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사각편대 | |||
미셸 플라티니 | 알랭 지레스 | 장 티가나 | 루이스 페르난데스 |
미셸 플라티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둘러보기 틀 모음 | |||
대표팀 | ||||
20대 | ||||
클럽 |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마리우스 트레소르 (1976~1979) | ▶ | 미셸 플라티니 (1979~1987) | ▶ | 루이스 페르난데스 (1987~1988) |
미셸 플라티니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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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83 · 1984 · 1985 | |||
| 1984 · 1985 | |||
| 1983 · 1984 · 1985 | |||
| 1984 · 1985 | |||
| 1982-83 · 1983-84 · 1984-85 | |||
| ||||
베스트팀 | ||||
| 1982 · 1983 · 1984 · 1985 | |||
|
1977 Ballond'or | ||
수상 알란 시몬센 | 2위 케빈 키건 | 3위 미셸 플라티니 |
1980 Ballond'or | ||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2위 베른트 슈스터 | 3위 미셸 플라티니 |
Player of the Year 1983 | ||
수상 지쿠 | 2위 미셸 플라티니 | 3위 호베르투 파우캉 |
1977 Onze d'Or | ||
<rowcolor=#000>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케빈 키건 | 미셸 플라티니 | 알란 시몬센 |
Player of the Year 1983 | ||
수상 호베르투 파우캉 | 2위 지쿠 | 3위 미셸 플라티니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
1984 |
발롱도르 다회 수상자 | |||
<rowcolor=#c18e33> ★★★★★★★★ | ★★★★★ | ||
리오넬 메시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
<rowcolor=#c18e33> ★★★ | ★★★ | ★★★ | ★★ |
요한 크루이프 | 미셸 플라티니 | 마르코 반 바스텐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rowcolor=#c18e33> ★★ | ★★ | ★★ | ★★ |
프란츠 베켄바워 | 케빈 키건 |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호나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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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플라티니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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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축구인 | |||||
이름 | 미셸 플라티니 Michel Platini | ||||
본명 | Michel François Platini 미셸 프랑수아 플라티니 | ||||
출생 | 1955년 6월 21일 ([age(1955-06-21)]세) | ||||
그랑테스트 레지옹 뫼르트에모젤주 죄프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1] | ||||
신체 | 키 179cm / 체중 74kg[2]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직업 |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AS 죄프 (1966~1972 / 유스) AS 낭시 (1972~1979) AS 생테티엔 (1979~1982) 유벤투스 FC (1982~1987) | |||
감독 | 프랑스 대표팀 (1988~1992) | ||||
행정 | 유럽축구연맹 (2007~2016 / 회장) | ||||
국가대표 | 72경기 41골[3] (프랑스 / 1976~1987) 1경기 (쿠웨이트 / 1988) | ||||
<colbgcolor=#eeeeee,#191919> 통산 득점 | 338골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fff> 역대 등번호 | 프랑스 대표팀 - 10번, 11번, 15번 AS 낭시 - 9번, 10번 등 AS 생테티엔 - 10번 유벤투스 FC - 10번 | |||
가족 | 부 알도 플라티니 (1927~2017 향년 90세) 모 안나 플라티니 (1929~2015 향년 85세) 누나 마르티나 플라티니 배우자 크리스텔 플라티니[4] (1956~) (1977년 결혼) 아들 로랑 플라티니 (1979~) 딸 마린 플라티니 (1980~) | ||||
서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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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2007년부터 2016년까지 UEFA 회장을 역임했다.
선수 시절 유벤투스에서 발롱도르를 3회 연속 수상[5]하면서 구단 최초의 빅 이어를 포함한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국가대표팀에서는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와 함께
2. 유소년 시절
미셸은 1955년 6월 21일 프랑스 그랑테스트지방 뫼르트에모젤주 죄프에서 1남 1녀중 독남으로 태어났다.<rowcolor=#fff> 어릴 적 미셸 |
1차 세계대전 후 로렌에서 일하기 위해 온 공동체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안나는 남편이자 두 자녀 미셸과 마르티나의 아버지가 될 남자인 알도를 만났던 것도 죄프에서 였다. 당시 죄프는 '작은 이탈리아'라고 불리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의 작은 코뮌으로 이뤄진 마을이였다. 어린 미셸은 조부의 카페에서 화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카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à l'époque, c'était une partie d'Italie
그 당시 그곳은 이탈리아의 일부였지.
그 당시 그곳은 이탈리아의 일부였지.
본인 曰||
1960년대 초, 당시 다섯 살에서 여섯 살이었던 어린 미셸은 종종 알도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청소년 팀을 맡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는 항상 공을 손에 들고 놀았다. 30km 거리에 있던 메스의 생 심포리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영향인지 어릴 적엔 메스의 선수들을 동경했다고 한다. 당시 수학 교사였던 알도는 그의 열정인 축구에 평생을 바쳐, 낭시의 디비전 3 팀의 감독까지 맡았었다. 60-70년대엔 AS 죄프(현 ES 죄프)의 관계자 직책을 맡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흉내 낼 만한 대단한 선수가 딱히 없었어. 굳이 누구였냐면, 메스에서 뛰던 네스토르 콤뱅 흉내를 내곤 했지. 근데 그땐 TV에서 축구를 거의 안 해줬거든. 유러피언 컵 결승전 정도나 볼 수 있었으니까 선수들을 잘 알기는 어려웠어. 나중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내 우상이였고 - 지금도 그렇지만 - 그땐 이미 내 경력이 한참 진행 중이였어. 포포투 2008년 자 기사에서 |
옷으로 만든 골대를 활용해, 가장 못하는 친구들만 끼워서 경기를 해도 항상 이기는 둥 동네 아이들과 축구 경기를 하고, 누나를 학교에 1시간 빠르게 데려가서 축구 연습을 하거나, 프리킥 연습을 하는 둥 열심히 꿈을 키우던 미셸은 본격적으로 축구 경력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리고 11살 즈음에 알도는 유스 클럽을 찾던 미셸이 자신이 관계자로 있던 AS 죄프의 유스로 입단하게 도와주어 커리어를 시작할때 많이 도움을 주었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3.1.1. 프랑스 리그
미셸은 지역 팀이였던, 그리고 아버지가 관계자로 있던 AS 죄프에서 유스 생활을 시작했다. 1971-1972 시즌에는 오둔르티셰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4-1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그해 5부 리그에서 득점왕에 올랐다. 한 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14-0으로 이긴 후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13골 넣고, 어시스트 하나 했어요."죄프 주변을 연고지로 하는, 어릴 적부터 많이 봐오고 동경하던 FC 메스에 들어가기 위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미셸은 비정상적이게 큰 심장을 가졌다 진단받고 만다. 그의 심혈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틀 동안의 테스트 동안 더운 메스의 날씨에 더위에 못 이겨 피곤했기에 검사에서 이러한 진단이 나온 것 이였다. 결국 메스에 입단하지 못하게 된 미셸은 낭시로 발을 돌린다. }}} ||
AS 죄프 소속 당시 플라티니 [6] |
플라티니는 모국 프랑스의 디비지옹 1[7] 소속의 AS 낭시에서 데뷔하여, AS 낭시를 2부 리그 우승을 시키며 1부 리그로 승격시킨다. 1978년 니스와의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어 1:0 승리, 낭시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으며 발롱도르도 3위에 오른다.
AS 낭시 시절 |
플라티니는 1979년에 AS 생테티엔으로 이적한다.[8] 플라티니는 생테티엔을 이끌고 1980-81 시즌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2번이나 진출시켰으나 둘 다 준우승에 그쳤다.
AS 생테티엔 시절 |
이렇게 10년 간 내공을 쌓고 있던 플라티니에게 손짓한 클럽이 바로...
3.1.2. 유벤투스 FC
세리에 A의 명문구단인 유벤투스였다.[9] 1980년대 초반 당시 전설적인 명장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지휘하던 유벤투스는 리그 내에서 언터처블 그 자체였고[10], 이탈리아의 자존심 그 자체라고까지 불렸으니 이방인 선수에 대한 텃세가 심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며 또 실제로 플라티니가 합세한 1982-83 시즌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제법 견제가 따랐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월드컵 이후의 사타구니 부상의 영향으로, 험난한 시작을 밟았던 플라티니 였다.그러나 플라티니는 여러 슈퍼스타들이 있었던 유벤투스에서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1982-83 시즌 세리에 A와 유러피언컵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더불어 리그 1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다.
당시 세리에 A에는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리그였고, 플라티니는 SSC 나폴리의 디에고 마라도나, 우디네세 칼초의 지쿠와 경쟁을 펼쳤는데 적어도 1985년까지는 플라티니가 리그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1983-84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스쿠데토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4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리버풀를 2: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4-85 시즌에는 18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왕 3연패에 성공했고, 비록 리그에서는 6위에 그쳤지만, 플라티니는 유러피언컵에서 7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페널티 킥 결승골까지 넣으며 마침내 유벤투스의 오랜 숙원이던 빅 이어를 팀에 안겨준다. 하지만 이 경기 직전 그 유명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고, 플라티니가 우승을 전혀 자축하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플라티니는 그 참사에 불구하고 격하게 우승을 자축하여 비판받았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사건이 그렇게나 심각한지 몰랐다고...
어쨌든 플라티니는 발롱도르 3연패(1983, 1984, 1985)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연패(1984, 1985)[11]로 축구계를 완전히 평정했다.
<rowcolor=#000> 1983년 | 1984년 | 1985년 |
발롱도르를 3회 이상 수상한 선수는 단 5명으로, 최초 요한 크루이프에 이어 플라티니, 그리고 마르코 반 바스텐이 있었으며 최근 리오넬 메시,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들을 추월했다. 그리고 발롱도르 3연속 수상은 메시가 나타나기 전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플라티니만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발롱도르라는 상의 파급력과 그 상징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 이 양반이 괜히 전설이 아니다.[12][13]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으나 서독에게 패하고 우승에 실패하며 상실감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종료 후 유벤투스에서 예정된 1시즌을 더 소화한 후 1987년에 불과 32세에 은퇴를 했다. 지금보다 선수 생명이 짧았던 시절이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조금 이른 감이 있다. 당시에도 전성기를 넘기면 조금 낮은 레벨의 팀이나 리그로 이적해서 뛰다가 은퇴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플라티니는 문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을 실천했다.[14]
31살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Mike Bullard, Weymouth I was 32, actually! The time was right. Above all else, I was tired. We were playing a league game against Sampdoria and I suddenly realised that I’d lost that extra bit of pace, so I said to myself: ‘Right, that’s it’. If I didn’t have the acceleration to get into goalscoring positions any more, then I couldn’t play my game. I was being beaten to the ball and I didn’t like it! 32살이었어, 사실! 그때가 딱 때였지. 무엇보다도, 정말 지쳤거든. 삼프도리아와 경기하던 중에 갑자기 알겠더라고. 내 스피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그래서 속으로 딱 생각했지: 이제 끝이다. 득점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갈 가속력을 활용하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축구인데, 그게 안 되면 내 경기를 할 수 없잖아. 공을 상대 팀 선수에게 빼앗기는데, 그건 나답지 않더라고! 포포투 2008년 자 기사에서# |
3.2. 국가대표
1976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플라티니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6강 조별리그에서 개최국 아르헨티나 전에서 60분에 동점골을 넣으나 팀은 2:1로 패했고 그 뒤 헝가리를 3:1로 꺾었으나 프랑스는 결국 탈락하고 만다.이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하였으나 처음에는 프랑스는 생각보다 경기력이 좋지 못했고 플라티니 역시 부상때문에 큰 활약은 하지 못한다.[15] 프랑스는 쿠웨이트,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한 조에 속했는데 라이벌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전반 1분만에 브라이언 롭슨에게 선제골을 내주었고 이후 전반 24분에 제라르 솔레르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다시 롭슨에게 리드골을 내주며 설상가상 후반 83분에 폴 마리너에게 쐐기골을 내주며 3:1로 패한다. 이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플라티니가 득점을 하며 4:1로 승리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선 디디에 디스의 선제골로 앞서가나 후반 84분에 안토닌 파넨카에게 페널티킥으로 동점을 내줘 결국 비기고 만다. 이후 12강 조별리그에 진출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4: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한다.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전반 17분에 피에르 리트바르스키에게 선제골을 내주나 플라티니 본인이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따라잡고 이후 연장전까지 3:3 동점 등 팽팽한 시합이었다. 그런데 시합 중 최악의 오심이 일어나는데 그 유명한 '바티스통 사건'이다. 플라티니가 환상적인 킬패스로 파트릭 바티스통에게 연결했는데 서독의 골키퍼 하랄트 슈마허가 바티스통을 가격해 바티스통을 기절시켰고[16] 정작 슈마허는 퇴장은 커녕 경고도 받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는 승부차기끝에 5:4로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호송되는 바티스통의 손을 잡고 함께 터치라인으로 향하는 플라티니[17] |
1982년 프랑스와 서독의 준결승전을 기억합니다. 정말 뛰어난 경기였는데요, 그 경기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하랄트 슈마허 선수의 거친 플레이로 파트리크 바티스통 선수가 거의 참수 당하던 장면이 팀의 심리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합니다. Amy Lewsey, Wigan Yes, we were psychologically affected, but in a positive sense. We were full of rage: against the Germans, against the ref, against everything. It was the biggest moment in my life as an athlete – I would even say it’s my greatest memory in football, even though we lost. It was the most extraordinary game – it had everything, pure drama. It was better than any movie; any theatre; any novel. 그랬지,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았어. 근데 오히려 긍정적인 쪽으로. 분노가 끓어올랐거든: 독일 선수들, 심판, 모든 것에 대해. 그 순간이 운동선수로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순간이었어 - 졌지만 축구 인생 최고의 기억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야, 가장 특별한 경기였지 - 그 경기는 진짜 뭐든 다 있었어. 순수한 드라마였지. 그 어떤 영화, 연극 혹은 소설보다 더 대단했어. 포포투 2008년 자 기사에서# |
이후 3·4위전에서도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가 이끄는 폴란드에게 3:2로 패해 4위에 그치고 만다.
프랑스 국가대표 미셸 플라티니가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던 시점은 역시 유로 1984이다. 플라티니가 주장 완장을 걸고 참가했던, 그리고 프랑스에서 열리고 프랑스가 우승했던 유로 1984는 플라티니의, 플라티니에 의한, 플라티니를 위한 대회라는 이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조별리그 1차전 덴마크전에서 결승골로 1:0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 벨기에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0 승리를 이끌었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유고슬라비아전에서도 해트트릭을 넣으며 3:2 역전승을 이끌고, 조 1위로 4강에 진출한다.
준결승전인 포르투갈전에서 2:2로 팽팽히 맞서던 연장 후반 14분에 결승골을 내지르며 팀을 결승전에 안착시켰으며,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이끄는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도 불꽃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작렬, 2:0 승리를 이끌며, 조국 프랑스에 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안겨주었으니 이젠 마에스트로를 넘어서 국민영웅이었다.
플라티니는 이 대회에서 5경기 동안 9골을 몰아쳤는데, 그것도 모든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 2게임 연속으로 오른발, 왼발, 머리로 1골씩을 넣으며 '퍼펙트 해트트릭'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당시 프랑스 지상파에서는 "다음 번 플라티니가 보여줄 묘기는"이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방영되기까지 했다니 이 무슨. 게다가 저 중 페널티킥 골은 벨기에전 쐐기골 뿐이고 프리킥은 두 골이나 넣었다. 더더욱 대단한 것은 유로 1984에 출전한 8국가 중 9골 이상을 기록한 국가는 플라티니의 프랑스(14골)과 준결승에서 좌절한 덴마크(9골)이고 나머지 팀들은 2~4골에 그쳤다. 그리고 조국 프랑스마저 자신이 넣은 골을 제외하면 5골이다. 즉 한 선수가 웬만한 팀 하나보다 골을 많이 넣었다.
한 마디로 얄짤없는 대회 득점왕[18]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유로 단일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이다.[19]
게다가 플라티니는 유로 1984 한 대회만 출전해서 9골을 넣은 것인데 이 9골이 2021년까지도 유로 통산 득점 순위에서도 1위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로 대회에서 3번이나 4번 출전한 선수들도 수두룩한데 통산 득점이 9골을 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20] 그냥 전무후무한 기록 그 자체다.
유로 1984에서의 플라티니의 퍼포먼스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더불어 역대 최고였다.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그렇다고 골만 넣은 선수도 아니고 중원에서 패스, 플레이메이킹을 다 하면서 기록한 스탯이다. 그만큼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뜻. 다만 대회 특성상 월드컵이 유로보다 한 수 위의 대회이기 때문에 후대의 평가나 언급에서 자주 밀리는 것뿐이지...
플라티니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넣은 스탯은 72경기 41골. 2007년 티에리 앙리가 추월하기 전까지 프랑스 국가대표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이후 2020년 올리비에 지루가 다시금 이 기록을 깨며 프랑스 대표팀 역대 득점 2위로 올라섰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플라티니는 대회전 부상을 입고 진통제를 먹으며 뛰고 있었는데 캐나다와의 조별리그 1차전은 장피에르 파팽의 골로 1:0 승리, 이고리 벨라노프, 올레흐 블로힌, 리나트 다사예프의 소련과는 1:1로 비기고 헝가리를 3:0으로 승리하여 조별리그를 2승 1무로 순항하여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에서는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이끄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전반 15분에 플라티니가 선제골을 넣으며 2:0으로 가뿐히 이기고 8강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카레카에게 선제골을 내주나 플라티니가 40분에 동점골을 넣으며 결국 연장전까지 가게 된다. 이때 연장전에서 프랑스에게 위기가 오는데 바로 페널티킥을 내주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킥의 달인'이라 불리는 지쿠가 페널티킥을 실축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고, 플라티니는 비록 승부차기를 실축했으나 프랑스는 결국 4강에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4년 전 준결승 상대인 서독을 만나게 되나 프랑스는 안드레아스 브레메, 루디 푈러에게 연속골을 내주며 2:0으로 패배, 결국 설욕에 실패하고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다.[21] 하지만 3·4위전 벨기에와의 시합에선 연장전 끝에 4:2로 승리했고 3위를 차지했다.
은퇴 직전 쿠웨이트 국왕의 요청을 받아 쿠웨이트와 소련의 친선경기에서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경기를 뛴 적이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슈팅, 패스, 시야, 조율, 테크닉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역대에 손꼽힐만한 미드필더로 골 기록을 보면 공격수마냥 골을 집어넣어 굉장히 공격적인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2-3선 사이에 주로 위치해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아래까지 내려와 볼 배급까지 자유자재로 했다. 특히 방향전환을 하며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조차도 틈을 찾아서 찌르는 킥력이 플라티니의 최대 능력. 이는 판단력과 킥의 정교함과 힘이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의 영상이나 활동반경 기록표 등을 보면 마라도나, 지쿠처럼 혼자서 무쌍 찍으며 역동적으로 다 뚫어 버리는 유형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신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볼터치와 패스, 하프라인 아래서부터 깊숙이 관여하는 빌드업 능력, 그리고 미드필더지만 슈팅-헤딩-프리킥까지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던 득점 능력까지 무척 다재다능 했던 선수고 또한 가지고 있는 여러 툴들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선택하고 조화시키는 높은 축구지능까지 겸비해 80년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골 기록을 보면 알수있겠지만, 플라티니는 기본적으로 플레이 메이커지만 득점력마저 무척 뛰어난 선수였다. 특히 프랑스 대표팀에서 기록한 41골은 티에리 앙리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고 리그 득점왕+챔스 득점왕+국대 득점왕을 모두 해본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찬스 포착 능력과 슈팅 능력은 당대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에서 미드필더로서 3연속 득점왕을 수상했다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정도. 중원에서 날카로운 킬패스만 찔러넣으면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당시의 편견과 달리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완벽히 갖추고 뛰어난 프리킥, 득점력마저 겸해 과거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의 틀을 벗어나 경기 자체를 지배하는 매우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그나마 단점을 찾자면, 스피드와 드리블 돌파 능력은 동시대 월클이나 역대 레전드급 선수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했다는 것 정도이다.[22]
득점력에서 비유하면, '미들라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프랭크 램파드보다도 월등한 득점기록을 갖고 있다. 게다가 램파드보다 플레이 메이커의 본업인 경기 조율 & 패스, 시야 부분에서도 전부 훨씬 앞선다. 램파드 역시 경기 조율이나 패스, 시야는 타 잉글랜드 박투박 선수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우위에 있는 선수지만 그가 10번으로서 강점을 보이지 못하는데에는 저런 부분에서 다소 아쉬운 면모가 있기 때문. 실제로, 장지현은 램파드를 아예 플레이메이커로 보지 않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플라티니는 스램제와 비교했을때 스콜스의 경기조율과 패스, 제라드의 운동능력과 넓은 활용범위, 램파드의 득점력을 모두 겸비한 가히 미드필더의 이상형과도 같은 선수였다 할 수 있다.
5. 평가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23]으로 꼽히며, 동시에 지단과 함께 프랑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여겨진다.[24] 또한 198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 스타 중 한 명으로, 3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 공격수가 아님에도 기록한 세리에 A 3연속 득점왕과 챔피언스 리그 우승+득점왕, 유로 우승+MVP+득점왕은 그가 당시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것들이다. 1980년대 초 마라도나, 지쿠, 루메니게, 파우캉과 함께 세계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퉜고, 1985년까진 세리에와 챔피언스 리그, 유로 우승까지 모두 거둔 플라티니가 그들 중 최고로 인정받았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분류되는 지쿠나 마라도나와는 달리 3선까지도 자주 내려와 완벽한 플레이메이커 롤을 소화하던 선수이고, 미드필더임에도 뛰어난 득점력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당시로서는 굉장히 유니크한 플레이 스타일의 소유자여서 커리어뿐만 아니라 임팩트와 퍼포먼스 면에서도 완벽했다.국제 대회에서도 맹활약을 보여줬다. 비록 우승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팀을 두 번이나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다.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와 플라티니가 구성한 중원은 당대 최강의 중원 중 하나였다. 또한 플라티니는 커리어 통틀어 단 한 번 참가한 유로인 유로 1984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조국 프랑스의 오랜 무관을 깨버리고 최초의 유로 우승을 선사했고, 해당 대회에서 플라티니가 보여준 퍼포먼스와 하드캐리는 후대의 평가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1986년 월드컵 활약과 함께 축구 역사상 단일 대회 최고의 퍼포먼스로 늘 언급된다. 월드컵에 1986년 마라도나가 있다면 유로엔 1984년 플라티니가 있다고 할 정도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상술했듯 현역 시절에 언터쳐블한 기량을 통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던 선수다. 25세에 불과했던 1980년 옹즈 몽디알의 독자 투표에서 이미 레몽 코파에 이은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 2위로 평가받았고, 1984년엔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랭킹에서 펠레, 페렌츠 푸스카스, 후안 스키아피노에 이어 4위를 차지하며 바비 찰튼, 레몽 코파 등을 제쳤다. 유고슬라비아의 스포츠 언론사 스포르트에서 해마다 선정한 베스트팀엔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고정적으로 포함됐으며, 역시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 옹즈 몽디알의 유럽 축구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독자 투표에서 90.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인정받았다. 같은 프로그램의 베스트 일레븐에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추가로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차지해 총 6회 이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잡지 '엘 그라피코'에서 선정한 1983년 세계 최고의 선수 랭킹에서도 호베르투 파우캉과 지쿠, 마라도나 등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고,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티보'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도 1984년, 1985년에 2회 수상해 마라도나와 함께 역대 최다 수상자로 기록돼있다.
이 중에서도 현역 시절 받았던 평가의 정점은 단연코 축구계 최고의 개인상인 발롱도르로, 발롱도르 역사상 최초 3연속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1980년대의 모든 선수 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기록한 선수임과 동시에 가장 많은 발롱도르 포인트를 획득한 선수이기도 하다. 연도별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미드필더를 정리해 보면 플라티니가 7회[25]로 가장 많고, 그 뒤를 4회의 레몽 코파[26]와 루이스 수아레스[27], 그리고 지단[28]이 잇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아, 2011년 '풋볼 이탈리아'가 발표한 1980년 이래 세리에 A 최고의 외인선수 랭킹에서 마라도나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며 마르코 반 바스텐, 호베르투 파우캉, 루드 굴리트, 지단 등을 눌렀고, '프랑스 풋볼'이 2000년과 2004년에 발표한 프랑스 역대 최고 선수 랭킹에서 지단을 누르고 1위를 차지,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자격으로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98 월드컵 직전 FIFA의 오랜 후원사 '마스터카드'에서 주관한 전문가 선정 20세기 세계 베스트 11의 일원으로 선정됐으며 20세기 유럽 베스트 11에도 당연하다는 듯 선정됐다.
요약하면 선수로서의 미셸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29]이자 최소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20위 안에 들어가며, 10위 안에도 자주 랭크되는 선수다.
아무튼 이미 상술됐고 또한 하술할 논란들 탓에 현재는 저 엄청난 퍼포먼스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말년의 도핑, 마약 등의 논란 때문에 펠레, 메시에 비해 저평가받았던 마라도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6. 은퇴 이후
제프 블라터 前 FIFA 회장과 함께 |
1987년 은퇴 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고,[30]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직위원장[31], 이후 FIFA 기술개발위원회 의장과 프랑스 축구 협회 회장을 거쳐 UEFA 회장을 역임했다.
1988년 프랑스가 1990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키프로스와 1대1로 비기면서 탈락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감독교체가 되면서 플라티니가 지휘봉을 잡았고 유로 1992 예선에 집중하면서 19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고 그로 인해 1991년 월드사커 올해의 감독상을 받게 된다. 다만 유로 1992 본선에서는 프랑스 저주받은 세대의 성적으로 다들 알다시피 조별탈락하면서 해임된다.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스타 플레이어가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은 그렇다 쳐도, 행정가로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 양반은 이마저도 해 냈다.[32] 은퇴 후의 커리어로 이 양반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뿐. 2005년 유에파 회장 선거에 베켄바워와 상대로 서로 경쟁했다. 사실상 베켄바워와 함께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게 맞장 뜰 수 있는[33] 둘뿐인 축구 행정가라 할 수 있겠다.
헤이젤 참사 당시 뛰었던 선수로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당시 선수로 뛰었던 미셀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2010년 헤이젤 참사 추모사에서
||2012년 4월 UEFA 유로파 리그를 없애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 통합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다가 엄청난 비난을 당했다. 결국 여러 가지 기획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라며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UEFA 유로 2020 대회부터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경기를 서로 개최할 예정으로 계획안을 내세워, 조국 프랑스가 개최하는 UEFA 유로 2016 때 프랑스를 지지하면 UEFA 유로 2020 개최를 밀어 주겠다고 약조한 터키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터키와 그리고 2020 유로 컵 경쟁 후보로 나온 아제르바이잔-조지아(공동개최 희망), 스코틀랜드-웨일스(역시 공동개최 희망)에서도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터키에선 그러지 말고 UEFA 유로 2016부터 먼저 프랑스 개최를 취소하고 분산 개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터라 그도 난감해하고 있다. 결국 UEFA 유로 2020만 그렇게 시험적으로 열고 2024 대회부턴 종전처럼 1, 2개 나라에서만 개최한다고 뜻을 밝혔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다른 목적 보다는 터키의 유로 개최를 방해하려는 목적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왔다. 요는 터키가 유럽연합 준가입국으로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국가가 프랑스[34]라는데 있다. 결국 터키는 내부사정까지 더해져서, UEFA 유로 2020 결승과 UEFA 유로 2024 개최를 천명하고 나선 상황.
2014년 발롱도르 투표를 앞두고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선수가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건 옳지 못하다"라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수상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5년 비리가 드러나서 물러난 제프 블라터의 뒤를 이어서 후임 FIFA 회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었다. 외신은 이미 차기 회장감이라고 예측하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다. 위에서 상술하듯이 블래터의 지지로 유럽축구연맹의 회장이 되었지만 회장이 된 이후, 유로의 참가국을 늘리고 상금을 대폭 올렸고 월드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서 블래터와 거리를 두었다. 후보로 나서는 정몽준이 플라티니는 블래터의 아들이나 다를 거 없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회장이 되면 개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정작 외신의 반응은 비아냥.
또한, 유럽 빅리그 팀의 팬들은 대다수가 플라티니를 아주 싫어한다. 이 사람이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밀어붙인 재정적 페어플레이 룰(FFP)때문에, 빅클럽들이 이적료를 무한 투입하여 선수를 영입하는데 제동이 걸렸고,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 PSG는 FFP때문에 선수 영입 금지의 징계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FIFA 회원국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회원국들의 지지를 확보한 상태여서 가장 유력한 차기 FIFA 회장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6.1. 몰락
그러나 2015년 9월 스위스 검찰이 플라티니가 제프 블라터 전 피파 회장에게 200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24억 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하면서 도덕성 문제에 큰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했다.
일단 본인은 FIFA로부터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보수를 받은 것 뿐이라며 부인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플라티니는 2001~2004년에 FIFA에서 상근직 임원으로 일했는데, 시작할 때 블래터에게 연봉 100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12억 3000만원)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FIFA의 급여 체계 문제로 재직 당시 연간 30만 스위스 프랑(약 3억 7000만 원)만 받았고, 2011년에서야 남은 미지급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액수도 그렇고 얼핏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나, 두 가지 이유로 플라티니의 주장에 의구심이 든다.
첫째, 플라티니가 FIFA에서 일했던 시기인 2001~2004년 당시 FIFA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당연히 이에 따라 재정이 부유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화로 약 25억 원 정도의 돈을, 그것도 플라티니만큼 유명한 인사에게 줄 돈을 수 년 동안이나 체불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수 년 동안 체불된 연봉이 왜 하필 FIFA 회장 선거가 있는 2011년에 갑자기 일시불로 지급되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이 불출마를 위한 대가성 자금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의혹들에 관해서 플라티니는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못하면서도 무고를 주장하며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FIFA 윤리위에 의해서 제프 블라터와 함께 나란히 8년 간의 자격 정지 징계가 확정되었다.# 플라티니는 CAS(국제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 항소했지만, 기각돼서 최종적으로 8년 자격 정지가 확정되었다. 자동적으로 FIFA 회장 선거에 당선은커녕 출마할 가능성조차 희박해졌다.
이에 더하여 사상 최대 조세 스캔들인 파나마 페이퍼즈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로까지 알려져 결국 UEFA 회장직도 사퇴했고, 알렉산데르 체페린(Aleksander Čeferin, 슬로베니아)이 새로운 회장으로 취임했다.
여기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결승전을 브라질과 프랑스의 대결로 만들려고 조작했던 사실도 시인했는데# 어차피 끝장나서 자포자기한 것으로 추정된다.[35]
2019년 6월 18일, 2022 카타르 월드컵 개최 관련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긴급체포되며 기어이 최하점을 찍었다.# 이에 대해 FIFA는 월드컵 개최지를 바꾸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36]
그리고 결과적으로 플라티니가 추진한 유로 2020의 대회 방식 역시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한달 밖에 안되는 기간동안 여러 국가를 이동하는 방식이다보니 선수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크리스티안 에릭센의 심정지 사태를 포함해서 대회에서 부상자들이 계속해서 나오자 축구 팬들에게서 큰 비판이 나왔다.
그렇게 잊혀지나 했더니 2022년 3월, 미국 'ESPN'보도에 의하면 6일(한국시각) 플라티니가 FIFA 잔니 인판티노 회장을 형사 고소했다. 플라티니 전 UEFA 회장이 인판티노 FIFA 회장을 고소한 이유는 '직권 남용'이다. ESPN에 따르면 플라티니 변호인단은 "인판티노가 영향력을 행사했고, 2018년까지 FIFA 법무 디렉터로 지냈던 마르코 빌리거가 공범"이라고 언급했다. 플라티니는 자신의 기소에 인판티노 희장의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체에 따르면 플라티니는 프랑스 검찰에 인판티노 FIFA 회장과 빌리거, 스위스에 있는 미하엘 라우버 전 법무장관 등 4명에 대해 심문을 하기 위해 국제 공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블라터와 함께 모든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이제 재기의 길이 열렸다고도 볼 수 있다.#
7. 기록
7.1. 선수
7.1.1. 대회 기록
- 유벤투스 FC (1982~1987)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84
- 아르테미오 프란키컵: 1985
7.1.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83, 1984, 1985
- 발롱도르 드림팀 3군[37]: 2020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득점왕: 198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4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4-85
- 세리에 A 득점왕: 1982-83, 1983-84, 1984-85
- 인터컨티넨탈컵 MOTM: 1985
- 프랑스 올해의 선수: 1976, 1977
- 프랑스 세기의 선수: 1999
- FIFA 100: 2004
- FIFA XI: 197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4, 1985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2, 1983, 1984, 1985
- 옹즈도르: 1983, 1984, 1985
- 슈퍼 옹즈도르: 1995
- 옹즈 드 옹즈: 1977, 1982, 1983, 1984, 1985, 1986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84, 1985
- 구에린 스포르티보 베스트 XI: 1983, 1984
- 구에린도로: 1983-84
- 엘 그라피코 올해의 선수: 1983
- Sport Ideal 유럽 XI: 1977, 1978, 1979, 1980
- 골든풋: 2004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프랑스 풋볼 60년간 베스트 XI: 2007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38]: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프랑스 드림팀: 2021
- 프레미오 인테르나치오날레 자친토 파케티: 2011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1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2011
- 유벤투스 올타임 XI: 2017
7.1.3. 클럽 기록
시즌 | 클럽 | 리그 | 리그 | 국내 컵[39] | 대륙 대회[40] | 총계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72-73 | AS 낭시 | 디비지옹 1 | 5 | 2 | 0 | - | - | - | - | - | - | 5 | 2 | 0 |
1973-74 | 21 | 2 | 0 | 3 | 0 | 0 | 1 | 0 | 0 | 24 | 2 | 0 | ||
1974-75 | 출전 기록 없음[병역] | 7 | 13 | 0 | - | - | - | 7 | 13 | 0 | ||||
1975-76 | 31 | 22 | 0 | 5 | 6 | 0 | - | - | - | 38 | 28 | 0 | ||
1976-77 | 38 | 25 | 0 | 1 | 0 | 0 | - | - | - | 39 | 25 | 0 | ||
1977-78 | 36 | 18 | 0 | 3 | 0 | 0 | 4 | 0 | 0 | 43 | 18 | 0 | ||
1978-79 | 19 | 12 | 0 | 5 | 3 | 0 | - | - | - | 24 | 15 | 0 | ||
시즌 | 클럽 | 리그 | 리그 | 국내 컵[42] | 대륙 대회[43] | 총계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79-80 | AS 생테티엔 | 디비지옹 1 | 33 | 16 | 0 | 7 | 5 | 0 | 7 | 5 | 0 | 46 | 26 | 0 |
1980-81 | 35 | 20 | 0 | 10 | 0 | 0 | 7 | 5 | 0 | 52 | 25 | 0 | ||
1981-82 | 36 | 22 | 0 | 8 | 0 | 0 | 2 | 5 | 0 | 46 | 27 | 0 | ||
시즌 | 클럽 | 리그 | 리그 | 국내 컵[44] | 대륙 대회[45] | 총계 |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경기 | 득점 | 도움 | |||
1982-83 | 유벤투스 FC | 세리에 A | 29 | 16 | 6 | 13 | 7 | 3 | 9 | 5 | 3 | 51 | 28 | 12 |
1983-84 | 28 | 20 | 3 | 7 | 3 | 1 | 8 | 2 | 3 | 43 | 25 | 7 | ||
1984-85 | 30 | 18 | 1 | 7 | 4 | 8 | 10 | 7 | 3 | 47 | 29 | 12 | ||
1985-86 | 30 | 12 | 1 | 4 | 1 | 4 | 7 | 4 | 2 | 41 | 17 | 7 | ||
1986-87 | 29 | 2 | 1 | 8 | 1 | 4 | 4 | 2 | 4 | 41 | 5 | 9 | ||
15시즌 | 총합 | 400 | 207 | 14 | 95 | 60 | 20 | 55 | 30 | 15 | 550 | 297 | 49 |
7.1.4. 국가대표 기록
<rowcolor=#1D439B> 소속 대표팀 | 연도 | 경기 | 득점 |
프랑스 | 1976 | 5 | 4 |
1977 | 7 | 2 | |
1978 | 6 | 4 | |
1979 | 4 | 2 | |
1980 | 6 | 5 | |
1981 | 4 | 2 | |
1982 | 10 | 4 | |
1983 | 4 | 1 | |
1984 | 10 | 13 | |
1985 | 6 | 2 | |
1986 | 9 | 2 | |
1987 | 1 | 0 | |
<rowcolor=#000> 통산 | 72 | 41 |
<rowcolor=#1010B5> 소속 대표팀 | 연도 | 경기 | 득점 |
쿠웨이트 | 1988 | 1 | 0 |
<rowcolor=#000> 통산 | 1 | 0 |
7.2. 감독
7.2.1. 개인 수상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1
- 엘 파이스 유럽 올해의 감독: 1991
7.3.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85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1998
8. 플라티니에 대한 언사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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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축구를 즐겨왔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미셸과 비교받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영광이다.
플라티니의 뒤를 잇는 것은 나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다. 플라티니는 한 사람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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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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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플라티니, 지단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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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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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낭시는 나의 고향 클럽이라서, 셍테티엔은 프랑스 최고 클럽이라서,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서 뛰었다.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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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플레이를 한다면 스코어는 영원히 0:0이다.
[47]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축구는 합리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공은 둥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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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 ||- 가족으로는 청소년기부터 만나 1977년 결혼해 현재까지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아내인 크리스텔 플라티니[50][51]가 있다. 그와는 슬하에 1남 1녀 로랑 플라티니와 마린 플라티니를 두었다.
- 여타 다른 과거의 유럽 국가처럼 프랑스도 징병제를 시행했는데[52], 미셸도 군대 복무 경험이 있다. 스포츠 선수 양성을 목표로 창설된
좡빌르 대대에서 복무했는데[53], 쥐스트 퐁텐, 지네딘 지단 등의 선수들이 거쳐 간 전설적인 대대이다. - 승부욕이 과한 편이다. 일화로는 한 번은 낭시 시절 기차 안에서 동료들과 카드 게임을 하다 패배하자 창밖으로 카드를 던져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프랑스 북부 해안 에트르타에서 친구들과 골프하던 때였다. 파 5홀에서 세 번째 샷을 치던 중 친구 중 한 명이 미셸이 스트로크를 치는 순간 골프백을 땅에 떨어뜨렸고, 당연히 놓쳐버리게 됐다. 미셸은 순간 격노해 골프공을 내려놓고 드라이버를 들어 바다로 팽이 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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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曰||
- 꽤 극단적인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한 승부욕을 극복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 프랑스에서 여러 말썽을 일으켜서 축구계에서 매장될 판이었던 에릭 칸토나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차라리 잉글랜드에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잉글랜드로 보낸 사람이다. 그렇게 잉글랜드에 진출한 칸토나는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이라는 희대의 명장의 밑에서 포텐셜을 터트려 축구계의 전설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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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축구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제라르 울리에[55]도 나도 에릭이 영국 가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했었어. 우리 둘 다 그가 영국 축구랑 딱 맞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거든. 딱 내가 이탈리아 축구랑 잘 맞았던 것처럼 말이야. 우리 둘다 완전 잘 맞았었지!
본인 曰||
* 당시 1980년대 때 유벤투스와 나폴리의 라이벌리 때문에 마라도나와 많은 비교를 당했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19년 All Football 팬 투표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올타임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11. 둘러보기
UEFA 유로 1992 참가 감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FFFFFF, #FFFFFF)" {{{#!wiki style="color: #000;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7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000" | <colbgcolor=#009EED> A조 | 토미 스벤손 | 미셸 플라티니 | 리하트 M. 닐센 ★ | 그레이엄 테일러 |
B조 | 리누스 미헬스 | 앤디 록스버그 | 아나톨리 비쇼베츠 | 베르티 포크츠 ☆ | |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60 | 1964 | 1968 | 1972 | 1976 | 1980 1984 | 1988 | 1992 | 1996 | 2000 | 2004 2008 | 2012 | 2016 | 2020 | 2024 |
[1] 이탈리아계 혈통이다.[2] 현역 당시 프로필[3] 대표팀 역대 득점 5위.[4] 혼전 성씨는 비고니[5] 나머지 한명은 리오넬 메시. 메시는 더 나아가 4연패까지 달성했다.[6] 윗줄에서 왼쪽부터 두번째 인물이 플라티니다.[7] 현재의 프랑스 리그 1[8] 당시 생테티엔은 바이에른 뮌헨과 유러피언 컵 결승까지 간 빅클럽이였다. 물론 당시 발렌시아의 감독이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당시 선수 이동 제한으로 관심을 보였으나 이적에 실패한 인테르 등의 플라티니에게 관심을 보인 클럽이 있었다. 다만 이후 규정이 풀린 후 인테르는 플라티니가 하필 유베로 이적하자 그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고 한다(...)[9] 유벤투스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클럽들이(잉글랜드의 아스날과 토트넘 등) 오퍼를 넣었었는데, 당시 잉글랜드에 가지 않고 유베로 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간편한 일정과 크리스마스때 잉글랜드의 전통에 따라 경기를 뛰기 싫어서라고(...).[10] 다른 '북부 3강'이던 AC 밀란은 1980년대 후반 아리고 사키 감독 체제가 되어서야 간신히 부활했을 정도로 막장 가도를 걷고 있었고, 인테르 역시 거기서 크게 다를 것 없는 행보를 걷고 있었다.[11] 잉글랜드 주관 잡지사인 월드 사커는 올해의 선수 및 올해의 팀, 올해의 감독을 매년 발표하였는데 기존의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에 이은 3번째 권위 정도에 해당하는 개인상으로 여겨졌다. 이 1980년대 시기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는 나름 의미를 가지는데 비유럽권 선수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발롱도르와 이 시기엔 탄생하지도 않은 FIFA 올해의 선수와는 달리 남미권 선수에게도 자격이 주어진 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올해의 선수상으로써 좋은 표본이 되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83년 지쿠,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사례에 해당한다.[12] 단, 이때는 비유럽인들은 발롱도르 수상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에서 주로 선수생명을 영위한 펠레는 물론이고 SSC 나폴리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마라도나마저도 후보조차 될 수가 없었다. 비유럽권 수상제한이 풀린 것은 1995년이다. 이 때문인지 펠레와 마라도나는 2000년대에 공로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별도로 받았다. 단 발롱도르 자체가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자격 대상이어도 정말 받기 어려운 상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렇다.[13] 2016년 발롱도르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은 1995년 이전의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던 비유럽권 선수들에 대해 재평가를 했는데 펠레는 무려 7회나 선정되었고 디에고 마라도나도 2회 선정되어 괜히 축구의 신들이라 불리는게 아니라는걸 증명했다. 그리고 펠레와 마라도나에 비견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스페인 국적을 획득했고 2회의 발롱도르 수상경력(1957, 1959)도 있긴한데, 이 경우에는 선수 경력의 거의 1/3 동안 발롱도르라는 상 자체가 없었다. 발롱도르의 제정은 1956년인데, 남미시절은 제외하더라도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과 디 스테파노의 득점왕 행진은 1954년,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는 1955년부터 있었다. 여기에 1956년 발롱도르 첫 수상은 공로상 개념으로 40세 스탠리 매튜스에게 넘어가는 상황까지 있었다. 물론 전설 스탠리 매튜스 역시 자신의 커리어 태반 동안 발롱도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14] 자고로 플라티니의 클럽 및 국가대표 활약으로 인해 플라티니 이후의 프랑스의 유명한 선수들 혹은 프랑스 리그에 뛴 유명한 선수들이 해외 리그(주로 이피엘, 라리가, 세리에, 분데스리가)로의 유출을 심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대표적으로 지네딘 지단, 카림 벤제마, 프랑크 리베리 등이 있다.[15] 이때 팀의 에이스는 플라티니가 아니라 알랭 지레스였다.[16] 바티스통은 슈마허에게 얻어맞아서 아예 턱뼈가 부서졌다. 결국 경기 도중 교체되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고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17] 플라티니는 바티스통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맥박이 없었어. 엄청 창백하기도 했지.' 주장이자, 친우로서 플라티니는 의료진을 불러오게 한 후 함께 터치라인으로 가며, 바티스통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에 키스해주기도 했다.[18] 유로 MVP는 공식직으로 1996년 대회부터 수여했다.[19] 좀 더 부연하자면, 유로 1984 득점 2위 프랑크 아르네센이 3골, 3위 루디 푈러가 2골이었고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게르트 뮐러와 마르코 반 바스텐도 각각 4골, 5골이 한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이다. 플라티니의 아성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프랑스 후배인 앙투안 그리즈만으로 UEFA 유로 2016에서 6골을 넣어 대회 MVP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이 기록이 유로 단일 대회 최다 득점 2위에 올라있다.[20] 2016년 7월 7일(한국시간)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웨일스와의 유로 2016 4강전에서 1골을 넣으며 플라티니의 9골과 타이를 이뤘다. 하지만 호날두는 유로 2004부터 유로 2016까지 네 번의 유로 대회를 거치며 누적된 기록이다. 이후 2021년 6월 16일, 유로 2020 조별리그 헝가리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총 11골로 단독 1위로 올라섰다.[21] 8강에서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치른 건 서독도 마찬가지였다.[22] 다만 깔끔한 퍼스트 터치와 빠른 상황판단 능력으로 한두명 정도는 무리없이 제쳤다.[23] 마라도나와 지단을 제외하면 플라티니 이상의 평가를 받는 공격형 미드필더는 없다. 크루이프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가장 많이 뛰기는 했지만 센터포워드와 중앙 미드필더로도 많이 뛰었다.[24] 1958년 발롱도르 위너이자 레알의 챔스 5연패 핵심멤버 중 하나였던 레몽 코파도 있지만, 아무래도 월드컵에서의 족적이 압도적인 지단과 유로 역사상 최고의 하드캐리 우승을 보인 플라티니에 비하면 국가대표 활약이 다소 부족하고 워낙에 옛날 선수인지라 한 수 아래로 평가된다.[25] 1976, 1977, 1979, 1983, 1984, 1985, 1986[26] 1956, 1957, 1958, 1959[27] 1960, 1961, 1964, 1965[28] 1997, 1998, 2002, 2006[29] 지네딘 지단과 함께 프랑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다만 은퇴 이후의 행보가 크게 갈리는데, 감독으로서도 챔스 3연패라는 레전드 커리어를 쌓은 지단과는 달리 행정가로서의 플라타니는 처음엔 승승장구했으나 마지막 관문인 FIFA 회장 선거를 앞두고 뇌물수수가 드러나 자신의 명예를 완전무저갱으로 실추시킴으로서 프랑스 축구계의 볼드모트가 돼버렸다(…).[30] UEFA 유로 1992 예선에서 스페인, 체코와 같은 조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8전 8승으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잉글랜드와 비기고, 덴마크 돌풍의 희생양이 되면서 해임된다.[31] 이 때 프랑스와 브라질이 결승에서 만나도록 대진표를 조작했다고 후일 밝혔다. 조작한 이유는 두 팀이 결승에서 만나야 흥행이 된다고 해서 했다고.[32] 다만 알아둘 점은 그를 블라터가 지지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전직 UEFA 회장인 렌나르트 요한손은 反 블라터파 수장으로 블래터가 늘 눈엣가시처럼 여겼기에 그를 축출하고자 고른 게 바로 플라티니이다. 선거 결과 아슬아슬하게 이겨 회장이 되었다.[33] 다만 UEFA 회장 선거에 블라터가 지지한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에 베켄바워와 달리 맞장 뜰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그래도 UEFA는 FIFA와 별개라면서 UEFA 유로 2016 대회부터 참가국을 24개로 늘리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여[56] 블라터가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FIFA 공인 대회가 아닌 대회에서는 처음이며 유로 대회는 피파와 일절 무관하고 우승상금 규모로는 월드컵에 뒤쳐지지 않는 유일한 국제 축구 대회이기 때문이다.[34] 축구와 전혀 다르지만 경제, 정치적으로 프랑스가 늘 터키에 대하여 반대한다.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도 터키를 맹렬히 비난하는 게 프랑스이니 말다했지만, 프랑스도 알제리 전쟁 당시 벌여놓은 이에 못지않아 터키랑 그리 사이좋지 않은 알제리도 프랑스가 터키를 아르메니아 학살로 비난하면 프랑스를 비난하고 터키는 좋아라 알제리를 편들어준다.[3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성공이었다.[36] 사실 카타르가 더운 날씨로 월드컵 개최지로서의 적합성에 대해서 예전부터 논란이 있었는데, 이에 카타르 왕실은 '전 경기장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면 된다.'로 정면 대응하며 오일 머니로 무장한 산유국의 위엄을 과시했다.[37] AM 5위[38] B팀[39] 쿠프 드 프랑스[40] UEFA 인터토토컵[병역] 75년 당시 프랑스의 징병제로 출전이 불가능했다.[42] 쿠프 드 프랑스[43] UEFA 컵, 유로피언 컵[44] 코파 이탈리아[45] UEFA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 유러피언 컵, 인터컨티넨탈컵[46] (Ho giocato nel Nancy perché è la squadra della mia città, nel Saint-Étienne perché è la squadra più forte di Francia, e nella Juventus perché è la squadra più forte del mondo...)[47] 간단히 말해 기술의 스포츠라는 의미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해도 격차가 나게 되는 육상 등의 단련의 스포츠, 포커 등의 판단력의 스포츠와 그 점이 다르다.[48] 프랑스어로 왕이라는 뜻[49] 미셸의 성씨에 명사 접미사(보통명사 또는 고유명사) 또는 형용사, 동사 접미사 "-oche"를 붙여 만든 별명이다.[50] 혼전 성씨는 비고니이다.[51] 그녀는 생테티엔에서 플라티니와 함께 뛴 동료인 장 프랑수아 라리오스와 82년 월드컵 도중의 불륜 스캔들로 인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로인해 라리오스와 플라티니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는데,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스캔들로 인해 라리오스는 프랑스 대표팀에서 제외됐었다.[52] 루메니게, 말디니 같은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검색해보면 복무 시절 사진이 나온다.[53] 징병제 폐지 후 사라졌으나 CSND 에 의해 2014년 다시 재구성 됐다. 참고로 CSND는 2024년 파리 올림픽의 훈련캠프로도 쓰였다.[54] 잉글랜드 남동부 지역, 보면 알다시피 프랑스와 가깝다.[55] 당시 프랑스 대표팀 수석 코치
[56] 사실 회장이긴 해도 UEFA에서도 FIFA가 관여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게 많아서 다음 회장 연임을 노리자면 블라터에게 거슬릴 수 있음을 어필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장직을 겨우 2% 수준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기에 아무리 블라터가 그를 지지하네 뭐네 해도 반블라터, 반피파 세력이 상당한 UEFA에서는 그도 눈치 좀 봐야 한다.
분류
- 1955년 출생
- 1972년 데뷔
- 1987년 은퇴
- 뫼르트에모젤 출신 인물
-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 프랑스의 축구 선수
- 프랑스의 축구 감독
- 미드필더
- 축구 행정가
- AS 낭시/은퇴, 이적
- AS 생테티엔/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프랑스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참가 선수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프랑스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감독
- 프랑스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발롱도르 다회 수상자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다회 수상자
- 옹즈도르 다회 수상자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수상자
- 복수국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