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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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호세 카레라스 José Carrer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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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제프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 Josep Maria Carreras i Coll |
출생 | 1946년 12월 5일 ([age(1946-12-05)]세) |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 |
국적 |
(1975~현재) |
직업 | 성악가, 자선 활동가[1] |
활동 | 1954년~현재 |
신체 | 170cm |
학력 | 바르셀로나 대학교(화학 / 중퇴) 리세우 음악원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요셉) |
가족 | 아버지 주제프 카레라스 이 솔레 어머니 안토니아 콜 이 사이치 배우자 메르세데스 페레즈(1971년~1992년) 배우자 유타 야거(2006년~2011년) 아들 알베르트 카레라스(1972년생) 딸 줄리아 카레라스(1978년생) |
1. 개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쓰리 테너'로서 유명세를 떨쳤다.백혈병 투병으로부터 복귀한 후 쓰리 테너 콘서트의 초기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태초에 세 명의 테너가 뭉칠 수 있게 한 장본인이며, 사실상 쓰리 테너의 구심점이었다.
동향 출신의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와 이탈리아 로비고[2] 출신의 성악가 카티아 리치아렐리[3]와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도 했고, 필립스와 EMI,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도 많은 음반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리스 출신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와도 여러 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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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음악적 성향
많은 오페라 가수들이 겨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쯤인 스물여덟 살 때까지 카레라스는 24개의 서로 다른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고, 세계 4대 오페라 하우스에 모두 데뷔하는 기록을 세웠다.
플레이DB 인물소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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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릭한 질감의 스핀토 테너로 음색 자체는 꽤나 어두운 편이지만 거칠지 않고 부드럽다. 그러한 속성이 목소리를 너무 쨍하지 않도록 하여 화려하고 풍부한 음색을 만든다.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목소리를 ‘벨벳 같다’라고 표현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음색에 독자적인 해석을 더한 열정적이고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그의 목소리의 서정성과 단단함을 잘 보여주는 사랑의 묘약 중 ‘Una furtiva lagrima’ |
토스카 중 ‘Recondita armonia’ |
1977년 녹음된 토스카 중 ‘E lucevan le stelle’ (4분 36초부터)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Sulla tomba che rinserra" - "Verranno a te sull'aure" |
그럼에도 카르멘의 돈 호세,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라 보엠의 로돌포, 돈 카를로의 돈 카를로, 가면 무도회의 리카르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등 무수한 배역에서 그는 해당 배역을 가장 잘 연기한 테너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실제로 유명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그의 돈 호세에 대해 ‘마치 그를 위해 쓰여진 배역 같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래 영상은 그의 목소리가 무결의 상태였던 1973년, 흠 잡을 데 없는 하이 C[8]와 함께 그가 왜 최고의 잠재력을 가졌었다고 평가받는지 한 눈에 보여주는 당시의 몇 안 되는 녹음이다. 고작 데뷔한지 4년째의 기량이다. 이런 녹음들을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쓰리 테너 공연으로만 그를 접한 대부분의 대중들의 평가는 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하루만의 임금님 중 ‘Pietoso al lungo pianto’ |
카르멘 중 ‘La fleur que tu m'avais jetée’ |
4. 내한
외국 성악가로서는 드물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9]인지 자주 내한해서 콘서트를 가지는 편이었다.국내 연주를 자주 왔던 몇 안 되는 성악가로, 한국 출신 성악도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의 내한 횟수가 7회 이하인 것에 비해 카레라스는 15회 이상이다.
1993년 2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MBC 초청 독창회를 가졌다. 당시 우리나라 가장 많았던 4000여개의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1993년 독창회 - 본 공연 |
1993년 독창회 - 앵콜 및 커튼콜 |
다만, 2014년 내한 연주회에서는 11월 23일자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준비하던 중, 급성 후두염과 감기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는데, 언론에서 자극적인 기사로 이를 비난하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공연 포스터 자체가 "전설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했기에 관객들은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전날에도 공연 시작 직전 안내 멘트로 건강 문제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추후에 일요일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에게는 티켓값의 110%를 환불해 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펼쳐졌다. 이 공연에서는 무려 6곡의 앵콜 이후에도 4번 이상의 커튼콜까지 선보였다. 1부에서는 아끼듯이 노래를 불렀으나 2부에서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창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의 전성기 시절 쩌렁쩌렁한 고음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세계를 호령했던 가수답게 모든 순간들에서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오랜 애창곡 <Core 'ngrato>는 정말 잘 표현해주었다. 2014년 공연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컨디션 관리를 잘 했고, 한국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과 박수와 함께 성황리에 무대를 마무리했다. 2부 후반에선 매 노래와 커튼콜마다 전원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2500여석 좌석 가운데 2400여석이 넘는 관중이 있었고, 2100여석의 일반판매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장비 등으로 인해 관람이 여의치 않은 자리와 초대석 일부를 제외하면 가득 찼다.
5. 여담
- 하이엔드 주얼리 및 시계 브랜드인 Chopard의 공동 회장 캐롤라인 슈펠레와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하며 그에 따라 쇼파드는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의 후원사로 오랜 시간 활동해왔다. 실제로 쇼파드에서는 카레라스의 이름을 건 주얼리와 시계 컬렉션을 출시하여 수익금을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 매 연주회마다 앵콜 중 한 곡은 무대 뒷쪽 좌석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불러주는 좋은 매너로 호평을 받는다.
- 독창회 앵콜 때 자주 부르는 노래가 몇십 년째 유지되어 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Core n’grato>, <Torna a Surriento> 등은 빠지지 않는 그의 애창곡이다.
- 2001년 <José Carreras Around the World> 앨범에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한국어로 부른 음반이 수록되어 있다.
- 공연 시 전례 없는 개런티를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카레라스와 더불어 쓰리 테너 모두에 해당되는데, 실제로 2014년 독창회의 경우 최고가 티켓 값이 44만원에 달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파바로티가 15억원, 도밍고가 14억원, 카레라스가 8억원의 개런티를 받았으며, 쓰리 테너 공연 때에는 각자 10억원의 개런티를 받았다. 보통 저 당시에 잘나가는 테너들은 1억 내외의 개런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했던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당시 한국 3대 테너 공연 최고가는 25만원으로 당시 역대 최고 표값이었다. 놀라운 점은 같은 공연의 시카고, 일본 등 외국의 티켓 값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다는 것이다. 최고가 티켓 기준 일본은 69만원, 미국은 75만원 수준이었다. 참고로 2000년대에 들어 조수미가 1억원 정도의 개런티를 받았다.
[1] https://fcarreras.org/en/[2] 베네치아 지방의 일부이다.[3] 심지어 리치아렐리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4] 이러한 평가와는 반대로 카레라스는 이 역에 대한 애착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지나치게 단순한 감정선 때문이라고. 반대로 카레라스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역으로는 카르멘의 돈 호세 등이 있다.[5] 대표적으로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6] 1970년대에 카레라스는 한 해 동안 50회 이상의 오페라 공연과 수십 회의 리사이틀에 더해 끊이지 않는 스튜디오 녹음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7] 카레라스와 함께 환상의 커플로 불리는 카티아 리치아렐리 또한 카라얀의 무리한 요구의 피해자로 유명하다.[8] 1분 50초[9] 실제로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신의 고향과 굉장히 비슷해서 친숙하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