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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01b> 호르크하이머 Horkheimer | |
본명 |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
출생 | 1895년 2월 14일 독일국 슈투트가르트 쥬펜하우젠 |
사망 | 1973년 7월 7일 (향년 78세) 서독 뉘른베르크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뮌헨 대학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
경력 |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 프랑크푸르트 대학 총장 (1951-1953)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소장 시카고 대학 객원 교수 (1954) |
직업 | 철학자, 사회평론가 |
배우자 | 로즈 리커 |
종교 | 유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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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사회조사연구소를 이끌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탄생시켰고, 비판 이론을 창시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현대의 각종 비평가, 기자들의 비평이 사실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권위주의적 인격'과 파시즘의 연관관계를 분석했으며, 이후 나치로부터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생활하면서 '도구적 이성'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을 효율적 결과 달성의 도구로만 사용하게 된다면 획일화된 사회를 만들어내게 되어 파시즘을 발생시킨다고 보았고, 이를 막기 위해 이성의 비판적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독일로 돌아와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고, 독일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교육관은 지금으로 치면 "주입식 교육만 하지 말고 비판적 사고도 길러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비판적 사고가 문학, 예술, 철학, 음악 등 각종 인문학적 소양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르크하이머의 이런 생각들은 독일과 미국의 민주주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1] 저서에 《도구적 이성비판 (1947)》, 《계몽의 변증법 (1947)》[2] 등이 있다.
2. 생애
슈투트가르트의 보수적이고 부유한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모리츠 호르크하이머는 슈투트가르트의 주펜하우젠 구역에서 여러 개의 섬유공장을 소유한 성공한 기업인이였다. 일찍이 호르크하이머는 학업을 중단하고 기업의 경영자 2세로서의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사업에 뜻이 없었다.1914년 이후부터 그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 감명받아 철학공부를 결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받은 단편 소설 몇 편[3]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행하던 신칸트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대신 그는 이제 후설을 열정적으로 연구했다. 몇 년 뒤, 칸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을 취득하였고, 1930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사회철학 교수직에 임용되었다. 같은 해에 사회조사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나치의 압박으로 1933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 이민 초기에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아도르노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이때 아도르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을 발표하여 철학계의 인정을 받았으며, 나치가 물러나고 19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다시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했다. 1951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총장직을 수행하였고, 이후 미국을 드나들면서 미국 의회의 외국인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때 시카고 대학의 객원교수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55년,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연구소 소장 자리를 아도르노에게 물려주고, 1958년에는 은퇴해서 스위스 몬타뇰라의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았다. 스위스로 떠나는 그에게 프랑크푸르트시는 명예시민권을 수여했다.
1973년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나가면서 아도르노, 마르쿠제, 벤야민, 뢰벤탈, 키르히하이머, 폴록, 노이만 등과 함께 비판 이론을 발전시켰다. 래리 레이에 따르면 그가 탄생시킨 비판 이론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회 이론 중 하나가 되었다.
3. 사상
3.1. 도구적 이성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위협에 대해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의 위협을 모방하였고, 이 모방된 위협을 가지고 다시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원시사회에서 주술을 통해 자연현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주술적 의식은 공포를 조성하는 일종의 위협으로서 근대에 이르러 주술적 요소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후 관료제 사회에서 그 위협은 기술적으로 체계화되고 공포는 조직적으로 재생산되면서, 거꾸로 인간사회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에 사용되어졌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공포의 미메시스[4]'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그 공포의 위협을 체계화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도구적 이성'이다.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 자연을 지배하느냐에서 발전된 계산적 이성이다. 즉,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성으로, 수학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그 특징이 된다. 이 이성은 그 생각의 동기와 과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그 결과와 목적을 성취하느냐에만 관심을 가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생산성의 증가를 보여주는 기술과 과학분야는 높히 평가받게 되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없는 시와 소설 등의 인문학은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신화시대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며 이성의 도구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에 이르러 만연해진 것이다. 결국 그 결과 인간을 단지 숫자로 파악하는 사회[5]가 만들어졌고, 이는 나치의 발흥과 유대인 대학살을 초래했다는 것이 호르크하이머의 사회 진단이다.
3.2. 비판 이론
호르크하이머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만 그 초점을 맞추는 도구적 이성을 '주관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자유, 평등, 정의, 관용의 실현을 모색했던 '객관적 이성'이 있다. 종교와 이성이 분리되기 시작했던 계몽주의 시기에 종교의 비합리성을 비판함으로써 형성된 것이 객관적 이성이었다. 그러므로 객관적 이성은, 초기에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합리성을 추구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성을 말했었다. 하지만 이 객관적 이성은 근대에 들어 절대화되고 형식화되면서 가치중립적이 되었고, 학문과 이성의 '중립화'는 여기에 그 어떤 반성과 비판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효율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도구화는 빠르게 촉진되었고, 결국 효율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주관적 이성(도구적 이성)'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6][7]따라서 우리는 막스 베버가 말했듯 학문과 이론에 있어서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러한 비판은 무조건적 반대나 거부, 사회에 대한 단순한 저항적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판은 "지배적인 이념이나 행동 방식 또는 사회적 상태를, 순전히 관습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반성적 노력"이며, 그 생각의 '동기'와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 비판은 어떤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생산적'이지 않고, '부정적'이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르크하이머는 진정한 이론은 '부정적(negative)'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유토피아적 옳은 사회나 대안에 대해 미리 규정할 수 없으며, 단지 현재 사회의 나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나쁜 것을 예상하고 폭로하는 것을 통해서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 이론은 교육학, 신문방송학, 사회학, 정치학 등 인문 및 사회과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의 각종 문예, 정치비평가들의 존재도 사실 그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4. 오해
- 계몽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호르크하이머 자신도, 비판을 할 때 계몽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자기모순이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비판 자체에 계몽성이 있는 것이라면 '호르크하이머를 비판하는 사람' 역시도 그 계몽성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부정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앞선 비판은 적절한 비판이라 할 수 없다. 호르크하이머는, 모두에게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계몽의 문제점이, 그 계몽 자체가 지배적이고 절대화되는 순간에 발생한다고 주장했지, 계몽이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았다.[8] 호르크하이머는 도리어 계몽의 비판적인 측면을 다시 회복해서, 그 '비판적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 이성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도구적 이성[9]의 필요성을 마냥 부정한 것만은 아니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단지 '도구적 이성'의 효율 중시 특성상, 내용과 과정을 중시하는 '비판적 이성'[10]의 설 자리를 아예 없애버리게 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뿐이지, '도구적 이성'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려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도구적 이성'이 점점 더 확대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보면서도, 우리는 교육을 통해 '비판적 이성'을 길러야만 하고, 이를 통해 '비판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 "비판이론은 니체처럼 '이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또는 "비판이론은 프로이트와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 틀린 얘기다.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의 도구적 측면'을 비판했지, 이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성의 비판적 측면'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 철학의 보안이라는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거시적 경제구조 분석은 탁월했으나, 개인들 사이의 심리적 문맥들의 복잡한 역할들을 규명하는 데에 등한시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정신분석학이 마르크스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물론에 질적 풍부함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12]
5. 어록
"이성의 개념이 더 무력하게 될수록, 그것은 더 쉽게 이데올로기적 조작과 심지어 가장 노골적인 거짓말들의 프로파간다를 스스로에게 제공합니다."
Max Horkheimer (2004). 『Eclipse of Reason』 p.17[13]
Max Horkheimer (2004). 『Eclipse of Reason』 p.17[13]
"이전에 민주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붕괴되었을 때, '독재 정부가 나쁘다'는 진술은 오직 수혜자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이성적으로 타당했음에도 이 진술이 반대말로 바뀌는 데에는 이론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Max Horkheimer (2013). 『Eclipse of Reason』 p.19[14]
Max Horkheimer (2013). 『Eclipse of Reason』 p.19[14]
"심지어 오늘날의 독재자들이 이성에 호소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많은 탱크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독재자들은 탱크를 만들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양보할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The Essential Frankfurt School Reader』 by Max Horkheimer, (p. 28), 1982.[15]
『The Essential Frankfurt School Reader』 by Max Horkheimer, (p. 28), 1982.[15]
"자본주의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켜야만 합니다."
Max Horkheimer, 1939년 12월에 쓴 에세이 『The Jews and Europe』[16]
Max Horkheimer, 1939년 12월에 쓴 에세이 『The Jews and Europe』[16]
6.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전통이론과 비판이론[17] 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 | <colbgcolor=#fff,#1f2023> 1937년 |
도구적 이성 비판 (이성의 상실)[18] 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 (Eclipse of Reason) | 1947년 |
계몽의 변증법[19] Dialektik der Aufklärung |
7. 여담
- 미국에서 활동할 때에도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조사연구소 학회지를 거의 대부분 독일어로 발간했다. 독일어로 발간되는 나치 어용학자들의 글이 독일 문화나 학문의 대표가 아니라는 것을 표명하기 위한 의도적인 고집이었다고 한다.
-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나치가 발흥한 까닭은 교육이 '이론 교육'에 편중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교육은 법, 의학, 경제와 같은 특정한 사안이나 직무 영역을 의미해서는 안되며, 역사의 요구가 사회에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은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열린 인식 태도와 함께 이러한 사회 변화의 내용을 항상 새롭게 담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인간을 육성하고 잘못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 수사학, 음악비평, 철학 등의 인문학적 소양 교육도 반드시 필요하며, 같은 맥락에서 예술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호르크하이머는 예술적 경험이 정치적 감수성과 경험 능력을 확장하는 데 유의미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 호르크하이머는 교육에 대한 이론뿐만이 아니라 활동도 열심히 했다. 독일 중앙정부의 정치교육에 대한 자문과 조정을 맡는 정치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60년대 독일 사회와 교육 부문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60~1971년까지 민주주의 교육을 위한 미국 교육연수 프로그램의 운영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좋아했는데, 말년 쯤(1968년)에 썼던 「이 시대의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받아들였고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바꾸려는 욕망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상충된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찍이 입문했던 그(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연민'이, 일시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고 그 결과 너와 나 사이의 장벽이 한 순간 철폐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오직 이 순간(연민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타인의 필요와 비통함과 고통이 직접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20]
[1] 독일 교육위원회 위원과 미국의 교육연수 프로그램 책임자를 역임하면서 교육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2] 아도르노와 같이 씀.[3] 『봄』 『리온하트 슈타이러』 『일』 『요하이』 등.[4] mimesis: 모방을 말한다. 즉, 자연을 재현하고 모방한다는 뜻이다.[5] 예를 들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영희'와 '철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2명의 노동력'으로 파악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6] 호르크하이머는 그렇다고 '주관적 이성'을 배제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그는 '주관적 이성'의 필요성도 인정하며, 따라서 '주관적 이성(도구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철학적 이성ㆍ비판적 반성적 이성)' 사이에서 '화해'를 목표로 한다.[7] 물론 도구적 이성(주관적 이성)은 신화시대 때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동물을 가축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이성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체계적이지 못했다.[8] 종교의 절대성을 비판하며 세상을 바꾸었던 계몽은 그 때만 하더라도 그 비판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근대 이후 '계몽 그 자체'가 절대화되어 스스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다시 동일성을 추구하고 획일화되어 버렸다고 호르크하이머는 주장했지, 이성이나 계몽 자체를 부정하자고 주장하진 않았다.[9] 주관적 이성을 말한다.[10] 객관적 이성을 말한다.[11]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객관적 이성(비판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도구적 이성)'의 화해라고 불렀다.[12] 호르크하이머는 권위적인 가족, 남성의 여성 지배, 인간의 폭력적인 동물지배 등등의 심리학적 분석을 사회학에 적용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호르크하이머는 프로이트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타나토스 이론(죽음 충동 이론)을 '체념적 문화 허무주의'와 결합된 일종의 생물학주의로 간주한다. 그는 타나토스 이론이 전제하는 인간의 증오, 공격성, 파괴성과 잔혹성을 인간의 원초적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호르크하이머에 있어서, 전쟁이나 일상의 삶에서 발견되는 잔혹성과 난폭성은 일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 및 억압적 사회질서와 학습의 산물일 뿐이다.[13] "The more the concept of reason becomes emasculated, the more easily it lends itself to ideological manipulation and to propagation of even the most blatant lies."[14] "Once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f democracy has collapsed, the statement that dictatorship is bad is rationally valid only for those who are not its beneficiaries, and there is no theoretical obstacle to the transformation of this statement into its opposite."[15] "When even the dictators of today appeal to reason, they mean that they possess the most tanks. They were rational enough to build them; others should be rational enough to yield to them."[16] "Whoever is not prepared to talk about capitalism should also remain silent about fascism."[17] 독일어로 60페이지짜리 논문이고 비판이론을 정의하는 호르크하이머의 대표작이지만 한국에서 번역된 바는 없다.[18] 1947년도에 『이성의 상실 (Eclipse of Reason)』이라는 제목의 영어 원본으로 출간했고, 이후 그걸 다른 사람이 독일어로 번역해서 이름지은 제목이 "도구적 이성 비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판은 1967년도에 출간되었다.[19] 아도르노와 함께 저술한 책으로, 원래 1944년에 『철학적 단편 (Philosophische Fragmente)』으로 있던 것을 개정해서 1947년에 출간한 책이다.[20]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