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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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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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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李立三.jpg
중화인민공화국 노동부 부장
본명 리룽즈(李隆郅, 이융길)
한문 李立三
한국식 독음 이립삼
영문 Lǐ Lìsān
백산
능지
출생 1899년 11월 18일, 청나라 호남성 예릉현
사망 1967년 6월 22일 (향년 67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호남대학
직업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공산주의 입문2.2. 리리싼 노선2.3. 실각2.4. 최후
3. 기타4. 참고문헌5. 관련문서
5.1. 인물5.2. 사건

1. 개요

파일:이립삼.jpg
1946년의 리리싼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취추바이에 이어 리리싼 노선을 이끌며 폭동과 파업을 주도했으나 대실패로 끝났고 좌경 모험주의자로 몰려 코민테른 요원 파벨 미프에게 숙청당했다. 이후 살아남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보았으나 큰 박해를 받았다.

2. 생애

2.1. 공산주의 입문

1899년 호남성 예릉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교육을 받다가 호남중학과 호남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때 동창으로 마오쩌둥차이허썬이 있었다. 재학 시절 리리싼은 마오쩌둥의 학생운동에 대해 겁을 먹고 참여하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겁쟁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1919년 근공검학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 차이허썬과 동행하여 그와 친분을 맺고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1] 1921년 2월 파리에서 조세염, 진공백, 유백견 등과 함께 공산주의 동맹의 설립을 준비했으나 1921년 북양정부가 프랑스 유학생들의 좌경화, 친공화 경향을 우려하여 유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기존에 파견된 유학생들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리옹의 중국-프랑스 대학을 장악하기 위해 9월 20일 리용으로 파견되었다가 체포, 10월 4일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귀국 후 진공백의 소개로 천두슈를 만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차이허썬의 소개로 마오쩌둥과도 다시 친분을 맺게 된다.

리리싼은 귀국 직후 강서성의 철도 노동자 파업을 도모했고 1924년 5월 광동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925년 상하이 총공회위원장으로 5.30사건을 지도함으로 더욱 유명해졌고 이로 인하여 192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공산주의 노동조합연맹 4차 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1926년 귀국하여 3,4차 전국총공회 집행위원장이 되었고 1927년 5월 5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국공결렬의 과정에서 천두슈가 우경 기회주의자, 멘셰비키로 몰려 축출된 8.7 긴급회의에서 천두슈를 강하게 비판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이후 출범한 취추바이 체제에서 광동성위원회 서기로 임명되나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샹중파, 쑤자오정,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취추바이, 펑파이 등 23명과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 6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원 겸 신임 총서기 샹중파의 비서장이 되었고 8월에 선전부장에 임명되면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영도하는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

2.2. 리리싼 노선

이후 한동안 중국 공산당은 역량을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폭동과 파업을 섣불리 선동하는 일을 자제했으나 1928년 이오시프 스탈린니콜라이 부하린의 노선 투쟁이 격화되고 1929년 경제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 우경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우경 착오와 동요를 비판하고 예방하라고 지시했다. 1929년 5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제37호 통고>를 통해 우경에 대한 투쟁을 지시했다. 같은해 중동로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요구에 따라 소련을 옹호하면서 공산당을 좌경화로 몰고 갔다.

1930년 2월 17일 중공중앙은 <제70호 통고>를 통해 "군벌간의 전쟁은 곧 중국 내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충돌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 (...) 세계대전은 바야흐로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곧바로 도래할 것. (...) 날로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이 정치적 직접혁명의 형세를 이끌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농민폭동, 유격전쟁, 도시파업, 병사들의 반항, 홍군의 확대를 외쳤다. 이에 따라 당은 무산계급의 영도력을 강화하여 총혁명 투쟁을 전개, 한개 혹은 여러개 성에서 우선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정치파업의 조직', '지방폭동의 조직', '군사반란의 조직', '홍군의 집중 공격'이라는 혁명 4대 구호가 등장하여 중심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4월 3일에 <통지 제130호가 발표, 홍군의 지휘계통을 중앙군사위원회에 통일시켜 홍군과 유격대를 중앙에서 통제할 것을 밝혔고 분산적 유격전술을 도피주의로 비난했다. 리리싼은 4월 5일과 4월 12일 <홍기>에 혁명고조와 무장투쟁의 실현을 촉구하는 글을 실으며 우선적인 승리필요성과 세계혁명과 중국혁명의 관계를 설명하며 무장폭동을 독려했다. 1930년 5월 제1차 전국소비에트구역대회가 개최되어 노동자, 농민의 역량을 결합하고 홍군과의 협조를 통한 도시 진공과 전국 소비에트 혁명 승리를 도모하게 되었다. 대회는 중국에 유산계급의 국민당과 무산계급의 공산당만이 있으며 최후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선언했다. 6월의 정치국 회의에서 리리싼은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라는 테제를 통과시켰고 코민테른은 이러한 리리싼 노선에 절대적으로 찬동했다. 이때는 반장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로 리리싼 입장에서 여러모로 폭동을 주장하기에 좋은 시기로 보였다.

하지만 리리싼은 극좌맹동주의, 좌경모험주의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너무 섣부른 봉기는 반대했다. 1930년 5월 16일 항저우 시위원회가 보름 안에 항저우를 포위 공격하자고 제안하자 리리싼은 이를 반대했고 좌경 경향은 아주 주의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30년 6월 9일 무장폭동이 필요하지만 중국이 이미 혁명고조에 이르렀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했다. 중국에 전국적인 정치적 파업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이를 말미암아 리리싼이 단순한 극좌 모험주의자만은 아니라 일부 현실적인 안목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 원동국은 6차 2중 전체회의에 즈음하여 리리싼의 정책을 우경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의 폭동이 필요하다는 전략 자체는 변치 않아서 7월 13일 난징, 우한, 상하이, 항저우의 폭동을 준비하고 7월 16일 코민테른주석단에 군벌전쟁을 혁명전쟁으로 전환시켜야 하며 폭동과 총동맹파업의 실현의 승인을 요청했다.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 좌익소아병적 현상이 나타났다면서 중국 공산당의 낙관론적 관점을 비판했지만 폭동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혁명고조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따라 펑더화이, 마오쩌둥 등 홍군의 일선 지휘관들이 7월 폭동을 일으켰고 7월 27일 펑더화이의 홍3군단이 장사를 점령했다. 중공중앙과 리리싼은 크게 고무되어 총동맹파업을 일으키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국민당의 반격으로 이미 점령한 장사에서 축출되었으며 난창, 우한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기대했던 노동자와 농민의 호응도 없었다. 8월 중순 코민테른 원동국은 국민당-제국주의 세력의 역량과 중국 공산당의 역량 차이가 현저하여 폭동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보고하게 되었다. 결국 리리싼은 폭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코민테른은 정식으로 무모한 폭동노선을 취소할 것을 지시했다.

2.3. 실각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제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스탈린은 리리싼에게 즉각 모스크바로 오라고 요구했고 코민테른은 소련에 체류하던 취추바이저우언라이 및 원동국 대표 게르하르트 아이슬러를 파견하여 전국적 총봉기계획과 홍군의 도시진공계획을 중지하고 리리싼의 노선을 비판했지만 리리싼의 권위가 아직 상당한 상태라서 전술적인 실수일 뿐 코민테른과 근본적 노선 차이는 없었다고 리리싼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리리싼과 코민테른의 화해를 도모했다. 리리싼은 철저히 자아비판을 하고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났으나 정치국 위원을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전략적이고 조직적인 과오'가 있음을 인정하는 수준으로 끝낸 다음 재교육을 위해 소련으로 떠났다.

하지만 소련에선 트로츠키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리리싼을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중국통 파벨 미프를 파견했다. 페테르 셰프스키라는 독일 상인으로 위장한 미프는 1930년 10월 상하이로 입국했다. 그는 9월 대회의 결정을 파기하고 리리싼을 크게 비판했다. 이어 코민테른은 11월 16일 서한을 통해 리리싼은 정세를 오판한 전술상 과오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경향을 보여준 원칙상 과오라고 비판했다. 혁명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제국주의 세력을 과소평가했으며 혁명무장력을 과신하여 중대한 손실을 초래했다는 비판이었다. 당황한 중국 공산당은 11월 말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하여 3중전회의 결정을 수정하여 리리싼의 퇴진을 결의했다.

파벨 미프는 당 지도부를 개편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1931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6기 4중전회를 소집했다. 중앙위원회 위원도 해본 적이 없던 천사오위가 정치국원이 되었고 선쩌민이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 유학파였다. 이때 보구, 왕자샹, 천위안다오 등이 당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리리싼 노선에 반대해왔던 장궈타오는 부재 중임에도 상무위원에 임명되었고 취추바이는 리리싼에게 양보한 죄를 물어 당 최고 기구에서 쫓겨났다. 리리싼에 대한 회유노선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은 저우언라이도 모든 직위에서 사퇴할 것을 알려왔지만 미프는 저우언라이가 매를 맞아야 한다면서도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여 자리에 남게 하였다.

2.4. 최후

파일:이립삼가족.jpg
1946년 귀국 기념으로 촬영된 리리싼 일가

실각 이후에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리리싼은 소련에 머물렀고 1936년 러시아인 옐리자베타 파블로브나 키시키나(Елизавета Павловна Кишкина, 1914~2015)와[2] 결혼했다. 1938년 대숙청이 한창일때 스탈린은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캉성, 천윈, 뤄푸, 왕자샹, 런비스, 덩파, 우위장, 양상쿤, 둥비우와 함께[3] 리리싼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이를 취소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중국 공산당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1946년 마오쩌둥의 배려로 소련에서 귀국해 중앙위원회 일원이 되었으며 노동부 부장을 역임했다. 대약진 운동 이후 경제 안정화 차원에서 비정규직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를 빌미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외국 첩자로 몰려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장칭이 비정규직 노동자 연맹에 출두하여 리리싼을 난타했으며 야오원위안도 리리싼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공격하며 가세했다. 2년 6개월 동안 홍위병들의 구타, 모욕, 조리돌림에 시달리던 그는 1966년 말에 비투회에 끌려가 조리돌림을 당했고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몰아닥친 탈권 운동 와중에 또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리리싼은 1967년 6월 22일 수면제를 먹어 목숨을 끊었다.

그는 '가장 경애하는 주석' 마오쩌둥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결코 외국과 내통한 첩자가 아니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자신이 자살하는 이유를 밝히고 문화대혁명에 경례한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바로 다음날인 6월 23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바로 비투회에 끌려가 조리돌림을 당했고 결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제야 살았다며 그것을 기뻐했다.
파일:LI_Lisan_and_his_family.jpg
1966년의 리리싼 일가

1980년 복권되었다.

3. 기타

장녀는 베이징외국어대학을 졸업해 베이징외대에서 러시아어 교수를 지냈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5.1. 인물

5.2. 사건


[1]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인물로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이 있다. 저우언라이의 경우 장학금을 받아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2] 중국 이름은 리샤(李莎).[3]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취추바이는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