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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7:16:03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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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rowcolor=black,white> 야오원위안
姚文元

(1931 ~ 2005)
왕훙원
王洪文

(1935 ~ 1992)
장춘차오
张春桥

(1917 ~ 2005)
장칭
江青

(1914 ~ 1991)


1. 개요2. 준동3. 종말4. 평가5. 여담

1. 개요

파일:attachment/4인방/Gang of Four.gif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순이다.
4인방(四人帮 / Gang of Four).

4인방은 중국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주위를 맴돌며 권력을 장악한 네 사람을 가리킨다. 각각 마오의 부인이자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칭(江青)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였던 장춘차오(张春桥), 문예비평가 겸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을 가리킨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선전부서와 언론을 장악해서 홍위병을 선동하고, 대장정 시대부터 이어져온 당주류들을 공격하였다.

방(幇)이라는 글자는 중국어에서 깡패 또는 패거리라는 뜻인데, 파생되어 암흑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상하이의 청방(靑帮)과 홍방(紅帮)이다. 한국으로 치면 조직폭력배 XX의 느낌도 있는 단어로, 중국어에서도 원래 정치인급에 쓰던 말은 아니다. 하지만 후일 상하이방 등에서 쓰이게 된다.

2. 준동

대약진 운동 중인 1959년 4월 27일, 마오쩌둥은 실권 없이 할 일만 많은 국가 주석직을 사임한다. 같은날 국가 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이후 대약진운동을 비판하였고, 마오쩌둥류사오치중국공산당 내부의 흐루쇼프로 여겨 타도하고자 했다. 이때 이를 옆에서 부추긴 것이 장칭이었다.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선동하여 펑전, 우한 등을 숙청한 장칭은 천보다를 소조장으로 하는 중앙문화혁명소조가 결성되자 부소장이 되었고 여기에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을 끌어들여 홍위병들의 폭동을 사주하여 중국 전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두목 역할은 마오의 부인이었던 장칭이 맡았고, 왕훙원은 상하이에서 혁명 지지 위원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는 임무를 맡았다. 언론인이었던 장춘차오는 혁명 지도 소조의 요직을 맡아 이 폭동의 이론화 / 체계화를 담당했고, 야오원위안은 각종 논설에서 반대파에 대한 공격을 맡았다.

이들은 방송과 신문을 장악한 후, 자신의 글을 언론기관을 통해 발표하면서 전 중국을 선동했다. 가령 이들이 중국중앙방송국[1]이나 인민일보 평론을 통해서 "XX성의 성장인 AAA는 반동이며, 장제스의 숨은 추종자이다. 이자를 타도해야한다."고 주장하면, 소련처럼 공안기관이 AAA를 체포한 것이 아니라 XX성의 홍위병이 대거 일어나 관청 담벼락에 AAA를 비난하는 대자보나 표어를 붙이고, 심지어는 AAA를 기습하여 폭행했다. 그러면 4인방 일파가 장악한 중앙에서는 이러한 '홍위병의 고발'을 핑계로 AAA를 해임하고 노동개조를 보내는 형식. 이렇게 숙청대상을 꼭 집기도 했지만, 불특정 다수가 반동이라고 하면 아예 행정 기관 전체가 마비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디어디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의 모 부대는 반동의 소굴이다."라고 4인방이 지목하면 홍위병이 그 부대를 습격하여 지휘관과 병사들을 폭행하는 식. 이런 식으로 펑더화이를 비롯한 쟁쟁한 인물들까지 조리돌림당했다. 펑더화이의 경우, 사천의 자택에 있는 것을 베이징 홍위병들이 몰려가서 납치해서 베이징으로 압송해갔다.

4인방은 아니지만 4인방과 보조를 맞추며 은밀하게 배후에 있던 사람이 정보기관인 국가안보국 부장인 캉성. 이사람은 1920년대 소련유학을 갔고, 소련의 공안기관(NKVD)에서 보안을 교육받은 사람인데, 옌안 해방구 시절 스탈린식의 무리한 숙청을 일삼다가 죄없는 사람들을 다수 숙청한 것이 밝혀져서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 이후로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4인방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들을 부추키는 방법으로 정적의 숙청에 관여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장칭은 이자의 내연녀였으나[2] 장칭의 성욕이 감당이 안 되자 마오에게 장칭을 바쳤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강한 권력욕을 지닌 사람이 네 명이나 모이다 보니 가끔 스텝이 엉키거나 다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하고, 심지어는 마오가 신임하던 저우언라이린뱌오 같은 혁명 동지들조차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제거 음모를 꾸미면서 권력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등 마오 자신도 통제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쯤이면 마오 자신도 말년에 접어들어 병상에 누워있던 처지였기에.

3. 종말

결국 1976년 저우언라이 사후 벌어진 천안문 사건에서 이들은 중국 인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들도 없었다. 이에 4인방은 마오쩌둥의 뒤를 잇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근거지인 상하이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장칭과 친밀했던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을 통해 베이징의 군부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군부원로들이 예젠잉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4인방 체포를 촉구했다. 10월 4일 저녁 예젠잉이 직접 마오의 후계자로 선포된 화궈펑을 찾아가 "선발제인"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화궈펑을 독촉했다. 이날 예젠잉은 화궈펑에게 10월 6일이나 7일에 4인방을 체포하겠다고 못을 박고 떠났다. 이후 왕둥싱도 가세함에 따라 10월 6일 저녁 8시에 4인방을 체포한다는 계획이 준비되었다.

10월 6일 왕둥싱은 중앙판공청 부주임 장요사를 비롯한 휘하의 행동조를 소집했다. 8시 30분, 왕둥싱의 명령을 받은 행동조는 중난하이의 장칭의 숙소인 만자랑 301호에 돌입했다. 실크 잠옷을 입고 외국 비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던 장칭은 이들이 자신을 체포하려 들어온 줄은 모르고 허락없이 들어온 행동조에게 무슨 일이냐고 화를 냈지만 행동조는 장칭에게 어떤 경칭도 사용하지 않고 격리 심사를 통보하고 즉각 연행했다. 장요사는 장칭에게 개인 문서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는데 자존심 강한 장칭은 장요사를 노려보다가 갈색 봉투 위에 화궈펑 동지 친전이라고 쓰고 열쇠를 넣어 건네줌으로 자신이 행동조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화궈펑에게 자신의 손으로 열쇠를 넘겨준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했다. 이후 장칭은 발악하며 저항했다는 썰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7시 55분, 중난하이의 회인당에서 화궈펑과 예젠잉이 장칭을 제외한 나머지 3인방을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핑계로 호출했다. 왕둥싱도 현장에 있었으나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었으므로 병풍 뒤에 숨어 있었다. 맨 먼저 장춘차오가 서류 가방을 들고 나타나자 중앙경호대 8341부대 소속 행동조들이 그의 양 옆에 붙어섰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장춘차오는 자신의 의자가 없고 화궈펑과 예젠잉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화궈펑이 4인방을 반당, 반사회주의 혐의가 있으므로 격리 심사할 것이라는 선포문을 읽었고 경악한 장춘차오는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라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끌려나갔다.

뒤이어 들어온 왕훙원은 당시 41세의 젊은 나이였고, 행동조가 자신을 붙잡으려들자 격렬히 저항했다. 행동조에게 붙들려 화궈펑 앞에 끌려온 왕훙원은 격리 심사 선포문을 듣자마자 예젠잉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이에 왕둥싱이 소총을 들고 와서 왕훙원을 제압하려 했지만 예젠잉이 다칠까봐 쉽사리 발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체포조가 왕훙원을 결박하여 끌고 나갔다.

8시 15분에야 도착한 야오원위안은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행동조에게 포위됐다. 다급해진 야오원위안이 측근들을 소리쳐 불렀지만 회인당 바깥에서 대기하던 측근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대기실로 끌려간 야오원위안은 조금 전과 같은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경호국 부국장에게 격리 심사를 통고받고 연행되었다.

체포된 4인방은 마오쩌둥이 사망한지 28일만에 중난하이 지하실에 수감되었다. 4인방이 체포되자 예젠잉과 화궈펑은 탕산 대지진 피해 현장의 복구 작업을 맡고 있던 베이징 군구 부정치위원 지호전과 당 중앙 대외연락부장 경표를 불러 4인방 체포를 알리고 야오원위안의 입김이 강하던 중앙 전시대, 인민일보 등의 언론 기관을 점거했다. 10시 30분, 예젠잉은 자신의 별장인 옥천산 9호관에 정치국원들을 불러모아 긴급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고 11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예젠잉은 4인방 체포를 알렸고 이에 리셴녠 등 정치국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회의는 다음날인 7일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정치국 회의는 화궈펑을 당군 최고 지도자로 추대, 11기 3중전회에서 추인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12일 4인방 체포가 서방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에 4인방의 근거지인 상하이에서는 4인방 석방을 요구하는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10월 18일 상하이의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체포되면서 4인방의 무력기반도 붕괴되었다. 온 중국인들의 증오를 받던 4인방의 몰락에 인민들은 환호했으며, 수산시장에선 민물게를 팔 때 암컷 한마리와 수컷 세마리를 묶어서 파는 식으로 4인방의 몰락을 조롱하였다.

1981년에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장칭은 게거품을 물며 재판관들과 덩샤오핑을 저주했지만 나머지 3인방은 즉각 태도를 돌변하여 이게 다 장칭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 장칭에게 덩달아 욕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집행유예로 원래는 사형이지만, 2년간 별일없이 복무하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는 형을 받았고, 왕훙원은 종신형을, 야오원위안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 후 2년 뒤에 장칭은 종신형으로 형량이 조정되었지만, 1991년에 지병인 식도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옮겨진 뒤 목을 매 자살했다. 왕훙원은 1992년에 감옥에서 복역 중 병사했고,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각각 1996년과 1998년에 가석방됐는데 둘 다 2005년에 병사했다.

4. 평가

이들 4인방이 원체 해먹은 게 많은지라 중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쿨타임 없이 까이지만, 다른 주동자들에 비해 이들의 악함을 너무 과하게 부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걸 빼더라도 까일 수 밖에 없다. 마오도 제지하려고 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이 시기쯤되면 마오도 늙어 병석에 앉아있을 시기가 되었기에 4인방의 행동을 하나하나 제지하기가 힘들었다고 보면 된다. 마오쩌둥은 1970년 이후로는 루게릭병과 비슷한 증세를 보여 거동이 극히 제한되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의 방중 때도 건강이 나빠서 직접 회동하지 못하고 저우언라이가 모든 의전을 담당했을 정도.

문화대혁명과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도리어 마오쩌둥은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낮아졌고, 그 덕분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던 화궈펑도 덩달아 영향력이 약해졌다. 원래 까였던 덩샤오핑의 경제정책들은 오히려 지지도가 높아졌기도 했고, 사실상 중국 정치권에 만연하던 마오이즘의 끝을 찍어준 인물들. 물론 반대로 이들이 문혁에 대한 비판을 모조리 감당하면서 마오쩌둥 신격화가 더 공고해진 면도 있다.

이들이 숙청된 뒤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축출할 때 마오 신봉자였던 화궈펑의 측근 네 명을 같이 쫓아냈는데, 이들도 소(小) 4인방이라며 잠시 까였다. 하지만 원조의 치적이 워낙 막강한 지라 이내 잊혀졌다.

그리고 재미있는 게 장칭이 재판에서 한 발언인데, 자기가 여자로서 마오쩌둥을 따라다니며 대장정을 완료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깔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문제는 당시 재판장에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수많은 원로들이 넘쳐났다는 것. 이것은 곧 대장정, 국공내전, 중일전쟁 동안에 전선에서 구른 베테랑들을 안전한 후방에서 노가리 까고 있던 자신보다 못한걸로 치부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정작 장칭은 대장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3] 하지만 평소 장칭의 성격을 보면 그런 말 하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이긴 하다.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은 국민당계 군벌 성스차이의 정치고문으로 있다가 그의 배신으로 1943년 처형되는데, 마오쩌둥은 마오쩌민의 자식들인 조카 마오위안신(1941년생)을 아들처럼 아끼고 길렀다. 자신의 아들인 마오안잉이 전사하고 마오안칭이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아마 똑똑한 조카를 아들처럼 아꼈던 듯. 그리하여 마오위안신은 명문 칭화대학에 진학해서 인민해방군의 기술장교로 일했다.

하지만 마오위안신은 마오쩌둥의 측근으로 주변에서 멤돌면서 4인방과 발을 맞추면서 문화대혁명 및 국정농단을 거들었다. 4인방이 몰락한 후 마오위안신도 체포되었다. 마오위안신의 행각도 4인방의 패악질에 못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17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큰아버지가 마오쩌둥이라는 국부였지만, 워낙 죄질이 나빴기 때문에 조기출소하지 못하고 형기를 꽉 채우고 1993년 출소했다. 출소한 후 다 이름을 리스(李實)이라고 바꾸고 기술자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5. 여담



[1] CCTV의 전신[2] 장칭과 캉성은 동향이다.[3] 장칭은 1937년에 옌안으로 이사했는데 그 전까지는 상하이시에서 배우 활동을 했다.[4] 10.2 항명 파동을 주도했다가 모두 정치적 생명이 끊겼다.[5] 다만 바둑기사들 같은 경우에는 느낌이 좀 다르기는 하다.[6] 슈페어는 개혁파자유주의자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슈페어는 적당한 수준에서 개혁을 멈추고 독재자가 될 생각이었다.[7] 현실에서 트레슈코프는 히틀러 암살 주동자, 나머지 셋은 서독 총리이다.[8] 정작 슈페어는 마오쩌둥보다 덩샤오핑에 가깝게 그려지는 점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