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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 |
본명 |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1] 다만 한국에는 무슨 이유인지 슬라보예로 알려졌다. |
국적 | [[슬로베니아|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49년 3월 21일 ([age(1949-03-21)]세) |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류블랴나 | |
모교 | 류블랴나 대학교 (BA, MA, DA) 파리 제8대학교 (PhD) |
경력 | 류블랴나 대학교 교수 뉴욕 대학교 교수 버크벡 런던 대학교 교수 |
학파 | 대륙철학, 류블랴나 정신분석학파[2], 라캉주의, 포스트 헤겔주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3][4] |
직업 | 철학자, 작가 |
[clearfix]
1. 개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자크 라캉,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철학적 업적을 카를 마르크스와 20세기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잘 연결해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받는 저명한 철학자이다. 그와 그의 철학을 따르는 학파를 류블랴나 정신분석학파 혹은 슬로베니아 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중에게는 철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정치에 대해 여러 논평을 남기는 것으로서 더 유명하다. 'MTV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대중 친화적인 행보 덕에 다른 대륙철학자들에 비해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꽤 높은 편이다.
2. 생애
1949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도 경제학자와 평범한 국영 기업의 중산층 회계사였다.[5] 지젝은 해안 마을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그곳에서 연방 공화국 당시 금서나 검열이 되지 않은 서양 영화와 대중문화 저서들을 탐독했다. 원래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그는 이러한 야망을 포기하고 대신 철학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1967년에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복수로 공부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자크 데리다의 저작을 슬로베니아에 소개하고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로 유학 가서 파리 제8대학교의 철학과에서 공부해 기초를 쌓았으며 라캉의 사위인 밀레의 지도를 받으며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접목과 라캉을 연구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1988)였지만 밀레가 그의 논문과 출판을 거절했다.
1971년에 임기로 연구원 조교로 취직되지만 그의 석사 논문은 당국에 의해 '비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받으며 기각되었다. 그는 1981년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로 『프랑스 구조주의의 이론과 실용적 관련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징집되어 1년 정도 군 복무를 수행하는 법적 의무를 다했다. 이후에 지젝은 주로 자크 라캉, 프로이트, 알튀세르의 저서를 편집하거나 번역했다. 그는 주로 라캉의 이론을 사용하여 헤겔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체스터튼과 같은 탐정 소설을 번역에 대한 서평을 기재했다. 그의 대표작은 1989년에 출판된『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6]이며, 이 책을 시작으로 그는 이데올로기 비평 이론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지젝은 유럽의 여러 잡지와 슬로베니아 좌파 저널에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도 한국의 잡지나 신문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지젝은 티토의 정책과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와 특히 군사적 경향을 비판했다. 사실 지젝은 1988년까지 슬로베니아 공산당의 당원이기도 했으며 32명의 다른 슬로베니아 지식인과 함께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기도 하면서 슬로베니아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1988년과 1990년 사이에도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여러 정치인들과 시민 사회 운동을 소개하면서 특히 인권 수호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0년 공식 자유 선거에서 그는 자유민주당의 전 슬로베니아 총회장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또한 1990년대에 지젝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참여했지만 5위권으로 탈락했다. 하지만 토론회에서 그의 주장들은 사회 비판적이며 정치적으로도 분명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지젝의 모습이다.
슬로베니아의 자유 민주주의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며, 슬로베니아의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같은 우익 계층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그는 '슬로베니아 민족주의 작가들이 대회를 개최하는 컨벤션 센터가 폭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는 아이러니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3. 사상
지젝의 근본이 되는 기획은 헤겔, 라캉, 마르크스를 변증법적으로 읽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기획을 스스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아니라 '유물론적 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으로 주장한다. 지젝에게 있어 두 개념의 차이는 체제의 주관적 내부와 객관적 외부의 차이와 같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경우 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지젝 특유의 종횡무진한 해석이 기존의 이론과 독법과는 상이하다는 점이다. 지젝은 독창성을 띤 철학을 연구하며 여러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또한 지젝의 자기 대화에 중심을 차지하는 부분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지젝은 알튀세르보단 루카치의 서술법에 영향을 받았다.[7]대중을 중심으로 한 인지도는 상당하며 국내에도 번역이 여러 권 되었다. 지젝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적 해석이나 철학을 참조하기도 하며[8] 또한 수많은 소설, 영화 등으로 살을 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특히 지젝의 영화 읽기는 웬만한 덕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포스를 철철 풍긴다.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라캉적 분석도 있다. 더군다나 앞서 말한 정신 분석의 경우 학계에서의 평과 대중을 중심으로 한 호응이 상당히 갈리는 분야라는 점도 지젝의 대중적 인기에 한몫한다. 시네필이라 부를 정도로 영화광이지만 영화를 직접 보지도 않고 평론을 쓴 적이 있다. 여기선 직접 영화를 고르기도 한다.
'동유럽의 기적'과 'MTV 철학자'라는 별명도 있을 만큼 논란성 짙은 기획력과 독특한 문체로부터 현대 철학 논란의 중심에 있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발언은 독창적이었다. 지젝은 칸트, 헤겔, 라캉, 마르크스에 관한 포스트적 해석만이 아니라 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제시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학문적 정밀성과 별도로, 지젝의 최대 무기는 흥미롭다는 것이다. 열정적인 제스처와 욕설, 농담으로 청자를 몰입하게 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 내용에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캐릭터 자체만으로 흥미롭다는 대중이 많은데 그 내용도 풍성하고 분석들도 예리하다. 듣고 있으면 자신이 지성적으로 향상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라고 주장하는 대중도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명성의 최대 원인이다. 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도 실은 지젝이 TV 토론에서 어마어마한 달변을 뽐낸 결과이다. 실제로 후보 중 한 명은 토론회 중 "슬라보예가 우리 중 가장 똑똑하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자유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표출한다. 지젝은 자유주의야말로 대중의 의지 발산과 변화를 막는 체제이기에 전체주의보다 해롭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지젝이 마오주의자라는 평가는 잘못이다. 지젝이 긍정한 바는 마오주의같이 극단성을 띤 공산주의 혁명조차도 '대안'을 마련하려는 급진성을 띤 시도라는 측면에 국한된다. 예컨대 알랭 바디우 등 당대의 마오주의자들이 68운동을 주도했던 걸 생각해 보자. 더욱 구체성을 띠게 말하면, 지젝의 정치 철학은 개인의 차원에선 체제를 거부하는 윤리에 관계된 고집, 사회에 관계된 차원에서는 계급론에 기댄 혁명론이다. 거칠게 말해 덮어놓고 혁명하자는 것. 또한 정치적 올바름도 자유주의자들의 지식이나 지성에 관계된 허영심이라 생각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비판성을 띤, 신좌파와 대조되는 전형이 될 만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좌파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68운동을 부정적인 태도로 묘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68운동이 성소수자와 여성과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문제를 상당부 해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한다. 또한 그 운동이 반자본주의에 기초했다는 것도 바람직하게 평가한다. 문제는 68운동 때 내세웠던 가치들이 우파도 내세운다는 것이다. 68운동의 영향으로 집단주의에 토대한 가부장성을 띤 자본주의 체제인 포드주의가 무너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복지에 부정성을 띤 개인주의에 바탕한 신자유주의나 자유 지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68운동이 내걸었던 평등주의와 반위계주의라는 가치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의 수사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은 이제 기업 자본주의의 억압스러운 사회 조직 그리고 실재하는 사회주의 양자에 공히 반기를 든 성공했다고 할 만한 자유 지상주의 혁명으로 자신을 현시하기에 이르렀다. 우파는 불안정 노동을 옹호할 때 68운동다운 가치를 동원하기도 하는데 "내년에 어떤 것을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말라. 당신이 획득한 자유,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라. 그럼으로써 당신이 틀에 박힌 일을 단조롭게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즐겨라." 이런 식이다.[9]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10] 다만 기본적으로 지젝은 좌파 철학자라서 인종주의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지는 펴지 않고 자유주의자가 죄책감을 갖고 진실을 가린다는 식이다.[11][12] # 영상
4. 어록
The only thing I’m afraid of is that we will someday just go home and then we will meet once a year, drinking beer, and nostalgically remembering “What a nice time we had here.” Promise yourselves that this will not be the case.
제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그냥 집에 가고,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홀짝이며 향수에 젖어 "그때가 참 좋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해 주세요.
20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시위 이후의 지속적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제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그냥 집에 가고, 일 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홀짝이며 향수에 젖어 "그때가 참 좋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해 주세요.
20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시위 이후의 지속적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5. 지젝에 대한 비판
하지만 이러한 지젝의 비판 역시 몇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존재 의의와 실재성, 효력을 토대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 양식(또는 간단히 말하면 경제)으로서의 토대에 준거하면서도, 그러한 토대가 존재하며 자신이 그 토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는 데 있다.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고 산업 노동자를 비롯한 임노동자들은 자본의 의해 착취되는 현실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가 된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토대, 경제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매우 구체적인, 또한 매우 미시적인 차원을 밝혀준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론은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탈실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젝은 이데올로기에는 항상 실재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서는 국가도 경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국가와 경제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거대 장치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론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떤 전략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질문해 볼 수 있다. 국가 장치나 경제 제도의 변혁이나 개조의 쟁점들을 구체화하는 전략적 질문들이 없는 정치란 결국 전무 아니면 전부(자본주의의 유지냐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폐지냐)라는 거대하지만 허망한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튀세르의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할 수 있노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버팀목을 무의식적인 향락에 위치시키는 반면, 호명을 넘어서기 위한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것은 사회적 적대의 존재에 대한 의식 내지 자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호명을 넘어서기’란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호명은 그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전면적 포섭과 종속의 작용이 되는 것 아닌가?
진태원, <호명 II: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 #
(...)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매우 구체적인, 또한 매우 미시적인 차원을 밝혀준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론은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탈실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젝은 이데올로기에는 항상 실재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서는 국가도 경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국가와 경제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거대 장치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론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떤 전략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질문해 볼 수 있다. 국가 장치나 경제 제도의 변혁이나 개조의 쟁점들을 구체화하는 전략적 질문들이 없는 정치란 결국 전무 아니면 전부(자본주의의 유지냐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폐지냐)라는 거대하지만 허망한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튀세르의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할 수 있노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버팀목을 무의식적인 향락에 위치시키는 반면, 호명을 넘어서기 위한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것은 사회적 적대의 존재에 대한 의식 내지 자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호명을 넘어서기’란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호명은 그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전면적 포섭과 종속의 작용이 되는 것 아닌가?
진태원, <호명 II: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 #
지젝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멘토인 라캉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지면이 많지 않으므로 단적으로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지젝은 라캉주의자이며, 더 나아가 라캉 정신 분석을 바탕으로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합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라캉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방금 언급한 다양한 사상을 종합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젝은 라캉,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등을 자신의 논의에 끌어들였지만, 지젝의 이러한 사상 원용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혁명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한 사상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론의 근거로 삼는 다양한 사상적 유산들을 공산주의라는 ‘내용 없는 기표’를 중심으로 짜 맞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라캉이나 헤겔, 혹은 그 밖의 다른 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공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젝이 라캉 혹은 헤겔,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이해에 기여한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적으며, 상당 부분은 이미 라캉 혹은 프로이트 연구자, 헤겔 연구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내용들을 ‘필요에 따라’, 즉 마르크스-레닌적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취사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매우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진정한 레닌주의자인지도 또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편의주의적으로’ 기존의 연구들을, 심지어 공산주의 이론조차 적절히 짜깁기하는 혼합주의자, 에피고네(Epigone)에 불과하다. 그가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공산주의는 결코 위험하지 않다. 다만 공허할 뿐이다.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 11일) #
분석학회라든가 현대 영미 철학에선 지젝을 제대로 언급하진 않는다.[13] 전통적 역사학자들에게 지젝은 역사학을 모르는 '국제적' 지식인이며 주류 철학에서의 평가는 그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현대 영미 철학에서는 지젝이 근거로 삼는 라캉은 이미 비주류가 되었으며 마르크스도 상극에 있는 코헨과 같은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 외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14] 이는 영미 학계가 통계를 이용한 실증적 방법론과 분석 철학을 주류로 하기 때문이며, 마르크스주의 집단 내에서조차 객관에 토대한, 논리상 타당성을 확보한 분파가 분석 마르크스주의자들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놈 촘스키는 "무언가 있는 척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극단적인 사례"로 지젝을 비판했다. 여기에 지젝은 “촘스키는 언제나 ‘실증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 사람만큼 ‘실증적으로’ 틀린 말을 자주 하는 양반도 없는 것 같다”고 역비판했다.라캉이나 헤겔, 혹은 그 밖의 다른 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공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젝이 라캉 혹은 헤겔,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이해에 기여한 ‘독창적인’ 부분은 매우 적으며, 상당 부분은 이미 라캉 혹은 프로이트 연구자, 헤겔 연구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내용들을 ‘필요에 따라’, 즉 마르크스-레닌적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취사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매우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진정한 레닌주의자인지도 또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편의주의적으로’ 기존의 연구들을, 심지어 공산주의 이론조차 적절히 짜깁기하는 혼합주의자, 에피고네(Epigone)에 불과하다. 그가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공산주의는 결코 위험하지 않다. 다만 공허할 뿐이다.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 11일) #
더 가디언에서는 이러한 지젝과 촘스키의 논쟁에 대해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한 영미권의 촘스키와 추상적 질문에 천착하는 대륙 철학의 전통 위에 선 지젝의 대립”이라며 “이론과 이데올로기, 현실의 관계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한 논쟁”이라고 평한 바 있다. @@
또한 지젝은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대륙철학계에서도 비판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헤겔 해석이나 라캉 해석에서 헤겔주의자나 라캉주의자들에게 지젝이 엄밀하진 못하다고 비판받는다. 그의 논리에는 부정신학을 옹호하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그의 해석이 타당하거나 객관적인지는 논란에 있다.실제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영국의 에릭 홉스봄은 지젝을 공연자(performer)로 묘사하며 지젝의 좌파적 기획을 비판했다.
5.1. 반론
홍준기는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사회 민주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주장 이외에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젝 같은 ‘공산주의자’가 “공허한 환상”을 부추기면서 가장 현실적인 사회 민주주의를 적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준기의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에 의지해 지젝을 비판한다는 핑계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논의 자체를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산주의 이념을 구분하지 않고 지젝 또는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을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 또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오해와 달리, 지금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산주의 가설은 과거에 실패한 역사적 공산주의를 복귀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서울 컨퍼런스를 위해 방한했던 지젝과 바디우가 입을 모아 북한을 비판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홍준기는 지젝을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런 논의를 처음 제기하고 시작했던 이는 가타리와 낭시였다.(1)
가타리가 네그리와 함께 집필한 <우리 같은 공산주의자>와 낭시가 쓴 <무위의 공동체>는 스탈린의 국가주의에 포획된 공산주의의 실패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공산주의를 발현시킨 이념(이상)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자고 요청했다. 특히 낭시가 제기한 새로운 공동체의 의미는 “생활 속의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이라는 ‘비동일적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동일적인 것이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동일성이나 입장에 대한 거리 두기를 의미한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새롭게 생각하자는 요청은 지젝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도 ‘철없이’ 공산주의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택광, <지젝 오독은 한국 사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 9일) #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산주의 이념을 구분하지 않고 지젝 또는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을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 또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오해와 달리, 지금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산주의 가설은 과거에 실패한 역사적 공산주의를 복귀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서울 컨퍼런스를 위해 방한했던 지젝과 바디우가 입을 모아 북한을 비판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홍준기는 지젝을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런 논의를 처음 제기하고 시작했던 이는 가타리와 낭시였다.(1)
가타리가 네그리와 함께 집필한 <우리 같은 공산주의자>와 낭시가 쓴 <무위의 공동체>는 스탈린의 국가주의에 포획된 공산주의의 실패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공산주의를 발현시킨 이념(이상)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자고 요청했다. 특히 낭시가 제기한 새로운 공동체의 의미는 “생활 속의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이라는 ‘비동일적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동일적인 것이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동일성이나 입장에 대한 거리 두기를 의미한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새롭게 생각하자는 요청은 지젝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도 ‘철없이’ 공산주의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택광, <지젝 오독은 한국 사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 9일) #
6. 한국 관련
- 한국에 자주 오는 편으로 2003년, 2010년, 2012년에 방문한 바 있다. 내한 당시 투썸플레이스를 보고 "저기는 둘이서 사랑을 나누는 곳이냐?"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 2012년 10월 16일 미국 버몬트 대학교(The University of Vermont)에서 강의를 하면서 강남스타일을 이른바 "신성시되는 외설(Divine Obscenity)"의 예로 들었다. 싸이를 비틀즈 이래 최대 인기 현상이라 추켜세우며 노래 가사와 배경이 되는 강남구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2013년 7월 1일부터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에미넌트 스칼러로 영입되었다.[15]
- 2015년 3월에는 저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의 서평을 놓고 뜬금없이 작가 장정일과 이택광 경희대 교수와의 논쟁이 한겨레의 지면을 빌어 벌어지기도 했다.
-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해, "부자를 악으로, 빈자를 선으로 설정하지 않았던 점이 좋았다"며 "뛰어난(excellent)" 영화라고 평했다. #
- EBS의 시사 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시즌 2의 강연자로 참여하였다. 주제는 '자유론'.
7. 저서(국내 발매작/발매순)
- 삐딱하게 보기
- 용기의 정치학
-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 환상의 돌림병
- 향락의 전이
- 믿음에 대하여
-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진짜 눈물의 공포
-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 이라크
-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의 말에서 빌린 것[16])
- 성관계는 없다
- 까다로운 주체
-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 신체 없는 기관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 HOW TO READ 라캉
- 죽은 신을 위하여
-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 시차적 관점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마르크스의 말에서 빌린 것[17])
-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 나눌 수 없는 잔여
- 폭력이란 무엇인가
-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를 두 권으로 출판)
-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원제: Islam and Modernity)
- 새로운 계급투쟁
- 판데믹 패닉
7.1. 공저
-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지젝이 만난 블라디미르 레닌
- 법의 무지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주디스 버틀러와 공저)
-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
- 레닌 재장전
- 예수는 괴물이다(존 밀뱅크와 공저, 원제는 The Monstrosity of Christ)
8.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1990 |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 | 슬로베니아 | 자유민주당 | 431,206 (9.68%) | 낙선 (5위) |
9. 여담
-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 아내는 철학자이고 두 번째 아내 Analia Hounie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모델력이 있고 학위는 라캉 연구. 원래는 교수와 제자 관계였으나 조금씩 발전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지지 선언을 하였다. # 다만 진짜 트럼프의 사상에 동감해서 지지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를 통해서 미국 정치계가 각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말의 전문부터 "난 트럼프가 역겹다. 그가 문명화된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럽다."라고 시작했을 정도.
- 2018년 5월 기준 좀 심각하게 아픈 듯하다. 최근 나온 강의 자료에 따르면 신장에 암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전립선에도 트러블이 있고 가슴 통증에 안면 마비 현상까지 일어났다면서, 2시간 동안 집중하는 것에도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모양.
- 그는 "왜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이 아주 설득력 있다고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좌파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피터슨의 유사과학적인 인용에 대해 "피터슨은 바닷가재, 유인원 등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여성과 결혼에 대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왔다는 주장은 음모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좋다"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의 '팩트' 중 대부분이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 조던 피터슨을 음모론자라 부르며 여러 기사와 인터뷰를 통해 비판하자, 2019년 4월 피터슨과 토론회를 가졌다. 인터넷상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의 모임이라 밈이 생산되기도 했는데, 지젝의 승리 혹은 우위를 그리는 밈들이 보이며 한편으론 둘 다 별로였다는 반응이나[18] 세기의 토론이라고 바람 잡은 것에 비해선 심심한 토론이었다는 의견도 상당했다.[19] 대체적으로 평은 국내외를 통틀어서 피터슨의 패배로 기운다.[20][21] 자세한 토론 내용은 조던 피터슨 문서의 '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 파트를 참고할 것.
- 틱장애가 있어 본인의 코를 굉장히 자주 만지며 나이 들수록 점점 심해진다. 오랜 강연 동안 지속된 그 자신의 습관인지라, 그의 강연을 오래도록 들어온 이들은 물론 그의 강연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상당한 흥밋거리 중 하나로 전해진다. 슬로베니아 억양까지 합쳐져서 처음 들으면 정말 집중이 단 하나도 안된다.
- 목소리와 말투 자체가 몰입감을 끌어올리기도 해서, 준비된 대본을 읽으며 나름대로 연기할 때도 훌륭한 전달력과 몰입감을 준다. 소피 피엔스가 감독한 <Pervert's Guide to Cinema>에서 이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정신 분석과 각종 철학론을 동원해 영화를 해석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런저런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데, 철학자이자 영화광인 사람이 철학론으로써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니 두말할 필요 없이 뛰어난 활약을 감상할 수 있다.
- 슬라보예 지젝이 크라이테리온에서 뽑은 영화들 #
- 그의 강의에 대해 패러디한 뮤직비디오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걸 만든 사람도 같은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 트랜스포비아 논란이 있다. TERF 등 혐오 진영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24] 트랜스젠더의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혼동하는 발언 등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트랜스젠더리즘'은 '포스트젠더리즘'이고 이는 성 정체성의 유동화를 촉진해 성 정체성의 부정화로 이어진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는 많은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가들에게 맹비난을 받았다.[25]
[1] 슬로베니아어와 가까운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슬라보이 지제크이다. 참고로 슬로베니아어의 ž는 프랑스어의 j와 같은 발음이다(IPA로 [ʒ\]).[2] 슬로베니아 학파라고도 부른다.[3] 영문 위키 참조 # Post-Hegelianism, Freudo-Marxism[4] 일반적으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고 분류되지만, 지젝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여러 차례 비판해 온 바 있으며, 또한 학문으로서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보통 라클라우와 무페만을 포함한다. 이것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넓은 범주이기 때문이다.[5] 이 인터뷰에 의하면 부모와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하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일 분도 소비하지 않았다고.[6] 루이 알튀세르를 위시로 한 1960~80년대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한 논문으로, 그의 논문 중 최초로 영어로 발표되었다.[7] 그래서 처음 읽는 독자들에겐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다[8] 애초에 헤겔을 한다면서 또는 안다면서 칸트를 대강 때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9] 지젝이 68운동에 관해 쓴 전문은 여기서 보자. 지젝은 68운동을 마냥 부정했다기보다는 후일 체제에 흡수되어 틀딱이 된 정신 승리나 하는 변질된 신좌파를 깐 것이다.[10] 참고 자료[11] 사상에 관해 정반대지만 조던 피터슨도 비슷한 내용을 발언한 바 있다.[12] 일부 좌파는 이슬람 문제에서 퇴행적 좌파로 비판받는 시각을 보이는데 지젝은 "좌파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나의 십자가로 짊어지기로 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죄책감은 이슬람에 대한 밑 모를 관용"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기사 무슬림을 무조건 실드 칠 게 아니라 이슬람권이 극우답게 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식. 공산주의를 막고자 냉전 시대 미국이 초당파스럽게 반공주의다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한 것도 핵심이라고 한다.[13] 분석철학이 대륙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긴 해야한다.[14] 다만 헤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로버트 브랜덤, 존 맥도웰, 찰스 테일러.[15] Eminent Scholar, 약칭 ES. 직역하자면 명학 또는 저명한 학자. ES로 임용했다는 것은 연구원, 교수자 중에서도 우대한 것으로 석좌 교수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반적인 석좌 제도보다 자유로운 것이 해외에서의 연구도 가능한 듯, 다시 말해 굳이 학교에 적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뜻.[16]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가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빗대어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주로 인종 차별 등의 문제가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원인을 모색할 때 사용되는 개념.[17] 정확히 말하면 헤겔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은 반복된다'라고 말한 것을 마르크스가 빌려와 '그 뒤에 한 문장 더 덧붙여야 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리고 그다음에는 희극으로'라고 말한 것을 다시 빌려온 것.[18] 이들에 의하면 피터슨은 전혀 준비가 안 되었고 지젝은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했다고. 한국어 자막을 달았던 한 유튜버는 '피터슨은 지젝을 잘 몰랐고 지젝은 자기 자신도 잘 몰랐다'고 평했다.[19] 다만 토론에서 지젝의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이후 지젝 관련 레딧에 피터슨의 팬들이 와서 지젝의 저서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젝의 팬들은 입문에 좋은 책들을 추천해 주었다.[20] 심리학자인 피터슨이 유명 철학자인 지젝과 사상에 관한 토론을 한다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그나마 자기 전공의 좁은 분야에 특화되는 경향이 강한 분석철학자들은 몰라도 대륙 철학자들은 사실상 걸어다니는 사상사 서적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특히 지젝과 같은 초유명 철학자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토론을 하기에는 피터슨의 역량이 부족하다. 토론이 별 내용 없이 공허하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렇게 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피터슨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피터슨의 사회적인 통찰력 같은 것과는 별개로 사상이나 철학에 있어서의 엄밀함에서는 지젝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지젝은 승리하지 않았고 승부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피터슨이 결격패했기 때문이다.[21] 심지어 피터슨은 홈그라운드인 심리학에서조차 과학으로서는 프로이트보다 더한 사망 선고를 받은 융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 자기 분야가 아닌 걸 섣불리 건드려서 망한 점도 있지만 그 자기 분야에서도 좀 엉성한 셈이다... 재미난 점은 피터슨이 프로이트에서 나온 융 심리학에 기반하듯이 지젝 또한 프로이트에서 나온 라캉철학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차이점이 토론에서 딱히 두드러지지는 않았다.[22]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23] 근데 영어 글쓰기 실력은 영... RT나 다른 영문 매체에 나가는 칼럼을 읽으면 편집자가 정말 많이 고친다는 걸 알 수 있다.[24]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가들은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 용어가 트랜스젠더 인권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보편적 인권의 문제임에도, 이것을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매도하는 표현으로 여겨진다.[25] 상당히 심각한 논란을 일으켰는지 영어 위키백과에서 단순 논란을 넘어 세부 항목으로 '트랜스포비아'가 적혀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