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한스 크나퍼츠부슈 Hans Knappertsbusch | |
본명 | 한스 크나퍼츠부슈 Hans Knappertsbusch |
출생 | 1888년 3월 12일 |
독일 제국 엘터펠트(현 독일 부퍼탈) | |
사망 | 1965년 10월 25일 (77세) |
서독 뮌헨 | |
국적 | 독일 |
직업 | 지휘자 |
신장 | 193cm |
활동 | 1910년 ~ 19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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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투르 니키슈도 크나퍼츠부슈만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압도적으로 연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이드리언 볼트, 크나퍼츠부슈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 시절에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고
에이드리언 볼트, 크나퍼츠부슈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 시절에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고
독일의 지휘자. 느릿한 템포로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준 고풍스러운 연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와 안톤 브루크너 등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지팔 1막 전주곡 연주. 1962년 8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팬들로부터 전설적인 명연으로 회자되고 있다. |
2. 일생
1888년 3월 12일 독일 엘버펠트에서 알코올 증류회사를 운영하던 구스타프 크나퍼츠부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고등학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부모는 한스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못해 대학교 졸업 논문의 소재를 파르지팔의 쿤드리로 삼을 정도였으며, 이 논문으로 크나퍼츠부슈는 뮌헨 대학교 철학 박사학위까지 따게 된다. 이후 쾰른 음대에서 프리츠 스타인바흐에게서 지휘를 사사했으나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 그러나 이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들인 지크프리트 바그너와 일하면서 한스 리히터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1918년 5월 엘렌 셀마 뉴하우스(Ellen Selma Neuhaus)와 결혼하게 되고,[1] 1922년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 1925년에는 첫째 아내와 이혼하고, 1926년에는 마리온 폰 라이프치히(Marion von Leipzig, 1888~1984)와 결혼하여 죽을 때까지 같이 살게 된다.1933년 나치당이 집권했으나, 크나퍼츠부슈는 나치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사상에도 동조하지 않았고,[2] 결국 1936년에는 뮌헨(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계약이 깨지고 독일에서 추방당해 연주를 금지당한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빈 국립 오페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빈 음악축제와 잘츠부르크에서도 연주 활동을 시작하였고, 1944년 '신의 축복을 받은 자' 리스트에 등재되면서 군인 징집을 면제당하게 된다.
종전 후에는 반유대주의자 누명을 쓰고 2년 동안 지휘 활동을 금지당했지만,[3] 1947년부터 다시 뮌헨에 돌아와 지휘했고,[4] 꾸준히 빈과 바이로이트에서 객원 지휘를 한다. 1951년에는 전쟁이 끝난 후 처음 열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했다.[5] 이후 크나퍼츠부슈는 1951년부터 죽기 전 해인 1964년까지 거의 모든 해에[6]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여했다. 특히 파르지팔 연주는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1951년과 1962년에 녹음한 파르지팔은 오늘날에도 전설적인 명반으로 꼽힌다.
1961년 브뤼셀에서 위 수술을 받은 뒤에는 몸이 쇠약해져 의자에 앉아서 지휘해야 했으며, 1964년 가을에는 넘어져서 대퇴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크나퍼츠부슈는 바로 다음 해인 1965년 10월 25일 향년 77세로 사망한다.
3. 기타
-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연주할 때 제자들의 편집으로 처음 출판된 버전으로만 연주하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교향곡 9번 녹음은 브루크너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가 편집한 초판본으로 녹음했다.[7] 그러나 사실 이미 1930년대에 브루크너 교향곡들의 원전판이 출판되어 브루크너 교향곡들의 초판본들은 크나퍼츠부슈가 현역이던 상황에도 거의 연주되지 않던 상황이었는데, 크나퍼츠부슈가 브루크너 교향곡을 연주할 때 초판본만 고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리허설을 매우 싫어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며,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일례로 어느 연주회 전에 리허설을 했는데 그날 연주가 엉망진창이여서 "왜 리허설 같은 걸 해서 이렇게 된 거냐고..."란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있다.
- 지휘자가 된 초반엔 무대나 지휘대에 서는 것을 매우 꺼렸다. 당시 캐리커쳐가 생겼을 정도인데, 정확히는 무대를 싫어했다기보다는 무대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에 가까웠다.[8]
-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1951년에 영국의 음반사인 데카에서 존 컬쇼를 필두로 한 녹음진이 방문했고, 이들은 이 연주에 감명받아 1951년 8월 4일 연주된 '신들의 황혼' 부분[9]의 녹음 편집을 끝냈지만, 이 당시 잡힌 음질에 경악했다고 하며, 거기에 계약 문제 때문에 이 녹음은 크나퍼츠부슈가 죽은 지 40년 가까이 지난 2003년까지 음반으로 나오지 않았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위시한 후배 지휘자들 사이에서 악보를 다 외워놓고는 지휘대에 악보를 놓지 않은 채 지휘하는 것이 유행할 무렵, "왜 당신은 항상 지휘대에 악보를 놓고 지휘하느냐?"는 질문에 크나퍼츠부슈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한다. "난 악보를 읽을 줄 알거든."
[1] 1년 뒤에 그들은 아니타(Anita)라는 이름의 자식을 낳게 되나, 안타깝게도 아니타는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크나퍼츠부슈는 다른 자식을 두지 않은 상태로 평생을 보내게 된다.[2] 아돌프 히틀러도 크나퍼츠부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크나퍼츠부슈의 템포가 너무 느리다며 '그 군악대장'이라는 말로 폄하했다고 한다.[3] 실제로 크나퍼츠부슈는 유대인과의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4] 이때 무명의 유대계 헝가리인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를 후원해줬는데, 이에 대해 훗날 솔티는 당시의 크나퍼츠부슈를 '아버지' 같았다고 회고했다.[5] 이 공연의 오프닝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열었다.[6] 1953년 제외[7] 그러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뢰베의 편집은 사실상 요즘말로 원작파괴 수준이었기 때문에 크나퍼츠부슈가 죽은 후에 뢰베판을 녹음한 지휘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8] 이는 푸르트벵글러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푸르트벵글러는 무대에 서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더 높아졌다고 한다.[9] 지크프리트는 테너 베른트 알덴호프(Bernd Aldenhoff, 1908~1959), 브륀힐데는 전설적인 바그너 소프라노 아스트리드 바르나이(Astrid Varnay, 1918~2006)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