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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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봉석 |
출생 | 1905년 8월 22일 |
경상남도 밀양 | |
사망 | 1950년 이후로 추정 |
학력 | 중앙불교전수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
약력 | 조선총독부도서관(1931) 국립도서관 부관장(1945~1950) 조선도서관협회[1] 초대위원장[2](1945~1947) 국립도서관학교 교수(1946) 동국대학교 강사(1946) 국화여자전문학관 관장(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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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봉석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던 대한민국 사서이다.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부터 장서 및 시설 보존으로 ‘국립도서관’으로 재탄생이 큰 역할을 기여하였다.
2. 상세
박봉석은 근대 한국도서관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국립도서관의 부관장과 국립도서관학교의 교수 등으로 활동하였다.한국사와 서지학, 불교 분야 등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노력과 능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서지학회상임위원, 근로여성을 위한 야간고등교육기관인 국화여자전문학관을 설립하였고, 동국대학교의 강사로서 서지학 등을 강의하였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국내의 정세 속에서 도서관이 가진 영향력을 극대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호협력을 통하여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도서관협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를 통하여 총회에서 당시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본인은 전무이사로서 협회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1947년,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십진분류표인 KDC(Korean Decimal Classification)을 만들었으며, 추후에 한국십진분류법이 동일한 표기를 사용하면서 박봉석의 성인 '박'의 머리 글자인 'P'를 추가하여 KDCP로 변경하였다.
3. 생애
3.1. 일제강점기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로서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3]대학을 졸업한 후, 193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취직하였고, 고원(雇員)의 신분으로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는 주로 분류와 편목 업무를 담당했으며, 1939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 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시험은 굉장히 어려운 시험으로 해방까지 조선인 중 일본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이 박봉석과 최장수 2명 뿐이었다.
1940년, 개성에 중경문고(中京文庫) 도서관 개관 준비를 담당하여 새로운 분류표를 완성하였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로 발표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10위였던 박봉석은 1942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재직하던 8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3위로 제3석 승진하였다.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관장과 이재욱 부관장 다음의 위치로, 사서로서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해방 이전까지 다수의 연구 논문 및 도서해제를 발표하였다.
국립도서관이 전국적인 규모의 강습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3번의 대회 중 2번은 조선도서관협회에서 주최하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도서관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도서관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군 정당국이 법률 자료를 자신들의 법률도서관으로 이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저 국립도서관의 집중화된 장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3.2. 해방 이후
박봉석은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도서관으로부터 장서와 시설을 지켜내어 ‘국립도서관’으로 재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해방 직후, 16명의 한국인 사서를 중심으로 '도서관 수호 문헌 수집 위원회'라는 조직을 창설하였으며,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인수 작업 인솔 및 국립도서관으로의 재탄생을 준비하였다.
개관 이후, 부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초창기에는 국립도서관의 총무부장 및 사서부장, 열람부장을 겸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9월에 조선도서관협회[4]가 설립이 되고 초대위원장에 취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립도서관 초대관장 이재욱과 2대 관장 조근영은 그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에 이재욱, 3대 회장에 조근영이 취임한다.
1946년, 사서직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전문직 학교인 국립도서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분류 및 편목 등의 수업을 담당하였고,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총 77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1947년, 조선십진분류표(KDCP)와 1948년에는 조선동서편목규칙을 저술하였다.
한국 전쟁 중 1950년 납북될 때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2003년, 도서관계 인사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4. 평가
박봉석은 동료인 최장수와 함께 조선인 최초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그는 조선총독부도서관 내에서 서열 3석[5]까지 오르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보기 드문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 된다. 항간에 조선총독부도서관 관료서 일한 경력과 창씨개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논란이 일어났지만,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일 정도로 사서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만 있었던 인사이다.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편목이 주요 업무였기 때문에 그의 손에서 조선최초의 십진분류법이 탄생하였으며, 이는 초석이 되어 한국십진분류법으로 발전할 정도로 도서관계의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지키며 기록과 자료가 중요함을 알렸고, 이는 이후 국립도서관의 초석이 되었다.
해방 이후 도서관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과 분류법 연구에 매진하여 분류법을 발전과 많은 사서들을 배출하는데, 이는 큰 업적으로 남았다. 또한, 도서관협회를 설립하여 도서관의 저변확대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한국도서관계에서는 선구자, "한국 도서관은 박봉석으로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록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