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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9:56:53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가나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8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BF_logo.svg.png

40대, 44대, 49대, 56대
파일: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9대, 12대
파일: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8대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9대, 21대
클럽
파일:발렌시아 CF 로고.svg

5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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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 ||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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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축구 감독
파일:external/imguol.com/06122013---coordenador-tecnico-da-selecao-brasileira-carlos-alberto-parreira-mostra-otimismo-antes-do-sorteio-dos-grupos-da-copa-1386345126828_1346x1920.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Carlos Alberto Parreira
본명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고미스 파헤이라
Carlos Alberto Gomes Parreira
출생 1943년 2월 27일 ([age(1943-02-27)]세)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시
국적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2cm
직업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감독 가나 대표팀 (1967)
플루미넨시 FC (1974)
플루미넨시 FC (1975)
쿠웨이트 대표팀 (1976~1977 / 수석 코치)
쿠웨이트 대표팀 (1978~1982)
브라질 대표팀 (1983)
플루미넨시 FC (1984)
UAE 대표팀 (1985~1988)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1988~1990)
UAE 대표팀 (1990~1991)
CA 브라간치누 (1991)
브라질 대표팀 (1991~1994)
발렌시아 CF (1994~1995)
페네르바흐체 SK (1995~1996)
상파울루 FC (1996)
메트로스타즈 (1997)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1998)
플루미넨시 FC (1999~2000)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00)
산투스 FC (2000)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01~2002)
SC 코린치안스 (2002~2003)
브라질 대표팀 (2003~2006)
남아공 대표팀 (2007~2008)
플루미넨시 FC (2009)
남아공 대표팀 (2009~2010)
행정 브라질 대표팀 (2012~2014 / 기술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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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감독.

브라질24년 만의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감독. 21세기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감독 중 마누 메네지스와 유이하게 선수 경험이 없는 감독이다. 또한 브라질 외에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을 이끌고 6번이나 월드컵을 경험한 감독이기도 하다.[1]

2. 지도자 경력

2.1.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파헤이라 감독이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31세 때인 1974년 브라질 리그의 명문 구단으로 리우데자네이루를 연고로 하는 플루미넨시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부터였다. 그는 그곳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은 뒤 1978년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쿠웨이트는 오일머니로 대대적인 축구 붐을 일으키고 있던 상태였는데 브라질 출신의 파헤이라를 감독으로 영입한 이유는 다가올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쿠웨이트를 사상 처음으로 본선에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가 감독 신분으로 처음 출전한 메이저대회는 바로 1980 아시안컵이었다. 이 때 그가 이끄는 쿠웨이트는 대한민국, 말레이시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B조에 속했는데, 쿠웨이트는 1차전에서 아랍에미리트와 1 : 1로 비기고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3 : 1로 꺾었으나 조 최강자였던 대한민국과의 3차전에서는 0 : 3으로 패하며 먹구름이 들어쳤다. 다행히 4차전에서 카타르를 4 : 0으로 꺾어 대한민국에 이어 조 2위로 4강에 오르게 되었고, 4강전에서는 이란을 만나 2 : 1로 꺾고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조별리그에서 대패당한 대한민국이있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우승을 점쳤으나 이번에는 쿠웨이트가 반대로 3 : 0으로 승리하면서 결국 우승을 따내 파헤이라는 쿠웨이트에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선사하게 되었다.[2]

이후 1982 스페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쿠웨이트는 대한민국,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3조에 속하게 되어 1차전에서 태국을 6 : 0으로 대파하고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4 : 0으로 대파했다. 한편, 조 내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대한민국도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2 : 1로 꺾고 2차전에서 태국을 5 : 1로 꺾으며 이제 대한민국과의 맞대결에서 최종예선 티켓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주심을 맡은 콜롬비아 국적의 심판이 시종일관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면서 대한민국은 편파판정 속에서 불리한 경기를 치르는 와중에 결국 후반 6분 대한민국은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쿠웨이트를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이태엽세트피스 찬스에서 완벽한 헤딩골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문제의 콜롬비아 심판이 수비수를 방해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후에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이태엽과 쿠웨이트 수비수는 몇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에 이태호가 나서서 항의했지만 주심은 도리어 이태호를 퇴장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일렀다. 결국 멘탈이 흔들린 한국은 끝내 종료 직전 한 골을 더 허용하면서 쿠웨이트가 2 : 0으로 승리해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서 쿠웨이트는 뉴질랜드,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한 조에 속하며 최종적으로 쿠웨이트가 4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하게 됐다.

본선에서 쿠웨이트는 축구종가 잉글랜드, 슈퍼스타 미셸 플라티니가 버티고 있던 프랑스 그리고 동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이들 사이에 낀 쿠웨이트는 그야말로 승점자판기 신세에 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쿠웨이트는 1차전에서 동유럽의 강호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1 : 1 무재배 승점 1점을 얻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쿠웨이트가 이 조에서 고춧가루 노릇을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2차전에서 쿠웨이트는 프랑스에 대패했다. 그냥 지기만 했으면 실력 차이려니 했겠지만 이 경기에서 쿠웨이트는 온갖 추태란 추태는 다 선보였다. 1 : 3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35분, 프랑스의 4번째 골이 터졌는데 쿠웨이트 선수들은 소련 출신 주심에게 관중들의 피리 소리를 주심의 휘슬로 착각하여 플레이를 정지시켰다며 어필했다. 그러나 소련 출신 주심은 쿠웨이트 선수들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양팀이 옥신각신하며 7분이 넘는 시간을 지연시켰고 이 때 쿠웨이트 축구협회장을 역임하던 셰이크 파하드 왕자가 그라운드로 난입, 선수단 철수 명령을 내렸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사태를 알아차린 소비에트 연방 출신 주심은 프랑스의 득점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렇게 어거지로 1골을 취소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종료 직전에 1골을 더 내줘 1 : 4로 대패를 당했다.[3] 이제 쿠웨이트가 2라운드(12강)[4]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상대인 잉글랜드를 무조건 이기고 체코슬로바키아가 프랑스를 잡아줘야 했다. 그런 다음에 또 체코슬로바키아와 득실 차를 비교해야 하는 매우 복잡한 경우의 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쿠웨이트가 잉글랜드를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고 결국 0 : 1로 아쉽게 패해 1무 2패 조 4위로 마감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쿠웨이트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했다.

2.2.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기

쿠웨이트 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한 이후 파헤이라는 다시 모국 브라질로 돌아와 1983년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는 브라질을 이끌고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했다. 이 때 브라질은 라이벌인 아르헨티나, 에콰도르와 함께 B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브라질은 약체 에콰도르를 상대로 1 : 0으로 승리했으나 2차전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맞붙었으나 그만 0 : 1로 지고 말았다! 3차전에서 다시 약체 에콰도르를 상대로 5 : 0 대승을 거두었으나 4차전에서 또 다시 아르헨티나에 0 : 0으로 비기고 말았다. 일단 승점에서는 앞서서 조 1위로 4강에 진출했으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페루와 쎄쎄쎄해서 결승 진출을 좌절시킨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던 브라질로서는 조 1위로 4강 진출에 성공한 것보다 아르헨티나를 못 이긴 걸 더 크게 보았다. 그 때문에 파헤이라의 인기는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그런데다 4강전 상대인 파라과이를 상대로도 쩔쩔매다가 1차전에서 1 : 1 무승부, 2차전에서 0 : 0 무승부를 거두었고 원정 다득점 우위의 원칙에 힘입어 겨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만난 결승전 상대는 30여 년 전에 자신들에게 마라카낭의 비극을 안겨준 장본인인 우루과이였다. 비록 30년이 훨씬 지난 일이라도 브라질인들은 우루과이에 패배하는 걸 매우 치욕스럽게 느꼈다. 파헤이라로서는 우루과이를 꺾고 우승을 하면 그나마 까방권이 주어질 수 있었으나.... 몬테비데오 원정 경기에서 그만 0 : 2로 무기력하게 참패했다! 뒤이어 사우바도르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도 고전 끝에 1 : 1로 비겨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준우승에 그친 것만으로도 브라질 축구 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지만 라이벌이었던 아르헨티나와 마라카낭의 비극을 안겨준 우루과이에 단 1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그 책임을 물어 해임당하고 말았다.

2.3. 플루미넨시 FC

브라질 대표팀 감독에서 해임당한 이후 파헤이라는 다시 플루미넨시 감독 자리에 취임했다. 그래도 아직 실력은 죽지 않았는지 1984년에 플루미넨시를 이끌고 브라질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것으로 역적 소리를 듣던 자신의 평판을 다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현재도 파헤이라 본인은 이 때의 리그 우승을 월드컵 우승보다 더 귀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2.4.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1985년 그는 아랍에미리트로 건너가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3년 동안 활동했으나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건너갔고 후임으로 같은 브라질 출신이자 1970 멕시코 월드컵 때 브라질에 우승컵을 선사했던 명장 마리우 자갈루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마리우 자갈루 감독이 이끄는 아랍에미리트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에서 졸전을 면하지 못했고 결국 1년 후인 1989년에 자갈루 감독을 경질해 버렸다. 자갈루 감독이 경질된 후 아랍에미리트의 끈질긴 요청 끝에 다시 복귀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아랍에미리트는 대한민국, 북한, 카타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풀 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1차전에서 아랍에미리트는 졸전 끝에 북한과 0 : 0으로 비겼고 2차전에서 중국을 상대로 2 : 1로 간신히 승리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대한민국과도 모두 무재배를 기록해 대한민국에 이어 2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본선에 오른 아랍에미리트는 서독, 유고슬라비아, 콜롬비아와 함께 D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아랍에미리트는 남미의 강호 콜롬비아에 0 : 2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2차전에서도 조 최강자 서독에 1 : 5로 대패했으며 3차전에 유고슬라비아한테도 1 : 4로 패배해 3전 전패를 기록해 대회 최하위로 탈락했다. 대회가 끝난 후 파헤이라는 아랍에미리트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했다.

2.5.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2기

아랍에미리트를 떠난 파헤이라는 다시 모국 브라질로 돌아와 1년 동안 상파울루를 연고로 하는 브라간티노 구단 감독을 역임했다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 때 그가 이끄는 브라질은 전통적인 공격 축구라는 팀 컬러를 지우고 좀 더 수비에 치중하는 4-4-2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공격은 거의 호마리우베베투 투톱에게 전담시키고 중원에는 브라질의 영원한 주장으로 불리는 둥가와 마우로 시우바를 중앙 미드필더에 세우고 왼쪽에 지뉴, 오른쪽에 마지뉴를 세웠는데 이 넷은 모두 수비 중심적인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브라질은 좀 더 안정적이고 실리적인 팀 컬러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파헤이라가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은 큰 무리 없이[5] 남미 지역예선을 통과해 1994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다. 본선에서 브라질은 소련이 해체된 후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러시아[6], 지난 대회 검은 돌풍의 주역 카메룬, 1990년 대회때 만났던, 북유럽의 강자 스웨덴과 함께 B조에 속했다. 브라질은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호마리우, 베베투 투톱을 앞세워 1차전에서 러시아를 2 : 0으로 꺾고 2차전에서 카메룬을 3 : 0으로 꺾어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3차전에서 스웨덴과 1 : 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브라질은 2승 1무에 6득점 1실점이라는 꽤 준수한 성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이후부터는 계속 고난의 행군이었다. 브라질의 16강전 상대는 개최국이자 축구 불모지로 불리던 미국이었다. 브라질의 낙승이 예상되었으나 예상 외로 브라질은 미국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7][8] 미국을 상대로 시종일관 고전을 면치 못했던 브라질은 후반 27분에 터진 베베투의 결승골로 겨우 1 : 0으로 제압해 8강에 올랐다. 월드컵 최다 우승국인 브라질이 축구보다 야구가 더 인기가 많은 미국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고작 1골 밖에 못넣고 겨우 승리했다는 사실에 브라질 축구 팬들은 크게 폭발했다.

8강전 상대는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였다. 과거 네덜란드와는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맞붙어 브라질이 0 : 2로 패한 바 있었다. 그 때 이후로 20년 만에 재회한 것이었다. 호마리우데니스 베르캄프의 대결이라 불리는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3 : 2 진땀승을 거두며 4강에 올랐다.[9] 이미 막강한 공격력은 다 쌈싸먹은 대표팀의 모습에 브라질 축구 팬들은 부글부글 끓었다.[10]

4강전 상대는 조별리그 3차전에서 맞붙었던 스웨덴이었다. 브라질은 스웨덴을 맞아서도 지루한 공방전을 이어갔고 방패의 대결이 아닌 방패와 방패의 대결만을 보인 끝에 후반 35분에 터진 호마리우의 결승골로 스웨덴을 간신히 1 : 0으로 제압하고 1970 멕시코 월드컵 이후 무려 24년 만에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가 이끄는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였다. 두 팀은 월드컵에서 3회 우승을 기록한 팀이었다. 즉, 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자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회 우승을 기록하는 팀이 되는 것이었다. 그 탓에 브라질 축구 팬들은 제발 결승전에서 만큼은 브라질다운 공격 축구를 원없이 쏟아 부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죽어도 수비축구를 버리지 못했던 파헤이라는 팬들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했다. 애초에 이탈리아는 빗장수비라는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A급 킬러의 확실한 역습 한 방으로 승리를 따내온 팀이었기에 브라질을 맞아서도 수비적인 전술을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브라질 역시 삼바 리듬을 연상시키는 공격 축구는 배제하고 수비적으로 내려 앉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경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방패와 방패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브라질의 공격수였던 호마리우베베투 투톱은 모두 이탈리아의 수비에 가로막혔고 이탈리아의 공격수인 로베르토 바조 또한 브라질의 수비에 막혀 신통치 못했다. 결국 정규시간 및 연장전을 포함한 120분이 흐르도록 스코어는 0 : 0이었고 역사상 최초로 승부차기로 우승컵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브라질은 수문장 클라우지우 타파레우의 맹활약과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가 허공으로 슛을 날리면서 3 : 2로 승리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4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24년 만에 차지한 우승이라 감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승을 차지했기에 파헤이라는 두둑이 까방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월드컵 우승으로 파헤이라는 1994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 축구 팬들이라면 몰라도 브라질인들이라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 브라질인들은 절대 단순한 월드컵 우승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월드컵 우승은 기본에 화끈한 공격 축구까지 거의 필수 옵션으로 붙인다. 공격 축구든 수비 축구든 우승만 하면 문제삼지 않는 이탈리아나 독일, 심지어 브라질 못지 않은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라이벌인 아르헨티나의 축구 팬들과는 전혀 다르다. 즉, 브라질 축구 팬들은 성적은 물론이고 내용까지 모두 만족시켜야만 합격점을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파헤이라가 이끄는 1994년의 브라질 대표팀은 성적은 일단 우승을 차지했기에 그 부분의 점수는 충족시켰을지 몰라도 공격 축구가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비축구로 우승을 차지했기에 내용 면에서는 낙제점을 받았다. 그래서 아예 브라질 축구 팬들은 "이런 월드컵 우승은 우승이 아니다!"는 소리를 내뱉었고, 결국 파헤이라는 우승컵을 안겨주고도 칭찬은커녕 도리어 진탕 욕만 먹고 사임하고 말았다! 이는 그만큼 브라질이란 나라에서 축구 감독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1]

2.6.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브라질에 역사상 최초로 4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고도 불명예스럽게 사임한 파헤이라는 이후 4년 동안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 신세가 되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1년 동안은 스페인의 발렌시아 감독을 맡았고 이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1년 동안 터키 수페르리가의 페네르바흐체 감독을 맡았다. 이후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 브라질 리그 감독을 역임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감독으로서는 4번째로 밟아보는 월드컵 무대였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개최국인 프랑스와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C조에 속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차전에서 덴마크와 맞붙었으나 무기력한 경기를 보였고 결국 0 : 1로 패배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차전 상대인 프랑스를 상대로는 무승부 이상의 성적을 내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상대로는 무조건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전히 수준 이하의 경기력을 보였고 결국 0 : 4로 떡실신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2패로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자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는 또 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감독 경질 스킬을 발동하였고, 그렇게 파헤이라 감독은 중도에 해임당하는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다.[12] 마지막 남아공과의 경기는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치르게 되었고 2 : 2로 비겨 1무 2패라는 성적으로 조 최하위를 기록했다.

2.7.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3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본 파헤이라는 다시 자국으로 돌아갔다. 1999년 그는 다시 플루미넨시 감독으로 부임했고 거기서 또 한 번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렇게 다시 야인이 될 뻔했던 파헤이라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1년 후 그는 잠시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감독을 맡은 후 SC 인테르나시오나우, SC 코린치안스 감독을 맡았다.

이 무렵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2002 한일 월드컵에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의 지휘 아래 사상 최초로 7전 전승을 거두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스콜라리 감독은 다시 지휘봉을 반납했고 브라질 축구협회는 새 선장을 뽑아야 했다. 약 1년 동안 공석으로 있던 브라질 대표팀 자리는 결국 브라질 리그에서 재기에 성공한 파헤이라에게 돌아갔다. 파헤이라로서는 3번째로 맡는 브라질 대표팀 감독인 셈이었다.

그는 1994년에 수비에 주안점을 둔 실리 축구로 우승을 차지했다가 오히려 성난 축구 팬들의 질타를 받았던 경험을 교훈삼아 그의 축구 철학과는 정반대의 전술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이른바 '마법 4중주(판타스틱 4)'라 불리는 화끈한 공격진을 필두로 한 공격 축구를 표방한 것이었다. 즉, 전방에 호나우두, 아드리아누 투 톱과 2선의 히카르두 카카, 호나우지뉴 이 4명을 앞세워 막강 화력을 쏟아붓는 그야말로 초호화 공격진이었던 것이다.

이 공격 축구는 초반에 아주 좋은 성과를 냈다. 2004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은 막강한 공격력을 뽐내며 7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다음 해에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비록 조별리그에서는 일본을 상대로도 2 : 2로 비길 정도로 형편없긴 했지만 4강전에서 개최국 독일을 3 : 2로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라이벌 아르헨티나무려 4 : 1로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뒤이어 열린 2006년 독일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에서도 브라질은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며 9승 7무 2패의 성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대회 전 브라질은 막강한 우승후보로 점쳐졌고 사상 최초로 2번째 2연패가 가능하리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막상 본선에 들어서자 그 예상은 과감히 빗나갔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크로아티아, 호주, 일본과 함께 F조에 속했다. 브라질은 1차전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시종일관 맹공을 퍼붓고도 최전방의 호나우두가 체중 관리 실패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 끝에 전반 44분에 터진 카카의 골로 겨우 1 : 0으로 승리했다. 2차전 호주와의 경기에서도 전반전 내내 호주의 강력한 압박 수비에 막혀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호나우두는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후반전에 들어서야 간신히 아드리아누가 선제골을 터뜨렸고 막판에 프레드가 쐐기골을 터뜨려 어렵게 2 : 0으로 승리하며 16강 진출은 어찌어찌해서 확정지었다. 이렇게 브라질의 창은 예상 외로 무뎠다. 이제 마지막 개그팀 일본과의 경기가 열렸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브라질은 이 경기의 승패가 별 의미가 없기에 2진들 위주로 투입했고, 반대로 반드시 브라질을 2골 차로 이겨야 하는 일본은 최정예 선수들을 투입했다. 그러나 일본은 브라질에 시종일관 밀렸다. 그렇게 경기가 브라질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던 중 전반 34분, 브라질 수비가 허점을 보인 틈을 타 일본의 다마다 게이지가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선제골을 터뜨렸다. 그렇게 일본이 개그팀이라는 오명을 벗고 역사상 최대의 이변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역시 일장춘몽일 뿐이었고, 전반 종료 직전 2경기 내내 부진하다는 질타를 받아온 호나우두가 절치부심한 끝에 동점골을 터뜨려 1 : 1로 전반을 마쳤다. 이후 후반전이 되자 브라질은 아예 일방적으로 일본을 가지고 놀았고, 후반 8분에 주니뉴 페르남부카누가 30m 중거리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렸으며 후반 14분에는 지우베르투가 쐐기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3 : 1로 벌렸다. 그리고 후반 36분에는 다시 호나우두가 4번째 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4 : 1로 벌렸다. 호나우두의 골이 터진 뒤 파헤이라는 당시 골문을 지키던 주전 골키퍼 지다를 빼고 후보 골키퍼 호제리우 세니를 투입시키는 여유까지 부렸다. 이렇게 모처럼 브라질은 막강 화력쇼를 뽐냈다.

16강전 상대는 아프리카의 샛별 가나였다. 브라질은 가나를 상대로 전반 5분 만에 호나우두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쉽게 풀어나가는 듯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탄탄한 가나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 종료 직전에 아드리아누, 후반 39분에 제 호베르투가 각각 골을 터뜨려 3 : 0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경기 내용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였고, 득점 과정에서 오심 논란도 있었기에 브라질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하이라이트 영상 때문에 브라질이 압도했을 거라고 하지만 오히려 가나가 아쉬움이 크게 남을 정도로 브라질보다 잘했던 경기였다. 그저 가나에게 운이 더 안 따라 주었으며 브라질은 골을 넣고 리드해도 가나에게 밀리는 양상이었다.

브라질의 8강 상대는 8년 전 결승전에서 0 : 3 패배라는 치욕을 안겨주었던 프랑스였다. 당초 예상으로는 브라질의 승리가 우세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꿀조에 속하고도 스위스, 대한민국과 내리 무재배를 거두고 승점자판기 토고도 어렵게 꺾고 조 2위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등 브라질보다도 더 헤맸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승승장구하면서 올라온 브라질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치러지자 브라질은 프랑스의 탄탄한 압박 수비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히려 그 동안 지적되어 온 조직력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후반 12분 프랑스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티에리 앙리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며 결승골을 헌납하고 말았다. 그나마 지다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이보다 더 대량 실점했을 정도로 브라질은 프랑스에 밀리는 경기를 보였고, 결국 0 : 1로 패해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프랑스에 무기력하게 참패하자 브라질 축구 팬들의 분노는 또다시 제대로 폭발했고, 결국 파헤이라는 또 다시 경질되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 때 선수들은 모두 청문회에 끌려갔으며, 호나우지뉴는 고향 마을에 세워진 본인의 동상까지 불살라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브라질이 마법의 4중주라는 화려한 공격진을 보유하고도 고작 8강에 그쳤던 이유는 공수 균형이 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전술은 이른바 더블 볼란치 전술이었는데 브라질은 그걸 따르지 않고 공격적인 성향의 선수들만 투입했다. 그 탓에 공수 간격이 벌어져 수비 불안을 초래했던 것이다.

물론 파헤이라 감독이 마법의 4중주를 연주했을 때 생기는 리스크를 모를 리 없었고 더블 볼란치 전술을 몰랐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는 1994년에 더블 볼란치 전술로 월드컵 우승까지 경험해본 백전노장이었다. 그럼에도 더블 볼란치를 쓰지 않은 이유는 역시 지랄맞은 브라질 축구 팬들 때문이다. 우승도 그냥 우승이 아니라 화끈하고 재미있는 공격 축구로 우승하라는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공격적인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3] 이 역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 자리가 얼마나 독이 든 성배 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승과 재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선수와 감독들에게 부담감과 중압감을 선사하는지 알 수 있다.[14]

2.8.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그렇게 브라질에서 역적으로 낙인찍힌 파헤이라는 이제 완전히 잊혀지는 듯했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준비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본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축구 전술에도 영국의 잔재가 남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4-4-2 전술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헤이라 감독도 4-4-2 전술을 선호하는 사람인데다 또 과거 여러 팀을 이끌고 월드컵에 5번이나 출전한 경험이 풍부한 노장이라는 점을 높이 사 영입한 것이다.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고 처음 치른 대회는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전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잠비아, 콩고, 차드와 함께 11조에 속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승 2무 1패(승점 11점)의 성적을 거두어 잠비아와 승점, 득실 차에서 동률을 이루었으나 홈 경기에서 잠비아에 1 : 3으로 패하는 바람에 조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조 2위 팀들 간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해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본선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튀니지, 앙골라, 세네갈과 함께 D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남아공은 앙골라와 1 : 1 무승부에 그쳤고 2차전에서는 튀니지에 1 : 3으로 참패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세네갈을 꺾고 튀니지와 앙골라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는데 세네갈과의 경기도 1 : 1 무승부에 그치며 2무 1패 조 최하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간 아프리카에서도 축구 불모지로 꼽혔던[15] 남아공 축구의 질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그 무렵에 그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는데 브라질에 있던 아내 레일라 파헤이라가 암에 걸려 투병 중이라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그는 아내의 병 간호를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하고 브라질로 돌아갔다. 1년 후인 2009년 3월, 그는 다시 리우데자네이루의 플루미넨시 감독을 맡았다. 계약기간은 2009년 연말까지로 실상 단기 알바직인 셈이다.

한편, 그가 브라질로 돌아간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남아공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이 2010년에 열리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을 겸해서 치러졌기 때문에 남아공은 개최국임에도 아프리카 예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남아공은 나이지리아, 시에라리온, 적도 기니와 함께 4조에 속했는데 여기서 남아공은 고작 최약체 적도기니를 상대로만 승리를 거두었고 나이지리아에는 전패, 시에라리온에는 1무 1패를 기록해 2승 1무 3패(승점 7점)로 어렵게 조 2위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조 2위 팀들 간 순위에서 최하위를 기록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09 컨페더레이션스컵에 개최국 신분으로 참가했는데 스페인, 이라크, 뉴질랜드와 함께 A조에 속했다. 다소 수월한 조였음에도 남아공은 1차전에서 이라크와 졸전을 벌인 끝에 0 : 0으로 비겼다. 2차전에서 조 최약체 뉴질랜드를 상대로 2 : 0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3차전에서 스페인에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 : 2로 참패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승 1무 1패를 거두는데 그쳤지만 다행히도 이라크와 뉴질랜드가 1승도 거두지 못하면서 조 2위를 차지해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전에서 남아공은 브라질과 맞붙었으나 역시 0 : 1로 패배했고 3위 결정전에서 다시 스페인과 맞붙어 후반 28분에 카틀레고 음펠라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승리하는 듯했지만 후반 종료 직전에 다니엘 귀사에게 연달아 2골을 허용하며 1 : 2로 역전당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역전패를 당하는 듯했지만 카틀레고 음펠라가 버저비터 동점골을 터뜨려 간신히 승부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연장 후반 2분에 샤비 알론소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국 2 : 3으로 패배했다.

이렇게 월드컵을 앞두고 갖가지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협회는 다시 파헤이라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침 플루미넨시 감독 임기가 다 끝나가던 시점이라 파헤이라 감독도 흔쾌히 수락했고 결국 파헤이라 감독은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파헤이라 감독으로서는 6번째로 밟아보는 월드컵 무대였다. 이 대회 개최국이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와 함께 A조에 속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A조 최약체였지만 여태껏 개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개최국 프리미엄을 받아 무난히 16강에 진출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10년 6월 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멕시코와 개막전을 치렀다. 두 팀은 장군멍군을 외치며 아주 치열한 경기를 벌였으나 전반전 내내 득점을 올리진 못했고 계속 팽팽한 기싸움만 벌였다. 그러던 중 후반 10분, 남아공의 시피웨 차발랄라가 선제골을 터뜨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서는 프랑스, 우루과이보다 전력이 다소 처지는 멕시코를 상대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남은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기에 이 같은 선제골은 매우 좋은 징조였다. 그러나 남아공은 이후에도 계속 홈 관중의 압도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나갔으나 멕시코의 골문을 좀처럼 열지 못했고 결국 후반 34분, 멕시코의 정신적 지주 라파엘 마르케스에게 동점골을 얻어맞고 1 : 1로 비기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열린 우루과이와 프랑스의 경기도 0 : 0 무승부로 끝나서 A조의 행보가 꽈배기처럼 꼬이고 말았다.

남아공의 2차전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만일 이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남아공은 3차전에서 반드시 프랑스를 이겨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남아공의 전력으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였다. 시종일관 밀리는 경기를 하던 남아공은 결국 전반 24분, 우루과이의 주포 디에고 포를란에게 중거리슛 선제골을 허용하며 0 : 1로 끌려갔다. 이후에도 경기는 계속해서 우루과이의 공세, 남아공의 수세로 이어졌다. 그렇게 수비적으로 버티던 남아공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후반 31분,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해 들어오는 루이스 수아레스를 골키퍼 이투멜렝 쿤이 파울로 저지했다가 퇴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결국 파헤이라 감독은 미드필더 스티븐 피에나르를 빼고 골키퍼 무니브 조세프스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디에고 포를란이 찬 페널티킥을 막는데 실패하면서 스코어는 0 : 2로 벌어졌다. 악전고투를 펼치며 어렵게 우루과이의 공세를 방어하던 남아공이었지만 그들의 수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기 종료 직전, 루이스 수아레스가 문전을 향해 올린 크로스를 수비수 알바로 페레이라가 받아 헤딩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결국, 남아공은 0 : 3으로 참패했고 이 패배로 인해 16강 진출이 불투명해졌다. 뒤이어 열린 멕시코와 프랑스의 경기에서 멕시코가 프랑스를 2 : 0으로 이기는 바람에 경우의 수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일단 남아공으로서는 남은 선택이 없었고 무조건 프랑스를 다득점으로 이겨야 했다.[16] 그러나 우루과이와 멕시코가 이미 승점 4점을 확보했기에 그 둘이 서로 비기면 남아공은 프랑스를 100 : 0으로 이겨도 절대 16강에 갈 수가 없었다. 즉, 남아공은 프랑스를 다득점으로 꺾고 우루과이가 멕시코를 2점 차 이상으로 이기는 이 2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16강에 갈 수 있었다.

3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남아공은 프랑스를 상대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고 마침내 전반 20분 만에 봉가니 쿠말로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1 : 0으로 앞서갔다. 그리고 전반 37분에 카틀레고 음펠라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2 : 0으로 벌렸다. 그런데다 마침 우루과이가 전반 43분에 터진 루이스 수아레스의 골로 1 : 0으로 앞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현재 상황으로 멕시코와 남아공은 승점 4점으로 동률이지만 득실 차는 멕시코가 +1, 남아공은 -1인 상황이었다. 이제 남아공이 한 골을 더 넣고 우루과이가 한 골을 더 넣어준다면 순위 역전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후반전 들어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뒤늦게야 각성한 프랑스는 갑자기 혼자 죽기 억울했는지 갈 길이 급한 남아공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물귀신 작전에 남아공은 조금씩 말려들었고 타 구장에서는 더 이상 골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남아공은 후반 25분에 플로랑 말루다에게 만회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코어는 2 : 1로 좁혀졌다. 3골을 더 넣어야 순위 역전이 가능한[17] 남아공은 사력을 다해 프랑스의 골문을 열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남아공을 저승길 동무로 정한 프랑스는 견고한 수비벽을 쌓아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경기는 그대로 끝나 남아공은 프랑스를 2 : 1로 이겼고 타 구장에서는 우루과이가 멕시코를 1 : 0으로 이겼다. 그리하여 남아공과 멕시코는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득실 차에서 멕시코가 +1, 남아공이 -2가 되어 3골이 더 앞선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하고 남아공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개최국이 2라운드 진출 실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0 : 3으로 대패했던 게 화근이었다. 이 대회가 끝난 후 파헤이라 감독은 충격이 컸는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팀 감독 자리를 사퇴했고 감독직에서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2.9.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 고문

마누 메네지스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이 2011년 코파 아메리카 8강, 런던 올림픽 은메달에 그치자 브라질 축구협회는 마누 메네지스를 경질하고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을 선임하였고, 기술 고문으로는 파헤이라를 선임했다.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던 두 명장들을 감독과 기술 고문으로 세워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우승을 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자국에서 열린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은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스페인을 상대로 강력한 전방 압박을 구사하는 축구를 선보여 3 : 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브라질이 12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월드컵 본선이 되자 브라질은 졸전에 졸전을 거듭했다. 1차전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는 일본인 주심 니시무라 유이치의 오심에 힘입어 3 : 1로 겨우 승리했고, 2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기예르모 오초아의 선방쇼로 인해 0 : 0으로 비기고 말았다. 3차전 카메룬과의 경기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며 4 : 1로 대승을 거두어 2승 1무의 성적과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그러나 16강에서는 강력한 압박으로 나온 칠레에 밀리는 경기를 보이다 승부차기로 간신히 제압했으며, 8강전에서도 콜롬비아와 격투기 수준의 치열한 경기를 벌인 끝에 2 : 1로 간신히 꺾고 4강에 올랐다. 그리고 4강에선 다들 알다시피 미네이랑의 비극이라는 믿기 어려운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써버렸다. 비록 이 때 어그로란 어그로는 당시 감독이었던 스콜라리가 다 끌었으나, 기술 고문이었던 파헤이라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쯤되면 이 사람이 얼마나 월드컵과 인연이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3. 총평

파헤이라 감독은 10개의 프로 구단과 6번의 월드컵 무대를 경험한 그야말로 세계 축구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축구 감독들 중에서 이렇게 월드컵 경험이 풍부한 감독도 드물다. 그리고 그 6번 출전한 월드컵에서 개인 통산 10승 5무 9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전까지 브라질 이외의 팀을 이끌고는 단 1승도 기록한 적이 없으며 그나마 개최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맡아 1승을 거두긴 했지만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즉, 월드컵 경험은 매우 풍부하지만 지독히도 운이 닿지 않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브라질을 제외하고 파헤이라 감독이 맡았던 팀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0년대 쿠웨이트나 1990년대 초 아랍에미리트는 당시 아시아에서야 잘 나가는 강호였을지라도 세계무대에 나가면 승점자판기에 불과했다. 1982년에 월드컵 무대를 경험한 쿠웨이트는 2022년 대회까지 40년 째 본선 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고 1990년에 월드컵 무대를 경험한 아랍에미리트 역시 2022년 대회까지 32년 동안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하고있으며 현재는 쿠웨이트와 더불어 최종예선 진출에도 버거워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쿠웨이트나 아랍에미리트는 월드컵 무대에 참가했다는 그 사실에 의의를 두어야 할 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팀을 이끌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것이다. 당시 파헤이라 감독의 모습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중국을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무대에 올렸던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과 같았다. 다만 세계무대의 경험이 모자란 쿠웨이트나 아랍에미리트가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왔다고 열라게 압박하는 바람에 불명예스럽게 사퇴했을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는 1994년 대회에서 16강까지 갔던 나름 강팀인데 1998년 대회에서 1무 2패밖에 못한 건 말아먹은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파헤이라 감독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기 몇 달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즉, 자신의 팀 컬러를 입힐 시간도 부족했는데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적인 명장이 아니라 명장 할아비라도 성적을 내기가 어렵다. 즉, 성적이 조금만 나쁘면 무조건 감독들 모가지부터 날리고 보는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의 허접하고 전근대적인 행정이 원인이지 파헤이라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남아공의 경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비록 월드컵 직전에야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남아공 대표팀은 2006년부터 이미 자신의 손에 만들어진 팀이었다. 그럼에도 역사상 최초로 개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만든 건 이 사람이 월드컵과 정말 인연이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2002 한국을 쌈싸먹을 정도의 죽음의 조 편성에 걸리기는 했고 그 와중에도 준우승팀 프랑스를 이기기는 했지만 브라질로 우승도 해봤던 경력으로 개최국을 16강 진출을 시키지 못했으니...

특히 1994년에는 우승컵까지 들어올리고도 욕 먹고 사퇴했다는 점도 이 사람이 월드컵과 인연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는 브라질 축구 팬들은 공격적인 축구를 원하지만 파헤이라가 수비 축구를 고집했던 면도 있지만 당시 브라질은 24년째 무관이었던 상황이었다. 또 지난 1990년 대회에서 화려한 공격진을 앞세워 공격 축구를 표방했지만 어처구니 없이 16강에서 탈락하는 흑역사를 쓴 상황이었다. 그래서 파헤이라로서는 공격보다는 수비에 주안점을 두어 안정적인 축구를 앞세운 것이었지만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그런 건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경험도 풍부하고 전술적인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지만 정작 월드컵 무대에서 보인 모습이 초라하기에 비운의 명장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가 맡았던 팀들이 우승은 기본이고 거기에 화끈하고 재미있는 공격 축구라는 옵션까지 붙이는 브라질, 조금만 성적이 부진하면 가차없이 해고하는 중동 팀들이라는 점들 때문에 더더욱 그런 면모가 부각되는 것 같다.

4. 기록

4.1. 우승

4.2. 개인 수상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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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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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모두 월드컵 본선 진출 자체가 업적인 세계무대 변방의 국가들이다. 또한 조국 브라질 감독으로는 무려 24년 만의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2006년 브라질 대표팀과의 2번째 월드컵 출전에서 8강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으며 4년 뒤 남아공 대표팀을 맡았을 때는 당시 개최국이었고,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남아공의 개최국 16강 진출을 이끌지 못하며 그의 이력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2]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4강전에서 9명의 선수가 부상을 입는 등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3] 그 후 소비에트 연방 출신 주심은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쿠웨이트 축구협회장에게도 엄중히 경고가 내려졌다. 쿠웨이트 협회에도 25,000파운드의 벌금이 부과되었다고 한다.[4] 당시 2라운드는 12강이었고 토너먼트가 아닌 12강 조별리그였으며, 그 다음 각 조 1위가 4강 토너먼트 진출로 진행되었다.[5] 볼리비아 원정 패배 제외. 이 패배는 브라질이 월드컵 예선에서 첫 번째 패배이다.[6] 단 기록은 러시아가 다 가져간다[7] 이는 상술했듯이 당시 브라질의 공격을 호마리우와 베베투가 전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윙어 역할을 할 마지뉴와 지뉴는 그다지 공격적인 선수들도 아니었고 화려한 개인돌파가 있는 선수들도 아니었다.[8] 덤으로 레오나르두는 미국 선수한테 팔꿈치 기술을 선보였다가 퇴장 당하고 추가 징계를 받아 결승전까지 뛰지 못했다.[9] 특히, 전반전은 아예 0 : 0으로 끝났다.[10]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바로 그 당시 네덜란드도 우승후보였다는 것이다.[11] 브라질 축구의 최대 치욕인 미네이랑의 비극도 주축 선수인 네이마르 주니오르티아고 실바의 결장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에 앞서서 따지고보면 결국 우승 뿐만 아니라 화끈한 공격 축구에 부합하는 경기 내용까지 갖춰져야 비로소 인정을 해주는 브라질 팬들의 요구 역시 이 비극의 발생 원인 중 하나였다고 봐야할 것이다.[12] 파헤이라가 해고되고 며칠 후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차범근 또한 네덜란드0 : 5로 대패를 당하며 2패로 탈락이 확정되자 전격 경질되었다.[13] 특히 파헤이라가 1994년에 24년 만에 우승컵을 안겨주고도 욕만 퍼먹었던 걸 기억하자.[14] 그러나 그 이후로도 브라질 축구 팬들의 그런 태도는 1도 달라지지 않았고, 그 결과 초래된 것이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미네이랑의 비극이다.[15] 남아공은 축구보다 럭비가 더 인기가 많다.[16] 남아공의 득실 차가 -3이었고 멕시코의 득실 차가 +2였기 때문에 남아공은 적어도 프랑스를 3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고 우루과이가 멕시코를 2골 차 이상으로 이겨주어야 했다.[17] 남아공이 프랑스를 상대로 5 : 1로 승리하게 되면 멕시코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루고 득실 차도 같아지지만 다득점에서 남아공이 더 앞서므로 16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