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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룡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남승룡
南昇龍|Nam Sungyong
파일:Nam Sungyong1936.jpg
출생 1912년 11월 23일
전라남도 순천군 장평면 저전동
(現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1])
사망 2001년 2월 20일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국립경찰병원
본관 의령 남씨 (宜寧 南氏)[2]
학력 순천보통학교[3] (졸업)
협성실업학교 (전학)
양정고등보통학교 (전학)
아사부 상업중학교[4] (졸업)
메이지대학 (철학 / 학사)
신체 165cm
종목 육상
주 종목 마라톤
가족 남동생 남기룡[5], 배우자 소갑순(1920년생), 아들 2명, 딸 남순옥 외 3명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기록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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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00397F><colcolor=#fff>
[별을 잊은 그대에게]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BGM : Augustana - Boston , (2005)

대한민국의 전(前) 육상 선수 및 지도자.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는 플레잉 코치로 참가해[6], 서윤복의 우승에 지도자로써 기여하였다. 본인은 12위로 골인하였다. 전성기가 지난 36세의 나이로, 플레잉 코치로 뛰어 12위를 기록한 것도 사실 굉장한 것이다.

2. 선수 경력

1932 전일본선수권과 1933 극동선수권에서 잇달아 우승했으며,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는 1934년193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일본 대표로 뽑혔다.

원래 일본에서는 손기정은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이니 마지못해 선발하더라도, 남승룡은 뽑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권태하 코치[7]와 당시 조선 육상계의 후견인 격이었던 기업인 정상희가 "선발전 1위를 한 선수를 탈락시키자니 무슨 헛소리들이냐"고 강하게 반발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딴 육상 영웅 오다 미키오[8]가 남승룡을 지지하면서 논란이 정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2위로 앞서 골인한 영국의 어니 하퍼(Ernie Harper)는 거의 실신할 듯이 기진맥진한 반면 남승룡은 완주하고도 기운이 남아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손기정에게 축하의 말을 건낼수 있었다. 그의 동메달 획득은 막판 스퍼트로 30명 정도의 선수들을 앞지른 결과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본래 남승룡은 후반에 전력 스퍼트하는 스타일이었고, 만약 조금만 빨리 역주하기 시작했다면 손기정과 함께 금-은메달 석권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로마자 표기는 이름을 일본어식으로 읽은 '난 쇼류'(Nan Shoryu)를 사용했다.
파일:손기정_1936.jpg
그는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손기정을 평생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메달의 색 때문이 아닌,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라고 회고했다. 당시 시상대 사진을 잘 보면 손기정이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는 가운데, 남승룡은 어떻게든 일장기가 가려질까 싶어서 바지를 명치까지 최대한 끌어올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장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9]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해방 후 용산철도국 마라톤부 감독을 사직하고 손기정과 함께 후배 양성을 하던 중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의 운동화를 선물받은 미국 켈리 선수의 안부 엽서를 받은 손기정이 그 안부 엽서에서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처음으로 알게 된 후 남승룡과 의기투합하여 후배이자 함께 가르친 제자인 어린 후배 서윤복을 데리고 대회에 출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참가하게 된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당시 36세의 노장이었음에도[10] 12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건재를 과시했다. 출전한 이유도 아직 마라톤 초보인 서윤복 선수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것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가슴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이 대회에서 서윤복은 우승을 차지했다.[11]

3. 은퇴 이후

1947년 1월부터 1963년 9월까지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지냈고,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전남대학교 체육학과 교수역임했다.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는 '경기력 향상 연구 연금'을 받았다.

2001년 2월 20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강남시립병원에 마련되었고 시신은 화장되어 경기도 용인시 용인공원묘지 봉안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평생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였던 손기정도 이듬해 11월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2]

4. 기록

5. 수상 기록

올림픽
동메달 1936 베를린 마라톤

6. 기타



[1] 기사[2] 기사[3] 現 순천남초등학교[4] #[5] 역시 마라톤 선수로 활동하였다.[6] 이 때, 한국 선수단의 감독은 손기정.[7]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출전해 마라톤 9위를 했으며, 광복 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8] 오다 미키오는 스포츠에 관해서는 상당히 공정한 성향이었는데 서술했듯 정상희가 남승룡을 뽑자고 주장했고 미키오가 이에 동조하며 '남승룡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당시 일본의 마라톤 코치이자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권태하가 앞지른 일본인 선수 중 한 명인 쓰다 세이이치로의 보복 우려가 크자 권태하 코치가 쓰다 코치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한 '쓰다 기용불가론'을 미키오가 스포츠부 부장으로 있던 아사히 신문으로 보냈고 이를 아사히 신문에서 보도해 쓰다 코치가 결국 해고되는 등 조선인 선수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9] 영상을 보면 손기정과 마찬가지로 남승룡 선수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미가요가 울릴 때 특히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10] 21세기에야 체계적 몸관리로 이 나이에도 활약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당시는 무려 1940년대였고, 남승룡은 이미 은퇴하고 감독을 한 지도 오래된 상태였다.[11] 서윤복은 이 대회에서 손기정의 올림픽 최고 기록을 갱신하며 손기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12] 용인공원묘지는 독립운동가 하희옥의 묘역을 불법 이장시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13] 사실 동메달 따서 관심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 일제 때 일본 대표로 올림픽 참가한 조선인은 십여 명이고, 둘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메달을 못 따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14] 일례로 2019년 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 방영 당시 '다들 쉬쉬하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식으로 일본 인터넷에서 상당히 확산되기도 했다.[15] 정말 강경한 반일 성향을 당시에 드러냈다면 '차라리 올림픽에 불참할지언정 일본 국가대표로는 절대 안 나간다! 가슴팍에 일장기를 달고선 도저히 뛸 수 없다!'였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아래 문단을 뒤집어 놓고 본다면 그들이 일본 대표를 거부할 기회는 무지하게 많이 주어졌던 셈이다(일본 체육계는 '우리는 조선인이므로 일본 대표는 결코 되지 않겠다'는 두 선수를 강제로 독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조선의 분위기는 조선인이 일본 대표로 선발된 것을 일종의 '쾌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마치 요즘 박찬호류현진 같은 한국 야구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한국 축구선수가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처럼 대표로 뽑힌다는 것은 수많은 일본 '내지' 선수들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니까.[16] 월드컵에서 개최지에 도착해서 본경기가 열리기 바로 전에, 선수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평가전을 한 번 더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무리수이다.[17]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남승룡 선수는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음에도 두 일본 선수의 따귀를 후려치며 징계를 하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엄청나게 분노를 했다는 것이다. 조선인한테 얻어 맞은 일본인 선수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이 사건의 여파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알려지 있지 않다.[18]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분에서는 인절미로 나왔는데, 검색 결과 등을 참조했을 때 찹쌀떡 쪽이 정보량이 더 많다.[19] '조선인임에도 일본 국적으로 출전하여서 일본 국가를 수상대에서 들어야하는 저 선수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 하는 뉘앙스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