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명
1927년 8월 7일, 난창 폭동의 실패 이후 우한시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긴급회의. 정식명칭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긴급회의다.이 회의로 기존의 총서기인 천두슈가 실각하고[1]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추대되어 취추바이노선을 전개, 추수폭동과 광저우 폭동을 교사하게 되었다.
2. 배경
2.1. 국공합작과 국공갈등
1924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쑨원의 주도로 중국에서의 혁명을 위해 합작하게 되었다. 쑨원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할 자격을 주고 공산당과 함께 국민혁명을 전개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1차 국공합작이다.하지만 군소정당에 불과한 공산당원들이 국민당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들의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국공갈등은 국민당 내부의 대권 경쟁과 결합되어 더욱 심화되었고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왕징웨이와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국민당 외교부장 후한민의 사촌동생인 후이성의 교사로 단정하고 후한민을 소련으로 강제외유를 보냈다. 이후 군정부장 쉬충즈도 천중밍과 내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었으며 원로 린썬과 청년부장 겸 중산대학 교장 쩌우루도 화북에 국민혁명을 전파하라는 구실로 광저우에서 추방당했다. 이에 분노한 혁명원로와 국민당 우파들은 1925년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 서산회의파를 조직하여 국공합작의 종식을 요구했지만 공산당과 좌파가 장악한 광저우 중앙은 2전대회를 통해 우파에 대한 제명으로 대응했다.
우파 숙청 이후, 국민당은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가 영도하고 있었고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운 장제스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하루빨리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주장이 시기상조라고 비판했고 신임 소련 고문 키산카 등은 장제스를 비판하며 도장, 반장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의 깊어지던 와중에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키산카 등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고문들은 자아비판 후 중국에서 추방되었고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상심하여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면서 국민당은 장제스가 영도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북벌을 추진하였다.
2.2. 북벌과 국공결렬
1926년 7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제스는 리쭝런, 바이충시, 탕성즈 등 국민당에 가입한 군벌들과 힘을 합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국민혁명군은 파죽지세로 우페이푸의 양호 지역을 장악했고 쑨촨팡의 강소, 절강, 복건 지역으로도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중산함 사건 이후 장제스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 공산당은 장제스를 기회주의적 군인, 신흥 군벌, 군사 독재자로 비판하면서 장제스 타도를 주장했고 이를 위해 프랑스로 떠난 왕징웨이를 귀국시키자는 영왕운동을 전개했다.영왕운동에 이어 우한과 난창 중에 어느 곳을 수도로 정할 지를 두고 천도논쟁이 발생하면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우한에 설립된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당권에 복속시키려 했다. 장제스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우한을 인정하지 않고 난창 천도론을 내세웠지만 결국 우한 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화해를 위해 덩옌다를 비롯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고 우한으로 가서 보로딘과 만났지만 보로딘은 장제스 타도를 계속 주장하였고 바실리 블류헤르가 장제스를 위해 일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어 우한 국민정부가 과격한 사회개혁과 무력으로 조계지를 회수하는 혁명외교를 전개하자 중산층, 향신의 불만이 가중되었으며 열강과 국민당이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난징사건과 4.2 난창기의 이후, 장제스를 포함한 국민당 우파들은 국공합작을 지속하다가는 국민당이 적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감행하여 국공합작의 종결을 선언했다.
2.3. 난창 폭동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는 아직까지 국공합작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6월 19일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고 5만명의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키고 토지를 국유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우한과의 합작 역시 파탄나고 말았다. 코민테른 요원 로이는 이러한 지시를 왕징웨이에게 통보하면서 만약 따르지 않으면 소련은 국민당을 맹우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공산주의 급진운동에 학을 뗀 우한 정부 역시 7월 15일 국공합작의 종결을 선언했다.중국 공산당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국민당의 공격에 분노하여 반격을 촉구했고 코민테른도 무장봉기 조직을 지령했다. 7월 12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장궈타오, 저우언라이, 리리싼, 리웨이한, 장타이레이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 임시정치국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산당이 조종할 수 있는 부대들을 이용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농민들을 조직해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했다.[2]
그런데 7월 23일,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새로운 요원인 비사리온 로미나제는 조금의 격식도 갖추지 않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우경 기회주의에 따른 심각한 착오를 범했다고 비판하면서 담평산, 천두슈를 징계하고 토지혁명에 찬성하지 않은 장궈타오를 격하게 비판하면서 임시 당 대회를 소집하여 당 지도부를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취추바이와 장궈타오는 로미나제와의 대화를 '최악의 대화'라고 표현하며 로미나제의 주장에 격분했지만 코민테른으로부터 중국에 송금되는 자금을 관리하는 로미나제를 거스를 순 없으므로 임시 당 대회 소집을 준비했다.
이후 소련 정치국은 중국 공산당에게 한개 사단을 무장시키기 위해 소총 1만 5천정, 탄약 1천만통, 기관총 30통, 산포와 포탄 2000발을 제공하기로 결의했다. 공산당은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펑파이 등의 주도로 7월 31일, 난창에 주둔한 장파쿠이의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을 선동하여 난창 폭동을 일으켰다. 2만명의 봉기군이 8월 1일 난창을 점령하고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설립했으나 열세에 밀려 8월 3일 난창을 떠나야 했고 난창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3. 회의의 전개
3.1. 개최
1927년 8월 7일 아침, 로미나제의 주최로 우한 국민정부의 소련 고문 미하일 라주모프의 자택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긴급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마오쩌둥, 취추바이, 덩샤오핑[3], 리웨이한, 쑤자오정, 장타이레이, 차이허썬, 샹중파, 런비스, 펑공다, 육침, 덩중샤 등 공산당 각급 22인의 지도자와 로미나제를 비롯한 코민테른 요원 세 사람이 참여했다. 22명의 참가자들중 공산주의 청년단에서 세 사람,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두 사람, 후난과 허베이 지역위원회에서 두 사람이 왔는데 전체 참석자 중에서 지도부에 해당하는 인물은 30%가 되지 않았으며 총서기 천두슈는 한커우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초대받지 못했다.3.2. 기존 노선 비판
맨 처음 로미나제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중대한 과오를 범했으며 그 뿌리가 매우 깊다고 크게 비판했다. 천두슈는 중국 공산당의 큰 어른으로 대우받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아무도 천두슈를 직접 지칭해서 비판하지 않았지만[4] 로미나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천두슈를 직접 언급하며 비판했다. 이어 임시중앙위원회 위원이자 후난 당위원회 전 서기 리웨이한이 발언을 요청했다. 이에 마오쩌둥이 나서서 로미나제를 지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당 내외 확대 군중은 혁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의 지도와 운영은 혁명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반혁명의 혐의가 있어 보입니다."
3.3. 군사분야 확충 요구
기존 노선에 대한 비판을 끝낸 마오쩌둥은 군사 분야에 공산당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군사 방면에서 우리는 종전까지 중산이 군사 운동에 전념한다고 비난하면서 우리는 정반대로 군사 운동은 팽개치고 민중 운동에만 전념했습니다. 장제스와 탕성즈 모두 총구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는 조금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확고한 개념이 서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추수폭동은 군사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번 회의는 마땅히 이 문제를 중시해야 하며,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더욱더 강력하게 이 문제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번 후난의 실패는 완전히 서생의 주관적인 착오에서 기인한 것이니 이후에는 군사 문제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합니다.[5]"
3.4. 토지 몰수와 토비 포섭 주장
그 다음 취추바이가 자아비판을 담은 보고서를 전달했고 농민 투쟁, 노동자 운동, <모든 당원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이 첨부된 조직 문제 등 3가지 결의안에 관한 토론을 열었다. 마오쩌둥이 다시 발언권을 얻어 5분간 발언했다."1. 대지주와 중지주의 표준을 반드시 설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누가 대지주이고 중지주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50무를 한계로 삼아서 땅이 비옥하든 척박하든 간에 모두 몰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소지주 문제는 토지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곤란한 점은 소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대지주가 없는 지역의 농협은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지주제를 무효화하려고 한다면 소지주에 대해 나름의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소지주 문제를 해결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인민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자경농 문제에서 부농이나 중농의 토지 권리는 같지 않다. 농민들은 부농을 공격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정확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4. 토비는 대단히 큰 문제이다. 지금 회당[6]이나 토비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책략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 몇몇 동지는 그들을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중산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우리는 오직 농민 혁명을 실행해야만 그들을 영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여겨야지 손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소지주 문제는 토지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곤란한 점은 소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대지주가 없는 지역의 농협은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지주제를 무효화하려고 한다면 소지주에 대해 나름의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소지주 문제를 해결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인민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자경농 문제에서 부농이나 중농의 토지 권리는 같지 않다. 농민들은 부농을 공격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정확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4. 토비는 대단히 큰 문제이다. 지금 회당[6]이나 토비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책략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 몇몇 동지는 그들을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중산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우리는 오직 농민 혁명을 실행해야만 그들을 영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여겨야지 손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대단히 과격한 것이라서 강경파인 로미나제조차 반대했다.
"우리는 도시 소시민 계급을 중립화할 필요가 있다. (...) 만약 우리가 모든 토지를 몰수하기 시작한다면 도시의 소시민 계급이 동요하여 결국 우리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 마오쩌둥 동지가 제기한 비밀 결사의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 그들 비밀 결사를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로미나제는 자신이 기회주의자라 여겨 혐오하는 천두슈와 달리, 마오쩌둥의 과격한 주장을 보고 그가 확고한 좌파라 여겨 언행을 부드럽게 했다. 이어 마오쩌둥의 친구인 차이허썬이 천식으로 숨을 헐떡이며 마오쩌둥을 옹호했다. 차이허썬은 마오쩌둥이 '농민 문제에 관해 중앙위원회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인물'이며 '농민 혁명의 즉각 시행을 주장한 과격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마오쩌둥을 정치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덕분에 마오쩌둥은 로미나제가 작성한 중앙위원회 임시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3.5. 회의결과
8.7 긴급회의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당원에게 호소함>[7]을 채택, 발표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천두슈가 멘셰비키와 같은 방식으로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투쟁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계급투쟁의 격화는 국민혁명에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당중앙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계급적 요구를 제약하고 자본가 계급과 지구 계급에 대한 혁명투쟁을 자제하도록 하였다. |
이에 천두슈는 북벌 와중에 고조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열기를 무시하고 국공합작 유지를 위해 토지혁명 심화를 저지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무장화를 태만히 한 우경 기회주의자, 멘셰비키로 규정되어, 총서기직을 박탈당했고 <당의 조직문제 결의안>을 채택, 취추바이, 샹중파, 리웨이한 3인으로 구성된 중앙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취추바이를 신임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로 선출했다. 그리고 제6차 대표대회 소집 이전까지 당을 이끌 정치국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쑤자오정, 샹중파, 취추바이, 뤄이눙, 구순장, 왕허보, 리웨이한, 펑파이, 런비스 등 9인이 정위원이었고 덩중샤,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펑궁다, 장타이레이, 장궈타오, 리리싼 등 6인은 후보위원이었다. 장궈타오, 저우언라이는 난창 폭동 등의 실패에 책임을 묻고 후보위원으로 일시 강등당했다. 당의 조직문제 결의안은 믿을 수 없고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축출하여 당조직의 비밀운영과 공산당원의 당성을 보장할 것을 결의하고 성 이하 각급 위원들에게 상급기관으로부터 심사를 받아 당성을 공고히 하고 기회주의자를 축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8.7 긴급회의는 결의문을 통해 중국혁명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혁명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반제투쟁, 계급투쟁, 사회혁명을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라고 비판하며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을 심화, 발전시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헤게모니를 관철함으로 먼저 국민혁명을 완성시키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천두슈의 '기회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현실 무산계급과의 일체감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급진적인 당의 대중화 방침"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전략방침을 결정했다.
- 각지의 빈농과 소농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대지주와 중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혁명을 실행한다.
-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하여 혁명적인 좌파 국민당의 기치 아래 총폭동을 일으키며, 특히 추수시기 호남, 호북, 광서, 광동 등 4개 성에서 농민들의 조세저항을 유도하여 추수폭동을 일으킨다.
- 각지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다.
이후 총서기 취추바이의 주도에 따라 전개된 중국 공산당의 혁명전략을 취추바이노선이라고 한다.
4. 이후
마오쩌둥은 총서기가 된 취추바이로부터 상하이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모든 당 간부들이 지방으로 가는 것을 꺼리는 와중에 마오쩌둥은 이를 거절했다."나는 큰 도시로 나가 높은 빌딩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시골로 가서 산에 올라 녹림 친구들을 사귀고 싶습니다."
8월 9일 취추바이는 마오쩌둥을 중앙위원회 특별대표로 호남에 파견하여 추수폭동을 준비하게 했다. 1927년 9월 9일 추수폭동이 거행되었으나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취추바이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11월 상하이 확대회의를 통해 연속혁명론을 주장, 12월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으나 장타이레이가 사망하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공산당원은 80% 이상이 격감하는 피해를 입고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다만 호남에서의 폭동을 지휘하다가 패주한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점거,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홍군 건설의 기반을 닦게 된다.
5. 참고문헌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 코민테른과 립삼체제의 형성 및 좌절, 김원규, 역사와 세계 27.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