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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5:02:20

김지남


1. 개요2. 묘소3. 생애4. 둘러보기

1. 개요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광천(廣川)이다. 중인 신분의 역관이었지만 자초법(煮硝法: 흙을 달여 화약의 주요 원료인 염초를 굽는 방법)을 알아내고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하는 등 크게 활약하여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2.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참조

3. 생애

1654년(효종 5년)에 태어나 1718년(숙종 44년)에 죽었다. 1671년(현종 12년)에 18세의 나이로 역과에 급제하여 중국어 역관이 되었고, 1682년(숙종 8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와[1] 사행 일지인 동사일록(東槎日錄)을 지었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의 역관으로 수행하였는데, 그의 권유로 자초법을 알아내기 위해 랴오양(遼陽)의 어느 시골 집에 찾아들어가 사례금을 주고 그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그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여러시도끝에 결국 《자초신방(煮硝新方)》이라는 책을 입수하여 그 방법을 알아냈다.

1694년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하였으나, 그를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에게 건의하여 군기시에서 자초법에 따라 염초를 구웠는데 그 성과가 매우 크자참조 그 방법을 정리하여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고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중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을 제수함은 부당하다는 양사(兩司)의 반대로 문성첨사(文城僉使)의 외직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간원에서 여러차례 상소하여 취소되었다.

1710년 북경에 갔을 때 우연히 심양의 장수 송주와 며칠 동안 이야기했는데, 우리 나라가 제후의 법도를 잘 지킨다는 사실을 많이 말했다. 나중에 송주가 재상이 되자 그러한 사실을 황제에게 직접 아뢰어, 황제가 조선에서 바칠 공물을 줄여 주었다.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대표가 회동하는데, 큰아들[2] 경문(慶門)과 함께 수행하여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국경을 획정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나서 지은책이 북정록北征錄.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 경문과 함께 편찬하였다.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증직贈職[3] 형조판서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직行職 지중추부사

저서로 《신전자초방》 《동사일록》 《북정록》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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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보,저자, · 당파원론 · 국조연대 · 선원록 · 호송 금부도사의 작가 · 김지남 }}}

[1] 중국어 역관임에도 일본에 파견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왕왕 있는 일이었다. 다른 나라를 상대하는 자는 견문이 넓을수록 좋다는 이유. 김지남도 동사일록에 이런 사실을 기록하면서, 조정의 방침이 참으로 지당하다는 식으로 평했다.[2]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역관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김경문은 김지남이 파견된 1682년 통신사 바로 다음인 1719년 통신사행에 파견되어 역시 사행록을 썼다.[3] 생전의 공로를 기려 사후 내려진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