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width=100%><width=20%>
원용덕 ||<width=20%>
조흥만 ||<width=20%>
전이호 ||<width=20%>
김재현 ||<width=20%>
전이호 ||
초대
원용덕 ||<width=20%>
제2대
조흥만 ||<width=20%>
제3대
전이호 ||<width=20%>
제4대
김재현 ||<width=20%>
제5대
전이호 ||
제6대 이강대 | 제7대 이찬영 | 제8대 정만교 | 제9대 이인호 | 제10대 정수남 |
제11대 김익순 | 제12대 최춘호 | 제13대 박승만 | 제14대 김정규 | 제15대 라흥도 |
제16대 윤장근 | 제17대 김만기 | 제18대 김진기 | 제19대 조명기 | 제20대 이동노 |
제21대 박희용 | 제22대 허신 | 제23대 최석립 | 제24대 신윤희 | 제25대 서철수 |
제26대 손태진 | 제27대 김영덕 | 제28대 류순곤 | 제29대 조래원 | 제30대 김보영 |
제31대 조래원 | 제32대 김보영 | 제33대 김시천 | 제34대 유외수 | 제35대 이정 |
제36대 한성동 | 제37대 홍종설 | 제38대 윤종성 | 제39대 승장래 | 제40대 백낙종 |
제41대 이종협 | 제42대 이재섭 | 제43대 이태명 | 제44대 전창영 | 제45대 박헌수 |
※ 명칭 변천 : 헌병총사령관 (초대) ▸ 국방부 합동조사대장 (2 ~ 11대) ▸ 국방부 조사대장 (12 ~ 24대) ▸ 국방부 합동조사단장 (25대 ~ 35대) ▸ 국방부 조사본부장(36대 ~ 현임) | ||||
※ 계급 변천 : 대령 (3, 5~8, 10, 12, 14, 15, 20~22, 28, 34, 42대) ▸준장 (2, 4, 9, 18~19, 25, 29~30, 43~ 현재) ▸소장 (11, 13, 16~17, 23~24, 26~27, 31~33, 35~41대) ▸ 중장 (초대) |
역임한 직위 | |||||||||||||||||||||||||||||||||||||||||||||||||||||||||||||||||||||||||||||||||
|
<colbgcolor=#2A5034><colcolor=#ffffff> | |
출생 | 1908년 |
한성부 | |
사망 | 1968년 2월 4일 (향년 59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 |
본관 | 원주 원씨 |
학력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
군사 경력 | |
임관 | 쓰핑 육군전치학교 신징 제1분교 (군의학반) 군사영어학교 (1기 / 특별임관) |
복무 | 만주국 육군 |
1932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5년 ~ 1961년 | |
최종 계급 | 중교 (만주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연합참모본부 헌병총사령부 총사령관 |
주요 보직 | 만주국육군군관학교 교의 군사영어학교 부교장 남조선국방경비대 사령관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본부 호국군사령부 부사령관 영남지구 계엄사령관 육군본부 헌병총사령부 총사령관 |
[clearfix]
1. 개요
만주국, 대한민국의 군인. 본관은 원주(原州)#.2. 생애
190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를 졸업한 뒤에 강릉군에서 개원의를 하다가 1932년에 만주군에 입대하였다. 군의관으로 근무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만주군 중교.[2]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부교장을 지냈다. 웃긴 게 부교장이었는데 학생이기도 했다.[3] 그후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였고 특별임관으로 소령 계급을 받았다. 남조선국방경비대 초대사령관을 지냈고 정치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1952년 5월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들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버스 채로 강제 연행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이에 이승만은 1953년 3월 3군 헌병을 통합한 헌병사령부를 만들어 원용덕을 사령관으로 앉혔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송효순, 홍구표, 한필동 등에게 지시해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4년에는 야당 정치인들의 집에 북한 공산당 명의로 쓰여진 선전 문서를 집어넣는 정치공작을 벌였다.[4]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몰락한 후 원용덕도 1960년 7월 29일 헌병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8월 3일 김성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특사로 풀려났다. 1968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3. 인간관계
아들인 원창희(元昌喜, 1933-1984)도 육군 장교로 임관해, 준장으로 전역했다. 1950년 6월 입교한 대한민국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입학생이 되었는데, 문제는 지원 및 입학 당시의 나이가 17세여서 입학 불가였다. 그러자 원용덕은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원창희가 육사에 입교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고, 심사위원들은 원창희를 입교시키는 대신, 한 명만 봐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1933년생 지원자들을 전부 합격시켰다. 하지만 원창희, 박경석 등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입교 후 25일 새벽(6.25 전쟁 발발) 서울로 진군하는 북한군을 막으려는 채병덕의 지시로 소총훈련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내촌-태릉 전투에 동원된다. 전쟁 동안 생도 중 3분의 1이 전사 및 실종되었으며, 첫 정규 4년제 육사 1기 졸업생은 이들이 아닌 전두환, 노태우 등이 속한 육사 11기들이 되어버렸다. 첫 정규 4년제 육사입학생들은 무려 46년이 지난 1996년에야 정식 육사 졸업장이 나오고, 육사 기수 대신 똑같이 전쟁터에 끌려나온 육사 10기(생도 1기)[5]의 다음 학번이란 의미로 '생도 2기'로 불리운다. 원창희는 박경석을 비롯한 동기들과 혼란 속에서 살아남아 부산에 도착한 후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군사경찰 소위로 임관했으며 아버지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했지만 10.26 이후로 신군부의 숙청 타겟이 되는 바람에 제대해야 했으며 이후 월남전 참전당시의 부상 후유증 때문에 1984년 51세로 사망했다.#40년대 말부터 콧수염을 길러서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방 이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상당히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가 어느날 성씨가 다른 사람을 삼촌이라고 데려오자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라며 취중에 농담을 던졌고 박정희는 그를 외삼촌이라며 둘러댔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남조선로동당 간부이자 수많은 군인을 남로당원으로 가입하도록 선동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 이재복이었다.
사실 박정희와는 단순 친한 사이 그 이상이었다. 박정희가 형인 박상희 때문에 연좌제로 잡혀들어가서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박정희를 변호해주고 박정희에게는 박상희의 잔당들을 실토하도록 설득해서 사형을 면하게 해줬으며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원용덕 덕분에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국 문관으로 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정희가 형 문제로 연좌제에 걸리기 전에는 대위[6]였는데 이 때도 박정희는 미군들과의 사이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중재한 것도 원용덕이었다. 미군 측에서 정말 마음먹으면 박정희를 갈아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원용덕이 박정희를 보호했다.
4. 기타
사망 11일 전인 68년 1월 24일 저녁에 신당동에 있는 그의 2층 양옥집(건평 60평)이 화재로 전소된 적이 있다. 소방서 추산 당시로 1,500만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화재 당시 원용덕 장군은 병환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어찌보면 일종의 복선이 아닐까 싶다.5. 대중매체에서
- 1981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정희룡이 연기했다.
- 1989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박경현이 연기했다.
- 1993년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극장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제거계획>에서는 배우 김일우가 연기했다.
- 1995년에 방영된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성우 겸 배우 김수일이 맡았다.
- 2003년에 방영된 SBS 대하사극 야인시대 102회에 등장하였으며, 김창룡, 한격만, 김장흥과 같이 이기붕의 지시를 거부하는 김두한을 협박하였다.
[1] 당시에는 연희전문이랑은 다른 학교였다. 뒤에 합쳐져 연세대 의대가 되었다. 연대 의대가 지금도 다른 과들이랑 따로 노는 이유 연세라는 명칭자체가 연희의 '연'과 세브란스의'세'를 합치면서 나온 단어이다.[2] 만주군은 괴뢰국이었지만 중국식 계급인 교관급 장교 표현을 썼다.[3]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미군정에선 위관급 장교 출신 군경력자들은 몇 주씩 교육을 시켰지만 영관급 장교 출신의 군경력자들은 하루나 이틀 만에 임관시켰다고 한다.[4]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에도 원용덕은 "그들(불온 문서를 받은 정치인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그랬다"고 말했다. 용공으로 몰아 잡아넣으려고 함정을 팠음을 인정한 셈.[5] 이들도 2년 교육과정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1년 교육만 마치고 투입되었다.[6] 그래서 육군본부에서 계급도 없이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김종필 중위에게 윗사람 대우를 받았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