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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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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b3775><colcolor=#fff> 중화민국 제4대 외교부장
후스
胡適(호적) | Hu Sh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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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후홍싱 (胡洪騂:호홍성)
출생 1891년 12월 17일
청나라 강소성 소송태도 송강부 천사청(川沙廳)
(現 중국 상하이시 푸둥신구 천사신진)
사망 1962년 2월 24일 (향년 70세)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베이현 난강진
(現 타이베이시 난강구)
재임기간 제4대 외교부장
1949년 6월 12일 ~ 1949년 10월 1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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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b3775><colcolor=#fff>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 / 박사)
원적 안휘성 휘녕지광태도 휘주부 적계현
(現 중국 안후이성 셴청시)
사상 중국식 자유주의, 실용주의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대만)
직업 철학자, 외교관
희강(希彊) → 적지(適之)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정치를 말하다2.3. 호인정부론 주장2.4. 국민정부 시절2.5. 국공내전 이후
3. 사상
3.1. 자유민족주의
3.1.1. 자유주의3.1.2. 민족주의
3.2. 실험주의3.3. '전반서화'론와 그 변화3.4. '관용'론과 그 굴절3.5. 인생관3.6. 기타
4. 가족5. 여담6. 저서7. 매체에서8. 주요 경력9. 참고문헌10. 둘러보기

1. 개요

중화민국실용주의, 자유주의 철학가, 문학가, 외교관, 관료, 교육자.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Hu_Shi2.jpg
1925년의 후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주관적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호적문집 제6책 182쪽.

후스는 청나라 강소성 송강부 천사청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선교사 쑹자수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부친인 호전(胡傳, 1841~1895)은 안후이성 상좡촌의 중하급관료로, 후스가 불과 4세일 때 사망하였으며 후스는 전통 유교 집안을 따라 사서오경의 경전 교육을 받았다. 이후 1904년부터 후스는 상하이의 신식 학교에 다니며 서구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후스가 17세가 된 1908년 모친은 그를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나, 후스는 거부하고 1910년 8월 16일 공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 유학했다.

후스는 미국에서 1915년 9월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 존 듀이 밑에서 교육학실용주의 철학을 수학했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1917년 중국으로 돌아와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다만 귀국 후 후스는 전통 유교 집안에서 억압받아온 모친을 동정하여 모친의 뜻에 따라 전족을 하고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와 정략결혼을 해 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후스로 하여금 중국 전통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문과대 학장이 되었으며 <신청년>[1]에 팔불주의(八不主義)를 기고하면서 백화문 운동[2]을 주도했다. 이때 마오쩌둥과 악연이 생기는데, 수업을 멋대로 청강하던 사서 마오쩌둥에게 모욕을 주어 쫓아낸 것이다. 1919년 중국철학사대강 상권을 출판하여 듀이의 실험주의를 중국 구학술 연구에 적용시키는 국고정리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 후스는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 왔는데, 이는 1917년 7월 후스가 중국으로 귀국한 직후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후스는 귀국 도중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장쉰이 일으킨 장훈복벽 소식을 들었고, 이후 상하이에 귀국해 보니 중국에서는 출판계와 교육계가 모두 침체된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후스는 중국이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는 장훈복벽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향후 20년 동안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사상과 문예 방면에서 중국 정치를 일으킬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1910년대 후스가 정치에 대해 말한 건은 단 한 건으로, 천두슈가 간행하는 <매주평론> 제31호에 실은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주의를 적게 말한다> 뿐이었다. 이는 1919년 6월 잡지 발기인인 천두슈가 체포되어 버리자 후스가 대신 잡지를 편찬하게 되어 쓴 글로, 여기서 후스는 "'외국에서 수입된 주의'는 중국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했고 <문제와 주의> 논장을 제기하며 "주의(근본 해결)를 크게 말하고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것을 두려워하고 쉬운 것을 추구하는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2.2. 정치를 말하다

"왜 이렇게 비겁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청조 말 정부는 권위로 (혁명) 지사들을 죽였지만, 지사들은 날로 많아졌고, 혁명당은 죽이면 죽일수록 날로 많아졌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이후 정부는 정객들을 매수하였고, 이후 10년의 시간은 중국에 돼지들만 가득 차게 했다. 지사라는 명사는 마침내 사전에서 사라졌다! 신문화, 학생운동,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등 어느 것도 큰 소리로 주장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자가 내일은 정객이 되고, 오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자가 내일은 교육부 차관이 된다. 이 돼지들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돼지 냄새가 풍긴다. 이 돼지들은 또한 돼지를 인생의 본분으로 여긴다. 자신을 파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 돼지의 세계 속에서 민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조직 또한 의지할 곳이 없다."
후스, 1923년 2월 4일 <노력주보> 제40호에 실린 <차이위안페이는 소극적인가>

다만 후스가 스스로와 약속한 '20년간 정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는 서약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결국 후스는 1922년 5월 7일 정치평론지인 <노력주보>를 창간하여 국내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후스는 자신이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주의만 크게 주장하고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 새로운 여론'과 '국내의 부패한 정치에 격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지식인들은 혁명적으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나키즘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후스는 이에 반대하며 자유주의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특히 '불관용, 부자유의 정치제도를 만들어내 폭력과 강제력으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한다'며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에 크게 반대했다.

한편, 당시까지만 해도 명망높았던 후스가 정치평론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하자 주변에서는 후스를 응원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었는데, 후스는 두 의견 모두 받아들이며, 학문과 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세 갈래 길에서 (5.4 운동부터 지금까지) 일찍이 3년을 지체했다. 지금 나는 나의 가슴을 억누르면서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아직 한 발은 동양의 길을 밟고 있고, 한 발은 아직도 서양의 길을 헤매고 있다. 또한 내 머리는 여전히 원래 걸었던 길을 바라보고 있다."
"나의 친구들아, 나는 일찍이 변절하지 않았다. 나의 태도는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단지 나의 재료와 실례가 바뀌었을 뿐이다. (중략) 나의 정신이 정치에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은 확실하다. 철학은 나의 직업이고 문학은 나의 오락이고 정치는 다만 내가 참지 못해서 새롭게 노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후스, 1922년 6월 18일 <노력주보> 제7호에 실린 <나의 기로> 中.

이후 제1차 직봉전쟁직계군벌 우페이푸의 승리로 끝나고 쑨원이 불법총통으로 지목했던 대총통 쉬스창이 1922년 6월 2일 쫓겨나게 되자 남북의 화의를 꾀하기 위해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교육자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쑨원하야 촉구선언>을 쑨원에게 보냈다. 선언에서 이들은 쉬스창이 이미 퇴위했으니 쑨원도 동반 하야하여 남북의 통일을 이루자고 촉구했다. 무력통일에 반대하고 연성자치론을 지지하는 후스의 눈에 쑨원은 그저 '또다른 군벌 1'에 불과했고 전혀 대업을 이룰 만한 인재로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들의 호법의 공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이미 국민에게 공인된 바이다. 지금 베이징의 불법총통이 이미 퇴직했고, 전에 국회를 해산하라고 명령했던 총통이 6년간의 불법명령을 취소하고 국회를 회복했다. 호법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남북이 일치하니 더 이상 무력을 쓸 필요가 없다."
1922년 6월 4일 베이징 신문 <천보>에 실린 <쑨원하야 촉구선언>.

후스의 이같은 입장에 남방의 국민당은 1922년 6월 7일 <민국일보> 논평에서 "남의 괴뢰가 되어 의병을 막는다"며 그를 비난하였으나, 곧이어 6월 16일 천중밍이 일으킨 영풍함 사건에서도 후스는 쑨원을 비판하고 천중밍을 지지하였다.
"쑨원천중밍의 충돌은 그들의 주장이 충돌한 것이다. 천 씨는 광동 자치를 주장하여, 모범적 신광동을 만들려고 했다. 쑨 씨는 광동을 근거로 하여 중화민국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주장 모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쑨 씨는 그의 주장으로 인해서 안목을 잃었다. 무리한 방법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민국) 8년 안복부의 정책과 연합하려고 했고, 11년에는 장쭤린의 정책과 연합하고자 했다."
후스, 1922년 6월 25일 <노력주보> 제8호에 실린 <저일주> 中.

2.3. 호인정부론 주장

제1차 직봉전쟁으로 우페이푸가 장쭤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당시 지식인들은 봉천군벌은 싫어한 반면 우페이푸는 5.4 운동 시기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안휘군벌의 친일정부를 반대해온 등의 행보로 여론은 그를 '모범군인', '애국군인', '민주주의를 반대하지 않는 군인'으로 평가하며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 여겼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우페이푸에게 기대를 걸었고, 양광에서 뻗대고 있던 쑨원과도 화해하여 남북화의를 이루어 주기를 바랬다. 이에 후스와 차이위안페이 등 15인은 1922년 5월 14일 <노력주보> 제2호에 <우리들의 정치주장>을 실었는데, 이 문건은 표면상 차이위안페이 명의로 선언되었지만 실제로는 후스가 집필한 내용이었다. 이들은 <최저한의 요구>와 <6개항 건의>를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헌정의 정부
1. 공개된 정부
1. 계획적 정치
<최저한의 요구>의 내용.
1. 남북의 화해와 대화
1. 민국 6년의 국회 회복
1. 군비의 축소
1. 공무원의 축소
1. 선거제도 개선
1. 재정수지 공개 및 개혁
<6개항 건의>의 내용.

이것이 후스가 량치차오, 차이위안페이, 리다자오 등이 주창한 <호인정부론>이었다. 이들은 '좋은 사람(호인)'에게 정치를 맡겨 북양정부의 정치개혁을 도모하고자 했고, 마침내 <우리들의 정치주장>에 서명한 16인 중 왕충후이(국무총리), 뤄원간(재정총장), 탕이화(교육총장) 3인이 입각한 '호인정부'인 왕충후이 내각이 수립되자 후스는 크게 고무되었다.[3] 그러나 애초에 교육총장 탕이화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교육과 전혀 관계없는 의사에 불과했으며, 재정총장 뤄원간 역시 재정 전문가가 아니라 사법 전문가에 가까운 등 내각은 그 구성부터 순탄치 않았다.

시작부터 어긋난 내각이었지만 탕이화는 뭐라도 해보려는 요량으로 전국 학제회의를 열어 교육제도와 관련 법규를 제정하려고 랬는데, 고작 1주일의 회의만에 제도와 법을 만든다는 뜻이었기에 후스는 크게 불만을 품었다. 뒤이어 남북화의,백화문 운동과 교육계 봉급 체불 문제에 있어서도 정부가 무능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참다못한 후스가 이들 셋을 불러 모아 외교총장 구웨이쥔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마저 파행으로 끝나고 만다. 이 회의를 다룬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회의 중 모군이 계속해서 충고했고, 박사는 참지 못해서 질책하다가 서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차 화가 났고 주인이 말려서 마침내 마쳤다."

다만 후스는 이 기사의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며, "그래도 왕 내각에 계획이 있다고 하니 일단 양보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중추절까지 그들의 대정방침을 선포해주기를 기대하기로 했다"고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후스의 바람과는 달리, 대총통의 꿈을 안고 있던 직계군벌의 차오쿤은 이들 왕충후이 내각을 붕괴시킬 술수를 꾸미고 있었다. 결국 군벌과의 알력 다툼 속에서 1922년 11월 뤄원간 사건이 일어나자 호인내각은 붕괴되었다. 후스도 뤄원간 사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으나 이해 호인정부론을 폐기하고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곧이어 차이위안페이가 호인정부 와해에 분개하여 베이징대학 교장직을 사직함과 동시에 <불합작선언>을 발표하자 천두슈 등이 이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행보라며 비판했는데, 후스는 차이위안페이를 적극적으로 감싸며 옹호하였다.
"혼탁하고 아무런 부끄럼 없는 암흑의 중국에서 이 나약한,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민족 중에서 차이 선생의 '불합작주의'는 성공할 수가 없다 (중략) 그러나 바로 이 국가의 혼란과 암흑 때문에, 나약함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이 민족 때문에 차이 선생의 이러한 정의로운 호소가 있어야 한다. 자주자주 일어나고 부단히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걸끄럽게 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적당히 잘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걸끄러움과 적당히 잘 넘어가지 않는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이 죽은 것이다."
후스, 1923년 1월 28일 <노력주보> 제39호에 실린 <차이위안페이의 '불합작주의'> 中.

중국공산당 총서기 천두슈는 후스가 <호인정부론>을 주장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도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1925년 선후회의에 참석한 것 때문에 후스를 무력통일론자 우페이푸, 연성자치론자 천중밍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인물이라고 혹독하게 깠다. 그와 별개로 후스와의 친분은 유지했지만은. 후스 역시 원래부터 계급투쟁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 중화민국의 청년 및 지식인들과 달리 중국공산당에 적대적이고 중국국민당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만 다른 많은 중국 지식인처럼 자본주의와 의회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었고, 1926년 소련 여행에서 영국보다도 소련을 본받아야 한다며 소련을 고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여행 중에는 중국에서 서구식 정당 정치가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 국민정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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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의 후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하여 베이징이 함락되고 동북역치를 통해 중국 통일이 완수된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들어서자 국민당이 실시하는 훈정 체제가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적 보장이 없는 체제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으며 중원대전 중에 장제스에게 약법 제정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여 중원대전 막바지인 1930년 8월 약법 제정을 주장했고 1931년 약법제정을 강행하다가 후한민과의 의견충돌로 탕산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는 제1차 양광사변으로 이어졌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당시 흥분한 지식인과 민중과는 달리 침착하게 국제적 중재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했다. 이후 30년대에 중국 지식인계에 발생한 <민주와 독재> 논쟁에서 민주헌정제를 지지했고, 1933년에는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여하여 잠깐 활동했으나 내부 노선 차이로 제명되어 활동을 그만둔다. 이후 현대화만이 중국을 살릴 길이라 인식, 그 현대화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장제스 정권뿐이라 여겨 1935년 8월 장제스가 헌정과 다당제를 실시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장제스를 지지했다.
"우리는 국가의 입장에 서서 양광의 지도자들에게 고한다: 이번에 이웃지역을 위협하며 진격하는 상황에서, 어떤 대단한 간판을 내세워도 내전을 선동한다는 큰 책임은 줄어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좋은 구호라도, 국가를 분열시키고 민족을 위기로 모는 큰 죄악을 속죄하지는 못한다.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다는 첫 번째 조건은 하나의 통일된 정부 하에서 조성된 하나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말한다. 나라에 수많은 국민당에 반대하거나 난징정부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9. 18 이후 통일의 필요성을 깊게 인식하고, 편견을 과감하게 버리고, 간극을 없애고, 국가의 입장에서 정부를 옹호해야 한다."
후스, 1936년, 제2차 양광사변에 대한 입장.

이후 1936년 제2차 양광사변 당시에는 위와 같이 천지탕을 비판했고, 그해 말 벌어진 시안 사건에 대해서도 "장쉐량과 그의 부하들의 이번 거동은 국가를 배반한 행위이며, 통일을 파괴한 행위이고, 국가와 민족의 힘을 파괴한 것이며, 국가와 민족의 진보를 저해한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며 크게 비난했다.
"나 자신의 이성과 지성과 (지적) 훈련을 가지고서는 나는 즉시항일을 주장할 수 없다. 나의 양심을 갖고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피와 살을 가지고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현대적 무기 앞에 목숨을 내놓으라고 붓끝으로 돌아세울 수는 없다"

(열정적인 항일 주장에 대해) "도대체 주전을 주장하는 '우리'는 누구이고 싸움터에 나가 희생될 '그들'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쪽에 속하는가?"
1930 년대 초 민권운동을 통해서 본 국민정부의 성격, 김창규, 2000.06. 17p.

중일전쟁 발발 이후 초기에는 저우포하이, 천궁보, 천부레이, 타오시성, 가오쭝우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화평을 주장했으나 1938년부터 4년간 주미 중화민국 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왕징웨이 공작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설령 후스가 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해도 그러한 매국적 밀약에 동의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이후 1945년부터 베이징대학 총장이 되었다. 옌시산 내각이 출범하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All social radicalism must inevitably lead to political dictatorship, because only absolute power can achieve the task of radical revolution; only violence and unlimited terroristic despotism can accomplish the complete overthrow of the extant order and prevent its return or revival."
"모든 사회적 급진주의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절대 권력만이 근본 개혁이라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고 오직 폭력, 무제한의 공포적인 전제주의만이 완전하게 현존 질서 또는 그 재현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1941년 7월에 발표한 글 <The Conflict of Ideologies>의 일부.
"美國人來了,有麵包,有自由;蘇聯人來了,有麵包,無自由;他們來了,無麵包,無自由。"
"미국인이 온다면 빵도 있고 자유도 있을 것이고, 소련인이 온다면 빵은 있지만 자유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온다면, 빵도 없고 자유도 없을 것이다."[4]
베이징에 남아달라는 공산당의 권유를 거부하고 베이징을 탈출하면서 남긴 말.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합류시키기 위해 상당한 공작을 하였으며, 후스의 제자 우한[5] 등을 파견하여 후스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후스는 '과거는 잊고 베이징대학 총장도 계속 맡게 해줄테니 베이징에 남으라'는 마오쩌둥의 권유를 뿌리치고, 베이징 함락 직전 난징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후스를 '문화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반동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규정하고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후스는 장제스, 쿵샹시, 쑹쯔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동으로 취급되었다.

2.5. 국공내전 이후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과 충성심에 관련하여 긍정적인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1950년 10월 2일, 타임지와의 인터뷰. 아들 후쓰두가 자신을 반동분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후 주유엔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여 미국에 머물렀다. 타임지, 뉴욕 타임즈 등에 중국의 정통 정부와 지도자로서 중화민국과 장제스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하고, 대만의 지식인들과 중국국민당 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후스는 애초에 중화민국 정부의 정치개혁을 위해 대만으로 건너갔기에,[6] 장제스에게 내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다당제 정치체제로 개혁하고 나서 국민대회 개최를 통해 정식으로 총통과 부총통을 선출함으로 법적 정통성을 회복하라고 권고했다. 장제스가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1954년 2월 19일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개최된 중화민국 국민대회 제1계 2차 회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어 단절된 국통이 다시 이어졌음을 축하하는 축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귀순한 14,000명 반공포로 중 대표 50명의 귀환 의식을 직접 주재했다.
"그대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귀환은 자리에 참석한 국민대회 위원뿐 아니라, 모든 대만인, 나아가 모든 세계인들을 흥분시키고, 대륙의 수많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희망을 줄 것이다."

1958년 대만으로 영구귀국하여 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대만에서도 자신의 강경한 개혁 사상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와 과학을 위해 중국을 서양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중체서용론자들을 비판했다. 후스는 동양문화는 정신문화, 서양문화는 물질문화로 이분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며 동양에는 정신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까버리고 과학과 근대문명이야말로 고도의 정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과 후스에 대한 옹호가 이어지는 등 학술 논쟁이 이어졌다.[7] 유교 이데올로기는 역대 전제 정권의 정치적, 권력적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 하여 신문화운동 전후로 크게 비판받았다. 논쟁은 격렬했지만 뿌리깊은 '중체'에 대한 관념이 늘 중화인의 기저에 논재했고, 각자 평행선을 달렸던 전반서화론과 중체서용론은 1960년대 타이완섬에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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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4월, 장제스와 후스

이후로도 후스는 장제스에게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3당 훈정을 종식하고 민주 개혁을 시행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장제스의 3선을 반대하고 중화민국 내부의 장제스 비판 세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여전히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반공역량 결집을 위해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3당 훈정 외의 정당을 창당하는 일을 비판하는 등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레이전 등의 신당 창당 운동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했으나, 본인이 참여하는 것은 끝까지 거부했다. 하지만 반역 혐의로 체포된 레이전이 사실 동상을 세워 마땅한 인물이라 칭송하며 그를 체포한 것은 세계의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라고 혹독하게 까는 등 국민당 일당 독재에도 날을 세웠다.

다른 사람들같으면 진작에 숙청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후스의 국제적 명망은 이미 국민당 정권에서 건드리기 껄끄러울 정도의 만렙이었는데다가 어찌되었든 간에 국민당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거물 인사이다보니 불이익은 없었다. 북양정부, 국민정부 시절부터 사회개혁 운동에 참가해온 국내적 명망 만렙에 듀이의 제자와 외교관 경력으로 국제적 명망조차 만렙인 후스가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국민당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네 정통성 깎아먹으면서 동시에 국제적 반발까지 일으킬 수 있는 후스 타도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후스가 리쭝런처럼 미친 척하고 중공에라도 가버린다면 국민당의 위신은 이만저만 박살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중국의 수많은 세력들과 싸워오면서 성격도 꼬장꼬장했던 후스 역시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중화문명의 우수성으로 대륙광복을 할 것이라는 장제스에게 "그 중화민족의 우월성이란거 죄다 전 세계 어느 문명 가도 있는건데 헛소리 ㄴㄴ. 총통의 애국심이 너무 지나치신 모양이다"라고 장제스가 발언을 끝내자마자 그의 면전에서 빈정댈 정도의 인물이었다. 당시 장징궈가 장악한 대만경비총사령부가 위대한 중화민족의 문명을 업수이 여기는 반동들은 죄다 남중국해의 고깃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서릿발같이 호령하는 가운데 이는 엄청난 발언이었지만 레이전 등을 반역죄로 체포해서 조질 수 있었던 국민당도 후스만큼은 직접 공격할 수 없어서 간접적으로 언론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웃기는 짬뽕이라고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하며 무시했고, 후스의 존재의미를 알고 있었던 대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후스 옹호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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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의 후스

하지만 우궈전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친정부 어용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2월 24일, 중앙연구원에서 거행된 연회 도중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뒀다. 장제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신 문화 중 구 도덕의 본보기, 구 윤리 중 신 사상의 모범”이라는 만련(挽聯)을 영전에 선사했다.[8] 마오쩌둥 역시 후스가 죽기 전인 1957년 전국의 지식인 대표들을 접견했을 때 “신문화운동에 있어서 그는 공로가 있다. 따라서 단번에 부정할 수는 없으며, 실사구시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21세기가 되면 후스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사망 시점에서 국민당에 대해서 온건한 비판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후스가 사망한 후 대만의 반정부 세력들은 모두 무력화되어 국민당 일당 독재는 더욱 강화된다.

3. 사상

3.1. 자유민족주의

"진정한 개인주의(자유주의)는 ― 개성주의(individuality)를 말한다. 특징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독립사상으로 다른 사람의 귀를 나의 귀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을 나의 눈으로 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유 능력을 나의 사유 능력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이 자기의 사상 신앙의 결과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권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금이나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진리만을 위하고 개인의 이해는 따지지 않는 것이다."
<비개인주의적 신생활>『호적작품집』 제6권, 132페이지.

후스의 사상은 널리 알려진대로 자유주의로 대표되지만, 후스는 일생 내내 자유주의, 세계주의와 함께 민족주의 입장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다만 당시 중국의 상황에 따라 후스 사상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비중은 줄곧 달라져 왔다. 크게 후스는 5.4 운동 이후~1930년대 및 국공내전 이후부터는 자유주의를 주로 주장했고, 1930년대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점부터는 민족주의도 함께 주장했다.
"오직 자유만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고, 오직 민주정치만이 전 민족의 힘을 단결시켜 전 민족의 역경을 해결할 수 있으며, 오직 자유와 민주만이 우리에게 사람 냄새가 나는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후스, 1947년.

후스의 이러한 경향은 자유민족주의로 발전하여, 위과 같이 자유와 민족을 함께 강조하기도 했다. 후스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이렇게 개인과 사회(민족)을 함께 결부시켜 생각함으로써 그 역시 서구적 기준의 자유주의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후스의 사상은 점차 보수주의적으로 진행되게 된다.

3.1.1. 자유주의

"자유만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해방할 수 있고, 민주 정치만이 전 국민의 역량을 한데 모아 민족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자유 민주만이 우리에게 인격을 갖춘 문명사회를 키워낼 수 있다."
후스, <우리는 우리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호적지선생년보장편초고 제6권.

후스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엄복의 <천연론>[9] 및 미국 유학 당시의 경험과 스승 존 듀이신자유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민국시대 내내 중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가진 후스답게 그의 자유주의는 하술할 실험주의, 관용론, 인생관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후스는 귀국 후인 1918년 6월 15일 <신청년> 제4권 제6호의 <입센주의(易蔔⽣主義)>라는 글에서 "사회와 국가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이 없다면, 술에 누룩이 없고, 빵에 효모가 없고, 사람에게 뇌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사회와 국가는 개량되고 진보할 희망도 없다"고 말하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이 있어야만 자유로운 가정, 자치적 사회, 공화적 국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후스가 '자유주의'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한 글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일전쟁 후 국공내전이 진행되며 중국에서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불관용', '비민주'적 정서가 심해지자 1948년 8월 1일 <자유주의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발표를 시작으로 후스는 다시 한번 자유주의를 꺼내들게 된다.
"‘자유주의’에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주의'가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는 당연히 나의 견해일 뿐이므로,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자유주의의 가장 간명한 뜻은 자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략) '자유주의'는 인류 역사상 자유를 주장하고, 자유를 숭배하고,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며, 자유를 충실히 하고 넓히고자 하는 대운동이다."
후스, 1948년 9월 4일 베이핑 방송에서 연설한 <자유주의> 中.

그는 인류는 종교, 사상, 정치 등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다. 또한 후스는 자유주의를 자유·민주·관용·점진적 개혁으로 정의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관용은 그 전제가 되고, 자유와 민주는 점진적 개혁으로 실현된다'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병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다만 만주사변 이후 후스의 자유주의 사상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어져 중국 전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이 됨에 따라, 후스는 다음과 같이 자유가 고대 중국에도 있었다는 주장도 하게 된다. 젊은 시절 후스가 중국 전통에 얼마나 비판적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의아한 부분.[10]
"'자유'라는 의미와 이상, “자유”라는 명사는 밖에서 들어온 것도, 서양 것도 아니라, 중국 고대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자유"에서의 어법을 도치어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도치시키면 “유자(由自)”가 되고, 즉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다"라는 의미이며,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것으로, 외부로부터의 억압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후스, 1949년.

3.1.2. 민족주의

후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빨라지고 있던 1930년대부터 민족주의를 내세웠지만, 후스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후스는 1910년대 미국 유학생활 중 발표한 <중국유미학생월보>에서 이미 애국주의적 입장을 드러내었고, 이러한 입장은 일생 내내 변하지 않았다.

후스는 1913년 자신의 일기에서 세계주의를 설명하면서 "나의 세계주의를 말하자면, '세계주의란, 애국주의를 인도주의로 부드럽게 만든 것이다'"라며 간접적으로 애국주의를 긍정했으며 '협의의 민족주의'를 국가주의로 규정하고 반대한 반면 '광의의 민족주의'는 애국주의로 규정하고 긍정했다.
"오늘의 큰 우환은 협의의 국가주의에 있고, 우리나라가 반드시 다른 나라를 앞질러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 종족이 반드시 타 종족을 앞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후스, 1914년 10월 26일, 그의 일기.

다만 이후 후스는 전반서화론 등 세계주의와 자유주의 성향만을 내보였을 뿐, 그의 민족주의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했던 민족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점차 드러나게 된다. 이후 그는 중국이 통일되고 탄탄한 '현대국가'이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현대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민족주의를 제시하며 제도나 문화 등을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1910년대 자신이 가졌던 '협의의 국가주의'와도 선을 그었다.
"민족주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천박한 것이 배외적인 것이다. 그 다음이 본국의 고유한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다. 가장 높고 가장 어려운 것이 민족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가장 최후의 길이 가장 어려우므로, 민족주의 운동이 종종 가장 쉬운 앞의 두 가지 길로 나아간다."
후스, 1935년.

그러나 1937년 국민당이 루산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후스는 국가주의와 일부 타협하며, "만일 하나의 중심사상이 과연 필요하다면, 그렇다면 '국가가 모든 것보다 높다'는 것을 공동 행동의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비친다. 물론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기는 했다.
"나는 나라를 구하는 법이 스스로 깊게 비판하고, 깊게 반성하고, 깊게 부끄러워하는 것에 있다고 깊게 믿는다. 자책의 결과로 아마도 스스로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 진작하여,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는 것일 것이다. (중략) 우리가 뉘우쳐야 한다고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민족주의에 반하라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협의의 민족주의자가 아닐 뿐이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서, 나라를 위해 간언하는 신하, 간언하는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지, 감히 병을 감추고 치료를 꺼리거나, 아첨하는 신하, 손해를 끼치는 친구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후스, 타오시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국 유학 후 줄곧 자유주의만을 주로 내세웠던 후스는 일본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도래하자 계속하여 자유주의, 민주주의, 인권만을 외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내재되어는 있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던 민족주의를 꺼내어 더 강하고 활기찬 중국이 되기를 바라였고,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된 '중국식 자유주의'자유민족주의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3.2. 실험주의

"한 무리의 새로운 인물들이 날마다 길드 사회주의,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또 계급투쟁과 잉여가치를 주장한다. 내정의 부패는 극에 달하고 있지만, 그들은 아마 보지 못했나 보다. 그들은 아예 사설이라든가 시평을 모두 취소하고 마르크스, 크로포트킨을 방패로 속인다.

(중략) 나는 2년 8개월을 기다렸다.[11]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현실정치에 대해서 말하려고 나섰다. 국내의 부패한 정치가 나를 분발시켰지만, 원인의 대부분은 최근의 「주의를 크게 말하고,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의 새로운 풍조에 격분해서 나선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정치는 나의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적게 말한다」를 주장하는 것이다."
후스, 1922년 6월 18일 <노력주보> 제7호에 실린 <나의 기로> 中.

후스는 애초에 중국의 실제 문제는 알아보지 않은 채 공산주의, 아나키즘만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늘어가는 것에 분개하여 정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후스의 정치주장은 줄곧 '실험주의(實驗主義, Experimentalism)'로 귀결된다. 후스가 주장하는 정치란 바로 이 '실험주의'를 행하는 것으로, 실용주의와도 맞닿은 면이 있다. 그는 실험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실험주의는 (중략) 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이다. 먼저 사실을 세심하게 찾아서 연구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가설을 제시하고, 다시 세심하게 실증한다. 모든 주의, 모든 학리, 모든 것이 참고 자료가 된다. 암시된 자료, 증거를 기다리는 가설, 이것은 절대로 천경지의(天經地義)의 신조가 아니다. 실험주의는 구체적인 사실과 문제를 중시한다. 때문에 근본 해결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하나 조금씩 나아가고 또 하나하나 지혜롭게 이끈다. 또 하나하나 실험한다. 그래서 진화한다."
후스, 1922년 6월 18일 <노력주보> 제7호에 실린 <나의 기로> 中.

후스의 실험주의는 생물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경험의 중시'와 스승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1919년 4월 잡지 <신청년>에서 <실험주의>라는 글을 실어 실험주의와 자신의 스승 존 듀이를 소개한 이래 죽을 때까지 실험주의를 믿어 왔다. 후스는 이러한 실험주의를 중국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2천 년 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온 전통적 가치에 관한 비판의식이 형성될 수 있으며, 실험주의가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대강하는 「근본해결」은 있을 수 없다.
1. 사실을 연구하면서 먼저 의문을 품고 그 후에 믿어야 한다.
1. 모든 원리와 통칙은 가설의 도구로 자신의 모든 주장 역시 증거를 기다리는 가정일 뿐이다.
1. 실험의 증거를 이용해 제출한 가설을 시험하고 시험의 결과로 자신의 믿음을 공고히 하며 타인의 의심과 반대를 없애야 한다.
1. 과학적 인생관의 첫 번째 글자는 ‘의심’이며 두 번째는 ‘사상’이고 세 번째는 ‘행동’이다.
호적의 연구방법론 성립 과정, 응용 및 그 영향에 대한 고찰, 양태근, 2012.1. 30p.

그는 중국 사상계에 논의되고 있었던 <문제와 주의> 논쟁[12], <과학적 인생관> 논쟁[13]에서 그러한 실험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만 후스의 실험주의는 '문제를 많이 연구하라'는 주장만 할 뿐,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단계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적용되지 못하고 이상주의적인 '주의'로만 남는 한계가 있었다.

3.3. '전반서화'론와 그 변화

후스는 1929년 <Conflict of Cultures>라는 논문을 발표해 전반서화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후스가 주장하였던 전반서화는 단순히 현대화 내지 세계화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화를 모조리 받아들여 중국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방적으로 바꾸자는 몹시 급진적인 이론이었다.

시간이 흘러 1935년 1월 10일 10명의 교수가 연명으로 <중국본위의 문화건설선언>을 발표하고,[14] 우징차오가 후스 등 전반서화론자들을 저격하면서 촉발된 <중국본위문화와 전반서화> 논쟁에서 그는 전반서화의 입장을 대변하며 중국문화는 보존하되 서양 문화에 대해서는 장점만 취하고 단점은 버릴 것을 주장하는 중국문화본위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신년 초에 사멍우, 허빙숭 선생 등 10여분의 교수가 발표한 <중국본위의 문화건설선언>은 이 2, 3개월 동안 국내 인사의 주의를 크게 끌었다. 나는 이 선언문을 자세히 읽고 실망을 느꼈다. (중략) 오늘의 중국에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정치의 형태 사회의 조직, 사상의 내용과 형식이 도처에 너무나 많은 중국고유의 재앙스런 특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많고 너무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좋은 법과 의미여도 중국에 오면 모두 이식된 귤나무가 탱자나무로 변하는 격이 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후스는 여기에서 중국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중국의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중국고유문화의 굳어진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지만 문화적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향후 문화 대변동의 성과는 바로 중국 본위의 문화"라며 전반서화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이후 후스는 '전반서화' 대신 '충분한 세계화'라는 용어를 대신 제안하게 된다.
"'전반서화'라는 구호가 뭇매를 맞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아마도 이 용어가 가지고 있는 어폐 때문인 듯하다. 이 용어의 어폐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반'에는 백분의 백 즉, 완전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백분의 구십구만 가지고서는 '전반'이라 할 수 는 없다 (중략) 그래서 나는 문화계 인사들에게 정중히 제의하고자 한다. 가치 없는 글자 혹은 용어와 관련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전반서화'를 말할 바에는 차라리 '충분한 세계화(充分世界化)'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후스, <충분한 세계화와 전반서화>, 호적문집 제5책, 454~455쪽.

실제로 후스는 천쉬징(陳序經)이 제시한 전반서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관련된 선행 연구에 따르면, 후스는 중국문화본위론자들의 보수적 경향과 절충에 반대하여 '의식적'으로 전반서화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세웠을 뿐, 실제로 중국이 100% 서양과 똑같아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며 그저 발전된 서양 문화를 재빨리 배워 중국이 부흥을 해낼 수 있게 '서양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는 전반서화론을 내세운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중국은 현실적으로 전반서화론을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전반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굳은 습관을 송두리째 바꾸기는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후스가 전반서화의 주장을 펼친 까닭은 그의 목표가 '전반서화'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닌, 전반서화를 이용한 '구국'에 있었기에 종국에는 그 입장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3.4. '관용'론과 그 굴절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며, 우리와 믿음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리석거나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관용’의 태도를 지키며, 우리의 새로운 믿음을 반대하는 이들 또한 ‘관용’의 태도로서 우리를 대해주기 바란다.”
후스, <'과학과 인생관' 차례>, 호적문집 제3책 163쪽. 1920년대 <과학과 인생관> 논쟁에서.

후스의 정치적 관용론은 1925년 11월 29일 베이징 군중이 신보(晨報) 신문사에 방화를 저지른 사건을 둘러싸고 천두슈와 논쟁하였던 일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후스는 천두슈에게 자유를 쟁취하는 유일한 원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자가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며, 나와 생각이 같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쟁취할 자격과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비판하였다.[15]

이후 국민정부 시기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유지되어, 1929년 3월 21일 <중국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와 필요시 인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훈정강령>을 채택하여 당국 체제를 강화하자 후스는 '사상의 자유를 속박하는 모든 명령과 기관을 폐지하고 당화교육를 취소하라'며 비난을 가했다. 이는 공산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후스가 반공주의를 내세운 까닭도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유재산의 폐지 같은 이유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명목 아래 불관용, 반자유적 정치제도를 만들어내고 폭력과 강제력으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8월에도 후스는 <자유주의는 무엇인가>를 발표해 동양(중국)의 자유주의 운동은 '자유(관용의 태도)'의 부재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다며, '야당을 받아들이고 소수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관용의 정신과 태도야말로 근대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고 자유주의와 관용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관용은 자유의 뿌리'이므로, 관용이 없다면 자유는 아예 말할 수도 없으며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최소한 상호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스는 이렇게 자유주의에 입각한 이러한 관용론을 통해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얻으려 했고,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의사 표현과 결정의 자유를 보장하여 민주정치의 체계를 바로 세우려 했다.
“나는 「관용과 자유」라는 글에서 관용의 태도가 자유보다 훨씬 중요하며, 자유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라 언급했다. (중략) 한 편으로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고, 또 한 편으로는 정부와 사회에서 힘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 위해서였기에, 나는 관용이 양쪽 모두의 일임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우리가 사상⋅언론 자유의 권리를 활용할 때 관용의 태도를 갖춰야 하며, 또한 정부 혹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역시 관용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후스, <관용과 자유>, 호적문집 제12책 838~839쪽.

다만 이러한 관용론은 국부천대 이후 점차 변화를 맞게 되는데, 1958년 5월 27일 자유중국사 환영회에서 후스는 정치적 약자인 야당에게도 '관용'의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1959년 3월 인하이광과의 논쟁에서도 그는 지식인들 역시 국민당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하이광 선생이 내 글(「관용과 자유」)을 읽은 후 글을 발표했는데, 그 역시 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중략) 하지만 인 선생은 똑같은 관용이라도 권력이 없는 자는 관용하기가 쉽고, 권력을 가진 자는 관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권력을 가진 자에게 더 많이 관용하라고 말해야지, 우리 같이 붓대를 잡은 보잘것없는 서생에게 관용을 논하지 말라 했다. (중략) 인 선생의 이 말을 나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오늘 나는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도대체 누가 권력을 가진 자인가? 병력과 정권을 가져야지만 권력이 있단 말인가?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서생들, 펜대 잡은 서생들도 나름대로 권력이 있지 않은가?

하얀 종이에 글을 써내면 일부 사람들의 호감과 동정, 그리고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힘이 바로 권력이다. 이 힘은 권력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원인이다. (중략) 우리 역시 약자가 아니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이기에 반드시 관용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후스, 호적문집 제12책 840~842쪽.

이 시기 후스는 '자유'를 보장받고자 국민당에 맞서던 과거와 달리 '관용'을 내세워 국민당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 대륙은 공산화되어 더 이상 자유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유일한 차선책이던 대만의 국민당 정부 또한 언론 통제와 탄압을 지속하며 여전히 자유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던 현실 앞에서 지식인의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보여진다.

3.5. 인생관

"현재 중국에는 ‘소년중국’의 적인 몇 가지 인생관이 있다. 첫째는 취생몽사(醉生夢死)의 무의식 생활로 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는 위축적 인생관으로 명상모임이나 선불교를 믿는 사람 등 소극적으로 움츠려들려는 생각을 가진 경우이다. 이런 사람들은 생활에 대한 담대함이 없고 모험심도 없이 평안함만을 구한다. 따라서 위축되고 겁쟁이가 된다. 세 번째는 야심만만한 투기주의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비록 위축되지는 않지만 순전히 자신의 사적 이익과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신의 도구로 여겨 타인의 인격과 지신의 인격이 희생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회의 공공 행복에 대한 고려 없이 거짓된 일을 꾸미거나 악한 일을 행한다. 이 세 종류의 인생관은 모두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의 활동을 위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활이란 전부 사회적 생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회는 유기적 조직으로 전체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은 전체에 영향을 준다. 이처럼 사회 활동은 상호적인 것이다.

(중략) 이것이 바로 사회 협진(協進)의 관념이다. 이 관념이 있으면 우리는 자연히 서로를 협력의 동반자로 생각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이 관념이 있으면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와 관련이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며 자연히 사회적으로 해악이 되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히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연히 이기적인 야심의 투기꾼이 되지 않을 것이다."
후스, <소년중국의 정신>, 호적문집 제12책 562~564쪽.

후스는 기존 인생관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비판적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후스는 비판적 정신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는 행동하지 않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고 설명하며, 개인의 태도와 행위, 사회적 관습은 쉽게 습관이 되고 익숙해지기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되므로,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며 전통적 관습과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면서, 이러한 물음이 있어야 생활에서 인생의 목적과 의의를 말할 수 있고 그러한 삶이 '신생활'이라고 했다.

다만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답하기만 할 뿐 그것이 생활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기에, 후스는 아래와 같이 인생의 의의는 원래 없는 것이며,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생의 의의는 개인 각자가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상, 비열, 고결, 더러움, 유용, 무용 (중략) 등은 전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생명이란 그 자체가 생물학적 사실에 불과하니 어떤 의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개가 태어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중략) 결국 생명에는 원래 의의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 어떤 의의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의의가 생기는 것이다."
후스, <인생에는 무슨 의의가 있는가>, 호적문집 제4책 625쪽.

그리고 후스는 개인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또한 중시했다. 선대 사람이 후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사회는 유기적 조직이기에 개인이 사회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회가 개인을 만들기도 한다고 여겼고, 이러한 '사회불후론'에 세계의 모든 물질과 개인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세계일체론을 근거로 사용했다.
"나라는 ‘소아(小我; 작은 나)’에 과거의 갖가지 인을 더하고, 또 현재의 갖가지 인을 더해 전해줌으로써 또 미래의 무수한 소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거의 여러 소아와 현재의 여러 소아, 그리고 미래의 무궁한 소아가 빗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이듯 대를 이어 끊임없이 전해져 ‘대아(大我; 큰 나)’가 된다.

(중략) 소아는 죽어 없어지지만 대아는 영원불사, 영원불후하다. ‘소아’는 비록 죽을지라도 모든 개별적 소아의 일체 행위와 일체 공덕 죄악, 일체 언어 행동은 그것이 크건 작건, 그것이 옳고 그르건,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모두 ‘대아’ 속에 영원히 남아 존재하게 된다."
후스, <불후>, 호적문집 제2책 529~530쪽.

위와 같이 후스는 '작은 나(개인)'라는 수단을 통해 '큰 나(사회)'라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설명은 '큰 나'라는 사회적 대의를 위해 '작은 나'인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후스의 자유주의가 서양의 보편적인 자유주의와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량슈밍 역시 이 점을 비판하여 후스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찾도록 만든 것으로, (후스의 주장은) 사람의 내재적 창조력을 발현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스는 각 개인의 자유인격을 실현할 수 인생관으로 '과학적 인생관'을 제시하며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모두가 인정하는 '과학적 인생관'으로써 인류 인생관의 최소한도의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인생관의 몇 가지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3. 일체의 과학에 근거해 우주와 그 속의 만물의 운동 변화가 자연적이며, 자연의 주재나 조물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5. 생물학 및 생리학, 심리학 지식에 근거해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며, 다른 동물과 비교해 정도상의 차이만이 있을 뿐 종류상의 차이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6. 생물학과 인류학, 인종학, 사회학 지식에 근거해 생물과 인류사회 변화의 역사와 그 원인을 알게 한다.

8. 생물학 및 사회학 지식에 근거해 도덕 예교(禮敎)는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의 원인은 모두 과학방법으로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10. 생물학 및 사회학 지식에 근거해 개인, 즉 “소아(小我)”는 죽어 없어지지만 인류, 즉 “대아(大我)”는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전 인류와 세상을 위한 생활이 최고의 종교이며, 개인을 대신해 사후의 '천당'이나 '정토'를 기원하는 종교는 이기적인 종교라는 것을 알게 한다.
후스, <과학과 인생관>, 41~42쪽.

3.6. 기타

4. 가족

5. 여담

6. 저서

7. 매체에서

파일:건당위업후스.jpg
건당위업에 나온 후스. 사진에서 맨 왼쪽이 천두슈, 가운데가 리다자오

8.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외교부장
파일:대만 외교부 로고.svg
3대 4대 5대
푸빙창 후스
(1949년 6월 12일 ~ 1949년 10월 1일)
엽공초

9. 참고문헌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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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5년 9월에 칭간된 국민계몽지. 반봉건, 반고전 문학을 주장하며 민주혁명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초기에는 자기비판을 선행하고 외래사상을 주장했지만, 창간 3년 뒤부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노동문제 등에 보다 치중했다.[2] 입말(구어)과 완전히 유리된 서면어인 한문 대신 입말에 가까워 상대적으로 쉬운 백화문(특히 북경어 백화문)을 쓰자는 운동. 오늘날 표준 중국어 문어체는 북경어 백화문에서 유래한다.[3] 사실 왕충후이는 처음에 후스를 교육차장으로 임명하려 9월 4일 뤄원간을 통해 후스에게 입각을 제의했지만, 후스는 거절하였고 대신 차이위안페이와 의논하여 탕이화를 추천하였다.[4] 물론 이는 마오쩌둥이 극도로 막장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한 말이었겠지만, 정작 미국은 장제스 정부를 제거하려 한 전력이 있고(대륙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두 번), 2차 대전 직후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는 기근이 일상이었으며 약탈도 극심했다. 참고로 프랭크 디쾨터의 주장에 따르면 2차 대전 직후 러시아 치하 만주에서는 무려 20억달러 어치의 물건들이 뜯겨나갔다고 추정하기도 했다.[5] 이후 베이징 부시장을 지냈으며 만력제의 능 발굴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해서파관 사건으로 참혹하게 조리돌림당했고 후스는 그걸 보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논평했다.[6] 기록에 따르면, 후스는 1948년 12월 15일 베이징을 탈출해 난징으로 왔고 이틀 뒤인 17일에는 주중 미국 대사 스튜어트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학문 활동은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보였다고 한다.[7] 철학적 논쟁 이외에도, 개인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충효인의예지신과 예의염치 등을 강조했던 장제스와 전면으로 충돌했던 주장이었다.[8] 다만 후스의 드높았던 명망으로 인해 장제스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며 후스를 칭송하긴 했지만, 사적으로는 그를 못마땅해했다는 야사도 있긴 하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은 정보이지만.[9] 엄복이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책 <진화와 윤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1898년도 책. 다만 그대로 번역하진 않았고, 헉슬리의 관점을 선택적으로 수용했으며 허버트 스펜서의 관점을 골격으로 의역한 책이다. 꽤나 감명깊었는지 후스는 이 <천연론>을 읽고 적자생존의 “적”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호를 '스즈(適之)'로 바꾸었다.[10] 1926년 후스는 동서문화의 근본적 차이를 비교하며 동양의 문화가 '자포자기의 무반성(不思不慮)'인 반면, 서방문화는 '부단한 진리추구'라고 일갈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942년에 와서는 “고대 중국은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고, 인성, 도덕행위, 법률과 정치조직 등 수많은 성숙한 학설들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중국 사상에 대해 설명할 때도 고대 중국의 사상은 '진리에 대한 추구'이며, '중국 사상 자체가 자유'라고 말하였다. 말년 후스는 노자, 공자, 맹자도 모두 자유주의자로 평가했다.[11] 후스가 천두슈의 <매주평론>에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주의를 적게 말한다>를 발표하여 실험주의를 주창한 이래.[12] 1919년 7월 후스가 잡지 <매주평론>에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적게 말한다>를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의 국정에 적합하지 않고, 점진적인 개량주의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논쟁. 이에 리다자오는 8월 같은 잡지에 <문제와 주의를 다시 논한다>를 발표해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에 적절하며, 중국 문제는 반드시 근본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옹호했다. 이 논쟁으로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여러 사람들이 중국 혁명의 전개를 위한 노선 탐구에 나서게 되었다.[13] 1923년 2월 14일 장쥔마이가 칭화대학에서 '인생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잡지 <청화주간>에 발표하면서 시작된 논쟁. 일부에서는 <과학과 현학> 논쟁, <과학과 철학> 논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장쥔마이는 량치차오의 과학파산론을 옹호하면서 '인생관은 주관적이고, 직각적이고, 종합적이고, 자유의지적이고, 단일성을 지녔다'고 하였다. 따라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과학은 인생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단지 현학만으로 인생관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5.4 운동으로 인기가 급상승했던 과학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주장에 정문강, 후스 등이 이를 비판하면서 확대되었다.[14] 발표에 참여한 교수들은 왕신밍(王新命), 허빙숭(何炳松), 우위간(武堉干), 순한빙(孫寒冰), 황원산(黄文山), 타오시성, 장이(章益), 천가오융(陳高佣), 사멍우(薩孟武), 판중윈(樊仲雲)이었다.[15] 당시 천두슈는 불관용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보여 후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천두슈의 이러한 입장은 이 뿐만이 아니라서,일례로 1917년에도 천두슈는 후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중국 문학을 개혁함에 있어서 백화를 정통으로 삼는 것은 옳고 그름이 명백한 일”이며, “반대자들에게 토론의 여지를 용납할 수 없고, 우리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으므로 누구도 우리의 주장을 고치도록 용납할 수도 없다”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16] 후스는 동서양 국민들의 생활방식이 대동소이하다고 보았지만, 반면 량슈밍(양수명)은 후스와는 반대로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시대적 차이가 아닌 유형의 차이로 보았다.[17] 이건 비단 유교만이 내세우는 가치도 아니기 때문이다.[18] 1919년 3월 15일 잡지 <신청년> 제6권 제3호에 실렸다. 희곡 <인형의 집>을 모티브로 쓴 글이다.[19] 다만 호인의 정의는 지식인들마다 조금씩 달라서, 같이 <우리들의 정치주장>에 서명한 정문강은 '소극적으로는 무익한 일을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는 몸소 실천하며, 자기절제를 하고, 남을 책망하기에 앞서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고 했으며, 매조분은 '지식계급 중 선량한 사람, 개인의 인품이 순결하고 지식 있는 자, 희생정신을 가졌고 행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민중을 계도할 수 있는 자'라고 했다.[20] 후스의 컬럼비아 대학교 유학시절 은사 존 듀이 교수의 중국이름 '杜威'에서 한 글자 따서 지은 이름이다.[21]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정말로 후쓰두가 쓴건지, 아니면 후쓰두의 명의만 빌린 건지는 불분명하다.[22] 이상한 것은 아니고 그 당시 신지식인은 대부분 중매결혼에 부정적이었다.[23] 현재 대만에서 중국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범록연맹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범람연맹의 원조격인 후스를 굳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 듯 하다. 마찬가지로 장제스뿐만 아니라 바이충시, 쉐웨와 같은 국민당 장성들도 공산당 입장에서 원수들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나오는 선전영화나 선전드라마에서 긍정적이거나 적어도 카리스마는 있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1970~80년대 선전영화들은 졸장부 소인배 겁쟁이로 그려지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