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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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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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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파일:MBC 로고.svg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 부문 남자 신인상
육성재 & 슬리피
(2015)
박찬호
(2016)
이시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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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WBC ALL-WORLD TEAM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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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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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color=#181818,#DDDDDD> 1998
방콕 AG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AG
2003
아시아야구선수권
2006
WBC
심재학 김기태 이종범
2006
도하 AG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WBC
2010
광저우 AG
2013
WBC
박재홍 박찬호 진갑용 손민한 봉중근 진갑용
2014
인천 AG
2015
프리미어 12
2017
WBC
2017
APBC
2018
자카르타 AG
2019
프리미어 12
박병호 정근우 김재호 구자욱 김현수
2020
도쿄 올림픽
이름
ⓐ 1998년 이전의 올림픽과 야구선수권대회에는 아마추어 선수만 출장했으므로, 따로 주장 경력을 기재하지 않았다.
ⓑ 2017 APBC는 U-24 대회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주요 대표팀 | 역대 로스터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 역대 유니폼 | 세대별 대표팀 | 논란 |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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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얼 로빈슨
(1958)
박찬호
(1994~2001)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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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허스트
(1994)
박찬호
(2002~2005)
케빈 리차드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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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번 박찬호
(2005~2006)
닉 헌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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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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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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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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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10)
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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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2011)
박찬호
(2012)
김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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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찬호 홍보대사.jpg
<colbgcolor=#2f241d><colcolor=#ffffff>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박찬호
朴贊浩 | Chan-Ho Park
출생 1973년 7월 28일[1] ([age(1973-07-28)]세)
충청남도 공주읍
(現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충주 박씨
학력 중동초등학교 (졸업)
공주중학교 (졸업)
공주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경영학과[2] / 중퇴)
신체 185cm|체중 95kg|혈액형 O형[3]
포지션 투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LAD)
소속팀 파일: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엠블럼.sv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 MLB)
파일:텍사스 레인저스 엠블럼(1994~2002).svg 파일:텍사스 레인저스 엠블럼.svg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 MLB)
파일: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엠블럼(2004~2010).svg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 MLB)
파일:뉴욕 메츠 엠블럼.svg 뉴욕 메츠 (2007 / MLB)
파일: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엠블럼.sv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 MLB)
파일:필라델피아 필리스 엠블럼(1992~2018).svg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 MLB)
파일:뉴욕 양키스 엠블럼.svg 뉴욕 양키스 (2010 / MLB)
파일:피츠버그 파이리츠 엠블럼(1997~2013).svg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 MLB)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2011 / NPB)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한화 이글스 (2012 / KBO)
프런트 파일: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엠블럼.svg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2019~ )
응원가 지누션 - A Yo[5]
서진필 - 사나이 순정[6]
종교 불교
별명 코리안특급, 투머치토커
병역 예술체육요원[7]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가족관계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f241d><colcolor=#ffffff> 배우자 박리혜(1975년생)[8] (2005년-현재)[9]
자녀[10] 딸 박애린 (2006년생)
딸 박세린 (2008년생)
딸 박혜린 (2014년생)
가족 아버지 박제근, 어머니 정동순, 3남 1녀 중 셋째[11]
}}}}}}}}}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선수 경력2.3. 은퇴 이후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4. 플레이 스타일
4.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4.2. 투구폼
5. 여담
5.1. TV활동
5.1.1. CF
5.2. 역대 연봉5.3. 기타5.4. 가족5.5. 작품 속 박찬호5.6. 자서전5.7. 투 머치 토커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6.3. 기타 기록
7. 어록8.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파일:박찬호_국가대표.jpg
저 녀석을 앞으로 10년 동안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크 그레이스[12]


한국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 선수이자 KBO 국제홍보위원.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국민적인 인기를 누린 스포츠 선수중 한명이다. 불같은 강속구[13]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때 다저스의 1선발 급 에이스[14]까지 올라갔던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한 투수.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승(124승)을 기록한 대투수이며, 2001년에는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15]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투수 중 한명이다.[16][17] 또한 한국인 야구선수로서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때린 타자이기도 하다.[18]

한국에선 단순히 뛰어난 운동선수가 아닌 한국 스포츠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여겨진다. 뛰어난 실력, 어려움을 딛고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인기 요인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 그가 영웅이라 불리는 까닭이다.[19] 외환위기로 나라가 폭삭 망하고 직장까지 잃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패배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박찬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20][21]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박찬호 경기 중계의 시청률은 낮에도 25%가 나왔었다. “IMF시절 박찬호 중계 시청률 25%↑, 류현진 6배”(MBC에빠지다)

2. 생애

2.1. 유년기

1973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전파사[22]를 하던 가정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23]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24]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파일:/image/295/2013/01/07/154800410_untitled-5_dhp1225.jpg

주간야구

어려웠던 집안 사정상 그렇게 배불리 먹지는 못했기에,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 겸 스윙훈련을 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또한 하체단련을 위해 공주산성을 토끼뜀을 하며 오르내렸다는 트레이닝 일화가 유명하다.[25]

동기생으로 홍원기손혁이 있었고, 이 셋은 당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축이었다. 특히 홍원기는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한국 야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대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26][27]

2.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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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출국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계약을 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공항으로 몇 명 안되는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배웅을 나왔다.
박찬호: "제가 100억을 벌어서 오겠습니다."
기자들: "100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찬호: "아 농담한 건데 너무 심하네ㅋㅋㅋㅋㅋㅋㅋ"
모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찬호는 미국가서 1000억을 벌어 왔다.

2.3. 은퇴 이후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데다,[38]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듯.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39]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사실 박찬호는 국가대표급 멘탈이다. 메이저리그 자체가 치열한 정글이다. 제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잠시 부진하면 가차없이 팬들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에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박찬호는 선발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엄청난 한국기자들이 항시 쫓아다녀서 심적 부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김병현은 기자와 싸움까지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의 고백을 보면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기자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 찍고 이런 것 자체만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박찬호는 IMF당시 우상급이었기에 유혹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헌데 10년 이상 큰 기복없는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고 딱히 사생활적인 측면이나 언론과의 마찰 등 별다른 트러블 없이 묵묵히 야구에 정진했다라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멘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축구 등 다른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집중을 받아서 부담감에 무너지거나 혹은 유혹에 넘어가 술이나 유흥에 빠져 막장테크 탄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부상부진에 시달리면서도 PED에 손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박찬호가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던 시기는 스테로이드 시대 중에서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고, 메이저리거들 상당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PED를 사용했지만, 박찬호는 그러지 않았다.

새가슴이란 비난을 받았던건 볼넷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면승부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보니 겁이 많다고 안티들이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게 도망가는 피칭을 했어도 박찬호의 피홈런수는 꽤 많았다.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친화적인 구장이라 점수가 잘 나지 않는 구장이다보니 홈런 맞고 점수를 내주면 치명적인지라 굳이 무리하게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보냈던 것인데, 박찬호는 삼진도 많이 잡던 투수였다. 오히려 주자를 내보내면 부담스러워서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헌데 박찬호는 주자를 내보내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며 주자 내보내도 다음 타자 잡으면 그만이란 전략으로 무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볼넷 위기 상황에서도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유인구를 던져 삼진도 많이 잡은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굳이 무리하게 승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올림픽 유도 김재범은 유도는 3초만에 결정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한번 상대를 맞잡아보면 '어 오늘 할만하다'라든지, '오늘은 좀 느낌이 안좋은데'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박찬호도 일단 첫타자 상대해보면 오늘 제구와 구위가 괜찮다라든지, 컨디션이 안좋다라든지 느껴질텐데, 박찬호도 삘 받았을때는 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로 변신한다.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든지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한 날에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정면승부로 많은 삼진을 뽑아내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 야구에선 타자를 압도했던 류현진도 떡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선 기교파 투수에 가까워졌고, 박찬호 전성기때는 약물러들 전성기였는데 그때 동양인 박찬호가 힘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강속구로 압도하는 피칭을 했었다. 다만 박찬호가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가운데로 몰리면 홈런을 맞았기에 이럴 때는 무리하지 않고 볼넷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가급적 유인구로 승부하는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잘 던지다 한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멘탈이 약하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이는 멘탈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UFC 김동현은 국내에 '멘탈전도사'로 유명했고 연승 중에 드디어 강자와의 대결이 잡히자 언론에서는 김동현이 구름을 넘어선 경지라는 둥 극찬했고 실제 경기 시작하자마자 백스핀엘보우를 날리며 '멘탈지존'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상대가 가볍게 피하고 카운터 날리니까 한방에 뻗어버렸다. 멘탈은 신기루같은 것이다. 흔히 '전사의 심장'운운하는데, 그것도 맷집이 받쳐주니까 한대 맞고 두대 치는 전략으로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다. UFC에서 K-1챔피언 출신 타격가 마크 헌트와 5라운드 내내 전율의 타격전을 벌이며 '전사의 심장' '최고의 멘탈'로 찬양받았던 안토니오 실바는 약물적발 뒤 맷집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KO패를 당했고, 마크 헌트와 재대결때는 헌트의 주먹에 심하게 움찔거리며 심지어 뒷통수를 보이며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오고 결국 무기력하게 KO패당했다. 결국 멘탈도 실력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먹을 맞아도 맞을만하다고 느껴지면 '오 더 때려봐'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고, 내가 한번 휘둘렀더니 상대가 데미지를 받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한대 때렸는데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멘탈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멘탈지존 맥그리거는 좀비파이터 디아즈에게 패했는데, 자신의 필살 펀치를 맞고서도 끄떡도 안하고 덤벼드는 모습에 멘탈붕괴됐다고 한다.

여하튼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던건 멘탈이 약한게 아니고 그게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너졌어도 18승을 거두기도 하고, 방어율 3점대 초반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무너진 경기들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사이영상급 투수가 된다. 원래 야구에선 투수들이 유리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라고 해봐야 3할인데, 즉 강타자들 상대해도 10번 중 7번은 투수들이 잡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못하는 투수들을 보면 계속 안타 맞는게 아니고 잘 던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등의 패턴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상급 투수냐, 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인 것이다. 오히려 박찬호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피지컬 문제에 가깝다. 박찬호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00~01년 전반기까지인데, 특히 올스타에 뽑혔던 01년 전반기에는 그야말로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허리문제로 후반기에 무너졌다. 박찬호의 피칭스타일은 신체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스타일이고, 타고난 피지컬이 (메이저리그치곤)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의 스타일 상 이를 악물고 한계까지 쥐어짜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박찬호는 90년대 후반~00년대에 활동한 메이저리그 파워피처치곤 체격이 큰 편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명높은 스테로이드 시대로, 타자들이 전대미문의 파워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40] 이 시절에 파워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로저 클레멘스가 193cm/107kg의 거구인데다 약의 힘까지 빌렸던 걸 생각해보자. 즉, 메이저리그 투수치고 평범한 체구인 박찬호가 역사상 타자들의 파워가 가장 강한 시대에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피지컬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계에 부딪히는 걸 이를 악물고 버텼으니 힘이 떨어지면 무너지는 건 당연한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는 FA전 부상을 참고 뛰었고, 이렇게 무리한 것은 나중에 심각한 기량 저하로 돌아왔다.

사실 박찬호는 큰 기복이 없는 투수인데, 대표적인 예로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도 많이 좋았다.[41] 퀄리티 스타트의 가치가 큰 기복없이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잣대이고, 특급투수들을 보면 반드시 퀄리티 스타트 성적이 좋고 무너지는 경기가 거의 없기에 방어율이 높은 것이다. 종종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율 3점대 초반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그 시즌 무너진 경기 없애고 그때도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고 계산하면 방어율은 2점대를 마크할 것이고, 20승도 넘을 수 있고 이러면 특급투수가 돼버리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고 그게 바로 실력이다. 멘탈 강하면 안무너지는게 아니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라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부상이 있을 때는 제구가 안돼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소개 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42],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시절 장출혈, 필라델피아 시절 신종 독감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생업에 정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의 특별한 프로정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 하면 생각나는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물론 이민 정착이 아니라 한국에 귀국해 살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에겐 최고의 롤모델로 손색없는 사람이 바로 박찬호. 미국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떤 업계에 진출하더라도 저런 근성 없이 성공을 바라면 안 될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주무기는 빠른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 특히 파워 커브메이저 최고의 명품 구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43] 그 외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투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44]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그리고 내야수(3루수) 출신답게 수비 실력도 훌륭한데, 특히 번트 대처능력은 귀신급.

게다가 저 기록들은 이른바 스테로이드 시대[45]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더 빛난다.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전성기 때는 리그에서도 1~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이다. 박찬호가 1선발급이었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이는 결국 기준을 어디 두느냐에 달린 문제다.

메이저리그 팀이 30개이니 전체 30등 안에 들면 1선발급이라는 조금 유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박찬호의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8, 2000-2001 세 시즌은 클래식 스탯은 물론이고 세이버로도 당연히 1선발급이 맞다. 반면 최소 올스타 수준, 리그 5위 안에 드는 선발이어야 1선발급이라는 조금 빡빡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클래식 스탯으로는 아슬아슬하고 세이버로는 어렵다.[46][47][48]

강력한 패스트볼과 커브볼을 기반으로 랜디 존슨에 이은 탈삼진 2위[49]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을 정도로 삼진머신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로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한편, 박찬호는 전성기 시절 97~98 마일을 최소 5번 이상은 나왔고 이러한 강속구에 80마일 중반의 파워커브 레퍼토리는 분명 기교파 투수와는 거리가 있다. 아니 사실 기교파는 말도 안되는 얘기고, 전성기 시절이었던 98시즌 전후 보다 오히려 직구의 구속과 구위가 더 압도적이었던 96~97시즌 연간의 박찬호는 경기 내내 평균 95마일 이상의 직구를 뿌리며 경기 후반까지도 97~98마일의 직구를 뿌리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었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파이어볼러 중 한명이었다. 당시 박찬호의 투구를 두고 USA 투데이의 저 유명한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인 밥 나이팅게일은 '80년대 중후반을 장식했던 강속구 투수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클래식한 강속구 투수라고 평한 바가 있을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한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50] 뿐이고 그나마 구원투수 쪽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우에하라 고지가 있으며 현역 동양인 선발투수 중에서 다르빗슈 유의 패스트볼 구위가 박찬호에 가장 근접해 있다. 하지만 정작 다르빗슈는 자신을 다양한 구질로 타자를 상대하는 유형의 투수로 생각하는 듯 하다.[51]

'박찬호 악포심 던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이를 악물고 괴성을 질러가며 포심을 던진 적도 있었다. LA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에서 이런 일이 좀 잦았는데 해설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습관 때문에 어금니가 망가져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남아있는 치아의 보호를 위해 대책으로 마우스가드(피스)를 착용하고 던진다.[52][53] 여담으로 이 때문인지 동양제과에서 박찬호를 모델로 '익사이팅'이란 이름의 껌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일반 껌보다 두께가 두 배 정도 굵어 씹는 느낌이 헤비하다. 실제로 많은 야구선수들이 치아보호를 위해 껌을 씹기도 한다.

류현진미국 진출 후 은근히 류현진과 비교가 되거나 재평가되고 있는데 박찬호는 전형적인 구속, 무브먼트로 윽박지르는 파워피처이고, 류현진[54]은 다재다능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박찬호처럼 우격다짐형 파워 피처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스타일이 완전 달라서 두 명의 다져스 한국선수의 경기를 모두 본 사람들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다. 젊을 적에는 사실상 패스트볼과 커브 투피치[55]로 A급 투수로 등극할 만큼 스터프로 먹고사는 스타일이었다. 90마일 초중반대에 무브먼트도 심해서 제구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삼진의 산을 쌓는 원동력이었다. 이후 여러 구질을 배우고 보완하면서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고 또 몇몇 구질은 부활의 원동력이 되긴 했으나 항상 박찬호를 상징하고 박찬호가 있게 한 것은 강력한 속구였다. KBO에서 류현진은 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었지만 MLB에서는 힘으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어서 박찬호보다는 압도적인 면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이다. 그래도 힘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구속이 빠른 파이어볼러 투수가 인기도 높고 많은 야구팬의 로망이라 전형적인 정통파 우완투수로 리그를 호령하는 한국 투수인 박찬호는 선구자 타이틀이 없어도 매력적인 투수였고, 박찬호 이후 정통파 한국인 메이져리거를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성기때는 흔히 기억되는 박찬호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투수였다. 특히 '퀄리티스타트'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정착시켰으며 박찬호의 투구를 보고 퀄리티 스타트가 쉬운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번 나오면 6이닝 3실점은 당연한거였다. 다만 삼진 아니면 볼넷일 정도로 제구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기복이 좀 있었고 볼넷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경력이 쌓일 수록 위기관리능력이 늘어 삼진과 병살로 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치고는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고는 했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1호 홈런 2호 홈런. 가장 마지막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56] 더 대단한건 3개의 홈런 모두 밀어서 넘긴 홈런이다.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박찬호는 원래 3루수로 야구를 시작했고, 소속팀 감독으로 부터 타격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2학년때 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도[57] 공주고등학교에서도 클린업을 쳤었다.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

박찬호를 비롯한 당시 92학번은 '전설의 학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들이 많은 학번이었다. 특히 투수쪽에는 조성민, 임선동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이 세 명의 투수 중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고 한다.[58] 공은 빠르지만 세세함이 부족하고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다 부상도 많았다는게 이유. 그래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의 단점을 고치는 한국 스타일보다 선수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훈련 스타일인데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선수의 몸관리를 해서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그래서 중계를 하던 iTV에서도 날이 더워질 즈음엔 여름의 사나이 라던가 뜨거운 이미지와 관련된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전담포수를 둘 정도로 포수와의 호흡은 상당히 민감했다. 방망이는 좋지만 수비와 리드가 시망인 마이크 피아자, 토드 헌들리, 폴 로두카[59] 대신에 찰스 존슨이나 채드 크루터 같은 수비형 포수를 선호했다. [60] 그러다 점점 연차가 찬 이후에는 그다지 까탈스럽지 않은 투수로 변했다.[61]

강했던 팀과 선수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다저스 시절 필라델피아 필리스, 제프 켄트, 에드가르도 알폰소.[62] 약했던 팀과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클리프 플로이드, 에릭 차베스, 미네소타의 자크 존스, 그리고 박찬호 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브래드 풀머를 빼먹으면 섭하다.

2006년 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 뿐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에게 강하다. 통산 9타수 1안타. (그런데 그 1안타가 홈런이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다만 가장 많이 상대한 아시아 타자인 스즈키 이치로를 상대로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상대전적은 35타석 .387/.457/.484이다.[63]

구질 욕심이 보통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투피치 피처로 구분되긴 하나, 2000년부터 재미를 보던 슬러브를 비롯, 속도가 40km/h가 차이 나는 커브를 실전에 쓰기도 했다. 또한 상술된 바 투심도 수준급이며, 너클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질을 실전에 사용하였다. 알고보면 팔색조 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당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오릭스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오릭스의 동료 선발투수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기도 했다.

타격도 투수 치고는 상당하여 통산 3홈런을 기록하였고, 번트가 특히 정교한 편이었다.[64] 2006년엔 시즌 중반까지 3할 초반대의 정교한 타율을 기록하면서 내셔널 리그 실버슬러거 투수부문 컨텐더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었다.[65] 이 해에 박찬호는 선발투수로 풀시즌을 보냈음에도 대타로 2번 등장하여 한 번은 무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기록했고, 나머지 한 번은 연장전에서 2사 주자없을때 펜스앞에서 잡힐정도로 큰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을 정도. 그외 A.J 버넷의 99마일 직구를 깨끗하게 받아쳐서 안타를 만들었다거나, 브랜든 웹을 상대로 3타수 3안타 2타점을 올렸다거나 한 일이 모두 2005~2006년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4.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

박찬호에 대한 논란 중 하나가 그의 최고 구속이다. 박찬호가 한창 짱짱하던 96년도 무렵에 비공식적(infomally)으로 100마일을 던질 수 있다는 의견이 미국의 잡지에도 실린적이 있지만 실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박찬호의 100마일에 대한 도시전설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직구 구속이 다소 빠르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진 쿠어스 필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 쿠어스 필드의 경우 타 구장에 비해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 밀도가 약간 더 희박하고 따라서 공이 받는 공기 저항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쿠어스 필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 알려져 있는데, 공기 저항이 적은 만큼 타구의 비거리가 증가하여 타 구장에 비해 장타를 맞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쿠어스 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팀컬러가 장타를 펑펑 쳐대는 대포군단인 것도 이러한 특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타구의 비거리를 늘릴 정도로 공기 저항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 쿠어스 필드에서 평균 구속이 타 구장보다 높게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2. 100마일을 넘어 101(약 163km/h)마일을 던진적이 있으며 이는 당시 국내 스포츠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되었다. 이것이 실제 신문지면이었는지 TV광고에 나오는 그래픽이었는지 불확실하나 쿠어스 필드 160km라는 문자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이 100마일 또는 101마일을 던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 영상을 업로드하거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을 보도한 스포츠 신문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구체적으로 일간스포츠스포츠서울이네라고까지 말한다) 그 신문 기사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는 기사들이 등장하는데, 시점도 1996년과 1997년으로 제각각이다가 나중에서야 1996년으로 통일되고 있다.


주로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고 주장되는 쿠어스 필드 기록은 1996년 6월 27일 콜로라도전이다. 그런데 다음의 두 링크를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위 기사는 최고구속 156.8km의 강속구를 뿌렸다고 나와 있으나 아래 기사는 구속 내용이 전혀 없다. 두 글을 송고한 기자가 LA지사 허종호 특파원으로 같은 사람임을 고려할 때, 156.8km의 강속구를 기사에 적시하는 사람이 100마일이라는 희대의 대기록을 적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 상식적 추론일 것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에서의 최고 구속이 98~99마일이라고 하고 있으며, 자신은 진짜 사나이에 출연하여 자신의 최고 구속은 160km/h (약 100마일)이라고 한 바가 있다.[66]

한편 공식 사이트에서는 최고구속을 161km/h로, 1996년 5월 28일 콜로라도전에서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 161km/h라면 100.04마일이다. 다만 이 공식사이트 기록은 완전히 틀린 것이, 1996년 5월 28일 다저스의 상대팀은 콜로라도가 아닌 필라델피아였다. 1996년 박찬호의 콜로라도전 등판은 총 5경기인데 6월 말과 7월 초에 5경기 모두가 몰려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져보면 1996년~97년 즈음부터 ‘박찬호 최고구속은 161km/h’라는 말이 등장한다.

4.2. 투구폼

파일:박찬호투구폼.gif
박찬호의 투구폼

박찬호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매일 같이 해와 하체가 튼실하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금기시한[67] 하이 키킹 동작을 했다는 점이다. 다만 하이 키킹의 경우 선수생활 후기에는 그 크기가 전성기보다는 꽤 낮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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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절에는 폼이 저렇게 극단적이었다. 이후 저 투구폼에서 든 다리의 무릎을 접은 형태로 폼을 바꾸고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데뷔하게 된다.

5. 여담

5.1. TV활동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촬영에 참여[68]하여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계곡의 얼음을 깨고 멤버들과 계곡물에 입수한 장면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멤버들과 돈독한 우정이 쌓였는지 녹화가 끝난 뒤에도 장문의 문자를 멤버들에게 일일이 보냈다고 하고[69] 그 해 KBS 연예대상에도 1박 2일 멤버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이로부터 2년 뒤에 혹한기 특집에도 다시 찾아와 멤버들을 한번 더 계곡에 입수시키기도 했다.[70] 2010년 시청자 투어 때도 치킨을 보내줬으며, 2011년에는 이승기 - 이수근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병뚜껑 복불복 게임에서 역대급 제구[71]를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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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 PD와 협상하면서 탁구대 맨 끝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취침,혹은 다 밖에서 취침이였다가 전원 구제로 바뀐 건데, 안 바꿨으면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나영석 PD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자 얼빠진 상태로 전원 실내취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텐트 걷자는 자막은 덤. 그래도 1박 2일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면을 건졌으니 야외취침으로 재미를 뽑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득은 봤다. 조작논란이 생길까봐 앞타자 이수근이 치는 장면부터 노컷으로 한 앵글로만 내보낸건 덤.

2011년 12월 1일, 주병진 토크 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신승훈과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훗날 2016년 9월 12일에 그의 아내 박리혜 셰프가 여성 셰프 최초로 냉장고를 부탁해스페셜 셰프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우 정준호와의 오랫동안 친분을 계기로 그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에 특별출연했다. 영어쓰는 충청도 학부모 역.

2018년에는 SBS에서 방영한 빅픽처패밀리에도 출연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다.

2020년 정글의 법칙IMF 금융위기 시절 국민영웅으로 같이 불린 박세리와 함께 출연했다.

2020년 축구선수 이영표, 오마이걸 승희와 함께 축구 야구 말구에 출연했다.

2021년 2월 14일부터 박세리, 박지성과 함께 쓰리박에 출연한다.

5.1.1. CF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2010년대에도 LG패션 타운젠트, 플렉스파워 등을 통해 여전히 활발한 CF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키의 전속모델로도 활동했다. 위의 광고는 미국과 한국 모두 방영됐었다.광고의 모습과는 다르게 MLB 통산 3홈런이다(...) 그것도 투수친화구장들에서 전부 밀어서 넘겼다(!)


건설회사 KCC의 광고에 출연하였다. 투머치토커의 컨셉을 그대로 유지한채로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5.2. 역대 연봉

연도 액수 소속팀 소속리그
1994년 10만 9000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95년 11만 4000 달러
1996년 12만 4000 달러
1997년 27만 달러
1998년 70만 달러
1999년 230만 달러
2000년 395만 달러
2001년 990만 달러
2002년 688만 4803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 1300만 달러
2004년 1400만 달러
2005년 1500만 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 1550만 5142달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 60만 달러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 50만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 250만 달러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120만 달러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 2억 5천만엔 오릭스 버팔로스 일본프로야구
2012년 2,400만원[72] 한화 이글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73][74]
리그 금액 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 8,665만 6,945달러 969억 9511만 8500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 2억 5천만 엔 28억 9,582만 5,000원
한국프로야구에서 번 돈 2,400만원
총액 999억 1,494만 3,500원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5.3. 기타

5.4. 가족

부인 박리혜는 아버지가 일본 부동산 재벌 박충서다.[84] 이와 관련 거짓 소문으로는, 그가 박찬호에 대해서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치로의 WBC 당시 발언이나, 2002 월드컵 당시 토티의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한국 사회에 퍼진 것을 보면, 이 발언도 비슷한 기레기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스포츠 신문이나 가십거리를 다루는 케이블 프로그램 등에 저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나오는데 해당 인터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박찬호가 장인이랑 비슷하게 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박찬호보다 장인이 부자는 맞다. 국내 기사에 따르면 장인도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니, 최소한 박찬호가 번 돈의 규모를 모를 리 없으며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가지는 위상은 한국 사회에서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들보다 더 대단한 大리그(일본에선 메이저리그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장기간 활약한 박찬호를 장인이 폄훼할 이유는 없다. 참고로 박찬호는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 소문 자체는 워낙 많이 퍼지다 보니, 박찬호의 팬들조차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할 정도다.

부인인 박리혜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요리사이며,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 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부인이 재일교포 2세이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일본어로 된 라벨링이 많이 나왔으며, 잘못 적은 한국어 라벨링도 보였다.[85] 맵고 짠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며, 박찬호도 현 시점에선 그 입맛에 길들여진 듯. 아내가 풀코스로 요리하는 걸 선호하는지라 러시아워인 아침밥 시간에는 싸움도 벌어진다고. 박찬호의 냉부 출연 이후 부인을 냉부의 스페셜 셰프로 등판시키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KBS2 '축구 야구 말구'에 그의 사촌 동생인 박현용씨가 출연하였다. 고깃집을 운영중이며 단골. 한의사 경력자다.

5.5. 작품 속 박찬호

1990년대 당시 아시아선수가 드물었던 메이저리그에서 노모 히데오와 함께 아시아 선수를 대표했으며 더불어 두자리 승수의 실력까지 겸비해서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만화 메이저에서는 본명이 아닌 '안종권'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팀 에이스의 모티브로 나왔으며, 일본 작품 답게 한국팀과 안종빈이 비열하게 나온다.[86] 그 바람에 여태까지 쌓아온 메이저의 이미지가 한국에서 완전히 꺾이게 되어버려서 지금은 이제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김성모의 만화 스터프 166km에서는 박찬화라는 2차 창작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셰필드의 '박찬화에게 전해, 난 영원한 도우미라고!'라는 명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는 클로저 이상용에서 3차 창작으로 이어진다.

5.6. 자서전

초판 인쇄일이 1996년 12월 15일이다. 겨우 만 23세. 박찬호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요인이 IMF로 한참 힘든 한국인에게 희망을 줬다는 것인데, 1996년은 IMF는커녕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고생하고 막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시점이다. 책 내용도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첫승을 거둔 부분에서 끝난다. 즉, 이 책의 내용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기가 아니라,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기인 것이다. 때문에 박찬호가 승승장구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어린시절, 공주고와 한양대학교 시절, 마이너리그때 힘들었던 일 등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특히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경험담과 메이저리그 도전이 당시 국내에는 워낙 생소했기 때문에 잘 팔린 편이다. 요즘에야 워낙 메이저리거가 늘어났고 인터넷이 발달하여 마이너리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 시대였던 만큼 마이너리그에 대해서 개인 팬이 정보를 얻기는 정말 힘들었다. 당장 현업인인 자신도 마이너리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던 상황에서 강등된 박찬호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고, 책에서 이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박찬호는 대망의 메이저리그 1승을 달성하고 나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지만, 탈고를 마친 시점에서는 이미 10경기 출전에 5승이라는 전적을 올리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채 시즌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올라서기 위한 중요한 기점들을 다 거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쯤 되면 책 한권 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아직 리즈 시절이 오기 전 도전정신에 가득차 있던 시기의 박찬호를 알기 가장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선구자, 개척자의 이미지와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뭔가 '위인 박찬호'라는 느낌에 종종 '투수'라는 것을 잊게 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박찬호도 빼박 투수구나라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그 정도로 투수라는 포지션에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투수는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가 등의 본인의 투수론이 잘 드러나 있어 투수 박찬호를 느낄 수 있다.

5.7. 투 머치 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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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

2006년 샌디에고전에서 1이닝 3루타 2개를 맞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대 타이 기록이다.
파일:찬호본즈71.gif
파일:찬호본즈72.gif

파일:찬호립켄.gif

여러 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간에.

6.3. 기타 기록

7. 어록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8. 연도별 성적

NPB와 KBO에서는 홀드세이브를 기록한 적이 없다.
MLB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1994 LAD 2 0 0 0 4 0 0 - 0 11.25 5 6 6 2.50
1995 2 1 0 0 4 0 0 - 0 4.50 2 2 7 1.00
1996 48 10 0 0 108⅔ 5 5 - 0 3.64 82 75 119 1.41
1997 32 29 2 0 192 14 8 - 0 3.38 149 78 166 1.14
1998 34 34
(5위)
2 0 220⅔ 15 9 - 0 3.71 199 108 191 1.34
1999 33 33 0 0 194⅓ 13 11 0 0 5.23 208 114 174 1.58
2000 34 34 3 1 226 18
(5위)
10 0 0 3.27 173 136 217
(2위)
1.31
2001 36 35
(1위)
2 1 234
(3위)
15 11 0 0 3.50 183 111 218
(3위)
1.17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2 TEX 25 25 0 0 145⅔ 9 8 0 0 5.75 154 95 121 1.59
2003 7 7 0 0 29⅔ 1 3 0 0 7.58 34 31 16 1.99
2004 16 16 0 0 95⅔ 4 7 0 0 5.46 105 46 63 1.44
2005 20 20 0 0 109⅔ 8 5 0 0 5.66 130 60 80 1.68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5 SD 10 9 0 0 45⅔ 4 3 0 0 5.91 50 30 33 1.66
2005 시즌 합계 30 29 0 0 155⅓ 12 8 0 0 5.74 180 90 113 1.67
2006 SD 24 21 1 1 136⅔ 7 7 0 0 4.81 146 54 96 1.39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7 NYM 1 1 0 0 4 0 1 0 0 15.75 6 2 4 2.0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8 LAD 54 5 0 0 95⅓ 4 4 5 2 3.40 97 40 79 1.4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9 PHI 45 7 0 0 83⅓ 3 3 14 0 4.43 84 38 73 1.4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0 NYY 27 0 0 0 35⅓ 2 1 0 0 5.60 40 13 29 1.47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0 PIT 26 0 0 0 28⅓ 2 2 1 0 3.49 25 9 23 1.13
2010 시즌 합계 53 0 0 0 63⅔ 4 3 1 0 4.66 65 22 52 1.32
MLB 통산(17시즌) 476 287 10 3 1993 124 98 20 2 4.36 1872 1048 1715 1.40
NPB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1 오릭스 버팔로즈 7 7 1 0 42 1 5 4.29 44 16 21 1.33
KBO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2 한화 이글스 23 23 1 0 121 5 10 5.06 134 63 68 1.54
개인 통산
통산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19시즌 506 316 12 3 2156 130 113 20 2 4.40 2050 1127 1804 1.41
역대 기록(MiLB)
연도 출장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이닝
<colbgcolor=#dcdcdc,#222222>1994 샌안토니오 미션스(더블 A) 20 5 5 0 0 3.55 91 57 100 101⅓
1995 앨버커키 듀크스(트리플 A) 23 6 6 0 0 4.91 93 76 101 110
2002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1 0 1 0 0 9.00 9 76 3 3
2003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 2 1 0 0 0 2.45 10 3 3 11
2003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3 3 0 0 0 4.89 27 8 12 18⅓
2004 애리조나 래인저스(루키) 4 1 1 0 0 1.71 15 15 20 21
2004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 2 0 2 0 0 8.74 16 5 5 11⅓
2004 호클라호마 레드호커스(트리플 A) 4 0 2 0 0 3.72 21 3 19 19⅓
2007 라운드 락 익스프레스(트리플 A) 9 4 4 0 0 5.57 64 18 49 51⅔
2007 뉴올리언즈 제피어즈(트리플 A) 15 2 10 0 0 6.21 100 27 70 84
2010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1 0 0 0 0 0.00 1 0 2 1
타격 기록[98]
통산 타석 타수 안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통산 479 430 77 3 27 31 20 155 0.179 0.215 0.240


[1] 음력 1973년 6월 29일[2] 당시 한양대학교에서는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선수 학생들도 체육대학이 아닌 일반 학부에 분산시켰다.[3] #[4] 선발 투수[5] 초구 던지기 전 / 완투승 / 완봉승[6] 묻지 마라. 욕하지 마라. 찬호는 계속 던진다. 야구와 함께 살아왔다. 나의 과거를 묻지를 마라. 던지고 던진 인생이었다. 후회 없지만 눈물이 난다. 야구를 하면서 난 너를 만났고 사랑을 알았고 꿈을 가졌다...이 생명 다 바쳐 널 위해 던진다. 사나이 한평생 내 사랑 팬을 위해 실패를 해도 욕하지 마라. 찬호의 도전이란다. 박찬호 순정이란다.[7]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획득.[8] 재일한국인 2세이며 일본 중앙토지 부동산 회사 사장 박충서의 딸이다. 참고로 외가는 반남 박씨라고 한다.[9] 2005년 11월 30일, 박찬호는 미국 하와이에서 가족과 친지 등 30여명이 참석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2월 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야구 선후배 300여명을 초청해 피로연을 열었다. #[10] 박찬호의 세 딸은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출생 당시 부모 중 한명이라도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11] 매형 김만섭 씨는 박찬호의 국내매니지먼트사인 '팀61'의 대표이다. # 남동생 박헌용 씨는 미국 LA에서 한의학을 전공한 한의사로, # 2021년 1월 4일 방송된 축구야구말구에 깜짝 출연했다. #[12] 1997년 컵스전에서 완투승을 한 박찬호를 보고 당시 컵스의 1루수였던 그레이스가 한국인 기자에게 박찬호의 나이를 물어봤는데 기자가 24살이라고 답하자 한 말이라고 한다. 참고로 최희섭이 은퇴 당시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마크 그레이스처럼 되고 싶다고 회고한 바있다.[13]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시즌에는 속구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다.[14] 케빈 브라운 때문에 에이스까지는 차지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다른 중하위권 팀에서는 에이스 노릇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15] 21세기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린 첫번째 선수가 되는 것이다.[16] 추신수가 박찬호의 통산 WAR을 넘었기에 역대 최고의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아니다. 박찬호의 투타 통산 fWAR는 22.6(투 20.8 + 타 1.8)이고 추신수는 2018시즌까지 fWAR 34를 기록했다. 또한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1억 3000만 달러의 계약으로 박찬호의 FA 기록까지 깨뜨렸다. 다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상징성 측면에서 볼 때 그 위대함을 논할 수는 있을것이다.[17] 아시아 지역으로 범위를 넒혀 박찬호와 비교할 수 있거나 분명히 뛰어넘었다고 평가할 만한 선발투수는 다르빗슈 유, 노모 히데오, 구로다 히로키, 류현진이 있다. 박찬호가 이들에 비해 앞서는건 17년 뛰어서 쌓인 누적 뿐이며 노모와 비교하면 딱 1승 차이나는 다승 빼고 누적에서도 밀린다. 더욱이 이 4명은 전부 자국리그에서 뛰다가 빨라야 만 26, 27세. 제일 늦은 구로다는 만 33세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아마때 넘어가 메이저팜에서 키워진 선수인 박찬호가 이들에 비해 누적 빼고 다 밀리니 가장 말석에 놓을 수밖에 없다.[18] 최희섭이 아니다. 박찬호가 선수 초기부터 텍사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뛰었던 내셔널 리그에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규정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돈트렐 윌리스잭 그레인키처럼 수준급 타격 실력을 뽐내는 투수도 곧잘 등장한다.[19] 당시 한국인들이 국제정세에 어둡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로 인한 경제성장, 1996년 OECD 가입으로 인해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을 넘는다고 까지할 정도로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았었다.[20] 당시 골프선수 박세리가 LPGA에서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스윙을 하는 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과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21] 최전성기인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거의 스포츠계에서 박찬호의 인기는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 원탑 자리를 차례대로 차지했던 H.O.T., 조성모, god 급의 위상과 비슷할 정도의 인기였다.[22] 지금의 가전제품 판매 및 수리 점포. 전자기기 업체 노릇을 하던 전파사도 있었고, 웬만한 동네에는 개인이 직접 운영하는 전파사가 하나 둘 정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사장된 점포 형태이다.[23] 2013년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를 계산해 보면 1982년도인데, 그 시절까지도 라면은 집에서 만만하게 사먹을 물건이 아니었다는 얘기다.[24] 투수 전업 전까지 박찬호는 3루수였는데, 얼마나 잘 했는지 오죽했으면 당시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왜 전향시키냐고 욕을 먹고 경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박찬호의 반대급부로 3루수 전업을 했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 야구부의 에이스였다.[25] 그 때문인지, 도로명주소 개편 당시 박찬호가 살았던 공주산성 근처 있는 작은 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산성찬호길이 생기기도 했다.[26] 그리고 이 두 친구는 감독까지 하게 된다 같은 팀에서 차례대로 물론 손혁은...[27] 여담으로 박찬호가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날 때 3명의 지인을 데리고 왔는데 후술할 션, 한양대 2년 선배 류지현 그리고 홍원기였다고 한다.[28]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 라든가[29]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30] 이 광고가 나가던 시기 한화 성적현시창이었기에 한화 경기를 보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을 대비한 고단수 보험 마케팅이라는 드립이 성행했었다.[31] 그리고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으로 온 윤석민도 이날 경기를 보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만났다거나 사전에 이곳에 오기로 했다는 걸 알고있던 건 아니었으며, 박찬호는 현장에서 윤석민이 왔다는 걸 기자가 알려줘서 알았다고 말했다. 이날 박찬호와 함께 류현진 경기를 응원한 건 피터 오말리 전 구단주.[32] 박찬호가 고향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 뒤라..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 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 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33] 다소 졸렬한 일이긴 하지만 아래 이시영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박찬호의 엄청난 승부욕 때문에 생긴 일로 봐야 할 듯하다. 이미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고 사실상 은퇴투어 중이던 박찬호 입장에선 까마득한 후배인 오재원을 상대로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만, 경기에 나선 이상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 입장에서 경쟁자가 부당하게 이득을 본 일(이라고 본인이 착각한 일)해 앙금이 남은 것.[34] 양학선 선수는 카잔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35] 밥 두 끼에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36] YS는 개신교 신자로 장례도 당연히 개신교 식인데 영정을 향해 절을 했다. 뭐가 문제냐면 기독교장은 절을 하지 않고 목례만 한다.[37] 야구선수들 중에는 유백만, 김재박, 방수원, 윤석민 등 골프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 꽤 많다. 앞뒤로 치는 야구의 스윙 궤적과 위아래로 치는 골프의 스윙 궤적은 다르지만 막대기를 휘둘러서 공을 앞으로 보내는 것은 원리가 같아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매우 빠르다.[38]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그런데 잡상인은 불법이라 현 시점에서 한다면 바로 지하철보안관이 승차하여 제재한다.[39]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40] 배리 본즈가 73홈런을 때려낸 게 박찬호의 전성기인 2001년이다.71, 72호 홈런을 박찬호에게 뽑았다.[41] 한창때는 그 랜디 존슨보다도 많이 기록해본 적이 있다.[42]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43] 여기에 슬라이더체인지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마이너리그 시절 통타 당하던 구질이라 이후에는 구사를 자제하다 2008 시즌부터야 적극 활용했고, 체인지업은 그가 던질 수 있는 구질 중에서 민감하고도 완성된 시간도 꽤 오래 필요했던 구질이다.[44]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 2에서나 볼 수 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45] 사실 MLB에서 약물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베이브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복용했다는 기록이나 미키 맨틀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종기가 나서 결장한 사건, 행크 애런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밝힌 것 등 약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는채로 약물 복용이 성행했으며, 미첼 리포트가 터지며 선수들의 금지약물 사용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이후에도 약쟁이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통상적으로 스테로이드 시대를 일컫는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를 일컫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금지약물을 대놓고 복용하는 선수들이 존재하던 시기 자체는 이 때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전 시기는 금지 약물에 대한 생각 자체가 희박했고(암페타민조차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 이후 시기에는 약을 빨다 걸리면 그대로 철퇴를 맞기 때문에...[46] 박찬호는 2000년 NL bWAR 7위, 2001년 10위를 기록했다. fWAR로는 1998, 2000년은 양 리그 통합 20위대, 2001년은 19위다.[47] 혹자는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실력을 올리지 못했고, 다저스 시절은 케빈 브라운에 이은 2선발이었으므로 2선발급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딱히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커트 실링랜디 존슨 다음, 잭 그레인키클레이튼 커쇼 다음 2선발로 나왔다고 해서 이들이 1선발급 투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분석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수가 1선발급인지 아닌지는 팀에서 1선발로 나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성적을 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48]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시절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빅리그 선발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확실한 유망주', '미래의 메이저리그 프런트라인 급 투수'로 평한 부분은 새삼 박찬호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해준다. #[49] 물론 큰 차이가 있긴 하다. 2000 시즌 217K를 잡아내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분은 347K. 다만 이 시즌에 볼넷도 124개로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삼진/볼넷이 1.75였다.[50] 물론 두 선수 모두 각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슬러브와 포크볼로 재미를 보기는 했다.[51] 다르빗슈가 쓰는 구종의 개수를 생각하면 다구종으로 상대하는 스타일이 맞긴하다.[52] 이미 어금니는 심하게 마모되었다고 한다.[53] 200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1박 2일에서 밥을 먹기 위해 치아 보조기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4] 류현진이 KBO 에 있을 때에는 최고의 파워 피처에 컨트롤도 최고의 피네스 피처라 부를 수 있는 완전체였다. 메이저리그로 와서는 양쪽 모두가 정점인 완전체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정교한 제구력과 섬세한 운영이 장점으로 평가받는다.[55] 사실 패스트볼을 포심투심으로 나눈다면 3피치. 그런데 주무기를 패스트볼과 커브로 단순화했을 뿐이지, 다른 구종을 못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56]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세 홈런 다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장(1호 다저 스타디움, 2호 퀄컴 스타디움, 3호 돌핀 스타디움(댄 매리노의 집))에서 쳐낸 것도 대단한 기록이다.[57]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 시킨 감독은 당시 학교내에서 수많은 반대의견, 특히 다른 투수들의 학부모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찬호를 기어이 투수로 전향 시켰는데, 후에 졸업 이후 이로 인한 말썽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 당하고, 이후 교편을 잡게 된다. 이 감독은 박찬호 본인이 가장 존경했던 은인이자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참고로 박찬호가 투수로 전향하자, 원래 투수였다가 박찬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로 전향한 선수가 바로 홍원기다.[58] 사실 92학번 전체를 이야기해보면 더 많은데 손경수, 정민철, 염종석, 차명주, 전병호, 안병원 그리고 타자로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김종국 등이 있다.[59] 다만, 토드 헌들리가 다저스의 주전 포수를 보던 1999 시즌에는 채드 크루터 영입 전까지 일시적으로 박찬호의 전담포수를 맡기도 했다.[60] 조인성이 까였던건 투수진과의 불화가 주된 요인이고 그 외에 리드 때문이지 수비 능력 자체는 좋다.[61] 짬이 차면 포수 리드를 따르기보단 포수와 조율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던지는 경향이 많아지기 때문. 이런 점 때문에 신인급 포수는 그 팀의 최고 베테랑 선발의 경기에 주로 투입되곤 한다. 아예 그냥 투수가 리드까지 전담하게 되는 것.[62] 뉴욕 메츠에서 2루수로 뛰다 나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던 그 선수 맞다.[63] 류현진또한 이치로를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상대전적은 .667/.667/1.667이다.)[64] 경기의 절반 가량을 책임져야하는 선발 투수가 출루를 했다가 괜히 부상을 당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공수교대를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괜히 병살타 치지 말고 빠르게 아웃을 당하거나 희생 번트를 잘 대는 것을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2할 이상의 타율을 보여주는 투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65] 최종 0.268/0.268/0.268 하지만 볼넷 0개에 장타가 없어서 출루율,장타율이 낮았기 때문인지 결국 그해 실버슬러거는 타율은 0.151에 그쳤지만 그해에만 80타석에서 6개의 홈런을 쳐낸 카를로스 잠브라노가 가져갔다.(0.151/0.160/0.397)[66] 참고로 160km/h는 약 99.4MPH다. 다시 말해, 설령 100마일 투구 기록이 없다고 해도 박찬호의 말이 그대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67] 다만 금기시라고 하기에는 당대에도 쓰는 선수들은 꽤 있던 편. 최동원이라거나, 박철순이라거나, 조계현이라거나...하나같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다.[68] 박찬호의 고향인 공주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69] 멤버들과 일상적인 통화도 했다고.[70]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던 은지원이 가장 먼저 입수를 함으로서 다른 멤버들은 빼도박도못하고 전원 입수를 하게 되었다.[71] 실제 게임장면은 09분26초부터[72] 한국프로야구 최저 연봉이다. 박찬호/2012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연봉 0원이다. 한화는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적지 않은 연봉을 준비하였었는데, 박찬호가 오히려 연봉 0원으로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규정상 선수에게는 최저연봉은 줘야 하므로, 딱 그만큼만 받은 것. 대신, 한화는 박찬호에게 주려고 했던 6억 원 상당의 금액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박찬호 역시 연봉 전액을 같이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사비를 더 기부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박찬호는 자기 돈을 써가며 KBO에 봉사하면서 뛴 셈. 덤으로 박찬호는 KBO 최저연봉이 이렇게 적은 줄 몰랐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대략 2000이닝을 던지면서 969억을 벌었으며, 이닝당 4,800만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박찬호가 2,400만원을 어떻게 보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은 5억이 넘는다.[73]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13년 3월 16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하시길.[74] '외화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메이저 당시 세금은 미국에 낸다. 물론 단순 외화벌이로 국위 선양하는 선수들의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75] 막상 본인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나는 치즈 냄새가 더 역겨웠었다고. 그래서 너희들도 니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당해보라는 의도였다고 한다.[76] 마늘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알리신은 입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특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그런데 마늘은 한국 음식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거의 모든 한국 음식에 들어가며, 한국인의 1인당 마늘 소비량은 외국인에 비해 넘사벽 수준이다. 보통 적응하여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다 입국한 사람이나 오신채를 먹지 않는 승려의 경우, 그냥 거리에서조차 약간의 마늘 향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77] 치즈냄새도 그렇지만 특히 덩치가 크고 땀이 많이 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주 심한 암내가 난다.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이들과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근데 반대로 외국인 입장에서 마늘은 안 그래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인데 마늘 좋아하는 사람도 한국사람처럼 몸에 배어있는 정도로 나면 엄청나게 괴롭다. (치즈 좋아하는 외국인도 백인들 냄새는 괴롭듯이) 이걸 갖고 인종차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식습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배어있는 냄새는 진짜 견디기 힘들다.[78] 당시 이런 분위기와 언론을 비판했던 딴지일보의 기사 제목은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였다.[79] 당시 동인천 인근에는 미림극장, 애관극장 등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옛날식 영화 판넬을 그리는 화백들이 많았다.[80] 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 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중 하나가 찬빈이었다.[81]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남녀 사이에 넘사벽 차이가 있는 건 차별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테니스 여성 올타임 넘버원을 다툴 만한 레전드인 세레나 윌리엄스는 남자 세계랭킹 200위 선수와 성대결을 펼쳐 완패했고, 여자농구에선 마이클 조던급 레전드인 쉐릴 밀러가 남자 하부리그에서 지명된것만 해도 화제가 될 정도다. 한국 여자 국대 축구팀은 남자 고교 축구팀(청대가 아니라 그냥 한 고등학교 팀)과 연습경기를 해도 이길 수가 없고, 여자 복싱 세계 챔피언은 남자 시 5위(세계 5위, 국내 5위가 아니라 한 도시의 5위)와 스파링을 해도 상대가 안 된다. 그나마 차이가 적은 골프에서조차 최강급 여자선수가 남자대회에선 컷오프 통과하냐 마냐를 따질 수준이다. 하다못해 바둑이나 게임도 오래 앉아 집중해야 하는 관계로 평균 체력이 떨어지는 여자는 남자보다 경기력이 더 부족한 편이다. 이렇다보니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여성 선수가 있다 해도 메이저리그는커녕 KBO, 아니 대만 리그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82] 즉, 박찬호는 순수 운동능력만으로 평가하고 있기에 저 말은 "저 녀석 왜 저렇게 잘해?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아냐?" 수준으로 남녀 사이의 운동능력 격차를 뛰어넘을 정도로 이시영이 뛰어나다는, 칭찬이 포함된 징징이다. 아마추어 상대로 저러는 박찬호의 승부욕이 과하다고 하면 모를까, 저걸 갖고 성차별 운운하는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83] 당시 자기 월급을 꼬박꼬박 한국 가족한테 송금한터라 박찬호 자신한테는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84] 여담이지만 박충서의 아버지 박용구는 개혁 성향의 인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기여를 한 결정적 후원자였다. 훗날 이와 관련해 시국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정희로부터 모종의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 이후 박정희가 박용구 대신 선택한 사람이 신격호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용구는 재능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아들 박충서가 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 성향의 박용구가 세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인물 중 하나가 허문도. 이래저래 박찬호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집안에 사위로 들어간 셈.[85] 흑마늘을 훅마늘로 적어놨다.[86] 굳이 따지면 한국팀과 이승엽을 모티브로 한 선수가 비열하게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박찬호를 모티브로 한 선수는 비열한 건 아니다. 얼굴이 완전 엑스트라 악역 1 수준인 게 문제지만 작중 취급은 일본팀에게도 크게 인정받는 모습. 경기 내용도 사기캐 토시야에게 허용한 솔로 홈런을 제외하면 실점이 없었고(7이닝 1실점은 확정이나 이후 이닝까지 던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엽과 달리 비겁한 수를 쓰는 묘사도 없다. 애니에서는 6기에서 한번더 등장, 고로와 맞대결을 펼치는 화가 있다.[87] 가장 어린 선수는 당시 다저스의 동갑내기 팀 동료 이스마엘 발데스였다.[88] 1위는 당시 애리조나 소속의 랜디 존슨. 무려 347개.[89] 애리조나 전 8이닝, 샌디에이고 전 17이닝, 밀워키 전 7이닝, 샌프란시스코 2회 실점까지 무실점 피칭을 펼쳤으며 당시 타고투저시대에 나온 값진 기록, 참고로 ML최고기록은 오렐 허샤이저의 59이닝 무실점[90]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91] 랜디 존슨은 이닝 2위, 삼진 1위였고 커트 실링은 이닝 1위, 삼진 2위였다.[92] 자책점 2점은 당시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허용한 실점이었고 이후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13이닝 무실점 3세이브 활약을 펼쳐 합법적 병역브로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93]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힌 사연도 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 전 행사로 당시 유학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 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94] 사실 옆으로 안 차고 돌려차기했다고 밝혔다.[95] 레전드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는것이 이 당시 주니어는 자신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상태였고 따라서 레전드 선수의 마지막 올스타전이 된 것이었다. 현지에서도 다들 박찬호가 이 홈런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했고.[96] 민훈기 기자의 저서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에 따르면 박찬호는 올스타전 2일전에도 모두가 큰 한방을 노리고 있을테니 변화구의 효과가 클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고, 올스타전 이후 사석에서도 "변화구로 승부를 시작할 예정이었다.분명히 직구를 노리고 있을 테니 커브를 던지면 헛스윙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물론 고의 홈런은 투수도 타자도 불가능에 가까운일이지만 어느정도 쉬운 공을 던져줄수는 있다.아마 립켄을 맞이한 순간 노장에 대한 예우로 마음을 바꾼 것 같다.[97] 참고로 양대리그 연속 힛바이피치 기록 1위는 박찬호가 최초이고 심지어 2002년은 145.2이닝 소화로 규정이닝 미달이었다.[98] 투수치고는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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