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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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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회택.jpg
<colbgcolor=#203d41> 이름 이회택
李會澤 | Lee Hoe-taik
출생 1946년 10월 11일 ([age(1946-10-11)]세)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사우리
(現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1]
본관 연안 이씨 (延安 李氏)[2]
신체 167cm
직업 축구 선수 (중앙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학력 김포초등학교 (졸업)
김포중학교 (졸업)
김포농업고등학교[3] (전학)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전학)
동북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 70 / 학사)
소속 <colbgcolor=#203d41> 선수 성균관대학교 축구부 (1966)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1966~1967)
양지 축구단 (1967~1970)
해병대 축구단 (1970)
한양대학교 축구부 (1970~1973)
포항제철 축구단 (1973~1980)
해봉 (1977 / 임대)
감독 한양대학교 축구부 (1983~1985)
포항제철 아톰즈 (1987~1992)
대한민국 대표팀 (1988~1990)
전남 드래곤즈 (1998~2003)
기타 대한축구협회 (2005~2013 / 부회장)
김포 FC (2023~ / 기술 고문)
국가대표 82경기 21골 (대한민국 / 1966~1977)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행정가 경력
5.1.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
7. 이회택에 대한 언사8. 여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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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2. 선수 경력


이북에서 조부모와 함께 월남해서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친 이용진 옹은 한국 전쟁 때 의용군으로 참가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하며 모친은 재가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부친과는 남북 통일 축구 대회 때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이회택은 근성과 독기가 있는 캐릭터였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시기에는 기계 체조를 했다고 하나, 유년기부터 공 차는 걸 좋아했던 이회택은[4] 기계 체조를 때려 치우고 또래 애들과 김포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시기에 축구부 비스무리하던 걸 하던 고등학교 형들과 활동하다가[5] 김포농고에 들어가고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고 축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출을 하는 등 집안과 갈등을 빚다 고2가 되고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다. 한양공업고등학교의 문을 두드려 보나 전국적으로 명문인 학교였고 지방에서 5, 60명 가량이 몰려와서 테스트를 받던 와중 제대로 된 기본기가 없던 이회택은 속도만 인정받다 열흘 정도 후 쫓겨나게 된다. 다시 한 달쯤 뒤 영등포공업고등학교의 부름을 받고 그 해 6월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데뷔무대에서 2득점을 뽑아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리고 부정 선수[6]였던 이회택은 그 약점을 노린 축구 명문인 동북고등학교의 스카우트를 받고 2학년에서 1학년으로 학년을 하나 내린 채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의 이회택과 동북고는 전국대회가 열리면 반 정도는 우승했다고 한다. 이회택은 훗날 본인에게는 천부적인 스피드, 체력, 순발력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축구를 늦게 시작했어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해인 1965년 동북고 3학년 청소년 대표로 데뷔한다. 여기서 성공적인 청소년대표 생활을 보내면서 국가대표 물망에도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이회택을 잡기 위해 당시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가 각축전을 벌였다고 한다. 성균관대는 동북고에서 이회택을 가르친 박병석을 영입하면서 이회택을 입학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본래 연세대가 가고 싶었던 이회택은 5월에 성균관대를 자퇴하게 된다. 이후 1년만 뛴다는 조건으로 석탄공사에서 뛰게 된다. 이 시기인 66년 8월 므르데카컵 3, 4위전에서 인도에게 패하자 대표팀은 이회택을 등용한다. 67년 초 무렵 이회택은 다니고 싶어하던 연대에 합격해 이미 연대 선수들과 훈련하며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북한이 월드컵 8강(8위)에 올랐기에 67년 2월 육해공군 3군 소속 선수를 대상으로 양지 축구단이 창설되게 된다. 이회택은 성균관대를 자퇴하면서 입영 대상자가 되었기에 양지의 감독을 맡게 된 최정민이 이회택을 선택하며 연대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던 이회택을 중앙정보부에서 끌고 가면서 양지 선수가 되게 된다. 이회택은 육군 공군 해병대 중에서 가장 복무 일수가 짧은 해병대를 선택하여 양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회택은 양지 축구단에서 당시 딱히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대표팀 데뷔하고 석탄공사 시절 몇 달간은 대표팀 성적도 그렇고 별로 안 좋았지만 양지 소속이었던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에이스로 활약하고 아시아 올스타에 뽑히는 등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당시 급료도 계장급인 2만 원씩이나 받던 이회택은, 말하자면 1963년 18살에 고등학교 1학년 축구 선수로 시작해 1967년 22세의 나이에 아시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본인은 이미 이 시기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다. 이춘풍, 풍운아, 의리의 사나이 등의 별명을 달고 다니면서 직설적인 언행을 하기로 유명했으며 기행도 상당했다. 이미 20살 고3 시절부터 축구 하나만을 보던 생활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하는 이회택이지만 이 시기부터 축구 반 노는 것 반으로 놀아제꼈다고 한다. 본인의 술회에 따르면 그 당시 대표팀이라면 축구는 물론 술 노름 싸움 등 뭐든지 1등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7] 또 본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방탕하게 놀아도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몸을 다시 만들면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그러고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사실상 국가대표팀인 양지에서 자기가 막내급이었는데도 축구를 잘해서 심하면 10살 이상씩 차이 나는 선배들이 귀여워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통에 또래들과 어울리며 축구하는 대신 나쁜 것을 많이 배웠다고. 돈도 돈이고 소속도 중앙 정보부 산하의 양지 소속이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도 청소년 대표에 뽑히자, 국가대표에 뽑히자,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자,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자였는데 너무 빨리 그걸 다 해 버렸고 동기부여를 따로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환경도 없어서[8] 허무했다고 한다.[9]

아무튼 이렇게 살다 제대를 앞둔 이회택은 계약금으로 300만 원을 받고 외환은행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10] 그런데 연세대와 한양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이회택의 마음이 변한다. 그러나 이미 선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이회택은 150만 원을 물쓰듯 써 버린지라 외환은행으로 가야 할 처지였으나 한양대에서 150만 원을 주기로 하면서 1970년 한양대에 입학하고 1974년 졸업을 맞이한다. 1972년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회택에게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었던 한홍기가 찾아와 1973년에 포철 축구단이 창단되고 자기는 포철 초대 감독이 될 것인데 박태준이 직접 지명했으니 포철에 입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마음이 움직인 이회택은 포철에 입단하기로 하여 창단 멤버가 된다. 박태준과도 좋은 관계를 맺은 이회택은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 포항에 남게 된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82경기에서 21골을 넣으며 활약했다.[11] 만 스무 살의 나이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본인의 술회대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12] 1970년대 이후에는 대표팀에서의 비중도 한 살 차이 고등학교 후배 박이천에게 많이 넘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천부적인 재능으로 인해서 올드 팬들이나 선수들의 기억 속 임팩트로는 크고 많이 남아 있으나 전반적인 선수 시절은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지도자 생활 최대의 한이 90월드컵 24강 본선에서 정보 부족이나 체육학자들의 오산 등으로 인해 모든 것을 펼쳐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선수 생활 최대의 한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당시 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바탕으로 개최된 대회가 아니라 정식 범아시아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던 것이다.[13]

여담으로 선수 시절에 독일 분데스리가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SL 벤피카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유럽 무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도 모르고 해서 굳이 이적하진 않았다고 한다.


1972년 펠레산투스 FC와의 내한 경기에서도 71분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었으며[14] 에우제비우SL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도 페널티 킥으로 1:1 동점골을 넣었다. 2020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유럽에 진출했어도 실패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빠른 발과 뛰어난 가속력 및 순발력을 바탕으로 168cm라는 작은 키를 커버하며 굉장히 열정적이다 못해 전투적인 축구를 했다고 한다.

상대 수비를 등지고 도는 홀드업 플레이[15]에 탁월했고 과시한다고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힘과 체력과 순발력, 탁월한 개인기, 100m를 11.8초에 주파하는 속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폭발적인 가속력을 바탕으로 돌파하는 굉장히 역동적이고 전투적인 스타일이였다고 한다. 오프 더 볼 움직임과 판단력이 좋아 수비수를 순간적으로 따돌리면서 공이 오는 위치를 선점했고 양발을 모두 잘 써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골 결정력을 바탕으로 많은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의 대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넓은 시야를 가지고 2선에서 다른 공격수에게 어시스트나 키 패스를 넣어 주는 것에 능한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트라이커는 체격이 좋은 선수가 대부분이고 최전방에서 주로 득점만 하던 시절, 키가 작음에도 빠른 속도로 골을 많이 넣었고 골만 잘 넣는 것이 아닌 동료들에게 득점 기회도 많이 만들었던 이회택은 포지션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점프력이나 헤더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건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하다 보니[16] 자기 관리를 소홀했던 것이 한이라고 한다. 만약에 이회택이 적어도 차범근이나 최순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유럽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독일의 묀헨 글라트바흐라든가 포르투갈의 벤피카에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도 탐났던 재능인 건 확실하며 본인도, 그리고 후배인 최순호가 평가하길 재능면에서는 최고였다고 한다. 다만 최순호 역시 이회택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언급하면서 부족한 자기 관리를 아쉽게 평가했다.

4. 지도자 경력

4.1. 포항제철 축구단 감독

41세에 선수시절에도 몸담았던 포항제철의 감독을 맡았으니 당시 기준으로도 제법 빨리 감독으로 데뷔한 셈이다. 그런데 감독 데뷔 시즌에 팀을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주성, 정해원 등이 이끌었던 대우 로얄즈에 우승은 내주었지만 대단한 성과였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 우승까지 달성했다.

4.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포항에서의 우승으로 인해 이회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게 될 국가대표팀 사령탑까지 겸하게 된다.[17]

1990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이회택 감독은 1차 예선, 최종 예선 통틀어서 11전 9승 2무 아시아 예선 무패로 우승(1위)하여 24개국 본선 진출[18]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다. 예선에서 보여준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터라 세 번째 진출하는 90월드컵 24강 본선에 대해 기대가 엄청났으나. 결국 24강 조별 리그에서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에 속절 없이 패하며 3전 전패(22위)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 도전을 끝맺는다.[19]

사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외신들도 한국을 다크호스로 많이 꼽았다. 특히 긴 머리를 휘날리는 '삼손' 김주성은 주목해야 할 선수로 꼽히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압도를 당하며 오히려 아시아와 세계 축구 간의 격차만 확인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소위 '아시아의 맹주'라며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던 전성기라면 전성기 시절.

이회택 본인은 이것에 대해 당시 체육학자들이 1주일 전에만 가도 시차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데이터를 내세우면서 주장을 하는 통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협회도 1주일 전에 가도 괜찮다니까 그냥 1주일 전에 이탈리아에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회택은 1주일 더 일찍 가서 못 해도 현지 클럽 팀이나 다른 국대 팀과 평가전도 좀 갖고 컨디션 조정도 더 잘하고 그랬으면 16강은 몰라도 좀 더 좋은 경기를 했을 텐데 데이터에 밀려서 그러지 못했던 것이 지도자 생활 최대의 한으로 남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록 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으로 윤덕여가 퇴장 당하고 다니엘 폰세카의 골 상황이 오프사이드인데도 골이 인정된 것 때문에 패배했지만, 마지막 우루과이전에서야 컨디션이 올라와서 우루과이와는 어느 정도 대등한 경기를 했던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정보전에서 무력해서 상대 팀이 어떤 축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세계 무대의 전술과 동 떨어져 있었는데 압박 축구를 접해보고 대응이 곤란했던 점 등등이 아쉬웠다고 한다.

여담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20] 주역이었던 정용환, 박경훈, 최순호, 변병주, 김주성부터 이영진, 김풍주, 황보관, 최인영 등 화려한 멤버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회택은 이때 한국 축구가 10년을 먹고 살 커다란 재산을 남겨줬다. 바로 황선홍홍명보를 대표팀에 부른 것. 당시 두 사람은 애송이도 아니고 그냥 듣보잡이나 다름없던 터라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21] 포항 시절의 업적도 그렇고 선수 보는 눈으로는 사실상 허정무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소속 구단 포항제철로 돌아가 1992년 프로 축구 우승으로 이끈 것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도 사임하고 야인의 세월을 보냈다.

4.3. 전남 드래곤즈 감독

1998년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K리그에 다시 돌아온다.[22]

그러나 리그 준우승과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을 일궈낸 전임 허정무 감독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고, 리그컵과 FA컵 준우승 한 차례만을 기록한 채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충칭의 별 이장수 감독이 차기 감독이 되었다.

5. 행정가 경력

5.1.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이회택은 전남 감독직을 내놓은 이후로는 주로 대한축구협회에 몸담아 행정가로 일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 재임기에 기술위원장을 맡았으며[23] 2008년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 동안 다시 기술위원장직을 맡아 월드컵 지역 예선 무패 통과와 사상 첫 월드컵 원정 2라운드 16강 15위 달성에 조력자 역할을 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이 계약연장을 거부하자 축구협회는 후임 감독직을 맡을 인물을 물색하는데 이회택은 당시만 해도 축협 주류에 대한 반대파의 대표 인사로 꼽히던 조광래를 추천한다. 당시 회장이던 조중연은 틈만 나면 자신을 디스했던 조광래에게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기는 데 탐탁지 않았다고 전해지나 기술위원장의 추천이니 묵살할 수도 없고 축구계 주류-비주류의 화합을 추진하는 차원에서 통 크게 이회택의 제안을 수락해 조광래호가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거창하게 출발했던 조광래호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이때 이회택은 기술위원장으로서의 업무수행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는데, 자신이 품어 준 셈인 축구계 후배 조광래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폄하한 것이다.

조광래의 말인즉 기술위원장이 특정 선수를 대표팀에 포함시키라며 본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압력을 행사한 적은 없고 선수를 추천하는 통상의 업무를 행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압력조였는지 제안조였는지는 알 턱이 없으나 대다수의 여론은 이회택 쪽을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해당 포지션인 오른쪽 풀백 자리에서 잘해주는 선수를 뽑을 생각은 않고 K리그 정상급 중미J리그에서 어중간한 활약을 보이던 윙 포워드를 포변시킬 생각만 하던 조광래의 과거 행태를 감안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듯. 많은 축구 팬은 "내가 기술위원장이라도 보다보다 답답해서 누구누구 좀 써봐라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는 조광래 항목에서도 각주로 언급되고 있지만, 올림픽 대표팀과의 선수 기용 문제로 바로 이회택과 한판 하고 언론에 까댔을 정도의 인물정작 외압 문제에 관해 짤린 뒤에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묵인했다가 짤리니까 저런다. 혹은 당시 대단치 않게 받아들인 걸 뒤끝 작렬하느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느냐는 것.

무엇보다 조광래는 이회택이 축구계의 반목을 일소하고 대화합하는 차원에서 끌어안은 인물이다. 애초에 국가대표 감독직으로 추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악연 때문에 조광래를 고까워하던 조중연 회장에 대해 조광래를 꾸준히 쉴드쳐주던 인물이 이회택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회택이 기술위원장이 아니었더라면 조광래는 평생 축구협회 반대파로 낙인찍혀 국가대표 감독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렇게 나름 호의를 베풀고 챙겨준 인물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까내린 데 대해 이회택은 심정적으로 상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결국 조광래가 경질되기 전에 먼저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24]

그동안 유지하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직함도 반납하고 요새는 고향 김포시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는 김원일이 그의 축구교실을 거쳤다고 한다.그리고 해병대도

2014년 7월 21일, 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축구인노조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여담으로 전 항목에서는 이미 기술위원장 및 부회장에서 사퇴했음에도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회택의 사퇴는 이번 공금횡령건이 발각되어 사퇴한 것이 아니라 2011년도에 남아공월드컵에 대한 책임으로 사퇴결의를 받아 사퇴한 것이다. 홍명보, 허정무, 황보관과 같이 계속 이미 사퇴한 사람 사퇴하라고(...)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황보관이야 경우 사퇴하지 않고 임원명단에서 직원명단으로 이름을 옮겨 WOW팀 팀장겸 기술교육실장을 하고 있으니 사퇴의 필요성이 있는 것도 맞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이회택 보고도 사퇴하라는 여론이 높았던 것에 대해 좀 소식 좀 알고 비판하라는 얘기에 대해, 이회택 보고 사퇴하라는 얘기는 이회택이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니 그런 비판들이 나오는 것이며 그에 대해 4년마다 축구 보지 말라는 얘기가 이회택 두둔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웃긴 얘기다. 상식적으로 알았으면 사퇴가 아니라 적폐 청산이라거나 그냥 물러가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을 터이다.

2017년 축구협회 비리사건에 휘말려 9월 14일 배임혐의로 입건되었으나, 이듬해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다. 축구협회 전 직원, 공금 사용 관련 대부분 무혐의 처분

이후 2023년에 고향 김포에 기반을 둔 프로 축구단인 김포 FC의 기술 고문으로 부임했다. 다만 사실상 명예직이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이회택에 대한 언사

내가 축구를 하던 때는 저기 앉아 있는 이회택 선배의 시대였다.
차범근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지만 기량만은 타고난 천재형 스트라이커.
최순호
등지는 기술이 몸은 조그마하면서도 상당히 좋으세요. 그래서 아주 큰 선수들이 뒤에서 밀치거나 이러는데도 버티는 힘이 워낙 좋아서 그런 점이 독특했고, 특히나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서 적진 돌파 하는 것, 그리고 문전에서 발리킥 있잖아요. 아주 유명하죠. 가슴으로 잡아서 때리는 기술이라든가 이런 기술은 우리나라 축구사에, 우리나라 스트라이커 계보에서 정말 배울 점이 많은 그런 분이었다고 볼 수 있죠.
허정무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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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중 장령공파의 집성촌이다.[2] 출처.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28세손 택(○澤) 신(○新), 항렬, 부친 이용진 옹은 27세손으로 용(庸○) 경(庚○) 항렬[3] 現 김포과학기술고등학교[4] 본인의 회상에 따르면 부친의 농장에 유니폼 같은 옷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선수였던 것 같다고 한다.[5]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선수가 되려고 축구하는 축구부와 그냥 생활 체육하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아마 생활 체육하던 축구부를 이회택이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6] 이회택의 증언으로는 군 복무를 마치고 와서 고등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며 부정 선수였던 것이 딱히 특별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학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시기라 선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기 일쑤였으며 학교에서 선수 더 하라고 잡아 놓은 고등학교 4, 5학년도 수두룩했다고 한다.[7] 술은 몸에서 안 받아줘서 안 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한다.[8] 선수의 몸관리도 그렇고 그 당시에는 그냥 월급제인데 성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아서 연봉이 오른다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고 추가 수당 같은 것도 없었고 국가나 민족에 대한 충성만을 말했다고 말한다. 충성은 충성인데 따로 동기부여도 없으니 노는 건 노는 것이었다고 한다.[9] 아시아 최고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지 실제로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대표팀이 비교적 자주 부딪치는 동남아시아와 극동아시아 쪽과의 경기에서 이회택이 그렇게 실감했을 수는 있겠으나 서아시아와 그렇게 본격적으로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회택이 그렇게 느낀 것은 너무 일렀다.[10] 그 당시 물가로는 집 한 채 정도의 가격의 거금이었다고 한다.[11] 경기 기록이 다 구비되지 않은 것도 있고 이 시기 주인 잃은 골이 꽤 있기도 하니 분명히 몇 골 정도 넣기는 더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 예를 들어 2진급과 붙었다거나 제대로 된 국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대강 선발된 팀이라거나 클럽팀과의 경기라거나 해서 당시 A매치 취급을 받았지만 인정되지 않은 경기가 꽤 있다. 산토스나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도 국가대표팀으로 득점을 기록한 이회택이지만 공식 A매치 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12] 대표팀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 시기도 있고 본인 인터뷰에서도 방탕하게 사느라 전성기 2, 3년을 제외하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13] 당시는 스포츠 대회의 규모가 작았고 아시아의 본선 진출권 월드컵 만해도 16개국 본선 진출 체제라서 아시아는 + 타 대륙과 합쳐 0.1장일 정도로 비중은 현재보다 더욱 작았기 때문에 아시아 대회 우승을 했어야 한다. 또한 아시안컵이나 아시안 게임도 우승에 실패하기도 했다.[14] 첫 번째 골은 69분 차범근이 터뜨렸다. 펠레와 마라도나 중 누가 낫냐는 질문에는 펠레가 더 낫다고 한다.[15] 축구협회 부회장 시절에 이동국의 플레이가 답답했는지, 국가대표 훈련장에서 직접 등지고 도는 플레이를 시연해보이면서 스트라이커라면 등지고 버틸줄 알아야 한다고 질책하는 장면이 방송에 잡힌 적이 있다.[16] 유혹이 많았고, 또 이렇다 할 일가 친척이 없었다는 점이 컸다고 회고한다.[17]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전임 감독 체제가 아니었기에 프로 축구 우승 구단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겸했다.[18] 당시 1990 월드컵 ~ 1994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아시아 전 지역 최종 예선까지 통합 리그전 예선이었고 아시아 예선 우승(1위)과 준우승(2위)이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 하는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 예선 우승(1위), 아랍에미리트가 준우승(2위)로 진출하였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축구에 이어 다시 아시아 지역 1위를 찍은 대회이다. 다만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월드컵 대회 중 지역 예선의 일부라서 우승이라는 개념은 없어서 이걸 공식대회 우승으로 치진 않는다.[19] 사실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조별 리그 3경기 모두 전반전까지 상대에게 리드를 빼앗기지 않은 것은 1990년 이탈리아 대회가 유일한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2002년 한국/일본 대회에서도 32강 D조 2차전 전반에 미국의 선제골을 허용해서 0:1로 뒤졌었다.[20]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유럽팀 불가리아에게 1:1무승부로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획득하며 첫 승점 1점 1무 2패 86월드컵 20위를 기록했다.[21] 물론 황선홍은 당시 대학 축구계의 스타이기도 했고 국가대표 데뷔전인 1988 AFC 아시안컵 카타르한일전에서도 1골 1도움을 기록하고, 월드컵 예선에서도 맹활약했다.[22]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빈자리를 메운 것이다.[23] 독일 월드컵 직전 동아시안컵 최하위와 사우디전 참패의 부진을 책임지고 본프레레 감독보다 한발 앞서 사퇴를 표명했다.[24] 이 사퇴 결정 자체가 본인이 밀어붙인 조광래 선임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에 조광래의 명줄은 이 때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25] 이회택이 대단한 점은 1990년대 이후부터는 매우 꾸준히 일관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냉정하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잘 나갈 때나 좋았던 때의 기억은 어떻게 보면 허풍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로까지 입담을 털어놓지만, 본인의 단점이나 잘못했던 점 등에 대해서는 몹시 초연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26] 소문으로는 축구화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난리를 피웠다고 하나 본인 증언으로는 교체 지시를 받고 그냥 흙묻은 축구화를 바닥에 세게 몇 번 털었다고 한다.[27] 나머지 6명은 김용식, 김화집, 홍덕영, 차범근, 정몽준, 거스 히딩크다.[28] 강부자도 축구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