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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2:48:41

아르튀르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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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콜뤼슈
6위7위8위9위10위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16위17위18위19위20위
장 가방
21위22위23위24위25위
26위27위28위29위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32위33위34위35위
볼테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41위42위43위44위45위
미셸 사르두
46위47위48위49위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다비드 두이예
장 자크 골드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달리다
레옹 지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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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위62위63위64위65위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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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위72위73위74위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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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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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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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B0B0B0><colcolor=#202020>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파일:Rimbaud.png
본명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출생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제2제국 샤르빌
사망 1891년 11월 10일 (향년 37세)
프랑스 제3공화국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시인 → 상인
사조 상징주의
서명 파일:아르튀르 랭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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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B0B0><colcolor=#202020> 묘소 프랑스 샤를빌메지에르 샤를빌메지에르 묘지
종교 무종교(유신론)[추정]
부모 아버지 프레데리크 랭보
어머니 비탈리 랭보
형제 이자벨 랭보
비탈리 랭보
프레데리크 랭보
동거인 폴 베를렌 (1871년 ~ 1875년) }}}}}}}}}

1. 개요2. 생애
2.1. 활동기2.2. 절필기
3. 작품4. 어록5. 여담

[clearfix]

1. 개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문학은 모두 상식 차원에서 쓰였지만, 랭보만은 예외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는 프랑스시인이다. 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 등의 후기 상징주의 작가들과 더불어 프랑스 현대시 구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빛나는 재능으로 시대를 앞지르는 시를 썼지만 방랑, 방황, 반항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다. 일찍부터 라틴어로 글을 썼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으나 지속적인 가출과 이 시대에는 현대보다 훨씬 심하게 탄압받던 성적 지향 등으로 인해 한 번도 안정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30대에 요절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2. 생애

2.1. 활동기

프랑스 제2제국 동북부 아르덴주 샤를빌[2]에서 군인인 프레데리크 랭보(Frédéric Rimbaud)와 비탈리 랭보(Marie Catherine Vitalie Rimbaud)[3] 부부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865년 랭보는 형 프레데리크 랭보[4]와 함께 콜레주 드 샤를빌에 입학해 총명한 재능을 뽐낸다. 형 프레데리크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보여줬지만 랭보가 라틴어·그리스어 암송 부문의 상을 모조리 쓸어가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랭보는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학교를 싫어했다. 일부러 수학이나 간단한 나눗셈조차 못 하는 척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래는 콜레주의 교육 방식에 반발, 랭보가 작성한 글이다.
알렉산드라가 유명했었다는 사실이
내게 뭐 중요한가? 라틴 민족이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아는 것이 내게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이야?
그들이 살았었다 해도
그들은 나를 연금 생활자 정도로 만들었을 테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언어를 보전해 온 것뿐인데.
내가 선생들한테 뺨을 맞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을 정도로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빌어먹을 그리스어
이 빌어먹을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중략)
걸상에 앉아 바지가
닳도록 공부해봤자 좋은 일도 별로 없고.
빌어먹을!
구두닦이가 되려면 구두닦이 할 자리를 얻어야 하고
시험에 붙어야 해!
당신들에게 할당된 자리들은 구두닦이나 수위나
목축업자 같은 거지.
다행히도 나는 그런 자리는 원하지 않아.
빌어먹을!
에라이, X같다!(출처: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랭보의 개인 교사 이장바르[5] 선생에게 소설 레미제라블 등을 소개받으며 본격적으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랭보의 어머니는 왜 아이에게 소설이나 읽히냐며 불평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이장바르와 랭보는 스승-제자 이상의 친밀한 관계였다. 이장바르는 가출한 랭보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장바르 선생은 랭보에게 계속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고 대학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랭보는 대학 X까 나는 시인이라고라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즈음 랭보는 유명한 '견자의 편지'를 이장바르에게 써 자신은 시인의 길로 전념할 것을 밝혔다.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랭보는 친구 브르타뉴[6]의 소개로 파리에서 한참 인기를 끌던 시인 폴 베를렌을 알게 된다.
파일:external/bf97e4628e944d13fcb100b387b636c0e87448e5dd61fee942961dc2bea06fe1.jpg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랭보는 스스로 자신있게 여긴 작품 ‘취한 배’를 들고 베를렌을 찾아간다. 자기소개와 함께 시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자 직접 그를 만나러 간 것. 당시 랭보는 불과 17세의 미성년자였고 베를렌은 그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고 달콤한 행복에 취해있었다.

베를렌은 랭보의 시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를 파리로 초청한다. 그러나 랭보에 대한 파리 작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더럽다'는 말을 하는 작자들도 있었다. 랭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기 파리를 다녀온 뒤 두 번째로 파리에 대한 환멸을 맛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랭보는 하늘 같은 선배 시인에게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둘이서 일상을 벗어나 유럽 여행을 함께하면서 여행의 영감을 시로 써보자고 했던 것. 그 제안에 솔깃했던 베를렌은 신혼집을 나와 함께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올랐고 그렇게 몇 달씩이나 유럽 전역을 다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문학적 성향은 물론 성격과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여행 중 랭보의 내면에 숨어있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나며 두 사람은 불륜 관계로 발전, 베를렌의 가정은 파탄이 나고 만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심하게 다투게 되고 격분한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지경으로 치달으면서 베를렌은 남색 혐의로 감옥에 간다(당시에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처벌되는 범죄인 시대였다). 갈 데가 없어진 랭보는 로슈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고, 이후 베를렌과 재회하지 못한다.

다만 베를렌은 그후 랭보와 가끔 편지를 주고 받았고, 감옥생활 중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랭보에게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개무시당한 일이나, 랭보의 친구의 친구와 친해져 역시 편지 교환을 할 때 간간히 '슈투트가르트(랭보가 묵던 지역)의 그 애', '슈투트가르트 놈', '그 기생충' 라는 식으로 지칭하며 소식을 물어봤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베를렌은 랭보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랭보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죽었으며, 죽기 1년 전까지도 랭보의 시집 편집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 후 제르맹 누보[7]라는 스페인 시인과 런던 등을 전전하며 다시 유럽 전역을 떠돌던 랭보는 결국 19세의 나이에 절필을 선언한다.

2.2. 절필기

문학의 길을 접은 후 그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노동자가 된다. 네덜란드 식민지 군에 용병으로 지원하기도 하고[8], 전 유럽맨발로 돌아다니려다가 발을 잘릴 뻔 하기도 하고, 벽장에 짱박혀서 외국어를 습득하려고 밤낮없이 책만 읽기도 하는 등, 기행을 일삼던 랭보는 아프리카 아덴의 마제랑, 비아내이, 바아디 앤드 시 등의 리용 지역 회사의 아프리카·아라비아 지사에 이력서를 내며 전전하다가 결국 커피 선별 및 검량 작업장인 '하림'의 감독관직을 맡았다.

이러면서 한편으로는 밀수업에도 발을 담궈 아덴의 헛간 건물을 하나 사들여 무기 밀수에 가담했다. 유목민들의 카라반 루트를 이용한 무기 거래가 랭보의 주 무역루트였는데, 이때 아직 에티오피아황제가 되기 전이었던 메넬리크 2세와 안면을 트기도 했다.

그의 됨됨이 때문에 고약한 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감독관들에게 흔한 별명이었다고 한다. 랭보는 이런 동안에도 가족들로부터 과학 서적이나 실용 서적을 주문해 볼 정도로 독서에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문학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기를 선택했는지, 누군가 자신의 과거의 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건 다 헛소리였고 거짓말이었다."라는 식으로 일갈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써갈겨 남겼던 시가 일으킨 반향으로 파리에서의 그는 이미 젊은이들에게 대스타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시절의 사진을 보면, 꽃미남 시절의 랭보는 사라지고 웬 폐인이 한 명 서있다. 2010년대에 와서야 그의 말년의 사진들이 다시 발견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메넬리크 2세가 에티오피아 일대를 안정시켜 나가기 시작하자, 점점 거래에서 고압적으로 나오거나 대금을 어음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랭보는 이익을 위해 더 멀리까지 밀무역을 나가야 했다. 이 거친 환경 속에서 한계에 달한 랭보는 종양에 걸려 에티오피아의 헤라(Herar)에서 제알라(Zeliah)까지 후송되었다.

거기서 배를 타고 1891년 8월 23일 프랑스로 돌아온다. 마르세유로 향한 랭보는 결국 전신에 퍼진 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10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유전의 영향이 큰 병이었으며 친인척 중 관절염이 악화돼서 사망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랭보가 사망할 당시 그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상황이었다.[9]

병원 사무원은 그의 사망을 이렇게 기록했다.
무역업자, 이송 도중에

장례 절차에 쓰였던 비용계산서는 다음과 같다.
6급 장례식.
떡갈나무 납관: 212.60 프랑.
구리판, 상장, 마차 몇 대 등등.
총액 458.11 프랑.

3. 작품

4. 어록

인생이란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하는 희극이다.[10]
책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11]
책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5. 여담



[추정] 이 기사에 따르면 랭보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한다.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 교리와 관습에 비판적이었다.[2] 現 샤를빌메지에르·Charleville-Mézières.[3] 혼전성은 '퀴이프(Cuif)'.[4] Jean Nicolas Frédéric Rimbaud.[5] Georges Alphonse Fleury Izambard, 1848년 12월 11일 ~ 1931년 2월.[6] Paul-Auguste Bretagne, 1837년 3월 21일 ~ 1881년 10월 30일.[7] Germain Nouveau 1851~1920.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인이지만 스페인으로 귀화해 살았다.[8] 그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 방문할 목적으로 지원했다.[9] 여동생 이사벨이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 따르면 오른쪽 엉덩이께부터를 모두 절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랭보는 수술 이후에 의족을 착용하길 원했고 실제로 그에게 맞는 의족이 제작되어 오기도 했지만, 종양이 악화되어 실제로는 한 번도 착용해보지는 못했다고 한다.[10] 원문은 다음과 같다. "La vie est la farce à mener par tous."[11] 원문은 다음과 같다. "Je me crois en enfer, donc j'y suis."[12] 랭보가 유일하게 출판한 시집인 <Une saison en enfer>와 동명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