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보기관 변천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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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1961~1998 / 2022~ ) |
<colbgcolor=#8b0000><colcolor=#fff> 중앙정보부 中央情報部 |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 |
설립일 | 1961년 6월 10일 |
해산일 | 1981년 4월 8일 (19년) |
전신 | 중앙정보연구위원회 |
후신 | 국가안전기획부 |
약칭 | 중정부, 중정 |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산4-5 |
상급 기관 | 대한민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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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 정부조직법 제15조(중앙정보부) ①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보안 및 범죄수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기 위하여 대통령소속하에 중앙정보부를 둔다. ② 중앙정보부의 조직·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 |
표어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1] 약칭은 중정 혹은 중정부, 영어 약칭은 KCIA. 흔히 남산이라고도 불렸다.
국가안전기획부와 국가정보원의 전신이며 미국 중앙정보국을 모방해서 창설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CIA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국내 파트는 FBI가 담당하기 때문에 중앙정보부는 CIA보다 권력이 더 강했다.[2]
흔히 중정 하면 남산을 떠올리기 쉽지만, 남산 청사에는 남파간첩 및 좌익사범을 색출하는 국내정보담당 부서가 있었고 대외, 대북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해외정보 부서가 입주한 이문동 청사(현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이자 의릉 부지)[3]가 별도로 있어 각각의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다.
2. 청사
퇴계로 쪽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
좌측 상단의 건물은 중앙정보부 본관의 우측에 위치했던 제 1 별관 건물로 1996년에 발파 해체되었다. 동아일보 보도
6국 건물은 위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진의 중앙 앞쪽에 보이는 구 감찰실 건물(2017년 철거)의 오른쪽에 위치했고 서울특별시청 남산별관과 균형발전본부로 사용되었다. 2017년 8월 16일 서울시에서는 해당 건물을 지하실까지 정밀 해체하고 '중앙정보부 6국'과 부끄러운 역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 6"으로 명명했다. 해체된 지하실은 기억 6 전시실 지하에 다시 재현되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초구로 이전하고, 남산 르네상스 계획을 세우면서 일부 건물이 철거되거나 현재 서울특별시청 남산청사,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서울종합방재센터,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진 중앙의 구 감찰실 건물은 TBS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16년에 방송국이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로 이전하면서 2017년 3월 현재 철거되었다.
중앙 뒤에 바로 보이는 건물이 현재 서울시 소방재난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앙정보부 및 안기부 본관은 서울유스호스텔로 바뀌었고 맞은 편의 6별관(일명 지하 벙커. 위의 6국과는 별도의 건물이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바뀌었다.
과거 중앙정보부가 소유하고 있었던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으며 중정 부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은 현재 문학의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방재난본부 건물 인근에 있으며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지하에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남산 '그곳'의 흔적들
3. 특징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부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4] 제2공화국부터 창설 계획이 있었는데,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쿠데타 며칠 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제2공화국 하에서 정보기관을 창설한 사람이 바로 이후락이다. 이후락은 쿠데타 직후 체포됐지만 일머리는 출중한 인물인지라 박정희 집권 후 공보실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거쳐 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전성기에는 각 부처마다 요원들이 상주하여 공무원 동향을 감시하기도 하고 검찰, 경찰, 교정기관을 지휘하면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자리했다. 형식상으로는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한 다음 검찰에 송치 하지만, 당시 검찰이 중앙정보부에서 송치한 범죄자를 기소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검찰은 그냥 장식에 불과했다. 즉, 검사 없는 단독 수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당연히 간첩을 잡는 목적이어야 하고 이러한 측면에 기여한 측면도 많았긴 하나, 정권안보 및 반정부 운동 탄압을 위해 악용된 경우들 또한 많았다. 그리고 요원들이 교도소에서 비전향장기수 등 좌익 재소자의 사상 전향 공작을 이끌기도 했다.[5]
10.26 사태 이후 김재규가 체포된 뒤, 전두환 정부 출범 뒤인 1981년에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꾸고 일부 권한을 보안사에게 넘겼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과 같이 일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은 관계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의 지위는 부총리급으로 장관보다도 높았다. 국무총리 바로 밑이었으며 역시 부총리급인 경제기획원 장관과 동급이었다. 일부 드라마들을 보면 국가안보회의에서 중앙정보부장이 국방 장관 아래에 앉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설정으로 실제로는 모든 장관들의 상석이자 국무총리 바로 아래에 앉는다.[6]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확인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4대 의혹 사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동백림 사건,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가 있다. 특히 동백림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경우는 외국의 사정을 무시하고 일을 벌였기에 당시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었다.
3.1. 고문 수사
그 외에도 들어가면 제발로 나오기 힘들다는, 속칭 남산 벙커로 악명높았다. 얼마나 사람들을 험하게 다뤘던지 중정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꿈에서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방에는 폐공장 등으로 위장한 분실들이 있어서 시시한 피의자들은 주로 거기서 처리했다. 연행된 이들은 입고 있던 평상복을 벗고 국방색 민무늬 군복을 입은 채 수사를 받았으며, 특히 간첩사건 같은 경우에는 본인뿐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잡혀가 무수한 곤욕을 치렀다. 수사관들은 고문으로 인한 상흔을 숨기기 위해 생고기 등으로 멍을 뺐다고 한다.이러한 수사가 극에 달했던 김형욱 부장 시절에는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 상관없이 일단 잡혀오면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심지어 국회의원조차 박정희한테 밉보였다는 이유로 지하실로 끌려가 다른 피의자들과 똑같이 고문을 당했다.
이런 과거 때문인지 1960년생 이전 태어난 사람 중 상대방을 협박할 때 자신이 중앙정보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만큼 정보부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크다는 이야기. 이런 모든 과오들은 국가정보원이 안고 가야 할 부담이다.
4. 중앙정보부장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인물들의 경우, 제3공화국에서 있었던 2인자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견제도 많이 받았다.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사람들이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도 이런 권력 집중의 폐해 때문이었다.대표적으로 최장기 정보부장 재임자인 김형욱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3선 개헌이 통과된 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박정희가 비서실장 이후락과 김형욱을 같이 잘라버렸다. 김형욱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워낙 많았기에 백수가 되자 보복을 피하려 망명길에 올라 미국에서 코리아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폭로했고, 그와 관련된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1979년 실종되었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설이 김재규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믹서기에 던져져 살해되었다는 이야기와 차지철이 보낸 암살자가 김형욱 부장을 납치해 청와대 지하실로 산 채로 끌고 오자 박정희가 손수 카빈총으로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둘 다 루머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의 발표에 따르면 김재규의 부하들이 현지에서 살해하고 낙엽으로 덮었다고 하는데, 정부 공식 발표가 이러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나마 김종필은 부장 퇴임 후 6공 출범 전까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지만 국무총리를 두번 지내고 대선까지 출마하는 등 무난한 삶을 살다 2018년에 사망했으며, 이후락은 중정부장에서 잘린 후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절대 충성을 약속하며 입 꾹 다물고 조용히 살았던 덕에 국회의원까지 지냈고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정권과 간신히 합의를 봐서 살아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운이 좋았다지만 이 양반도 전두환 집권기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서 크게 고생하다가 말년을 허망하게 보내고 2009년에 사망했다. 본인이 사망 전에 공개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의 재직 중 벌어진 정치 공작은 전부 박정희가 모르게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한다. 정말인지 아니면 이후락이 대인배인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다.
3대 중정부장 김재춘은 퇴임 후 박정희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후임 부장 김형욱에게 한동안 적지않게 들볶이기도 했다. 김재춘의 전임으로 2대 중정부장을 지낸 김용순은 불과 한달 반 정도 재임하고 물러나서 있는듯 없는듯 살았는지라 거의 논외 취급을 받고 있다.
역대 중앙정보부장 목록은 하단 참조.
4.1. 역대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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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 매체에서
현대사 관련 대중 매체에서 십중팔구 악역으로 나오는데, 이는 안기부도 마찬가지다.5.1. 드라마
- 코리아게이트 (1995, SBS)
- 야망의 전설 (1998, KBS2)
- 삼김시대 (1998, SBS)
- 제5공화국 (2005, MBC)
- 자이언트 (2010, SBS)
- 빛과 그림자 (2011, MBC)
5.2. 영화
- 증발 (1994)
- 이중간첩 (2003)
- 실미도 (2003)
- 효자동 이발사 (2004)
- 그때 그 사람들 (2005)
- 남산의 부장들 (2020)
- 킹메이커 (2022)
- 서울의 봄(영화) (2023)
6. 기타
1960~70년대 당시에는 운동선수의 군 복무지로 활용시키기도 했다. 60년대 중앙정보부 산하에는 양지 축구단이 있었는데 현재의 상무 축구단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 소속된 축구 선수는 육/해/공군 소속 중앙정보부 파견병 신분으로 간주했다. 이회택, 김호 등의 당대 영건으로 구성했다.이는 사실 체제 경쟁의 일면이었는데 양지 축구단은 북한 축구 대표팀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는 걸 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창설한 것이었다. 최강 권력을 자랑하는 중앙정보부에서 남북전 축구 대결을 위해 만들었으니만큼 지원을 팍팍 해줬는데 정작 남북전은 성사되지 않았고 오히려 한일전에서 이기는 성과를 거뒀다. 김형욱이 중정부장에서 경질 당한 후 1970년 해체했다.
야구 쪽에서도 비슷하게 중앙정보부 소속 야구단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좌절됐다.[7] 김응용 등이 뛸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김응용의 인터뷰로는 중정 야구단이 해체되고 육군으로 전출 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양지 축구 선수단과 같은 신분으로 처리할 예정이었던 듯하다.
특이 사례로 야구 선수 백인천은 중앙정보부 첩보원으로 대체 복무했다. 일본에서 뛰고 있었는데 병역이 문제되자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일본에서 첩보원 신분으로 병역을 필한 것으로 처리했다.
삼풍백화점의 창업주인 삼풍그룹 이준 전 회장이 중앙정보부 창설기 요원으로 활동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실제 그는 활동하는 과정에서 여러 기업인 및 건설가들과 커넥션을 만들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이후 삼풍그룹의 전신이 되는 동경산업을 창립한다.
7. 관련 사건
8. 관련 문헌
[1] 대한민국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제11·31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의 작품이다.[2] 미국은 정보 분야에서도 국내와 국외를 엄격히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여, 국내 정치에 대한 개입에 관해서는 CIA보다 FBI가 구설수에 오른다. 가령 존 에드거 후버가 국장을 맡던 시절의 미국 FBI는 미국 주요 유력 인사들을 사찰해 그들의 여러 비밀들을 쥐고 있었고, 덕분에 후버는 죽을 때까지 FBI 국장으로 재임하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영화 시카리오 시리즈에서 잘 묘사가 되는데 CIA 요원들이 미국 내에서 작전할 일이 생기자 국내 요원인 FBI 요원들을 대동하는 등, 그러다 마찰이 생기자 서로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등 두 정보 기관의 알력 다툼과 암투가 잘 묘사되어 있다.[3]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몇 군데 후보지를 놓고 고심하던 끝에 최종적으로 의릉을 낙점했다고 한다. 왕릉 중에서 중앙정보부 청사 자리를 고르라고 조언한 이가 박정희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둘 중 누구 아이디어였든 간에, 수십 년동안 이 나라를 쥐락펴락할 정치공작 센터로 왕릉을 선택한 것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 정보장교 출신들다운 절묘한 발상이었다." #[4] 이때 육군 특무대장이 그 유명한 김창룡이었으니 인권이나 월권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물론 김창룡만 있는 게 아니고 원용덕의 헌병사령부도 야당 정치인 등 민간인 대상 감찰 업무를 수행한 막장 오브 막장이었고 '김성주 치사 사건'이나 '동아일보 불온선전물 사건' 등의 정치공작을 진행한 바 있다.[5] 초기 중앙정보부법에는 검사의 지휘권 발동이 불가능했지만 너무 초법적 권한이라는 반발을 사자 개정되어 사라지긴 했다.[6] 현재 부총리인 경제부총리 기재부 장관과 사회부총리 교육부 장관은 다른 모든 장관들보다 의전서열이 앞선다.[7] 당시 북한은 친미 스포츠라고 야구를 금지하는 바람에 국가대표팀부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