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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46:20

천부레이

파일:진포뢰.jpg
<colbgcolor=#00001b> 중화민국 군사위원장 시종실 2처 주임
이름 陳布雷 (정체) | 陈布雷 (간체) | 진포뢰
영문 Chen Bulei
언급(彦及)
출생 1890년 11월 15일
청나라 절강성 자계현
사망 1948년 11월 13일 (향년 57세)
중화민국 강서성 난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절강대학
직업 언론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당 합류2.3. 국공내전과 헌정기의 활동2.4. 죽음
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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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문필가, 언론인, 정치인. 장제스의 측근으로 그의 비서로 오랫동안 일했으나 국공내전 도중 자결했다. 문성(文星), 장제스의 지낭(智囊), 장제스의 문담(文膽)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 저장성 자계현에서 태어났다. 닝보중학교, 절가예비대학을 거쳐 1907년 절강대학에 입학하여 1911년 전체 4위로 졸업한 이후 상하이에서 천탁보 기자로 일했으며 편집장까지 올랐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이를 지지했으며 1912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2년부터 교육과 언론활동에 전념했으며 이때부터 자주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1921년부터 상하이에서 언론활동을 하였다.

2.2. 국민당 합류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어 북벌군이 난창을 점령하자 1927년 난창에서 장제스를 만나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였고 장제스의 제일 가는 측근이 되어 그의 개인비서로 활약했다. 1927년 장제스의 1차 하야 시기 그의 하야 선언문을 작성하였으며 1928년 장제스가 복직하자 절강성 정부 비서장과 교육청장,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부부장, 교육부 차장을 지냈으며 1935년 군사위원회위원장 시종실 제2처 주임, 국방최고위원회 부비서장을 역임했다. 특히 시종실 제2처 주임을 10년 이상 역임했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의 최측근으로 통하며 국민당의 2인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사치를 모르는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고 장제스도 그를 부를 때 절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했다. 샤오위안충 등과 함께 언론활동을 통해 국가관을 통합시키는 선전활동을 수행했다. 1934년 장제스가 구술한 <적인가? 친구인가?(敵乎? 友乎?)>라는 논문의 초안을 잡았으며 이를 쉬다오린이라는 필명으로 외교평론의 1934년 겨울호에 개재하는 등 장제스의 항일의지를 선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일본이 만약 다시 만주국과 같은 제2, 제3의 괴뢰조직을 조성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30만의 육군을 파병해야지 겨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상비병력은 총 17개 사단인데 전 병력을 보내도 충분하지 않고, 국내와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이므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예비역과 후비역을 징발하여 조달해야 할 것이다. (...) 일본이 만약 어떠한 이유로 중국에 무력을 사용한다면 중국의 군사력은 일본과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반드시 큰 희생이 따를 것이다. (...)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한다 해도 소위 정식적인 결전은 없을 것이며 (...) 전쟁을 종결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 일본이 점령할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양호한 교통망과 중요한 항구가 있는 약간의 도시와 중요한 항만에 불과할 것이다.
적인가? 친구인가?

1936년 2차 양광사변 때 장제스를 수행하여 계계군벌의 수령 리쭝런과의 회담을 보좌했으며 1936년 서안 사건 이후 장제스의 명에 따라 서안 사건에 대한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은 서안반월기의 초고를 작성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를 곁에서 수행했다. 일본에 대한 승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후스, 저우포하이, 천궁보, 메이쓰핑, 타오시성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결성,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했지만 왕징웨이처럼 일본에 투항하여 한간이 되지는 않았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자 승전에 기뻐하는 조카딸에게 "뭐가 즐거워? 정말 간고의 세월이 아직 뒤에 남아 있는데."라고 말하면서 국공내전을 예견했다. 중일전쟁이 끝났을 때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승전 공식 석명의 초안을 장제스가 직접 작성했다. 중국공산당도 천부레이의 문장력과 명망을 탐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가 충칭에 주재할 때 계속 천부레이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 그를 공산당 쪽으로 회유하려 했지만 천부레이는 응하지 않았다.

2.3. 국공내전과 헌정기의 활동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군사위원, 총통부 국책고문,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46년 1월 10일 정치협상회의가 충칭에서 개막되자 국민당 대표로서 쑨커, 장췬, 우톄청, 천리푸, 왕세걸, 사오리쯔, 장려생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46년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할 위기에 처했을 때 천리푸, 장려생 등 CC단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했고 결국 2차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1946년 12월 25일 중화민국헌법이 통과되어 헌정 실시가 선언되자 1947년 7월 2일 웡원하오, 우톄청과 함께 민주동맹과 청년당에게 입법원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국민당과의 합작을 촉구했다. 이 운동에 힘입어 7월 4일 중국청년단이 성명을 발표해 정부와 입법원 참가를 결정했고 이어 민사당도 뒤따라 분규가 해결되었다.

국민혁명군이 만주에서 섬멸되어 국민정부가 위기에 처했는데 1947년 12월 마오쩌둥이 <현재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글을 발표하자 장제스는 천부레이에게 "이 친구 글, 정말 신랄하구먼."이라고 하면서 천부레이에게 마오쩌둥보다 글솜씨가 못하다고 돌려 비난하자 천부레이는 "그 친구는 자신이 쓴 글입니다."라고 꼬우면 직접 쓰지 그러냐는 식으로 받아쳤다.[1] 국민혁명군이 회해전역에서 패한 후 장제스는 군정회의에서 자신을 숭정제에 비하며 자신은 잘났는데 부하들의 무능으로 패했다고 훈시하자 천부레이는 "허튼 소리!"라고 비난했다. 이 말을 들은 장제스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회의를 끝내버렸다. 이렇듯 평생동안 장제스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지만 쓴 소리를 할때는 가차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천부레이를 포섭하기 위해 서남연합대학교의 학생지도자인 공산당원 원영희(袁永熙)를 포섭하여 천부레이의 막내딸 천롄(陳蓮)에게 접근시켰다. 미남이었던 원영희에게 천롄이 첫눈에 반해버려 둘은 결혼하게 되었지만 결국 정체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천부레이는 장제스에게 부녀 관계를 고려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장제스는 원영희의 신분을 보증하여 1948년에 특별석방시켜주었다.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솔선수범을 위해 전 재산 3천달러를 모두 금원권으로 바꾸었으나 금원권 개혁이 대실패로 돌아가면서 전 재산을 잃고 말았다.

2.4. 죽음

1948년 말에 이르러 전세가 기울대로 기울자 천부레이는 병환에 시달렸는데 부인과 딸에게 편지를 써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체력, 정력, 지력이 모두 쇠해지고 병든 몸은 갈수록 지탱하지 못하여 국가의 비상시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목숨만 도둑질하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때문에 수년 동안 마음속에 맴돌던 '절명'이란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자제할 수 없구나.

10월 10일에 쑨원의 무덤을 참배한 이후 11월 11일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내 몸을 보면 전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마음은 영원히 고통 속에 묶여 있도다.

결국 11월 13일 천부레이는 사위 원영희에게 전화해서 정치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조언한 후 난징의 공관에서 장제스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하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금년 봄부터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모두 자극적이었습니다. 7~8월 사이 형세는 더욱 위급해져 종일 앙앙불락했습니다. 당과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이때, 천한 몸이 오랫동안 분기할 수 없고, 세모는 다가오는데 위기를 막을 수 없어 부득불 세상을 하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제스는 천부레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11월 15일 거국적인 추도식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오전 11시, 쑹메이링과 함께 빈소로 들어와 묵념하고 '당대완인'이라는 현수막을 빈소에 걸었다. 쑹메이링이 생화 두 송이를 내려놓고 장제스와 함께 빈소를 나왔다. 천부레이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받은 다이지타오까지 12월에 연이어 자결을 시도했고 1949년 2월에 끝내 자결했다.

3. 여담

천부레이의 장례를 치른 천롄과 원영희 부부는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1949년 베이징이 점령된 후 공산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강제이혼당하고 천롄은 자살했다.

4. 참고문헌



[1] 사실 마오쩌둥도 천보다를 대필작가로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