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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9:05:23

던컨 에드워즈

1957 Ballond'or
수상 2위 3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빌리 라이트 던컨 에드워즈
레몽 코파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던컨 에드워즈
Duncan Edwards
파일:Duncan-Edwards.jpg
출생 1936년 10월 1일
잉글랜드 웨스트 미들랜즈주 더들리 우드사이드
사망 1958년 2월 21일 (향년 21세)
서독 바이에른주 뮌헨
국적 영국 (잉글랜드)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수비수
신체 180cm, 82kg
유소년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2~1953)
프로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3~1958)
국가 대표 18경기 5골
출장/골 177경기 21골[1]

1. 개요2. 이야깃거리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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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유일한 선수였다. - 바비 찰튼[2]
격노의 바다 위에 있는 바위같은 선수 - 스탠리 매튜스[3]
던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량이 있습니다. 최전방에 있으면 그는 헤딩을 할 것이고, 하프백(미드필더) 자리에선 패스를 하겠죠, 상대 팀에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으면, 그는 바로 수비수로 변해서 마크를 할 겁니다. 우리 팀원들은 그의 플레이를 보고 스스로를 애송이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 톰 피니
코치님, 다음 경기는 3시에 시작하나요? - 던컨 에드워즈, 뮌헨 참사 당시 잠깐 의식이 돌아오고 지미 머피 코치를 보고 했던 말

1936년 10월 1일 생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활약한 영국의 축구선수. 버스비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맨유유스 선수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재능이였으며 만 21세의 나이에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어간 재능 있는 선수였지만[4][5] 불과 몇 달 뒤 뮌헨 참사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보름 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된 경기 영상도 없고 활약상은 물론이거니와 플레이 스타일이 어떤지도 알 수 없지만, 당대의 수많은 영국의 레전드들이 남긴 평가만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재능이었음을 짐작 가능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거라는 평가까지 받는 선수이다.

이 시대에는 장신으로 취급받는 180대의 신장에 빠른 스피드, 강한 체력[6], 양발 개인기, 뛰어난 수비력과 창의적인 패스 능력, 넓은 시야와 뛰어난 득점 감각까지 두루두루 갖춘 멀티플레이였다. 그야 말로 시대와 국가[7]를 잘못 타고난 천재.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공식 경기가 200여 경기에 달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신임을 받았고 또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주목할 부분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수비수였음에도 당시에 200경기 동안 20골 이상을 넣은 것인데, 수비 전술이 그렇게 잘 짜여있지 않고 절대적으로 공격에 치중했던 시기였긴 해도 수비수형 미드필더 겸 수비수가 이 정도 스텟을 쌓는 것은 평균 수준은 되는 것이다.[8]

공격형 미드필더, 공격수로 뛰었던 바비 찰튼이 재능 면에서 부러워했다는 것을 보면 동 포지션이 아님에도 그러한 열등감을 느낄만큼 축구에 대한 능력 자체가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쟁쟁한 공격수, 미드필더들을 제치고 발롱도르 3위에 선 것 또한 놀라운 성과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평가들을 뒷받침해줄 그의 플레이가 남지 않은 것이다.

2. 이야깃거리

3. 관련 문서



[1]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때때로 중앙수비수로 출전하던 선수가 이 정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최고의 레전드이자 발롱도르 위너.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선수.[3] 초대 발롱도르 위너.[4] 발롱도르 역사상 20대 초반의 나이에 발롱도르 순위권에 랭크된 선수는 기껏해야 호나우두, 메시, 호날두 등 당대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축구의 신 취급받는 선수들임을 감안한다면 수비수 내지 수비형 미드필더인 던컨이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5] 비슷하게 21살 무렵에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선정된적 있는 선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고 불리는 프란츠 베켄바워.[6] 이 시절 선수들은 흡연과 음주를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던컨은 금욕주의자라서 담배와 술을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7] 당시 영국은 축구 종가일 뿐, 축구 강국이라고 자처하긴 힘들었다. 본국에서 조차 축구는 제 1순위 인기 스포츠가 아니라 3순위에 불과했고, 전술은 30년 전 MW전술이 여전히 사용될 정도로 정체되어 있었다. 축구 인프라나 환경도 나쁘다 보니 소위 말하는 뻥축이 성행했고, 창조적인 플레이나 세련된 전술은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맷 버스비나 빌 섕클리 감독과 같은 이들이 명장으로 칭송받은 것도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좋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고, 파탄난 팀을 반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8] 오버래핑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스스로 그런 플레이를 했을 정도로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던 천재였다. 맷 버스비 감독도 대단한 게, 경기 중에 항상 즉흥적으로 공수 라인을 조정하여 던컨이 프리롤로 활개 칠 수 있게 해주었다.[9] 다만 당시 규정상 자전거 라이트를 안 켜서 벌금을 냈다고 한다.[10] 손흥민이 2019-2020시즌 번리전에서 골을 넣을때 70미터가 넘는 드리블을 하면서 제친 선수가 8명이다. 이보다 더 많았다면 단순히 역습으로 재낀게 아니라, 지공 상황에서 상대편 수비수를 갖고 놀았다고 봐야 한다. 다만 던컨의 이 기록은 프로에서 한 게 아니라 유소년 팀에 있을때 했던 거라 격은 떨어지는 편.[11] 따라서 현지에서 맨유를 부를 때는 '맨 유나이티드'나 '유나이티드'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