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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박수근 朴壽根 | Park Soo-Keun | |
호 | 미석 美石 |
출생 | 1914년 2월 21일 |
일제 강점기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 |
사망 | 1965년 5월 6일 (향년 51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1914~1945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1948~1965 |
본관 | 밀양 박씨 |
직업 | 화가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학력 | 양구공립보통학교[1] (졸업) |
부모 | 아버지 박향지 어머니 윤복주 |
배우자 | 김복순(1922~1979 / 1940년 결혼) |
자녀 | 장남 박성소(1942~1948) 장녀 박인숙(1946~)[2] 차남 박성남(1947~) 삼남 박성인(1949~1950) 차녀 박인애(1956~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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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화가. 단순화된 선과 구도, 회백색의 화강암과 같은 질감으로 우리의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를 담아낸 그림을 그렸다.2. 생애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 읍내의 정림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7세 때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댔다가 실패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서는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로 진학도 못하는 처지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대세였기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으려 했으나 박수근은 스승도 없이 혼자 그림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노력이 통한 모양인지, 18세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 당시 '선전'에서의 입선은 조선인이 화가로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매우 기뻐했다고... 하지만 설렘도 잠깐,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어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했었던 탓인지 1933년부터는 연이어 세 차례 낙선의 쓴맛을 보았다.21세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는 늘어난 빚더미로 금강산으로 떠나면서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박수근은 홀로 춘천으로 옮겨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여 마침내 1936년 제15회 선전에서 수채화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선했다. 이 시기에 박수근은 아버지가 재혼해 살고 있는 김화군 금성의 집에 왔다가 빨래터에 있는 김복순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복순의 집안에서 의사집안 아들내미랑 약혼을 서둘렀고 이때문에 박수근은 상사병으로 몸져 눕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 승낙을 받고, 둘은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김복순은 몇 시간씩 박수근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이 당시엔 주로 맷돌 돌리는 여인을 모델로 하였다. 김복순은 처음 모델을 하는 거라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하나님께 '이 작품이 잘 그려져서 선전에 낙선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곤 했다고 한다. 결혼 3개월 만에 박수근은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이 되어 아내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 휴일이면 평양의 화가들과 어울려 스케치도 나갔고, 일본 유학파들인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등과 함께 ‘주호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1944년까지 매년 동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1년 박수근은 그의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 〈맷돌질하는 여인〉을 제20회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1945년 8월 15일 평양에서 해방을 맞은 박수근은 도청을 그만두고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금성은 공산 치하여서 기독교 신자인 박수근은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러는 와중에 1947년 차남 성남을 얻었으나 이듬해 장남 성소를 뇌염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박수근은 가족들과 금성에서 몇 십리 떨어진 시골로 피신을 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후퇴로 생명까지 위태로워지자 박수근은 가족들을 남겨 놓은 채 홀로 남하해야만 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데다 전쟁 통에 두 살배기 3남 성인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 아이를 데리고 사선을 넘어 탈출을 감행한 아내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남편이 서울에 있는 친정 동생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량진 한강변에서 어렵게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들어가 갖은 고생 끝에 남편을 만났고 가족끼리도 재회했다.
가족은 만났으나 전쟁 중이라 생계가 막막해졌다. 헐값으로 화방에 그림을 팔아 겨우겨우 생계를 연명하던 중,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자리를 얻게 된다.이때 소설가 박완서를 만났다고 한다 미군 PX에서 근근이 모은 돈으로 박수근은 창신동에 작은 집 한 칸을 마련했고 전쟁과 피난으로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다. 이후 휴전이 되고 새로이 생긴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여 남한 미술계에서 화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특유의 소박한 인물과 풍경이 굵고 검은 윤곽선에 황갈색의 색채와 두터운 질감, 명암과 원근이 없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40세가 되던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연이어 입선하였으나, 1957년 43세 때 제6회 국전에서는 낙선하였다. 박수근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이 무렵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한달에 한두번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샀는데 그의 그림에서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중에서 단골 고객은 미국 대사관 문정관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이었고, 캘리포니아 거주하는 마가렛 밀러 여사가 특히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했다. 밀러 여사는 귀국 후에도 우편을 통해 박수근의 그림을 계속 사주고 화구를 부쳐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박수근 화풍은 원숙해졌다. 대상이 뚜렷해졌고 독특한 질감의 표현방식으로 독자적인 조형성을 이루었다. 해외에도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하여,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 〈노상〉, 〈풍경〉이 전시되었고, 반도화랑 창설에 중심 역할을 했던 미국인 실리아 짐머맨이 소장했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서미술전’에 출품되기도 했다.
해외에서의 연이은 출품 소식에 국내 미술계에서도 박수근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59년 그는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어 8회부터 14회까지 매년 심사를 거치지 않고 국전에 출품할 수가 있었다. 이 해에 그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현대작가초대전 작가로 선정되었고, 이어 1962년에는 제11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서양화 공모작들을 심사했다. 그러나 국전의 파벌 싸움과 심사 잡음이 가시지 않아서 다시는 심사를 안 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하필이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과는 이런 상황이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주한미공군사령부(USAFK)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렸는데, 이때 외국 애호가들이 상당수의 박수근 작품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중 몇 점이 홍콩 인터내셔널호텔의 인터하우스에 선을 보여 ‘동양적인 유화’라는 매력적인 평을 얻기도 했다. 이 시기가 박수근의 예술 전성기이기도 하다. 40대 후반으로 작품 활동이 왕성했을 뿐 아니라 주제의 깊이나 표현 기법도 완숙에 이른 시기였다. 정확한 연대가 없이 ‘60년대’로 표기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그린 것들로, 소재가 정감이 넘치고 화강암 같은 질감의 기법도 최상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완숙한 작품을 선보임에 따라 박수근의 화단 내 위상과 예술적 평가도 높아지고 있었지만, 생활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성기는 잠깐에 불과했고 작품에 한창 전념할 나이에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과음이 계속되면서 신장과 간이 나빠져 몸이 부었고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했다. 치료비가 없어 악화된 뒤에야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 중에 시신경을 잘라내 실명하고 말았다. 이후 짙은 안경을 끼게 됐고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다른쪽 눈마저 침침해져 가는 악조건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지막 국전 작품이 되고 말았다. 점점 증세는 악화되어 복통이 일어나고 소화가 안돼서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진단 결과 신장염과 간염이 나왔다. 1965년에 접어들면서 박수근의 간경화와 응혈증은 더욱 악화되어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이 어려워 5월 5일 전농동 집으로 퇴원, 6일 새벽 1시경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유해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2004년 4월 15일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으로 옮겨졌다.
3. 여담
- 박완서가 소설가로 등단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박완서가 등단하게 된 시점은 1970년으로 박수근 사후였긴 했지만,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박수근의 그림을 미군들로부터 판매한 후 박완서가 회계업무를 처리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친분이 생겼다고. 박완서의 대표작인 소설 나목의 등장인물 '화가 옥희도'의 실제 모델이 박수근이다.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선 아예 본인 이름인 박수근으로,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로 나온다.
- 호사가들의 입담 속에서 오르내리는 것이 박수근의 그림 항아리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 오르면서 그림까지 가져올 엄두가 안 나서 액자에서 분리한 뒤에 항아리에 밀봉하여 금성과 남대천 사이 야산에 매장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증언이다. 춘천문화재단 함광복 이사장은 전쟁사를 분석하여 철원군 광삼리 ~ 남둔리 간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만일 이 항아리가 발견된다면 그 가치는 수백억에 달할 것이라 주장했으나 가족들은 그 그림들이 온전히 있겠냐는 질문에는 회의적이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통일이 된다해도, 또 그 항아리가 온전하다 해도 지뢰밭 한가운데 있는 항아리를 찾아야 하기에 박수근의 그림 항아리를 찾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 국내 현대화가중에서는 인기작가인 만큼, 박수근의 작품들 중에는 위작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빨래터> 위작 논쟁 등이 벌어져 재판까지 벌어진 적이 있다. # 결과는 진품으로 판정.
- Art in Culture 2001년 1월호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과소평가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과대평가된 인물로 선정된 게 이중섭. 그러나 2015년 2월호에서는 둘 다 과대평가된 인물로 소개되었다.
- 장녀 박인숙은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2006년에 인천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 시니어모델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