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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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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4대 외교부장
胡適
후스 | Hu Shih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u_Shih_1960_color.jpg
한국식 독음 호적
희강(希彊) → 적지(適之)
출생 1891년 12월 17일 청나라 강소성 소천현
사망 1962년 2월 24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대만)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 박사
사상 중국식 자유주의, 실용주의
직업 철학자, 외교관,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정부 시절2.3. 국공내전 이후
3. 여담4. 저서5. 매체에서6. 주요 경력7.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실용주의, 자유주의 철학가, 문학가, 외교관, 관료, 교육자.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Hu_Shi2.jpg
1925년의 후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주관적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호적문집 제6책 182페이지.

원적은 안휘성 적계이며 현재의 상하이에 해당하는 강소성 송강부 천소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선교사 쑹자수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1910년부터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1914년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존 듀이 밑에서 교육학실용주의 철학을 수학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1917년 중국으로 돌아와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후 문과대 학장이 되었으며 신청년에 팔불주의(八不主義)를 기고하면서 백화운동[1]을 주도했다. 이때 마오쩌둥과 악연이 생기는데, 수업을 멋대로 청강하던 사서 마오쩌둥에게 모욕을 주어 쫓아낸 것이다. 1919년 중국철학사대강 상권을 출판하여 듀이의 실험주의를 중국 구학술 연구에 적용시키는 국고정리 사업을 전개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 량치차오, 차이위안페이, 리다자오와 함께 적극적인 호인정부론을 주장하면서 북양정부의 정치개혁을 도모하였고 왕충후이 내각이 설립되자 그에게 남북화의, 군축을 실시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충후이 내각은 직예군벌의 압박 속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1922년 11월에 발생한 뤄원간 사건으로 붕괴되었다. 이에 후스도 호인정부론을 폐기하고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었으며 차이위안페이가 주장한 불인정운동을 따르게 되었다.

2.2. 국민정부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Hu_Shi.jpg
1940년의 후스

초기에는 다른 많은 중국 지식인처럼 자본주의와 의회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고, 1926년 소련 여행에서 영국보다도 소련을 본받아야 한다며 소련을 고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여행 중에는 중국에서 서구식 정당 정치가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에 호인정치를 주장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도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1925년 선후회의에 참석한 것 때문에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는 후스를 무력통일론자 우페이푸, 연성자치론자 천중밍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인물이라고 혹독하게 깠다.

원래부터 계급투쟁에는 반대하던 후스였기 때문에 1938년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반공주의 사상가로 거듭나 당시 대다수 중화민국의 청년 및 지식인들과 달리 중국공산당에 적대적이고 중국국민당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9년 <Conflict of Cultures>라는 논문을 발표해 서양화를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있자 세계화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하여 베이징이 함락되고 동북역치를 통해 중국 통일이 완수된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훈정을 실시하자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적 보장이 없는 체제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으며 중원대전 중에 장제스에게 약법 제정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여 중원대전 막바지인 1930년 8월 약법 제정을 주장했고 1931년 약법제정을 강행하다가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탕산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는 1차 양광사변으로 이어졌다.

30년대에 중국 지식인계에 발생한 독재와 민주 논쟁에서 민주헌정제를 지지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현대화만이 중국을 살릴 길이라 인식, 그 현대화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장제스 정권뿐이라 여겨 1935년 8월 장제스가 헌정과 다당제를 실시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장제스를 지지했다.
"모든 사회적 급진주의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절대 권력만이 근본 개혁이라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고 오직 폭력, 무제한의 공포적인 전제주의만이 완전하게 현존 질서 또는 그 재현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1941년의 발언.

중일전쟁 발발 이후 초기에는 저우포하이, 천궁보, 천부레이, 타오시성, 가오쭝우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화평을 주장했으나 왕징웨이 공작을 비롯한 매국적 밀약은 거부했다. 1938년부터 4년간 주미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45년부터 베이징대학 총장이 되었다. 옌시산 내각이 출범하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미국인이 온다면 빵도 있고 자유도 있을 것이고. 소련인이 온다면 빵은 있지만 자유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온다면, 빵도 없고 자유도 없을 것이다." [2]
美国人来了,有面包,有自由;苏联人来了,有面包,无自由;他们来了,无面包,无自由。
베이징에 남아달라는 공산당의 권유를 거부하고 베이징을 탈출하면서 남긴 말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합류시키기 위해 상당한 공작을 하였으며, 후스의 제자 우한[3] 등을 파견하여 후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후스는 '과거는 잊고 베이징대학 총장도 계속 맡게 해줄테니 베이징에 남으라'는 마오쩌둥의 권유를 뿌리치고, 베이징 함락 직전 난징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문화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반동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규정하고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후스는 장제스, 쿵샹시, 쑹쯔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동으로 취급되었다.

2.3. 국공내전 이후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과 충성심에 관련하여 긍정적인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1950년 10월 2일, 타임지와의 인터뷰.

주유엔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여 미국에 머물렀다. 타임지, 뉴욕 타임즈 등에 중국의 정통 정부와 지도자로서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하고, 대만의 지식인들과 중국국민당 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후 장제스에게 내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다당제 정치체제로 개혁하고 나서 국민대회 개최를 통해 정식으로 총통과 부총통을 선출함으로 법적 정통성을 회복하라고 권고했다. 장제스가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1954년 2월 19일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개최된 중화민국 국민대회 제1계 2차 회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어 단절된 국통이 다시 이어졌음을 축하하는 축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귀순한 14,000명 반공포로 중 대표 50명의 귀환 의식을 직접 주재했다.
"그대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귀환은 자리에 참석한 국민대회 위원뿐 아니라, 모든 대만인, 나아가 모든 세계인들을 흥분시키고, 대륙의 수많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희망을 줄 것이다."

1958년 대만으로 영구귀국하여 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대만에서도 자신의 강경한 개혁 사상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와 과학을 위해 중국을 서양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중체서용론자들을 비판했다. 1962년 11월의 강연에서 후스는 동양문화는 정신문화, 서양문화는 물질문화로 이분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며 동양에는 정신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까버리고 과학과 근대문명이야말로 고도의 정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과 후스에 대한 옹호가 이어지는 등 학술 논쟁이 이어졌다.[4] 유교 이데올로기는 역대 전제 정권의 정치적, 권력적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 하여 신문화운동 전후로 크게 비판받았다. 논쟁은 격렬했지만 뿌리깊은 '중체'에 대한 관념이 늘 중화인의 기저에 논재했고, 각자 평행선을 달렸던 전반서화론과 중체서용론은 1960년대 타이완 섬에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파일:胡適與蔣介石.jpg
1958년 4월, 장제스와 후스

이후로도 후스는 장제스에게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3당 훈정을 종식하고 민주 개혁을 시행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장제스의 3선을 반대하고 중화민국 내부의 장제스 비판 세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여전히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반공역량 결집을 위해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3당 훈정 외의 정당을 창당하는 일을 비판하는 등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레이쩐 등의 신당 창당 운동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본인이 참여하는 것은 끝까지 거부했다. 하지만 반역 혐의로 체포된 레이쩐이 사실 동상을 세워 마땅한 인물이라 칭송하며 그를 체포한 것은 세계의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라고 혹독하게 까는 등 국민당 일당독재에도 날을 세웠다.

다른 사람들같으면 진작에 숙청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후스의 국제적 명망은 이미 국민당 정권에서 건드리기 껄끄러울 정도의 만렙이었는데다가 어찌되었든 간에 국민당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거물 인사이다보니 불이익은 없었다. 북양정부, 국민정부 시절부터 사회개혁 운동에 참가해온 국내적 명망 만렙에 듀이의 제자와 외교관 경력으로 국제적 명망조차 만렙인 후스가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국민당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네 정통성 깎아먹으면서 동시에 국제적 반발까지 일으킬 수 있는 후스 타도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후스가 리쭝런처럼 미친 척하고 중공에라도 가버린다면 국민당의 위신은 이만저만 박살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중국의 수많은 세력들과 싸워오면서 성격도 꼬장꼬장했던 후스 역시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중화문명의 우수성으로 대륙광복을 할 것이라는 장제스에게 "그 중화민족의 우월성이란거 죄다 전 세계 어느 문명 가도 있는건데 헛소리 ㄴㄴ. 총통의 애국심이 너무 지나치신 모양이다"라고 장제스가 발언을 끝내자마자 그의 면전에서 빈정댈 정도의 인물이었다. 당시 장징궈가 장악한 대만경비총사령부가 위대한 중화민족의 문명을 업수이 여기는 반동들은 죄다 남중국해의 고깃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서릿발같이 호령하는 가운데 이는 엄청난 발언이었지만 레이쩐 등을 반역죄로 체포해서 조질 수 있었던 국민당도 후스만큼은 직접 공격할 수 없어서 간접적으로 언론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웃기는 짬뽕이라고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하며 무시했고, 후스의 존재의미를 알고 있었던 대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후스 옹호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오의 문성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친정부 어용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2월 4일, 회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 시점에서 국민당에 대해서 온건한 비판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후스가 사망한 후 대만의 반정부 세력들은 모두 무력화되어 국민당 일당독재는 더욱 강화된다.

3. 여담

로크를 비롯한 기독교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철학자였으나 정작 자신은 무신론자였다.

후스의 차남 후쓰두(胡思杜)[5]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서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에 남았고, 1950년 인민일보상에 "나의 아버지 후스를 비판함 《对我的父亲——胡适的批判》" 이라는 논설을 발표할 정도로 중공정권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어 탕산철도학원 (이후 쓰촨으로 이전하여 서남자우퉁대학으로 이름을 바꿈) 의 마르크스-레닌주의학 교수로 일했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백화제방 백가쟁명"때 인민일보상에서 "좀 더 자유로운 교육이 필요하다"며 공산당을 비판했다가, 이후 벌어진 마오의 반격인 "반우파 투쟁" 때 반동으로 비판을 받고 1957년 목을 매서 자살한다. #

장남 후쭈왕(胡祖望) 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남았고, 그 아들인 손자 후푸도 미국에서 관리를 했다.

루쉰은 후스가 '제국주의의 군사(軍師, 책사)'라고 비난하였다. 후스는 중국 문화 및 민족성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다섯 귀신'으로 지칭하며 비판했는데, 뒤에 '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영향이 없다'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부인하는듯한 문구를 넣었기 때문.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되는 김준엽 교수가 4.19 혁명 이후 대만을 방문했을 때 이 사람과 직접 만나서 한국의 4.19 혁명에 대한 감상이 어땠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회고록 <장정 5>에 두 사람이 만남을 가지고 나서 같이 찍은 사진이 실려있다. 중국 근현대사 최고 아이돌(?)인 후스와 직접 만나게 된 김준엽은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웠는지 자서전 곳곳에 후스에 대한 존경심을 많이 피력하기도 했다. 애초에 김준엽 본인이 중국사 전공이기도 했고.

希望(희망)이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1921년 여름 윈난성 쿤밍시 시산구에 갔을 때 친구와 아내가 난초를 줬는데 베이징에 돌아와서 키우지만 꽃이 피지 않자 이 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1978년 대만에서 이 시에서 따와 가사를 만들 때 일부 바꾸고, 음을 붙여서 蘭花草(兰花草, Orchid (Grass), lan hua cao, 난화초)라는 곡을 만들어 1979년 銀霞(은하)가 발표했다. 1987년 라이브. 한국의 쿠팡에서 운용하던 차량이 이 곡을 후진벨로 썼다. 뜬금없이 왜 대만 가요를 썼는지는 의문. 안 나오는 차량도 많고 2010년대 중후반 새벽 소음공해 민원 우려 때문에 점차 사라졌다. 링크, 링크 2

민두기 교수가 큰 관심을 표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후에는 흔적도 찾기 힘들지만 민두기 교수는 후스 평전인 <중국에서의 자유주의 실험>(지식산업사, 1997)을 집필하기도 했다.

4. 저서

5. 매체에서

파일:건당위업후스.jpg
건당위업에 나온 후스. 사진에서 맨 왼쪽이 천두슈, 가운데가 리다자오

중국공산당의 창당 일대기를 다룬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중국계 미국 배우 오언조가 분했다. 베이징 철학과 교수과 학생들이 참여한 대토론회에서 좌파인 진독수, 이대조에 동조하여 완전 보수파인 구홍명과 대립하지만 러시아 방식에는 선을 긋는 중도파로 나온다.

멋대로 청강하는 마오쩌둥에게 '베이징대학에는 베이징대학만의 방식이 있음'을 이야기 했을 뿐 결국 청강을 허락하는 모습으로 연출했다. 실제 일화처럼 모욕을 주어 쫒아내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훈훈함을 연출하기 위한 어른의 사정?[7]

대체역사물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에서는 북양정부에서 호인정부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총통자리에 오른다. 원래역사에서 장제스를 짜증나게하던 비판 실력은 어디안가서 툭하면 우페이푸 신경을 빡치게 만든다.# 물론 후스 본인의 단점도 들어나는 이벤트가 있는등 마냥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진않는다.## 특이하게도 푸이와 친구이다.#

6.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외교부장
파일:대만 외교부 로고.svg
3대 4대 5대
푸빙창 후스
(1949년 6월 12일 ~ 1949년 10월 1일)
엽공초

7. 참고문헌



[1] 입말과 완전히 유리된 서면어인 한문 대신 입말에 가까워 상대적으로 쉬운 백화문(특히 북경어 백화문)을 쓰자는 운동. 오늘날 표준 중국어 문어체는 북경어 백화문에서 유래한다.[2] 물론 이는 마오쩌둥이 극도로 막장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한 말이었겠지만, 정작 미국은 장제스 정부를 제거하려 한 전력이 있고(대륙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두 번),2차대전 직후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는 기근이 일상이었고 약탈도 극심했다. 참고로 프랭크 디쾨터의 주장에 따르면 2차대전 직후 러시아 치하 만주에서는 무려 20억달러 어치의 물건들이 뜯겨나갔다고 추정되기도 한다.[3] 이후 베이징 부시장을 지냈으며 만력제의 능 발굴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해서파관 사건으로 참혹하게 조리돌림당했고 후스는 그걸 보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논평했다.[4] 철학적 논쟁 이외에도, 개인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충효인의예지신과 예의염치 등을 강조했던 장제스와 전면으로 충돌했던 주장이었다.[5] 후스의 컬럼비아 대학교 유학시절 은사 존 듀이 교수의 중국이름 杜威에서 한글자 따서 지은 이름이다.[6] 자서전이다.[7] 현재 대만에서 중국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범록연맹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범람연맹의 원조격인 후스를 굳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 듯 하다. 마찬가지로 장제스뿐만 아니라 바이충시, 쉐웨와 같은 국민당 장성들도 공산당 입장에서 원쑤들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나오는 선전영화나 선전드라마에서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카리스마는 있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1970~80년대 선전영화들은 졸장부 소인배 겁쟁이로 그려지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