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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0:13:02

토머스 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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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Thomas Kuhn
파일:external/coraifeartaigh.files.wordpress.com/thomas_kuhn.jpg
<colbgcolor=#343d88> 본명 <colbgcolor=#FAFDFF,#191919>토머스 새뮤얼 쿤
Thomas Samuel Kuhn
출생 1922년 7월 18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사망 1996년 6월 17일 (향년 73세)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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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Thomas S. Kuhn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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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3d88><colcolor=#fff> 모교 태프트 스쿨 (졸업)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 1943년 학사)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 1946년 석사)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 1949년 박사)
경력 하버드 대학교 (교양 과정 · 과학사 / 조교수) (1948~56)
UC 버클리 (과학사 / 부교수) (1961~64)
프린스턴 대학교 (과학사 / 교수) (1964~79)
MIT (언어학과 · 철학과 / 석좌교수) (1979~91)
지도교수 존 해즈브룩 밴블랙
분야 과학철학, 과학사
배우자 캐서린 머스 (Kathryn Muhs)[1]
예하네 번스 (Jehane Barton Bu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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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제임스 코넌트와의 만남2.3. 《과학혁명의 구조》가 나오기까지2.4. 보스턴으로의 귀향
3. 사상
3.1. <과학혁명의 구조>
3.1.1. 과학의 흐름과 과학혁명3.1.2. “패러다임” 개념3.1.3. 공약불가능성
3.2. <과학혁명의 구조> 이후
4. 수용과 학문적 영향5. 주요 저서6. 어록7. 관련 강의 영상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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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 물리학자.[2]

옛날부터 서양 학생들을 괴롭혀 온 외국어 문법 암기사항을 가리킬 때 쓰이던 단어 “패러다임(Paradigm)에 새로운 뜻을 부여함으로써, 상황이나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뀔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이다. 반증주의를 내세웠던 칼 포퍼와 대립되는 입장에 서 있다고 평가된다. 과학철학에 있어 과학사적 연구를 중요시했다.

2. 생애[3]

2.1. 초년기

쿤은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유대인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은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하버드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였으며, 어머니 미네트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쿤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쿤은 전학을 자주했는데, 부모님은 쿤이 규모는 작지만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사립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다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비교적 규모가 큰 태프트 사립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쿤은 과학과 수학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그 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쿤은 1940년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정작 쿤의 관심분야는 문학과 철학에 있었고 그래서 쿤은 강의도 그런 쪽으로 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하버드 대학교는 전시 체제로 운영되었으므로 쿤은 그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쿤은 조기 졸업을 위한 전자학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관심 분야에 손을 완전히 놓지는 않아서, 학부 2년차에는 학부 신문인 《하버드 크림슨(Harvard Crimson)》지의 편집 기자로 활동했으며, 학부 문학회인 시그넷 소사이어티(Signet Society)의 회원도 되었고, 학부 3년차에는 자연계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크림슨》의 편집장으로 뽑혀서 활동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 내의 라디오파 연구소에서 군 복무를 시작해서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프랑스와 영국 등지의 연합군 레이더 기지들을 옮겨다니며 근무했다. 이 시절에 쿤은 다시 과학, 철학,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가 때에도 여러 철학자들의 글을 읽는데 시간을 썼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5년 쿤은 다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그는 전쟁 수단으로 동원되는 과학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그래서 자신이 뛰어난 물리학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물리학과에 양해를 구하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철학 과목을 한 학기 수강한다. 물론 자신의 나이와 여건을 고려해 일단 물리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지만, 이후 쿤에게 철학은 계속해서 강력한 관심사로서 남게 된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 끝에 쿤은 1946년에 석사 자격 시험에 통과했고 박사 과정으로 고체 이론 물리를 전공한다.

2.2. 제임스 코넌트와의 만남

쿤이 대학원 시절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의 평생 스승인 제임스 코넌트 총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코넌트 총장은 미국 고등 교육 개혁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으며, '자유 사회에서 교양 교육의 목표 설정을 위한 하버드 위원회'를 발족하고 인문학도들에게 과학사 중심의 과학 교양교육이 필요함을 주창하고 있었다. 쿤은 이에 대해 '방향은 맞지만 그걸 가르칠 교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식의 논평을 《크림슨》에 게재하였는데, 이 논평이 코넌트 총장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총장은 쿤에게 '그럼 자네가 이 프로젝트를 도와주게나'라고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쿤은 이를 계기로 순수 물리학자가 되는 길을 접고, 본격적으로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물론 쿤에게 있어서 과학사는 철학으로 가는 중간 단계였음은 분명하다.

코넌트 총장의 프로젝트에 참가한 1947년은 쿤에게 여러 가지로 중요한 해였다. 그해 여름, 쿤은 학부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탐구하던 중에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쿤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끔찍할 정도로 역학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의 글은 논리이든 관찰이든 지독한 오류들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쨌건간에 고전 논리학의 창시자로 칭송받았고 경이로울 정도로 꼼꼼하게 자연을 관찰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재능이 어째서 운동학과 역학에 관해선 이다지도 발휘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의문에 쌓인 어느날 쿤의 머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불연듯 스쳐지나갔다.
책상 위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펼쳐 놓고 손엔 4색 연필을 쥔 채 책상 앞에 앉아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 그때 내가 본 광경은 여전히 뇌리 속에 남아있다. 갑자기 머릿 속의 파편들이 스스로 새롭게 짜맞추어지며 탁탁 들어맞기 시작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순간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단한 물리학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내가 상상조차 못했던 방식이었다. 그제서야 난 그가 말했던게 무엇이었는지, 그의 권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했다. 이전엔 지독한 착오인 것 같았던 진술들이 이젠 아무리 나쁘게 본들 강력하고 일반적으로 성공적인 전통 하에서의 아까운 실수로 비추어졌다.[4]
즉, 쿤의 깨달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던 지적 전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시대의 과학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과학자들이 작업하는 '지적 틀'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운동"이라는 용어는 우리 시대가 정의하듯 '사물의 위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의인 '일반적인 변화 전반'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그의 논리가 지독한 착오는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번뜩이는 통찰에서 이미 쿤의 그 유명한 개념, '패러다임'에 대한 단초가 보여지고 있다.

쿤은 코넌트 총장의 후원 아래 1948년 펠로 소사이어티(Fellow Society)의 주니어 회원이 되었다. 쿤은 회원 자격으로 3년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해 쿤은 물리학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캐서린 머스와 결혼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역사책을 포함해 많은 책들을 읽었다. 쿤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읽은 책들 중에는 과학사가 알렉상드르 쿠아레, 인지 심리학자인 장 피아제, 철학자인 윌러드 콰인, 루트비히 플렉의 책들이 포함된다. 1950년에는 코넌트를 도와 교양과학 과정인 '자연과학4' 강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회원 자격 마지막 해인 1951년 초에 쿤은 연구를 위해 유럽에서 가스통 바슐라르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을 만나고 돌아와 보스턴 공공 도서관에서 로웰 강의로 알려진 강의를 8회에 걸쳐 진행했다. 당시 쿤은 3회까지의 강의를 바탕으로 《과학혁명의 구조》를 쓰려고 구상했다. 그러나 과학사를 통해 철학적 함의들을 이끌어 내려는 그의 구상은 1956년까지 과학사 연구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 따라 연기되었다.

2.3. 《과학혁명의 구조》가 나오기까지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쿤은 코넌트 프로젝트의 강사로서, 그리고 과학사 조교로서 하버드에 남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하버드 주변을 맴돌았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쿤은 오랜 기간 하버드에 머물렀지만 정작 정규 교수직으로 승직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간 그의 연구에 진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3년에는 『통합 과학의 국제 백과사전』의 과학사 부분을 저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1956년까지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고 활동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같은 해에 그의 첫 저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출간했는데, 쿤은 이 연구를 토대로 하버드 사학과에 정규 교수직 승진 심사를 신청한다. 지금이야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명저로 인정받지만, 당시 하버드 사학과는 그 책이 교육용으로는 적당하나 학문적으로는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를 내렸고, 그렇게 쿤은 정규 교수직 승진 심사에서 떨어졌다.

쿤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 학교는 UC 버클리였다. 1956년에 버클리의 철학과와 사학과는 쿤에게 과학사 수업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쿤이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UC 버클리가 그를 초청한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냉전시대에 소련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는 국가적인 정책의 일환으로 과학적 발견의 방법을 모색하는 프로젝트가 추진 중에 있었는데, 쿤의 연구 경력이 그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하에서 쿤을 초청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었다. 쿤은 날씨 좋은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사를 가르쳤으며, 남는 시간에는 자신의 연구가 품고 있는 철학적 문제에 매달리면서 그 생각을 바탕으로 《과학혁명의 구조》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과학혁명의 구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1년 전인 1961년에, 쿤의 말을 빌리면,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는 충격적인 일을 겪는다. 승진할 것이 유력했던 UC 버클리 철학과 정교수직 승진 심사에서 충격적이게도 탈락한 것이다. 더군다나 쿤은 그 무렵 존스홉킨스 대학교로부터 좋은 조건의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쿤이 버클리에 남아 있기를 바랬던 학과장이 이를 말리면서 심사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도 있었다. 그러나 심사에서 철학과의 노장 철학자들이 쿤의 철학과 정교수직 승진은 모두 반대하면서 단지 사학과 정교수직만 승인해주었고, 결국 쿤은 사학과 교수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는데, 존 설은 후일 어느 대담에서 자신을 포함해 소장 학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을 정도로 부당한 일이었다. 불과 2년 후인 1963년 프린스턴 대학교[5]에서 과학사 및 과학 철학 교수직을 쿤에게 제안하자 쿤이 그것을 바로 승락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무튼 이 사이인 1962년에 쿤은 그 유명한 책 《과학혁명의 구조》를 낸다. 사실 이 책은 초반에는 그렇게 잘 팔리는 책이 아니었다. 1962/63년에는 919부, 1963/64년에는 774부 밖에 팔리지 않았다.[6] 그런데 곧 이 책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이 책이 각 학문 분야로 파급되면서 실질적으로 철학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바로 그 계기는 1965년 런던정경대학에서 열린 한 과학철학국제학회에서였다. 이 학회의 심포지엄은 원래 칼 포퍼의 과학철학의 의의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쿤의 과학철학을 포퍼, 라카토슈, 툴민, 파이어아벤트 등 대부분의 발표자들이 논박하는 과정에서, 칼 포퍼를 위한 심포지엄이 사실상 쿤을 위한 심포지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회의의 토론 결과물인 『비판과 지식의 성장』은 본래 그 의도와는 다르게, 쿤 이론에 대한 철학자들의 반응을 모은 책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러다임과 과학혁명을 이용하여 과학의 발전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을 주제로 한 학회가 여러 곳에서 열리게 되었고, 각종 매체에서 이를 언급함에 따라서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다른 분야에서도 곧 쿤의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한참 동안 이 책은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 중 한 권이었고, 그에 비례하여 《과학혁명의 구조》도 덩달아 불티나게 팔렸다.

프린스턴 대학교에 있었던 1978년까지 쿤은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에 쿤은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쿤을 오해한 탓도 크다. 샌프란시스코의 학생들은 쿤을 이렇게 찬양했다. "마르쿠제와 쿤은 샌프란시스코의 영웅이다. 혁명에 대해 책을 쓴 분들이 여기 있다." 쿤은 조교들을 통해 자신의 책이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야 했다. 극단적인 비난도 있었다. 쿤과 친분이 있었던 과학철학자 카를 헴펠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쿤의 책은 비합리적이고 상대주의적이므로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 그러나 이 양극단의 평가는 실제 쿤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쿤은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기 전,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1977년에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묶어 《본질적 긴장》을 출간했으며, 1978년에는 《흑체 이론과 양자 불연속성》을 출간했다.

2.4. 보스턴으로의 귀향

1977년 쿤은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 한 해 동안 뉴욕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1979년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로 재직한다. 이로써 쿤은 정신적 고향인 보스턴으로 돌아온 셈이다. 귀향 후 쿤은 여러 가지 상을 받기도 하고 몇 번의 학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귀향 전 1968년에서 1970년까지 미국 과학사학회 회장을, 그리고 귀향 후 1988년에서 1990년까지 과학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과학사학회 최고상인 조지 사턴 상을 받았고, 1983년에는 과학사회학회의 존 데스먼드 버날 상을 받았다. 1983년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철학과의 첫번째 록펠러 석좌교수로 임명되었고, 1991년 그 대학에서 은퇴했다. 쿤은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서 10개 이상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쿤의 삶은 철학자들과의 대담에도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시절의 논문들을 보면 그가 과학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언어 철학적인 문제로 집중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1970년대까지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기했던 패러다임의 문제를 해소하고 의미를 명료화하려고 노력했다면, 귀향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당대 미국 철학자들의 비판에 답하면서 자신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기도 하고 다른 표현들을 사용해 이를 구체화시켰다.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비판들 중에서도 특히 도널드 데이비드슨과 힐러리 퍼트넘의 비판에 대응하려고 애썼다. 데이비드슨의 비판에 대해서는 국소적 공약불가능성의 개념으로 대처했고, 퍼트남의 인과적 지칭이론을 반박할 때에는 공약불가능성의 전체적 특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 즉 과학혁명을 '과학종(scientific kind)의 사전적 분류 체계의 변화'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러한 설명은 아쉽게도 설득력을 갖지 못했고, 자신의 철학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한 채 쿤은 1996년 6월 17일 기관지암[7]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사상

3.1. <과학혁명의 구조>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판은 1962년에, 2판은 1970년에 출판되었다. 특히 2판은 1판 출판 이후 빗발친 여러 문제 제기에 대한 쿤의 대답인 후서Postscript를 담고 있으므로 정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최신 출판본은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재판된 4판이며, 재판 당시 생존한 가장 저명한 과학철학자중 하나였던 이언 해킹Ian Hacking이 머리말을 썼다. 2013년 한국에서도 4판이 김명자/홍성욱 공동 번역으로 새로이 출판되었다.[8]

3.1.1. 과학의 흐름과 과학혁명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과학은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밟으며 발전해나간다:

이러한 설명은 흔히 다음과 같은 함축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3.1.2. “패러다임” 개념

그리스어 “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 영단어 “Paradigm”은 본래 외국어 문법을 학습할 때 동사의 변화 패턴을 외우는데 쓰는 범례를 가리킨다[예.]. 쿤은 재판관이 관습법 상의 판례에 준거해 판결을 내리는 것을 과학 활동과 견주어 연상하고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쿤은 과학이 항상 특정한 패러다임(paradigm)에 의해 조직되고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이론적 개념, 규칙, 가정, 실험 방법론 등을 포함하는 의미의 단어이다.

쿤은 과학적 과정이 항상 특정한 이론적 틀(패러다임)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는 앞선 노우드 러셀 핸슨과 같은 학자들의 작업을 참고하면서[10] 과학적 활동에는 과학자가 사용하는 개념, 믿음, 실험 장치 등이 관찰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지구 중심설(천동설) 패러다임에 익숙한 과학자와 태양 중심설(지동설) 패러다임에 익숙한 과학자는 동일한 천문학적 현상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11]

하지만 “절망스러울 정도로 남용되고” “통제가 되지 않는다고” 쿤 자신이 고백할 정도로 현대 사회에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뿌리 깊게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매우 애매하게 사용되며 1판 출판 당시에 많은 비판을 받게끔 하는 요인이었다. 철학자 마가렛 마스터맨Margaret Masterma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어휘 “패러다임”이 최소한 21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쿤은 이런 비판을 인정하고 2판의 '후서'에서 “패러다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의를 시도한다.

'후서'에서 쿤은 “패러다임”이 넓은 의미에선 기호적 일반화symbolic generalization (예. 역학에서의 f=ma), 모형models (예. 기체 운동론에서의 기체 운동 모형), 가치value (정확성, 단순성, 일관성 등), 범례exemplar로 구성된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을 뜻하며, 좁은 의미에선 오직 범례만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때 ‘범례’란 실제 해당 분야에서 해결한 모범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해답들을 가리킨다: 과학 공동체의 예비 구성원들은 이런 연습 문제들을 푸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과학 공동체에 속한) 전문가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체득하게 된다.

쿤은 이렇듯 과학 가운데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바로 구체적인 문제 풀이이며, 과학자들의 중요한 발견 역시 기존의 문제 풀이 방식을 본땀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 예시로 쿤은 베르누이의 정리 발견이 유체를 하위헌스(호이겐스)의 진자를 빗대어보는 발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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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공약불가능성

본래 “공약불가능하다incommensurable”, 즉 공통된(“com-”) 척도(“measure”)를 결여한다는 말은 직각이등변삼각형에서 (빗변 길이/다른 변 길이) 값이 유리수가 아니라는 성질을 가리키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쿤은 패러다임들끼리의 경쟁이 증명 문제처럼 딱딱 풀리는 것이 아니며,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공약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쿤의 이러한 ‘공약불가능성’ 개념은 <과학혁명의 구조>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논란을 낳은 주제 중 하나이며, 과학철학의 중요한 문제거리중 하나로 남아있다.

3.2. <과학혁명의 구조> 이후

<과학혁명의 구조> 출판 이후 쿤은 프린스턴 대학교, MIT 등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후기로 갈 수록 ‘공약불가능성’ 개념을 보다 정교화하는 등 과학철학적 주제에 관해 주안점을 두었다.

20세기 후반 내내 쿤은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과 묶여 '합리주의적 과학관'에 반하는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쿤은 자신이 ‘비합리주의’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으며 상기한 사회 구성주의와 과학지식사회학 옹호자들과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쿤의 이론중 공약불가능성은 후에 그의 후계자라 할수 있는 피터 갤리슨에 의해 반박된다. 갤리슨은 크리올어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는데, 분명 사용하는 단어와 제반 문화가 다름에도 언어가 피진어, 크리올어를 통해 소통가능하듯이 과학의 패러다임도 일종의 피진어 형성을 통해 공약불가능성을 극복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과학자를 이론/실험/기구 연구자로 나누고 실험,기구연구자들이 피진어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여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4. 수용과 학문적 영향

<과학혁명의 구조>는 흔히 20세기 중반 과학적 방법론 논쟁의 역사 속에서 기존에 널리 받아들여진 칼 포퍼의 반증주의에 관한 막대한 위협을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이는 21세기 현재까지도 과학적 실재론을 반대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문헌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러한 <과학혁명의 구조>의 입장은 곧 논리 경험주의논리학적인 형식에 방점을 둔 전통적인 과학철학적 입장 혹은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많은 반발을 낳았다. 예컨대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과학혁명의 구조> 서평에서 그 내용에 관해 부분적인 공감을 표하면서도 쿤의 핵심적 주장에 대해선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한 바 있다[12].

<과학혁명의 구조>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진영은 ‘과학이 사회적인 요소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활동이다’라는 주장을 반대하는 진영이었으며, 이는 곧 과학에 대한 사회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 그리고 과학기술사회학에서는 스트롱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으로 대표되는 과학지식사회학SSK을 낳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급기야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하여 종국엔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과학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아울러 <과학혁명의 구조>는 진영을 막론하고 과학철학에 있어 과학사 연구의 비중이 확대되는데 기여하였으며, 쿤과 같은 이공계 학위 소지자들이 과학철학 및 과학사 학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코페르니쿠스 혁명
The Copernican Revolution
<colbgcolor=#fff,#1f2023> 1957년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년
본질적 긴장[13]
The Essential Tension
1977년
흑체 이론과 양자 불연속성
Black-Body Theory and the Quantum Discontinuity
1978년
구조 이후의 길[14]
The Road since Structure
2000년

2024년 기준,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과학혁명의 구조』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나, 나머지 책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6. 어록

역사를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보고(寶庫)로 간주한다면, (역사는) 현재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전환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15]
《과학혁명의 구조》 2판 1장의 첫 구절.
당신이 얻으려는 해답은 당신의 질문에 달려있다. [16]

7. 관련 강의 영상

[navertv(579423)]
[navertv(579408)]

8. 여담


[1] 쿤과 캐서린 머스 사이에 3명의 자녀(사라, 엘리자베스, 너새니얼)를 둠.[2] 쿤 자신은 본인을 "철학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 물리학자"라고 표현했다.[3] 본 내용의 대부분은 하버드 사이언스 리뷰(Harvard Science Review)에 게재된 쿤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인터뷰 전문), 여기에 쿤이 자신의 책에서 말했던 내용과 다른 인터뷰의 내용을 추가했다.[4] Thomas Kuhn, "What Are Scientific Revolutions?", The Probablistic Revolution, Volume I: Ideas in History, eds. Lorenz Kruger, Lorraine, J. Daston, and Michael Heidelberger (Cambridge, MA: MIT Press, 1987), excerpt from pp. 7-22: http://www.units.miamioh.edu/technologyandhumanities/kuhn.htm[5] 과학혁명의 구조 한국어 번역판에서[6]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홍성욱 옮김, 까치글방, 2013, p.49[7] 한국에서는 보통 폐암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쿤은 기관지암과 후두암이 악화되어서 죽었다. #[8] 3판까지 번역은 김명자의 번역으로 평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4판에서 합류한 홍성욱의 공동 번역본에 관해선 호평이 많다. 물론 전공자들은 원서로 공부한다.[예.] 라틴어 1형 동사 'amo-amas-amat …'[10]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김영자, 홍성욱 옮김. 까치글방. 2019(14쇄) 166쪽, 175~176쪽, 212~213쪽[11] 흔히 이론적재성이라고 불린다.[12] Steven Weinberg (Oct. 8, 1998), "The Revolution That Didn’t Happen",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1998/oct/08/the-revolution-that-didnt-happen/[13] 『과학혁명의 구조』 전후로 발표했던 철학적 논문을 모아놓은 책. 『과학혁명의 구조』와 함께 읽으면 좋다.[14] 쿤의 사후에 제임스 코넌트와 존 호글랜드가 쿤의 논문을 편집하여 책을 엮음.[15] History, if viewed as a repository for more than anecdote or chronology, could produce a decisive transformation in the image of science by which we are now possessed.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I. Introduction: A Role of History)[16] the answers you get depend upon the questions you ask.[17] 출처 불명.[18] 웨슬리 샤록, 루퍼트 리드 『과학 혁명의 사상가 토머스 쿤』 김해진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