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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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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정치/사회
2.1. 한국2.2. 세계
3. 경제
3.1. 세계3.2. 한국3.3. 일본
4. 문화
4.1. 개괄4.2. 음악
4.2.1. 서양 음악4.2.2. 한국 음악4.2.3. 일본 음악4.2.4. 중화권 음악
4.3. 영화4.4. 언론4.5. 방송4.6. 만화, 애니메이션4.7. 패션4.8. 스포츠4.9. 게임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6. 이 시대에 시작되거나 만들어진 것들7.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8. 참고/관련 문헌

1. 개요

서기 1970년~1979년까지를 이르는 연대시기. 1960년대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발전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1945년부터 시작되었던 냉전 체제가 계속되었던 시기였고 중동전쟁 등 석유파동(오일 쇼크)까지 겹쳤다. 그만큼 시대가 격동적이다. 하지만 데탕트 등의 긍정적인 사례도 존재했다. 아타리 2600 등의 게임기를 통해 본격적인 게임의 시대가 도래한 연대이다. 또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블랙 사바스, 딥 퍼플, 플리트우드 맥, AC/DC(밴드), 등 레전드급 밴드들이 세계를 들었다 놨던 록 음악헤비 메탈의 최대 전성기였다.[1]

여담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피해를 입었던 상위 선진국[2]들이 전쟁의 상흔을 완벽히 씻어내고 다시 경제적 여유를 되찾은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오일 쇼크영국병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세계를 앞둔 폭풍전야 시기이기도 했다.

2차 대전 및 제국주의 시절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여파가 테러리즘으로 나타난 시기로 특히 주축 3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극좌와 극우 테러리즘 단체가 악명을 떨치던 시기이다. 독일에서는 70년대를 독일의 가을이라고 부르며 독일 적군파가 맹위를 떨쳤고 이탈리아에서는 70년대를 납의 시대라 부르며 붉은 여단이 테러를 일으켰다. 일본에는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이 있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과 IRA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68 혁명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문화계의 표현의 자유가 높아진 시절로 에로 영화의 전성기라 여겨진다. 칸 영화제에서도 에로 영화가 상영되었다. 미국 영화계는 6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뉴 할리우드 시대가 계속되고 2020년대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는 미국 영화계의 거장들이 속속 두각을 나타낸다.[3]

2. 정치/사회

2.1. 한국

사실상 이때부터 남북분단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봐도 된다. 남북한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된 뒤 태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상 유년기만 보낸 1940년대 중반~1950년대생들이 이 시기부터 사회 주류가 되었는데 이들의 조국은 1948년에 수립된 단독 정부 대한민국이지 과거의 조선이나 식민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남북통일에 대한 회의론적인 입장이 증가한 것도 북한의 경제 몰락과 그 대략적인[4] 실상이 알려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 1990년대 초반부터다. 다만 90년대보다는 아직 북한 땅에 살아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이에 20~40대의 청년기~중년기까지 이북에서 살아본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민족 의식이 강하고, 북한에서 민족주의를 역이용하는 정치 선전을 제대로 못했기에 김일성이 권력기반을 위해 해방정국 당시 소련에 빌붙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증언이 더해져 북한을 민족주의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많았다.

1969년 3선 개헌 후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꺾고 승리했으나, 대선 과정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중앙정보부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대내적인 금권살포에도 불구하고 40대의 야당 후보 김대중에게 94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승리하지 못한 것이 한몫했다. 재선에서 이겨도 박정희는 지도력이 약해졌고, 야당과 재야세력, 사법부 등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동하고 위수령까지 내려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미 3선 개헌 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은 학계, 종교계, 법조계까지 참여하는 범국민적인 성격으로 전환됐는데, 경제는 급속한 성장과 수출증진을 대가로 막대한 외화를 차입받으면서 외국 빚이 점차 늘고, 부실기업도 속출하여 점차 단점이 드러났다. 국제 정세도 1969년 미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후 대변혁을 일으켜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수교를 하는 한편, 주한미군도 감축하겠다고 하자 박 정권은 안보위기를 절감하여 자주국방 노선을 수립했다. 뒤이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했고, 유신헌법 개헌투표에 부쳐 91.5% 통과로 제3공화국 시대가 끝나고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유신체제 수립 후, 박정희는 중정과 친위 군부세력을 토대로 하여 물리/제도적으로 폭압적 통치를 시작했다. 이들은 실권을 지닌 채 국회는 물론이요, 집권당과 내각마저도 전부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공작정치와 밀실정치도 만연했다. 1973년 3월에는 하나회 멤버이자 군부의 실력자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구속되고, 8월에는 박정희의 강력한 라이벌이던 김대중이 일본 도쿄에서 중정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기도 했다. 또 장준하도 1975년에 등산 도중 의문사했다.

이로써 유신정권은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시달렸고, 종식 때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반유신운동은 거세게 타올랐는데, 그 이전에도 전남대 <함성> 지 사건, 고려대 <민우> 지 사건, 박형규 목사의 서울 부활절 연합예배 투쟁 등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10월부터 서울대 문리대를 시초로 본격적인 반유신 학생운동이 벌어졌고, 천관우, 김재준 등 지식인 15명도 투쟁에 동참했다. 뒤이어 12월 24일 장준하가 주도한 '100만인 헌법 개정 청원운동'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여 장준하백기완 등에게 징역 15년을 때려 본보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럼에도 반유신운동이 사그라들지 않자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후, 중앙정보부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문 등 비인간적 가혹행위가 수반됐으며 관련자들은 사형, 무기, 20년형 등을 무더기로 선고받았다.

동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피격당해 숨졌고 이 과정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체포되어 박정희 정권은 반일시위를 하여 반유신운동을 잠재우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신운동은 대학가 외에도 언론계, 종교계 등지에 파급됐고, 특히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자 동아일보가 중정의 압력으로 광고를 싣지 못했다. 또 재야 및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됐다. 국내외적으로 압박을 받은 유신정권은 1975년 2월, 유신헌법 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긴급조치 1/4호 위반자들을 풀어주는 유화책을 제시했다. 반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주도하던 기자 백수십 명은 조선 및 동아일보로부터 해직을 당했고, 3월부터 학생운동이 다시 번지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7호를 내려 고려대에 휴교 조치를 내렸다. 뒤이어 4월 8일에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중 도예종 등 8명에 사형판결을 내렸고, 다음 날 새벽에 전격 사형집행했다. 뒤이어 11일에는 서울대생 김상진이 할복자살로 저항했으나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인해 반유신운동은 힘을 잃었다.

전술한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박 정권은 반전에 성공했는데, 몇몇 국민들이 안보 위기의식을 표하고 보수 종교/지식인이 유신체제와 적극 손을 잡은 것이다. 4월 29일에 박정희는 "1975년이 북한에서 남침을 저지르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하여 총화단결로 국난을 극복하자고 강조하자, 5월 들어서 서울시내 주요 대학에서 온갖 안보궐기대회가 열리고, '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도 열리는가 하면 학도호국단도 15년만에 부활했다.

동년 5월 13일에는 최종보스격인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해 사석에서 반유신 의사를 표하는 것조차 영장 없이 구속하여 반유신운동 자체가 알려지지 못하게 봉쇄했고, 7월 9일에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법, 교육관계법 개정안(교수 재임용제) 등 4대 전시입법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 중앙정보부 등은 고문을 통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 등을 만들었고, 교도소도 일제 말처럼 전향을 강요했다. 또 국보법이나 반공법으로 구속됐다 석방돼도 사회안전법에 따라 보안감호소로 또 보내지거나 감시를 받았다. 1976년에는 반상회가 만들어져 사회적으로도 병영화가 진행됐고, 교수들까지 학생시위 방지에 동원됐다. 그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터지자 박정희는 반공/반북 안보의식을 강조해 위기 의식을 강조했고, 애인, 이웃, 친척이든 뭐든 간첩임을 의심하라는 살벌한 간첩 색출운동도 벌였다. 문화/예술계 역시 마찬가지여서 방송, 음악, 영화 등지에서 검열이 강화됐고, '대마초 사건'으로 가수들이 구속되는 '가요계 학살'이 벌어졌다.

야당 역시 인도차이나 사태를 기점으로 태도가 변했다. 신민당은 1975년 5월 12일 개헌운동을 멈춘다고 했고, 21일에 김영삼 총재가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열었으나 그 뒤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10월 8일에 유신체제를 정면 비판한 김옥선 의원이 제명되었는데도 신민당 차원에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국의 묵인 하에 깡패들이 각목을 들고 폭력사태를 벌였고, 그 속에서 이철승이 새 대표로 선출되어 '중도통합론'으로 유신체제에 야합했다. 다른 한편 박정희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76년 1월 '포항 석유설'을 발표하여 산유국의 꿈을 잠시나마 갖게 하고, 1977년 2월 임시 행정수도 구상을 발표하면서 투기광풍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동적 복고주의의 일환으로 충효 및 경로사상까지 동원해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위와 같은 반공/안보 분위기 속에서도 반유신운동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가면극회, 문학회, 야학문제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터졌고, 1976년 3월 1일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등을 중심으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지만 파급이 안 됐다. 다만 1976년 10월 박동선 사건(일명 코리아게이트)이 터져 대미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하면서 박 정권에 불리한 요소가 들어섰다. 특히 카터 대통령은 '인권외교'를 내세운 뒤, 박 정권의 인권탄압에 분개하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1977년 하반기 들어 반유신운동은 다시 불타올랐다. 서울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연행까지 감수하는 '가미카제'식 투쟁을 주로 벌여 도심지를 중심으로 유인물을 뿌렸고, 광화문 등지에선 시민들과 연합투쟁을 했다. 1978년 2월 제2차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고, 1979년 3월 1일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발족됐다. 거기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와 일부 개신교 목사들도 반유신투쟁에 한몫을 했고, 해직 언론인들은 조선투위 및 동아투위를 만들고 해직교수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로 나섰다. 중정 폐지와 학원 병영화 반대 외에도 빈부격차, 민생고, 해외 의존 경제체제 등 경제/사회문제도 같이 거론됐고, 1970년대 후반부터 함평 고구마 투쟁동일방직 투쟁 등을 통해 노동/농민운동도 확대됐다. 같은 시기에는 몇몇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중남미에서 유행한 종속이론이나 급진 사회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념적 성향 역시 어느 정도 띠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12일에 열린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민주공화당을 1.1% 더 앞지르는 이변이 생겨 박 정권에 타격을 입혔다. 특히 신민당보다 더 야당성이 강한 민주통일당의 표를 합치면 8.5%나 더 앞지른 것이다. 공화당의 패배에는 재벌 위주 정책으로 인해 생긴 빈익빈 부익부 현상, 벼농사 피해(일명 '노풍'), 경기 침체 등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도 한몫했다. 이를 계기로 김재규 중정부장과 공화당 측이 박 정권에 경제팀 교체 요청을 하여 성장 드라이브를 이어간 남덕우 경제팀이 물러났고, '안정화 정책'을 들고 나선 신현확이 새 부총리로 취임했다. 동월 27일에는 박정희가 통대선거를 통해 99.9%로 연임에 성공했지만, 정작 취임식에서는 일본의 친한파 인사를 빼곤 미국, 일본, 자유중국(대만) 등의 공식적인 축하 사절이 없었다.

1979년 5월 30일에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직에 복귀하면서 박 정권과의 갈등은 더 극한으로 치달았고, 뒤이어 터진 8월 YH 사건과 10월 초 김영삼 총재 제명사건은 오히려 박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윤활유 역할을 했다. 거기에 제2차 오일 쇼크와 부가가치세, 인플레, 부동산 투기 등으로 민생파탄이 더해졌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동년 10월 16일부터 터진 부마민주항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항쟁이 터지자 박 정권은 위수령까지 선포하며 이를 막으려 했지만, 수습 대책을 놓고 권력층 내부에서 대립이 격화됐다. 결국 10월 26일, 김재규 중정부장이 궁정동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여 유신정권은 끝을 고했다.

6.25 전쟁의 폐허와 수난 속에서 태어났거나 그 이전에 태어났어도 이 시기 유년기를 보낸 초기 베이비부머, 즉 1940년대생과 1950년대생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20대~30대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온 몸으로 겪었던 1930년대 및 그 이전 세대들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해방, 전후 세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 기성세대들(1910~30년대생)의 기대가 특별히 컸던 편이었고, 이들부터 1960년대 초반생까지를 황금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5]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1997년 저서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에 따르면 해당 세대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회정의에 관심을 지녔으나, 권위주의 독재가 심화될 당시 이들은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현실과 타협했다고 한다. 또 맹목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이전 세대와 달리 계산적이고 물질적인 마인드를 지니기도 한다.

이 때까지도 남북이 대결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과 적십자 회담을 통해 통해 남북한 UN동시가입까지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성사된 것은 20년 후인 199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1972년에 북한에서는 주석제와 주체사상이,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이 확립된다. 그리고 1976년 미군 장교들을 살해한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져서 미군이 출동하고 전쟁 직전사태까지 험악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격랑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김정일로의 세습(계승)이 확정된 것도 이 때다.

출산율의 경우 1971년까지는 출생아 수 100만명대가 이어졌으며, 1974년까지는 출산율 4명 내외, 출생아 수 90만명대가 이어지면서 베이비 붐이 이어졌으나,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출산율이 3명 내외까지 감소하면서 출생아 수가 80만명대 내외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 건설 노동 파견을 갔다.

2.2. 세계

New York City 1970s Part 1 - NBC Universal Archives

미국소련의 양강 대결이 이 연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남베트남북베트남1975년 멸망하는 등 일시적 쇠퇴를 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대 후반에도 오일쇼크와 경제위기, 지미 카터 시절의 이란 이슬람 혁명(호메이니 집권),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우려하게 했다. 리더십 측면에서도 닉슨의 사임 이래 포드와 카터가 모두 재선에 실패했다. 영국 역시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오일쇼크를 바탕으로 브레즈네프 정권이 그나마 안정된 경제사정을 유지하는 등 일시적으로 호시절을 보낸다. 80년대의 서구(영미)권의 신보수(+신자유주의) 우위와 공산권 붕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점차 공산주의로 기울었고, CIA가 사주한 칠레 쿠데타로 반미감정이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남미에서도 저변에서 친소 감정이 확산되었다. 프랑스는 나토에서 탈퇴했고 이베리아 반도, 독일에서는 미국이 소련보다 나은 선택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좌파 정당들이 집권했다. 나토 동맹국인 그리스와 터키는 키프로스 문제로 전쟁 직전까지 갔다. 영국은 지속된 경기 침체와 불만의 겨울로 엉망이었으며, 미국 국내도 마약과 범죄, 인종갈등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손을 벌리며 데탕트(화해)를 기획한다. 1971년대만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때부터 상임이사국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과 일본 국교가 회복되었다. 여담이지만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회복세를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하락세를 걷고 있다.

한편 중공은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이 잇달아 죽고 화궈펑에 의해 4인방이 축출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면서 개방의 물결이 시작되게 된다. 대만에서는 장제스가 비슷한 시기(1975년)에 죽고 옌자간에 거쳐 아들 장징궈가 뒤를 잇는다.
포르투갈에서는 철권 독재 정치를 펼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전 총리가 1970년 사망하고 1974년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참전했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살라자르의 뒤를 이어 독재정치를 펼치던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축출되면서 오랜 극우 독재정권이 붕괴되었고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페인 역시 이듬해인 1975년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가 국왕이 되어 왕정이 부활하면서 남유럽의 독재체제가 종식되었다.

반면 칠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와 같은 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중화되었고 브라질은 군정이 계속되었다.
1972년 당시 옛 서독에서 열렸던 1972 뮌헨 올림픽이스라엘 선수들을 노렸던 범죄사건 검은 구월단 사건이 터져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으로 표면화 되고, 이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캐나다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뉴질랜드의 참가를 허용하자 이에 범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여 불참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거부하고 있던 올림픽 정신이 정치색깔과 인종차별 색깔 등으로 물들게 되는 계기를 낳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 된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헬게이트에 빠진다.
Japan in the seventies (2) 70年代の日本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이어서 좌파 투쟁이 치열했으나 70년대 일본의 좌파 운동은 내분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고, 그 가운데 적군파처럼 과격한 무장 투쟁으로 대중들의 호응을 스스로 버리고 만다. 한편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일본 국민들은 좌파 사회운동 등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돈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집권 후 '일본열도 개조론'이 나오기까지 했다. 극소수의 에도 시대 출생자들이 1970년대에도 살아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산당이 전성기를 맞고 자민당이 록히드 사건과 오일쇼크로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이 시기였다. 하지만 분열과 오히라 마사요시의 죽음으로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 전술한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쉬쉬했던 정경유착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정경유착 근절' 이야기가 호응을 얻었으나, 정경유착은 점차 규모가 커져갔다.

나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던 시기이지만 석유파동을 이겨내고 경제가 좋아져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은 현재와 같아진다.

이와는 별개로 유독 2차 세계 대전 이후 손에 꼽을 수준의 악랄한 독재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집권했던 시기로 꼽힌다. 전성기(?)가 훌쩍 지난 마오쩌둥&프란시스코 프랑코와 1971년 사망하며 권력을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에게 세습한 프랑수아 뒤발리에를 논외로 치더라도 1970년대의 주요한 독재자로 꼽히는 김일성[6], 폴 포트, 이디 아민,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7], 모부투 세세 세코[8], 장 베델 보카사, 시아드 바레,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9] 등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현재까지의 인류 최악의 독재자들을 논할 때 최상위권으로 언급될 정도이다. 이들은 통치의 잔혹성도 잔혹성이었지만 경제적 기반까지 파괴해 나라의 미래를 철저히 망쳤다는 것에서 역대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고 있다.[10]

얼마나 당대 독재자들의 수준이 심각했냐면, 자국민을 최소 천 단위로 죽이는 것은 거의 기본 소양이었고 한국에서 서슬 퍼런 독재로 간주되는 유신 체제 하의 박정희마저 폭정 수준으로 따지면 '당대 개발도상국의 흔해빠진 독재자 A' 수준에 불과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11][12] 박정희보다 한 술 더 뜬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13], 네 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아메드 세쿠 투레, 헤이스팅스 반다, 하페즈 알아사드. 무아마르 카다피,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14], 심지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수하르토, 엔베르 호자조차[15] 총체적으로 따지면 1970년대 최악의 독재자 반열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이 시기에는 유독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가까운 수준으로 미친 독재자들이 많았다.[16][17] 현 시점 1970년대의 저러한 독재자들과 비견되는 수준의 학정이 일어나는 국가는 북한, 잘 쳐줘서 탈레반이 집권하는 아프가니스탄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유독 독재자들의 폭정&인권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3. 경제

3.1. 세계

3.2. 한국

한강의 기적의 절정기로, 한강의 기적의 80%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 초고성장 시대였다. 1960년대경공업 위주에서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점차 변화가 되어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겪어온 1910년대~1950년대 초반년생들 기성세대들이나 경제계 등에서는 이 때를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태동의 시기라고 평가한다. 또한 경제계 거물인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등의 경제적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여서 이들의 존재가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외채가 급증하고 물가 상승으로 물가 성장이 60년대에 비해 둔화되는 효과를 보였다.

실제로도 당시 GDP는 연간 7~8% 이상씩 성장했으며 잘나가는 해에는 12%까지도 성장했다. 당시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국민들의 노력 등에 의한 영향력이 컸다. 지금은 사망해서 몇분 남지 않은 당시 기성 세대였던 1900~1930년대생들의 집단주의적 특성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라고, GDP라는 국가 규모의 지표는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으나 군부독재의 한계로 저임금 정책, 노동인권 탄압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70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해였고 이 사건 직후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학생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때의 고착화된 노동인권적 가치가 현대까지도 '열정페이'로 대변되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77년에는 식량에서도 식량 자급 자족율이 100%를 넘어서 식량에서도 근대화를 일으켰으며, 북한과 1인당 국민 소득도 2배 이상으로 따돌렸다. 196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보다 잘 살던 북한이었는데, 1973년에 1인당 국민 소득에서 이미 한국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는 상대로 된 것이다. 1974년에 세계 펑균 1인당 국민소득을 추월했고, 1976년 세계 19위권의 무역국이 되었으며, 78년에는 17위까지 올라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은 일시적으로 1700달러 후반대를 기록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1700달러 초반대까지 떨어졌다. 한강의 기적 문서 참조. 중화학 중복 투자와 8.3 사채 동결 조치 등의 정부주도적인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가 부도 위기 등을 야기하며 큰 한계를 보였지만, 결국 부가세 문제와 함께 신민당이 득표 1당이 되고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만다.

당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원자력 발전 정책으로 인해 1978년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상업운전을 했다. KAIST의 성립 등 과학기술, 공업의 집중 투자가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또한 컴퓨터와 금융권 전자화가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안녕 자두야의 배경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한국에서는 아무리 검정 고무신의 배경시대였던 1960년대보다는 경제사정이 확연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에는 컬러 TV 판매와 방송은 논의만 나왔고 컬러 TV는 있어봤자 해외수출품이거나 AFKN과 일본방송 시청용에 가까웠다. 사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컬러 TV 방송을 굉장히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자가용 자동차 역시 중산층들의 사치품이었고 일반인들은 자가용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세금 문제와 연료비 때문에[18] 자동차 가지기가 참 힘들었다. 컬러TV가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80년 컬러방송 시작때부터이고 대중화 된것은 1980년대 중후반이며, 자동차는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컬러영상들은 1960~1970년대부터 볼 수 있었고 컬러사진은 1950년대부터 볼 수 있었으나 이것 역시 지금 컬러영상이나 컬러사진이 넘쳐나는 것에 비하면 이때 컬러사진과 컬러영상은 부유층들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교통수단인 여객선, 비행기, 기차도 지금은 KTX, SRT의 개통과 대형 항공사의 성장 및 LCC 항공사의 설립, 비행기의 다양화와 여객선의 다양화, 해운산업의 발달 및 디지털 운전기기 및 인터넷 운전시스템의 발달, 무인운전 및 자동운전의 발달 등으로 나름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는 대한항공이 광동체를 도입하고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기차의 주력이었으며 여객선 산업도 발달하고 있었지만 이때 당시 일반인들이 이 교통수단들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그 교통수단들은 부유층들이 많이 탔고, 현재는 여러 노선의 개통 및 연장, 자동운전 및 무인운전이 가능한 신형 전동차 도입, 지하철 객차 증가, 에어컨 등 냉방장치 설치 등으로 국민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된 지하철도 이 당시에는 지금보다 노선이 적었고 지하철 객차의 량도 지금보다 적었던지라 다른 교통수단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부유층, 중산층이 제법 탔으며 이 당시 지하철에는 에어컨도 없었으며 지금은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많이 있지만 이때 당시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에스컬레이터는 1982년 2호선이 연장 개통하며 일부 역에 설치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서울에서 같은 수도권을 다니거나 부산, 대구, 대전, 광주의 각종 지역이나 그 주변을 다닐 때 곳곳에 퍼져있는 각종 지하철 노선으로 인해서 빠르게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철로는 충청도까지 갈 수 있게 되었고 철도를 이용해서 지방을 갈 때도 KTX 등으로 빠르게 갈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해외로 가는 비행기나 여객선도 나름 탈 수 있게 되었고 국내선 비행기나 여객선 역시 쉽게 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는 서울에서 같은 서울 지역이나 수도권을 다닐 때도 5~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던 구간이 있었고 부산[19], 대구, 대전, 광주의 지하철은 아직도 개통이 되지 않았으며 철도를 이용해서 지방을 가도 시간이 많이 걸리던 시대였으며 당시 해외로 가는 비행기나 여객선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을 빼면 탈 수가 없었고 그마저도 해외 여행을 할 때 규제가 있었으며 국내선 비행기나 여객선도 부유층이 많이 탔으며 심지어 지금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이 나름 대중화가 되었고 퍼스트클래스 석이나 비즈니스 석의 경우 비싸기는 하고 여전히 부유층 전용이긴 해도 나름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고 여객선이나 기차의 특등석도 현재는 나름 비싸기는 해도 사람들이 꽤 많이 타지만 당시의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석이나 비즈니스 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코노미 석마저도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탔고 여객선이나 기차 역시 특등석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이 많이 탔다.

그리고 이 당시 한국의 고속도로들은 경부고속도로 준공을 계기로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노선이 다양해지고 차선이 확장된 지금에 비하면 차선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으며 터널 같은 경우에도 설치가 나름 이뤄지고 있었지만 지금 터널들이 장대터널들이 많이 설치되고 터널들이 많이 대중화 된 데 비하여 이때 당시 터널들은 주로 작은 터널들밖에 없거나 장대터널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부산에도 1980년에야 장대터널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이때 당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5~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역들이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비포장도로도 1960년대에 비하면 적어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포장도로 대부분을 꽤 포장했으나 여전히 이 때만 해도 거의 모든 비포장도로가 포장된 현재에 비교하면 이때 당시에는 비포장도로가 꽤 남아있었다.

전화기의 경우 현재는 대중화가 되었으나 1970년대 당시에 전화기는 버튼식 전화기도 조금씩 도입되고 있었고 대중화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전화기는 부유층들이 많이 이용했으며 지금은 널리 대중화가 된 휴대폰의 전신인 카폰도 이 당시에는 부유층이 많이 이용했으며 버튼식 전화기가 슬슬 도입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다이얼식 전화기가 주류였다. 그리고 현재 휴대폰이 카메라, 메시지, 게임 등 다양한 기능을 이용할 수 있고 인터넷 같은 것도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지도, 지하철 노선도, 배달앱, 메신저, 음악, 드라마 다시보기, 금융앱 등도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이때 당시 휴대폰의 전신인 카폰은 그냥 전화 용도로만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역시 대중화가 된 중식, 일식, 양식이나 뷔페, 고급 한정식 등을 포함한 소고기, 돼지고기 등의 고기류, 해산물류, 치킨류 음식, 케이크, 머핀, 과자를 포함한 제과류, 제빵류,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도 이때 당시에는 1960년대보다 대중화가 이뤄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일반인들보다는 중산층, 부유층이 많이 먹었다. 그리고 피자나 치킨, 햄버거, 샌드위치 등을 포함한 패스트푸드 같은 경우도 현재는 체인 수가 난잡해질 정도로 상당히 많이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 한국에 있던 패스트푸드점은 1979년에 생긴 롯데리아밖에 없었고 이것 역시 대부분 중산층이나 부유층이 많이 먹었다.

은행에 있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의 경우에도 지금은 최첨단기기가 많이 설치되고 출금하기도 편해졌으며 모니터도 최첨단화가 된 건 물론, 많이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현금 자동 입출금기는 설치되기는 했어도 일부만 설치되거나 출금할 때 불편한 점들도 꽤 있었고 검은색 바탕에 녹색 글씨가 나타는 현금출금기가 많았다.

고속도로 휴게소 분야에서도 이 당시에는 지금 고속도로 휴게소가 각종 꼬치류에 버거류, 도넛류, 튀김류 같은 각종 간식과 패스트푸드, 각종 다양한 음식 및 매점이 있고 위생도 괜찮은 것에 비해서 이 당시 고속도로 휴게소는 음식 메뉴도 얼마 없고 위생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화가 된데다가 각종 도시락과 패스트푸드, 즉석식품까지 판매하는 편의점도 이때 당시에는 편의점이 1982년에야 롯데쇼핑에서 시작을 했고 점포도 많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지금은 대중화가 된 선풍기도 이때 당시에도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선풍기를 샀다. 지금은 필수품이 된 에어컨도 이때 당시는 부유층, 중산층 전용이었으며, 에어컨을 가진 집에서 에어컨을 틀자고 하면 "우리가 이병철네 집인 줄 아니?"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20]

의류 중에도 드레스, 웨딩드레스, 양복, 넥타이, 와이셔츠, 블라우스, 방한복, 스웨터, 외투, 가운, 티셔츠, 산타복, 원피스, 츄리닝, 후드티 및 정장, 연미복 등은 지금은 대중화가 된 패션들이 상당히 많고 그림과 글씨, 컬러가 새겨진 패션들도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에 그 패션들은 1960년대에 비하면 나름 많아졌지만 이 당시 그 패션들은 부유층, 중산층 또는 그들의 자제들이 많이 입었고 뿐만 아니라 특히 이때 당시에 정장과 연미복은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을 정도다. 그리고 당시 그 패션들에는 컬러는 어느정도 있었어도 그림, 글씨를 새긴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은 대중화가 많이 되었고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들이 많아진 잠옷도 이때 당시에 1960년대보다 잠옷을 입는 사람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잠옷은 대부분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입었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컬러는 어느정도 있었어도 그림, 글씨가 새겨진 잠옷을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설사 그림, 글씨가 새겨진 잠옷들이 있어도 많지 않거나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 글씨가 많이 새겨지지 않았으며 이 때 잠옷을 입을 때는 지금과 다르게 침실에 있을 때 외에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쳐야 했다. 또한 지금은 대중화가 되었고 역시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도 많이 있는 내복도 1960년대에 비해서 내복을 입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잠옷만큼은 아니어도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입었으며 이 때 내복도 컬러는 어느정도 있어도 그림, 글씨가 새겨진 내복은 찾기 힘들었고 설사 그림, 글씨가 새겨진 내복이 있더라도 많지 않거나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 글씨가 많이 없었다. 역시 현재는 대중화가 되고 그림, 글씨 및 컬러가 새겨진 것들도 많은 민소매러닝도 1960년대보다는 입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부유층, 중산층이 입은 경우가 많을 정도이고 그림, 글씨가 새겨진 민소매러닝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설사 있더라도 지금에 비해 색이 짙지 않거나 그림과 글씨가 많이 새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대중화가 된 패션이자 여성들의 주요 속옷이기도 하며 그림, 글씨와 컬러가 새겨진 것도 많이 있는 브래지어도 1960년대에 비해서는 입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부유층, 중산층 여성들이 많이 입었고 컬러가 있는 브래지어는 어느정도 볼 수 있기는 했으나 이때 당시 그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브래지어는 많이 보기 힘들었다. 또한 지금은 대중화가 된 가방도 이 당시에는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많이 샀으며, 장신구, 액세서리, 모자, 안경, 시계, 우산, 수건, 양산도 현재는 대중화가 많이 이뤄졌지만 이때 당시 이 물건들은 부자들이나 중산층들이 주로 샀었다. 지금은 대중화가 된 테디베어를 비롯한 인형류도 이 때는 단순한 인형정도로 생각하거나 주로 부유층, 중산층 중심의 어린이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지금은 어린이들의 놀이감이 된 장난감들도 이때 당시는 부유층, 중산층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도 1960년대보다는 많이 설치되었고 많아졌다지만 이때 당시만 해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여전히 고급장비였다. 물론 70년대~80년대 초는 고층건물들이 많이 준공되고 고층 아파트도 많이 들어오고 대학교에도 70년대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60년대보다는 대중화가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지방에서는 엘리베이터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층운행을 하는 엘리베이터들도 많아졌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들도 전층운행을 많이 하고 있고 2,3층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많아진 것에 비하면 이 때는 엘리베이터가 나름 대중화가 되었어도 절전운행을 하거나 짝수층, 홀수층, 고층, 저층으로 운행하는 엘리베이터가 제법 많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경우에는 지금에 비해서 홀수층, 짝수층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으며 2,3층을 통과하는 엘리베이터도 있었다.[21]

백화점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되었고, 국민들 다수가 백화점을 이용하며 백화점 식당가와 푸드코트, 식품관도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백화점은 1960년대보다는 나름 발달을 거듭하고 백화점이 계속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부유층과 중산층이 백화점을 이용했고 호텔 역시 지금은 거의 국민들 절반이 호텔을 이용하고 호텔 레스토랑도 꽤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 호텔은 1960년대보다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고층 호텔도 계속 준공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호텔의 주 이용객은 부유층들이나 중산층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형마트의 경우에도 지금은 대중화가 많이 되고, 창고형 대형마트도 나왔지만, 이때 당시에는 한국은 대형마트가 한 개도 없었다. 복합쇼핑몰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는 고속터미널 등을 제외하면 복합쇼핑몰을 보기가 힘들었다.

아파트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대중화가 많이 되었고 국민의 상당수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70년대~80년대 초 당시에 아파트는 1960년대보다는 건립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부유층이나 중산층의 전유물이었다. 비상구 같은 경우는 1960년대보다는 대중화가 많이 되었지만 여전히 허름한 곳이나 학교 같은 경우에는 비상구를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있었고 비상구에 픽토그램 또한 도입되지 않았다.[22] 또한 목욕탕의 경우에도 지금은 찜질방과 각종 편의시설, 식당과 매점을 보유한 목욕탕이 많고 각종 스파산업이 발달한데다가 대형 목욕탕들이 많을 정도로 목욕탕이 다양해 졌지만 이 당시에 목욕탕은 1960년대에 비하면 호텔 등에도 목욕탕이 생기고 스파도 생기고 대형 목욕탕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 목욕탕은 주로 부자나 중산층들이 많이 썼고, 이때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과 서민들은 대중목욕탕을 많이 이용했다. 또한 수영장도 이때 당시에는 1960년대보다는 설치빈도가 늘었지만 부유층들이 많이 이용했고 지금 워터파크가 상당히 많고 수영장도 많아진 현재에 비하면 이 때 워터파크는 부곡하와이 한 곳이 들어온 것에 그쳤다. 테마파크 같은 경우도 지금은 거의 서울랜드, 롯데월드, 에버랜드를 비롯해서 대중화가 많이 이뤄졌지만 이때 당시에는 테마파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수준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대중화가 된 편은 아니었다. 또한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도 지금은 구장이 많이 발전한데다가 구장 내에서 다양한 음식과 과자 등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1980년대 당시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은 대중화 수순을 점점 밟고 있긴 했어도 구장 음식이 많이 없었으며 먹을 수 있는 게 음료, 소주와 마른 오징어, 옛날과자 뿐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화장실만 보더라도 1960년대보다는 어느정도 화장실이 많아졌고 집 안에 화장실이 설치되거나 욕조가 생긴 화장실들이 제법 많아졌으며 공중화장실 개선도 나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지금 화장실들이 최신식 화장실들로 위생이 괜찮고 화장실 벽에 그림도 그려져 있고 음악도 나오는 것은 물론 개인별 소변기가 많고 집 안에 화장실이 많고 욕조가 구비되어 있는 화장실이 대중화 된 것과 다르게 당시 그 화장실들은 주로 부유층, 중산층이 많이 썼으며 깨끗한 공중화장실도 주로 고층건물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대부분의 공중화장실은 흔히 생각하는 개인별 소변기가 아닌 시멘트바닥, 타일바닥에 홈을 파놓거나 물이 항상 흘러내리게 되어있는 대형 철제 소변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화장실들은 물낭비는 둘째치고 냄새가 지독하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또한 지하공간 같은 경우도 지금은 지하공간을 쇼핑몰, 마트, 백화점, 음식점, 카페, 디저트집, 박물관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고 지하주차장도 곳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지하 층수 역시 지하10층까지도 있을 정도로 지하공간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고 대중화도 많이 되었지만 이 당시 지하공간은 1950년대~1960년대보다는 발전하여 음식점, 다방, 카페, 디저트집, 쇼핑몰 등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층수도 꽤 확대되었지만 이 당시는 많이 내려가봐야 지하4층이었고 지하공간 역시 완전 대중화가 되지는 않았고 지하공간도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제법 많이 썼으며 지하주차장도 대형 건물 위주로만 있었다.

그리고 해외여행 같은 경우도 지금은 국민들이 좋아하는 여행 수단이 되었지만 이때 당시에 해외여행을 갈 때 196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통제가 심했고 일부 자유화가 되었지만 해외여행도 부유층만 거의 갈 수 있었다.

병원 같은 경우도 지금은 대중화가 된데다가 대형 병원도 많이 준공이 되고 최신 시설도 많이 갖추고 있고 편의시설도 많이 갖추고 있으며 치료시설도 많아지고 높은 건물로 지어진 병원들도 많지만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당시에 병원은 1960년대에 비하면 나름 높은 건물로 지어진 병원들도 슬슬 많아지고 치료시설도 슬슬 많아지고 있었지만 이 당시 병원 치료는 여전히 부유층이나 중산층이 꽤 받았다.

대학교 같은 경우에도 지금은 최신 건물들이 많이 설치되고 편의점도 많이 들어오고 매점 메뉴도 많아지고 최신 쇼핑몰도 들어오고 최신 기숙사도 들어오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들도 많아지고 정보화도 많이 진행되고 최신 시설도 많이 설치되고 대학 교실도 많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당시 대학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건물도 나오고, 1960년대보다는 어느정도 상황이 나아졌지만 대학교 기숙사나 대학교 교실은 꽤 좋지 못했다. 그 외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경우 지금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들이 꽤 있고 나름대로 쾌적한 시설과 최신 시설도 갖춰진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당시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엘리베이터도 없고 냉방 시설 같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인 대학교 및 전문대학, 교육대학 등 고등교육기관 진학률만 해도 졸업정원제 등으로 인해서 1960년대보다는 대학교 진학률이 늘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젊은 층들이 대학교에 갈 수 있는 현재에 비하면 대학교를 진학하기가 거의 까다로웠고 이 때만 해도 대학은 거의 엘리트나 중산층 이상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중등교육인 중학교, 고등학교는 거의 엘리트들만 가던 1960년대에 비하면 1960년대~1970년대에 중학교 무시험 정책, 고교 평준화 등으로 활성화가 되었고 초등교육인 초등학교는 해방 이후나 1950년대에 활성화가 되었지만 이 때만 해도 지금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비하면 도시권의 중학교, 고등학교 역시 엘리트들이 가는 이미지가 제법 있었고 초등학교 역시 도시권은 여전히 엘리트들의 자녀가 가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다.

지폐의 경우에도 지금은 5만원권도 나오고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도 많이 보편화가 되었고 10원, 50원, 100원, 500원 동전도 보편화가 되었지만 이 당시에 한국은 10전, 50전에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500원이 지폐였던 1960년대에 비하면 1원, 5원, 10원, 50원, 100원이 지폐에서 동전으로 바뀌고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도 등장했지만 당시에만 해도 이 지폐들은 꽤 고액권에 해당했고 아직 5백원이 지폐였고 5만원권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시절이며 현재는 평범한 금액이 되었고 국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금액도 이때 당시만 해도 꽤 고액이거나 높으신 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고액권이었다. 또 수표 역시 지금은 일반 국민들도 수표를 제법 사용하지만 이 때만 해도 196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높으신 분들이 사용했던 고액권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은 보편적인 가격이 된 금액들도 이 때만 하더라도 최고액에 해당되었던 196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고액에 해당되었던 가격들이 많았으며, 지금은 중간 고액이 된 금액들도 이 때만 해도 가치가 커서 60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최고 금액에 해당되는 금액들이 많았다.

3.3. 일본

연도별 1인당 GDP[23]부터 먼저 살펴보자면 일본은 수준급의 선진국이었던 반면 한국은 세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던[24] 개발도상국이었다. 그런 만큼 두 나라의 생활 수준에 있어서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물가 변동을 고려하지 않은 1인당 GDP 수준으로만 보면 한국은 일본의 70년대 중반 경제수준을 80년대 후반에야, 70년대 후반 경제수준을 90년대 초반에야 누릴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이다. IMF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의 경제력은 일본에 거의 15~20년이나 뒤쳐져 있던 셈이고, 후술하듯 민생 수준의 격차도 이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연도 한국 일본 세계 평균
1974년[25] 563$[26] 4354$[27] 1343$[28]
1979년[29] 1784$[30] 9104$[31] 2303$[32]

1970년대 일본은 자가용 자동차와 유채색 TV 방송이 이미 196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완전 대중화 되어있었고[33] 컬러영상과 컬러사진도 진작에 보급되어서 대중화가 된 것은 물론, 여객선, 비행기, 기차도 신칸센 개통 및 일본항공[34], 전일본공수 등의 성장으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으며 지하철은 이미 1930년대에 개통하기 시작하여 노선을 제법 확보하여 1970년대에 이미 지하철이 대중화가 되었으며 게다가 지하철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많이 설치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도 1960년대에 준공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노선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으며 터널 역시 많아지기 시작한데다가 장대터널들도 제법 건설이 되고 있었다. 또한 비포장도로도 1950년대에 포장도로로 바꾸기 시작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도로들을 포장했다.

전화기 역시 대중화가 되었으며 버튼식 전화기도 많이 도입하고 있었고 카폰 역시 제법 있는 집이 많아졌다. 또한 은행의 현금 자동 입출금기 역시 슬슬 보편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음식, 중국 음식을 비롯한 고급 요리, 뷔페 및 패스트푸드 및 육해공 음식들도 일찍이 대중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점 브랜드들이 이미 70년대에 진출을 했으며[35] 모스버거라는 일본 버거 브랜드도 70년대 초에 설립되었고, 롯데리아도 1972년 설립되었다.[36] 선풍기와 에어컨도 상당히 대중화가 되었다. 또한 고속도로 휴게소도 이미 70년대에 대중화가 되었고 휴게소 음식들과 간식들도 제대로 된 음식들과 간식들이 나왔으며 편의점도 70년대 후반에 이미 대중화가 되었다.

그리고 드레스, 웨딩드레스, 양복, 넥타이, 와이셔츠, 블라우스, 방한복, 스웨터, 외투, 가운, 티셔츠, 산타복, 원피스, 츄리닝, 후드티 및 정장, 연미복도 일찍이 대중화가 된 것은 물론, 잠옷, 내복, 민소매러닝, 브래지어도 일본에서는 일찍이 대중화 되었으며 각종 패션에 그림과 글씨 및 컬러도 일찍 새겨졌다. 가방도 대중화가 이뤄졌고 장신구, 액세서리, 모자, 안경, 시계, 우산, 수건, 양산도 일찍 대중화가 이뤄졌다. 마루코의 배경 이후의 일이긴 하나 3대 명품(일명 에루샤) 매장도 한국에서 90년대 중후반에야 유의미하게 생기기 시작한 것과 정반대로[37] 일본에서는 이미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부터 부티크 매장이 진출해 있었다.

장난감 역시 일본에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일본에서는 이미 일찍 대중화가 되었으며, 비상구도 필수적으로 설치를 했으며 비상구의 픽토그램 도입도 빨리 이뤄져서 70년대 중반에 시범적으로 적용하다가 1982년에 픽토그램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또한 백화점과 호텔도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그리고 대형마트도 꽤 일찍 생겨서 대중화가 되었고 복합쇼핑몰 역시 대중화가 많이 되었다. 또한 아파트도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다. 또한 병원도 최신 건물들과 최신 시설들이 많이 설치되었고, 대학교도 발전을 거듭하여 최신 시설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도 설치할 정도였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최신 시설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목욕탕도 많이 늘어나서 온천과 스파가 많이 발달하였고 목욕탕 내 편의시설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수영장도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대중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워터파크도 상당히 많이 지어지고 있었다.[38] 뿐만 아니라 일본의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 등도 많이 발전하여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에서도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지하공간도 일찍이 발전하여 지하공간에 상당한 쇼핑몰, 아케이드, 카페, 음식점 등의 발달로 일찍이 대중화가 되었고 지하주차장도 많이 확보했다. 그리고 병원 역시 일찍이 대중화가 되어서 대형 병원들도 많이 준공했고 병원 시설도 많이 갖추었으며 병원 치료도 많이 활성화가 되었다. 또한 해외여행도 1964년부터 일찍이 자유화가 되었고 해외여행도 일찍이 활성화가 되었다. 심지어 공중화장실도 일찍이 개선이 이루어지고 개인별 소변기도 많이 설치되었으며, 일찍이 각 집에 화장실이 설치되었으며 욕조가 설치된 화장실도 많았다. 초등교육(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일본의 소학교)과 중등교육(중학교, 고등학교)도 일찍이 활성화 되었으며 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도 일찍이 활성화 되었다.

지폐의 경우에도 일본은 일찍이 한국의 5만원권에 해당하는 5천엔 지폐와 10만원에 해당하는[39] 1만엔 지폐를 이미 만들어 두었고, 과거 고액에 해당했던 금액도 거의 낮아져서 그 금액들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미 일본은 보편적인 금액 가격이 갖춰졌고 고액 중에서 예전에 일부 최고 고액이었던 금액들도 중간 고액으로 가치가 꽤 낮아졌다.

참고로 한국과 일본의 시기별 가구당 가전제품 보급률 비교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1981년 3월 30일 경향신문 기사 마루코 배경 7년 후, 자두 배경 2년 후라 어느 정도 격차가 좁아졌을 텐데도 이 정도 격차였다. 한국 VS 일본 가전제품 보급률[40]

4. 문화

4.1. 개괄

1970년대 문화를 포괄하는 단어는 '청년문화'이다. 1960년대 말 68혁명으로 형성된 저항주의적 청년문화는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도 파급됐는데,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등 반전 포크송 가수들의 노래가 인기를 끈 것이었다. 특히 바에즈의 <Banks of the Ohio>가 번안곡 <내 고향 충청도>가 된 것처럼 번안 포크송도 유행했다. 거기에 청바지생맥주까지 인기를 끌면서 '통블생(통기타, 블루진(청바지), 생맥주)'이란 신조어를 낳아 청년문화가 형성됐고, 이미 1967년에 윤복희가 퍼뜨린 미니스커트도 불티나게 유행했다.

이 시기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의 왜색 대중문화에 식상해진 청년이나 청소년에게 호소력이 있었지만, 서구권 청년문화와 달리 한국의 청년문화는 대항/비판문화라기보다 독점자본에 의한 부르주아 삘이 나는 대중문화와 혼재돼 있었다. 당시에 맥주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만 마실 수 있는 비싼 술이었고, 아무리 운동권들이 밥 딜런의 노래나 양희은의 <아침이슬>, 김민기의 <친구>를 부른다 해도 주류 대학사회나 일부 운동권에선 통블생 자체를 '향락주의적 문화'라 하거나, 외국 문화를 추종하는 딴따라가 어떻게 우리의 우상이 되느냐고 부정적으로 봤으며 진정한 목소리는 공동체 정신과 민중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 서양 저항문화의 표피만 따왔다는 지적도 있으며 운동권 입장에선 절대악인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데엔 통블생이 방해 요소라고도 했다. 다른 한편 요정정치와 정인숙 사건으로 대표되는 박 정권의 색정/향락문화의 일환으로 조장된다는 쪽도 있다.

유신체제 내내 청년문화는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경찰은 통기타를 빼앗거나 가위를 들고 장발을 단속하는가 하면, 미니스커트에도 자를 들이댔다. 특히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국주의적 사고관을 지닌 박정희는 장발과 같은 자유로운 대중문화 자체에 혐오감을 표했는데, 1973년 개정 경범죄처벌법 시행 후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을 합법화했고, 박정희가 TV를 보다 손가락 한번 가리키면 장발 방송인이 출연금지될 정도로 공포분위기가 조성됐다. 또 경찰은 시내 곳곳에 가위를 들고 상주하며 각 접객업소에 장발자의 출입을 금지하는 푯말을 붙여놓고, 공항 측은 외국인 장발족의 입국을 막았다.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윤리위원회가 '공연예술 정화대책'을 발표한 후 무더기로 금지곡이 양산됐고, '대마초 파동'으로 포크송과 록 음악도 고사 직전의 타격을 받았다. 박 정권은 문화검열 기준으로 국론 분열 및 민족 주체성 저해, 퇴폐성을 내세워 엄숙주의를 견지했으나, 기생관광 같은 향락문화는 장려하는 내로남불스런 모습을 보였다. 박 정권의 가요대학살로 포크송 대신 트로트가 다시 장악했으나, 청년들의 새 문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져 '하이틴 영화'와 '그룹사운드' 같은 새로운 대중문화가 나왔다.

4.2. 음악

4.2.1. 서양 음악

레드 제플린, Stairway to Heaven 엘튼 존, Goodbye Yellow Brick Road 핑크 플로이드, Time
쿨 & 더 갱, Hollywood Swinging , Bohemian Rhapsody 이글스, Hotel California
윙스, Silly Love Songs ABBA, Dancing Queen 비 지스, Stayin' Alive

그야말로 록 음악 최대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음악사를 그야말로 들었다 놨던 비틀즈가 1970년이 개봉박두하자마자 해체해버리면서 이후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초반기에는 롤링 스톤스의 우위 체제가 드러났으며, 더 후 역시 Who's Next 앨범으로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데뷔한 밴드중에서 1970년대 초반 인기를 얻게된 밴드들이 등장했다. 1971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IV 앨범을 발표해 헤비 메탈하드 록의 전성기를 열었다. 시드 바렛의 탈퇴 이후 긴 방황기를 겪던 핑크 플로이드도 주목받는 밴드가 되었다.

1973년,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전례없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대가 만개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킹 크림슨 등 여러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들이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에릭 클랩튼을 중심으로 한 블루스 록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AC/DC를 중심으로한 하드 록이 인기를 끌었다. 또한 비 지스, ABBA디스코풍 밴드 역시 대단히 성공했으며, 팝 록에서는 엘튼 존폴 매카트니, 플리트우드 맥이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외에도 글램 록데이비드 보위 등이 인기를 얻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솔로 아티스트 및 밴드들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또한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3개의 밴드로 대표되는 헤비 메탈이 크게 유행하였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다스 프리스트 등도 활동하면서 Nevermind(1991년) 이전 시기까지 록의 주류 장르로 자리잡았다. 한편으로는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등의 펑크 록 밴드들이 록씬을 뒤흔들어놓고 장렬히 산화한것 역시 1970년대의 일이었다.

일렉트로니카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 시대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의 전자음악을 실험한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크라프트베르크 등의 테크노의 조상 뻘 되는 크라우트록 그룹들이 등장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앰비언트가 태동하게 된다. 여러모로 다양한 장르가 가장 많이 시도되고 탄생한 시기이다.

차트에서는 가족밴드가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70년대 초에는 카펜터스잭슨 파이브, 1970년대 말에는 비 지스&앤디 깁이 차트를 작살냈다.[41] 각 밴드가 추구한 음악은 소프트 팝-펑키 흑인음악-디스코로 달랐지만 어쨌든 이 기간동안 다른 시기에 비해 가족밴드가 훨씬 흥했다.

4.2.2. 한국 음악

한국에서는 소위 7080 세대들의 노래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던 나훈아-남진라이벌 투톱 체제와 하춘화 등의 트로트 가수들이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송창식, 양희은, 김민기와 같은 초창기 포크가수들이 등장하여 한국 음악 장르를 더 확장시키는 것에 기여했다. 가왕 조용필이 이 시기에 신인으로 데뷔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크게 히트시켰다.

한편, 한국에서도 신중현에 의해 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음악을 한 것으로 칭송받는 산울림이 전설로 남은 초기작들을 발매하였다. 또한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등이 개최되어 한국 밴드음악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반면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 지정 등 흑역사가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4.2.3. 일본 음악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1970년대는 '아이돌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 초중반은 3인조 걸그룹 '캔디즈'[42]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1973년 결성부터 1978년 고라쿠엔 고별공연 때까지 신인류 세대들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에서 합격한 아이돌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가수로 핑크 레이디야마구치 모모에가 있다. 핑크 레이디는 <UFO>란 곡으로 사회 현상급 인기를 누렸다. 솔로 아이돌 중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이돌을 초월한 가창력과 스타성으로 독보적인 스타로 군림했다가 1980년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남자 가수 중에서는 '주리(ジュリー)'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사와다 켄지가 치고 올라갔고, 사이조 히데키, 고 히로미, 노구치 고로가 '신 고산케(新御三家)'를 형성하며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마츠토야 유미[43], 나카지마 미유키 등 소위 뉴 뮤직 세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4.2.4. 중화권 음악

대만에서는 외성인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등려군이 가수로서 주가를 올려가고 있었다.

4.3. 영화

현재의 미국 영화를 완성한 시기이다. 그 전까지 1960년대에 남았던 검열이 이 때에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기도 한다. 바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크게 형성하였다. 이 운동이 현재까지 미국 영화들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을 세울 뿐만 아니라 훗날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대항할 수 있는 조류를 남긴 것이다.

1960년대 내내 쇠퇴해있던 말론 브란도대부를 통해 재기하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비롯한 당대 신진 감독들과 협력하여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그의 연기적인 후예격이라 할 수 있는 리얼리즘 연기를 크게 지향한 성격파&연기파 배우들이 데뷔하거나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여 무수히 많은 걸작들을 배출한 중요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가 있으며 데뷔는 1960년대지만 본격적인 커리어 무브를 시작한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도 존재한다. 여배우로선 현존 최고의 여배우라는 명성을 가진 메릴 스트립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를 필두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1977년 <스타워즈>가 개봉하면서 20세기 가장 히트한 영화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사회풍자적이면서 굉장히 리얼한 묘사를 살린 신세대 누아르 영화들도 이 시기에 대거 출현하였다.

4.4. 언론

박 정권의 언론통제 정책은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7대 대선을 계기로 강화되어 이듬해 유신체제 수립부터 보도통제가 일상화됐다. 이에 기자들이 반발하여 1971년 동아일보 등 14개 언론사의 언론자유선언을 비롯, 1973년 경향신문 등 10개 신문/방송사들의 언론자유선언을 거쳐 1974년에 본격적인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시작됐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의 계기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에 따른 개헌운동 보도금지, 10월 19일 월남전의 진상을 보도금지토록 하는 '협조요청'에서 비롯됐다. 이에 동월 23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청암 송건호 등 간부 3명이 서울농대생들의 학생시위를 보도하다 정보기관에 붙잡혔고, 한국일보도 월남전 관련 기사 때문에 장강재 사장과 간부 3명이 중정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에 동아-한국 2개 신문 기자들이 농성을 벌였다.

24일에는 동아일보 편집국과 방송국, 출판국 등 기자 200여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후, 11월 7일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35개 언론사 기자들이 이 선언에 동참했다. 동아일보는 각 부별로 선출된 대표들을 통해 '자유언론 실천 특별위원회'를 꾸리고 <알림>이란 소식지를 제작/배포했으며, 기독교방송중앙일보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 운동이 확산됨과 동시에 동아일보 측이 보도금지 요청까지 어겨가며 반정부 시위/집회, 기도회 등의 투쟁상황을 보도하자 정권은 각 기업체와 기관 등 광고주들로 하여금 동아일보랑 계약을 해지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결국 동아일보는 1974년 12월 16일부터 4년간이나 광고가 못 실리는 이른바 '광고탄압'을 겪었고, 특히 12월 26일자는 3면이 백지로 나온 건 물론이요 1975년 1월 25일에는 신문광고의 98%가, 2월 8일엔 방송광고까지 92%나 각각 떨어져 나갔다.

이에 1974년 12월 28일에 한국기자협회가 성명을 발표하며 '정부의 박해 중지, 동아일보 구독운동 전개, 광고해약 회사 불매운동, 동아일보 해약광고를 게재한 신문 불매' 등의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시민들의 참여와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시민들과 민주단체에서 격려광고를 내고, 국제 언론단체들도 항의서한을 보내 엄중히 항의했지만, 이에 불구하고 동아일보 측은 권력 앞에 굴복했다. 동아 측은 1975년 3월 8일 심의실 등 4개 부서를 폐지하고 소속 기자 및 사원을 해직했고, 해고에 반발하며 농성하던 기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언론사가 권력에 굴복하며 대량으로 언론인을 해직했다는 건 일제 시기에도 없던 유례 없는 사례였다.

이 운동으로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해직된 기자는 146명이며, 이들은 해직 후에도 언론 자유와 복직을 위해 줄기차게 투쟁했다.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실패했지만 언론인들이 민주세력과 연계해 반유신 투쟁에 나서는 밑거름이었다.

다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권력과 언론사주의 관계인데,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에서 보듯 정부의 언론탄압에 사주가 가세함으로써 권언유착이 형성된 것이다. 이건 언론사가 사회적 역할이나 사명보다 이윤 및 상업성을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박 정권은 양심적인 기자를 탄압하는 강경책과 돈만 버는 언론사엔 특혜를 해 주는 이른바 '당근과 채찍' 작전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 정책은 1980년대 5공 ~ 노태우 정권 시기 들어서 더욱 심화됐는데, 언론사가 재벌화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4.5. 방송

1969년 KBS, TBC, MBC 3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했다. TV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의 지위를 추월한 것도 이 시기였다. 흑백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는데, 1960년대만 해도 극소수에 불과한 TV 수상기의 보급은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1967~68년 당시 10만 대밖에 안 된 TV는 1972년 100만 대, 1975년 200만 대, 1978년 400만 대, 1980년 660만 대로 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TV의 광속보급은 전자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경제정책과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대중의 여가생활 및 오락에 대한 요구가 결합됐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풍미한 흑백 TV는 국민들의 관심과 여가를 묶어 놓은 오락매체로서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중문화의 총아가 됐다.

TV는 대중들 입장에선 신문이나 대한뉴스 류의 뉴스영화보다 빠른 정보전달 매체이자 사회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오락매체로서 사회/문화생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으로는 대중조작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정부나 자본이 방송매체를 장악하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해를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1970년대 방송매체는 후자가 더 강해 정부의 정책 홍보수단이자 기업들의 선전장이 됐다.

정부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방송도 더 엄격히 통제와 규제를 가했는데, 방송은 방송법과 전파관리법, 공연법 등 법적인 통제를 받았으나 인사관리 및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문공부 지침, 기관원 상주 등과 같은 직접적 규제가 강했다. 정부는 KBS-TV의 <총리와의 대화>나 <정부와의 대화> 같은 정책홍보 프로그램이나 '목적극'이라 하는 반공/경제성장 드라마 등을 만들도록 하여 시청자들에게 반공/반북의식과 성장제일주의를 세뇌시키도록 했다. 이 시기를 빛낸 반공드라마로는 KBS-TV의 <실화극장>과 <조총련>, <전우>, TBC-TV의 <추적>, MBC-TV의 <113 수사본부> 등이 있고, 관변 드라마로는 KBS의 <꽃피는 팔도강산>이 있다.

또 1976년 4월 문공부가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극'을 편성토록 했고, 1978년 '프로그램지침'을 통해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극'을 새마을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도록 했다. 대표적인 민족사관 정립극으론 TBC의 <풍운백년>과 MBC의 <예성강>, <사미인곡> 등이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정부 논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야 했던 뉴스와 툭하면 저질 시비에 시달리던 코미디에 비해 그나마 자유로운 창작이 허용되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최고의 텔레비전 컨텐츠였다.[44] 1970년 TBC 일일연속극 아씨가 대히트하면서 각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연속극을 편성했고 하루에 방송사당 4~5편의 드라마가 편성되기도 했다. <아빠>와 <갈대>, <안녕>, <여로> 등 멜로드라마도 양산됐다.

70년대에는 탤런트 전속제가 매우 강하게 적용되었으며, 1970년대 초까지 TV 드라마의 주축이던 연극/영화배우들은 장민호, 정민, 강계식, 주선태, 정애란, 한은진, 김희갑, 지계순 등 일부를 제외하고 본업으로 돌아갔고, 1972년에는 한국영화인협회가 최무룡, 신성일, 황해, 허장강, 고은아, 윤정희 등 톱스타급 13명에 대해 TV 드라마 출연을 금지한 바 있었다. 김자옥처럼 KBSMBC를 넘나들며 출연하는 경우나 박근형, 김영애처럼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뒤 다른 방송사로 컴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보통 한 방송사와 전속 출연 계약을 맺고 해당 방송사의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각 방송사의 간판 배우들이 연달아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70년대 충무로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는 모두 TBC 동양방송 전속 탤런트로서 TBC-TV의 연속극 여자 주인공을 번갈아가며 맡았고, 심지어 같은 시간대 드라마 주인공을 2작품 연속 맡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당시 MBC 전속 탤런트였던 최불암김혜자는 70년대에 이미 십 여편의 드라마에서 부부 역할로 출연하였으며,[45] 심지어 어린이 드라마도 같은 아역배우들이 주연과 조연을 번갈아가며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한편 1973년 12월 에너지 절약 명분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고,[46] 1976년 4월에는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47]과 외래어 사용 금지 지침[48]이 각 방송사에 내려졌다. 이때 종합뉴스 시간대가 밤 9시로 정해지면서 뉴스는 9시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49]

방송사들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음에도 기본적으로는 철저히 상업성의 논리를 따랐는데, 이는 광고 때문이다. 광고료는 방송사의 주 수입원이라 이들은 한결같이 높은 광고수입을 보장받는 시청률 경쟁과 대중의 감각적 요구,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는 프로그램의 양산에 매달렸다. 교양프로는 새마을 운동이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등의 계몽적인 목적 외엔 맘대로 만들 수 없었고, 사회 고발프로나 토론, 질 좋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아예 꿈도 못 꿨다. 그렇다 보니 코미디, 쇼, 일일연속극, 가요프로 등 오락프로가 전부였다.

코미디에서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이기동 등 1세대 코미디언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극후반이긴 하지만 이주일도 이 연대에 처음 TV에 등장했다. 또 TBC 쇼쇼쇼 1대 MC 곽규석[50]의 후임으로 허참이 등장하고 KBS의 김동건, TBC의 황인용, MBC의 변웅전, 차인태 등 명아나운서들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선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최고의 전성시대다. 특히 토요일 밤 8시 일본 TBS에서 방송한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ヨ!全員集合)"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일본 예능 역대 최고 시청률 50.5%를 기록하며 "괴물 프로그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 전국을 장악했던 시대이기도 하며 이것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도리후. 당시 오사카요시모토 흥업은 쪽도 못썼다

서쪽의 섬나라 영국에선 몬티 파이선이 시대를 초월한 병맛개그를 시전하고 있었다.
한편, 1970년대는 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컬러 TV의 대중화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세계 최초로[51] 컬러TV방송을 개시한 미국이나 1960년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한 일본 등도 전면 컬러화는 각각 1972년, 1971년에야 달성했다.# 우리나라도 60년대 말(TV방송 초기)부터 컬러 TV방송을 추진했고 70년대 중후반부터는 프로그램 제작을 컬러용으로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신문사들의 반대로 실제 시판과 컬러 송출은 1980년으로 넘어간다.

4.6. 만화, 애니메이션

한국 만화계는 도서윤리위에 의한 사전심의제 확립과 1972년 정병섭군 자살 사건, 합동출판사의 독과점 등으로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소재 범위가 제한되어 일상 및 해학 위주의 명랑만화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어린이들의 접근경로도 만화방 중심에서 아동잡지 쪽으로 점차 이행되어갔다. 성인만화 역시 고우영, 강철수 등이 스포츠신문과 주간잡지 등지에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반짝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은 1970년대 초반 침체기를 겪다가 해외 애니 하청제작에 하나 둘 뛰어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1976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로 최초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똘이장군> 등이 히트하면서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 애니업계에선 1970년대 초반 들어 애니 제작인력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1972년 토에이 동화 지명해고 및 파업과 1973년 무시 프로덕션 파산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공투 등 사회주의 운동의 약화로 아웃사이더 트렌드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972년 마징가 Z의 히트로 슈퍼로봇물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세로 자리잡았고, 토에이 동화도 해외판매 및 하청제작 발주를 받아들이기 시작해 일본 애니계의 큰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만화가 요시다 타츠오가 이끈 타츠노코 프로덕션도 1970년 <해치의 모험>, 1972년 <독수리 오형제>, 1977년 <얏타맨>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녀물 쪽에선 <인어공주 나나(1970)>, <에이스를 노려라(1973)>, <큐티 하니(1973)>, <유리가면(1975)>, <캔디 캔디(1976)>, <베르사이유의 장미(1979)> 등이 인기를 끌었고,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플란다스의 개>,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 등 명작동화 애니메이션도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대표한 감독으로는 나가이 고, 데자키 오사무, 나가하마 다다오, 린타로 등이 있다.

한편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가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기동전사 건담>으로 대표되는 제2차 아니메 붐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마츠모토 레이지토미노 요시유키가 마니아들에게 우상으로 등극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1978년 도쿠마 쇼텐이 일본 최초 애니전문지 <아니메쥬>를 창간했다.

4.7. 패션

1970년대에서는 펑크 록의 흥행으로 펑크 룩이 대서였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에는 모히칸 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다.

4.8. 스포츠

1970년대 당시 한국 스포츠는 아직 영향력이 없었으나, 스포츠 자체가 지닌 국민의 일체감과 단결력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 덕에 정권 차원에서 관심을 쏟았고, 이는 1980년대 들어 스포츠 강국으로 나아갈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인기를 끈 종목은 축구권투, 레슬링이었는데, 그 중 축구는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국민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 국민 스포츠 지위에 올랐고, 아시아에서도 킹스컵 총 6회 우승(B팀 포함), 메르데카컵 총 6회 우승으로 각각 이름을 날렸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 이르기까지 본선 진출을 매번 시도했으나 호주, 이란 등지에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고, 1972년 박스컵 준결승 때 버마에게 0-1로 지기도 했으나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이건 축구가 다른 종목에 비해 비교적 나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미 말했듯 정권의 전폭적 지원도 같이 작용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박대통령배 쟁탈 국제축구대회'를 매년 열어 국민들의 관심과 열기를 모아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다.

또 다른 인기스포츠인 권투에선 홍수환 선수가 1974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아널드 테일러를 꺾어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제패를 달성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유행어를 전 국민에게 남겼고, 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개최된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를 4전 5기로 꺾어 또 신화창조를 했다. 그 외에 염동균, 유제두, 박찬희, 김태식, 김성준, 김환진 등 스타들이 배출되어 한국 권투의 황금기가 열렸고, 이 시기 동안 권투는 '헝그리 정신'의 표상임과 동시에 '진짜 남자의 스포츠'로 거듭났다.

메이저 국제 대회에선 1972 뮌헨 올림픽 때 북한에 밀려 부진했으나,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선 종합 4위로 북한을 앞서 자존심을 지킨 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에서 처음으로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대한민국에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줘서 하이라이트를 이룩했고, 이 때에 들어서 한국 스포츠가 성장기를 거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 게임)를 1970년에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의 위협 문제와 경제문제 등으로 반납하게 되었고,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아시아 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외에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애리사와 정현숙 등이 이끄는 대표팀이 우승을 하여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았고, 1979년 서독 서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선수가 개인종합 1위를 하고 전영 배드민턴 오픈대회에서도 황선애 선수가 우승해 국민 영웅이 됐다. 산악계에선 1977년 고상돈이 이끄는 한국등반대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전국민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위와 같은 국위선양 활동과 더불어 프로레슬링도 한 시대를 풍미했는데, '박치기왕' 김일천규덕의 당수, 여건부의 알밤 까기 등 현란한 기술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TV 앞으로 모여들어 환호성을 지르게 만들었고, 특히 일본 선수와 대결할 때는 과거 일제 강점기 때 치욕을 갚아줬다는 대리만족을 선사케 했다. 특히 김일과 천규덕은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거듭났다.

야구 중에선 고교야구가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은 출신교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동문 및 그 가족들의 헌신에 힘입은 것이다. 이 시기를 풍미했던 대회로는 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배-봉황대기 4대 대회가 있고, 고교 야구부는 전통의 명문 경북고와 경남고, 부산고, 부산상고, 대구상고, 중앙고, 그리고 신흥강호 신일고도 있었다. 이보다 더 특기할 만한 건 광주일고, 군산상고 등 호남 학교들의 활약인데, 특히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 때 이변을 일으켜 '역전의 명수'라는 호칭을 얻었고, 이 순간은 1977년작 정인엽 감독의 영화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에서 다뤄졌다.

4.9. 게임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비롯한 1세대 게임기들인 , 테레비 테니스, 아타리 비디오 핀볼 (일본에 수입되어 로컬라이징된 타이틀은 에포크 TV 블록), 컬러 TV 게임등이 출시되었다. 이 시기는 이른바 게임계의 석기시대. 이때를 보통 게임 산업의 태동기로 본다.

한국에서 전자오락실이 처음 생긴 것이 1974년이고, 1976년 아타리의 브레이크아웃이 인기를 얻어 시내 중심부에만 있던 전자오락실이 점차 변두리로 확산되고, 1978~1979년,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일본 뿐만이 아니라, 한국, 미국,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된다.

1970년대에 등장한 게임으로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 경우 ▼.

6. 이 시대에 시작되거나 만들어진 것들

7.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8. 참고/관련 문헌



[1] 실제로 유튜브나 록 음악 커뮤니티를 보면 1970년대를 그리워하는 여러 록 음악 팬들의 댓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2]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3]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테런스 맬릭[4] 자세한 실상은 현재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예컨대 북한이 2023년까지 남한을 자국 영토로 보기 때문에 남북관계와 무관하게 외교와 관련된 자리에 한국 정부와 관련된 것을 배제하고, 이 영향을 받아서 탈북민이 민족주의적 정서가 겹쳐 유독 한국인으로 인정받기 원하는 건 언론에서도 북한 전문가들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의 대외적인 정책과 달리 북한 주민의 가치관 같은 일상생활은 전문가도 잘 모르고 스스로 놀라기도 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의 사투리 등의 전통문화 같은 것은 저 세대가 더 정확하게 안다. 시장이나 정치권 등에서 북한 쪽 사투리를 쓰고 그곳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도 프로야구에서 김동엽 감독처럼 걸쭉한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우까지 있었다.[5] 1960년대 중반생부터는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그렇게 쉽게 평가하지 못하게 됐고, 1970년대생들은 명백한 외환위기 이후 세대다.[6] 집권 시기는 1945년부터였으나 오늘날과 같은 북한 체제를 만든 것은 1967년 도서정리사업 이후이므로 김일성도 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7] 이하 넷은 히틀러, 스탈린보다 더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8] 독재의 잔혹성보다는 사치와 부정부패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으로 더 악명이 높다.[9] 차우셰스쿠는 이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있어도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낮은 대인 관계 능력으로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만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막장 독재자라는 인식은 없었으나 80년대 들어 극심한 에너지 절약정책, 배급제 시행 등의 긴축 정책으로 우상화+도청과 더불어 인민들을 미친듯이 쥐어짜며 선술한 독재자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부터도 답이 없는 독재자인 것은 사실이었고 당장 악명높은 인구정책은 집권 직후인 1960년대에 시행했다.[10] 프리덤 하우스는 1980년 세계의 자유 연감에서 1979년 축출된 폴 포트, 이디 아민, 응게마, 보카사에 대해 "이들 정부의 행동은 나치의 잔혹 행위가 가장 극심했던 시절의 독일동유럽 정부의 행동과 비슷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더 나빴습니다.(The actions of these governments approximated and in some cases surpassed those in Germany and Eastern Europe in the worst years of Nazi brutality— although their focus was not as explicitly on a particular group)"고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나치마저 이들 넷 중 가장 극악무도했던 응게마처럼 나라 인구의 50~75%(!!!)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힌 적은 없었으며, 심지어 응게마는 이 대기록을 그 어떠한 전란도 없는 순수 폭정만으로 기록했다. 물론 나치는 인종 절멸 비율에서 응게마 이상의 비율로 절멸할 것을 계획하긴 했지만 그 계획을 완전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11] 사실 이쪽은 의외로 당대 독재자치고는 반대파를 적게 죽인 편이었다. 그 대신 통치의 억압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독재자들 못지않았지만.[12] 오히려 70년대 독재자들과 비슷한 자는 전두환이다. 어엿한 중진국에 진입한 나라에서 유아, 임산부 가리지 않고 자국민 수백 명을 학살하며 집권한 것과 동시에 고국이 세계적 주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으며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다 편하게 죽었으니까.[13] 이쪽도 박정희와 비슷하게 억압성 위주의 독재를 펼치며 사람을 적게 죽인 편이다. 물론 1973년 대학생 시위에 발포해 40~83명을 학살하면서 무의미한 따짐이 되어버렸지만.[14] 사실 이쪽은 독재 자체보다는 개막장 그 자체였던 사생활 때문에 더 지탄받는 경향이 크다.[15] 잔혹성과 인권 탄압, 악행의 규모는 초반에 언급한 독재자들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지만, 나라 전체를 말 그대로 박살낸 저들과는 정반대로 악행와 대등한 수준의 큰 업적들도 많기에 박정희와 비슷하게 사망한 지 오래 지난 현재는 자국에서도 호불호가 매우 심하게 갈리는 편이다. 특히 호자는 박정희와 비슷하게 조사에 따라서는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보다 더 많을 정도.[16] 바로 뒤 시대인 1980년대를 대표하는 독재자로 꼽히는 사담 후세인,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냉전 이후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들인 로버트 무가베, 오마르 알바시르, 바샤르 알아사드 역시 객관적으로는 매우 잔혹한 독재자로 꼽히나, 선술한 이들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참고로 이들은 현대의 북한에 비해 약간 나은 수준일 정도로 극도로 억압적인 통치를 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데, 1970년대에는 이들보다도 한 술 더 뜬 이들이 세계적으로 난립했다는 것이다. 김정일김정은은 김일성이 물려준 토대 위에서 독재를 하는 것인지라 논외.[17] 이 시기 중 비델라가 집권한 1976년 3월 29일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 9월 9일까지 약 5개월 동안은 전술한 독재자들이 모두(물론 프랑코,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제외) 현역 독재자로써 집권한 초유의 시기였다. 멩기스투의 경우 1977년까지는 공식적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뒤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처형을 지시하는 등 실질적으로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며, 프랑수아 뒤발리에도 본인은 죽었어도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여 독재 체제는 기존과 비슷하게 지속되었다.[18] 1970년대 초반에야 자동차 1대 가격이 그야말로 억소리 날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소수의 부유층들이나 가졌던 사치품이었고, 현대 포니의 등장으로 자동차의 국산화가 진행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시기까지는 승용차의 가격이 일반인들이 아예 부담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승용차를 보유하면 세금 부담이 컸던 데다가 오일쇼크로 기름값이 고공행진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유지비용이 비쌌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를 가졌으면 잘 사는 사람인것은 여전했다.[19] 부산 지하철이 처음 개통한 것이 1985년이다.[20] 다만 이는 당시 에어컨의 연료 효율이 끔찍한 수준이라 전기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의 영향도 크다.[21] 심지어 엘리베이터가 대중화가 되고 있던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파트에 홀수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사례가 있었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층을 운행하지 않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들이 많았다.[22] 한국 같은 경우 비상구의 픽토그램 시범 도입은 1980년대 중반~후반, 비상구의 픽토그램 완전 도입은 1992년이다.[23] 세계은행 통계 기준[24] 세계 평균의 절반을 처음 넘긴 것도 1976년이었다.[25] 모모는 엉뚱해의 배경 연도다.[26] 2024년 환율로 3524달러[27] 2024년 환율로 27256달러[28] 2024년 환율로 8407달러[29] 안녕 자두야의 배경 연도다.[30] 2024년 환율로 7582달러[31] 2024년 환율로 38692달러[32] 2024년 환율로 9788달러[33] 일본은 이미 1960년부터 컬러 방송을 시작했지만 컬러 TV가 지독하게 비쌌고 볼 수 있는 컬러 방송도 얼마 되지 않았던 만큼 60년대 중반까지 컬러 TV 보급률이 0%대에 불과했는데, 1967년을 기점으로 컬러 TV가 대폭 늘어나 1973년 컬러 TV 수가 흑백 TV 수를 넘겼다.[34] 1970년 전 세계 국가 중에서는 5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보잉 747 여객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35] 맥도날드가 일본에 진출한 것이 1971년이며, 그로부터 1년 전(1970년)에 KFC, 던킨도너츠도 진출했다. 1973년에는 피자헛도 진출했다.[36] 롯데리아는 한국에는 1979년 진출했다.[37]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 샤넬은 코스메틱 매장만 있었고, 루이비통은 극소수 호텔 아케이드에만 진출해 있었으며, 에르메스는 아예 진출하지도 않았다.[38] 반면 한국은 1973년 서울어린이대공원 준공식을 열 때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을 정도로 놀이공원 인프라가 빈약했다.[39] 현재까지도 한국은 10만원권을 발행하지 않는다.[40] 더 상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 링크들을 참고하면 된다. 한국 다른 자료 VS 일본 다른 자료)[41] 공교롭게도 이 세 그룹은 각 그룹의 핵심멤버가 요절했는데, 카펜터스의 경우 여동생이자 메인보컬인 캐런 카펜터가 1983년 거식증의 후유증으로 요절했고, 잭슨5의 경우 메인보컬이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마이클 잭슨이 2009년 프로포폴 투약사고로 숨졌다. 비 지스의 경우 메인보컬이자 맏형인 배리 깁은 살아있지만, 나머지 쌍둥이 두 명과 솔로 활동에 주력하던 앤디 깁이 모두 요절했다.[42] PEACH-PIT의 소녀만화 <캐릭캐릭 체인지>에 나오는 아무의 수호캐릭터 3명이 해당 아이돌을 모티브로 했다.[43] 마츠토야 유미는 1976년 11월 29일에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결혼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바꾼 이름으로 1972년 데뷔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본명인 아라이 유미로 활동했다.[44] 물론 드라마도 당국에서 "사회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규정할 경우(...) 조기종영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1978년 MBC 주말연속극 청춘의 덫이 불륜을 소재로 다뤘다는 이유로 조기종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99년에 리메이크된다.[45] 두 사람의 부부연기 대표작인 전원일기는 1980년에 시작했다.[46] 아침방송은 1981년 5월에야 부활한다.[47] 6시대 어린이 프로그램, 7시대 뉴스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8시대 가족 대상 프로그램, 9시대 뉴스와 드라마 등.[48] 특히 민영의 탈을 쓴 국영방송 MBC가 이 지침을 철저히 지켜서 뉴스데스크는 뉴스의 현장으로, 그랜드쇼는 토요일토요일밤에로 제목을 변경했고, 가수들의 이름도 바니걸즈가 토끼소녀로, 어니언즈가 양파들로 바뀌었다.[49] 1991년 신규 개국한 SBS가 종합뉴스를 8시에 편성하면서 9시=종합뉴스 공식이 처음 깨졌지만 실질적으로 이 공식이 힘을 잃은 건 2012년 MBC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이동과 이후 JTBC 뉴스룸의 영향이 컸다.[50] 후라이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세대 코미디언.[51] CBS- 1950년[52] 정확히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검정 고무신이 컨셉이나 그림체를 따다 왔으나, 두 나라의 경제적 차이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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