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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04:05

여주 이씨

조선 6대 국반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60px><tablebordercolor=#fff> 驪州 李氏
여주 이씨
}}}
관향 경기도 여주시
시조 이인덕(李仁德)[1]
이은백(李殷伯)[2]
이세정(李世貞)
집성촌 경기도 수원시
경상북도 경주시, 포항시, 예천군, 고령군
경상남도 밀양시, 함안군
평안남도 중화군
인구
(2015년)
96,481명

1. 개요2. 본관과 관련하여3. 분파
3.1. 교위공파(校尉公派)
3.1.1. 서예공파(書藝公派)3.1.2. 상서공파(尙書公派)3.1.3. 정당공파
3.2. 문순공파(文順公派)3.3. 경주파(慶州派)
4. 연원5. 번성6. 실존 인물7. 항렬표8. 기타

1. 개요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이며 한국의 성씨. 고려시대 호족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며 조선시대 이언적을 배출함으로써 나라를 대표하는 양반가문인 국반(國班)으로 명성을 떨쳤다.

2. 본관과 관련하여

경기도 여주(驪州)를 근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은 여주(驪州)를 본관으로 삼고있다. 그러나 3파의 본관을 각각 다르게 써오고 있는데 교위공파는 고려 때는 황려(黃驪)로 조선 때는 여흥(驪興), 여주(驪州)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본관을 영의(永義)로 사용하는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본관을 (驪州) 쓰는데 이규보의 후손 가운데 하음(河陰. 지금의 강화)을 본관으로 사용한 지파가 있었다. 경주파는 예전부터 여주로 사용하고 족보도 여주로 쓰는데 여강(驪江)이라고 쓰기도한다. 그러나 현재는 여주(驪州)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3]

여주이씨(驪州李氏)에서 분적한 성씨로는 강화 이씨와 고령 이씨가 있는데 모두 문순공파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강화 이씨는 문순공파 이규보의 맏아들인 판도판서를 지낸 이함이 분적조이며, 고령 이씨는 이규보의 둘째 아들인 사간을 지낸 이징이 분적조이다.

3. 분파

3개의 상대종파(上大宗派)와 8개의 대종파(大宗派)[4], 16개의 중종파(中宗派)가 있다.[5] 소종파의 경우 약간의 이견이 있어 집안마다 다르게 센다.

3.1. 교위공파(校尉公派)

3.1.1. 서예공파(書藝公派)

5세 수산(秀山)을 파조로 한다. 현재 북한 지역에 거주한다.

3.1.2. 상서공파(尙書公派)

5세 수해(秀海)를 파조로 한다. 증손자대에서 삼형제에 의해 셋으로 나뉜다.[6]

3.1.3. 정당공파

5세 정당문학 수룡(秀龍)을 파조로 한다. 6세는 벽(璧)으로 숭정대부 홍문관대제학이었고, 7세 윤침(允琛)은 검교중문사인이었으며, 8세 천백(天白)은 충주목사였다.

3.2. 문순공파(文順公派)

3.3. 경주파(慶州派)

흔히 이언적 가계인 양동마을 중심의 양동파와 비 이언적 가계로 나뉜다. 16지파로 분류된다.

4. 연원

시조 이세정은 고려경기도 여주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호족이었다. 그러나 타 여주이씨 파와 달리 고려 멸망 후 그 후손들은 경상도 일대로 피신하여 터를 잡았다. 이세정의 5세인 이윤방(李允芳)은 첫째 아들 이지언과 둘째 아들 이춘언을 두었다.

이지언의 첫째 아들 이성호(李成浩)는 현감을 했는데 이성호의 딸은 경상북도 청송으로 이주했던 안동 권씨 급사공파 후손 권명리(權明利)의 아들과 혼인했다. 한편, 권명리의 딸은 당시 경주시의 토성(土姓)이었다가 상경종사해 벼슬을 한 후 역시 낙향한 경주 손씨의 후손이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훗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진 청송 출신 월성손씨(月城孫氏) 손사성(孫士晟)과 혼인하여 차남 손소를 비롯하여 자식을 몇 명 낳았다.

둘째 아들 이광호(李光浩)는 안강 현감을 하면서 이미 양동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용양위부호군 좌령사직을 했던 이광호의 둘째아들 이상도(李尙道)의 딸에게 지금은 절손된 포항 출신 풍덕류씨인 류복하(柳復河)가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 사위로서 이사왔다. 류복하는 외동딸을 손사성의 차남 손소(孫昭, 1433~1484)에게 출가시켜 사위로 삼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을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손소는 처가의 상속자로서 양동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5남 3녀를 두었다.

한편, 이광호와 이성호 형제는 이권(李權)이라는 사촌이 있었는데, 이권의 아들 이숭례(李崇禮)가 포항시 연일읍에 눌러 앉았다. 이숭례의 아들 이수회(李壽會, 1431-1518)는 훈련원 참군을 지냈는데 경주 이씨와 혼인하면서 경주시 내동면으로 이주하였다. 이수회의 아들 이번(李蕃, 1463-1500)[11]은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했는데, 그 전에 바로 경주 손씨 손소의 고명딸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면서 양동마을 재입향하여 세거(世居)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이 바로 이언적이다.

흥미롭게도 가계도상 이들은 서로 먼 친척이었다. 이윤방의 장남의 차남의 장남의 딸의 딸과, 이윤방의 차남의 삼남의 독자의 차남의 장남이 결혼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략 다음과 같다.
이윤방ㅡ이지언ㅡ이광호ㅡ이상도ㅡ딸(류복하)ㅡ딸(손소)ㅡ딸
이윤방ㅡ이춘언ㅡ이 권(李權)ㅡ이숭례(李崇禮)ㅡ이수회(李壽會)ㅡ이번

5. 번성

이언적은 조선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태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가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5현이자 동국18현으로서 문묘에,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다. 문묘종묘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언적 외에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바로 이 이언적이 배출됨으로써 그 후손들은 그를 중시조로 삼고, 자신의 능력 외에도 그의 이름 덕분에 명문대가(名門大家)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동시에 그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남을 기반으로 둔 남인계열인 까닭에, 인조반정 이후 서인 노론계열에 정권을 내줌으로써 당상관에 오른 이가 매우 드물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수장이 된 이가환이 신유박해로 사망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6. 실존 인물

※ 시대 순으로 기재.

6.1. 고려

6.2. 조선

6.3. 현대

7. 항렬표

파일:항렬표.jpg

8. 기타



[1] 생몰 연대는 미상이나 증손자의 호적으로 추정해 보컨대 대략 예종시기로 여겨진다.[2] 이규보의 증조부. 이은백 → 이화 → 이윤수 → 이규보 순으로 이어진다.[3]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여주에 살고 있는 여주이씨(驪州李씨)는 340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4] 대종파는 강조표시를 한다.[5] 소종파의 사람들은 자신의 파명 대신 중종파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6] 첫째 진(珎)의 증손자 계손은 감찰공파의 파조, 둘째 지(止)는 진주파를 세웠으나 단절되었다. 셋째 고(皐)는 학사공파의 파조이다.[7] 상홍은 상의, 상관 상신의 형이다.[8] 학은 아래의 사직공파, 천안공파의 파조인 란과 응의 형으로 새가 들어가는 한자를 돌림으로 쓴다.[9] 정확히 말하자면 홍성-청양 쪽 일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 실제로 청양군 비봉면, 그중 옛 홍주군 얼방면 지역인 양사리, 강정리, 용천리, 방한리에도 많이 거주하는 편. 이 집안 사람인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충남 청양군 비봉면 출신이다.[10] 공교롭게도 본파인 문순공파와 이름이 같다.[11] 이광호의 5대 종손.[12] 경주파도 이와 같은지는 미확인.[13] 윤방의 3남이 학사공 이고(李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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