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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46:18

천보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문혁소조 소조장
천보다
陳伯達(진백달) / 陈伯达 | Chen Boda
파일:천보다.jpg
본명 천셩쉰(陳聲訓, 진성훈)
출생 1904년 7월 29일
청나라 복건성 혜안현
사망 1989년 9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상우(尙友)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손중산 노동자 대학
직업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당의 사상가가 되다2.3. 1950년대의 활동2.4. 문화대혁명의 나팔수2.5. 2월 역류에서의 승리2.6. 몰락2.7. 석방과 죽음
3. 기타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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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문화대혁명 때 중앙문화혁명소조장으로 악명을 떨쳤으나[1] 숙청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4년 복건성 혜안현에서 태어났다. 원래 천성쉰이란 이름을 얻었으나 사숙에 입학하면서 스승으로부터 천젠샹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에 15세의 나이로 집미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여 17세에 귀향,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운동을 하였다. 1925년 5.30 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참가하였고 1926년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선포되자 복건성 군벌 장전의 휘하에 소속되어 국민혁명군 1군 독립4사단 사단부 비서를 맡았다. 하지만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원들에 대한 사냥이 이어지자 1927년에 상하이로 피신하여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에 소련으로 파견되어 모스크바의 손중산 노동자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감명받아 파다(巴達)이라는 필명을 지었다가 이를 좀더 중국 이름에 가까운 보다로 바꾸어 마침내 천보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 상하이로 귀국하여 공산당 활동을 벌이다가 1931년 톈진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하지만 1931년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가 1932년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1935년 베이핑에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12.9 운동에 동참했다. 1937년 8월, 당의 지시로 옌안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복건성 사투리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대중사업에 나서진 않고 선전, 이론사업에 참여했다.

2.2. 당의 사상가가 되다

옌안으로 옮겨온 이후 산베이 공학 및 중앙당교 교원을 맡았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 부원장에 임명되어 중국 고대철학사를 강의하였다. 1938년 쑨원의 사상에 대한 토론회에 참여하였다가 마오쩌둥의 주목을 받게 되어 식사 초청을 받고 마오쩌둥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신철학회에서 행해지는 천보다의 고대철학 강의를 매번 들으러 오며 천보다와 철학에 관한 토론을 나누었고 마오쩌둥은 천보다의 저작들을 청하여 그 중에서 <묵자철학사상>과 <공자의 철학사상>에 대한 논평문을 발표, 1939년 천보다를 중앙군사위원회 부비서장에 임명, 1958년까지 자신의 정치비서 겸 대필작가로 삼았다. 이때 마오쩌둥은 천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사상은 오래된 골동품 위에 줄곧 머물려 하지 말고 현실의 문제를 연구하는 데 힘을 기울이시오."

이에 천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을 강조, 마오이즘의 이론화 작업을 맡았다.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주도하여 마오쩌둥의 독재권력을 공고화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중일전쟁 이후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이론의 토대를 제공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1945년 발표된 <연합정부론>이었다. 또한 1946년 <중국4대가족>, <인민 공적 장제스>, <중국의 명운을 논함> 3부작을 발표하여 국민정부를 비판하였으며 마오쩌둥은 이를 다듬어 1947년 <당면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발표하였다. 이후 리리싼, 리웨이한과 함께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 초안 작성을 맡았고 <마오쩌둥 선집> 발간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1945년 중국 공산당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9년 3월, 7기 2중전회에서 중앙위원에 보선되었다. 1956년 9월, 8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중국 공산당 중앙 선전부 부부장, 중국과학원 부원장, <홍기> 총편집인 등을 역임하며 '노선생님'으로 지칭되었다.

2.3. 1950년대의 활동

1950년 마오쩌둥 선집 발간사업을 시작한 이후 1951년 <마오쩌둥 사상을 논함>을 발표했으며 농업합작화에 관한 3가지 결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소련의 경제개발 노선을 탈피하여 '중국적 길'을 논하는 마오쩌둥의 1956년 4월 정치국 확대회의에서의 강연 <10대 관계를 논한다>를 주도적으로 정리했다. 1956년 4월 5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니키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비난했고 또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팔미로 톨리아티 등도 공격했다. 그리고 <농업생산호조합작의 결의>, <인민공사 60조>, <국제공산주의운동 25조>, <사회주의 교육운동 23조>의 초안을 맡았다.

1957년 1월 마오쩌둥에게 간부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 1957년 2월 마오쩌둥의 <인민 내부 모순의 정확한 처리 문제에 관하여>를 정리하여 논문 형태로 만들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백화제방운동이 벌어졌으나 이는 곧 반우파투쟁으로 번졌다. 천보다는 이에 대해 덩샤오핑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 8차 당대회 문건을 발표하여 중국 사회의 모순은 선진 사회제도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라고 주장했으나 마오쩌둥은 1957년 9월 10일, 중국 공산당 8기 3중전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모순, 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의 모순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이라고 발언하면서 천보다의 사상을 비판했다.

1958년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자 공산주의의 새벽이 밝았다며 대환영했고 1960년 대약진 운동이 수천만명의 죽음으로 끝난 대참사라는 것이 밝혀지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서 마오쩌둥을 옹호했다.

2.4. 문화대혁명의 나팔수

1965년 해서파관 사건으로 베이징 시장 펑전이 주도하던 문화혁명 오인소조가 해체되고 1966년 5월 16일 중앙문화혁명소조가 결성되자 천보다는 소조장이 되어 문혁소조를 이끌게 되었다. 천보다의 회고에 따르면, 천보다는 자신은 서생이므로 이런 막중한 책무를 맡을 수 없다고 거절의 의사를 밝혔으나 마오쩌둥이 서생 두 글자는 떼면 그만이라고 강권하여 맡게 되었다고 한다. 1966년 6월 1일 천보다는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고 선포, 공산당 내부의 주자파, 부르주아 전문가, 학술계 권위자들, 신망있는 대가들을 사냥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류사오치왕광메이와 날을 세워 왕광메이가 우경세력이라고 비난했던 칭화대학의 학생 콰이다푸를 지지하며 7월 23일 장칭과 함께 그를 만나 "학생들에게 배우라는 주석의 명령으로 왔다."고 베이징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홍위병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의 시작으로 중국 전역이 피바다로 변하자 이를 적극지지했으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승진한다. 8월 16일에 홍위병들의 베이징 방문에 대해 '세찬 바람과 폭우에 맞서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도'에 잘 왔다고 칭찬, 1200만명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올라오도록 부추겼다. 여기에 반달리즘에도 힘을 실어 산동성 곡부의 공자묘를 파괴하려는 산동성 홍위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베이징 홍위병 200명을 파견하여 돕게 했고 공림을 어떻게 파괴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이렇게 반달리즘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자신은 홍위병들이 약탈한 고서적과 예술품을 빼돌려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던 중 홍위병 내부의 혈통주의를 신봉하는 보황파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1966년 10월 3일 <홍기> 논평을 통해 조반파를 지지했고 이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통해서 보황파에 맞서는 조반파 홍위병들의 궐기를 촉구하여 가뜩이나 개판이었던 중국은 조반파와 보황파의 파벌 싸움으로 거의 내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군부의 불만이 위험수치까지 치솟아오르고 천보다와 캉성의 알력이 시작되자 장춘차오의 상하이 코뮌 선포 등 제멋대로인 문혁소조 때문에 화가 난 마오쩌둥이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2월 10일, 천보다를 불러서 크게 질책하기도 했다.
"너, 천보다 말이야! 과거에 류사오치와 나에 관한 한 너는 언제나 기회주의자였어. 내가 너를 오랫동안 알았다만 너는 너하고 개인적으로 관련이 된 일이 아니면 결코 나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당황한 천보다는 자아비판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마오쩌둥은 묵살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장칭에게 야심만 크지 실력이 그에 못미친다고 혼을 냈으며 자신에게 여전히 보고를 잘 하는 것은 저우언라이밖에 없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2.5. 2월 역류에서의 승리

마침내 마오쩌둥은 1967년 2월 10일 회의를 소집하여 천보다를 기회주의자로 질타했다. 2월 11일 예젠잉이 "당신은 정부와 당과 공장과 농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할 줄 모른다! 군대까지 엉망으로 만들 작정인 것이다!"라고 천보다를 비난했고 쉬샹첸도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콰이다푸같은 자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인가?"라고 천보다를 몰아붙혔다. 2월 16일의 회의에서 장춘차오가 자신들은 군중과 논의해서 일을 해결했다며 천보다를 옹호하려 하자 당의 원로이며 부총리인 탄전린도 소리를 질렀다.
"말끝마다 대중, 대중 하는데 도대체 대중이 무엇인가?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부는 여전히 당이다! 당신은 당의 지도력을 무시한 채 하루종일 대중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교육하고,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떠들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인가? 하나같이 추상적인 공론에 불과하다. 당신은 나이 든 간부들을 숙청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들이 단 한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려 하고 있다."

천이도 천보다를 맹비난했고 심지어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살아있을 적에는 스탈린에게 충성스러웠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월 19일 마오쩌둥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 문혁소조의 실수는 그들이 한 일의 2~3%를 넘지 않는다고 옹호하면서 초강경발언을 쏟아냈다.
"여러분은 장칭과 천보다가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천이를 중앙문화혁명소조 대표에 임명하라! 천보다와 장칭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캉성을 유배시켜라! 나 역시 물러날 것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지원으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붕괴되고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까지 문혁소조에 복종하였고 천보다와 장칭의 권력은 마오쩌둥을 제외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2.6. 몰락

하지만 무소불위에 가깝던 천보다의 권력에도 몰락이 찾아오고 있었다. 1970년 8월 말의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린뱌오, 리쭤펑, 우파셴 등의 린뱌오 계열 군부가 국가주석직의 존속을 주장하였다. 이에 장춘차오와 캉성은 반대했다. 1969년 4월 28일의 9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던 천보다는 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회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선포되자 경쟁자인 캉성을 견제하기 위해 린뱌오와 동맹을 맺고 <천재론>을 발표, 린뱌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갑자기 확대회의를 개최, 천보다는 가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적의 스파이 노릇을 해왔다고 공격, 천재론에 대한 논쟁을 중단시키고 린뱌오의 부하들에게 자아비판을 하도록 명령했다. 린뱌오도 몰락했고 천보다는 '반역자, 스파이, 출세주의자'로 낙인찍혀 가택연금을 당했다. 한때 국가서열 4위까지 올라갔던 천보다는 지도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1970년 10월 1일 국경절에서 천보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전 세계에 천보다가 숙청당했음이 알려졌다. 1970년 11월 6일 중앙문혁소조를 대체하기 위한 중앙조직선전조가 결성되면서 천보다는 야오원위안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파일:재판진백달.jpg
재판정에 선 천보다

1971년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마오쩌둥을 제거하기 위한 571 공정을 가동하다가 들켜서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던 중 일가와 함께 몰살당하는 9.13 사건이 발생하자 천보다는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 1973년 10차 당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당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같이 체포된 걸로 간주되어 1980년 11월의 특별법정에 회부, 1981년 1월 25일, 18년형을 선고받았다.

2.7. 석방과 죽음

그러다가 1981년 발표된 <역사결의>에서 천보다의 이름이 빠지게 되었는데 1981년 7월 5일, 천보다의 표준어 통역인 왕리가 복역 중에 역사결의를 보고 옥중에서 <수인의 언어>를 발표, 천보다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왕리의 탄원서는 처음에는 천보다에 대한 맹렬한 비난으로 시작되었다.
<역사결의>에서 천보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태도이고 영명한 것입니다. 천보다는 오랫동안 교조주의와 좌경기회주의로 마오쩌둥 동지의 만년의 좌경 오류 사상을 조장하였습니다. 문혁 첫 1년 저는 아침저녁 그와 만나고서 그의 성품이 나쁘고 극단적 개인주의인데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보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투기를 일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갇힌 이후 그는 또 3년의 문혁 동안 수많은 나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 왕리는 천보다를 변호할 만한 8가지 정황에 대해 제시하며 천보다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10년이나 형기를 채웠으니 속죄의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왕리의 탄원서 덕에 1981년 8월 가석방되어[2] 이후로 집필활동을 계속했고 1988년에 형기가 만료되어 베이징시 문사관에 소속되어 일하게 되었다.

석방 이후 장칭을 비난하며 문혁 때 자신의 활동에 대해 변호했으며 1989년 9월 20일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3. 기타

아내가 3명이었다. 동시에 아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혼을 두 번 했다. 3남 1녀를 두었다. 첫째부인이 장남 천샤오다를 낳았으나 장남은 26세에 죽었다. 마오쩌둥의 딸과 연인관계였는데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의 반대로 헤어졌고 실연의 슬픔에 기찻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4. 참고문헌


[1] 특히 공자묘 파괴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왕리도 1982년 1월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