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몬데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99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신인왕 | ||||
마이크 피아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라울 몬데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노모 히데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199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대런 루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마퀴스 그리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 | 라울 몬데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스티브 핀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마퀴스 그리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스티브 핀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마퀴스 그리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199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스티브 핀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마퀴스 그리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 | 라울 몬데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앤드루 존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43번 | ||||
데이브 핸슨 (1990~1991) | → | 라울 몬데시 (1993~1999) | → | 케빈 엘스터 (2000) |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번호 43번 | ||||
존 허덱 (1999) | → | 라울 몬데시 (2000~2002) | → | 스캇 캐시디 (2002) |
뉴욕 양키스 등번호 43번 | ||||
테드 릴리 (2002) | → | 라울 몬데시 (2002~2003) | → | 제프 넬슨 (2003)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등번호 43번 | ||||
미겔 바티스타 (2001~2003) | → | 라울 몬데시 (2003) | → | 브랜든 빌라포테 (2004) |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43번 | ||||
마크 윌리엄스 (1999~2003) | → | 라울 몬데시 (2004) | → | 윌리스 로버츠 (2004) |
애너하임 에인절스 등번호 43번 | ||||
훌리오 라미레즈 (2003) | → | 라울 몬데시 (2004) | → | 매튜 브라운 (2007~2008)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43번 | ||||
트래비스 스미스 (2004) | → | 라울 몬데시 (2005) | → | 제이 파웰 (2005) |
라울 라몬 몬데시 아벨리노 Raúl Ramón Mondesí Avelino | |
생년월일 | 1971년 3월 12일 ([age(1971-03-12)]세) |
국적 | [[도미니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산크리스토발 |
학력 | 라세오 마누엘 마리아 발렌시아 |
가족 | 아들 아달베르토 몬데시 |
신체 | 180cm / 91kg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8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자유계약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3~1999) 토론토 블루제이스 (2000~2002) 뉴욕 양키스 (2002~200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3) 피츠버그 파이리츠 (2004)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4)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2005) |
기록 | 30-30 클럽 (1997, 1999) |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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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現 도미니카 공화국의 정치인. 1990년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스타플레이어였으며, 30-30을 두 차례 달성하는 등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5툴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으나 개인의 인성 문제나 자기관리 실패, 복잡한 사생활 등으로 인해 몰락하면서 본인의 재능을 오랫동안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2. 선수 생활
1988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한 몬데시는 1994년부터 팀의 주전 우익수로 자리잡아 타율 0.306, 16홈런 56타점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오른다.[1] 이듬해인 1995년에는 타율 0.285, 26홈런 88타점 27도루의 성적으로 생애 첫 올스타전 출장과 더불어 골드글러브까지 수상했고, 1996년에도 타율 0.297, 24홈런 88타점으로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팀의 간판선수로 자리잡게 된다.1997년에는 타율 0.310, 30홈런 87타점 32도루라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며 30-30 달성과 더불어 두 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98년에는 타율 0.279, 30홈런 90타점의 성적을 기록했고, 1999년에는 타율 0.253, 33홈런 99타점 36도루로 두 번째 30-30 달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1999년을 끝으로 감독과의 불화, 훈련 태만 등의 이유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된다.[2] 트레이드 이후에도 그럭저럭 제몫을 하긴 했지만 그의 기량은 다저스 시절에 보인 모습에 비하면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후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있었던 2004년에는 시즌 초 개인사를 이유로 팀을 무단이탈해 고국인 도미니카로 돌아가버리며 파문을 일으키는 등 제대로 몰락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몬데시는 2005시즌을 끝으로 스타 출신으로는 조금 이른 나이인 34세에 은퇴하게 된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73/출루율 0.331/장타율 0.485, 1589안타 271홈런 860타점 229도루.
3. 선수로서의 평가
말년의 저니맨 생활에도 불구하고 통산 OPS .815라는 괜찮은 기록과 20-20을 무려 6번이나 남긴 강타자였으며, 젊을 때는 무지막지한 강견을 바탕으로 골드글러브를 두 번 수상한 뛰어난 우익수이기도 했다.[3] 스테로이드 파문에서도 연루된 바 없기에 약물 논란에서도 자유로운 편.문제는 멘탈이었는데, 자기 관리 실패 및 방탕한 사생활과 더불어 선수로서 훈련에 임하는 자세 등 여러 단점이 있었고 결국 여기에 발목을 잡히며 몰락, 선수로써는 한창 전성기를 보낼 30대 중반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가 가진 재능을 100%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후일 도미니카를 대표하는 타자가 된 블라디미르 게레로 못지 않은 성적을 남겼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보다도, 대한민국에서는 박찬호의 특급 도우미로서 유명. 이 때는 정말 다저스가 크보 제9구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고 이 때의 선수들이 펼친 맹활약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서, 201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대충 30대 초중반이 넘은 성인 남성들은 라울 몬데시와 더불어 마이크 피아자, 게리 셰필드, 숀 그린, 채드 크루터, 에릭 캐로스, 제프 쇼(...) 등의 선수들은 이름만 대도 감탄 또는 한탄을 내뱉으며 박찬호가 나왔을 때 얼마나 잘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몬데시, 셰필드, 그린의 경우는 한국 오면 박지성 친구 에브라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찬호 도우미로 인정받고 있다.[4] 하지만 다저스 역대 세이브 2위에 올라있는 제프 쇼지만 그는 박찬호 경기에 올라와서 심심하면 불장난을 친 원조 불쇼일 뿐이고(...)[5] 마이크 피아자는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저 타격만 잘했을 뿐 볼배합은 최악이고 도루저지도 못하는 소녀어깨 포수였을 뿐이다.(...)[6]
4. 선수 은퇴 이후
선수생활이 끝난 후에는 과거의 나태했던 선수생활을 반성하며 정당활동에 뛰어들어 도미니카 혁명당원으로 활동했다.2010년에는 고향 산 크리스토발 시에서 6년 임기의 시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는 바람에 무려 징역 8년 형을 선고받는다.
5. 기타
박찬호의 도우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박찬호의 미국진출 초기 SBS 개그프로그램의 코너였던 '찬호 파크'에서도 등장. '라울 뭔데씨', 남희석이 연기했다. 역할은 전형적인 바보역할.엄청난 강박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운동선수들은 징크스가 심해지다보니 강박증으로 심화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장훈. 예를 들어, 덕아웃에서 자신의 야구가방을 가지러 갈 때 딱 n발자국에 집으러 가야 하는데, 중간에 스텝이 꼬이거나 거리가 안맞아서 숫자가 안 맞는 경우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가 걸어오는 등. 야구선수의 징크스를 다룬 메이저리그 다큐멘터리에 관련영상이 남아 있다.
멘탈이 안 좋았던 어쨌던 1990년대에 다저스에서 신인왕을 차지하는 등 강타자로 활약한 점이 있어서 다저스 팬들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2007년에 몬데시가 다저스타디움을 방문했을 때에는 팬들이 기립박수를 치면서 라우우우우우우우우우울!!!을 외치기도 했다.
아들인 라울 몬데시 주니어와 아달베르토 몬데시도 야구선수다. 특히 아달베르토는 2011년 도미니카를 비롯해 국제 자유계약 선수 시장에서도 수준급으로 평가받던 16세 유격수 유망주로서 7월 말에 200만 달러라는 웬만한 드랩 1라운더 급의 계약금을 받고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했다. 그리고 2015년 월드 시리즈의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엔트리에 등록이 되면서 역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월드 시리즈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가 되었다. 10월 30일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5회초 대타로 나왔지만 삼진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로열스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거머쥐면서 아들은 월드 시리즈 한 타석만 나와 삼진을 당하고서도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거머쥐었다. 아버지는 1535경기를 뛰면서 얻지 못한 걸 아들은 한 타석만 나오고 얻었다. 그런데 아달베르토가 금지약물 복용으로 징계를 받게 되었다. 다만 감기약에 금지약물 성분이 있는 걸 모르고 복용했다는 주장이 입증되어 출장정지는 80경기가 아닌 50경기. 참고로 아달베르토가 데뷔 초에는 Raul Mondesi Jr. 을 등록명으로 한 적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헷갈리기도 하는데, 1992년생 친형이자 전직 마이너리거 라울 몬데시 주니어가 따로 있고, 1995년생 동생 아달베르토 몬데시(전 등록명 라울 몬데시 주니어)가 여기서 언급되는 메이저리거이다. 2019년 기준으로 친형은 야구를 은퇴했으며, 아달베르토 몬데시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주전 유격수이다.
여담으로 한화 이글스가 2005년에 몬데시를 영입하려 추진했지만 실패했다고.
[1] 1992년부터 이어진 다저스의 내셔널리그 신인왕 5연패 대기록에서 세 번째 수상자였다. 5명의 순서는 1992년 에릭 캐로스 → 1993년 마이크 피아자 → 1994년 라울 몬데시 → 1995년 노모 히데오 → 1996년 토드 홀랜스워스.[2] 참고로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그 유명한 숀 그린이었다.[3] 거의 현 시대의 스즈키 이치로나 추신수, 제프 프랑코어, 블라디미르 게레로 같은 리그 정상급의 우익수 송구를 자랑했다고 한다.[4] 현역 야구선수로 비교하자면 류현진과 푸이그 사이로 보면 적합하다.[5] 그러나 제프 쇼 문서에도 설명했듯이 이 부분은 심하게 과장되었다.[6] 이 부분은 박찬호와의 호흡 때문에 괜히 피아자의 수비력이 너프되어보이는 것도 있다. 마이크 피아자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