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1:53:25

모리타 아키오

{{{#!wiki style="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bottom: -15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타몬 마에다
1946~1951
이부카 마사루
1951~1971
모리타 아키오
1971~1989
오가 노리오
1989~1999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데이 노부유키
1999~2005
하워드 스트링거
2005~2012
히라이 카즈오
2012~2018
요시다 켄이치로
2018~
}}} }}}}}} ||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건설자들 & 거인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81207_400.jpg
에스티 로더 헨리 포드 루이스 B. 메이어 아마데오 지아니니 데이비드 사르노프
찰스 메릴 스티븐 벡텔 월트 디즈니 후안 트립 러키 루치아노
윌리엄 레빗 윌터 루서 레오 버넷 토머스 왓슨 주니어 레이 크록
윌리스 캐리어 피트 로젤 모리타 아키오 샘 월튼 빌 게이츠
같이 보기: 지도자 & 혁명가 부문,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소니 제3대 대표이사 사장
모리타 아키오
盛田昭夫| Morita Akio
파일:external/ndarticle.joins.com/20111008164119781.jpg
<colbgcolor=#000> 이름 모리타 아키오 (盛田昭夫)
출생 1921년 1월 16일
일본 제국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 1999년 10월 3일 (향년 78세)
도쿄도 미나토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책 소니 대표이사 및 사장 (1971년 ~ 1989년)
{{{#!wiki style="margin: 0 -10px;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color: #373A3C"
<colbgcolor=#000> 부모 아버지 모리타 쿠사에몬, 어머니 모리타 수코
배우자 모리타 료코 (1951년 결혼 ~ 1999년 사망)
자녀 장남 모리타 히데오
차남 모리타 마사오
장녀 오카다 나오코
신체 178cm
학력 아이치현 제1사범학교 부속소학교 (졸업)
아이치현 제1중학교 (졸업)
제8고등학교 (졸업)
오사카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 / 학사)
종교 신토
}}}}}}}}} ||

1. 개요2. 생애3. 소니를 창업하다4. 말년5. 여담6. 어록7. 서훈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기업인.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세계적인 가전 메이커 소니를 창업한 공동 창업주다.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오늘날의 소니를 있게 한 거장이자 가전제품으로 세계를 평정한 전자업계의 제왕이다.

그의 인생사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백과- 모리타 아키오를 참고.

2. 생애

모리타 아키오는 1921년 아이치현의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665년부터 아이치 현 서부해안의 치타 반도에 위치한 코스가야(현 토코나메 시)에서 간장, 미소, 그리고 사케등을 제조해 판매하는 것을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아버지 규자에몬으로부터 가업을 이을 수련을 받고 있었으나[1], 수학과 물리학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았고 1944년 오사카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에서 장교로 복무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해군 전시개발위원회에서 복무하던 이부카 마사루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3. 소니를 창업하다

종전 후인 1946년, 모리타는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20여명의 직원과 자본금 19만엔을 들여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창업 당시 이부카는 38세였고, 모리타는 25세로 모리타가 13살 어렸다. 그러나 모리타의 가족이 당시 창업한 회사에 투자한 까닭에 실질적인 주주는 모리타의 집안이었다. 어쨌거나 처음 창업 당시 직책은 일단 이부카가 높았으며, 회장도 이부카가 먼저 하고 이부카가 일선에 물러날 때에야 모리타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50년 최초로 테이프 레코더를 개발, 일본내 판매를 하게 되었고, 그 후 1955년 일본 최초로 포켓사이즈로 된 휴대용 라디오를 생산해냈으며[2] 이듬해인 1958년 사명을 소니로 개칭하게 된다. 초기 휴대용 라디오를 개발해냈을 때, 셔츠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게된 모리타는 직원들로 하여금 약간 큼직한 주머니가 달린 셔츠를 입게 해 그에 맞는 규격의 라디오를 생산해낸 것이었다.

그후 1960년 세계최초의 트렌지스터 텔레비젼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고, 1973년 트리니트론 텔레비전 기술로 에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1979년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워크맨을, 1984년에는 워크맨의 휴대용 CD 플레이어 버전인 '디스크맨'을 출시, 소니가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3]

이같은 실적으로 인해 1960년 소니의 미국법인인 소니 아메리카 코퍼레이션이 설립되고 다음해인 1961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88년 미국의 CBS로부터 CBS 음반사를 인수하고 이듬해 1989년 역시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해 종합 미디어사로 발전하기에 이르게 된다.

4. 말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광고에 출연한 모리타 아키오. 발음이 전형적인 재플리시다.

1994년 11월 25일, 모리타는 바로 전년도에 테니스를 치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화근이 되어 소니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오가 노리오가 임명된다. 그 뒤 1999년 10월 3일, 폐렴으로 인해 향년 78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5. 여담

6. 어록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하라!!"
"나의 경영이념은 '소니와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직원들의 행복이 나의 최대 관심사다. 그들은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소니에게 맡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해져야 한다. 직원에 대한 나의 최대 사명은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소니에 근무해 정말 행복했다.'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목표는 일반인들을 이끄는 것이고, 그들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른다. 만약 헨리 포드가 일반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자동차가 아니라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7]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은 아주 많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우리의 근본적인 목표는 항상 우리의 기술을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편리함, 새로운 방법, 그리고 유익함을 제공하는 것이다."[8]

7. 서훈



[1] 사실 일본에서는 가업을 잇는 풍토는 장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가 잇기도 하고 종업원 중에 믿음직하고 능력이 뛰어난 자를 양자입적하여 잇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와도 친정의 성(姓)을 유지하고, 또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할 때 "그렇다면 내가 성을 간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가문의 성이 절대적이지만, 그와 달리 일본에서는 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갈 수도 있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수백년, 때론 천년 가까이 한 가문으로 이어지는 가업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2] 세계 최초의 휴대용 라디오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1954년에 내놓은 Regency TR-1 모델이다. 그러나 소니의 제품이 훨씬 더 상업적으로 흥행해서 미국에서는 아직도 소니가 세계 최초로 휴대용 라디오를 발명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3] 다만 실제로 상기된 제품들을 개발한 것은 이부카 마사루가 이끄는 엔지니어링 팀이었고 모리타 자신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포춘지는 이부카 마사루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그를 소니의 '진짜 천재'라 표현하기도 했다.[4] 단 토요타는 렉서스를 제외하면 싼맛에 쓰는 저가형 브랜드의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진짜 미국 제품에 견주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은 회사는 소니가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애플과 같은 이미지를 그 당시 가지고 있었다 생각하면 될 듯.[5] 실제 여느 일본기업과 마찬가지로, 역대 소니의 최고경영자로서 기술자 출신인 사람은 이부카 뿐이다. 이후에는 모리타를 시작으로 히라이 가즈오까지 계속 마케터(하워드 스트링어는 굳이 따지면 컨텐츠 제작자)가 사장을 맡았고, 현임 요시다 겐이치로는 재무통이다.[6] 다만 해당 세계관에서는 이부카 마사루와 결별하고 리카싱과 동업을 하게된다.[7] 워크맨의 출시 준비 당시 전문가들과 회사 내 직원들의 회의적 반응을 마주한 후에 이를 반박한 말이다. 훗날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제품 개발 철학을 설명하며 이 말을 인용했다. #[8]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