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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조선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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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_의릉_정자각_원경_미술_2011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

1. 개요2. 역사
2.1. 훼손
3. 교통편

1. 개요

파일:서울_의릉_능침_전경(항공) 문화재청.jpg
懿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경종선의왕후 어씨왕릉이다.

효종영릉(寧陵)과 같은 양식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인데,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일직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반면에, 의릉은 완벽히 상하의 위치로 능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1]

1970년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에 속해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참고.#.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영녕릉, 선정릉처럼 여러 무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달랑 있다.

2. 역사

1724년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양주 중랑포 천장산 자락에 묻혔고, 뒤이어 선의왕후 어씨가 1730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 앞에 능을 조성했다.

경종의 뒤를 이었던 영조가 긴 재위 끝에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 16년에 윤구종이란 사람이 혜릉(惠陵)[2]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하였다. 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라면서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대 사람들도 영조가 경종에 대해 보인 우애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반증이다. 엄연히 경종 역시 한 시대의 국왕이었고 그 ‘삼종의 혈맥(효종-현종-숙종)’을 이어받은 정통성이 보증된 군주였다. 반상 구분이나 예법 엄격하게 따지던 왕조국가 조선에서 국왕의 능침 앞에서 말 타고 지나가면서 내리지도 않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관련 실록 기록)

이 '윤구종 사건'은 원래 정언 유성한이 정조에게 "전하께서 공부도 안하시고 여악이 난잡하게 노시는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라는 식의 불온한 상소[3]를 올려서 신하들이 죄를 줄 것을 청하며 뒷배경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것이다.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유성한이 과거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발언을 한 것과 유성한과 윤구종이 같은 패거리임을 거론하며 "경종 대왕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 역적 놈들이 사도세자를 핍박했는데 이런 자들이 경종 대왕과 영조 대왕, 사도세자에게는 충성했겠는가!"라는 주장을 하며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와 사도세자의 추승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경종의 죽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복잡하게 얽힌 사건으로 발전한다.[4]

2.1. 훼손

파일:/image/047/2010/09/06/1283752142.672210_IE001232276_STD.jpg
중앙정보부에 의해 훼손된 시기의 의릉

1960년대 이 의릉 가까운 자리에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5]가 들어섰을 때 중정에서는 무덤 앞에 연못과 계곡을 만들고 비단잉어를 풀었다. 실제로 연못을 다시 메우기 전만 해도 의릉 매표소에서는 잉어 먹이를 팔기도 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6] 구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7]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여기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3. 교통편

대중 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의 경우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이문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혹은 서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7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 버스 120, 서울 버스 147, 서울 버스 1222, 서울 버스 261번을 타고 의릉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여담이지만 의릉은 택시 기사들도 그 위치를 잘 몰라서 의릉으로 가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기사들이 많고, '안기부 자리 가 주세요'라고 하거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요' 해야 가기 쉽다. 오늘날에도 서울에 오래 살았던 중장년층은 의릉 부지를 '안기부 자리'로 기억하며 그 당시에는 이 주변이 굉장히 삼엄했다고 회상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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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항공 사진에서 곡장을 두른 능이 경종의 능이고, 앞 쪽 곡장이 없는 능이 선의왕후 능이다.[2]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으로 동구릉 내에 자리잡고 있다. 여담으로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하기 전 세상을 떠나 살아생전에 왕비가 되지 못했다.[3] 정조는 조선왕조 내에서 손에 꼽히는 공부벌레 임금으로 유명했기에 이 발언은 사실관계조차 무시한 모욕이었다.[4] 사실 이 일은 당시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치르는 일을 두고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인데, 이렇게까지 번진 것이다. 여담으로 이런 일을 촉발한 유성한은 주변의 탄핵 요구에도 정조가 벌을 주지 않았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5] 해외 파트 담당으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악명을 떨친 국내 파트는 그 유명한 남산에 있었다.[6] 원래 의릉 주변에도 건물이 몇 있었지만(과거 중앙정보부 건물로 추정) 대부분 철거해 석관동 캠퍼스 자체가 이원화되어 있다. 게다가 남은 건물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7] 링크 속 의릉 구역 안에 자리한 흰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