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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7:10:30

다이지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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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결렬 이후 각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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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당 우파가 주축이었지만 우징헝, 리스쩡 등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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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1대 고시원장
본명 다이촨셴(戴傳賢, 대전현)
한문 戴季陶
한국식 독음 대계도
영문 Dai Jitao
천구(天仇)
선당(選堂)
출생 1891년 11월 26일 청나라 사천성 광한현
사망 1949년 2월 21일 중화민국 광동성 광저우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니혼대학 법학과 중퇴
직업 관료, 정치가, 사상가
고시원장
재임기간
1대 1928년 10월 25일 ~ 1948년 6월 30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과 일본 유학2.2. 신해혁명에서 2차 호법운동까지2.3. 2차 호법운동에서 1차 국공합작까지2.4. 다이지타오주의의 정립과 서산회의2.5. 1926년~ 1936년2.6. 죽음
3. 저서4. 주요 경력5. 매체에서6. 참고문헌7. 관련문서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혁명가, 저술가, 중국 국민당의 우익 이론가.

2. 생애

2.1. 유년 시절과 일본 유학

1891년 사천성 광한에서 태어났으나 절강성 오흥에서 성장하여 그의 원적은 절강성이다. 1904년 청두의 외국어학당 고등과에 입학했는데 감독선생이 학생 석차가 불공평하게 처리한다고 항의하다가 퇴학당했고 이 사실이 사천 전역에 통보되면서 사천 어디의 학당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이름을 바꾸고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정체가 드러나 쫓겨났다. 그러다가 만난 일본인 교사 코니시 미나에게서 일본어, 물리, 화학 등을 배우게 됨에 따라 청일전쟁 패전 이후 대유행 중이던 일본 유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그의 형이 동생을 위해 몰래 조상의 밭을 팔아 7백냥을 만들어 그에게 줌으로 1905년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이때를 두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길게는 10일, 짧게는 5일이면 도착할 수 있다. 비용으로 말하자면 많으면 3백금, 적으면 백금이면 족했고, 학교로 말할 것 같으면 정치, 농업, 공업, 상업 등 모든 분야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외국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미개한 학문을 찾는 것인데 실익 면에서 일본만한 나라가 없는 것이다."

또한 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고마움을 표했다.
"내가 일본에 유학을 할 수 있는 것도 장형이 큰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일본 도착 후에 사범대학에 입학하였고 1907년 매우 들어가기 어려웠던 니혼대학 법학과으로 진학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1909년에 대학을 그만두었다. 이때 그는 저술활동을 시작하였고 일본어, 경제, 일본의 정치, 사회, 역사, 문화, 풍속 등에 대해 깊게 공부하여 일본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후에 일본론을 집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친해진 친구로 1906년에 만난 4살 위의 장제스가 있다.

그리고 어느 일본 여성과 가까워지게 되는데,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는 쑨원을 뒷바라지하던 흑룡회에서 파견한 하녀 신엔 미치코(津淵美智子)라는 여자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1] 그런데 <진결여회고록>에는 '아이코'라는 여자와 가까워졌다고 나와 있으며 장웨이궈가 1996년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연합보> 기자 왕사순과 40여차례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리한 <장위국인생여행>에서는 일본에서 만난 간호사와 가까워졌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장제스와 다이지타오가 어떤 일본 여성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2.2. 신해혁명에서 2차 호법운동까지

귀국 이후 상하이에서 잠시 관료 생활을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곧 그만두고 언론계에 투신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 천탁보(天鐸報) 등의 언론에 저술을 기고하였으며 이때 청나라에 대한 저항 의지를 드러내며 대천구(戴天仇)라는 이름을 썼고 이를 호로 삼았다. 1911년 4살 연상이며 역시 혁명가인 뉴여우헝(鈕有恒)과 결혼했다. 하지만 1911년 5월 22일 위안스카이 등을 죽여야 한다고 강경한 논설을 쓰다가 조계지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때 면회 온 아내에게 주필이 감옥에 가지 않으면 좋은 주필이 아니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석방 이후 일본을 거쳐 영국령 말레이시아로 망명했고 이때 쑨원을 만나 동맹회에 가입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광화보(光華報) 필진에 참여했고 신해혁명이 터지자 상하이로 돌아와 민권보(民權報)를 창간했으나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권세를 보고 “난세의 붓은 제아무리 비단 같은 글 수백만 편을 토해 내도 총 한 자루만 못 하다”라고 한탄했다. 1913년의 계축전쟁에 참여하여 위안스카이에 의해 목에 현상금이 걸렸고 2차 혁명 실패 이후 도쿄로 망명하여 중국혁명당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면서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을 따라 귀국하게 되는데 혼자 남은 미치코는 10월 6일 장웨이궈를 출산하게 된다. 이를 까맣게 모르던 다이지타오는 1차 호법운동, 이후의 호법전쟁에 참여하여 광저우에 머물렀으나 1918년 광저우 군정부가 개편되면서 쫓겨난 쑨원이 상하이로 이주하자 장제스와 함께 상하이로 이동하였고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그곳에서 쑨원주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이론적 기반을 닦았고 이 시기에 쑨원의 주목을 받아 그의 번역가, 비서로 활동하게 된다.

1918년 이래로 2년간 사회주의, 노동문제 연구를 하여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5.4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큰 영향을 받아 상하이에서 <성기평론>(星基評論)의 주간을 맡았다. 다이지타오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중국을 부패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 계급이 핍박받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1919년 말에 천두슈가 설립한 상하이 마르크스 연구사와 왕래하였고 중국 공산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나 공산당이 주장하는 계급투쟁이 중국을 위한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않아 정작 그 자신은 입당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 연구사와도 왕래를 끊었다. 1920년 6월 6일 그가 발행하던 <성기평론>이 53호를 마지막으로 정간당하자 언론과 선전활동을 중단하였다. 이는 쑨원이 천중밍과 합작하여 군사활동을 중시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던 중 1920년에 장웨이궈의 손을 잡고 나타난 미치코를 보고 그제야 장웨이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미 매우 무서운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던 다이지타오는 장제스로부터 미치코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자 하얗게 질려서 “우리 모두 황당했던 과거의 일들이다. 한때의 풍류, 생각도 하기 싫다. 지금은 처자가 있다. 너도 알다시피 얼마나 사나운지 모른다.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 인생은 그날로 끝난다.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해라.”라고 하였고 이에 장제스는 시키는대로 둘러댔는데 이에 미치코는 통곡하더니 “두 놈 다 형편없는 놈들이다. 자신의 혈육도 필요 없다니 나도 필요 없다”라고 장웨이궈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장제스 일기에 따르면, 1921년 봄에 사망했다고 한다.[2] 결국 장웨이궈는 장제스가 기르게 되었다.[3][4]

2.3. 2차 호법운동에서 1차 국공합작까지

1920년 쑨원이 군벌 천중밍의 초청으로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광저우로 가서 2차 광동정부를 조직하자 그를 따라나섰고 광저우에서 재정지원을 위해 사업을 하여 광저우 정부의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외에는 장제스에게 천중밍과의 합작에 대해 설득한다거나 군정부를 위한 법률안을 기초하는 작업을 일부 맡았으나 이 시기에 군정무의 실무에 깊숙하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다이지타오에게 상당히 우울했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일본으로부터 투자받은 30만원을 모두 날려 다이지타오가 자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다이지타오 본인도 사업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또한 1922년 영풍함 사건이 터지면서 2차 광동정부도 붕괴되고 북방에서 군벌들의 전횡이 이어지자 실망하여 심각한 신경쇠약증을 앓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당내조직과 선전에 주력했다. 1922년 11월, 쑨원의 지시에 따라 사천의 군벌들을 설득하여 무기를 버리고 통일의 길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라는 지시를 받고 8년 만에 고향인 사천에 가게 된다. 하지만 이 임무로 인해 그의 누적된 스트레스와 병환의 시너지가 폭발하여 그는 강에 투신하였다. 다행히도 어부가 구조하여 목숨은 건졌는데 그는 이 경험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을 두고 "이 사건은 내 평생에서 하나의 큰 기적이고 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기도 하다."라고 기록했다. 한동안 사천에 머물며 불교를 공부하던 다이지타오는 1923년 1차 국공합작이 추진되기 시작하자 1923년 1월 23일 21인의 참의 중 한명으로 임명되었으나 간여하지 않았다. 1923년 12월 쑨원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돌아왔으나 이미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용공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 개조가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다이지타오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임시집행위원 취임을 거부하고 상하이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랴오중카이가 직접 찾아와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다이지타오는 공산당원이 국민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미래의 분규를 낳을 것이라고 논박하며 자신은 언론사업만 전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쑨원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광저우로 가게 되었다.

광저우에서 다이지타오는 용공정책이 대세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 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당 개조에 깊숙이 간여했다. 일단 다이지타오는 옛 동지들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고 1차 전국대표대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었다. 다이지타오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선전부장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랴오중카이 등 국민당에서 그의 귀환을 간곡히 요청하자 4월에 광저우로 돌아와 공직에 취임했으며 4월 11일 법률위원회위원장에 임명되었고 4월 28일에 대본영참모가 되었다. 선전부장으로써 중앙통신사를 창설하였고 4월 10일의 중앙집행위원회 20차 회의에 참가했다. 하지만 용공정책을 강경하게 반대해온 원로파의 장계 등과 충돌을 빚었고 6월 19일에는 장계가 다이지타오를 구타하며 인신공격을 퍼붓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공산당원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충격을 받은 다이지타오는 6월 20일 공직에서 사임하고 다시 상하이로 떠나 노동운동 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개조 이후 당무 진행은 자못 순조롭다. 종전의 당의 운영에는 좋은 방법이 없었는데, 이번 개조로 조직상 하나의 좋은 방법을 얻어 진행상 활기를 불어 일으키고 있다."

1924년 6월 30일 중앙집행위원회 39차 회의는 다이지타오에게 상하이에서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상하이 집행부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결의했으나 신경쇠약에 빠진 다이지타오는 정치에 간여하려 하지 않았다. 7월 9일, 당중앙은 다이지타오를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며 7월 10일 그간의 분규는 쌍방이 모두 양해했으나 광저우로 돌아올 것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고 8월 11일 다이지타오 복귀를 요청하는 결의안이 통과됐으나 다이지타오는 응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다. 이후 북방에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고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직예군벌 정권을 축출하고 돤치루이 임시집정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쑨원을 북방으로 초청했는데 이에 호응한 쑨원이 북상선언을 발표하여 북방으로 올라가게 되자 다이지타오는 쑨원을 수행하여 그의 일본행을 보좌했다. 이후 쑨원을 따라 베이징으로 갔지만 베이징의 혼란한 정세를 보고 질려 12월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광저우에 일시적으로 돌아와 1925년 1월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고 장제스가 교장이 되자 자신은 정치부장[5]이 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한달만에 때려치우고[6] 상하이로 가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후임은 정치부 부주임이었던 저우언라이였다.
파일:정치부장 다이지타오.jpg
정치부장 시절의 다이지타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3월 16일 효라는 글을 발표하여 "마땅히 극히 성실하게 효를 다해야 한다."라면서 쑨원의 죽음을 애도했고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출범하자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정치활동엔 참여하지 않고 그간 국민당을 통합해오던 쑨원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것을 탐구하였는데 다이지타오는 그것이 쑨원이 남긴 삼민주의에 있다고 판단하고 쑨원의 이념의 체계화 작업에 매진했다.

2.4. 다이지타오주의의 정립과 서산회의

쑨원이 죽은 후에 공산당의 국민당 잠식에 불만을 품어 1925년 5월 국민당 1기 3중전회에 참여하여 순정 삼민주의를 제시, 현재 국민당은 쑨원의 삼민주의가 아니라 왜곡된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민생철학 계통표>를 발표하여 무산계급혁명이론을 비판했고 1925년 6월 <손문주의 철학이론>을 발표하여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보존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징웨이와 후한민은 다이지타오의 저술을 아주 충실한 연구업적이라고 극찬했다. 다이지타오는 이어 1925년 7월에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을 발표하였다.
중화민족이 생존하려면 먼저 국민당이 생존해야 한다. 국민당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그 생존욕망이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하는 독립성, 배타성, 통일성, 지배성이 충분히 발휘되어야 한다. 공통의 믿음이 세워지지 않으면 상호 믿음이 생겨나지 않고, 상호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단결은 굳건하지 않으며 생존할 수 없다. 중화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당원이여, 삼민주의 신도들이여, 단결하라!

다이지타오의 이러한 주장은 국민당 우파와 원로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쉬충즈는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을 아예 수만부나 찍어 휘하 장병들에게 배부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다이지타오는 소위 다이지타오주의라는 체계적인 반공이론을 창설하게 되면서 국공합작과 연아, 연소, 연공, 부조농공 정책의 격렬한 비판을 가해 국민당 우파의 중심인물로 자리잡았다. 황포군관학교 내부에서도 허종한, 양인지 등의 우익 학생들이 쑨원주의연구회를 결성하여 다이지타오의 저작인 <손문주의 철학이론>과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을 기반으로 이론을 정립하며 발전했다. 이들은 북벌 이후 황포동창회로 개칭하고 훗날 남의사 설립에 나서게 된다.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이에 반발하여 공산당원 소초녀가 1925년 8월 <국민혁명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책자를 발표하여 <국민혁명과 중국국민당>을 반박했고 공산당은 중앙집행위원회에 다이지타오의 저작에 제재를 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지타오의 이론은 맹목적으로 공산당을 비난하는 우경화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지나친 혹평은 자제하고 다이지타오와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그러던 중 1925년 11월 23일 국민당 우파들이 베이징에서 서산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다이지타오는 처음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으나 상하이 집행부에서 다이지타오에게 참여할 것을 강권하여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지켜보지 위해 북상, 1925년 11월 18일 예비회의에 참석하였다. 다이지타오는 예비회의 주석 우징헝은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권고만 하지 탄핵하지 않으며 공산당원들에 대해서도 리다자오와 얘기하여 성의를 다해 협상하고 분열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다이지타오 등도 이에 동조했다. 이에 풍자유를 비롯항 동지구락부의 강경파들이 분노하여 6월 19일 오전 6시, 30여년의 청년들이 4대의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 다이지타오와 심정일(沈定一)에게 폭행을 가하고 이들을 납치하여 동지구락부 건물로 끌고 나갔다. 심정일은 자신이 중국공산당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5.30 운동2.7 사건을 보고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삼민주의를 순봉하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다이지타오는 자신이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고 국민당 안에서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것이 과실일 뿐이며 국민당을 정리하기 위해 공산분자를 축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러한 봉변을 당한 다이지타오는 6월 20일 즉각 베이징을 떠나버렸다. 상하이로 돌아온 다이지타오는 한동안 은거하다가 12월 13일 모든 정치적 직책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발표했다.
당내 사상상 좌우의 위기와 인사상 분열의 난국을 맞아 그를 구제해보고자 혀가 닳고 입술이 타도록 자못 정열을 쏟았으나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 수개월 이래 듣고 본 모든 것은 염려하지 않은 바 없고 좌경, 우경은 이미 호랑이를 탄 꼴이 되어 이(理)와 정(情)으로 다스릴 수 없음을 더욱 깨달았다. 계통을 바로잡고 사상과 사업의 중견(中堅)을 세우는 것은 결코 나약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 따라서 일체의 정무와 당무의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결의함과 아울러 일체의 당무의 직책을 다시는 맡지 않겠음을 선서한다. 이후로 나는 단지 개인의 능력대로 학업에 전념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 능력이 미치고 또 좋아하는 바이니 이제까지 모든 동지와 나를 알고 사랑하는 청년제군은 또다시 정무와 당무를 기대하여 공중(公衆)에게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이후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당중앙이 다이지타오에게 선전부장을 제의했으나 거절했고 광저우 국민정부가 중앙집행위원에 그를 임명했으나 신경쇠약을 이유로 사절했다. 쑨원주의학회에서 그를 대표로 초빙했을 때도 거절했다. 한편 광저우 국민정부는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서산회의 관계자들을 징계했는데 다이지타오에게 반성을 촉구하며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말 것을 훈령했다. 이는 매우 관대한 대우였는데 다이지타오가 적극 참여한 바가 없음을 고려한 것이겠지만 다이지타오는 이를 반기지 않고 1926년 1월 22일 본의 아니게 서산회의에 참가했지만 일정한 주장 하에서는 회의의 결의에 동의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 지도부에 글을 보내 이전대회와 당중앙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서산회의 관계자 처분이 불공평함을 지적하며 당의 단합을 위해 그 집행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다이지타오의 눈에 띄어 후원을 받은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의사의 수장이 되는 다이리였다. 상하이에서 개인 기밀 조사요원으로 일하던 다이리는 다이지타오의 후원으로 1926년 황포군관학교 6기로 편입할 수 있었다.

2.5. 1926년~ 1936년

이후 세계여행을 떠나 세계적인 혁명활동을 관찰하고자 했으니 비용을 조달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926년 여름, 중산대학 교장직에 임명되자 정치직권상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대학운영에만 전념하겠다며 그 자리를 수락하였다. 이는 1926년 3월의 중산함 사건으로 다이지타오의 친우인 장제스가 국민당 최고 실력자로 떠오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다이지타오는 학교 측의 독촉에도 건강상의 이유로 광동에 내려가지 않고 휴가를 신청했다. 1926년 9월이 되고 나서야 당중앙에 학교의 행정과 정치교육을 분리시킨다는 <중산대학개편안>을 제출하여 정치교육은 당중앙이 전담하고 행정은 교장제를 위원제로 바꾸어 집단운영체제로 교체하자는 것이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1926년 10월 15일 중산대학 운영은 위원제로 개편되었고 다이지타오는 중산대학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다이지타오는 중산대학에서 자신의 혁명론을 강연했다. 하지만 좌우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는데 피로를 느끼고 1926년 11월 교육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장제스는 이를 만류하며 소련교육계 시찰을 권고하였다. 다이지타오는 이를 수용하여 소련 외유를 준비했으나 당은 그의 소련 외유를 허락하지 않고 대신 일본 외유를 명령했다. 이에 다이지타오는 1927년 2월 11일 중일민족평등친선 사명을 부여받아 일본으로 떠나 1개월 반을 머물며 국민혁명을 선전하다가[7] 3월 23일 도쿄를 떠나 3월 31일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자 여기에 합류하여 천궈푸와 함께 국민정부 조직조례와 군사위원회 조직대강을 작성하여 장제스의 집권을 도왔고 다시 교장제로 환원된 중산대학 교장에 취임했다. 1928년엔 고시원장에 임명되어 1948년까지 역임하면서 공무원 임용제도의 틀을 닦고 정착시켰다.
파일:고시원장 대계도.jpg
고시원장 시절 집무를 보는 다이지타오

원래는 천리푸, 천궈푸 형제가 창설한 CC단의 일원이었으나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남의사와 CC단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장제스의 의도에 따라 남의사 집행위원회에 배치되었으나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장제스의 측근임에도 불구하고 강경토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쿵샹시 등이 장 위원장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느냐고 비난하자 장제스와 나는 너희 공씨, 송씨보다도 밀접한 관계다, 하지만 나는 위원장과의 관계보다는 당국대업을 더 신경쓴다고 외쳤고 쑹메이링이 장제스의 안전과 당국대계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반박하자 아녀자의 안목은 쥐새끼와 같다고 욕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이지타오는 장제스 석방 이후 쑹메이링의 비난을 받았으며 다이리 등이 다이지타오와 일본측의 연계를 찾아내어 그를 공격했지만 장제스는 다이지타오를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당중앙에서는 다이지타오를 신뢰하지 않아 다이지타오가 열람할 수 있는 문서의 등급을 제한하는 등 그를 배척하였다.

2.6. 죽음

이후 중일전쟁 동안 장제스를 보좌했고 종전 이후 "자네들 기쁜가? 뒤에 울겠지? 장차 천백배의 고통이 오는데 견뎌낼 수 있겠는가?"라고 침울하게 말하면서 당시 중국의 암담한 상황을 염려했다.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국민정부가 궁지에 몰리자 다이지타오는 상황을 오자서가 하룻밤만에 머리가 샌 고사에 비유하면서 희망을 잃게 되었다. 1948년 봄부터 다이지타오는 방문객을 거절하면서 정치를 피하기 시작했고 회의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헌정 실시 후에 더 이상 고시원장직을 맡지 않게 되었다.

결국 1948년 9월 난징에서 수면제를 먹고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조되었다. 그러다가 장제스의 측근 천부레이가 당과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위기를 막을 수 없다면서 음독자살하자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다시 약을 먹었으나 이때도 살아났다. 이 와중에도 전황은 급박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광저우로 이전하였다. 타이완으로 가자는 제안에 대해서 그는 거부했고 고향인 청두로 가고 싶다고 아들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에 아들이 청두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구해보았으나 계속 날씨가 좋지 않아 청두로 가는 비행기가 뜰 수 없었다. 이에 상심한 다이지타오는 결국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서 1949년 2월 21일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마침내 숨졌다. 살아남은 유족은 국부천대와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들 다이안궈는 이후 중화민국 공군 중장까지 지내고 이후 정치가로 활동했다.[8]

그가 사망하기 2개월 전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를 장제스와 더불어 43명의 '전범' 중 16호 전범으로 뽑아 비난했다.

3. 저서

4. 주요 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고시원장
파일:중화민국 고시원 휘장.svg
고시원 설립 1대 헌정 실시
다이지타오
(1928년 10월 28일 ~ 1948년 6월 30일)

5. 매체에서

파일:건국대업대계도.jpg
영화 건국대업에서는 중국배우 엽소갱(叶小铿)이 분했다. 더 이상 천하가 국민당의 것이 아니라고 장제스에게 간하는 충신 포지션으로 나온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일각에서는 흑룡회가 파견한게 아니라 단순한 게이샤로 추측하기도 한다.[2] 장제스 일기의 뉘앙스를 보면 이후 다이지타오와 연락이 되긴 되었던 모양이다.[3] 간호사 버전에 따르면 간호사가 장웨이궈를 낳고 얼마 안가 죽었기 때문에 다이지타오가 장웨이궈를 키워야 했다고 나오고 아이코 버전은 미치코 버전과 사람 이름만 뺴고 똑같은 이야기다.[4] 친부는 다이지타오라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지만 다이지타오와 장제스 모두 장웨이궈가 장제스의 아들이라 주장했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5] 정치부 주임[6] 말도 없이 사라져서 공산당이 납치한거 아니냐는 등의 말이 퍼졌다.[7] 일본의 차관을 얻기 위해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다이지타오는 부정했다.[8] 여담으로 다이안궈도 사실 장웨이궈의 형제라는 둥, 역시나 일본 여자의 소생이라는 둥 하는 출생 관련 소문이 많았었다. 다이안궈의 적장자가 요절하고 1984년에 다이안궈도 죽으면서 결국 장웨이궈의 출생의 비밀은 미궁으로 남아버렸다.[9] 2006년 소화 출판사에서 정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