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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E 게오르그 솔티 경 Sir Georg Solti | ||
<colbgcolor=#00001b><colcolor=#fff> 본명 | <colbgcolor=#ffffff,#2d2f34>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 | |
국적 | 헝가리 | 독일 | 영국 | |
출생 | 1912년 10월 21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1997년 9월 5일 (향년 84세) | |
프랑스 앙티브[1] | ||
작위 | 기사[2] | |
직업 | 지휘자 | |
학력 | 부다페스트 프란츠 리스트 국립 음악 아카데미 |
[Clearfix]
1. 개요
Sir Georg Solti, KBE.[3] 1912년 10월 21일~1997년 9월 5일
헝가리 출신의 명지휘자.[4]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로열 코벤트가든 오페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1953년에 독일(서독) 시민권을, 1972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헝가리 본명은 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이다.[5]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도 퍼스트 네임은 George가 아닌 독일식 Georg를 계속 이름으로 사용했다. 실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죠지 숄티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고, 게오르그 솔티에 가깝게 발음해주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게오르그 솔티라고 표기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발음 문단을 참고한다.
그래미 어워드 역대 최다 수상자로 유명하기도 한데, 총 31회의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장르의 뮤지션 팬들이 검색하다가 곧잘 접하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주페, 경기병 서곡 (rec. 1959) | 버르토크,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rec. 1963) |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독실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유대인이었다. 어린 시절은 유복했던 듯 하나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애국심에서 전쟁국채에 투자했지만 전쟁에서 패하면서 국채의 가치는 떨어졌고 그의 아버지는 가난해졌다. 그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는데, 부유한 삼촌들 덕분에 그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에르노 포도르 음악원을 거쳐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 편입하였다. 버르토크(Béla Bartók), 베이네르(Weiner Leó), 도흐나니(Ernő Dohnányi) 등에게 사사했다. 10대 시절 지휘에 매력을 느껴 지휘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 10대 중반에는 피아노 레슨으로 스스로 학비를 보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연습을 게을리하는 학생이었고, 열심히 연습하라는 주변의 요구에 대해 왜 열심히 해야 하냐고 반문하였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지휘 수업을 들었지만 선생님의 자질에 불만을 품었고 수업에 만족하지 못했다.
1930년 아카데미를 졸업하였고, 1930년대에 헝가리 국립가극장(Hungarian State Opera)에서 조수(répétiteur)로 일했다. 1932년 요제프 크립스가 있던 독일 카를루스에 극장로 이적했고 이무렵 성을 슈테른에서 솔티로 개명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헝가리로 돌아왔다. 1937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잘츠부르크에 독감이 유행하던 바람에 조수(répétiteur) 2명이 연이어 일을 못하게 되었고, 대타로 급하게 투입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조수 경력 덕분에 그의 몸값은 올랐고 몇개월 후에 헝가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하지만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독일은 물론이고 헝가리에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헝가리 역시 반대유인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중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던 런던에 지휘자난이 생기자 기회를 얻어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러시아 발레를 지휘하며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실랄한 혹평을 받았다. 당시 타임지는 "그의 지휘는 너무 폭력적이다.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하고 음악을 학대하여 섬세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평했다. 이후 런던에서 더이상 지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런던에서 일자리가 끊긴 후 토스카니니에게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부탁할 목적으로 스위스 루체른으로 떠났다. 하지만 실패하였고, 막스 히르겔이라는 테너가 바그너 트리스탄을 연습하는 조수로 채용되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스위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돈벌이를 했다.
하지만 종전 후에는 완전히 팔자가 뒤바뀌었는데 독일의 거장지휘자들이 대거 연주 금지된 덕분에 지휘 경력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일거에 유서깊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연주금지가 풀린 전임자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귀환했고, 솔티의 인기는 떨어졌다.
한편 1946년 그는 '반주 피아니스트'로 DECCA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6] 하지만 그는 데카사에 지휘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지휘로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을 녹음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솔티 본인도 훗날 매우 서투른 연주였다고 평했다. 그러고 한동안 지휘자로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2년 후 아마도 헝가리인이라는 이유로 헝가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하이든 교향곡 103번 녹음 세션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당시 녹음 세션을 맡게 된 신예 프로듀서 존 컬쇼는 솔티의 지휘를 대단히 좋게 평가했다. 당시 DECCA가 독일 관현악 레퍼토리를 위해 섭외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한스 크나퍼츠부슈, 에리히 클라이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지휘자들은 매우 권위적이었던 반면에 지휘자로서 이제 막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던 솔티는 프로듀서에게 매우 고분고분한 지휘자였다. 컬쇼의 자서전에 따르면 컬쇼는 프로듀서가 지휘자를 장악하고 컨트롤해야 한다고 믿었던 인물이며, 실제로도 녹음 스튜디오에서 여러 거장 지휘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심리전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1952년 결국 뮌헨 국립가극장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시립 가극장(Frankfurt City Opera)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숄티는 9시즌 동안 지휘했다. 한편 조국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솔티는 앞으로 평생 헝가리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1953년에 서독 시민권을 취득했다.
1950년대 후반 DECCA에서는 고참 프로듀서들이 은퇴하면서 존 컬쇼가 메인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랐고, 컬쇼가 강력하게 선호했던 솔티가 큰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50년대말부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여러 녹음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진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음반계에 큰 이정표를 세웠고 게오르그 솔티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영국의 로열 코벤트 가든 오페라(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재직기간 동안 코벤트 가든 오페라의 명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솔티는 작위를 받기 몇 개월 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에 20년 넘게 있었지만 그는 시카고로 이사하지 않고 런던에 자택이 있었으며 시카고에서는 호텔에만 머물렀다.[7] 1971년에 코벤트 가든 오페라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극장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기적으로 지휘했다.
1969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22년간 장기재직했다.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 시절은 솔티에게나 시카고 심포니에게나 리즈 시절이라 할 수 있는데, 솔티는 나중에 상임지휘자에서 스스로 물러날 즈음에 이르러 시카고 심포니는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했다. 다만 시카고 심포니 재임 초기에는 코벤트가든 등 기존에 예약되어 있던 스케줄 때문에 솔티가 시카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는데 이 때문에 수석객원지휘자직을 신설하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영입하였다. 솔티는 일부러 자신과 다른 스타일의 지휘자인 줄리니를 선택하여 오랜 설득 끝에 그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줄리니는 솔티와는 대조적인 스타일의 지휘자였기 때문에 이 영입은 시카고 심포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솔티는 줄리니의 후임으로도 자신과 대조적인 성향의 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방대한 양의 음반녹음을 남겼다. 솔티는 시카고에서 재임기간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직을 맡기도 했지만 교향악, 관현악 음반 녹음은 거의 전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이루어졌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2회 녹음했고, 이외에도 주요 레퍼토리를 시카고 심포니와 전집 단위로 녹음했다. 경쟁 음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향악 지휘자 라인업이 빈약했던 데카사에서 솔티는 70년대 이후 데카의 간판인 관현악 지휘자가 되어 정통 레퍼토리들을 전곡단위로 녹음했다.
오페라는 오페라에 익숙한 코벤트가든이나 빈 필 등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와 녹음했지만 1976년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녹음에 시카고 심포니를 처음 기용한 후 바그너나 베토벤 피델리오, 베르디 오텔로 등 관현악의 비중이 큰 오페라 녹음에서 시카고 심포니를 기용했다. 1991년 숄티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집권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상임지휘자직을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1972년에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나 악단 경영진측과 갈등 끝에 1975년에 사임했다. 나중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렌보임과 정명훈이 잇달아 곤욕을 치르고 물러났을 때 솔티는 "파리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바렌보임과 정명훈을 두둔하기도 했다. 특히 솔티의 후임으로 파리 오케스트라에 취임하여 장기간 재임했던 바렌보임의 융화력을 높이 사서 나중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후임에 앉히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았다. 런던 필 재임기간 동안에는 에드워드 엘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추가하였다.
1983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빙되어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지휘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1976년 야심차게 준비했던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자[8] 차기 프로덕션의 지휘자로 솔티를 섭외했다. 솔티는 바이로이트측에 여러가지 까다로운 요구를 했는데, 특히 연출 측면에서 과감하게 솔티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연주의 연출로 제작하기까지 했다.
또 솔티는 오케스트라의 호른 파트를 시카고 심포니 단원들로 대체하려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호른수석인 베를린 필의 게르트 자이페르트 등이 반발하여 역풍을 맞기도 했다. 또 타이틀 롤인 지크프리트역의 라이너 골트베르크(Reiner Goldberg) 등과도 갈등을 일으켰는데, 결국 골트베르크가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고 급히 만트레트 융(Manfred Jung)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준비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던 1983년 링은 프리미어 이후에 역시 논란에 휩싸였는데, 특히 피터 홀의 보수적인 연출은 보수적인 관객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진보적인 평론가들에게는 혹평을 받았다.[9] 또 교체된 타이틀롤인 만트레트 융에 대해서도 혹평이 있었다. 솔티의 지휘 자체는 직전 프로덕션의 피에르 불레즈가 워낙 말아먹은 바람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기대했던 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다는 평이었다. 결국 1983년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바이로이트 출연이 되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객원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4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미국의 젊은 음악도들을 위한 "Solti Orchestral Project"를 진행했고 이는 동영상과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10]
1991년에는 모차르트의 타계 200주기 당일인 12월 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레퀴엠 연주를 지휘했다. 앞서 카라얀, 번스타인이 타계한 후라서 생존해 있던 대지휘자들 가운데 명성이 높았던 솔티가 이 세기의 음악사적 이벤트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1995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1997년에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3. 데카와의 파트너쉽
영국 클래식 레이블 데카와 평생에 걸친 파트너쉽을 지속했다. 데카와 계약을 맺은 것은 여러가지로 숄티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데카가 처음에 그와 계약을 맺은 것은 유명 연주자나 성악가의 반주자로 기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피아노 반주자는 음반 표지에 이름이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솔티는 데카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일하면서 컬쇼 등의 프로듀서에게 자신의 지휘 열망을 열심히 피력했다. 이를 계기로 솔티는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당시 데카는 거액을 들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독점 계약을 맺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 필의 주요 지휘자들은 대부분 DG 소속이었다. DG 소속이었던 칼 뵘은 빈 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였고 빈 필과 무척 녹음하고 싶어했지만 데카와 빈 필의 독점 계약 때문에 1970년 이전에는 녹음을 할 수 없었다. 숄티는 데뷔 초창기에 아직 빈 필의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받은 적 조차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빈 필과 가장 많은 녹음 세션을 갖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11] 하지만 초기 녹음 세션에서 빈 필을 통솔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숄티의 공격적인 해석과 비전통적인 지휘법에 대해 특히 노장 단원들의 반발이 있었고 일부 단원들은 녹음 세션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때문에 한동안 숄티의 빈 필 녹음세션은 비정예 멤버로 꾸려졌다.
1958년부터 1965년에 걸쳐 진행된 숄티와 빈 필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세계최초로 스테레오로 녹음[12] 된 니벨룽의 반지 전곡 음반사에 남을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64년의 신들의 황혼 세션은 BBC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 데카의 놀라운 녹음기술과 화려한 성악진 등으로 엄청난 화제와 성공을 거둔 녹음 프로젝트였다.
이 녹음은 원래 한스 크나퍼츠부슈를 기용하려 했으나 크나퍼츠부슈가 워낙 녹음에 비협조적인 지휘자였기 때문에 결국 이 녹음 세션은 숄티에게 돌아왔다.[13]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휘자 경력이 일천했던 숄티가 이런 대작 녹음에 기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상당수 존재했는데, 경쟁사인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이 녹음이 50장도 팔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4]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반지 세트는 출시 후 현재까지 약 1,800만장이 팔려, 클래식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버르토크 녹음이 유명하다.
4. 이름의 표기와 발음
일단 그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퍼스트 네임은 Georg이며, George(조지)라는 철자를 사용한 적은 없다.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로서나,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도 언제나 그의 이름은 Georg였다.그가 영국 시민권자인데 왜 독일식인 게오르그로 발음하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다. 일단 게오르그는 독일식 발음이 아니다. 독일식 발음 표기는 게오르크이다. 참고로 솔티는 1953년 독일(서독) 시민권을 취득했고, 이후 1972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그가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독일 국적을 포기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영국 정부에서는 1948년 이후 복수 국적(dual citizenship, also known as dual nationality)을 전면 허용하고 있다. #
영미권 클래식 라디오 진행자를 위한 발음 가이드에서는 게오르그 숄티라 나와 있다. 다만 괄호 속에 조지 숄티를 표기해 놓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미권에서는 주로 친숙한 조지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조지 숄티라고 발음한다. 낙소스 비디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에서도 그 발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게오르그 솔티라는 표기가 굳어져 왔다. 고 클래식 음악가 정보에도 게오르그 솔티 혹은 숄티를 사용한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는 조지 숄티라고 되어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에 따라 게오르그 솔티라고 읽을 때도 있고 조지 숄티라고 읽을 때도 있다. 국내 로컬/라이선스 기획 박스셋의 이름은 솔티시모이다. 여기서는 "게오르그 솔티"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게오르크 솔티라는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를 쓴다.
S에 /ʃ/ 발음이 적용되는 이유는 헝가리어로 된 성씨기 때문이며, 이것이 솔티가 되려면 헝가리어 특성상 Sz가 되어야 한다. 예) George Szell(조지 셀). 여기에 대한 설명은 헝가리어 문서에 자음 문단에도 있다. 그래서 각 국가 위키피디아에서 이름에 대한 IPA표기는 없어도 성에 대한 IPA표기가 있는 것이다.
5. 기타
다른 유명 지휘자들도 그렇지만, 솔티 역시 자신이 맡은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엄격함을 주문,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그의 특징과 대머리를 빗대어 '괴성을 지르는 해골'(screaming skull)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경화의 젊었을때 성질이 꽤 한가락 한 모양이라 여러 지휘자, 피아니스트들하고 수도 없이 싸웠다고 직접 말한 적도 있는데 그중 솔티와의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리허설 중에 솔티가 정경화에게 "거길 왜 그렇게 연주하느냐" 라는 말에 정경화가 욱 해서 대드는 바람에 욕설이 오고가며 싸웠다고 한다. 서로가 한 말은 "한국잡년", "빌어먹을 독재자" 등.
지옥의 묵시록의 삽입곡으로 사용된 발퀴레의 기행이 DECCA 레이블에서 발배된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이다.
동시대의 유명 지휘자들이 대부분 메이저 레퍼토리는 암보 연주를 선호했지만 솔티는 반드시 악보를 놓고 지휘했다. 이 밖에 악보를 꼭 지참하는 유명 지휘자로는 마리스 얀손스와 리카르도 무티 등이 있다.
[1] 휴가 중 갑자기 사망하였으며, 묘역은 부다페스트에 있다.[2]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 2등급이므로 기사 칭호(Knighthood)가 훈장 서훈과 동시에 붙는다. 사망하기 세달 전 서훈명단에 올랐다. 유명인들이 받은 기사작위는 대부분 'Knight Bachelor'라는 것인데, KBE는 이보다도 한단계 격이 높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3] 1971년 명예 KBE훈장을 받았고, 1972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정식 KBE로 전환되어 기사작위도 같이 받았다.[4] 헝가리는 저명한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내로라 할 명지휘자들을 배출했는데, 솔티의 선배격 지휘자들로는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유진 오먼디, 안탈 도라티 등이 있다. 이 중 헝가리 국적을 유지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저마다 세계적인 입지를 다졌다.[5] 숄티라는 이름은 헝가리의 도시인 숄트에서 나왔다. 편의상의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6] 이 당시 데카에서 발매된 녹음들 중 게오르그 쿨렌캄프의 반주를 맡아서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이 남아있다.[7] 카라얀이 34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도 베를린에서는 호텔에서만 머물렀던 것과 비슷하다.[8]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하고,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은 엄청난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는데 토마스 만 등의 해석을 근거로 근대시대로 설정한 셰로의 연출은 모순점으로 논란이 일었다. 때문에 이 프로덕션은 프리미어 이후 연출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이 작품을 처음 지휘해봤던 불레즈의 지휘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불레즈의 지휘 역시 프리미어 이후 템포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프로덕션은 마지막해인 1981년에 녹음, 녹화되어 음반 및 영상물로 출시되었다. 많은 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평가는 다소 나아진 편이다.[9] http://www.wagneropera.net/RW-Performers/Georg-Solti.htm.바이로이트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 중 하나로 기록됨., The disastrous Peter Hall-Georg Solti 1983 Bayreuth Ring is an exception. But it was so badly thought out, mishandled, and mismanaged on every front that it were better had it never been attempted.. 피터 홀과 게오르그 솔티의 재앙과도 같은 반지. 다시는 이런 시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함. http://www.nytimes.com/1983/08/01/arts/opera-premiere-of-solti-hall-gotterdammerung.html 숄티의 프로덕션은 성공적이지 못해..가까스로 막을 내림[10] 해당 음반은 데카에서 발매된 "The Carnegie Project". 다만 일회성 기획으로 끝나서 아쉬운 점이 없지않아 있다.[11] 한국의 지휘자 정명훈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정명훈 역시 정식으로 빈 필의 정기연주회에 초빙된 적은 없지만, DG가 아시아시장을 위해 그를 밀고 있었기 때문에 빈 필과 녹음 세션을 가질 수 있었다.[12] 세계 최초의 스테레오 반지 녹음은 아니다. 세계 최초는 55년도 카일베르트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실황. Testament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솔티 반지는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 정도 되겠다.[13]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크나퍼츠부슈는 녹음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프로듀서 존 컬쇼가 결사반대했다.[14] 월터 레그는 일부러 녹음 세션이 진행되던 비엔나로 가서 데카 스태프들과 우연히 만난 척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