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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윈터보텀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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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대 |
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월터 윈터보텀 경 Sir Walter Winterbottom, CBE | |
출생 | 1913년 3월 31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랭커셔주 올덤[1] | |
사망 | 2002년 2월 16일 (향년 88세) 잉글랜드 서리주 길퍼드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3cm | 체중 76kg | |
직업 | 교육자, 군인[2] 축구선수 (하프백[3] / 은퇴) 축구감독 스포츠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로튼 아마추어스 (미상) 모슬리 FC (미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36~1938) 첼시 FC (전쟁 당시 객원 신분으로 임시 출장) |
감독 | 잉글랜드 대표팀 (1946~1962) 영국 올림픽 대표팀 (19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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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감독.2. 생애
2.1. 초기 생애, 선수 시절
잉글랜드 올덤에서 태어난 월터 윈터보텀은 방직기 기술자 제임스의 외아들이었다. 12살에 윈터보텀은 올덤 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그 곳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뛰어난 학업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1933년 체스터 다이오세선 티쳐스 트레이닝 칼리지(현 체스터 대학교) 를 1등으로 졸업하여 올덤 알렉산드라 로드 스쿨에서 교사로 재직했다.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윈터보텀은 로튼 아마추어스와 모슬리 FC에서 아마추어 축구를 하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눈에 띄게 되었다. 윈터보텀은 1936년에 파트타임 프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계약하면서 교직 생활과 선수 생활을 병행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치른 첫 시즌(1936/37)에서 그는 2부 리그 21경기, FA컵 2경기에서 하프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척추 이상 때문에 다음 두 시즌 동안 그는 거의 출전할 수 없었고 나중에 이 증상은 신경성 척추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동안 윈터보텀은 리즈&카네기 트레이닝 칼리지(현재의 시티 오브 리즈 트레이닝 칼리지)에서 공부하기 위해 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체육학 전공으로 졸업하자마자 강사 자격을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윈터보텀은 영국 공군의 중령으로 항공부에서 체육 강사 양성교육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때 윈터보텀은 첼시에서 객원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런던의 문법학교에서 FA 코칭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축구협회의 비서였던 스탠리 루스는 FA 위원회를 설득해 윈터보텀을 축구협회의 초대 축구지도자 양성책임자로 임명하면서 잉글랜드 최초의 대표팀 감독도 겸임시키자고 제안했다.
2.2. 축구 감독 시절의 기록과 업적
2.2.1. 기록
윈터보텀은 잉글랜드의 첫 번째, 최연소(34세) 그리고 최장기 감독 기록(16년)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역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들 중 대표팀 감독 경력 이전에 축구팀 감독 경력이 아예 없는 유일한 감독이다.2.2.2. 국가대표팀
윈터보텀이 16년간 지휘봉을 잡았던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139전 78승 33무 28패, 383득점 196실점을 기록했다. 이 기간의 영국내 대항전에서 잉글랜드는 6패만을 기록했다. 잉글랜드는 13시즌(우승 7회, 공동 우승 6회)을 챔피언으로 마쳤다.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4차례 모두 예선전을 치렀고, 8강전까지 두 차례 출전하여 예선전까지 모두 28경기를 치렀으며, 15승 7무 6패, 75득점 35실점을 기록했다. 그의 시대 동안 주목할 만한 승전은 1947년 포르투갈전에서의 10-0, 1948년 이탈리아전 4-0, 1956년 브라질전 4-2, 1961년 스코틀랜드전 9-3 승리 등이 있다. 패전은 1950년 월드컵에서 미국에 0-1, 1953년 헝가리에 3-6[5] 등이 있다.
2.2.3. 대표팀 시스템 정비
윈터보텀은 잉글랜드 대표팀을 감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선수 선발권은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선정위원회에게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경험과 지식은 선발자들에게 점점 더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 알프 램지가 윈터보텀의 잉글랜드 대표팀 후임 감독으로 부임할 때 그는 감독이 선발에 대한 독점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협회를 설득했다. 윈터바텀은 재임 기간 내내 축구 협회에 유럽 대륙과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잉글랜드를 추월하고 있으며 영국 축구는 변화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16년간 활약한 그는 현대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표팀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잉글랜드는 그가 물러난 지 4년 만인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그의 혁신에는 국가대표 리저브팀, 연령 제한을 둔 유소년 대표팀 제도 도입이 포함되었다. 그는 청소년 대표팀이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기 전의 어린 유망주들에게 국제 축구에서의 연속성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2.4. FIFA 월드컵
윈터보텀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FIFA 월드컵 본선에 4회 참가했는데 이는 서독의 제프 헤어베어거와 헬무트 쇤 감독만이 가진 기록이다.[6] 잉글랜드는 1950년에 처음으로 월드컵에 진출했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브라질 토너먼트 진출 자격을 얻었다.[7] 그들은 칠레에 2-0으로 이겼지만, 미국에 0-1, 스페인에 0-1로 져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윈터보텀은 1954년 영국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월드컵 출전기회를 얻었고 조별 예선은 통과했지만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에 졌다.1958년, 잉글랜드는 지역예선에서 아일랜드와 덴마크를 제치고 스웨덴에서 열리는 본선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총 전적은 17전 16승 1패. 그러나 잉글랜드는 대회 개막 4개월 전에 뮌헨 비행기 참사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요 선수들인 로저 번, 토미 테일러, 던컨 에드워즈를 잃었다.[8] 그들이 없이도 잉글랜드는 소련, 브라질,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비겼지만 8강 플레이오프에서 소련에 패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8강에 올랐지만 최종 우승국이 될 브라질에게 졌다.
2.2.5. 후학 양성
윈터보텀은 잉글랜드 대표팀의 초대 감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영국 축구계에 가장 공헌한 점은 코칭스태프의 육성이다. 윈터보텀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래의 코칭스태프와 감독을 키워내는 일이 대표팀 감독직보다 더 중요하다고 확신했다.1946년 그가 축구협회에 입성했을 때 다른 구단 경영진, 감독, 선수들은 윈터보텀이 주장하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냉소적이었지만 윈터보텀은 코칭에 대한 열정과 코칭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 슈롭셔 주 릴레샬의 여름 거주 코스로 국가 코칭 계획을 세웠고,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협회에서 주관하는 지도자 예비과정과 심화과정 강좌를 수강하고 시험을 치르도록 설득했다. 진행은 순조로웠고 그가 계획한 일들은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이들은 강의를 수강한 후 학교 축구 클럽에서 경험을 쌓았고 이후에는 유소년 클럽에서 시간제 코칭스태프로 발전했다. 그는 빌 니콜슨, 돈 하우, 앨런 브라운, 론 그린우드, 데이브 섹스턴, 말콤 앨리슨, 조 머서, 빅 버킹엄, 지미 힐, 바비 롭슨과 같은 젊은 코치들을 그의 주위에 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 클럽 감독들의 세대가 교체되고 이들이 굵직한 경력들을 추가하자 이런 지도자 연수와 자격 취득 과정에 긍정적인 감독들이 많아졌다.
윈터보텀의 지도자 연수 코스는 프로 선수, 심판, 학교장, 클럽 트레이너, 남학생, 청소년 지도자로 확대되었다. 릴레샬 외에도 그들은 러프버러 칼리지, 카네기 칼리지, 비샴 애비, 버밍엄 대학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1947년에 300명이 협회 배지를 받았고 매년 자격을 갖춘 코치의 수가 증가했다. 그 강좌들은 엄청난 반응을 얻었다. 윈터보텀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동시대 축구의 선구자, 기술 사상가로 여겨졌고 강좌는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매니저들, 특히 론 그린우드와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다양한 수준의 팀을 거친 수제자 바비 롭슨에게 영감을 주었고, 결국 론과 바비도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2.2.6. 출판
윈터보텀은 또한 축구협회의 출판업무를 담당했다.축구협회 소식지의 발간이 1946년에 시작되었고 이것은 FA Bulletin로 발간되다가 나중에는 FA News로 바뀌었다. 축구 협회 연감은 1948년에 소년용 연감과 함께 함께 세상에 소개되었다.
1950년에는 최초의 축구이론 교육용 필름이 만들어졌다.
중요한 이정표는 최초의 현대 축구 코칭 매뉴얼인 윈터보텀의 책인 Football Coaching의 출판이었다. 이어서 <Skillful Football> ,<Modern Football> , <Football Training> 이라는 세 권의 책이 더 나왔다.
2.2.7. 스포츠 대중화 캠페인
1962년 윈터보텀은 축구협회를 사임하고 중앙 체육회(Central Council of Physical Recreation, CCPR) 총비서로 임명되었고, 2년 후 새로 결성된 스포츠 위원회(Sport of Council) 의장이 되었다. 그는 더 넓은 스포츠 무대에 올라 20세기 후반 영국의 스포츠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윈터보텀은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더 행복하며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16년 동안 그는 모든 운동을 위한 스포츠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 및 지방 정부로부터 스포츠에 대한 훨씬 더 많은 투자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잉글랜드의 경제가 조금씩 사양길을 걷고 있었지만 새로운 스포츠 시설이 건립되는 것에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 10년 동안 499개의 스포츠 센터가 지어졌고 524개의 새로운 수영장이 지어졌다. 그의 지도하에 스포츠 운영 기관들은 더 많은 전문 기관을 개발하고 더 많은 코치를 배출해 일반인들도 스포츠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올림픽 메달을 딴 젊은 엘리트 스포츠맨들과 여성들을 후원하기 위해 산업계로부터 기금을 모금하면서 스포츠 원조 재단의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윈터보텀은 유럽 평의회의 회원이었으며 스포츠 개발 위원회의 의장으로 캐나다와 유네스코가 스포츠 포 올 컨셉을 수용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2.3. 말년
1978년, 65세가 된 윈터보텀은 스포츠 위원회를 은퇴하고 스포츠에 대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영국 스포츠 장비 제조업체들이 외국 기업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영국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1979년 그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정부가 지역사회의 스포츠를 지원하는 것을 도왔다.1966년, 1970년, 1974년, 1978년 월드컵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연구단장을 지냈고, 1985년 Winterbottom Report를 제출했다. 1987-1989년에는 인공 스포츠 경기장 건립에 대한 자문 활동을 했다.
2002년 2월 16일, 윈터보텀은 암 수술 후 로열 서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2002년 3월 1일 추도미사가 엄수되었다.
3. 비판
언론인 데이비드 골드블라트(1930~ )는 잉글랜드 감독으로서의 윈터보텀을 평가하면서 "윈터보텀"이 잉글랜드 팀에 전술적 사고와 논의의 척도를 도입했다."고 썼다. 그러나 윌리엄 베이커는 윈터보텀이 "상류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에 훨씬 덜 영감을 받는 노동자 계급의 축구 선수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축구 저널리스트 브라이언 글랜빌은 "나는 그와 가까이 지냈지만 그는 썩어빠진 감독이다."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4. 기록
4.1. 대회 기록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46~1962)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47, 1948, 1950,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 1959, 1960, 1961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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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올덤[2] 1938~1946년[3] 5백 전술에서 전방 수비수 2명을 말한다[4] 1952 헬싱키 올림픽[5] 잉글랜드의 비영연방팀상대 웸블리 무패 기록은 이때 깨졌고 다음 해에 헝가리 원정을 가서 1-7로 대패했다.이것이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이다. 참고로 1951 ~1956년은 헝가리의 최전성기였던 소위 매직 마자르 시절로 그들은 이 6년간 1패밖에 하지 않았다.[6] 자국 대표팀이 아닌 타국 대표팀 감독 경력까지 포함하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가 6회로 월드컵 최다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7] 잉글랜드는 이전에 남아메리카에서 경기한 적이 없었다.[8] 바비 찰튼도 이 월드컵에 참가는 했지만 경기에 출전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