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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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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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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함석헌
咸錫憲 | Ham Seok-heon
파일:함석헌.jpg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1]
본관 강릉 함씨[2]
출생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미라면 원성동[3]
(현 평안북도 염주군 다사노동자구)
사망 1989년 2월 4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29호
가족 아버지 함형택, 어머니 김형도
배우자 황득순[4], 슬하 2남 5녀
장남 함국용[5], 차남 함우용[6]
장녀 함은수[7], 차녀 함은삼[8]
3녀 함은자[9], 4녀 함은화[10], 5녀 함은선[11]
학력 용천 덕일소학교 (수료)
용천 양시공립보통학교 (졸업)
평양고등보통학교 (중퇴)[12]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고등사범학교 (역사학 / 졸업)
직업 사회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
종교 개신교(퀘이커)
경력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
씨알의 소리 편집대표위원장
신민당 고문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위원장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일생
2.1. 유년기2.2. 일본 유학2.3. 귀국 후 해방 전까지2.4. 해방 후
3. 씨알 사상4. 연표5. 여담

[clearfix]

1. 개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사상계 통권 61호(1958년 8월)에 투고한 글의 제목.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언론인,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 노년에 더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겨레의 할아버지'란 호칭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신자였다.[13]

함석헌은 자신의 정체성을 퀘이커에 두고 있다. 퀘이커 신자로서 성서조선에 기독교 관련 칼럼을 꾸준히 연재했으며, 퀘이커 관련 신학서적을 번역하는 등 생전에 국내에서의 퀘이커 진흥에 힘썼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퀘이커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함석헌 본인이 도덕경 연구/강의도 하는 등 말년으로 가면 갈수록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이 강해졌기에 나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베스트셀러인 저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본래 기획에선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였으나, 그가 말년에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출간 전 제목을 수정했음을 밝힌 것에서 잘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일생동안 개신교인, 퀘이커 신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말년으로 갈수록 기독교 초교파 및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일생

2.1. 유년기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미라면 원성동(現 북한 기준 평안북도 염주군 다사노동자구), 일명 다사도라고 불리는 곳에서 아버지 함형택(咸亨澤, 1878. 7. 6 ~ ?)[14]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형도(金亨道) 사이의 2남 5녀의 둘째이자 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형택은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 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 김형도는 50살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었다. 훗날 함석헌은 자신이 존경한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꼽을 정도였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9촌 삼종숙(三從叔)인 함일형과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咸錫奎, 1881. 2. 12 ~ ?), 함석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9년 평양에서 3.1 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는 박차고 나온 학교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년여 간 집에 있다가 경기도 경성부로 올라와 우연히 함석규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군오산학교[15]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이때 교장이던 유영모와의 만남을, 함석헌은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함석헌은 류영모에게서 일본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와 야마무로 군페이에 대해 배웠다. 또 그 외에도 이승훈 선생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고를 하고는 했다. 이외에도 허버트 조지 웰스의 글과 그가 이후 자주 언급하게 되는 퍼시 비시 셸리의 글도 이때 접하게 된다.

2.2. 일본 유학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16]에 입학하였고 1928년 졸업하였다. 생전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원래 도쿄제국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구제고등학교였던 제1고등학교를 지망했으나, 이 당시 조선인이 구제고등학교에 지원하려면 본인이 원래 다녔던 평양고보같은 관립고등보통학교 졸업증이 있어야해서 무산되고 결국 고보 졸업증이 필요없던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일본의 고등사범학교들은 교칙이 매우 엄격하고 똥군기도 장난아니었기때문에 고사[17]시절을 썩 좋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하면서 그냥 고사에 가지말고 정식 대학에 진학했어야 했단 식으로 후회하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생활에서 함석헌은 두 가지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관동대지진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이었다. 관동대지진은 진도 6의 대지진으로 사망자만 최소 10만여 명이 발생한 대재앙이었다. 이런 대재앙 속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조직적으로 구타, 살해등을 수도 없이 자행했다.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때 6천여 명의 조선인과 일부의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피해를 입는 관동대학살을 일으켰다. 함석헌은 친구의 집에 가 있어 지진이 일어난 반대편에 있다가 참변을 면하였지만, 친구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집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나를 그 곳에 있게 하여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서도 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있게 한 것은,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 곳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며칠 뒤 일본도와 죽창을 든 일본인들에게 쫓기게 되었으나 경찰에 의해 수감되어 오히려 무사했으며, 이후 인생에서 수시로 드나들게 될 유치장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18]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하면서 그는 우치무라 간조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된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이자 손기정남승룡의 마라톤 스승인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의 창간에 참여했고 직접 글도 게재한다. 그의 첫 글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였는데 여기서 함석헌은 마태오의 복음서 6장을 인용하며 의식주를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의(義)를 구하려는 의지를 표현했다. 《성서조선》은 그의 지우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고, 잡지의 책임자는 김교신이 되었다. 함석헌은 여기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2.3. 귀국 후 해방 전까지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던 시점이었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일제 관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잡지는 회원 외 배포를 금지 시켰다. 학교에서 그의 별명은 '함도깨비'로, 못하는 것이 없다 하여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1938년 3월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현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에 있던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학생들을 모아,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던 중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로 1년여를 옥살이를 했다. 이때 옥중에서 아버지 함형택의 부고를 받았고, 그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이 상주 노릇을 했다고 한다.

출옥한 이후에도 계속 농사일을 맡아 농사를 지었으나 1942년에 <성서조선> 필화 시비[19]에 휘말려 서대문형무소에서 감금되어있다가 해방을 맞는다. 이때 그를 고문하고 구타하던 일본인 형사와도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1940년대에 일본인 형사가 유창한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점.
형사: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그렇다.
형사: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형사: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데[20]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형사: 에이, 그런 협잡(인찌끼)[21]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22]

감옥에서 그는 불경을 접했는데, 무량수경을 비롯해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등의 경전들을 읽으며 "불교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23]고 한다. 이후 출감하였고, 1945년 광복을 앞두고 친우 김교신의 부고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성서조선>도 폐간되고 친구도 잃은 상황에서 그는 낮에 농사를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이때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2.4. 해방 후

해방 후 일시적으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등에 앉혀졌으나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된다. 이때 소련군에게 둘러싸여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받은 2만 평의 전답으로 인해 토지개혁 때 반동으로 낙인 찍혀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질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24] 이후 이중 간첩 행위까지 요구받자 결국 1947년 월남한다. 이때 어머니와 장남, 장녀 3명이 내려오지 못해 평생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월남한 이후 그는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했으며 이 무렵에서 한국 전쟁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한국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이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1952년 무렵 <흰 손>이라는 시를 동지들 앞에서 낭송하며 무교회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사실상 <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년대 내 마음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25]

그는 무교회에 머물지 않게 된 이유를 3가지로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 우리만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백 년을 가다가도, 천 년을 가다가도, 내가, 우리가 하게 생겼지, 어디서 다 된 것을 빌어다 써가지고 될 수는 없다. 물건은 빌릴 수가 있지만 정신이야, 믿음이야, 빌 수 없지 않은가?’(중략) 정치는 암만 해도 일본 혼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려 될 수 없고, 신앙도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가지고 우리를 살릴 수 없다. 무교회 신앙은 우치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중략) 그러므로 나를 살리는 내 신앙은 내게 있다. 내가 발견해내고 내가 남김없이 다 써야 한다. (중략) 그러니 나는 지난날에 배우던 무교회를 찾고 그것을 받들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이하 생략) [26]

서울로 돌아온 후, 그는 안병무의 권유로 <사상계>의 주필로써 자리잡게 된다. 이때 그는 장준하와 만나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지가 되고, 평생동안 그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의 사상계 첫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 글은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실렸으며 전쟁과 전후 기간 동안 기독교의 행보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함석헌의 첫 대사회, 대종교 비판 발언으로 앞으로 이어질 그의 발언들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후 사상계에 여러 사람들의 반박글과 재반박글이 연재되면서 사상계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잡지로 자리 매김하게 했다.

그 다음에 그가 게재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수록된 '할 말이 있다.'였다. # 이 글은 특이하게도 다른 글과는 달리 함석헌이 직접 써서 사상계로 가져간 글이었다. 중간에 군인과 대통령을 비판하여 장준하와 <사상계>에 의해 편집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훗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 다시 고스란히 실렸으며, 그 때문에 함석헌은 형무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우리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고 말하며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중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 더 거리낌 없이 하게 되었으며 비겁한 민중은 점점 더 말을 아니하고, 점점 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젊은 민중을 향해 가슴을 터놓고 말할 것을, 외칠 것을 호소하면서 글을 끝맺었다.

이 글에 대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반박문 '함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가 이 사상계에 기고되었으며# 함석헌 역시 재반박문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를 <사상계>에 기고해(1)(2) 사상계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사상계>에서 자신의 글이 편집되었음을 안 함석헌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약 1년여 동안 사상계에 글을 기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준하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6.25 전쟁 8주년을 기념하여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한다. 이 글에서 그는 6.25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소련미국의 갈등에서만 찾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 3가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독립하지 못하는, 제노릇 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 독립정신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이었다. 그는 생각이란 위대한 종교, 결국 뜻을 찾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문제가 '생각의 가난'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결국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으로는 국민들의 반성과 회개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5.16 군사정변 후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를 기고하면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나 군정 연장 선언에 귀국하여, 장준하의 옥중 출마를 도와 당선시켰다. 여담으로 1963년 무렵 연설이 유튜브에 남아있다. #

이후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으며,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 받았으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퀘이커 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 대회에 참석한 뒤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받았으나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 1980년에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이것도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사상계>가 폐간된 이후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며 새로운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씨알의 소리>는 출간하자마자 폐간되고 이에 고소를 진행해 다시 재 발행했으며, 12.12 군사반란 이후 1981년에 폐간되었다가 1988년 이후 재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파일:법정스님과함석헌선생.jpg

법정 스님도 저서에서 함석헌에 대한 존경을 자주 표현했고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감동 받았던 것을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1970년 <씨알의 소리>가 창간되었을 때 송건호[27] 등과 함께 편집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법정의 스승으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이 함석헌과는 같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선후배[28] 사이로 막역한 사이였기에 법정 역시 스승의 친구인 함석헌과 친해질 수 있었다고.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1964년[29] 해인사 퇴설당선원에서 정진하던 시절 종로에 있던 사상계 본사에 장준하를 만나러 갔다가 마침 그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함석헌은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책 <뜻으로 본 韓國歷史>를 다시 손질하러 법정이 있던 해인사의 금선암(金仙庵)에 들어왔고,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窮玄堂)에서 승려나 사부대중을 상대로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그만두고 법정이 1975년 가을 송광사 불일암에서 은거하게 되었을 때 함석헌은 법정의 산거(山居)에 한 번 오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고, 법정은 오셔서 쉬어가시라는 회신을 보냈는데, 15-16인 되는 장자모임 회원들과 함께 왔다. 이때 회원들은 아랫절 즉 송광사에 묵고 함석헌은 법정과 불일암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가 법정이 불일암으로 옮겨온지 얼마 안 되어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그릇과 수저가 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아, 법정이 함석헌과 함께 온 회원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밥 대신 감자를 삶아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감자를 한솥 삶았는데, 젊은 사람들과 달리 함석헌은 겨우 두 개 정도 들고는 더 먹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은 "하루에 저녁 한 끼밖에 안 드시는 분이 감자로 견디기 힘든 건 당연하고 따로 밥을 지어드려야 했었는데, 융통성이 없이 꼭 막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그 일이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회고했다. 또한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법정은 마침 안거중이었고 함석헌의 영결식날 하필 절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어, 인편에만 조문을 대신케 하고 참석하지 못했다며 "고인과 유가족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라고 추모글에서 고백했다.

1987년부터 암으로 투병하던 중 1988년 12월 씨알의 소리 복간 96호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투고하였다. 이는 그가 쓴 마지막 글이었다. 1989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같은해 2월 4일 새벽 서울특별시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함석헌은 사후 13년만인 2002년에 건국포장 수훈을 받았다. 그가 만년을 보낸 쌍문동의 저택은 함석헌기념관으로 조성되었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6년 10월 19일에는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씨알 사상

民 대신 "씨알"[30]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저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YMCA에서 옛 스승[31]인 다석 류영모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겼다.

그는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다"를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뭄에 있나니라"고 해석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 다만 전통 있는 순우리말겨레라는 단어가 이미 있는데 불필요하게 새 낱말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겨레는 민중과는 결이 다르지만.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는 다섯 가지 특성이 있다.

4. 연표[32]

5. 여담

노벨평화상 후보에 2회 노미네이트되었다. 단, 노벨평화상 후보는 단순 추천만 받으면 등재될 수 있기에 '친구가 있다'라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이 다 해 먹는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이와 비슷한 관용어는 함석헌이 발언한 이전에도 계속 쓰이던 말이다.

우연이겠지만 자신이 저항해 온 일제의 수장인 쇼와 덴노와 생몰년도가 같다. 정확히는 해당 인물보다 한달 먼저 태어나 한달 늦게 죽었다.


[1] 신천, 바보새 모두 알바트로스에서 따온 호이다[2] 동원군파 53세 석(錫) 항렬.[3] 강릉 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함일형·함석은 부자도 이 마을 출신이다.[4] 黃得順. 1902년 1월 15일생. 창원 황씨(昌原 黃氏)이다.[5] 咸國用. 1920년생.[6] 咸禹用. 1931년 9월 1일생.[7] 咸銀秀. 1923년생.[8] 咸銀三. 1927년 4월 20일생.[9] 咸銀子. 1929년 8월 16일생.[10] 咸銀和. 1933년 3월 31일생.[11] 咸銀善. 1939년 1월 25일생.[12] 이후 명예졸업.[13] 퀘이커란 십일조에 반대하고 목사가 없는 개신교 일파이다. '복음주의 퀘이커' 분파에만 목사가 있다. 인디언과의 우호 증진, 노예제도 반대 등의 주장을 펼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예제 철폐 이전에 남부의 노예들을 노예제가 없는 북부로 탈출 시켜주던 지하 비밀조직의 상당수가 이 퀘이커 교도들이었다고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자서전에서 가끔 퀘이커교도 이야기를 했다.[14] 譜名은 함극상(咸極祥)[15]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16] 현재의 국립 쓰쿠바대학. 여학교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가 따로 있었는데, 오늘날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다.[17] 고등사범학교의 줄임말[18] 웅진출판사의 만화 위인전 "20세기의 큰 인물"에서는 이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반인과 경찰 가리지 않고 일본인들에게 공격을 받은 경험 때문에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걸로 나온다. 비슷한 시기에 루쉰 역시 '중국인은 미개하니까 동족이 참수당해도 구경을 하거나 낙제하는 것도 당연하다'며 조롱받은 경험을 두고 의사가 아닌 문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19] 당시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글이 실렸는데, 일본은 이 글이 일제를 은유적으로 비판한다고 판단하고 <성서조선>을 전부 몰수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했다.[20] 이건 일종의 유도 심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여호와 외의 다른 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유일신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다>>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죄다>>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천황은 여호와를 믿지 않으니 멸망한다 라는 식으로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몰아가려고 한 것.[21] いんちき. 일본어 사전에 찾아 보면 협잡, 부정, 속임. (=ごまかし, いかさま)이라고 나온다.[22] 이치석. (시대의 창, 2008) 씨알 함석헌 평전, 292~3.[23]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196.[24] 함석헌의 글과 관련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출소 후에도 스스로 농사짓던 땅이 몇 천 평 정도 남았는데 그조차도 진정한 애국자라면 지주일 리 없다는 논리(......)로 모두 뺏겼다고 한다. 땅을 뺏기 전 그래도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인데 직접 농사지을 땅 정도는 갖게 해주자는 의견도 있었고 함석헌 본인은 자신이 진짜 애국자라면 토지가 있을 수도 생명이 있을 수도 없다고 몰수를 받아들였다지만 애초에 그 땅은 원래 가난했던 함석헌의 아버지가 명의로 소문나서 모은 재산이라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25] 함석헌, 말씀모임, 전집 3, 한길사, 1988, 김용준 엮음, 나의 스승 함석헌, 해동문화사, 1991, 69쪽 재인용[26] 함석헌, 말씀모임, 전집 3, 139쪽[27] 훗날 <한겨레> 초대 사장이 된다.[28] 효봉이 1기, 함석헌은 8기.[29]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항쟁이 벌어졌던 해이다.[30] 본래는 '알'에 'ㅏ'가 아닌 (아래아)를 쓴다.[31] 평안북도 정주군오산학교에 다닐 때, 류영모가 새로운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때부터 그의 제자가 되었다.[32] 출처: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웅진출판사)[33] 당시 지식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5.16을 쿠데타라고 비판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무능한 장면 내각을 물리친 5.16을 혁명으로 인식하며 칭찬하기 바빴으며 대중들 중에서도 5.16을 환영하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