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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06 15:59:24

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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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4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펑전
彭真
| Peng Zhen
파일:F200908121717302756627116.jpg
본명 푸마오궁 (
傅懋恭
, 부무공)
국적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출생 1902년 10월 12일
산서성 평양부 취워현
사망 1997년 4월 26일 (향년 94세)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 베이징의원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이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겸 비서장
베이징시 영도인
1. 개요2. 생애3. 가족4. 기타5. 둘러보기

1. 개요

중국의 정치인, 제4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2. 생애

청나라 산서성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곳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노동 운동과 지하 공작으로 경력을 시작하였다.

이때 연고지인 산시성과 톈진 등지에서 지하당 활동을 하던 중 1929년 체포되어 6년간 투옥되는 등 초기 경력은 순탄치 않았다. 출소 후에는 옌안으로 건너가 당 중앙에서 활동하며 류사오치의 신임을 얻어 중앙 조직부장, 중앙당교 부교장 등을 맡았고,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며 일찌감치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1949년부터 17년간 베이징시의 제1서기 겸 시장을 맡아 수도를 통치했다.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당시 베이징은 '바늘 하나 꽂을 수 없고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펑전의 독립왕국'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견제를 받게 된다. 1965년, 마오쩌둥이 베이징 부시장 우한의 희곡을 문제 삼아 문화대혁명의 불씨를 지피자, 펑전은 이를 정치 문제가 아닌 학술 문제로 취급하며 마오의 의도에 저항했다.[1] 결국 펑전은 문화대혁명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약 12년간 투옥 및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면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는 문혁으로 파괴된 국가 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해 법치 확립이 시급하다고 판단,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서 '린뱌오-장칭 반혁명 집단' 재판을 지휘하고 1982년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1983년에는 서열 3위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 올라 중국 법률 체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8대 원로로서 당의 보수적인 흐름을 이끌기도 했다. 1987년, 당내 민주생활회에서 개혁파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을 거세게 비판하며 그를 실각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 사건은 펑전이 개혁개방 시기에도 여전히 이념을 중시하는 강경 원칙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88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97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가족

10살 연하의 아내는 베이징사범대학 출신이며 톈진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아내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푸루이는 원자력 전문가로서 10·11기 전국정협위원에 선출되었다.

차남 푸양은 캉다 로펌[2]의 설립자이며 중국정법대, 칭화대, 난카이대 법학과의 객원교수를 지냈다.

3남 푸량은 골프장을 운영했다.

4. 기타

문화대혁명 당시 자신을 고문하고 박해했던 홍위병들이 훗날 찾아와 용서를 구하자, "책임은 당신들에게 있지 않다"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껴안아 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처럼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끝까지 강경한 원칙을 고수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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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펑전은 '문화혁명 5인 소조'의 조장으로서 "진리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로 학술 토론이 정치투쟁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2월 제강(二月提綱)'이라는 보고서로 구체화되었으나, 격노한 마오쩌둥에 의해 즉각 폐기되고 펑전은 '반당집단'의 수괴로 몰렸다.[2] 현 중국에서 15~20위 정도의 로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