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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13:41:29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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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역임 직책 및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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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rowcolor=#000,#ddd> 임시
(1882–1887)
초대
(1887–1894)
2대
(1895–1922)
3대
(1922–1945)
루드비히 폰 브레너 한스 폰 뷜로 아르투르 니키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rowcolor=#000,#ddd> 임시
(1945)
임시
(1945–1952)
3대
(1952–1954)
4대
(1954–1989)
레오 보르하르트 세르주 첼리비다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rowcolor=#000,#ddd> 5대
(1989–2002)
6대
(2002–2018)
7대
(2019–)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 키릴 페트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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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89754FA-DF93-4061-9D57-76D93F49667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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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그라모폰 소속 주요 음악가
클라우디오 아바도 마르타 아르헤리치 세르게이 바바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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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의 소속 음악가들은 공식 사이트 참조, 성씨 알파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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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요 수상과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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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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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벤저민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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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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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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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베아 침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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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주 아페르기스
(작곡)
올가 노이비르트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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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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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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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파일:D8FE539D-CCB2-44DA-9D5B-B6EEC0E8759F.png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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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 대공로십자성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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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2등급 그랜드 우피시아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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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과학 및 예술 훈장
[3]
}}} ||
<colbgcolor=#000><colcolor=#fff>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파일:Karajan 1984.jpg
본명 헤르베르트 카라얀[4]
Herbert Karajan
출생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잘츠부르크 공국 잘츠부르크
사망 1989년 7월 16일 (향년 81세)
오스트리아 아니프
국적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직업 지휘자
활동 1929년 ~ 1989년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도이치 그라모폰 로고.svg
서명 파일: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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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아니프 묘지
신체 173cm
학력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피아노 / 지휘, 1916~26)
수상
/영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1960)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오페라 녹음상 (1964, 69)
잘츠부르크 명예시민 (1968)
베를린 명예시민 (1973)
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77)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박사 (1978)
빈 명예시민 (197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주상 (1978)
그라모폰상 (1981)
Médaille de Vermeil (1982)[5]
유네스코 국제음악상 (1983)
RPS 금메달 (1984)[6]
에두아르드 라인 명예의 반지 (1984)
올림피아상 (1986)[7]
배우자 엘미 호르가레프[8] (1938년 ~ 1942년, 이혼)
아니타 귀터만 (1942년 ~ 1958년, 이혼)
엘리에트 무레 (1958년 결혼)
자녀 이사벨 카라얀 (1960년생)
아라벨 폰 카라얀 (1964년생)
레이블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종교 가톨릭[9]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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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카라얀과 일본5. 나치이력 논란
5.1. 비판5.2. 옹호
6. 디스코그래피7. 카라얀의 키8. 여담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바그너 파르지팔 1막 전주곡
1980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루크너 교향곡 7번
1989년 4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2]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며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이다. 그의 압도적인 위상과 유명세를 잘 요약하는 별명이 바로 20세기 클래식의 황제다.[13]

비단 그의 음악성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적 행보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를 받는다. 카라얀은 음악과 디지털 기술의 접목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 카라얀을 기점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영상물과 음반이 폭증했다. 또한 후술할 자비네 마이어 사건을 통해, 클래식 음악계에서의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카라얀은 클래식의 대중화에도 힘써서,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가장 강력한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14] 클래식 음반 판매량은 작곡가 별로 집계가 되지 않지만 지휘자, 연주자 별로 집계한 것을 보면 카라얀이 2억장 정도로 공식적으로 집계된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판매한 인물이기도 하다.[15][16]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평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카라얀과 일본

파일:sony 1979.jpg
1979년 소니와 필립스가 CD 공동개발을 결정할 당시의 모습[17]
기념사진을 찍었다[18]

카라얀은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열정적인 청중, 유럽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실황방송 중계시스템, 소니의 뛰어난 기술력 등...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의 안내로 각종 첨단 기기들을 관람했다[19]. 카라얀은 CD 등을 비롯하여 소니의 음향 관련 기기의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CD를 이용한 최초 녹음도 카라얀이 했는데, 잘츠부르크 부활절음악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녹음한 것이 그것이다. 카라얀은 심지어 일본에서 대학생 오케스트라를 리허설한 적도 있다.

5. 나치이력 논란

5.1. 비판

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나치 전과가지고 논쟁을 많이 벌이기도 했는데 사실 당시 독일출신의 거장급 지휘자들은 나치 전과가 다 있었으며 대부분 사면됐다.[27] 그러나 카라얀의 전과는 여러 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것이 사실로, 전술한 것과 달리 '한 때'라고 언급한것과는 달리 국내 클래식 커뮤니티에서는 산발적으로 논란이 계속되고있다.

대부분의 독일 거장 지휘자들은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해야만 했고, 이러한 현실은 지휘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가, 그리고 전 독일 국민들이 모두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단순히 나치당원 경력만으로 종신형 받고 그런 게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와 활동한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 여사는 '그는 단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하고 싶었을 뿐'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얀의 경우 히틀러 치세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무명의 지휘자였을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범재판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안슐루스(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보다 한참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카라얀은 독일에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이후 35년에 다시 한 번 가입했다. 나치에 두 번 가입한 사람이 나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치란 말인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역사학자 올리버 리스콜브는 카라얀의 친나치적인 언행을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반 유대주의에 공감하는 편지나 학창시절 오스트리아 국수주의 단체인 '범 독일 청년 그룹' 소속 이력 등.해당 기사 출세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을 뿐 나치의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친나치적,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너무 많다.

그리고 1935년 히틀러 생일 축하공연(바그너의 탄호이저)이나(해당기사(독일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등을 지휘한 것 등 나치 부역 이력은 그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잘못이고 과오이다.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기엔 지휘자들 이상으로 나치 부역을 거부하고 독일을 탈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이력 때문에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단체들이 비판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공연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나치 부역 경력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경중, 자의 타의를 가리지 않고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악단 단위에서 까였고 이들 또한 한참동안 이스라엘 공연도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토마스 만[28]의 아들 클라우스 만[29]은 "이 추밀원 고문들과 나치당원들은 …자꾸만 재촉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활동하고 지휘하고 연출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카라얀을 보라. 이런 자들에 의해 문화가 재건되느니 차라리 파편 속에 묻혀 있는 편이 낫다."라고 나치 부역 이력자들을 전부 비판하기도 했다.#

1981년 프랑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중에서, 나치당원들 앞에 월광소나타를 연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2차대전이 끝난 뒤 관객석이 텅 빈 무대에서 음악을 지휘하는 수모를 당하는 피아니스트 칼의 모티브가 되었다.

최근에는 1942년 독일 국방군과의 직접적 연관의 가능성과 친위대 보안국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증거들을 발견한 카라얀 연구자인 Riehle는 카라얀이 적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추종자였지만 확신에 찬 나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2023년 11월 아헨 극장에 설치된 흉상이 철거되어 인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음악적 업적을 떠나서 그 시절 행적을 옹호하기엔 적극적 행적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나 나치를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사회에서 카라얀이 앞으로 어떻게 재평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5.2. 옹호

그러나 그를 1930년대 초반에서 1940년대 중반 사이에 만났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나치가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 크리스타 루트비히 같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나 아헨 오페라 극장 합창 지휘자이면서 나중에 필하모니아 합창단 단장이 된 피츠 같은 경우나, 바이로이트의 많은 성악가들이 그는 정치적인(즉 음악계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목적에서 나치에 가입했던 것이지,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실제로 나치의 사상에 적극 찬동한 음악가들의 증언들도 포함되어있다. 베를린 필의 악장을 역임했던 토마스 브란디스 같은 경우에는 친척 중 일부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홀로코스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 카라얀은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30].

실제로 탈나치화 재판의 기록을 보면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외부에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공연에서 나치와 관련된 곡을 연주한 적도 거의 없었다고 증언한다. 단 한번 연주했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시 행사에 포함되어있어 지휘해야 했지만, 재판관들 역시 카라얀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의 경력은 나치의 사상과 충돌하는 면도 많았다. 일례로,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아니타 귀터만은 유대인의 피가 섞인 혈통이었고, 위에서 나왔듯 히틀러는 카라얀에게 일종의 반감도 많았다. 심지어 스승과 아버지가 나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기록도 있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와 함께 몰래 멘델스존 음악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6. 디스코그래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음반 목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카라얀의 키

항상 논란이 되었던 카라얀의 키. 대부분의 국내언론들은 카라얀이 키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누가 카라얀의 키를 정리 했다.카라얀의 키 논란이 정리된 글

여기서 작성자는 카라얀의 키를 번스타인, 카를 뵘,마리아 칼라스 등의 사람들과 찍힌 사진을 제시하며 말했다.

라는 근거 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한예종 교수인 카라얀 전문가 홍승찬 교수가 키 컴플렉스 부분을 강조 했다. 홍승찬 교수는 한 매체에서 카라얀이 키에 대한 컴플렉스로 허리 위로는 찍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라얀의 영상물들을 모두 잘 찾아보면 전신 영상물이 간간히 보이는 편이다. 1971년에 촬영된 베토벤 교향곡 3,7번이나 1973년의 오사카 리허설 장면, 1977년 송년음악회 등이 그들이다. 1981년 오사카 실황 영상에서도 전신 영상물이 있다. 애초에 키가 작은 것을 문제 삼고 컴플렉스로 생각한다면 카라얀과 키가 비슷하거나 조금 작다고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 또한 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카라얀이 자신의 전임인 푸르트뱅글러나 후임인 아바도에 비해 키가 작고 또 친하게 지냈던 지휘자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쿠르트 마주어 등에 비해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건 사실이다.

외국의 언론이나 카라얀과 관련된 사람, 또 카라얀의 다큐멘터리나 그의 전기에서는 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나 카라얀의 전기를 쓰며 그를 여러번 만난 리처드 오스본 역시 카라얀의 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국내에 대한 소문은 카라얀의 내한공연을 들 수 있다. 카라얀이 1984년 내한당시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당시 공연을 보고 온 여러 사람들이 카라얀이 지휘대에 몸을 기울여 기대고 지휘했다는 증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카라얀의 내한당시 키가 160정도로 보이더라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인도 어디에 기대어 똑바로 서지 않으면 자신의 실제 키 보다 작아보이는게 사실이다. 다만 만년에 나이도 든데다 척추질환으로 수술을 몇 차례 받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기 때문에 키가 꽤 줄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 구두 장인은 카라얀이 13cm의 키높이 구두를 항상 주문해 신었다고 주장했는데 근거가 부족해 묻혀버렸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권에 카라얀의 키가 173cm 라고 기재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카라얀의 키 논란은 사실상 종결된 상태.

8. 여담

물론 닐손은 60년대의 대체불가한 바그너 소프라노였고, 전시대를 통틀어도 단연 탑클래스에 속하는 바그너 소프라노였기 때문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공연했다. 특히 1950년대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함께 해 오며 좋은 관계로 지냈고 1960년에는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라타 <박쥐>의 녹음에도 갈라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리허설에서 닐손에게 노래에 감정이 없다, 감정을 넣어 부르라는 주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닐손의 스타일은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냉혈한의 목소리 그 자체였고, 결국 60년대 이후 카라얀은 실제 공연에서는 여러 사정에 의해 닐손과 종종 공연을 하더라도 음반 녹음에서는 닐손이 아니라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목소리를 지닌 표현력이 좋은 성악가들을 기용했다. 그리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은 뒤에 나오는 메트로폴리탄 리허설 일화에도 나오듯 평소 리허설 때도 카라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대해 먼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은 닐손이었다. 언행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던 닐손은 60년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도 카라얀에 대한 거리감을 그대로 표출했다. 닐손은 언론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자신과 공연은 종종 하는데, 음반 녹음에서는 절대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점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인터뷰에서 닐손은 카라얀인 자기에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요구했고, 자신이 카라얀의 스타일과 맞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닐손은 앞으로도 카라얀이 자신을 녹음에 기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닐손의 목소리 스타일 자체가 일단 카라얀 본인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대다가 닐손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이 카라얀에게는 사사건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60년대 후반부터는 카라얀과 닐손은 리허설에서도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 일화가 다소 나온다.
이후에는 사석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푸치니의 <토스카>에 나오는 악역 스카르피아를 분장없이 연기할 수 있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했을 때 카라얀과 닐손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카라얀은 무대를 어둡게 하여 오페라 리허설을 했고 닐손이 이에 대항하는 격으로 광부가 쓰는 헤드랜턴을 쓰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로는 조명 대체가 안되었는지 결국 닐손은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어 공연에서 빠지게 되었고 이를 비방하는 말로 언론을 통해 기고했다. 카라얀 또한 "내 음악세계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떠났다고 응수했다. 이후 카라얀과 닐손이 함께 공연하는 일은 없었는데, 이미 이전부터 카라얀은 바그너 녹음에서 닐손을 기용하지 않았고 닐손보다 유명세는 떨어지더라도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성에 가까운 성악가를 기용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니벨룽의 반지 프로덕션은 원래 음반 녹음과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위해 기획된 것인데, 음반 녹음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아닌 헬가 데르네슈를 기용했다. 데르네슈는 닐손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질 뿐만아니라 바그너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소프라노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미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량이 크지 않아 실제 공연에서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소프라노 뿐만 아니라 테너 주연 역시 훌륭한 미성을 지녔으나 성량이 부족했던 헬게 브릴리오트를 기용했다. 카라얀은 음반녹음에서는 미성의 데르네슈와 브릴리오트를 기용하여 부족한 성량을 마이킹으로 보완할 수 있었으나,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엄청난 크기의 홀에서는 데르네슈나 브릴리오트의 성량의 한계가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배역에서 유명한 닐손과 제스 토머스을 주연으로 기용했다. 이처럼 카라얀의 고집스운 성격에 대해 닐손이 반항해서 카라얀이 그녀를 더 싫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닐손의 스타일 자체가 카라얀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닐손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닐손은 60년대초 인터뷰에서도 이미 카라얀의 스타일에 자신이 맞지 않기 때문에 카라얀의 음반 녹음에 기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또 닐손은 카라얀의 사후 인터뷰에서도 "마에스트로는 호불호가 분명해서 그의 눈 밖에 나면 가수들은 목소리를 다듬을 시간도 없어서 녹음테이프만 들어도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단 닐손 본인이 카라얀의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행 등에서도 카라얀과 안맞아 그의 눈 밖에 난 상황임을 복합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도 닐손은 카라얀을 싫어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나는 그가 음악에 집중 할 때 그와 함께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9. 관련 문서


[1] 1975년 수훈, 대략 2급과 1급 사이인 1.5급 정도로 분류된다.[2] 1960년 수훈[3] 1961년 수훈[4] 어렸을 때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 (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었다.[5] "Herbert von Karajan: A Chronology", deutschegrammophon.com[6] #, royalphilharmonicsociety.org[7] "hvk_bio_english", 9번째 슬라이드[8] 카라얀보다 11세 연상.[9] 카라얀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가톨릭 신심을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는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의 미사 때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 사례로 잘 알려져있다. 이는 바티칸 미사에는 관현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 미사 연주회로도 알려져 있는데, 카라얀은 이 미사에서 지휘를 하기 위해 복잡한 스케줄을 다 정리하고 빈필과 합창단 그리고 캐서린 배틀 등의 솔리스트를 포함한 초호화 라인업을 모두 자비로 고용하여 미사를 드렸다. 그가 이 미사에 그토록 지휘하고 싶어한 이유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서 자신과 가족이 영성체를 받고 축복을 받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카라얀은 불교에도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불교의 주된 교리 중 하나인 환생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였다. 다시 태어나면 독수리가 되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10]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고 지휘한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마주치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며 말이 많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교감을 이루었기에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을 감은 채로 지휘를 하다 뇌졸중이 와 바닥에 굴러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그 후 기절해 1975년과 1979년 병원에 실려가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11] 눈을 감은 채로 지휘하는 이유를 물어본 인터뷰 영상이 있다.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따로 영어 자막이 있으니 자막을 켜고 한번 감상해보자.#[12] 카라얀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녹음이기도 하다.[13] 음반 509종, 영상물 78종을 남긴 음악계의 황제[14] 출처[15] By one estimate he was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 recording artist of all time, having sold an estimated 200 million records, Karajan (1908-89) is easily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ian of all time, making well over 500 recordings that sold more than 200 million copies – and are still selling.[16] 2위는 1억장 정도로 집계된 루치아노 파바로티, 3위는 8000만장 정도의 마리아 칼라스. 카라얀이 이들보다 2배 이상이다.[17] (왼쪽부터)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 카라얀, 필립스 오디오 부문 대표 조프 반 튈뷔르흐.[18] 기사참고[19] 당시 소니 수뇌부와 지휘자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니 창립자인 아키오 모리타나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카라얀, 번스타인, 아바도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20] 도쿄 FM에서 발매되었는데 블루레이, LP, SACD, CD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품절되어 구하기 매우 어렵다.[21] 영웅 교향곡에서 네명의 호른 단원을 기용했는데, 어시스턴트, 3번, 2번, 1번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다.[22] 모차르트의 작품 중 특히 카라얀이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로 세 번이나 녹음했다. 일본, 영국 순회공연 때도 레퍼토리로 올린 적이 몇번 있다.[23] 당시 되찾은 핸드백에서 짙은 립스틱과 액체가 묻은 콘돔이 발견되어 카라얀 부인의 외도설이 국내에 돌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다.[24] 카라얀은 콘서트 후 호텔입구 까지 팬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이를 피하기 위해 호텔 주차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핸드백을 분실했으며, 이 여성팬은 주차장까지 쫒으면서 핸드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핸드백은 그 여성에 의해 호텔측에 전달되었다.[25] 음악동아 및 조수미 자서전 등의 기록등으로 교차 검증이 되는 점을 볼때 엘리에트의 기억과는 달리 한국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은 내용은 사실로 보인다. 한국 입장에서는 20세기 최대 거장의 단 한번뿐인 방문이라 사소한 내용까지 다 화제가 되었지만, 엘리어트의 기억에는 수많은 연주방문 중 하나였으니 일일이 다 기억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26] 공연이 시작한 후에 관객들이 들어오고, 밖에서는 자전거 소리가 들렸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27]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칼 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나치전과에 연루돼있다. 뭐 셋 다 사면받았고 칼 뵘 같은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사면받았다는데 전기문 같은 곳에서 보면 자세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뭐라하기가 좀 그렇다.[28]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작가. 나치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29] 아버지와 함께 나치에 반대하다가 독일을 떠나야 했다. 2차대전 기간에는 기자로 활동.[30] 이것과 관련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카라얀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만 대했다는 말이 있다. 오가 노리오 전 소니 사장이나 안네 소피 무터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대해서 굉장히 비정치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31] 카라얀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만년에 걸었던 거리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걸으며 회상했다.[32] 고전적이라고 비판한게 아니라 구시대의 음악을 대변할 수 있을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다.[33] 두 사람 모두 일본에 자주 공연을 하러 갔던 것을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34] 요훔은 푸르트뱅글러 사후 베를린 필의 감독으로 자신이 거론되자 김칫국 마시듯 확신하고 베를린에 집까지 미리 알아보고 있었다.[35] 다만 악보만을 참고해서 지휘자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카라얀이 번스타인의 악보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36]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카라얀을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카라얀도 클라이버에 대해 덕담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과 교류를 잘 하지 않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친구라 할 만한 동료 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 정도를 제외하면 카라얀이 유일하다.[37] 클라이버는 돈에 초연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심어준 발언이기도 하다. 사실 클라이버는 자신의 희소성을 이용해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던, 돈의 속성에 상당히 밝은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본인이 만족하지 않으면 연주회를 가차없이 취소하기도 하는 등, 단지 본인 희소 가치를 올리겠다는 이유만으로 지휘 횟수를 줄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카라얀은 클라이버의 그러한 타협없는 완벽주의 성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38]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카라얀의 도움으로 베를린 필과 녹음을 많이 남겼다.[39] 헝가리계 독일인으로, 히틀러 반대 운동에 참여하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연루되어 처형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손이자 똑같이 히틀러에 맞서다 처형당한 음악가 한스 폰 도흐나니의 아들이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의 아들 유스투스 폰 도흐나니는 히틀러 정권의 패망을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총통 수석부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보병대장 역을 분했다.[40] 오늘날의 3천달러야 330만원 정도의 가치이지만 60년대의 3천달러는 오늘날에는 거의 1억의 가치가 있다. 당시 아무나 못 타는 수준이던 보잉 707 제트기의 뉴욕 - 파리 직항 운임이 편도 200달러 정도였다.[41] 당시의 2500억은 지금 가치로 2조가 넘는다.[42] 그가 생 모리츠에 별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국적은 엄연히 오스트리아였다. 집은 잘츠부르크 교외인데 카라얀이 별장에 자주 기거하다보니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3] 이때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말이 압권인데, "우리가 죽더라도 한 사람의 유해는 베를린으로, 다른 사람은 모스크바로 가야할 것 아니오?(...)"[44] 오페라는 대개 2시간을 넘어간다. 카라얀은 실제로 무대에서 간혹 쓰러진 적이 있었다.[45] 애초에 지휘자까지 되지 않더라도 국립 악단의 단원이라면 괴벨스나 그 외 나치당 수뇌부의 비호 덕에 징집으로부터 비교적 보호받을 수 있었다.[46] 켐핀스키 호텔 꼭대기 특실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물론 이는 카라얀만 그런건 아니고 게오르그 솔티도 시카고에서 집을 구하지 않고 호텔을 이용했다.[47] 카라얀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칼라스에게 토스카에 필요한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으니 출연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오나시스가 자신을 초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내가 부자이지만 이 모든 일에 돈을 쏟아 부을 만큼 부유하지는 않다"고 거절했고 칼라스는 이미 그때 급격히 분별력이 떨어지고 제정신이 아니여서 두려워 했다고 말했다. 시기는 칼라스가 은퇴한 뒤인 1965년 ~ 1968년 경으로 추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