1 ~ 4기 멤버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fff,#fff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
파일:Shades of Deep Purple.jpg
파일:The Book of Taliesyn.jpg
파일:DeepPurple(앨범).jpg
파일:Deep_Purple_In_Rock.jpg
파일:fireball.jpg

1968

1968

1969

1970

1971
파일:external/www.deep-purple.net/M-Head-UK-big.jpg
파일:Who Do We Think We Are.jpg
파일:Burn Deep Purple.jpg
파일:Stormbringer.jpg
파일:Come Taste the Band.jpg

1972

1973

1974

1974

1975
파일:external/cps-static.rovicorp.com/MI0001626013.jpg
파일:The House of Blue Light.jpg
파일:Slaves and Masters.jpg
파일:The Battle Rages On....jpg
파일:Purpendicular.jpg

1984

1987

1990

1993

1996
파일:Abandon.jpg
파일:Bananas.jpg
파일:Rapture of the Deep.jpg
파일:Now What?.jpg
파일:Infinite.jpg

1998

2003

2005

2013

2017
파일:Whoosh!.jpg
파일:Turning To Crime.png
파일:
TBD

2020

2021

2024
}}}}}}}}}}}}}}}}}} ||
리치 블랙모어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롤링 스톤이 2015년 10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키스 리처즈 제프 벡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비비 킹 척 베리 에디 밴 헤일런 듀언 올맨 피트 타운젠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위-75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조지 해리슨 스티비 레이 본 앨버트 킹 데이비드 길모어 프레디 킹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데릭 트럭스 닐 영 레스 폴 제임스 버턴 카를로스 산타나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쳇 앳킨스 프랭크 자파 버디 가이 앵거스 영 토니 아이오미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브라이언 메이 보 디들리 조니 라몬 스코티 모어 엘모어 제임스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라이 쿠더 빌리 기븐스 프린스 커티스 메이필드 존 리 후커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랜디 로즈 믹 테일러 디 에지 스티브 크로퍼 톰 모렐로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믹 론슨 마이크 블룸필드 휴버트 서믈린 마크 노플러 링크 레이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제리 가르시아 스티븐 스틸스 조니 그린우드 머디 워터스 리치 블랙모어
<rowcolor=#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조니 마 클라렌스 화이트 오티스 러쉬 조 월시 존 레논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앨버트 콜린스 로리 갤러거 피터 그린 로비 로버트슨 론 애시튼
<rowcolor=#fff>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디키 베츠 로버트 프립 조니 윈터 듀언 에디 슬래시
<rowcolor=#fff>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레슬리 웨스트 T-본 워커 존 맥로플린 리처드 톰슨 잭 화이트
<rowcolor=#fff>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로버트 존슨 존 프루시안테 커트 코베인 딕 데일 조니 미첼
76위부터는 문서 참조.
}}}}}}}}} ||
같이 보기: 최신 버전,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
파일:Ritchie_Blackmore_Profile.jpg
<colbgcolor=#4C4C4C><colcolor=#fff> 본명 리처드 휴 블랙모어
Richard Hugh Blackmore
출생 1945년 4월 14일 ([age(1945-04-14)]세)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웨스턴슈퍼메어
국적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영국|{{{#!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영국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영국}}}{{{#!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소속 딥 퍼플, 레인보우, 블랙모어스 나이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4C4C4C><colcolor=#fff> 부모님 루이스 블랙모어
바이올렛 블랙모어
배우자 마그릿 볼크머 (1964 – 1969)
에이미 로스먼 (1981 – 1983)
캔디스 나이트 (2008 – )
자녀 위르겐 블랙모어, 로리 블랙모어, 어텀 블랙모어
신체 179cm, 76kg
종교 무종교 (유신론)[1]
활동 기간 1960년 – 현재
사용 악기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만돌린, 만돌라, 드렐라이어
장르 하드 록, 블루스 록, 메탈,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 바로크 음악, 포크 음악
레이블 Polydor, BMG, Edel, SPV, Ariola, Frontiers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및 데뷔 이전2.2. 딥 퍼플 시절2.3. 레인보우 시절2.4. 재결합한 딥 퍼플2.5. 블랙모어스 나이트, 뉴 레인보우
3. 연주 스타일 및 평가4. 사용 장비5. 가족 관계
5.1. 부모5.2. 현 가족5.3. 전 부인들
6. 기타

1. 개요

파일:Ritchie_Blackmore_Deep_Purple_1970s.jpg 파일:Ritchie_Blackmore_2018.png
<rowcolor=#fff> 전성기 시절(1970년대)의 모습 2018년의 모습
영국기타리스트. 전설적인 하드 록 밴드 딥 퍼플레인보우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헤비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리프를 가진 곡, Smoke on the Water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데뷔 이전

파일:Ritchie_Blackmore_with_Hofner_Guitar.png
10대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2]
리치 블랙모어는 1945년 4월 14일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웨스트어폰메어에서 태어났으나, 곧 그의 가족 전체가 런던 서부에 위치한 헤스턴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기타를 처음 잡은 것은 12살 때였는데, 아버지가 그에게 사준 프라무스 클래식 기타가 그의 첫 기타였다. 아버지의 조건에 따라 1년간 기타 레슨을 받았는데, 그는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14살 때엔 자전거를 타고 수 마일 밖에 있는 기타 선생님에게 가서 기타를 꾸준히 배웠다고 한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지역 스키플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빨래판이나 개집(...)같은 악기라고 말하기 힘든 것들로 연주[3]를 하다가 이내 기타를 연주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렇게 스키플 밴드에서 연주를 하였던 경험은 추후 그가 원래 하던 하드 록을 잠시 그만두고 바로크, 포크 밴드를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집은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다, 당시 영국의 폭력적인 교육 현장에 의해 그는 언제나 선생들에게 매를 맞을 정도로 시달렸으며, 동시에 공부에 매진하면 할수록 본인이 경멸하는 교사들처럼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4] 이는 그가 더욱 기타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그는 15살에 학업을 그만두기로 한다. 리치 인터뷰에서 당시의 본인이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듀언 에디, 더 쉐도우즈같은 로큰롤 아티스트들에게 크게 빠져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또한 1961년에 사우스 홀 뮤직 센터(South Hall Community Center)에서 개최된 네로 앤 더 글레디에이터즈라는 인스트루멘탈 록 그룹이 그리그산왕의 궁전에서를 연주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게 본인이 클래식 음악에 기반한 기타 연주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곧 학교를 그만둔 뒤,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견습 라디오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 첫 번째 일렉트릭 기타[5]를 구입하기도 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빅 짐 설리반(Big Jim Sullivan)에게 기타를 배웠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그는 이후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던 프로듀서 조 믹(Joe Meek)의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당시 영국 대중음악계의 다양한 아티스트들[6]의 곡을 녹음하거나 그들의 라이브에 참가하였다. 같은 시기 레드 제플린에서 활동하게 되는 지미 페이지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둘 다 본인들만의 밴드를 하기 전에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7]

2.2. 딥 퍼플 시절

파일:external/mp3musicx.xyz/deep-purple-534c92162c3031.79553139.jpg 파일:external/cdn.hitfix.com/DeepPurpleMk2_featured_photo_gallery.jpg
<rowcolor=#fff> 1기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
(좌측 첫 번째)
2기 시절의 리치 블랙모어
(좌측 첫 번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딥 퍼플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딥 퍼플#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딥 퍼플#|]][[딥 퍼플#|]]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딥 퍼플영국 드러머 크리스 커티스가 영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실력 좋은 연주자들을 모집하여 지금으로 치면 슈퍼 밴드를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탄생하였는데, 리치는 이 때 키보디스트 존 로드와 함께 가장 먼저 라인업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1968년 딥 퍼플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리치는 이 당시부터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리치는 특유의 날카롭고 꽤 잘생긴 외모를 가졌던데다, 기타 실력 또한 동시대 다른 밴드들 대비 엄청난 편이었기에, 결성 당시부터 수많은 팬을 거느리며 한순간에 슈퍼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전성기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딥 퍼플과 투어활동을 돌던 시기 어느 날 리치가 감기에 걸려 공연을 하루 쉬고 대타를 내보냈는데, 관중들이 리치가 보고싶다고 난리를 피워서 아예 공연 자체가 중단되기도 할 정도였다.

다만 딥 퍼플 활동 당시 다른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인간성 부분에서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멤버들마다 일일이 공연 시 그들이 위치해있을 자리를 정해주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다른 멤버들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루머도 있고, 자신의 성격을 늘상 다 받아주는 존 로드에게 버럭 버럭 화를 내거나[8] 작사가이자 보컬인 이안 길런이 라이브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면 리치 블랙모어가 "가사를 왜 틀리냐"며 큰소리로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9][10] 결국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저런 놈이랑 더 이상 같이 못 해먹겠다"며 딥 퍼플을 나오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Ritchie Blackmore's Story를 보면 음악적 견해 차이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리치나 이안 길런이나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리드하길 원했고, 서로 타협을 잘 못봤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안 길런이 리치에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불러주겠다고 하면, 리치가 방향성을 내놓고, 그러면 이안은 "그건 블루스 스타일이잖아, 난 그런거 부르기 싫어!" 이런 식이었다.

다만 이렇게 자신의 밴드 멤버들과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협업이 끝난 후에는 그들에 대한 험담보다는 그들의 음악성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더 많이 했던 것으로 보아, (딥 퍼플을 포함하여) 들어가는 밴드들마다 멤버들과의 갈등을 겪는 것에는 인간성 부분에서의 결함이 있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완벽성을 병적으로 추구하는 성격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리치 블랙모어도 후임으로 들어온 데이비드 커버데일, 글렌 휴즈와 음악적 갈등으로 로니 제임스 디오와 그가 활동하고 있던 엘프라는 밴드의 멤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밴드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를 결성하고 밴드를 나오게 된다. 하지만 휴즈나 커버데일이나 인터뷰에서 리치에게 많은 것을 배웠었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자주하였다.

2.3. 레인보우 시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인보우(밴드)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레인보우(밴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4. 재결합한 딥 퍼플

파일:Deep_Purple_Reunion_1984.jpg
딥 퍼플 재결합 당시의 리치 블랙모어
(사진 우측 첫 번째)
1984년 딥 퍼플 재결합에도 참여하였지만, 이 때도 이안 길런과 대판 싸우는 등 사이가 안 좋았다. 중간에 이안이 다시 나가서 레인보우의 보컬이였던 조 린 터너를 데려왔지만, 존 로드를 중심으로 다른 멤버들이 조 린 터너를 노골적으로 하대했고 앨범의 실패로 리치를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에게 쫓겨나게 된다.[11]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의 모금활동을 위해 Rock Aid Armenia에 이언 길런과 같이 참여하여 퀸[12], 러시[13], 블랙 사바스[14], 아이언 메이든[15]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16]영국의 내로라하는 록 밴드의 멤버들과 함께 Smoke on the Water를 합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안 좋은 소문만 알고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곡을 손대는 것을 맘에 안들어할 것 같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본인도 인정하는 프로들[17]이 연주한 자기곡을 들으면서 상당히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에이전시 쪽은 다시 이안 길런을 데려오기로해서 데모 테잎을 보내서 보컬 부분만 녹음해서 듣게 했는데 'Perfect Strangers' 때와 더 악화된 목소리 때문에 이안과 일을 못하겠고, 무대에 서더라도 BGM 마냥 구석에 박혀있을것이라고 했는데, 에이전시쪽은 이안과 같이 일만 해준다면 돈도 계속 주고 구석에서 연주를 하던 상관없다고 했다. 최강의 패조차도 먹히지 않아서 결국 이안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속 일을 하게 된다.

재결합 3번째 앨범인 'The Battle Rage On...' 때 이안과 리치의 갈등이 더더욱 안 좋아졌는데, 스파게티 사건이 그 중 하나다. 직원 중 하나가 식사 때 리치가 먹을 소스 없는 스파게티(치즈와 허브로 이뤄진 것)을 가져왔는데, 리치가 아직 안 온 사이에 이안이 거기다가 케첩으로 도배를 하는 짓을 저지른다. 리치가 이 때문에 빡쳤고 이안은 웃으면서 자기가 했다고 하자 그대로 스파게티를 얼굴에 던젔다고 한다.[18]

아무튼 투어에서 이안 길런과는 더 이상 일을 같이 못하겟다고 느낀 리치는 1993년 11월 17일 헬싱키 공연을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Good Bye"라는 말만 남기고 밴드를 떠나버렸다.[19] 딥 퍼플이 아닌 레인보우 같은 솔로 활동이야 말로 자신의 적성에 맞다고 다시 실감한다. 이 레인보우의 앨범은 원래 솔로 앨범으로 기획 되었지만, 음반사의 강요로 레인보우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두기 화이트를 보컬로 내세운 레인보우의 마지막 앨범인 Stranger In Us All을 낸다.[20]

2.5. 블랙모어스 나이트, 뉴 레인보우

파일:Blackmore's_Night_Ritchie_Candice.jpg
리치 블랙모어(좌)와 캔디스 나이트(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블랙모어스 나이트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블랙모어스 나이트#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블랙모어스 나이트#|]][[블랙모어스 나이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인보우(밴드)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레인보우(밴드)#뉴 레인보우|뉴 레인보우]][[레인보우(밴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재결합한 딥 퍼플 마저도 뛰쳐 나온 리치는 당시 여자친구였던[21] 미국인 보컬리스트 캔디스 나이트(Candice Night)블랙모어스 나이트(Blackmore's Night)라는 밴드를 결성,[22] 바로크 음악포크 음악에 심취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23]

프로듀서였던 펫 리건은 리치가 스튜디오에서 재밍을 하고 있었는데, 기존의 메탈 곡이 아닌 동화에나 나올법한 포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그냥 "별일이네~"하고 넘겼는데 결국엔 리치는 쭉 이 노선으로 가면서 포크송 앨범들을 연이어 내게 된다. 리치 또한 인터뷰에서 블랙모어스 나이트에서 활동하면서 심리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느꼈으며, 관객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자신 역시 하드 록이나 메탈보단 이러한 음악들이 더욱 괜찮다고 생각하여 계속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24]

헤비 메탈 팬덤에선 리치의 이러한 행보에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받았지만, 브라이언 메이키스의 진 시몬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엄청 헤비한 음악만 하다보면 나중엔 지쳐서 결국 어릴 적 처음 접했던 유들한 음악을 하게 된다고 하는데, 리치는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을 하면서 캔디스가 알던 인맥들과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시절 때와 달리 "과격한 관객"들이 아닌 유순한 관객들을 상대하다보니 이 시절 때 성격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순해졌다고 한다.[25] 캔디스 나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치 블랙모어는 자신의 대표곡인 Smoke on the Water 등 딥 퍼플, 레인보우 시절 곡들을 들으면 그 밴드들에서 활동할 다시의 본인이 가지고 있던 나쁜 기운들이 다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까지 했는데, 이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메탈 음악을 거의 안 한 근본적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비드 커버데일은 리치의 이런 행보에 대해 매우 부럽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자신은 일 때문에 때문에 계속해서 팬들이 원하는 앨범들을 만들어야 했지만, 리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 해왔기 때문이었다. 리치 블랙모어를 보고 기타리스트가 된 조 새트리아니는 늘 해오던 음악과 다른 음악 장르를 하고 싶으면 과감하게 바꿔버리는 리치 같은 성향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가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밴드 활동 시작으로 하드 록/헤비 메탈 팬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종종 후배들과 같이 공연을 하면서 계속 얼굴을 내비치는 멤버들이나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아에 다른 세계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록/메탈 쪽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졌다. 그나마 가끔 딥 퍼플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 때 대중에 얼굴을 내비치긴 한다는 것이 위안.
파일:Ritchie Blackmore's Rainbow 2017.jpg
2017년의 뉴 레인보우 라인업
(좌측에서 두 번째)
그렇게 팬들은 리치가 하드 록/헤비 메탈계와는 선을 긋고 완전히 바로크, 포크 아티스트로 전향할 줄로 알았으나, 2016년부터 뉴 레인보우를 결성하고 기존과 같은 하드 록, 헤비 메탈 연주를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오랜만에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블랙모어스 나이트 시기부터 함께하던 아내 캔디스 나이트가 배킹 보컬로 참여하며, 라이브 세트리스트를 봐도 그가 딥 퍼플, 레인보우 시절 선보였던 수많은 명곡들이 들어있어 팬들의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다. 뉴 레인보우의 결성 이후로는 블랙모어스 나이트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여러모로 나이가 들어 연주력이 크게 떨어진 부분도 없잖게 있기에 아쉽다고 평하는 팬들의 반응도 유의미하게 나오고 있다.[26]

2020년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대면 라이브 등 활동이 완전히 중단되고 마찬가지로 블랙모어스 나이트, 레인보우 활동도 제한되었었기 때문에 별 다른 대외 활동 없이 가족들과 자체격리를 했다. 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활동도 안 한 것은 아니며, 인터넷이나 각종 21세기 미디어물에 전혀 관심이 없던 리치 블랙모어가 아내의 권유로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공연 생중계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옛날엔 TV 매체에 꽤 나오긴 하였지만 이런 인터넷 방송은 처음인지 라이브 시작 당시에는 매우 어색해하였지만 의외로 금세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 연주 스타일 및 평가

<rowcolor=#fff> 딥 퍼플 시기 Smoke on the Water 라이브
(1972년 연주)
레인보우 시기의 Kill the King 라이브
(1977년 연주)
<rowcolor=#fff> 딥 퍼플 재결성 시기의 Highway Star 라이브
(1984년 연주)
뉴 레인보우 시기의 Burn 라이브[27]
(2019년 연주)
1970년대 내내 화려한 기타 플레이와 더불어 부리부리한 눈매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강렬한 외모의 미남 기타리스트였으며, 스타성까지 갖추고 있었던 독보적인 존재였다. 동시에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 등과 함께 현재의 하드 록, 헤비 메탈 기타 작법을 개척하고 완성한 기념비적인 기타리스트라고 평가된다. 물론 지미 헨드릭스 영향을 받은 부분들도 없잖게 보이긴 하나, 특히 당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던 블루스적인 즉흥 연주를 지양하고, 클래식에 영향을 받은 짧고 강력하며, 정교하게 계산된, 하모니를 맞춘 리프와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기타 솔로를 추구하여 이러한 장르들 특유의 이미지를 탄생시킨 기타리스트이다. 이 사람부터 시작해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이 블루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인 음악 장르로써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28]

지금 기준에서는 워낙에 연주자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어 그의 플레이가 별로 특별하게 와닿지 않을 수 있으나, 1세대 기타 테크니션 중에선 실력 면에서 최상위권에 존재하는 기타리스트였으며,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에디 밴 헤일런, 랜디 로즈, 제이크 E 리, 타카사키 아키라, 잉베이 말름스틴[29] 등 수많은 1970, 1980년대 슈퍼 기타리스트들의 탄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니 그야말로 개척자 격인 인물. 거의 동시대에 활약한 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 같은 거물 조차도 리치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 1970년대 말, 에디 밴 헤일런의 등장 이전까지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와 함께 기타키즈들의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대표적인 완벽주의로, 리치는 녹음 당시에 녹음의 완벽함을 위해 동료 밴드 멤버들의 관리까지 철저하게 시켰다고 하며,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즉흥성, 유연성보다는 계획성과 반복 훈련이 우선했던 클래식 베이스 음악가들의 정체성이 크게 드러나던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점은 직계 후임자라 볼 수 있는 잉베이 말름스틴에게까지 이어진다. 둘 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한 반복 훈련, 그리고 속주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 까지도 유사하다. 거기다가 동시대에 활동한 라이벌 지미 페이지가 워낙에 막장스러운 사생활에 마약 중독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과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마약은 고사하고 사생활에조차 단 한 번의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크개 비교된다.

위대한 기타리스트임이 틀림 없지만 굳이 단점을 들자면 딥 퍼플 당시에는 톤 다이내믹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프레이즈가 비슷비슷하다. 사전에 작곡한 부분들이나 몇몇 염두에 두고 배치한 멜로디들은 인상적이지만, 거의 모든 솔로 연주에서 손버릇에 가까운 3연음을 지겹게 들을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 빠르다는 칭송을 받은 프레이즈를 들어보면 같은 패턴의 3연음 런 주법이나 한 줄 트레몰로 피킹이 거의 고정적으로 나오는걸 들을 수 있다. [30]

4. 사용 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파일:Ritchie_Blackmore_ES-335.jpg
ES-335 TD를 연주하는 리치 블랙모어
파일:Gibson_CS_1961_ES-335_SC_ULA.jpg
깁슨 커스텀 샵 1961 ES-335 리이슈[31]
위 문단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첫 번째 기타는 아버지가 사준 프라무스 클래식 기타였으며, 이후 15세에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하며 번 돈으로 호프너클럽 50 일렉트릭 기타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62년에는 1961년깁슨 ES-335 TD 모델을 하나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그가 사용하던 ES-335는 훗날 기타 앰프 제조사 마샬을 창업하게 되는 짐 마샬이 운영하던 악기점에서 구입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기타는 그가 스튜디오, 라이브 세션으로 일할 당시부터 쭉 사용되었으며, 더 나아가 딥 퍼플 초창기까지도 사용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초창기 딥 퍼플의 명곡 중 하나로 회자되는 Child in Time의 기타 솔로로, 이 또한 ES-335로 녹음된 것이었다. 이 ES-335는 초기에는 튠 오 매틱 브릿지와 스톱 바 새들이 장착되었으나, 1965년경 리치는 이 악기의 테일피스를 빅스비 비브라토 테일피스로 교체하였고, 픽가드 또한 떼어내고 사용한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1971년에 딥 퍼플이 TOTP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을 때 찍힌 사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 리치는 본인이 사용하던 ES-335에 대해 매우 좋은 기타였으며, 톤은 따뜻하고 마치 보풀이 묻은 듯한 사운드를 내어주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파일:external/wallpaper.metalship.org/deep-purple23.jpg 파일:Ritchie_Blackmore_With_1968_Black_Stratocaster.jpg
스트라토캐스터를 연주하는 리치 블랙모어
파일:Fender_Custom_Shop_1968_Stratocaster_Black_Relic.png
펜더 커스텀 샵 1968 스트라토캐스터[32]
리치가 지금처럼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메인 악기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1968년록 밴드 크림의 오프닝 액터로 나섰을 때 있윴던 일 때문이다. 이 때 리치는 크림의 기타리스트였던 에릭 클랩튼이 빌려준 스트라토캐스터를 우연히 사용해본 뒤 그 연주감에 반하게 되었으며, 마침 동시기에 활동하였던 지미 헨드릭스가 스트라토캐스터로 보여준 트레몰로 암 테크닉을 본인도 사용하고자 하였기에 본인 또한 스트랫을 한 대 구입하기로 한다. 그가 처음으로 구입한 스트라토캐스터는 에릭 클랩튼의 로디로 활동하던 인물에게서 산 중고였는데, 여러모로 개조가 되었는지 텔레캐스터 넥이 장착돼있었으며, 음정이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기에 리치는 이 기타를 사용하긴 힘들겠다는 판단 하에 다시금 1968년에 생산된 검정색, 메이플 지판 사양 스트라토캐스터를 한 대 구입하게 된다. 이 1968년식 블랙 스트라토캐스터는 초창기 리치 블랙모어가 사용하였던 대표적인 스트랫 개체로, 추후 Machine Head 앨범의 수록곡이자 하드 록 자체를 상징하는 명곡 Smoke on the Water를 녹음하는 데 사용된다.

리치는 이후로도 다양한 스트라토캐스터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74년식 올림픽 화이트/로즈우드 지판 스트라토캐스터가 있다. 이 기타는 리치가 처음으로 스캘럽[33]작업을 시도한 개체로, 리치는 인터뷰에서 기타 지판에 이러한 작업을 한 이유에 대해 과거 오랜 연주로 지판이 움푹 패이다시피 한 클래식 기타를 여럿 연주해 보았는데, 이것이 의외로 평평한 지판을 가진 기타들보다도 본인의 손에 매우 잘 맞았고, 일렉기타들에도 이러한 작업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사포를 들고 무려 3일 동안 꾸준하게 갈아내어 개조를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알려진 바로는 지판에 스캘럽 작업을 한 거의 최초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다.[34] 이 스트랫 외에도 1970년대에 생산된 선버스트 색상 스트랫 두 대[35], 무대에서 기타 부수기 퍼포먼스용(...) 및 신제품 테스트용으로 애용되었던 올림픽 화이트 색상 스트라토캐스터 여러 대[36], 검정색 픽가드가 적용된 로즈우드 지판 올림픽 화이트 스트라토캐스터[37]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시키듯 왼손잡이용 스트라토캐스터들도 몇 개를 추가로 구입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파일:Ritchie_Blackmore_with_Stratocaster.jpg
현재는 메인 일렉기타로 상술한 첫 스캘럽 작업이 시행된 1974년식 올림픽 화이트/로즈우드 지판 스트라토캐스터를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제법 개조가 많이 되었는데, 넥과 브릿지 픽업은 레일형 싱글 픽업으로 교체되었으며, 기타에 롤랜드의 GK-2A로 추정되는 미디 컨버터/픽업을 추가로 장착하여 사용하고 있다.

4.1.1. 시그니처 모델

파일:Fender_Ritchie_Blackmore_Signature_Stratocaster.jpg
펜더 멕시코 리치 블랙모어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
펜더에서는 1997년펜더 재팬 공장에서 처음으로 리치 블랙모어의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 (ST72-145RB) 모델을 출시하게 되는데, 바디는 당대 펜더 재팬에서 생산되던 대다수 악기들이 그러하듯 베이스우드 바디를 채용하였으며, 그가 애용하던 1970년대 스트라토캐스터들처럼 라지 헤드스톡, 불렛 트러스로드 팁, 삼각형 넥 플레이트 등의 사양이 적용된데다, 결정적으로 스캘럽 처리된 지판이 채용되었다. 이 기타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만 내수 판매되었으나, 발매 첫 해인 1997년에는 예외적으로 북미 시장에 리미티드 에디션의 형태로 대략 300여대 가량이 수출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는 펜더 멕시코에서 리치 블랙모어의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가 재생산되기 시작했으며, 2025년 기준으로 계속해서 신품이 생산되는 중이다. 해당 모델의 대부분의 사양은 위의 펜더 재팬제 시그니처와 거의 동일하나, 바디 목재가 좀 더 전통적인 엘더 바디로 바뀌었으며, 픽업이 기존 싱글 코일 픽업 3개 조합에서 미들 포지션에 더미 픽업이 삽입된 넥, 브릿지 2 싱글 코일 픽업 구성으로 바뀌었다. 픽업 또한은 펜더에서 자체 제작된 스톡 픽업이 아닌, 시모어 던컨쿼터 파운드 플랫 싱글 코일 픽업[38]이 사용되어 기존 스트랫 픽업 대비 훨씬 강한 출력을 내어주도록 설계되었다. 지판에도 마찬가지로 스캘럽이 적용돼있으나, 마찬가지로 스캘럽 된 지판으로 출고되는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에 적용된 만큼 깊게 파여있지는 않다.

펜더의 하이엔드 커스텀 라인업인 펜더 커스텀 샵에서도 2013년에 펜더 커스텀 샵 트리뷰트 시리즈를 통해 리치 블랙모어가 사용하던 1968년메이플 지판 스트라토캐스터 개체를 복각하여 생산한 이력이 있다. Smoke on the Water의 녹음에 사용된 그것과 같은 개체이다. 관련 영상

4.2. 일렉트릭 기타/이펙터

4.3. 기타 앰프

4.4. 그 외 악기

5. 가족 관계

5.1. 부모

아버지는 루이스 J. 블랙모어, 어머니는 바이올렛 블랙모어이다.

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고, 그 유명한 "열심히 연습 안 하면 기타로 머리를 후려치겠다."라고 말한다.[39] 그 후 그는 일주일에 2-3번정도 기타 강습을 받으러 자전거를 타고 4마일 밖에 있는 곳에 왕복을 하곤 했다.

그가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다만 부모님은 그가 기타로 돈벌고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부모님을 공연에 처음 모셔왔던 건 딥 퍼플관현악단의 합동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이 거대한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주목을 받고있고, 관객들은 5천명 넘게 온 것을 보고 "아들놈이 확실히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있구나~"라고 실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는데 아버지와는 안 좋은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부자지간의 정까지만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부모들이 아이에게 대놓고 '사랑한다'라는 등 애정표현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아들에게 애정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였지만, 아버지는 좀 반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리치를 엄격하게 대한것도 아니었다. 뭐라 혼내려고 하면 큰 잘못이 아닌 이상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그러는거 아니다'라고 쉴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5.2. 현 가족

5.3. 전 부인들

리치는 현재의 부인인 캔디스 나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총 2번 결혼하고 2번 이혼하였다.

19살때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였던 독일인 마거릿 볼크머(Margrit Volkmar)가 있었고 그녀 사이에서 장남인 위르겐 블랙모어를 낳았다. 1964년부터 1969년도까지 짧은 기간만을 부부로 함께하였다.
1974년부터 1975년 까지 1년 간, 쇼산나 페인스타인이라는 소프라노와 동거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레인보우의 첫 스튜디오 앨범 'Ritchie Blackmore's Rainbow'에 백킹 보컬로 참여했고, 'Catch The Rainbow' 와 'Still I'm Sad' 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7년 6월 한 웹진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인터뷰를 하였고, 그녀는 리치에 대해 여러 썰들을 풀었다.
그 다음 에이미 로스맨이란 여성과 1981년도에 결혼했었지만 1983년도에 2년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6. 기타


[1] 종교는 없으나 신을 믿는다고 한다.[2] 들고 있는 기타호프너의 클럽 50 일렉트릭 기타이다.[3] 이렇게 악기가 아닌 것들로 연주를 하던 것은 스키플이라는 장르의 특색이었다.[4] 2015년에 진행된 인터뷰를 포함하여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학창 시절이 기억이 그다지 좋지 못했음은 확실한 셈.[5] 위 사진에 있는 호프너 클럽 50 일렉트릭 기타가 그것이다.[6] 대표적으로 닐 크리스찬, 스크리밍 로드 서치 등이 있었다.[7] 리치 블랙모어의 인터뷰에 의하면 둘은 알고보니 같은 동네에서 자랐으며, 1962년 'Teen Age' 시절에 서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치는 지미가 훌륭한 뮤지션이었을 뿐 아니라 스타성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자신만만했지만, 결코 오만해보이지는 않았다고 극찬했다.[8] 리치가 아무리 성격이 더러웠어도 존이 4살 연상이기도 하고 워낙에 호인이라 다 받아주었기 때문에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의 관계는 좋았다.[9] 심지어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놈이 무대에서 Smoke on the Water의 가사를 틀릴때 마다 기타로 머리를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라면서 이안 길런을 까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리치와 이안의 관계는 썩 좋지 않다.[10] 정작 리치 본인도 Smoke on the Water의 솔로를 다르게 연주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기에 "본인도 다르게 연주해놓고?"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록 계통 쪽 기타리스트들은 매번 곡마다 동일한 연주를 하는 것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매번 앨범과 같은 연주를 한다면 밴드 라이브를 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보자.[11] 존 로드, 이안 페이스는 그렇다치고 로저 글로버의 반응이 의외였다고 한다. 로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레인보우를 같이했고 조 린 터너와도 같이 호흡을 맞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저는 이안 길런과 딥 퍼플 가입 이전 에피소드 식스 시절부터의 친구이기 때문에 단순 팀 동료 이상의 의미가 있다.[12]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13] 알렉스 라이프슨[14] 토니 아이오미[15] 브루스 디킨슨[16] 데이비드 길모어[17] 브라이언 메이나 토니 아이오미 같은 경우는 리치가 직접 칭찬을 한 일도 있었을 정도.[18]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나, 이안과 리치의 증언이 엇갈린다. 이안 길런스파게티케첩을 뿌린 건 자기가 아니었으며, 이를 오해한 리치가 해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스파게티 그릇을 얼굴에 박아버렸다고 한 바 있다.[19] 인사를 받은 건 이안 페이스뿐이었고, 존 로드는 또 충격 먹고 방으로 달려갔다고 한다.[20] 원래 레인보우가 아닌 솔로 활동을 위해 두기 화이트를 썼다고 한다. 레인보우를 할 것이었으면 조 린 터너를 염두에 두고 곡을 썼을 것이라고 한다.[21] 이후 2008년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22] 블랙모어의 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내의 성이 나이트인 것으로봐서 블랙모어의 나이트라는 의미도 가지고있다. 즉 부부의 성을 밴드명으로 한 것.[23] 사실 어떻게 보면 이쪽으로 노선을 옮긴 것이 리치의 음악가 커리어에 있어서는 더 다행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도 초까지는 하드 록, 메탈에 있어 가히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펑크 록/얼터너티브 록/이모코어같은 신 장르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그 딥 퍼플 또한 재결성 후 예전 같은 히트를 친 적은 거의 없었다.[24] 아예 과거에 하던 음악들을 접은 것은 아니다.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곡들 중에서는 캔디스의 스타일에 맞게 작곡된 메탈풍의 곡들도 몇몇 있다.[25] 블랙모어스 나이트 공연을 보면 대부분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가족들과 같이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연장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무대 혹은 숲에 둘러 쌓인 야외 공연장들이다. 과격한 관객들과 함께 시끄럽고 공격적인 음악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니 사람이 심리적으로 유들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26] 뉴 레인보우 결성 당시 리치의 나이는 무려 70세였으며, 당연히 전성기 시절인 20대, 30대 시절의 연주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이 정도 고령에도 전성기 수준의 연주를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27] 이미 이 당시 나이가 70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느린 템포로 연주되었음에도 힘에 부치는 게 들린다. 나이 앞에 장사 없는 셈.[28] 리치 블랙모어가 이러한 장르들에 블루스와는 차별화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부여하였다면, 이 둘을 아예 분리해버린 사람이 바로 에디 밴 헤일런이다.[29] 이 분야에서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잉베이조차도 리치 블랙모어 앞에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한 양이 된다. 데뷔 초 잉베이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등 많은 부분에서 리치를 그대로 따라할 정도였다.[30] 피지컬을 필요로 하는 이런 연주는 이후 존 사이크스게리 무어의 해머링 & 풀링 6연음 또는 그에 기반한 각종 속주 릭, 프레이즈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31] 깁슨에서 1961년에 생산된 ES-335의 사양을 재현, 복각하여 생산한 리이슈 모델이다. 위 사진 및 영상에서 리치가 연주하는 악기는 후술하듯 픽가드가 제거되고 브릿지가 교체되는 등 여러 부분 개조가 되어있기에 해당 사진 속 모델과는 사양 차이가 일부 있음을 알 수 있다.[32] 펜더에서 1968년에 생산된 스트라토캐스터의 사양을 재현, 복각하여 생산한 리이슈 모델이다. 피니쉬가 까진 것은 레릭 처리된 것.[33] 지판의 프렛 사이 목재를 둥글게 파내는 작업. 이 작업을 하게 되면 현을 눌렀을 때 손가락이 지판에 닿지 않고 현을 누른 채로 공중에 떠있게 된다.[34] 그가 이렇게 지판에 스캘럽 작업을 해놓은 스트랫을 애용하였다는 점은 이후 그의 직계 후계자로 간주되는 잉베이 말름스틴에게로 전승된다.[35] 이 중 메이플 지판이 사용된 한 대는 1972년에 촬영된 Highway Star 뮤직비디오에서 볼 수 있다.[36] 리치 본인은 이 올림픽 화이트 스트랫들을 어떠한 애정도 없다는 듯 매우 험하게 다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래에 나올 펜더 재팬, 멕시코 생산 시그니처 모델이 이 외관을 기준으로 제작되었다.[37] 미들 픽업을 더미 픽업으로 교체하는 개조가 처음 시도되었던 개체이기도 하다.[38] 더욱 심이 굵은 알니코 자석을 사용하여 출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위 사진도 잘 보면 픽업 폴피스 자석이 매우 두꺼운 걸 볼 수 있다.[39] 이 일화가 훗날 자기가 그레이엄 보넷을 기타로 후려쳤다고 와전됨.[40] 레인보우의 멤버 였던 사람들로 이뤄졌는데, 이들이 레인보우에 있었던 시기는 각각 달랐고, 유럽에서 투어를 몇 번 돌다 해체되었다. 이후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멤버들의 갈등으로 엄청 싸워서 본인은 탈퇴를 했고, 남은 멤버들은 조 린 터너를 대신할 보컬로 두기 화이트와 그레이엄 보넷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아 결국 밴드가 해체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개성과 성격이 엄청 쎈 멤버들을 다뤘던 리치의 카리스마를 알 수 있는 부분.[41] 참고로 리치 블랙모어는 보기보다 미신같은걸 꽤 잘 믿는 사람이다. 밑에서도 서술되지만, 딥 퍼플 시절에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베이시스트 로저 글로버와 싸우는 일도 있었다.[42] 이 부분은 후배인 잉베이 말름스틴에게도 계승 중이다. 잉베이도 오랫동안 메탈만 연주하다가 시골 같은데서 포크송을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43]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고 나서 베켄바워와 독일 축구의 팬이 되었었다고 한다.[44] 2015년 7월 파리에서 한 인터뷰에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파리 생제르맹을 언급하기도 하였지만, 인터뷰 장소가 파리고,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였던 지라 립서비스라고 봐도 된다. 어쨌건 축구에 열광하며 최근의 축구도 보고 있긴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즐라탄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고, "그 파리에서 뛰고 있는 스웨덴 애." 이렇게 말했다.[45] 이 장면은 딥 퍼플 'Anthology' 앨범의 커버로 사용된다.[46] 그리고 이런 기타부수기는 후계자 잉베이 말름스틴이 그대로 따라한다. 리치 본인도 똑같이 기타부수기를 한 지미 헨드릭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47] 딥퍼플 재결합 당시의 공연때도 무대위에 올라와 찍고잇는 카메라맨에게 옆에있던 플라스틱 음료수컵을 던지고 "꺼져!"라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48] 어떤 곳이냐면 영화 007 스카이폴에 나오는 스카이폴 주택 같은 곳이었다.[49] 정작 에디 밴 헤일런이 어린 시절 리치 블랙모어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싸인을 요청했을 때, 욕설을 섞어가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50] 스티브 모스는 리치 블랙모어에 대해 이야기할때 오른손에 리듬감과 박자감이 있어야 제대로 칠 수 있어야 해서 본인도 연습하기 어려웠다고 한다.[51] 더욱 대단한 것은 70년대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코카인마약으로 취급받지도 않던 시대였을 정도로 마약 복용이 만연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리치 블랙모어는 로버트 프립, 프랭크 자파와 더불어 마약을 혐오했던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여담으로 세 사람은 음악적으로 완벽주의자라는 점까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