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역임 직책 및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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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요 수상과 수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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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 대공로십자성현장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2등급 그랜드 우피시아레 |
오스트리아 과학 및 예술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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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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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헤르베르트 카라얀[4] Herbert Karajan | ||
출생 | 1908년 4월 5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잘츠부르크 공국 잘츠부르크 | |||
사망 | 1989년 7월 16일 (향년 81세) | ||
오스트리아 아니프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지휘자 | ||
활동 | 1929년 ~ 1989년 | ||
링크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 아니프 묘지 | |
신체 | 173cm | ||
학력 |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피아노 / 지휘, 1916~26) | ||
수상 /영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1960)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오페라 녹음상 (1964, 69) 잘츠부르크 명예시민 (1968) 베를린 명예시민 (1973) 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77)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박사 (1978) 빈 명예시민 (197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주상 (1978) 그라모폰상 (1981) Médaille de Vermeil (1982)[5] 유네스코 국제음악상 (1983) RPS 금메달 (1984)[6] 에두아르드 라인 명예의 반지 (1984) 올림피아상 (1986)[7] | ||
배우자 | 엘미 호르가레프[8] (1938년 ~ 1942년, 이혼) 아니타 귀터만 (1942년 ~ 1958년, 이혼) 엘리에트 무레 (1958년 결혼) | ||
자녀 | 이사벨 카라얀 (1960년생) 아라벨 폰 카라얀 (1964년생) | ||
레이블 |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 ||
종교 | 가톨릭[9] | ||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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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너 파르지팔 1막 전주곡 1980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브루크너 교향곡 7번 1989년 4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2]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며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이다. 그의 압도적인 위상과 유명세를 잘 요약하는 별명이 바로 20세기 클래식의 황제다.[13]
비단 그의 음악성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적 행보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를 받는다. 카라얀은 음악과 디지털 기술의 접목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 카라얀을 기점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영상물과 음반이 폭증했다. 또한 후술할 자비네 마이어 사건을 통해, 클래식 음악계에서의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카라얀은 클래식의 대중화에도 힘써서,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가장 강력한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14] 클래식 음반 판매량은 작곡가 별로 집계가 되지 않지만 지휘자, 연주자 별로 집계한 것을 보면 카라얀이 2억장 정도로 공식적으로 집계된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판매한 인물이기도 하다.[15][16]
2. 생애
3. 평가
4. 카라얀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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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소니와 필립스가 CD 공동개발을 결정할 당시의 모습[17] 기념사진을 찍었다[18] |
카라얀은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열정적인 청중, 유럽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실황방송 중계시스템, 소니의 뛰어난 기술력 등...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의 안내로 각종 첨단 기기들을 관람했다[19]. 카라얀은 CD 등을 비롯하여 소니의 음향 관련 기기의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CD를 이용한 최초 녹음도 카라얀이 했는데, 잘츠부르크 부활절음악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녹음한 것이 그것이다. 카라얀은 심지어 일본에서 대학생 오케스트라를 리허설한 적도 있다.
- 1954년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도쿄뿐만 아니라 교토, 나고야, 다카라즈카 등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이 때 NHK 심포니와 연주한 차이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은 나중에 일본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 1957년
11월 3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16회 콘서트를 가졌다.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2회), 후쿠오카, 고베, 히로시마, 야하타, 센다이에서 공연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7번,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38번, 스트라빈스키 불새 조곡, 힌데미트 화가 마티스, 슈트라우스 돈 후안,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스메타나 몰다우,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베버 오베론 서곡, 앵콜은 바흐의 관현악 조곡 제3번의 Air(G선상의 아리아),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이 공연 영상의 일부는 DVD로 발매되었으며 유튜브에서 공연의 일부를 볼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등은 음반으로도 나와있다. 카라얀은 연주회가 일본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 영상물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 1959년
빈 필과 일본을 방문했다. 이것은 빈 필과 카라얀의 세계 투어의 일환이었다. 17개국에서 26회의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그중 일본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총 9회의 콘서트가 열렸다. 일본 공연의 일부는 나중에 CD, DVD로 발매되었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제4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등이 연주되었다.
- 1966년
베를린 필과 일본을 방문하여 4월 12일부터 5월 3일까지 3주간에 걸쳐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카나자와시, 오카야마현, 마츠야마시, 타카아츠, 센다이시, 삿포로시에서 18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레오노레 서곡 3번 콜리올란 서곡,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돈 후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 베베른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소품,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6번. 공연의 일부는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고 추후 킹 레코드에서 라디오 녹음된 분량을 음반으로 발매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의 경우 일본의 5개의 합창단을 연합하여 연주했다.
- 1970년
5월 8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6회)에서 공연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오사카), 브람스 교향곡 2번, 3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슈만 교향곡 4번, 오네거 교향곡 3번,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7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Fortner Marginalien(일본 초연).
- 1973년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7회), 오사카(3회)에서 공연을 가졌다.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6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브람스 교향곡 3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 드뷔시 바다, 쇤베르크 정화된 밤. 유튜브에서 공연 전 드레스 리허설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 1977년
11월 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5회)에서 연주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피아노 협주곡 3번, 4번, 5번, 브람스 교향곡 전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2번, 더블 콘체르토, 영웅의 생애. 당시 DG(베토벤 교향곡 전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와 EMI(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녹음한 것과 연관한 선곡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이 실황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 발매[20]되어 화제를 모았다. 합창은 동경예술대 합창단이 맡았다. 피아노 협주곡 선곡이 많은 것이 눈에 띄는데, 연주는 모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가 맡았다. 당시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전 공연을 다 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베토벤 교향곡 녹화 영상이 존재하나 미공개 상태이고 스위스 은행에 보관 중이다. 카라얀은 당시 방송국 측에 중계권만을 허용하고 녹화권은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공연 영상의 극히 일부가 바이센베르크의 방송 출연에 등장한 적이 있으며,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 1979년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에서 9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말러 교향곡 6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모차르트 교향곡 39번,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하이든 천지창조, 베르디 레퀴엠, 모차르트 레퀴엠, 브루크너 테데움. 2년 전 공연에서 일본의 합창단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빈 징베라인까지 데리고 왔다. 여전히 카라얀 본인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도쿄로 갔다.
이 때 공연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 1981년
10월 28일부터 11월 8일까지 도쿄에서 베를린 필과 10회 공연을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1번, 3번[21], 5번, 6번,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 차이스키 교향곡 6번, 라벨 볼레로, 스페인 랩소디,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을 공연하였다. 역시 유튜브에 공연 동영상이 있다.
- 1984년 방일 및 내한공연
10월 18일부터 10월 24일가지 베를린 필과 도쿄(4회), 오사카(2회)에서 총 6회의 공연을 가졌다. 오사카 공연은 DVD로 발매되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6번, 브람스 교향곡 1번, 3번,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슈트라우스 돈 후안,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조곡 2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5번.
일본 공연 직후 한국에서 최초로 이틀간 내한공연을 가졌다. 첫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과 제6번, 다음날에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트 15번[22]등을 연주했다. 당시 국내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된 공연이었다.
당시 공연을 관람한 사람의 수기에 의하면 당시 세종문화회관의 빈약한 음향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공연들과 달리 5관 편성으로 공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편성으로 연주한 것은 세종문화회관의 음향 상황과는 무관하며, 원래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할 때 4관 편성 이상으로 증원하여 연주해왔다. 심지어 베토벤 교향곡 5번에서 호른을 네 배 늘여 8명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 등을 4관 편성 규모로 연주했는데, 이는 세종문화회관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연주해왔기 때문이며, 내한 공연 직전 일본 공연에서도 똑같은 4관 편성으로 연주했었다.
당시 일본 및 한국 공연은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간 상황 직후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 시작 부분에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싸인이 맞지 않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번스타인과 아바도가 한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청 욕먹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대해서도 카라얀은 매우 큰 홀이라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콘서트 후에는 한국 청중들이 매우 정숙하고 음악에 대한 집중이 뛰어났고 평했다. 나중에 반드시 한국에서 다시 공연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한공연 당시 카라얀의 부인인 엘리에트가 핸드백을 잃어버렸다가 한국의 음악팬에 의해 되찾았기도 했다. 훗날 엘리에트는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아쉽게도 (한국이 아니라) 그 몇 해 전에 인도 뭄바이에서 빈 필하모닉과 공연했을 당시 일어났던 일"이라고 부인했다.[23] 그러나 핸드백 사건은 당시 음악동아 등에 수록된 사실이다. 카라얀은 잃어버린 핸드백에 여권 등이 포함되어 있어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핸드백을 되찾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감사의 표시로 핸드백을 찾아준 여성팬과 기념 사진을 찍었으며, 세미 정장 차림의 카라얀과 함께 찍은 이 기념사진은 당시 음악동아에 실렸다.[24] 카라얀은 나중에 지인들에게도 종종 한국에서 핸드백을 되찾은 얘기를 하면서 이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조수미에게도 카라얀이 이 일화를 얘기했다고 조수미의 자서전 등에 나와 있다. 출처[25]
카라얀이 이처럼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내한공연 당시 그의 부인인 엘리에트 여사가 서울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았던 사건도 작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카라얀이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점, 반면 1979년 중국 북경에서 상식 이하의 소란스러운 분위기[26]에서 공연하면서 실망했던 점, 번스타인이나 아바도와 달리 한국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이후에 내한한 점, 금난새, 조수미 등 한국인 음악가들과 인연도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카라얀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방문 요청을 받기도 했는데, 카라얀은 "날 보려거든 직접 찾아와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 1986년 방일 취소 및 1988년
1986년 베를린 필과 일본 도쿄에서 세 차례의 공연이 기획되었다. 이 중 두 차례 공연은 카라얀의 조언으로 설계, 완공된 산토리 홀의 개관 공연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건강이 악화되어 방일이 취소되고, 오자와 세이지가 대타로 베를린 필과 예정된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메타모르포젠,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7번이 연주되었다.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등은 녹화되어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 등에서 볼 수 있다.
1988년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3회)와 오사카(2회)에서 공연했다. 당시 사민당이 새로 집권한 베를린시 당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카라얀은 베를린시에서 주최한 베를린 필의 공연을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했는데, 그 다음날 일본 공연을 떠났다. 때문에 베를린에서 카라얀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카라얀의 최만년 공연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베토벤 교향곡 4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모차르트 교향곡 제39번,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의 공연 실황이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5. 나치이력 논란
5.1. 비판
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나치 전과가지고 논쟁을 많이 벌이기도 했는데 사실 당시 독일출신의 거장급 지휘자들은 나치 전과가 다 있었으며 대부분 사면됐다.[27] 그러나 카라얀의 전과는 여러 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것이 사실로, 전술한 것과 달리 '한 때'라고 언급한것과는 달리 국내 클래식 커뮤니티에서는 산발적으로 논란이 계속되고있다.대부분의 독일 거장 지휘자들은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해야만 했고, 이러한 현실은 지휘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가, 그리고 전 독일 국민들이 모두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단순히 나치당원 경력만으로 종신형 받고 그런 게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와 활동한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 여사는 '그는 단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하고 싶었을 뿐'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얀의 경우 히틀러 치세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무명의 지휘자였을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범재판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안슐루스(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보다 한참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카라얀은 독일에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이후 35년에 다시 한 번 가입했다. 나치에 두 번 가입한 사람이 나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치란 말인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역사학자 올리버 리스콜브는 카라얀의 친나치적인 언행을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반 유대주의에 공감하는 편지나 학창시절 오스트리아 국수주의 단체인 '범 독일 청년 그룹' 소속 이력 등.해당 기사 출세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을 뿐 나치의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친나치적,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너무 많다.
그리고 1935년 히틀러 생일 축하공연(바그너의 탄호이저)이나(해당기사(독일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등을 지휘한 것 등 나치 부역 이력은 그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잘못이고 과오이다.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기엔 지휘자들 이상으로 나치 부역을 거부하고 독일을 탈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이력 때문에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단체들이 비판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공연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나치 부역 경력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경중, 자의 타의를 가리지 않고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악단 단위에서 까였고 이들 또한 한참동안 이스라엘 공연도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토마스 만[28]의 아들 클라우스 만[29]은 "이 추밀원 고문들과 나치당원들은 …자꾸만 재촉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활동하고 지휘하고 연출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카라얀을 보라. 이런 자들에 의해 문화가 재건되느니 차라리 파편 속에 묻혀 있는 편이 낫다."라고 나치 부역 이력자들을 전부 비판하기도 했다.#
1981년 프랑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중에서, 나치당원들 앞에 월광소나타를 연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2차대전이 끝난 뒤 관객석이 텅 빈 무대에서 음악을 지휘하는 수모를 당하는 피아니스트 칼의 모티브가 되었다.
최근에는 1942년 독일 국방군과의 직접적 연관의 가능성과 친위대 보안국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증거들을 발견한 카라얀 연구자인 Riehle는 카라얀이 적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추종자였지만 확신에 찬 나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2023년 11월 아헨 극장에 설치된 흉상이 철거되어 인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음악적 업적을 떠나서 그 시절 행적을 옹호하기엔 적극적 행적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나 나치를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사회에서 카라얀이 앞으로 어떻게 재평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5.2. 옹호
그러나 그를 1930년대 초반에서 1940년대 중반 사이에 만났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나치가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 크리스타 루트비히 같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나 아헨 오페라 극장 합창 지휘자이면서 나중에 필하모니아 합창단 단장이 된 피츠 같은 경우나, 바이로이트의 많은 성악가들이 그는 정치적인(즉 음악계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목적에서 나치에 가입했던 것이지,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실제로 나치의 사상에 적극 찬동한 음악가들의 증언들도 포함되어있다. 베를린 필의 악장을 역임했던 토마스 브란디스 같은 경우에는 친척 중 일부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홀로코스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 카라얀은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30].실제로 탈나치화 재판의 기록을 보면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외부에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공연에서 나치와 관련된 곡을 연주한 적도 거의 없었다고 증언한다. 단 한번 연주했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시 행사에 포함되어있어 지휘해야 했지만, 재판관들 역시 카라얀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의 경력은 나치의 사상과 충돌하는 면도 많았다. 일례로,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아니타 귀터만은 유대인의 피가 섞인 혈통이었고, 위에서 나왔듯 히틀러는 카라얀에게 일종의 반감도 많았다. 심지어 스승과 아버지가 나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기록도 있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와 함께 몰래 멘델스존 음악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6. 디스코그래피
7. 카라얀의 키
항상 논란이 되었던 카라얀의 키. 대부분의 국내언론들은 카라얀이 키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했다.그런데 누가 카라얀의 키를 정리 했다.카라얀의 키 논란이 정리된 글
여기서 작성자는 카라얀의 키를 번스타인, 카를 뵘,마리아 칼라스 등의 사람들과 찍힌 사진을 제시하며 말했다.
- 칼라스의 키는 173으로 알려졌다. 카라얀과 칼라스 둘 다 구두를 신었다 가정하면 둘의 키는 비슷하다.
- 레너드 번스타인의 키는 170 정도인데 카라얀이 조금 더 커 보인다.
- 카를 뵘은 키가 177정도로 알려졌는데 카라얀과 키가 비슷하다.
- 존 바비롤리는 160 정도로 알려졌는데 카라얀과 키 차이가 상당하다.
라는 근거 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한예종 교수인 카라얀 전문가 홍승찬 교수가 키 컴플렉스 부분을 강조 했다. 홍승찬 교수는 한 매체에서 카라얀이 키에 대한 컴플렉스로 허리 위로는 찍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라얀의 영상물들을 모두 잘 찾아보면 전신 영상물이 간간히 보이는 편이다. 1971년에 촬영된 베토벤 교향곡 3,7번이나 1973년의 오사카 리허설 장면, 1977년 송년음악회 등이 그들이다. 1981년 오사카 실황 영상에서도 전신 영상물이 있다. 애초에 키가 작은 것을 문제 삼고 컴플렉스로 생각한다면 카라얀과 키가 비슷하거나 조금 작다고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 또한 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카라얀이 자신의 전임인 푸르트뱅글러나 후임인 아바도에 비해 키가 작고 또 친하게 지냈던 지휘자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쿠르트 마주어 등에 비해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건 사실이다.
외국의 언론이나 카라얀과 관련된 사람, 또 카라얀의 다큐멘터리나 그의 전기에서는 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나 카라얀의 전기를 쓰며 그를 여러번 만난 리처드 오스본 역시 카라얀의 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국내에 대한 소문은 카라얀의 내한공연을 들 수 있다. 카라얀이 1984년 내한당시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당시 공연을 보고 온 여러 사람들이 카라얀이 지휘대에 몸을 기울여 기대고 지휘했다는 증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카라얀의 내한당시 키가 160정도로 보이더라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인도 어디에 기대어 똑바로 서지 않으면 자신의 실제 키 보다 작아보이는게 사실이다. 다만 만년에 나이도 든데다 척추질환으로 수술을 몇 차례 받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기 때문에 키가 꽤 줄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 구두 장인은 카라얀이 13cm의 키높이 구두를 항상 주문해 신었다고 주장했는데 근거가 부족해 묻혀버렸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권에 카라얀의 키가 173cm 라고 기재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카라얀의 키 논란은 사실상 종결된 상태.
8. 여담
- 카라얀은 자신 주변의 동료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를 포함한 모든 음악가들을 립서비스인지 진심이지는 알 수 없지만 칭찬을 많이 했다. 특히나 조수미와의 일화 때문에 일부 카라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수미를 띄우기 위해 카라얀이 칭찬에 인색한 독설가라고 와전을 퍼트렸다. 정말 예외가 있다면 에리히 클라이버나 비르기트 닐손 정도. 그 이외에 수많은 음악가들에 대해 개인적 관계가 좋건 나쁘건 간에 상당히 우호적인 발언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31]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카라얀 자신은 푸르트벵글러를 음악적으로 대단히 존경했지만, 정작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매우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이 지휘자로 성공하지 못하도록 오케스트라에 압력을 넣어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카라얀 본인도 푸르트벵글러와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굳이 그와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평생 푸르트벵글러의 대한 존경과 찬사의 발언은 수도 없이 했지만 단 한번도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 개인사 측면에서 앙금이 상당히 많지만 이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하거나 불평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 사적인 자리에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자신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 보다 의외로 어차피 푸르트벵글러 이후 언젠가는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담담하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카라얀이 존경한다고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다. 월터 레그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의 음반을 시도때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도 나와 있듯이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카라얀이 20대 시절에 토스카니니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러 카라얀의 마을에 찾아오자 카라얀은 그의 리허설을 몰래 보기 위해서 리허설을 하는 오케스트라 홀의 오르간 뒤에 숨어서 그를 봤는데, 토스카니니가 오케스트라가 말을 듣지 않아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 모든 문이 잠겨 있어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가리던 그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창단 된 이후 토스카니니가 관심을 보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유럽으로 건너온 일이 있는데 카라얀은 그 때 토스카니니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단원들에게 조심해 달라고 당부까지 했을 정도였다.
- 토스카니니의 라이벌이라고 종종 회자되는 빌렘 멩겔베르크의 경우 1930년대에 울름 극장을 찾아와 지휘한 적이 있는데 카라얀은 그의 엄격한 지휘를 보고 놀랐다고 회고하며 뜻 깊은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 동시대의 지휘자들 중 카라얀과 경쟁 관계에 있던 조지 셀,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카를 뵘, 오이겐 요훔등을 자주 칭찬했고, 실제로도 특히 조지 셀과 므라빈스키의 음악적 스타일을 상당히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므라빈스키에게는 "구시대의 대변인"[32]이라고 했을 정도. 카라얀이 1969년에 모스크바 공연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동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리허설을 몰래 볼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당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쇼스타코비치의 6번 교향곡을 리허설 중이었다. 카라얀은 리허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나름 웅장한 사운드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신과 베를린 필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사운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카라얀은 리허설이 끝나자 므라빈스키를 개인적으로 만나려고 했지만 소련 당국 관계자들이 시간이 없다며 만남을 방해해 만나지 못했고, 그를 매우 아쉬워했다. 사망 몇년 전 카라얀은 리처드 오스본과의 인터뷰에서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 해석에 있어서는 월등하기 때문에 10번 교향곡 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밝혔다.
- 카라얀은 조지 셀을 음악적 스타일을 매우 좋아했고 개인적으로도 그와 가깝게 지내려 노력했다. 조지 셀은 아마도 동시대 지휘자들 중에서 카라얀과 사적으로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지휘자라 할 수 있다. 카라얀은 조지 셀에 대해서 매력이 있고 지적인 남자라고 코멘트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조지 셀을 자신이 음악 감독으로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초청했고 또 미국에 눌러 앉은 조지 셀이 유럽에서 베를린 필이나 체코 필 등과 객원 공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또 60년대 이후 카라얀은 베를린 필과 빈 필, 그리고 65년까지 밀라노 스칼라좌를 제외한 다른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대부분 모두 거절했지만, 1967년 예외적으로 조지 셀이 이끌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해 당시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과 셀이 길거리에 격의없이 긴 대화를 나누는 사진들이 여럿 남아있기도 하다. 다만 카라얀이 셀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 데 반해 조지 셀은 카라얀의 스타일을 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칼 뵘과는 매우 친해 서로 덕담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최소한 1950년대 부터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이후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만들 때 카를 뵘이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고 이들의 관계를 반증이라도 하듯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까지 뵘은 베를린 필과 많은 녹음을 남긴 객원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 먼저 뵘이 카라얀의 70세 기념을 축하하고 카라얀이 뵘의 85세 생일기념회에서 찬조연설을 한 뒤 선물을 주었다. 뵘은 카라얀에게 아들인 칼 하인츠 뵘(1928~2015)가 베토벤을 연기하더니 집에서도 귀가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카라얀은 서슴없이 이 이야기를 주변에 퍼트리기도 했다. 이후 카라얀은 1981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려고 준비한 칼 뵘이 급서하자 그를 위해 추모 곡을 지휘했고 추모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이자 클래식 연구가인 안인모씨는 뵘이 카라얀을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는 잘못 된 주장을 하였는데 아마 정보를 잘 모르는 상태였거나 두 사람 사이를 라이벌화[33] 시키려 했던 일본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 오이겐 요훔은 비록 푸르트뱅글러 사후에 베를린 필을 놓고 경쟁한 경쟁자였지만[34] 카라얀은 베를린 필에 요훔을 자주 초청하거나 또는 요훔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베를린 필하모니에 자주 초청했다. 한 번은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리허설 중이던 요훔에게 카라얀이 홀의 음향이 어떠냐고 조언을 구했는데 "홀이 넓어서 녹음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고. 실제로 개관 당시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녹음에 부적격하다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카라얀도 그걸 알고 있었고 동료 선배의 조언에 따라 1960년대 대부분을 베를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했다.
- 쿠르트 마주어에 대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칭찬했다. 마주어는 그 자신이 키운 유능한 음악가가 200명이 넘는다며 그를 뛰어난 음악가이자 열성가라고 말했다.
- 독설가 이미지로 잘못 알려지던 때에,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레너드 번스타인, 세르주 첼리비다케,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을 시기해서 이들이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것을 막았다는 루머가 상당히 유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다.
- 번스타인의 경우 1979년 베를린 필을 단 한 차례 지휘(말러 교향곡 9번)했다. 번스타인이 79년 이전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에도 베를린 필과 공연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카라얀의 방해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차이가 있다. 여러 증언으로 볼 때 79년 공연 당시 리허설 때 상당히 복잡한 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 리허설하러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강한 존재감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우선 담배를 물고 지휘대에 앉아 리허설을 시작하는 모습에 일부 단원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이후 리허설 때 일부 단원들과 번스타인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난 모양이고, 번스타인은 이에 대해 상당히 무례하다고 느꼈고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번스타인은 연주회 직후 공개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베를린 필이 말러를 잘 연주하지 못한다고 깠고, 말년까지도 사적인 자리에서 베를린 필 단원들이 버릇이 없다고 말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처럼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과 연주하지 않은 것은 번스타인 본인이 이를 원하지 않은 탓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 79년 연주 때 일부 단원들이 번스타인과 마찰을 빚었지만 다른 단원들은 번스타인의 카리스마와 음악성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재초빙하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번스타인과 카라얀은 표면적으로는 만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번스타인과 카라얀이 실제로 서로를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던 관계였던 것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번스타인은 자기 비서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카라얀을 까기도 한 모양이다. 번스타인 쪽에서 카라얀을 불편하게 여겼던 일화는 꽤 유명한데, 위에서 언급된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1979년 지휘와 관련이 있다. 1979년에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과 말러 9번 연주를 마치고 그의 악보를 몇달간 돌려 받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번스타인은 이 기간 동안 카라얀이 자신의 악보에 적어 둔 해석을 참고했다고 확신했고, 주변인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내며 카라얀을 비난을 하기도 했다.[35] 그래도 어쨌거나 둘은 만나면 그래도 서로 덕담과 농담을 주고 받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 첼리비다케가 1954년 이후 1992년까지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않은 것은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 양자의 관계 때문이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은 1954년말 리허설 때 첼리비다케가 단원들을 전부 짜르고 물갈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크게 언쟁을 벌인 후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992년 복귀 연주회는 독일 대통령의 세 차례에 걸친 요청 때문에 거의 마지못해 이루어진 공연이며 이후에도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은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못한 것은 클라이버가 요구했던 출연료가 카라얀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를린 필 매너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적으로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카라얀은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36] 카라얀은 클라이버에 대해 "냉장고에 음식이 비어야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반은 농담, 반은 칭찬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37] 라파엘 쿠벨릭이나 오이겐 요훔, 조지 셀, 카를 뵘, 루돌프 켐페, 존 바비롤리,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38] 등은 카라얀의 재직 시에도 베를린 필과 연주를 하거나 음반 녹음도 하였는데 카라얀은 이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음악적 조언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고 사적인 이야기도 주로 했다고 전해진다.
- 이외에도 후배 지휘자들에게도 좋은 말을 많이 남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는데, 카를로스 클라이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39], 오자와 세이지, 세묜 비쉬코프 등이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대해서는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배를 벗어나지는 못햇지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클라이버가 카라얀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카라얀과 클라이버는 때때로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하는 사이였다. 도흐나니는 카라얀의 제자이기도 하여 카라얀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자와 역시 카라얀의 제자에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며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오자와는 처음에는 제자에 가까웠지만 나중에 오자와가 성장할수록 음악적인 동반자로 대했다.
- 성악가, 협연자를 보면 비르기트 닐손을 제외하면 모두다 극찬했는데 미렐라 프레니, 레온틴 프라이스는 물론 쓰리 테너와 기타 자신과 활동한 성악가나 협주곡에서 활동한 독주자나 자신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도 칭찬했다. 베를린 필에서 호른주자로 활동한 게르트 자이페르트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상형적인 음악가로 세계 최고의 호른 연주가 라고도 했다. 전체적으로 모든 음악가들에 대해서 거의 호평 한 셈. 이리 되면 푸르트벵글러와 스토코프스키를 제외한 다른 음악가들을 대부분 혹평한 첼리비다케와는 완전히 반대인 셈.
- 비르기트 닐손(1918~2005)과는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우선은 음악적 스타일 부분에서 앞서 흔히 화통에 비유되는 그녀의 강력하지만 감성이 결여되어 있는 목소리가 카라얀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프라노상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카라얀은 바그너에서도 섬세한 표현을 중시했고 그래서 헬가 데르네슈와 같은 미성을 가진 소프라노를 음반 녹음에 자주 기용했다.
물론 닐손은 60년대의 대체불가한 바그너 소프라노였고, 전시대를 통틀어도 단연 탑클래스에 속하는 바그너 소프라노였기 때문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공연했다. 특히 1950년대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함께 해 오며 좋은 관계로 지냈고 1960년에는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라타 <박쥐>의 녹음에도 갈라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리허설에서 닐손에게 노래에 감정이 없다, 감정을 넣어 부르라는 주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닐손의 스타일은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냉혈한의 목소리 그 자체였고, 결국 60년대 이후 카라얀은 실제 공연에서는 여러 사정에 의해 닐손과 종종 공연을 하더라도 음반 녹음에서는 닐손이 아니라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목소리를 지닌 표현력이 좋은 성악가들을 기용했다. 그리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은 뒤에 나오는 메트로폴리탄 리허설 일화에도 나오듯 평소 리허설 때도 카라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대해 먼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은 닐손이었다. 언행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던 닐손은 60년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도 카라얀에 대한 거리감을 그대로 표출했다. 닐손은 언론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자신과 공연은 종종 하는데, 음반 녹음에서는 절대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점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인터뷰에서 닐손은 카라얀인 자기에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요구했고, 자신이 카라얀의 스타일과 맞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닐손은 앞으로도 카라얀이 자신을 녹음에 기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닐손의 목소리 스타일 자체가 일단 카라얀 본인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대다가 닐손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이 카라얀에게는 사사건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60년대 후반부터는 카라얀과 닐손은 리허설에서도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 일화가 다소 나온다.
이후에는 사석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푸치니의 <토스카>에 나오는 악역 스카르피아를 분장없이 연기할 수 있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했을 때 카라얀과 닐손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카라얀은 무대를 어둡게 하여 오페라 리허설을 했고 닐손이 이에 대항하는 격으로 광부가 쓰는 헤드랜턴을 쓰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로는 조명 대체가 안되었는지 결국 닐손은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어 공연에서 빠지게 되었고 이를 비방하는 말로 언론을 통해 기고했다. 카라얀 또한 "내 음악세계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떠났다고 응수했다. 이후 카라얀과 닐손이 함께 공연하는 일은 없었는데, 이미 이전부터 카라얀은 바그너 녹음에서 닐손을 기용하지 않았고 닐손보다 유명세는 떨어지더라도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성에 가까운 성악가를 기용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니벨룽의 반지 프로덕션은 원래 음반 녹음과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위해 기획된 것인데, 음반 녹음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아닌 헬가 데르네슈를 기용했다. 데르네슈는 닐손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질 뿐만아니라 바그너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소프라노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미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량이 크지 않아 실제 공연에서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소프라노 뿐만 아니라 테너 주연 역시 훌륭한 미성을 지녔으나 성량이 부족했던 헬게 브릴리오트를 기용했다. 카라얀은 음반녹음에서는 미성의 데르네슈와 브릴리오트를 기용하여 부족한 성량을 마이킹으로 보완할 수 있었으나,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엄청난 크기의 홀에서는 데르네슈나 브릴리오트의 성량의 한계가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배역에서 유명한 닐손과 제스 토머스을 주연으로 기용했다. 이처럼 카라얀의 고집스운 성격에 대해 닐손이 반항해서 카라얀이 그녀를 더 싫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닐손의 스타일 자체가 카라얀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닐손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닐손은 60년대초 인터뷰에서도 이미 카라얀의 스타일에 자신이 맞지 않기 때문에 카라얀의 음반 녹음에 기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또 닐손은 카라얀의 사후 인터뷰에서도 "마에스트로는 호불호가 분명해서 그의 눈 밖에 나면 가수들은 목소리를 다듬을 시간도 없어서 녹음테이프만 들어도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단 닐손 본인이 카라얀의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행 등에서도 카라얀과 안맞아 그의 눈 밖에 난 상황임을 복합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도 닐손은 카라얀을 싫어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나는 그가 음악에 집중 할 때 그와 함께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 그의 말년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굉장한 팬이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 그녀를 대단히 존경한다" 고 말할 정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오스트리아 방문 중 정말 카라얀을 보러 잘츠부르크 교외 아니프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대처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와 점심식사를 할 겸 카라얀의 자택을 찾았는데 거기서 대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남들이 다 들어주는 카라얀이 부럽다." 라고 했는데 카라얀은 꼭 그렇지만 않다고 말해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 대처에 대한 빠심이나 나치 집권 시기의 행적을 보면 정치적으로 우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가 죽기 직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 당시에는, 대다수의 서구 엘리트들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중국 당국의 진압을 지지하였고, '젊은이들은 노인의 충고를 따라야 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 그는 만족스러운 독주자나 성악가와는 매우 자주 협연했는데 피아노는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가 있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크리스티앙 페라스나 안네 소피 무터가 있다. 성악가로는 안나 토모와-신토우, 미렐라 프레니, 아그네스 발챠, 레온틴 프라이스, 라이나 카바이반스카 등이 있으며 남자 성악가로는 호세 반 담, 호세 카레라스 등이 있다. 물론 지휘자마다 선호하는 독주자나 성악가가 있기 마련이지만 자신이 연주할 때마다 원하는 연주자와 협연하는 지휘자는 극히 드물다.
-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음대에 들어가기 전에 빈 공대에 다니다가 자퇴했다. 특히 CD의 크기를 정하는 데 관여한 것은 유명하다. CD가 발명될 때, 휴대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만큼 너무 클 수도 없고, 너무 작으면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적어 어느 정도 크기가 적당한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재생시간이 74분정도 되니 이 한 곡을 다 담을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로 하자고 해서 지금의 CD크기가 나왔다. 이때 카라얀이 자문을 했다고 한다. 만년에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맘같아서는 냉동인간이 되어 수십년 뒤에 깨어나 자신의 모든 레퍼토리를 디지털 비디오로 녹화하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에 자주 간 이유 중 하나가 소니 본사 등을 방문해서 최신 기술을 체험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기술과 산업 트렌드에 대한 식견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1952년에 월터 레그에게 당시 잘나가고 있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20년 후에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레그는 당시에 정신나간 의견이라고 생각했지만 20년 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카라얀이 하도 눈을 감고 지휘하니까 베를린 필의 한 직원이 "마에스트로께서 지휘대에서도 눈을 감고 연주가 끝나고 내려 올때도 눈을 절반 감고 내려오시니 위험해 보인다며 안내견을 한 마리 길러야 할 판국이다."라고 했다. 비꼬는듯 하면서도 걱정하는 말이다.
- 전술한 것처럼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잘 연주하지 않았다. 자신은 말러의 음악이 고도의 연습과 노력을 필요로 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연주 한다고도 했다.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한 극장에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자고 제의 했는데 극장 측은 한 교향곡 당 리허설을 2번만 준다고 하자 연주 자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말러의 음악을 미술에 비유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실제로 말러의 대작 중 하나라고 불리는 2번 부활이나 8번 천인교향곡은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다만 교향곡 4번, 5번, 6번 그리고 9번은 몇번 연주 한 적이 있으며 녹음으로도 남겼다. 그중에서 5번, 6번, 9번은 말러 명반 중 하나로 꽤 자주 언급되는 호연으로, 카라얀이 말러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와 준비를 했음을 알수 있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에 따르면 카라얀과 1980년대에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카라얀이 말러 음악에 상당히 진심으로 대했다며 말러 이야기를 꽤 길게 했다고 회고 하고 있다.
-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다. 음반만 2억 장이 넘게 팔려서 그 로열티로 부인 엘리에트가 잘 살고 있고, 경비행기, 요트, 포르셰, 롤스로이스, 페라리 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경비행기 같은 경우 음반 표지로도 사용했다. (DG 카탈로그 번호 474 260-2) 집도 캠핀스키 호텔 특실 임대, 스위스 생모리츠의 호수와 소연주홀, 경비행기 이착륙장까지 딸린 저택도 받았다. 자택 지하에는 오케스트라 연습실이 있어 여름 휴가 시즌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서 챔버 규모 작품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왜인지는 알수가 없는데 자신의 변호사들과 재산 관리인들에게도 소송을 걸었다. 특히 에밀 유커 같은 재산 관리인들을 죽기 전에 소송을 걸고 심지어 카라얀이 죽은 후에도 엘리에트가 이어서 소송을 걸었다.
- 그가 전성기때는 하루에 3천 달러나[40] 벌었다고 한다. 그의 전성기 당시 미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2000~3000달러로 그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니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 그는 죽으면서 당시 한국돈으로 2500억[41]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이에 유가족은 그가 스위스의 생 모리츠에서 출생했고 사망은 외국에서 하였다고[42] 거짓말을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상속세가 18%이나 한 것에 비해 스위스에서는 4%의 상속세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유가족만 비웃음을 샀다고 하며, 당시 그의 친구는 카라얀이 살아서도 애를 먹이며 구설수에 오르더니 죽어서도 구설수라고 혀를 찼다고한다.
- 속도광이다. 자신의 롤스로이스를 아우토반이든 아니든 간에 고속으로 몰길 좋아했다. 카라얀의 차에 동승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산길에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카라얀에게 사정하기까지 했다.[43] 이 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오전에 아우토반에서 차를 몰다가 나무를 들이박아 전복 사고를 일으킨 후 오후에 리허설을 하러 간 적도 있다.
- 중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오케스트라 연습 영상을 보면 의외로 목소리 톤이 높고 가는 편. 굉장히 깐깐한 성미가 묻어나는 듯 하기도 하다. 이러한 목소리가 단원들에게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발시키는 측면도 있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걸걸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30대에 성대 폴립 제거 수술을 받은 이후로 걸걸했던 목소리가 가늘게 바뀐 것이라고 한다.
- 그가 지휘하는게 너무 열정적이여서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 그가 오페라를 공연할 때[44]면 항상 구급차가 대기중이었다고 하고 그의 딸은 아버지가 격정적인 부분에서 지휘하다 쓰러질까봐 걱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외모는 젊은 시절보다 적당히 주름이 생긴 초로기에 꽃 피었다. 잘 생긴 외모, 풍성한 흰머리, 굵은 주름, 눈을 감은 지휘동작은 지휘자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주어 그의 인기에 큰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레코드샵이나 이발소, 음악감상실에는 카라얀 포스터가 필수요소로 붙어 있었다.
-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 면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면허를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바쁜 스케줄에 잘 이용했다. 심지어 일본 공연을 지휘하러 갈 때도 자가용 경비행기를 직접 몰고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카라얀이 비행 조종을 배운 곳은 칠레였으며, 45세에 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2차 대전 공군 파일럿 출신이라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 당시 카라얀은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였기 때문에 군입대를 계속 연기할 수 있었다.[45] 전쟁말기에 카라얀은 왜 징집 안하냐는 여론이 나왔고, 카라얀 본인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더이상 징집 연기가 안되면 괴링을 졸라서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공군으로 입대하려고 마음 먹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징집되지는 않았다. 조종술에 관해 카라얀은 수많은 계기판을 보면서 신속히 판단을 내리고 섬세하게 운전하는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와 유사하다며 적성에 맞는다고 말하곤 했다. 카라얀은 분단 중인 베를린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34년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결코 베를린에 거주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 필과 스케줄이 있을 경우는 호텔[46]에서 체류하거나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의 자택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직접 몰거나, 또는 포르쉐나 롤스로이스를 몰고 아우토반을 이용해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교관의 감독 하에 보잉 747 비행기를 몰아 1회의 이륙과 2회의 착륙에 성공하여 합격점을 받기도 했다.
- 상술한 바와 같이 베를린에서 체류할 때는 베를린 쿠어퓌어스텐담 27번지의 켐핀스키 호텔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을 이용했는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스위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방에는 각각 화장실이 딸린 4개의 침실이 있었다. 카라얀이 묵지 않을 때에는 일반 투숙객들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숙박료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켐핀스키 계열은 아니지만 호텔 자체는 아직도 "호텔 브리스톨 베를린"으로 존재한다.
- 열렬한 스키광으로도 알려졌는데, 만년에 얻은 척추통증으로 인해 스키를 타지 못하는 것에 매우 분노하기도 했다. 57년 번스타인과 처음 만난 것도 스키를 타러 가서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 마지막까지 한담을 나눈 주제가 비행기와 스키였으니 그가 얼마나 이를 좋아했는지를 알만하다. 일례로 몽블랑 등정을 1965년, 그러니까 자신의 나이 57세에 올랐는데 22시간이 걸려서야 정상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데는 겨우 27분이 걸렸다.
- 이 뿐만 아니라 요트를 조종하기도 하고 말을 타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수영까지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랐다. 뭘 못 하는지 세는게 빠를 지경.
- 결혼 중매를 서기도 했다. EMI의 제작자인 월터 레그와 당시 인기 가수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결혼을 맺어 준 것. 후에 레그가 슈바르츠코프의 은퇴 직후 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소식을 슈바르츠코프가 누구보다 자신에게 먼저 알려 오자 매우 상심했다고 전해진다.
- 카라얀이 금전적인 계약에 민감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경험으로부터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카라얀은 이탈리아에 칩거하면서 극도의 경제난에 시달렸고, 식사를 거르면서 음악공부에만 매진하곤 했다고.
- 카리스마와 완벽주의의 이미지가 강하여 연습때도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비타협적이고 완고할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리허설에서 융통성있는 모습을 보였다는 일화가 많다. 워낙 연주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리허설에서 완벽함을 강조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카라얀은 자신이 생각한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굳이 그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레코딩 프로듀서였던 미셸 글로츠나 귄터 브레스트와도 종종 가벼운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녹음 중간에 약간의 미스가 나서 다시 재녹음할 것을 요청해도 카라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 실수면 괜찮다고 생각할 경우 그냥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금난새가 카라얀의 리허설을 숨어서 지켜본 일화에서도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의 녹음 때 오보에 수석주자가 솔로 부분을 재녹음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카라얀이 그정도면 됐다고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삼중협주곡 당시에는 리흐테르가 딱 한마디의 재녹음을 원하고 오이스트라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입을 빌려서 한 악장을 재녹음하자고 요구 했으나 카라얀은 당시 앨범 표지에 들어갈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서 그냥 가 버렸다고 한다.
- 하도 권력이나 뭔가 완벽을 추구하는 선 사실이었다. 몽셰라 카바예 에게 돈 엘비라 역을 맡길때도 14kg을 감량하라고 요구해 공연과 녹음이 불발 된 걸 보면 가창력 뿐 아니라 외모도 본다는 걸 알 수 있다.
- 1960년대말 카라얀 자신이 구상하던 계획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명성은 세계적이지만 그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별로 좋지 못했고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와서 오케스트라의 낮은 수준에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실제로 메트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본 카라얀은 오케스트라 수준이 형편없다며 "베를린에서는 저런 연주자들은 오디션을 보지 못한다. 마치 미적분을 모르는 7살 아이가 미적분을 하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의 연주로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1979년에 한 번 공연한 적이 있는데, 연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 연주 이후 이 곡을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의 일화도 있다. 1954년 당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리허설 도중 칼라스가 넘어졌다.(칼라스는 극심하게 눈이 나빴다. 그래서 카라얀이 일부러 천을 놓고 연주했다.) 카라얀은 당시 '요소를 찾는중' 이라고 둘러댓지만 30분 뒤 창피스럽던 칼라스가 구석에서 울고 있자 그는 자신이 실험을 한 것이라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카라얀은 칼라스를 완벽한 음감의 소유자이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노래를 완벽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카라얀과 칼라스는 함께 했는데 이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종신직을 맏게 되자 서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후 1965 ~ 1968년경에 카라얀은 오나시스의 보트에서 칼라스를 만난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카라얀이 <토스카>영화를 제안했지만 칼라스가 이미 은퇴한 후라 소극적으로 나섰고 오나시스도 자금출연에 부정적인지라 이뤄지지 못했다.[47] 그 이후 다시 계획을 세웠으나 이미 오나시스가 칼라스를 배신하고 떠나 충격받은 칼라스가 잠적해버려서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칼라스와 카라얀은 잠깐 이나마 만나 활동했지만 꽤 잘 맞았던 것 같다. 철두철미하게 악보를 공부하고 모든 성부의 음악을 연구해서 연주하는 카라얀과 칼라스는 잘 맞는 조합이었다. 최소한 음악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 세계적인 성악가들 중에서 그와 오페라로 협연을 해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 한 사람은 많다. 마리아 칼라스,레나타 테발디,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유명해진 상태에서 그와 함께 했지만 레온틴 프라이스, 미렐라 프레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호세 카레라스는 카라얀이 발탁해 유명해진 성악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9. 관련 문서
[1] 1975년 수훈, 대략 2급과 1급 사이인 1.5급 정도로 분류된다.[2] 1960년 수훈[3] 1961년 수훈[4] 어렸을 때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 (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었다.[5] "Herbert von Karajan: A Chronology", deutschegrammophon.com[6] #, royalphilharmonicsociety.org[7] "hvk_bio_english", 9번째 슬라이드[8] 카라얀보다 11세 연상.[9] 카라얀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가톨릭 신심을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는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의 미사 때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 사례로 잘 알려져있다. 이는 바티칸 미사에는 관현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 미사 연주회로도 알려져 있는데, 카라얀은 이 미사에서 지휘를 하기 위해 복잡한 스케줄을 다 정리하고 빈필과 합창단 그리고 캐서린 배틀 등의 솔리스트를 포함한 초호화 라인업을 모두 자비로 고용하여 미사를 드렸다. 그가 이 미사에 그토록 지휘하고 싶어한 이유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서 자신과 가족이 영성체를 받고 축복을 받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카라얀은 불교에도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불교의 주된 교리 중 하나인 환생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였다. 다시 태어나면 독수리가 되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10]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고 지휘한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마주치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며 말이 많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교감을 이루었기에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을 감은 채로 지휘를 하다 뇌졸중이 와 바닥에 굴러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그 후 기절해 1975년과 1979년 병원에 실려가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11] 눈을 감은 채로 지휘하는 이유를 물어본 인터뷰 영상이 있다.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따로 영어 자막이 있으니 자막을 켜고 한번 감상해보자.#[12] 카라얀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녹음이기도 하다.[13] 음반 509종, 영상물 78종을 남긴 음악계의 황제[14] 출처[15] By one estimate he was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 recording artist of all time, having sold an estimated 200 million records, Karajan (1908-89) is easily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ian of all time, making well over 500 recordings that sold more than 200 million copies – and are still selling.[16] 2위는 1억장 정도로 집계된 루치아노 파바로티, 3위는 8000만장 정도의 마리아 칼라스. 카라얀이 이들보다 2배 이상이다.[17] (왼쪽부터)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 카라얀, 필립스 오디오 부문 대표 조프 반 튈뷔르흐.[18] 기사참고[19] 당시 소니 수뇌부와 지휘자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니 창립자인 아키오 모리타나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카라얀, 번스타인, 아바도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20] 도쿄 FM에서 발매되었는데 블루레이, LP, SACD, CD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품절되어 구하기 매우 어렵다.[21] 영웅 교향곡에서 네명의 호른 단원을 기용했는데, 어시스턴트, 3번, 2번, 1번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다.[22] 모차르트의 작품 중 특히 카라얀이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로 세 번이나 녹음했다. 일본, 영국 순회공연 때도 레퍼토리로 올린 적이 몇번 있다.[23] 당시 되찾은 핸드백에서 짙은 립스틱과 액체가 묻은 콘돔이 발견되어 카라얀 부인의 외도설이 국내에 돌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다.[24] 카라얀은 콘서트 후 호텔입구 까지 팬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이를 피하기 위해 호텔 주차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핸드백을 분실했으며, 이 여성팬은 주차장까지 쫒으면서 핸드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핸드백은 그 여성에 의해 호텔측에 전달되었다.[25] 음악동아 및 조수미 자서전 등의 기록등으로 교차 검증이 되는 점을 볼때 엘리에트의 기억과는 달리 한국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은 내용은 사실로 보인다. 한국 입장에서는 20세기 최대 거장의 단 한번뿐인 방문이라 사소한 내용까지 다 화제가 되었지만, 엘리어트의 기억에는 수많은 연주방문 중 하나였으니 일일이 다 기억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26] 공연이 시작한 후에 관객들이 들어오고, 밖에서는 자전거 소리가 들렸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27]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칼 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나치전과에 연루돼있다. 뭐 셋 다 사면받았고 칼 뵘 같은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사면받았다는데 전기문 같은 곳에서 보면 자세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뭐라하기가 좀 그렇다.[28]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작가. 나치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29] 아버지와 함께 나치에 반대하다가 독일을 떠나야 했다. 2차대전 기간에는 기자로 활동.[30] 이것과 관련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카라얀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만 대했다는 말이 있다. 오가 노리오 전 소니 사장이나 안네 소피 무터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대해서 굉장히 비정치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31] 카라얀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만년에 걸었던 거리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걸으며 회상했다.[32] 고전적이라고 비판한게 아니라 구시대의 음악을 대변할 수 있을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다.[33] 두 사람 모두 일본에 자주 공연을 하러 갔던 것을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34] 요훔은 푸르트뱅글러 사후 베를린 필의 감독으로 자신이 거론되자 김칫국 마시듯 확신하고 베를린에 집까지 미리 알아보고 있었다.[35] 다만 악보만을 참고해서 지휘자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카라얀이 번스타인의 악보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36]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카라얀을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카라얀도 클라이버에 대해 덕담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과 교류를 잘 하지 않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친구라 할 만한 동료 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 정도를 제외하면 카라얀이 유일하다.[37] 클라이버는 돈에 초연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심어준 발언이기도 하다. 사실 클라이버는 자신의 희소성을 이용해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던, 돈의 속성에 상당히 밝은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본인이 만족하지 않으면 연주회를 가차없이 취소하기도 하는 등, 단지 본인 희소 가치를 올리겠다는 이유만으로 지휘 횟수를 줄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카라얀은 클라이버의 그러한 타협없는 완벽주의 성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38]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카라얀의 도움으로 베를린 필과 녹음을 많이 남겼다.[39] 헝가리계 독일인으로, 히틀러 반대 운동에 참여하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연루되어 처형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손이자 똑같이 히틀러에 맞서다 처형당한 음악가 한스 폰 도흐나니의 아들이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의 아들 유스투스 폰 도흐나니는 히틀러 정권의 패망을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총통 수석부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보병대장 역을 분했다.[40] 오늘날의 3천달러야 330만원 정도의 가치이지만 60년대의 3천달러는 오늘날에는 거의 1억의 가치가 있다. 당시 아무나 못 타는 수준이던 보잉 707 제트기의 뉴욕 - 파리 직항 운임이 편도 200달러 정도였다.[41] 당시의 2500억은 지금 가치로 2조가 넘는다.[42] 그가 생 모리츠에 별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국적은 엄연히 오스트리아였다. 집은 잘츠부르크 교외인데 카라얀이 별장에 자주 기거하다보니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3] 이때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말이 압권인데, "우리가 죽더라도 한 사람의 유해는 베를린으로, 다른 사람은 모스크바로 가야할 것 아니오?(...)"[44] 오페라는 대개 2시간을 넘어간다. 카라얀은 실제로 무대에서 간혹 쓰러진 적이 있었다.[45] 애초에 지휘자까지 되지 않더라도 국립 악단의 단원이라면 괴벨스나 그 외 나치당 수뇌부의 비호 덕에 징집으로부터 비교적 보호받을 수 있었다.[46] 켐핀스키 호텔 꼭대기 특실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물론 이는 카라얀만 그런건 아니고 게오르그 솔티도 시카고에서 집을 구하지 않고 호텔을 이용했다.[47] 카라얀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칼라스에게 토스카에 필요한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으니 출연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오나시스가 자신을 초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내가 부자이지만 이 모든 일에 돈을 쏟아 부을 만큼 부유하지는 않다"고 거절했고 칼라스는 이미 그때 급격히 분별력이 떨어지고 제정신이 아니여서 두려워 했다고 말했다. 시기는 칼라스가 은퇴한 뒤인 1965년 ~ 1968년 경으로 추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