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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2:16:43

영남 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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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차 영남만인소 : 사도세자 복권 만인소3. 2차 영남만인소 :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4. 3차 영남만인소 :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5. 4차 영남만인소 : 서원 철폐 반대 만인소6. 5차 영남만인소 : 흥선대원군 봉환 만인소7. 6차 영남만인소 : 척사 만인소
7.1. 해설
8. 7차 영남만인소 : 갑신의제개혁 반대 만인소

1. 개요

조선 후기 영남(지금의 경상도) 지역의 1만명 내외의 유생, 즉 유학자들이 연명해 올린 대규모 집단상소를 가리킨다.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이라는 모토 하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이다. 이들을 대표로 하여 올린 우두머리 즉, '소수(疏首)'라 하였으며, 주로 벼슬에 나서지 않은 선비들이 맡았다. 특히, 서울에 연고지를 둔 노론의 권력 독점으로 중앙 정권의 권력에서 멀어진 영남남인들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로 불린다.

1881년 이만손 등이 올린 만인소가 가장 유명하며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만손의 만인소만 가르치고 있지만, 이만손의 만인소는 6차이며 그 이전에도 영남남인이 올린 만인소가 있었다. 1만여명 내외가 서명하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영남 만인소는 정조 때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총 7차례가 있었다. 이 중 상소문 원본이 남아 있는 3차, 7차 만인소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1차 영남만인소 : 사도세자 복권 만인소


1차 영남만인소는 총 두 번 올려졌다. 첫 번째는 1792년 윤4월 27일, 두 번째는 5월 7일에 올려졌다. 경상도의 유생 이우를 비롯한 1만 57인이 올린 첫 번째 상소문에 정조가 깊은 공감을 표하자 고무된 영남의 유생들이 다시 이우를 중심으로 1만 368인이 연명한 2차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정조는 감격한 나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유생들에게 여비를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소수 이우는 경종의 무덤인 의릉을 관리하는 참봉에 임명했다. 유생들은 3차 상소문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조가 간곡히 설득하자 순순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 전문(1차) #===
"아, 신들은 한 폭의 의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으나 사람을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다만 죽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매번 《시경》을 읽을 때마다 ‘한없이 멀고 푸른 하늘아 이렇게 만든 사람 누구이던가.’라고 한 곳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근일 서울에서 온 자를 통해 비로소 유성한(柳星漢)이 겉으로는 경계한다는 이름에 핑계대고 속으로는 부도한 마음을 이루려고 전하 앞에 상소를 올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신들이 여러 가지로 조심하여 비록 감히 사람들을 대해 입을 열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 생각하건대 전하가 신들에게는 군부(君父)이니, 어느 일을 숨기며 어느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의리란 천하의 공변된 물건이니, 비록 백대가 되더라도 공의(公議)를 기다릴 것입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위에 있으면서 모든 이치를 다 조명하고 있는데, 신들이 끝내 위에 한 번도 아뢰지 않는다면 어찌 신들의 평생의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발을 싸매고 문경 새재를 넘어 피를 쏟는 듯한 정성으로 대궐문에 부르짖으니,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 천만 죽을 죄가 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소한 행실을 삼가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하는 것이고 큰 의리는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굽어 용서하고 살펴주소서.

아, 신들은 곧 영종 대왕(英宗大王)[1]께서 50년 간 길러낸 자들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께서 영종의 후사로서 영종의 마음을 전수받고 영종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정치를 대리한 것이 14년 간이었으니 신들의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이 영종을 사랑하고 추대하는 것과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영남 사람으로서 세자 시강원에서 가까이 모신 자가 그간 많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강론할 때에는 대부분 정미(精微)한 곳에 나아가고 예의바른 용모는 장엄하여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는 은의(恩義)를 곡진히 한다.’고 하였으니, 신들이 목을 빼고 목숨을 바치기 원한 것은 타고난 병이(秉彝)의 천성이 진실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영종의 지극히 인자한 성품으로서 종묘를 부탁할 곳이 있는 것을 기뻐하고 국운이 무궁하게 됨을 경사스럽게 여긴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일종의 음흉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세자의 가차없는 사색(辭色)에 남몰래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이에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로서 비밀리에 국가의 근본을 요동시키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음모를 빚어내는 것은 귀신도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을 배치해 둔 것으로 세자의 좌우가 모두 적이 되어 오로지 속이고 과장된 거짓말로 하늘을 속이는 묘방(妙方)으로 삼아, 없는 일을 지적하여 있다고 하면서 흉측한 계책을 부리고 흰 것을 변환시켜 검다고 하여 진실을 모두 변환시켰습니다. 하늘이 비록 높지만 못된 기운이 때로 장애가 되고 태양이 비록 밝지만 무지개가 때로 침범하는 것이니, 이는 하늘도 면할 수 없는 바입니다.

대저 무인년과 기묘년 이후 5년 동안에 그들은 재주를 부리지 않은 바가 없고 수단을 시험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서로 체결하고 결탁한 자로는 강충(江充)과 같은 자가 몇십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상소로 세자를 욕하는 자도 있었고 급서(急書)로 고자질하는 자도 있었으니 이에 끌고 따르며 호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자의 기후가 혹 수심에 차고 우울할 때가 있으면, 이에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또 이야깃거리로 삼아 안팎에서 서로 선동하고 더욱 교묘하게 참언을 투입하여 원근(遠近)을 현혹시키고 더욱 시급히 소문을 퍼뜨려 끝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이것도 부족하여 건도(乾道)가 회복할까 염려하고 전하께서 영명(英明)한 것을 몹시 걱정하여 그들이 이미 사용했던 기술로 다시 이미 숙달된 수단을 시험하여 마침내 을미년과 병신년에 지렁이처럼 뭉친 여러 추악한 자들이 있게 되었던 것이니, 동방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가 이 무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함에 미쳐서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았으니, 온 나라가 바라는 바는 오직 삼가 천벌을 시행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과감히 없애버려 의리를 밝히는 데 있었는데, 어찌하여 17년 동안 조정에 있는 신하 중 건의하여 세자의 무함을 변석하자고 청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비록 전하의 다함이 없는 효성으로서도 또한 통쾌히 여러 역적들의 형을 바루지 않았으니, 대성인(大聖人)이 생각한 바를 이[蟣蝨]처럼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가 헤아릴 바는 아니지만, 초가집 밑에서 마음속으로 탄식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근일 비로소 두 노신이 연명하여 상소한 데에 대한 비답을 삼가 보았는데, 비답에 ‘지난번 등극(登極)하였을 초기에 차례차례 대대적으로 처벌을 시행하여 요행히 이미 죽은 흉악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그 형벌을 용서하지 않았고,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팔의(八議)의 규정에 적용시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읽어본 이후에 비로소 전하께서 옛 역적을 제거하는 의리에 엄격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천하의 대법을 전하고 인륜을 만대에 수립하는 데에 열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신들과 같이 우물안에 앉아 있는 자들이 어찌 능히 하늘의 광대함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은 나름대로 전하의 이 조치가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극히 잘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전하께서 선세자(先世子)의 역적을 다스리는 것은 천지가 허여한 바이고 신명도 살펴보는 바이니, 마땅히 그 죄를 명시하고 명백히 그 죽임을 가하여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아무개는 어느 해의 극악한 역적으로 극형을 당하였고 아무개는 어느 해의 수종자로 그 다음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한 뒤라야 의리가 세상에 크게 밝아질 수 있고 형정(刑政)이 후세에 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하지 않아 전하의 마음은 비록 어느 해의 역적을 다스린 것이라고 하지만 죽은 자도 자기의 죽음이 어느 해의 죄로 연유한 것인지 모르는데 더구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어떻게 알겠으며, 또 더구나 먼 지방에 사는 신들과 같은 자가 더욱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의리를 밝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밝혔다 여기지 않고 전하께서는 형정(刑政)을 거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행했다 여기지 않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선조(先朝) 때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선세자(先世子)의 역적을 토죄(討罪)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들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매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듣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도 모년(某年) 뒤에는 즉시 뉘우치면서 매번 그때에 안금장(安金藏) 과 같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고, 또 고(故) 중신 조중회(趙重晦)가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전교하기를 ‘경은 볼 수 있으나 이이장(李彝章)은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선대왕의 안색에 수심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는 이이장이 그때 이미 작고(作故)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삼가 듣건대, 전하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너의 원수는 김상로(金尙魯)이다.’ 하였다고 하니, 이로 말하면 선대왕께서 그때의 간신(諫臣)을 추후 생각하고 당시의 참소한 역적을 몹시 미워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모년(某年)의 의리를 천지에 세워 법을 범한 여러 흉적들을 법대로 다스린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선대왕의 본심(本心)을 받드는 것이 되지 어찌 선대왕의 지극히 자애로운 덕에 손상이 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처치한 것이 은밀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의 잔당이 오히려 흉악을 멋대로 부려 선세자(先世子)를 무함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충신이라 하고 선세자를 옹호하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역신(逆臣)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충신과 지사(志士)들은 말하려고 하다가 즉시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려고 하다가 즉시 자제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의리가 밝혀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는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고 높은 이를 위하여 휘하니, 높은 이와 어버이에게는 설령 휘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휘하는데, 더구나 무함하는 말로 기필코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자는 《춘추》의 의리로 논한다면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억세어서 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 무리들이, 소굴이 이미 깊고 근본이 이미 견고해져서 공공연히 흉악한 말을 멋대로 하기를 마치 아비는 전해주고 자식은 물려받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금일에 이르러 성한(星漢)의 상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상소가 비록 강학(講學)을 권면한 것 같지만 권면하는 곳에서는 모두가 희미하게 헤아릴 수 없는 말이 있고, 비록 임금의 잘못을 진달한 것 같지만 임금의 잘못을 진달하는 곳에서는 모두가 전일의 습관대로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성한은 일개 미천한 부류일 뿐이니 그가 비록 사나운 짐승과 같은 심보를 가졌다 하더라도 진실로 익히 듣고 보아서 예사로운 일로 여기지 않았다면 홀로 어찌 멋대로 흉악한 입을 열고 종족이 침몰당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믿는 바가 있어 그랬을 것입니다.

대저 근년 이래로 법망이 매우 소활하여 비록 극악한 역적과 대단히 악한 자라도 전하께서는 혹시 다른 사람들까지 체포할까 염려하여 서둘러서 그 사람만 처벌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김하재(金夏材)와 같이 군신(君臣)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흉악한 자라 하더라도 한 번도 그 도당을 신문하지 않고 끝내 법을 적용하여 마치 입을 막아버리고야 만 것처럼 하였으므로 인심은 징계하거나 두려워할 줄 모르고 국가의 기강은 날로 무너져 지금은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순(虞舜)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삼간 것은 오직 형벌 뿐이었는데도 오히려 ‘호종(怙終)의 경우는 처벌한다.’고 하였으니, 호(怙)란 믿는 데가 있는 것이고 종(終)이란 두 번째 범법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성한(星漢)의 무리가 소굴을 의지한 것은 믿는 데가 있는 것이요, 무인·기묘년의 일이 있었는데도 그치지 않아 을미·병신년의 역적이 있었고, 을미·병신년의 일에서 그치지 않아 하재(夏材)와 같은 역적이 있었으며, 하재와 같은 역적에서 그치지 않아 이율(李瑮)·구선복(具善復)이 있었고, 이율과 선복에서 그치지 않아 이에 성한(星漢)이 있었으니, 이는 다만 두 번째 범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순임금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방치해 둔 채 신문하지 않았으므로 대신과 삼사(三司)가 법에 의해 간쟁하고 논란하였으나 윤허를 내리지 않았고 노신과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논단하여도 한결같이 윤허를 아끼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순임금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전하로서 형벌을 쓰는 데 이르러서는 어쩌면 이토록 같지 않단 말입니까. 실로 평일 전하에게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신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릿길을 와서 서로 거느리고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성한(星漢) 때문이 아니고 실은 성한의 소굴과 근거가 염려되기 때문이며, 단지 소굴과 근거가 염려되기 때문만이 아니고 세자의 무함이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음이 통한스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영남(嶺南)을 돌보아주신 것이 저처럼 절실하고 영남을 예로 대우함이 저처럼 지극하니, 영남의 진신(搢紳)과 유생들은 모두가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목숨을 바쳐 보답하려고 한다면 선세자(先世子)를 위하여 무함을 변명하는 것이 단연코 제일의 의리이니, 신들이 어찌 차마 자신과 집안을 생각하여 몇십 년 동안 맺힌 회포를 한 번 죽을 각오로 곧바로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신들도 이 말이 한 번 나오면 성한의 무리들이 역적으로 몰아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신이 되는지 역적이 되는지는 전하께서 반드시 통찰할 것이고, 후세에 동호(董狐)의 붓 을 잡은 자도 또한 반드시 판단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신들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특별히 유의하여 선세자의 무함이 참소하는 역적에게서 연유했음을 명백히 변명하여 팔도에 알리고, 허다한 역적에게 미처 시행하지 못한 형벌을 바로잡아 윤리와 강상을 부식(扶植)하며, 성한(星漢)과 같이 지극히 흉악한 자는 그의 소굴과 근거를 심문하여 화(禍)의 근본을 근절하면 종묘 사직에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으며 신민(臣民)들에게도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도중에서 또 삼가 듣건대 역적 윤구종(尹九宗)이 천지간에 없었던 흉악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 무리들의 믿고[怙] 재범[終]하는 짓이 어쩌면 이처럼 갈수록 더욱 극심합니까. 성한은 그 말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잡을 수 없고 은미하여서 반드시 분석해 깨뜨린 뒤라야 그의 흉악한 심보가 드러나게 할 수 있지만, 구종으로 말하면 자기 입으로 직접 지극히 흉악한 공초를 하였으니 오직 법을 적용할 뿐입니다. 구종과 성한은 역적질한 것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이 무리가 선세자(先世子)에게 불충한 것은 대체로 같습니다.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가 미루어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이 미친 것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자입니다. 어찌 자복하였으나 지레 죽었다고 하여 노적(孥籍)의 법률을 적용하기를 어렵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여러 신하의 요청을 따라 조금이라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憤)을 덜어주시길 천만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16년(1792년) 윤4월 27일 출처

===# 전문(2차) #===
"신들이 외람되게 짧은 글을 올려 감히 높으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는 비록 천지에 세워도 되는 것이지만 그 말은 모두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억울하여 눈물이 눈에 가득 고이고,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땀이 등을 적셨습니다. 이에 우리 성상께서 선대왕을 추모하는 생각을 미루시고 초야(草野) 사람의 말에 감동하심을 입어 특별히 후원(喉院)에서 물리치려던 즈음에 받아들이기를 명하시고 인하여 매우 엄한 문폐(文陛)에서 사대(賜對)하셨으니,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버러지같이 미미한 저희가 어찌 감히 이렇게 될 줄을 꿈엔들 기약하였겠습니까. 황송하여 숨을 죽이고 서로 이끌며 들어가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니 처참한 모습에는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였고 옥음(玉音)을 들어보니 목이 잠겨 말을 하지 못하셨으니 신들이 목석이 아닌데 어찌 피눈물을 흘리며 창자가 찢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비답을 내리셔서 의리가 바른 것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영남 선비들의 공(功)을 면려하셨으니, 신들은 비록 그날 죽었다 한들 어찌 다시 유감이 있었겠습니까. 마땅히 손으로 은혜로운 윤음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아서는 의리를 강마하는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의리를 품고 돌아가는 귀신이 되면 분수에 족하지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할 계책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의리와 일은 본디 두 가지 이치가 아니어서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일에 시행하고자 해서이며, 일을 결단하여 하는 자는 반드시 의리에 근본을 두는 것인데, 의리를 말로만 한다면 이는 공언(空言)인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의리가 위에 있었고 삼대 이후에는 의리가 아래에 있었는데 이는 고금의 유식한 선비들이 다같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신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삼대 이하에 있는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의리’란 두 글자를 영남 땅에만 있게 하는 데서 그치려고 하시니, 신들이 만약 묵묵히 한 마디도 없이 물러간다면 이는 ‘우리 임금은 할 수 없다.’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들에게 하교하신 바를 공손히 듣지 않은 것이 아니요, 전하의 마음을 신들이 우러러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신들이 끝내 석연치 못한 것이 있어서 부득이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의리를 거듭 나타내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그 광망(狂妄)함을 용서하시고 살펴주소서.

아, 천하의 의리가 비록 미세하지만 그 대경(大經)·대법(大法)으로 천지에 뻗쳐 있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신하된 자는 군부(君父)에게 충성하고자 하고, 군부에게 충성하고자 하면 그걸 미루어서 우리 임금의 아들을 사랑하여 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없을 때에는 학수고대하는 사랑함이 있고, 일이 발생하면 부심하는 충성이 있는 것이니, 이런 의리는 흉역(凶逆)의 종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병이(秉彝)의 천성을 다같이 타고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한 도(道)가 같은 소리로 1만 명이 서로 호응하여 천릿 길에 발을 싸맨 채 생사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온 것은 참으로 같이 부여받은 천성으로 반드시 30년 동안 맺혀 온 선세자의 무함을 분변하고자 한 것입니다. 흉적을 주토(誅討)하는 것은 변무(辨誣)한 후에 차례로 할 일입니다. 신들이 비록 먼 고장에서 생장하였으나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어찌 대궐 부근의 소식이 정확히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장헌 세자(莊獻世子)께서는 예학(睿學)이 날로 발전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 드러나서, 대리(代理)의 명(命)을 받들면서부터 매양 빈대(賓對)하는 자리를 당하여 용의(容儀)가 정숙하고 수작이 간략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존경하고 삼가 두려워한 것이 대조(大朝)와 차이가 없었으며 서무(庶務)를 수응하기에 이르러서는 큰 일은 대조에 품하고 나머지 일은 모두 친히 스스로 재결(裁決)하셨는데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조정이 다함께 알고 있던 바입니다.

참소하는 말이 성하게 퍼져 인심이 의혹되는 즈음에 미쳐서 온천에 거둥하신 일이 있으셨으나 혹 한 가지 일이라도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시고 혹 한 사람이라도 생업을 잃을까 염려하여 거듭 단속하시고 정성껏 보살펴주셨으니, 모든 백성들이 깃발을 우러러 보면서 모두 손을 모아 감축하였고 지금 30, 40년이 되도록 호서의 부로(父老)들이 지난 일을 언급하면서 이따금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으니, 이는 경외(京外)가 다함께 아는 바입니다.

영남 사람인 고(故) 설서(說書) 권정침(權正忱)의 그날 일기(日記)를 보건대 선대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기에 힘쓰고 다른 기미(機微)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화변(禍變)이 일어나는 즈음에 예학과 조존(操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신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저 푸른 하늘은 무슨 까닭으로 허다한 소인배들을 출생시켜 임금을 진동시킬 권력으로 내원(內援)을 맺어 참소하지 않은 말이 없었고 꾸며대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잗다랗고 하찮은 일을 태산(泰山)같이 불렸고 없는 일을 진짜로 만들었는데 그 기미가 매우 비밀스럽고 그 모의가 더욱 급박해져 필경에는 김상로와 홍계희의 계책이 이루어져 종사(宗社)가 거의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이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의리에 입각한 자들은 모두 주토(誅討)를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은 것으로써 애가 타고 뼈가 저리지만 신들은 예무(睿誣)를 분변하는 것이 급하고 주토는 그 다음이라고 여깁니다. 참으로 예무를 ‘감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두고 엄히 다 변론하여 분명하게 후세에 보일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장차 무엇을 근거하여 참무(讒誣)를 씻고 진적(眞蹟)을 크게 써서 선대왕의 인자한 덕과 선세자의 지극한 효행을 아울러 우주 사이에 일제히 빛나게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이렇게 된다면 비록 오늘에 형정(刑政)에서 군흉(群凶)의 당여(黨與)들도 아울러 남김없이 죽인다 하더라도 역시 신하들의 지극히 원통한 마음에는 보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토는 그 무함을 성토하는 것이니, 무함했던 자가 주토되면 무함을 받은 처지에서는 변명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필연의 형세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주토하는 법이 변무의 다음이라 하여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설혹 크게 주토를 행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령이야 어두운 가운데서 기뻐하시겠지만 경모궁(景慕宮)의 혼령은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참으로 이렇게 된다면 내가 후일 돌아가 뵈올 면목이 없을 것이다. 어버이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니,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전하의 이 하교는 의리의 미묘한 곳까지 세밀하게 분석하신 것이지만 신들은 황공하게도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선왕께서 주토를 기뻐하시어 참으로 형체 없는 데서 보시고, 소리 없는 데서 들으신다는 뜻에는 신들도 삼가 감복하고 있습니다. 선세자의 밝으신 마음으로 헤아려보아도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기실 것은 이치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어찌 슬퍼하고 불안해 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어버이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신다면 선세자께서도 또 어버이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실 것입니다. 선왕께서 기뻐하실 일을 선세자께서 슬퍼하고 불안해 한다는 것은 신들은 그럴 이치가 없다고 봅니다.

아, 선세자는 영묘(英廟)를 아버지로 삼고 전하를 아들로 삼으셨으니, 천하에 근심이 없기로는 반드시 문왕(文王)에게 별로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들로 하여금 변무(辨誣)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눈물을 흘리며 전하 앞에서 일제히 호소하게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먼저 예무(睿誣)를 밝히고 다음에 주토를 거행하여 의리에 흠결이 없게 한 연후에야 밝게 오르내리는 선세자의 영혼이 참으로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빨리 신들의 말을 윤허하소서. 어찌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릴 일이겠습니까. 아, 인간 세상의 세월은 빨리 흘러서 새 능침(陵寢)의 음용(音容)이 아득하기만 한데 신들이 이 달을 당하여 이런 억울함을 호소함은 천의(天意)와 인사(人事)가 실로 기약하지 않고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애통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선세자께서 무함을 입게 된 까닭을 다 말하여 팔도에 반포하시고, 이어서 또 전 수찬 이지영(李祉永)의 상소 가운데서 논한 여러 역적에게 혹 노적(孥籍)하는 율을 시행하거나 혹 추탈(追奪)하는 법을 시행하여 윤리와 기강을 세우고, 유성한(柳星漢)의 소굴을 따져 조사하고 윤구종(尹九宗)에게 빨리 추율(追律)을 행하소서. 그와 아울러 대청(臺請)을 윤허하되 하루라도 지체시키지 않는다면 신들은 비로소 의리가 크게 행하여져 돌아가 부모와 종족에게 자랑하고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하찮다고 하여 말까지 버리지 않으시면 종묘 사직에 다행한 일이며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16년(1792년) 5월 7일 출처

3. 2차 영남만인소 :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


다른 만인소와 달리 경기, 호서, 호남, 해서, 영남의 유림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9,996명이 연명하였다.

===# 전문 #===
"성인(聖人)의 정사는 인륜을 밝히어 근본을 돈독히 하는 데에 있고 생민의 도리는 종통(宗統)을 높이고 분의(分義)를 다하는 데에 있는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으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막혀서 유행되지 않으니, 이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충현(忠賢)의 후예이고 사대부의 족속으로서 조정에서나 집에서나 모두 버림을 당하고 억울함을 안고 답답하게 살아온 지 4백여 년이 되었는데, 마치 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행히 성명(聖明)의 시대에 오랫동안 도(道)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졌고 깊은 사랑과 후한 은택을 베풀어 어느 하나 성취되지 않은 사물이 없는데, 신 등이 한갓 분의만 두렵게 여기고 사정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고루 감싸주신 하늘과 스스로 담을 쌓는 격이므로, 감히 서로 이끌고 나가 이와 같이 아뢰는 바입니다. 대체로 이른바 종통을 높이고 근본을 돈독히 한다는 것은 아비의 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례(儀禮)》의 전(傳)에 ‘짐승은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른다.’고 하였고, 야인(野人)은 ‘부모를 따질 것이 뭐 있는가?’라고 한 것입니다. 도읍(都邑)의 선비는 아비 높일 줄만 알고 대부(大夫)와 학사(學士)는 조상 높일 줄을 아는 것입니다. 덕이 더욱 높으면 대부와 학사가 조상을 높이는 것이 되고 재주가 더욱 낮으면 짐승의 어미만 아는 것이 되는데, 지금 사람의 축에 끼어 조상을 높일 줄 아는 대부나 학사를 따르지 않은 것을 도리어 어미만 아는 짐승으로 몰아붙여서야 되겠습니까?

성인이 예를 제정한 때에 어미의 일가붙이는 경하게 하고 아비의 일가붙이는 중하게 한 것은 어미의 일가붙이를 경하게 보아서가 아니라 아비의 일가붙이를 높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약간 경하게 한 것입니다. 이적(夷狄)은 짐승과 같은 무리입니다. 어미의 일가붙이만 중히 여기는 것은 이적의 풍속인데 중화(中華)의 문물(文物)이 융성한 고장에는 이런 풍속이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신라 말엽 이후로 논의될 만한 윤리 문제가 매우 많았으나, 우리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예악(禮樂)과 전장(典章)이 찬란하게 구비되었습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상례와 제례를 사용하고 《춘추(春秋)》의 존왕 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숭상하는 등 강상(綱常)을 펼치고 예의를 돈독히 하여 도리어 중화(中華)를 앞질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신들이 앙심을 풀려는 일개 소인의 논의로 인하여 이적으로 대하고 짐승으로 대한 채 오래도록 변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명분(名分)을 구실로 삼고 있는데, 명(名)이란 것은 그 위치를 정하는 것이고 분(分)이란 것은 위엄의 등분(等分)인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시작하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고 아우가 형을 형으로 여겨 아들과 아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이 명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호칭할 때 도리어 노복이 상전에게 하는 예를 본받음으로써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일상의 떳떳한 정리까지 막히어 유행되지 못하게 하니, 명(名)의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명이 바르지 못한데 분(分)이 어디에 시행되겠습니까? 이른바 명분이 여기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졌으니, 어찌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같이 슬퍼하고 상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벼슬길을 막는 데 있어서는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정사에 지장을 줄 뿐만이 아니라, 신 등이 강상(綱常)에 분의를 다하지 못한 원인도 오로지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체로 이 법이 한 번 시행된 뒤로는 관방(官方)에 관계된 것은 각각 정해진 자리가 있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제한이 매우 엄격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가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비록 벼슬길을 열어주었다고 하지만 실은 열어준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이 세상에 나서 한(漢)나라의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과 진(晉)나라의 배수(裵秀)·완부(阮孚) 와 당(唐)나라의 소정(蘇頲)·두고(杜羔)·두순학(杜荀鶴) 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과 같은 재기(材器)와 진관(陳瓘) 추호(鄒浩) ·호인(胡寅) 과 같은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필시 어미가 천하다고 버렸을 것이니, 그 자신이 낭묘(廊廟)에 오르거나 세상의 명유(名儒)가 되는 것은 논할 것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무릇 풍속을 바꾸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입니다. 잘못된 습속을 답습하여 오랜 세월을 경과하다가 극도에 이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인데, 이 역시 물리(物理) 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다만 견문(見聞)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변통할 바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열성조에서 특별히 불쌍하고 민망하게 여기어 여러 차례 유시를 내리셨는데, 이는 지난날의 사첩(史牒)에도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지금 감히 하나하나 다 아뢸 수는 없습니다만, 지난 성종조 때 마침 가뭄을 만나 서류(庶類)를 금고(禁錮)한 것에 허물을 돌리시고 마음에 측은하게 여기시어 경장(更張)하려고 하시다가 갑자기 승하하셨고, 선조조에는 신분(申濆)의 상소에 답한 비답에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어찌 꼭 적손(嫡孫)뿐이겠는가?’라고 하셨으며, 인조조에서는 ‘벼슬길이 너무나 좁으니 재능에 따라 의망하라.’고 명하셨고, 현종조에는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건의할 때에 역시 옛날의 범위가 너무나 좁았다고 탄식하셨으며, 숙종조에도 널리 조정 신하들에게 묻고 누차 변통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조조에는 매양 선왕의 뜻으로 하교하고 심지어 임진년 의 처분이 있었습니다. 그 하교에 ‘서류는 양반이 아니었던가? 하나의 유자광(柳子光)으로 인하여 청직(淸職)의 길을 나가지 못하도록 금하였다면, 무신년 과 을해년 에는 〈서얼(庶孽)이〉 한 명도 없었으니 모두 충신이란 말인가? 절대로 구애하지 말고 건국 초기의 풍속을 존속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대왕께서는 즉위하신 초년에 특별히 벼슬길을 소통시키는 방도에 진념하여 조목조목 절목(節目)을 아뢰게 하셨으나,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참작하여 정한 것이 품계를 제한하여 옛날처럼 막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제한이 아직도 많아 적체된 것을 소통시킬 수 없다고 여기시어 하교하시기를 ‘이들도 사족(士族)의 후손인데, 어떻게 여염의 미천한 부류들과 동등하게 하여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역시 과인의 잘못이다. 인륜의 떳떳한 호칭을 알려고 하면서 도리어 천리 밖 풍속이 같지 않은 습속을 사모하고 있으니, 조정의 관직이 어찌 사대부의 등급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전조(銓曹)에 통망(通望)하라고 하신 주의나 태학에서 나이의 순으로 서열을 정하라고 하신 유시는 기어코 점차 길을 트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해 더욱 간절히 말씀하셨으나 승하하신 바람에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이 다하도록 못 잊어하는 마음은 팔도의 사람이면 똑같은 것입니다만, 신 등에 있어서는 부모를 잃은 듯한 슬픔이 더욱 간절합니다.

그리고 역대의 명유와 석학들도 모두 소통의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기어코 시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고(故)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열공(文烈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 문충공(文忠公) 오윤겸(吳允謙), 문정공(文正公) 최석정(崔錫鼎) 등이 상소나 계사로 진달하여 말뜻이 간곡하고 측은하였는데, 거기에서,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어찌 적손과 서손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이토록 편협합니다.’라고 하였고, ‘우리 조정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대신들은 그들의 자손만 생각했지 만세토록 인재를 잃는다는 우려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예제(禮制)의 규정이 삼대(三代) 때보다 더 엄한 적이 없었으나 적손과 서손의 명칭은 사가(私家)에서만 시행되었지 조정에서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문벌을 숭상하는 것은 육조(六朝) 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을 쓸 때에는 아비의 성만 묻고 어미의 일가붙이는 묻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비록 재능과 덕망이 출중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눌려서 드러나지 못하고 배척하여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부자의 윤기와 군신의 의리가 없어졌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를 거스리고 인기(人紀)를 손상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서얼을 천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왕자(王者)가 어진이를 맞이할 때 제한이 없다는 도리에 결여됩니다.’라고 하였고, ‘서얼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족히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뜻을 손상하는 것으로서 선왕(先王)의 공명 정대한 정사는 아니니, 통용(通用)하는 조치가 있어야 매우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서얼을 제한하는 법은 애당초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범위가 너무나 좁아 문벌 외에는 아무리 기특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등용될 수 없으니, 만일 상규(常規)만 따르고 구례(舊例)만 지킨다면 끝내 안팎의 인심을 수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사가 목이 마르고 부황(浮黃)이 나 움막 속에서 즐비하게 죽어가고 있으니, 필부(匹夫)가 원한을 품어도 족히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인데 더구나 그 수가 이렇게 많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옛날에는 후한 예절과 두둑한 폐백으로 이웃 나라의 어진이를 대우하면서 오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지금은 법을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역내(域內)의 백성을 금고하여 혹시라도 등용될까 두려워하면서 정작 사변이 눈앞에 닥치면 매양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걱정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시골 미천한 부류의 자식도 가끔 높은 벼슬을 하는데 세족(世族) 명가(名家)의 서손은 영원히 금고되어 버림받고 있으니,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그 전도됨이 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모두 그 개략적인 것인데, 백분의 일도 거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소를 올리려다 미처 올리지 못하고 글을 올렸다가 퇴짜를 맞은 것으로 강설(講說)이나 기문(記聞), 비문(碑文), 행장(行狀), 문고(文稿) 등에 나타나 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이 역시 통달한 식견과 넓은 지식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매우 공명 정대한 그 논의는 천지에 내세우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의혹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서얼의 처지만 위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세도(世道)를 도와 하늘의 화기(和氣)를 이끌려고 한 것입니다.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를 제창한 자도 처음엔 서선(徐選)·강희맹(姜希孟)의 무리뿐이었습니다. 전후로 어진 신하들이 잇따라 그들의 말을 배척하였고 보면 사정(邪正)의 판가름이 흑백보다 더 명백하게 났는데도 잘못된 폐습이 고질화되어 이를 금석(金石)처럼 고수하였으니, 이 점을 신 등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종법(宗法)이 중하게 된 것은 《주례(周禮)》에서 비롯되었으나 적장(嫡長)의 명칭은 오직 종자(宗子)만이 해당되고 종자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부터 첩의 아들까지 서손에 속하기 때문에 아비가 적자(嫡子)와 중자(衆子)의 상(喪)에 입은 복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중자와 서자의 복이 다르지 않은 것은 적자는 두 개의 종통이 없고 중자와 서자는 똑같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 서자가 아비의 뒤를 잇는데, 서자가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으면 중자의 자식과 같이 되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서손이라고 한 것은 역시 아들이 첩을 얻어 낳은 아들을 말한 것이지, 첩의 아들을 서손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삼대(三代) 이후 적손과 서손의 구별이 이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예전(禮典)에도 특별히 ‘적처나 첩 사이에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후사를 세우게 한다.’는 글이 실려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왕이 예를 제정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아비와 아들을 바꿀 수 없고 뒤가 끊겨야만 비로소 후사를 세우도록 허락한다는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그 누가 골육(骨肉)의 자애스러움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에게서 난 아들이 있어도 남처럼 보고 반대로 먼 일가붙이는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할아버지와 아비의 혈연(血緣)이 연속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관작으로 가문을 지탱하려는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후사를 잇는 것은 조상을 위하는 것이고, 관작은 후손을 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후사를 잇는 것이 도리어 경시되고 관작이 중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신 등으로 하여금 윤상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윤상이 없어짐에 따라 성세(聖世)의 버린 물건이 되었습니다. 어찌 매우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한집안 안에서는 적손과 서손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선정신 조광조(趙光祖)도 이 일로 건의하여, 동성(同姓)을 6촌까지 타성(他姓)은 4촌까지 제한해서 정해진 한계를 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만, 어찌 조정에서 적손과 서손의 문벌을 논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정에서 사람을 쓸 때 오로지 문벌만 숭상하기 때문에 신 등이 더욱 가슴이 내려앉고 답답해 하는 것은 바로 대대로 전해온 문벌을 보전하고 싶은 생각에서 입니다. 대체로 문벌을 숭상한 것은 진(晉)나라 시대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벌이란 것은 벼슬아치의 자식은 비록 서손이라 하더라도 사족(士族)과 같고 서민의 자식은 비록 적자라 하더라도 끝내 군대에 편입되었지, 외가가 높고 낮음에 따라 본종(本宗)까지 높히거나 낮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서얼은 한집안의 서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서얼이 되고, 온 세상의 서얼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만세의 서얼이 되니, 천리로나 인륜으로나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현의 경전(經傳)이나 역대의 상전(常典)에서 찾아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몹시 불초하지만 사지[四體]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칠정(七情)도 똑같이 하늘에서 품부받았으니, 나라에서 볼 때에는 다같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후예이고, 조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한 번 서손이라는 이름이 붙자 일신만 금고(禁錮)되고 폐기될 뿐만 아니라, 대대로 영구히 철벽처럼 벼슬길이 막혀 있어서 도리어 뿌리나 파(派)도 모르는 향품(鄕品)이나 한미(寒微)한 족속들이 세상에 구애받지 않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람으로 대우하려고 하지 않고 저들도 감히 사람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배웠다가 커서 실행한다고 성인이 가르치셨는데 죽는 날까지 애써 공부를 해 보았자 필경에 무엇을 성취하겠습니까? 혁혁한 가문을 계승한 것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문호(門戶)가 나뉘어 외딴 산골에 움츠리고 살면서 마치 죄나 지은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지만 신 등과 같은 사람은 울분을 풀지 못한 채 머리가 점점 커서 철이 조금 들면 원하는 바는 바로 죽음입니다. 대체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폐기된 물건으로 자처하여 천지 사이에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무한한 곤고를 치르므로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신하 육지(陸贄)의 말에 ‘성왕(聖王)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마치 옥(玉)이 든 박(璞)을 던져버리면 돌멩이나 갈 뿐이지만 다듬으면 규장(圭璋)이 되는 것과 같으며, 물이 나는 근원을 막으면 썩은 물이 될뿐이지만 터놓으면 시내도 되고 못도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돌멩이나 규장, 썩은 물이나 시냇물 등이 애당초 두 개의 판이한 물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 등의 처지는 흡사 내동댕이친 박이나 막아버린 물과 같으니, 한가닥 구구한 마음이 어찌 다듬어 주고 터주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영조조에는 ‘서얼이 일국의 절반을 차지하였다.’고 하교하셨고, 선대왕께서도 좁디 좁은 나라에서 서류(庶類)를 빼면 일국의 절반을 잃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출생은 날마다 늘어나는데 낳는 족족 금고시키면, 그 원한이 더욱 심해지고 그 울분이 더욱 쌓일 것입니다. 전후로 크고 작은 공론이 제기될 때마다 화기(和氣)를 해친다는 말로 신 등을 지적해 왔는데, 비록 신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해 보라고 하더라도 원통에 사무쳐 감히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의 궁박한 사정은 아플 때에 부르짖는 것보다 더더욱 심하니, 벼슬의 현달을 의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 등이 사람의 축에 끼지 못한 것은 관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찌 감히 사소한 혐의가 두려워 지극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아 해와 달처럼 사(私)가 없으신 성상으로 하여금 아랫사람의 실정을 통촉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관작이란 나라의 당당한 공적인 기구이니, 인재를 격려하고 어질고 어리석은 자를 선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조(銓曹)에서 선발하는 때에 제한만 존속시키고 주의(注擬)할 때 현저히 차별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천박하게 여기는 습성이 이루어져 고루한 것을 변통하기 어려우니 신 등이 비록 의관(衣冠)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네발로 기어 다니고 부리로 숨을 쉬는 무리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향학(鄕學)에 있어서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인데도 유사가 문안을 조사하다가 일개 역적 이율(李瑮)의 거짓 통문(通文)으로 인하여 길을 터주었다가 곧바로 막아 좋은 법규(法規)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향당(鄕黨)과 서숙(書塾)에서 배척하는 풍조가 조성되고 제사지내는 곳에 양보의 미덕이 땅을 쓸 듯이 없어짐으로써 융성한 시대에 수치거리를 끼쳤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습속의 좋고 나쁜 것은 오직 벼슬길의 막히고 트임에 비례하는데, 벼슬길의 막히고 트임은 오직 선발과 추천의 사이에 차별과 제한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인물을 차별하고 제한하는 것은 선왕의 정전(定典)이 아니고 이륜(彛倫)을 바르게 펴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고 보면, 이를 경장(更張)하는 일이야 어찌 잠깐 사이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좋은 시대를 보기를 원하고 있던 차에 울분을 반드시 풀 때를 당하였으므로 발을 싸매고 멀리 와서 피눈물을 흘리며 성상께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우리 열성조의 지극하셨던 뜻을 본받으시고 또 여러 명유와 석학들의 논의를 직접 들으신 것으로 여기셔서 굽어 받아들여 특별히 처분을 내려 주심으로써 신 등으로 하여금 집에서 종통을 높이는 도리를 다하고 조정에서는 근본을 독실히 하는 정사를 밝혀 습속이 크게 변하고 혜택이 두루 미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산 사람만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고 하겠습니까? 또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한 귀신들도 백골에 미친 후한 은혜를 칭송할 것입니다."
순조실록』, 순조 23년(1823년) 7월 25일, 출처

4. 3차 영남만인소 :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

만인소 본 문서에 나온 영상이 이 만인소이며, 현존하는 만인소 2점 중 하나로 전체 길이가 100m, 무게 30kg에 육박한다. 2004년 도산서원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으며, 2010년 KBS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국립안동대학교 실내 체육관을 빌려 최초 공개를 했는데, 최대 42m의 체육관 바닥을 두 번 왕복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1792년의 영남 만인소에서 알 수 있든 남인들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면서 내심 아버지의 신원을 바랬던 정조의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의 신중한 태도로 사도세자 신원에 실패했고, 정조 사후 벽파의 숙청으로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했던 인사들은 모조리 중앙 정계에 축출당했다. 이후 시파가 집권하면서 세도정치 시대가 열리게 되고, 남인들은 중앙에서 쫓겨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남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사도세자 탄생 2주갑(120년)이 된 1855년 사도세자 추숭 문제를 띄워 정계복귀를 시도했다. 1855년 1월 27일 도산서원에 모인 유생들이 소수를 선출하고 공론을 취합하여 상소문을 작성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영남 유생들의 호응이 부족했고, 그 사이 류치명이 사도세자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류치명은 퇴계학파의 적통이자 안동 유림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기에 소수 이휘병은 부진한 호응에도 만인소를 강행한다. 상소문에는 총 1만 432명이 연명하였다.

하지만 상경해서도 이런저런 문제로 상소문은 봉입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고, 5월 15일에야 철종의 명령으로 상소문이 봉입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류치명의 상소문과 대개 비슷했지만, 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만인소를 올린 유생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사도세자 추숭이 정치적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철종이 소수 이휘병을 불러 경고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고, 처벌을 요구하는 대신들의 상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도세자 문제로 재기를 노린 남인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향촌사회에서 남인의 결속력이 강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5. 4차 영남만인소 : 서원 철폐 반대 만인소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를 추진하자 여기에 반대한 영남 남인들이 올린 상소문. 중앙 정권에서 대부분 축출된 남인의 정치사회적 기반은 서원이었고, 서원의 대폭 정리는 영남 남인에게 큰 위기였다. 대원군은 영남 남인을 대폭 중용한 인사지만 서원 철폐만은 밀어붙였고, 옥산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등 47개의 사액서원만이 살아남았다.

당연히 분노한 남인들은 서원 철폐 반대 운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성균관의 남인 유생들이 권당을 벌였고[3], 각 읍별로 향회를 열거나 서원 간에 통문을 돌려 대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호계서원과 도남서원 등이 중심이 되어 소회를 개최했고, 4월 28일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모여 상주의 유생 정민병을 소수로 하고 1만 27명이 연명한 상소문을 작성했다.

유생들은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5월 20일 문경을 출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의지는 완강하였고 유생들은 상소문을 전달하기는 커녕 포졸들에게 의해 한양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서원 철폐는 흔들림 없이 강행되어 영남의 50여개 서원 중 35개가 훼철되었다.

여담으로 남인이 서원 철폐 반대 운동을 벌일 무렵 밖에서는 신미양요가 벌어지고 있었다.

6. 5차 영남만인소 : 흥선대원군 봉환 만인소


1873년 동부승지 최익현의 상소로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밀려난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병인양요 이후 만들어진 강화도 진무영을 철폐하려 하자 강력 반대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주의 별장에 칩거했다. 영남 남인을 중용한 대원군은 그들의 동앗줄과도 같았으므로, 영남 남인들은 대온군의 봉환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1874년 10월 25일 안동의 숭보당에서 열린 도회에서 소수로 정민채를 선출하면서 영남 남인들의 대원군 봉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을 쓰기도 전에 정민채가 체포당했고, 유생들은 이중진을 소수로 뽑아 상경하여 상소문을 봉소하려 했지만 의견 대립으로 이중진이 소수에서 사퇴했다. 이후 류도수를 소수로 뽑아 해를 넘긴 1875년 3월 5일 상소문을 전달했지만 당연히 분노한 고종에게 소수 등이 전부 유배형에 처해지는 결말을 낳았다. 유생들이 2차 상소문을 올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올리기도 전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호남, 관서, 해서, 관북의 유생들까지 가담하여 6월까지 복합(伏閤)을[5] 계속했으나 고종의 태도는 강경하여 소수들을 모두 하옥한 뒤 죽이려 하였다. 결국 6월 22일 밤 대원군이 돌아오면서 소수들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고종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했다. 이후 흥선대원군 세력은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으며 재야의 흥선대원군 봉환 여론도 사라졌다.

7. 6차 영남만인소 : 척사 만인소

영남 만인소 중 가장 유명하며, 보통 한국사 수업이나 수능에서 나오는 '영남 만인소'는 이쪽을 뜻한다.

흥선대원군 집권기를 거치며 유림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교를 반대하는 척화론이 강세였지만 고종과 개화파는 이와 반대로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외국과 통상 수교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1880년 일본으로 가는 수신사 소속이었던 김홍집이 중국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왔는데, 유림들이 이를 읽고 본격적으로 척사 운동을 벌이면서 만인소가 시작되었다.

1880년 11월 안동향교에 모인 경상좌도의 유생 800명이 이만손을 소수로 선출했고 1만 명이 연명하였다. 1881년 2월 26일 상소문이 전달되었지만, 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삼사에서는 이만손 등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이만손은 체포되어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지만, 이듬해 임오군란이 터지자 풀려났다.

한편 영남 만인소로부터 몇 달 뒤 강원도의 유생 홍재학이 똑같이 척사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만손의 것보다 훨씬 과격하고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결국 홍재학은 왕의 심기를 거드린 대가로 이듬해 처형당했다.

===# 전문 #===
"방금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1권의 책이 유포된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단(異端)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자에 대한 처벌은 왕법(王法)에 나타나 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춘추(春秋)》에 실려 있으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와 반대로 하면 혼란해진다는 사실은 영원히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역대 임금들이 계승하면서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3대(三代) 이후로 유도가 이처럼 융성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악한 예수교라는 것이 해외의 오랑캐 종족들에게 나와서 예의나 염치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강상(綱常)이 일체 없어져버리니 다만 하나의 짐승일 뿐이고, 하찮은 존재가 될 뿐입니다.

우리 정종(正宗), 순조(純祖)로부터 헌종(憲宗)에 이르기까지 선대 임금들이 이루어 놓은 법을 후세의 임금이 계승하여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는 작은 죄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요망한 난적(亂賊)들이 모두 주륙되었습니다.

우리 전하가 즉위하자 선대 임금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병인년(1866) 강화도(江華島)의 변란 때에 크게 토벌하니 추악한 무리들이 놀라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10년도 되기 전에 흉악하고 너절한 말이 한창 무성하게 퍼져서 이전에는 은밀히 서로 꾀던 자들이 지금은 방자하게 책을 쓰기까지 하고 이전에는 사적으로 서로 전습(傳習)하던 것을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우리에게 주면서 그것은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말씀보다 낫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구(文句)와 같다고 하니, 어찌 이리도 성현(聖賢)을 모욕하고 어찌 이리도 나라를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임금 앞에 나가서 이것에 대해 아뢰려는 자도 있고 등대(登對)하여 전파시키려는 자도 있으니, 아! 예로부터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밥을 먹으며 선비의 의관을 차리고 사신의 임무를 받고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전하에게 아뢰고 성인을 모욕하는 말을 은밀히 조정에 퍼뜨리며 적의 세력을 장황하게 설명하여 임금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여러 나라 사이에 균형을 지킨다는 설(說)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더구나 선대 임금은 그처럼 엄하게 배척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용납해서 받아들이며 병인년에는 그처럼 엄정하게 토벌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너그럽게 받아들이니, 신은 전하께서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대 임금께 우러러 아뢰며 후세에 할 말이 있으실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이른바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조목조목 따져 보겠습니다.

그 말에 의하면, ‘조선의 오늘날 급선무는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없는데, 러시아를 방어하는 대책으로는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번국(藩國)으로 자처해 왔고 신의(信義)로 교류한 지 거의 200년의 오랜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황제(皇帝)’요, ‘짐(朕)’이요 하면서 두 존칭(尊稱)을 태연하게 사양하지 않고 받으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의 글을 받아두었다가 만일 중국에서 이것을 가지고 따지면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

일본으로 말하면 우리가 견제해야 할 나라입니다. 국경 요새지의 험준하고 평탄한 지형을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대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함부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미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래 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그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 스스로 끌어들여서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로 미국에 가서 우리 신료들을 지치게 하고 우리나라의 재물을 썼는데도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허점을 알고서 우리가 힘이 약한 것을 업신여겨 따르기 어려운 청으로 강요하고 댈 수 없는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

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위업을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도발하게 하는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빌미로 삼아서 병란의 단서를 찾는다면 장차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또 게다가 러시아나 미국,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후하고 박한 차이를 두기가 어렵고,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 한 줄기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이미 실시한 일본과의 규례를 따르고 새로 맺을 미국과의 조약을 끌어대면서 와서 거주할 땅을 요구하고 물화를 교역하기를 요청하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또 더구나 세상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각 나라들이 서로 이 일을 본보기로 하여 땅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하기를 일본과 같이 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겠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성과는 다 없어지고 원수가 되며 여러 나라의 원망이 몰려들어 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러시아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허락한다면 세계의 한 모퉁이인 청구(靑邱)에 장차 수용할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황준헌의 말처럼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힘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해도 만 리 밖의 구원을 앉아 기다리면서 혼자서 가까이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일을 굳이 해서 러시아 오랑캐에게는 본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미국에서는 원래 계책으로 삼지도 않은 일을 계책을 삼게 하여 병란을 초래하여 오랑캐를 불러들이게 합니까?

그는 또 말하기를, ‘서학(西學)에 종사하고 재물 모으기에 힘쓰고 농사를 장려하는 데 힘쓰며 상공업에 힘써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재물과 농공(農工)은 선왕(先王)의 좋은 제도와 아름다운 규범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로하여 모여들게 하면서 덕을 베풀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항상 편안할 것입니다. 절약하는 것으로 제도를 삼아 먹는 것을 적게 하고 쓰는 것을 남게 한다면 재물은 항상 풍족할 것입니다. 무익한 일을 해서 유익한 일에 손해를 주지 않으며 다른 나라의 기이한 물건 때문에 본국의 재화를 천시하지 않는다면 공인(工人)들은 언제나 고무될 것입니다.

당요(唐堯), 우순(禹舜) 때에는 집집마다 어진 사람이 살았고 성주(成周)에서는 집에는 식량을 쌓아두고 여행할 때면 전대를 걸머지고 다녔으며 한(漢) 나라에서는 창고에 곡식이 붉게 썩어갈 정도이며 돈꿰미는 썩어났으니, 이것으로 하여 백성들은 용감하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선왕의 도리를 버리고 다른 묘책에 힘을 쓰겠습니까? 더욱 분통스런 것은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일본에서 연사(演士)로 행세하고 예수를 믿어 자진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앞잡이가 되고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어 버렸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혹시 지난날에 법망을 빠져나간 큰 괴수가 강화도의 실패에 분격해서 병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행수로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서 점차로 우리를 물들이려는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달콤한 말로 유인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고 위태로운 말로 위협하는 것에 힘을 다하였는데 또 무엇 때문에 ‘예수교를 전교(傳敎)하는 것이 해롭지 않다.’는 말을 끝머리에 붙이겠습니까? 그 심보를 알 만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우선 쫓아버리고 그 책은 물이나 불 속에 집어던져 호오(好惡)를 명백히 보이며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해서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주공과 공자,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 사람들이 모두 임금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가지게 하며 백성들의 마음으로 성(城)을 삼아서 더럽고 요사스런 무리들이 간계를 부릴 여지가 없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예절 있는 풍속을 장차 만대에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고종실록』, 고종 18년(1881년) 2월 26일 출처

7.1. 해설

요약하면 서양 오랑캐(洋夷)들은 예수교를 믿어 부자 군신 사이의 의리도 모르는 짐승(禽獸)들이므로 상종하지 말아야 하며, 일본은 서양에 개항하였으므로 기존의 오랑캐에서 짐승으로 타락했으니 막부와 맺던 교린(交隣)관계는 커녕 메이지 유신으로 정부가 바뀐 일본과 국교를 맺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일본이니 미국이니 하는 짐승들과 외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졌다. 애초에 조선책략의 내용은 이홍장이 구상한 것이고, 청나라 조정도 이홍장의 수하인 정여창의 상소와 통리기무아문의 주청으로 1879년 정식으로 조선의 개항과 서양과의 수교를 정책으로 확정했고, 지속적으로 조선이 개항하고 서양과 수교하라는 내용의 실무문서인 자문을 보내줬기 때문에 청나라의 속국이므로 외교는 청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만약 받지 못하면 외교를 안한다는 명분이 외국에는 아예 통할수가 없었다.

최익현이 "서양인이 원하는 바는 우리와 무역을 하는 것이다." 고 말했다고 무슨 산업 혁명을 꿰뚫었다는 둥의 헛소리도 있지만 이는 일찍이 청나라가 1,2차 아편전쟁을 겪고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선에 러시아는 영토를 탐내나 영미는 교역 이익만 추구하니 어서 수교하라며 설득한 것의 영향이다. 결국 청나라 타령하며 헛다리를 짚고 개항에 반대한 유생들은 귀양을 가게 된다.

전세계에 걸쳐 영국과 러시아는 그레이트 게임을 펼치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영국은 청나라를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와 러시아는 국경 분쟁 중이었으므로, 영국의 공러 의식에 대해 더욱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러시아의 남하에 필요 이상의 위협을 느끼고, 대러시아 방어 전략에 조선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조선책략이었다. 청의 의중은 쉽게 말해, 한반도에 여러 외세(일본과 미국)를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과 황준헌(黃遵憲;황쭌셴)은 만나게 되고, 조선 책략은 조선으로 흘러들어 조선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조선 책략의 내용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만인소를 올린 이들의 주장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일견 청나라의 종주권은 인정하면서 같은 시기에 올라온 홍재학의 상소를 보면, "중국이 오랑캐에 넘어가 천하에 시궁창 냄새가 진동한다."라고 할 정도로 문화적으로 중국을 오랑캐 취급하는 적개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열강들은 교화할 여지가 있는 오랑캐는커녕 날짐승 들짐승인 금수(禽獸)이고 이항로 같은 이들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갑각류(鱗甲)급 생물로 보았기 때문에 명분은 중국 속국, 실질은 주자성리학 질서 수호 예수교 반대 때문에 개항에 반대한 것이다.

일본과 갈등을 빚은 서계문제 즉 "천황이니 폐하이니 짐이나 하는 드립을 감히 사용하다니" 하며 펄펄 뛰고 국서 접수를 거부한 것에 대하여 청나라에서는 1871년에 일본과 대등하게 삼궤구고두례를 폐지하고 수교하였고, 일본과 조선 사이의 수교를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확인 했으며, 이홍장도 자문(咨文)을 보내 "짐이니 황제이니 하는 문구 타령으로 우리를 배려하는 건 고마운데 우린 상관없다. 상관말고 어서 수교나 빨리 하라."고 채근해서 조선이 더 이상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짧게 말하자면, "짐승같은 무리들과 접촉하지 말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관계와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는 행위기 때문에 어디와 수교하든 위험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냉정한 정세 판단과 유연한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남 만인소에 표현된 위정 척사파의 주장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감고 모르쇠로 일관하자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김홍집은 일본을 시찰하면서 일본과 서양과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양이와 일본은 같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다.

종전에 1879년 베이징에서 이홍장과 영의정 이유원의 회담에서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서양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여 이이제이(일종의 세력 균형)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제의하였으나, 국력이 약한 조선으로서는 비현실적이라고 거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수신사로 김홍집이 일본에 다녀온뒤, 일본의 사정[7]을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로 그 방향을 돌린 듯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조선 책략을 받아들여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과 수교를 시작으로 서양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맺게 된다. 조선에는 서양과 조약을 체결할 실무자는 커녕 서양어를 할줄 아는 사람 조차 전무 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파견한 마건충의 주도로 조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열강과 수교를 맺느다. 결국 조선 책략은 '조선을 위한 외교 지침서'보다 청국의 대러시아 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이후 위정척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조선의 근대화를 막았던 골칫거리들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8. 7차 영남만인소 : 갑신의제개혁 반대 만인소

위의 3차 만인소처럼 현존하는 만인소 중 하나이다. 해당 상소는 전달하려고 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복제 개혁이 취소되면서 임금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위의 3차 만인소와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하고 있다.


[1] 1890년에 영조로 묘호를 고쳤다.[2] 진성 이씨이황의 후손이며 6차 만인소의 소수인 이만손(李晩孫, 1811~1891)의 아버지이다.(부자 소수)[3] 권당(捲堂)이란 일종의 동맹 휴학과 같은 개념이다. 성균관에서 아예 나가버리는 행위, 제공하는 식사를 거부하는 행위(식사를 할 때 누가 먹는지 전부 확인했는데, 과거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일정 횟수 이상의 식사를 해야 했기에 이는 과거 거부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수업에 들어가도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눈 뜬 장님 행세를 하는 행위, 곡성을 내며 대궐까지 나아가는 행위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4] 그 전에 정민채(鄭民采), 이중진(李中振)이 소수로 선출되었지만 정민채는 안동부에 체포당했고 이중진은 중간에 사퇴했다.[5]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신하나 유생들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는 것.[6] 자는 가술(家述).[7] 생각보다 위협이 되지 않고, 세력 균형을 통해 이들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