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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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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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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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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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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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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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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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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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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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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김시습
金時習|Kim Sisoup
파일:김시습_초상.jpg
출생 1435년
한성부
사망 1493년 (향년 58~59세)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
(現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본관 강릉 김씨 (江陵 金氏)
열경(悅卿)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시호 청간(淸簡)
종교 불교(법명: 설잠)
부모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선사 장씨
배우자 남효례의 딸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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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芳草襲芒屨, ruby=방 초 습 망 구)] 향긋한 풀내음 신에 스미고
[ruby(新晴風景涼, ruby=신 청 풍 경 량)] 맑게 갠 풍경 시원하기도 하여라
[ruby(野花蜂唼蘂, ruby=야 화 봉 삽 예)] 들꽃마다 벌이 날아와 꽃술을 물고
[ruby(肥蕨雨添香, ruby=비 궐 우 첨 향)] 살진 고사리 비가 적셔 향기를 더하네
[ruby(望遠山河壯, ruby=망 원 산 하 장)]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ruby(登高意氣昻, ruby=등 고 의 기 앙)] 산성 따라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구나
[ruby(莫辭終夕眺, ruby=막 사 종 석 조)] 사양치 말고 저녁 동안 바라보시게
[ruby(明日是南方, ruby=명 일 시 남 방)] 내일이면 곧 남방으로 떠날 터이니
유산성(遊山城)[1]
조선의 관료.

2.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잠시 강원도 강릉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가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부터 매우 명민하여 태어난 지 8개월에 글 뜻을 알았다고 하고 만 3세에 이런 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ruby(桃紅柳綠三春暮, ruby=도 홍 유 록 삼 춘 모)]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삼월은 이미 저물었네.
[ruby(珠貫靑針松葉露, ruby=주 관 청 침 송 엽 로)] 푸른 침으로 구슬을 꿰니 솔잎의 이슬이네.
소문을 듣고 당시 정승인 허조가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를 넣어 지어보라" 청하자,
[ruby(老木開花心不老, ruby=노 목 개 화 심 불 노)] 늙은 나무에 꽃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라고 지어 허조를 놀라게 하였다고도 한다.

5세에 이미 <중용>과 <대학>을 익혔다고 하며 이에 세종이 친히 5살난 아이를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시험을 맡은 박이창(朴以昌)이 병풍에 그려진 강변에 접한 정자와 배를 가리키며 지어보라 하자,
[ruby(小亭舟宅何人在, ruby=소 정 주 댁 하 인 재)] 작은 정자, 배 매인 집에는 누가 사는가?
라는 시를 썼다. 박이창의 호가 소정주(小亭舟)인데 김시습이 이를 알고 시를 지었는지 아니면 김시습을 시험한 후 박이창이 이 시를 마음에 들어해 호를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전자라면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김시습의 문재(文才)와 재치에 미루어 전자라고 짐작함에 무리가 없다.
감탄한 박이창이
[ruby(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ruby=동 자 지 학 백 학 무 청 공 지 말)] 동자의 학문이 마치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다.

라고 스스로 시를 지은 다음 대구를 지어보라 하자 김시습은,
[ruby(成王之德 黃龍飜碧海之中, ruby=성 왕 지 덕 황 룡 번 벽 해 지 중)] '어진 임금의 덕이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를 뒤엎는 듯하다.'

라고 답하여 박이창을 거듭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2]

이에 흡족한 세종은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었는데 이 비단을 모두 홀로 가지고 으로 가라고 명하였다.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궁금했던 모양인데 '별 거 아닌 거'라는 투로 즉석에서 비단을 서로 묶어서 엄청 길게하고는 그냥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다.[3]어우야담》에도 세종 앞에서 시를 지은 일과 비단을 끌고 돌아간 일화가 실려있다.[4]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계유정난수양대군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고 한다. 방랑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에 처해졌을 때 한밤 중에 시체를 수습해 몰래 서울 아차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학인으로서는 남효온, 송익필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린다. 이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를 편찬하며 명명한 것이다. 많은 저술을 하기도 했는데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의 저자이다. '금오'는 경주 남산의 봉우리 금오봉을 말하는데 금오신화를 이 산에 있던 용장사에서 스님으로 7년 동안 머무를 때 썼기 때문이다.

벼슬길에 뜻이 없었는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17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합격되는 통에 너무 오만하였음을 뉘우치고 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던 도중에 찬탈 소식에 울분을 토하며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녕대군이 수재라고 하여 세조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떠도는 승려로 살아가면서 벼슬자리를 모두 거부했다고도 한다. 하루는 억지로라도 끌고 간다며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달아나더니만 논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만든 똥통에 스스로 빠져서 "자, 이런데도 날 주상에게 데려갈 테냐? 가봐야 네놈들 목만 날아갈 텐데?"라며 비웃었고 포졸들은 미쳤다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당대에 설법으로 이름이 높아 세조가 그 설법을 듣고자 재물도 준다고 하고 어명을 어기면 참수할 것이라 협박까지 했음에도 "그러면 죽여 보시오"라며 거침없이 대들었다. 죽여봐야 설법을 못 들으니 세조가 고민 끝에 효령대군에게 부탁하여 효령대군이 손수 와서 설득하자 딱 1번 가서 세조에게 가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한명회가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라는 시를 짓자 이를 고친 개작시를 짓기도 했는데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로 바꿔버린 것이다. 본디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는 '젊어서는 사직을 보필하고 늙어서는 강호에 은거한다'는 뜻으로 사대부가 꿈꾸는 생애를 표현한다. 한명회는 '젊을 때에는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일하고 늙으면 은퇴해서 유유자적해야지'라는 포부 겸 자화자찬을 담아 이 시를 쓴 것인데 김시습은 이를 '청춘망사직 백수오강호'로 바꾸어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이 놈은 가는 곳마다 망치지 않는게 없다')라고 대차게 깐 것이다. 한명회가 이러나 저러나 썩어빠진 정치인일 뿐이라고 대놓고 비웃은 것이다. 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를 보고 감탄했고 배를 잡고 웃으며 그 시를 읊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명회는 노발대발하며 시를 적은 종이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신숙주[5]가 마침 가마를 타고 가고 있기에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고 호통을 치자 신숙주는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서거정과도 우연히 만났는데 신숙주와 달리 서거정은 오래 전부터 수양대군을 모시던 사람인지라 김시습도 서거정은 호통치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말투는 서로를 은근히 비꼬는 비수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서거정도 그를 천거하고자 세조에게 건의했으나 결국 그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조가 죽고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떠돌아 다닌 게 오래되어서 잘 맞지도 않았다. 현실과 이론의 차이 및 온갖 부조리에 치를 떨며 오래가지 않아 때려치우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지냈다고 한다. 생존 당시에는 야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김시습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기는 김시습이 죽은 뒤 한참 뒤인 중종 시기였다. 그래서 김시습의 일화는 정사보다는 주로 야사가 출처이다.

이후 잠시 머리카락을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혼인하여 대를 이으려 했으나 아내가 일찍 죽고 실의에 빠져 다시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그 후 떠돌아 다니다가 무량사[6]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고 묻어달라고 당부한 후 사망했다. 몇 년 후 절에서 다시 파보니 시신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아 사람들은 부처라 여겨 화장 후 나온 사리를 봉안했다. 사리는 부여군 무량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비바람으로 부도가 훼손되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불교계에서 사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2017년 9월 무량사로 되돌아갔다.

정조 대에 남효온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는데 당시에 이미 자손이 끊겼다는 언급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재주는 많았으나 세상이 어질지 못해 평생을 미친 것처럼 꾸며 살다 갔다.'라고 할 수 있겠다.

3. 여담


[1] 김시습이 상당산성에 다녀가며 지은 시다.[2]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한시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대구의 법칙까지 부합한다.[3] 50필이면 적어도 폭은 약 1m에 길이는 500m 정도 되는데 아이는 물론 성인도 끌고 가기 힘든 길이이다. 호기심 천국에서 직접 실험해 보았는데 폭은 둘째치고 그렇게 묶어 봤자 아이가 끌고 가기 너무 힘들어서 가다가 멈추어 쉬고 다시 끌고 가기를 반복했다. 어찌저찌해서 성공은 했지만 아이가 너무 지쳤으며 그나마 실험에서는 옆에서 어른들이 따라다녔으니 망정이지 실제로 혼자 했으면 아동 학대 수준이었다.[4] 원문: 김시습은 다섯 살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이 그를 대궐 안으로 불러 친히 만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해 주고자 했다. 삼각산(三角山)을 주제로 시 짓기를 명하니, 김시습이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삼각산 높은 봉오리 하눌을 꿰뚫으니, 올라서면 복두성도 딸수 있겠네. 삼각산 바위에 뚫린 굴 비구름 일으킬 뿐 아니리니, 왕가로 하여금 만세토록 평안케 하리라." 임금이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듯하였는데, 이는 김시습이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비단 백 필을 내리며 그에게 직접 집으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김시습은 비단 백 필을 풀어 그 머리와 꼬리를 서로 잇고서 한 쪽 끝을 허리에 두른 패 하직하고 나가니, 백 필의 비단이 모두 딸려 갔다. 임금은 이를 보고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중략)...다섯 살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스스로 오세(五歲)라 (號)를 지었다.[5] 정창손이나 정인지라는 얘기도 있다.[6] 당시에는 충청도 홍산군에 위치. 현 충청남도 부여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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