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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5 23:13:05

이인석(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철이(李哲伊)·이동천(李東天)·이철(李哲)
본관 여주 이씨[1]
출생 1902년 1월 2일[2]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현 양좌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02번지)[3][4]
사망 1929년 1월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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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인석은 1902년 1월 2일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현 양좌동(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0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5년 3월 경주 양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5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야경대(夜警隊) 본부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1922년 4월 귀국하였다.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어 경주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1923년 7월 10일 퇴직하였다.

1923년 음력 12월, 이웃에 거주하는 보천교 신도 허병훈(許秉勳)에게서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국독립의 희망을 품게 되었으며, 상하이간도 방면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여 1924년 10월 12일[5] 오후 2시경, 영일군 기계면 율산동(현 북구 기북면 율산리)에 거주하는 정철검(鄭喆儉)에게 "나는 군정부에 속한 자로서 조선독립 운동을 위해 신명을 걸고 활동하고 있으니, 당신과 같은 부호는 이를 원조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연해주 군정부에 보낼 군자금 1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정철검은 소지한 돈이 없다고 말하였기에 이인석은 10월 22일까지 요구한 돈을 준비해 두라고 말하고 떠났으며, 10월 24일 저녁 무렵 다시 정철검의 집을 방문했으나 부재중 상태로 결국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이인석은 곧 체포되었으며, 1924년 12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공갈미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곧 공소하였다. 그러나 1925년 3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60일[6]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원심 판결이 유지되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5년 9월 25일 출옥한 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지린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7]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방면을 전전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29년 1월 사망했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여강경주파 24세 석(錫) 광(光) 근(根) 현(鉉) 항렬.[2]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월 12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한구·이석채, 정치인 이원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용의조선인명부에는 양동리 103번지가 출생지 및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3년 당시 양동리 102번지는 이희구(李熙久)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103번지는 이용구(李容久)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5] 음력 9월 14일[6] 1925년 3월 17일 수형인명부에는 '미결 구류일수 90일 통산'으로 기재되어 있다.[7]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판스시(磐石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