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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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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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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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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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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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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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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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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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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소속 선수
<rowcolor=#FFFFFF> 포지션 이름 역할 등번호
- 김인식 감독 -
- 김윤겸 수석코치 -
- 유지훤 타격&수비코치 -
- 송진우 투수코치 -
- 김구라 단장 겸 해설 -
- 성승헌 캐스터 -
- 이찬원 캐스터 -
외야수 양준혁 선수 10
외야수 윤현민 선수 11
내야수 윤석민(타자) 선수 13
내야수 안경현 선수 16
내야수 채태인 선수 17
투수 이동현 선수 18
포수, 외야수 홍성흔
C
주장/선수 22
투수 윤석민(투수) 선수 24
포수, 내야수 최준석 선수 25
포수 현재윤 선수 27
투수 김환 중계/선수 29
내야수 박종호 선수 31
투수 송창식 선수 38
투수 니퍼트 선수 40
내야수 마해영 선수 49
투수 봉중근 선수 51
내야수 김태균 선수 52
외야수 이대형 선수 53
투수 유원상 선수 55
투수 이한진 선수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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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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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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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팀 - 양학선 류현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 김인식 박세리 이승엽 신지애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류현진 이동국 원동중학교 드림야구팀 안나린 이용훈
2024년 2025년 2026년 2027년 2028년
-
}}}}}}}}} ||


파일:2000 시드니 올림픽 로고.svg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코치)
2000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감독)
2002


파일:WBSC 프리미어 12 엠블럼.svg
2015 프리미어 12
우승 감독
2015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86 1987


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95 2001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양승호
(1983~1985)
김인식
(1986~1989)
서정환
(1990~1994)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1번
팀 창단 김인식
(1990~1992)
김성근
(1996~1999)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81번
김성근
(1984~1988)
김인식
(1995~2003)
강인권
(2007~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81번
이희수
(1989~2000)
김인식
(2005~2009)
이종두
(2010~2012)
}}} ||
}}} ||
파일:김인식 감독.jpg
<colbgcolor=#fff,#131313> 김인식
金寅植 | Kim Insik
출생 1947년 5월 1일[1] ([age(1947-05-01)]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돈암초등학교 (졸업)
배문중학교 (졸업)
배문고등학교 (졸업)
신체 176cm, 76kg[2], A형[3]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크라운맥주 야구단 (1965)
해병대 야구단 (1966~1968)
한일은행 야구단 (1969~1973)
지도자 배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3~1977)
상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8~1980)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1982~1985)
해태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1986~1989)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0~1992)
OB-두산 베어스 감독 (1995~2003)
한화 이글스 감독 (2005~200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 2006, 2009, 2015, 2017)[4]
종교 무종교개신교[5]
가족 아내 안명혁, 슬하 1남 1녀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
경력 KBO 육성위원장 (2003~2004)
KBO 규칙위원장 (2010~2016)
KBO 기술위원장 (2012~2017)
KBO 총재 특별보좌 (2017)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장 (2010)
유튜브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김인식TV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비판5. 여담6. 종합적인 평가7. 향후 행보
7.1. 인터넷 방송
8. 역대 감독 성적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우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도전에 나섭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정식 중

대한민국야구인.

1946년 5월 1일 출생. 해병대한일은행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26세의 나이에 조기 은퇴했다. 이후,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거쳐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쌍방울 레이더스(1991~1992) - OB·두산 베어스(1995~2003) - 한화 이글스(2005~2009)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9년 이후 2선으로 물러나 KBO의 기술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 감독'과 '킬인식'이란 상반된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평가가 심히 엇갈리는 감독이다. 김응용, 김성근과 함께 1990년대~2000년대 프로야구판을 휘어잡았던 "야구판 3김"[6] 중 한 명으로 셋 중에서는 김인식이 막내다.

OB-두산 시절에는 구단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무려 9년(1995~2003)을 재임하며 2번의 우승을 일궈내고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며 미라클 두산이란 팀컬러를 만든 감독이다.[7] 그 후 2004년부터 맡았던 한화 시절에는 부임 초반 3년은 믿음의 야구와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를 발굴하며 이를 기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려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로는 구단의 육성 홀대의 기조에서 과한 투수 혹사 및 노장 선호, 군입대 선수 관리 미비 등의 올바르지 못한 팀 운영으로 암흑기를 초래시킨 명과 암을 지닌 감독으로 평가된다.[8] 그리고 이어지는 노장 감독 잔혹사의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9] 그러나 한화의 경우 2군이 훈련장도 2014년에야 완성되었고, 지원도 열악한 팀이었던데다 이후 김성근 감독이 재임해 암흑기가 연장되는 동안 전권은 없었고 건의가 프런트에게 무시되던 감독이었던 면이 부각되며 일부에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파일:193987_01.jpg

그리고 통산 5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 이상의 성적 4번[10]을 거둔 감독으로, 비록 2017년 WBC 1라운드 탈락 참사로 마지막은 좋지 않았지만, 그 동안 쌓아온 성공적인 커리어들만으로도 베이징 올림픽 전승 우승의 김경문 감독과 더불어 대표적인 국제전 감독이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009년까지 980승 45무 1032패 승률 .487.

2. 선수 경력

1965년 실업 야구 팀인 크라운맥주를 시작으로 1967년에서 1968년까지 해병대 야구부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나 해병대 시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25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이 당시만 해도 국내에 스포츠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하던 시절이라 피칭 뒤에 아이싱은 커녕 반대로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면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찢어지고 해진 어깨의 모세혈관이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없다. 한일은행 당시 김영덕, 김응용 등 훗날 프로야구 1세대의 명감독들이 한 팀에서 뛰었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선수 경력에 대한 본인의 회상이 최근 본인 유튜브 채널에 올라왔다. #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인식/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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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비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인식/비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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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여담

파일:attachment/김인식/표정변화.jpg
* 표정변화 짤이 매우 인상적인데, 무표정만 나오거나 거기에 가끔 한두개만 환한 표정을 보이는 스티븐 시걸, 홍명보, 양상문, 오승환 등 다른 짤들과는 달리 이 쪽은 우거지상도 포함되어 참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짤이 기사에 실렸다. 그리고 이 짤을 김인식 본인에게 보여주면서 클락추승우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물어봤는데 단순히 잘 못 쳐서라고 답했다.[11] 답변 영상은 오리고기 문단의 영상 링크에 같이 나온다.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img_05.png
* 모나지 않은 성품에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가 좋으며, 입이 거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선수들에게 욕설도 잘 안한다.[13][14] 그래서인지 야구계에선 선후배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 TV카메라 앞에서도 늘상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있고 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15]이라 선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오히려 두산 감독 시절의 팀 컬러에서 알 수 있듯 국내 출신 감독 가운데는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자율을 부여하는 감독이며, 두산의 후임 감독인 김경문은 김인식 감독의 자유방임에 익숙한 팀컬러를 바꾸기 위해 상당한 내부진통을 겪기도 했다. 또한 이글스의 전설 정민철이 최악의 시즌[16]을 겪은 직후 절망에 빠져있던 차에, 김인식이 새 감독으로 한화에 부임했다. 캠프에서 심하게 의기소침해있던 정민철에게 0승드립을 치며[17] 장난스레 다가가 훈련일지용 공책을 선물해주며 다시 잘 해보라고 격려해주었고, 새 감독이 자신을 선발투수 라인에서 뺄 수도 있다는 걸 걱정하던 정민철이 김인식의 믿음에 용기를 얻게 되어 의지를 가지고 훈련하게 되었고, 결국 재기에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는 이글스팬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선수 포텐셜을 굳게 믿는 유형의 지도자.


6. 종합적인 평가

위의 장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한화 이글스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문제들로 여러모로 한화 팬들한테는 평판이 좋은 축에는 못 든다. 그러나 전체 커리어로 보면[20] 결코 무능한 감독이 아니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명장이다. 당장에 한국시리즈 2회 우승 - 2회 준우승의 커리어를 기록하고 있으며[21],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5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 이상의 성적 4번[22]을 거둔 감독으로 2017년 WBC 1라운드 탈락 참사를 제외하고 국제전에서 또한 괄목한 커리어를 기록한 명장인 셈.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 시절에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중재역이자 투수 육성의 역할을 맡아 해태 왕조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며, 감독 생활 초창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광환, 김용희 등과 함께 자율훈련과 분업화로 대표되는 메이저리그식의 신사고(新思考) 야구를 주도했다. 1994년 선수이탈 파동으로 사분오열된 팀을 추스려 우승으로 이끈 점 또한 덕장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80년대 박영길이 내세웠던 빅볼 노선[23]을 이어받아 세밀한 작전보다 타자의 장타력을 극대화하는 공격야구를 추구, 관리야구와 스몰볼 중심이었던 한국야구의 스타일 다양화에 공헌했다. 베어스 시절의 트리오나 이글스의 데이비스(클락)-김태균-이범호(-김태완) 등 항상 중심타선 만큼은 파괴력있는 거포들로 대부분의 시즌 동안 평균 이상의 득점력과 장타력이 있는 타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에서 타선관리 능력은 손에 꼽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단, 한화는 그가 오기 전부터 뻥야구 구단이었다. 한화의 뻥야구 컬러를 김인식이 만든건 아니다. 하지만 장종훈, 강석천의 은퇴와 송지만의 이적, 이영우의 입대로 인해 생긴 타선의 공백을 잘 다듬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한 부분.

투수 육성에도 나름 노하우가 있어서 페넌트레이스 중반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커버하는 즉시전력감의 불펜투수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지만, 두산 시절이나 한화 시절이나 키워낸 투수를 너무 과하게 소모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투수 출신 감독 치고는 타자를 보는 안목도 좋은 편이고 한화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퇴색되긴 했지만 두산에서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한화에서의 말년에는 08년에 기회를 붙잡은 김태완을 제외한 한화의 빅뱃 유망주들은 그의 재임기에 2군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것도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저 그런 베테랑 선수들인 이도형, 윤재국, 김인철 같은 선수들에게 밀려서.[24]

김인식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최대한 성적을 올릴 수도 있고 리빌딩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구단이 성적을 원하는지 리빌딩을 원하는에 따라 맞추어주는 편인데, 쌍방울에서 지원이 없다고 때려치우고 나오자 같이 일했던 코치들이 다 해고당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25] 그 이후부터는 최대한 구단의 요구에 맞추어주는 편이다. 한화 구단에서 가을야구를 선택하지 않고 리빌딩을 요구했다면 OB(현재 두산)에서 꼴찌까지 하면서 리빌딩을 했듯이[26] 한화도 젊은 선수 위주로 투수를 갈아넣지 않고 리빌딩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화로 홍성흔이 첫 FA때 두산에서 찬밥대우를 받자 한화에 영입 요청했으나 어깨가 안 좋아 포수로 못쓰는데[27] 굳이 왜?라는 답변이 오자 지명타자나 외야로 쓸 생각이었지 포수로 쓰겠냐며 어이없어하면서 포기했다고 한다.[28]

비슷한 연배나 레벨의 다른 감독에 비해 통산 승률이 낮은 편인데(.487), 이건 김인식 감독이 맡았던 팀들이 대부분 재정과 인프라 지원 면에서 최하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우선 처음 감독을 맡은 팀이 신생팀이었기에 선수층이 빈약했던 쌍방울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말 다했다고 볼 수 있고 김인식 시절의 두산은 그룹 구조조정의 여파로 모기업이 도무지 구단에 돈을 쓸 여력이 없어서 매년 주력 투수와 타자를 팔아 구단 운영비에 보태는 팀이었다.[29] 심지어는 김동주까지 KIA 타이거즈에게 유동훈+현금 30억원으로 트레이드하려다 정보가 새나가서 포기했을 정도였다.[30] 적어도 두산 시절의 김인식은 열심히 구단이 선수팔이를 하는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꾸려낸 팀으로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라도 평가받아야 한다. 김경문 감독 취임 이후 빠르게 세대교체가 된 두산 팬덤에서는 골수팬이 아닌 이상 새로 팬덤에 가세한 팬들은 거의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단기전의 마술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995년 우승 이후 2000년대 초까지는 오히려 단기전 성적이 상당히 저조했지만[31] 2001년에 삼성을 상대로 업셋으로 우승하면서 단기전 능력을 드러냈다. 이후의 포스트시즌에서는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정규리그 성적이 뒤졌다는 건 애초에 팀의 전력이 뒤진다는 뜻이기에 업셋이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01년 한 번이라도 업셋우승을 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 한화에서도 2005년엔 SK, 2006년엔 현대를 업셋하고 3년간 플옵에 진출해서 한번도 업셋을 당하지 않는 등[32] 그 나름의 단기전 실력은 보여줬다. 그리고 만들어준 전력을 가지고 치르는 4번의 국가 대표감독에서 단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2009 WBC, 2015 프리미어12) 단기전에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한화에서의 안 좋은 말년으로 인해 한화 팬들에게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거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 물론 이 시기에 한화 선수층이 고갈된 건 사실이고, 결국 2012년까지도 한대화 감독이 재임 기간 내내 리빌딩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그 리빌딩조차도 절망적으로 얇아진 선수층에 선수들 자체의 기본기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2군 구장도 없는 판이니 유망주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팀을 손봐야 할지 실로 난감할 지경이었다.

다른 감독에 비해서도 유난히 원한 맺힌 장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는 세대교체를 등한시하여 팀 체질을 악화시킨 부분에서 흑역사로 취급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지만, 이후 김인식 감독보다 더 화려한 경력의 김응용 감독이 9년만에 복귀해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꽤나 많이 주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송창식안영명을 갈아마시며 9-9를 찍고 킬끼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남기고 떠났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부임 이후 김인식 부임 시기에는 상상 못했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2016년, 백인천 수준으로 몰락해버려서 김인식 감독은 어쨌든 짜내는 거라도 잘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김인식 관련 다큐

그밖에 김인식 감독의 또 하나의 장점으로는 언론에 대해 굉장히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언론을 대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언론의 효율적인 활용은 좋은 능력이다. 일단 충실하게 기사거리를 제공하면서 기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사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성근 감독처럼 어그로를 끄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반작용으로 언론의 과대평가라는 말도 나왔다. 실제 한화 시절의 실정이 가려진 원인도 언론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준 덕분에 일정 부분 가려진 덕도 있다.

여담으로, 노리타들이 툭하면 들고 나오는 감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김인식에 비하면 김성근의 혹사는 새 발의 피다, 김인식 시절에 기반을 개판으로 쌓아놔서 그런 거다, 그런 건 김인식 시절에나 하던 거다 등등의 레퍼토리. 김인식 감독을 들먹여 김성근의 잘못을 가리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아무리 한화 시절 김인식의 실책을 크게 잡아도 야구 인생 내내 선수들을 갈아넣고 야구 외적 요소로까지 선수들 억압한 김성근보다는 훨씬 낫다. 게다가 김인식 감독이 안영명, 마정길 등에 가한 혹사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5~16년의 살려조가 당한 것의 2/3 수준에 그친다.[33] 게다가 혹사의 유일한 목적이자 혹사를 정당화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팩터인 성적 면에서도 6년간 단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한 김인식>>>>>2년간 수백억 지원받은 김성근이었다.[34]

7. 향후 행보

2011년 8월 OBS의 '명불허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야구감독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통산 980승을 거둔 상태에서 불명예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1000승을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는 듯. 그러나 감독의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작금 야구계에서 기존의 낡은 야구관을 벗어나지 못해 팀을 망쳤던 환갑이 훨씬 넘은 노감독이 새로운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그가 현역으로 감독을 하던 시절과 현재는 환경이 변해도 너무 변했고, 또한 한화 감독 이후 1~2년도 아니고 5년 넘게 현장을 떠나서 쉬어버린 터라 실전 감각에 문제가 많을 게 뻔하다.

유능하지만 구세대에 속하는 노 감독이 현장을 오래 떠났다 복귀해서 실전 감각에 문제를 드러낸 사례는 상당히 많다. 2002년까지 SK 감독으로 있다가 3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6년 롯데 감독으로 돌아왔던 강병철은 실전감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며 과거의 승부사 기질마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보였고, 8년 쉬다 온 김응용 감독은 한화 감독 기간 동안 어메이징한 운용으로 한화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35] 김성근이 SK에서 해임된 후에 계속 여러 프로팀 감독들로 물망에 오르다 결국 한화 감독에 선임된 것도 원체 열성팬이 많은 양반이기도 하지만, 독립야구단이라도 맡아서 현장에 계속 머무르며 감을 유지했다는 점도 크다.

그러나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에서 온갖 불리한 요소들을 떨쳐내고 승리, 결승에서는 미국까지 꺾고 결국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금 명장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6년 9월 5일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된다. 그러나 16 시즌 세이브왕 김세현을 거르고 임창용, 장시환, 도박 징계를 아직 받지 않은 오승환을 뽑고 두산 출신 선수나 노장들을 과하게 선호하며 야빠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그리고 결국 1라운드에서 1승 2패로 탈락하면서 고개를 떨궜다. 2승 1패를 예상했던 야구팬들은 홈런왕 최정, 김세현 등을 뽑지 않은 결과라며 자업자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6] 마지막 3위 결정전에서도 상대적으로 약팀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단기전에 강하다는 긍정적 이미지도 많이 퇴색됐다. 김응룡처럼 국대 감독으로는 더 이상 못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당시 국대의 상황이 워낙 처참했기 때문에 아무리 김인식이라도 딱히 쉽사리 해결될 처지가 아니었다.

2022년 3월 29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MBN 예능 빽 투 더 그라운드에서 '국민감독' 역할로 고정 멤버로 합류했다.

2023년 4월 1일 잠실에서 열린 두산 vs 롯데 개막전에서 시구자로 초청되었다. 마운드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오른손과 오른팔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현역 시절 우완투수였음에도 왼손으로 시구를 했다. 아무래도 예전에 한 번 앓았던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해 거동이 꽤 불편한 듯 보였다. 물론 김인식 본인은 평소 근력 강화 운동을 거르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서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202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김응용, 김성근 전 감독과 같이 시구를 했는데, 위에 언급된 개막전 때처럼 다소 불편해 시포를 맡은 두산 시절 제자 홍성흔이 부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4년 7월 22일에 열린 한일 드림 플레이어즈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지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전히 거동이 다소 불편하다는 점이 알려졌다. 해당 이벤트 게임을 주최한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김 감독의 이동 편의를 위해 휠체어 제공을 제안했지만, "어떻게든 그라운드로 걸어갈 것이다."라며 닛폰햄 측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7.1. 인터넷 방송

2019년 9월 2일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김인식의 국민야구'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TV에서 인터넷 방송을 한다. KBO 리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아마야구, WBSC 프리미어 12 등 국내외 야구 이슈를 주 소재로 삼는다고 한다. 각종 썰방송도 할 계획이라고 한다. # 강병규[37], 이혜천, 김태형, 박철순, 김성근, 홍성흔 & 정수근[38] 편도 업로드됐다. 출연 게스트들이 빵빵하며, 출연 대기 중인 야구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로드된 동영상의 댓글에 제자 박명환도 댓글을 남기고 갔다.[39]

8. 역대 감독 성적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95 2001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1 쌍방울 레이더스 126 52 71 3 6위 -
1992 126 41 84 1 8위 -
통산 252 93 155 4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95 OB 베어스 126 74 47 5 1위 우승
1996 126 47 73 6 8위 -
1997 126 57 64 5 5위 -
1998 126 61 62 3 4위 [40]
1999 두산 베어스 132 76 51 5 1위[41] [42]
2000 130 73 57 0 2위[43] 준우승
2001 133 65 63 5 3위 우승
2002 133 66 65 2 5위 -
2003 133 57 74 2 7위 -
통산 1165 576 556 33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2004 한화 이글스 2 1 1 0 7위 -
2005 126 64 61 1 4위 [44]
2006 126 67 57 2 3위 준우승
2007 126 67 57 2 3위 [45]
2008 126 64 62 0 5위 -
2009 133 46 84 3 8위 -
<colbgcolor=#ffea92> 통산 639 309 322 8
총계 2056 978 1033 45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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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으로는 1947년 생이지만, 실제는 1946년 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기사에서 하일성이 김인식의 고등학교 2년 후배라고 한다. 또한 김인식 본인도 1946년 생인 강병철과 친구로 지내고 있다.[2] 네이버 프로필 기준[3]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7/01/2005070170220.html[4] 2002는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6, 2009, 2017은 WBC, 2015는 2015 WBSC 프리미어 12.[5] 원래는 무종교인이었으나, 2005년 조용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개신교에 입교했고, 2009년에는 용인 이레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명됐다.[6] 세 사람은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각자 다른 팀에서 감독을 역임하며 경쟁했다. 이 기간 중 김응용은 해태 타이거즈(1983~2000)-삼성 라이온즈(2001~2004), 김성근은 삼성 라이온즈(1991~1992)-쌍방울 레이더스(1996~1999)-LG 트윈스(2001~2002), 김인식은 쌍방울 레이더스-OB·두산 베어스 감독을 맡았다. 202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 세 사람이 나란히 시구를 했다.[7] 팀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만든 김태형 감독과 함께 영구결번 감독으로까지 언급된다.[8] 다만 이는 당시 구단의 운영 기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데, 취임 직전의 2년 동안 11명의 신인만을 받았고, 2012년까지 2군 구장조차 없을 정도로 선수 육성이 어렵던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FA에도 적극적인 팀이 아니라는 점 등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할 부분.[9]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상기된 김인식, 김응용, 김성근 모두 타 팀 프로 감독으로서는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지만, 한화에서는 시대에 뒤처진 야구로 인해 말년의 커리어가 실추된 점이 똑같단 공통점들이 있다.[46] 사실 비단 이 3명 말고도 빙그레 시절의 명감독이었던 김영덕을 비롯하여 LG의 신바람 야구를 불러일으킨 이광환롯데의 2회 우승을 달성한 강병철 등 명성이 자자한 여러 감독들이 거쳐갔지만, 김영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한화에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성공했던 김영덕도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번번히 물을 먹으면서 콩그레의 이미지를 굳혔지만...[10]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15 WBSC 프리미어 12 두번의 우승이 포함되어 있다.[11] 어디까지나 추승우를 김인식 감독이 데려왔다고는 하지만 영입한 이후 추승우가 거둔 성적이 썩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2008 시즌에는 0.245, 2009 시즌에는 0.233의 타율을 거뒀으니. 클락은 2008시즌 전반기만 해도 18개의 홈런과 2할 중후반대의 타율, 23개의 도루가 더해지며 타선의 활력소로 활약했지만, 후반기에는 OPS .498에 홈런은 고작 4개를 더하는 수준으로 추락하며 팀의 포스트시즌 탈락의 원흉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12] 이유야 다들 바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김인식이 OB와 한화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13] 박명환야구TV에서 게스트로 초대된 정수근이 언급하길 바보같은 놈이 가장 심한 욕설이라고. 물론 정수근 증언 영상을 직접 보면 '새끼'까지는 나오는데, 실제로 김인식이 한 말인지 정수근 본인 말투가 섞인 건지는 애매하다. 물론 김인식 본인이 했다 해도 정수근의 성대모사 톤상 거칠지 않고 안타까운 감정의 말투였다. 그것도 저 욕했던 상황은 야구의 '레드라이트 도루'로 인한 아웃, 즉 경기 중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감독 지시 위반 도루자 상황이었다. 야구계 폭력이 흔했던 80년대는 물론 90년대까지도 선수가 고의로 감독 지시 내용을 무시하고 정반대로 경기했다가, 아웃되고 팀이 지면 어두운데 끌려가서 뺨을 맞거나 선수단 전체 집합 후 엎드려 뻗쳐 있기 등의 기합을 당하기도 했다. 요즘이면 감독이 최대로 분노해도 2군 가는걸로 끝이지만, 과거에는 2군을 가기 전에 반드시 뺨이건 엉덩이건 맞고 갔고, 지도자의 지시를 위반한게 사실이긴 하니 선수들도 항명도 못했다. 그런데도 80년대 지도자 출신이 저정도 욕만 하고 2군도 안 보냈으면 화를 거의 안 내고 산 것이다.[14] 물론 김인식 감독이 폭력과 거리가 먼 덕장이었다고는 하나 선수들 사이의 위계질서 같은 것은 있어서 주장이자 주전 포수였던 김태형이 정수근이나 박명환의 귀싸대기를 때리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 쪽은 2010년대에 감독이 된 이후에도 선수들에게 귀싸대기를 때려서 구설수에 올랐다.[15] 박철우백인호가 그리 연차가 높지 않던 시절(87~89년 사이)에 술을 먹고 취해서 동국대 시절 은사이자 팀 수석코치였던 김인식에게 실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자식들 또 술 먹었네. 담뱃불 꺼."라고 야단만 치고 이 일을 김응용 감독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함구했다고 한다.[16] 04시즌 0승 7패 평균자책점 7.67[17] 이는 정민철이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던 시절 자신의 선수시절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던 레파토리였는데, 훗날 2015년 6월 18일 한화 경기의 특별해설로 김인식이 나와서 정민철과 공동 해설을 했을때 정민철이 다시 언급하며 사실로 밝혀졌다. 2004년말 마무리 훈련 당시 실제로 김인식이 정민철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야 민철아, 너 진짜로 빵승이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민철의 직접 증언으로는 자만 세게 발음했다고 하며, 그 빵승이라는 발음이 재미있으면서도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져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캐스터 정병문이 왜 그러셨냐고 묻자, 김인식은 "그때 우리 정민철 선수가 팀에 꼭 필요한 투수인데, 계속 의기소침해 있길래 제가 걱정이 돼서 말을 걸어봤던 거였죠"라고 답했다. 근데 막상 김인식은 마무리 훈련 후 12월에 쓰러졌다가 2005년초에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복귀했다.[18] 특히 쌍방울 창단 첫 해(90년)부터 교통사고가 나서 운전기사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OB 감독 시절(98년)에도 해태와의 원정경기를 위해 이동하던 도중 교통사고가 났다.[19] 대신 김성한이 기술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다가 선수단 엔트리를 작성하거나 전지훈련에 동행하면서 아예 감독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20] KBO 통산 감독 다승 3위에 들어간다. 1위인 김응용이 감독생활 24년 동안 1,554승을 거뒀고, 2위 김성근이 23년 동안 1,384승을 거뒀다. 이 두 감독 외에 통산 1,000승을 거둔 감독이 아예 없으며, 3위 김인식과도 격차가 상당히 크다. 3위 김인식은 18년간 980승을 거뒀다. 그 밑으로 4위 김재박(14년간 936승), 5위 강병철(14년간 914승), 6위 김경문(14년간 896승)이 존재한다. 그리고 김경문 밑으로 7위 류중일이 있기는 하나, 둘 사이의 간격은 무려 200승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넘사벽 수준인 셈이다.[21] 당장에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기록한 감독은 2024 시즌이 끝난 기준으로도 김영덕[47] (준우승 6회), 김인식[48] (준우승 2회), 선동열[49] (준우승 1회), 강병철[50] (준우승 1회)이 끝이고 2회 이상 우승한 감독은 10회 우승의 김응용[51], 4회 우승의 김재박[52] (준우승 1회), 류중일[53] (준우승 1회), 3회 우승의 김태형[54] (준우승 4회), 김성근[55] (준우승 2회)이 끝이다.[2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15 WBSC 프리미어 12 두번의 우승이 포함되어 있다.[23] 박영길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당시 전임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컨택 위주의 끊어치는 타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다 실패하고 1년만에 해임되었고 아예 감독직에서 은퇴했다.[24] 그나마 김인식 시절에 기용된 선수 중에서 고동진이 20대로 젊은 축이었지만 2할 5푼도 못 치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한계점이 명백한 수준의 선수였다. 차라리 고동진을 안정적인 백업으로 기용하고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맞다.[25] 소위 말하는 김인식 사단인 셈인데, 임신근, 유지훤, 우경하, 강만식이 소위 말하는 김인식 사단이었다. 이 중에서 쌍방울 시절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임신근과 OB 시절에 결별한 강만식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두산 - 한화 시절에도 수석코치, 타격코치를 맡아서 함께했을 정도의 최측근이었다.[26] 성적이 낮을수록 좋은 신인을 뽑을 수 있다. 또 꼴찌를 해야 하는데 나중에 쓸 투수들을 갈아넣을 필요가 없다.[27] 더군다나 당시 한화에는 신경현이 주전포수로 버티고 있었고 백업으로는 심광호가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한화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희근, 박노민, 김기남, 최연오, 정범모 등의 포수 유망주를 쓸어담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홍성흔의 용도는 당연히,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였고 만일 홍성흔이 한화에 입단했더라면 타선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굳이 2010년에 장성호를 사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28] 당시 한화는 롯데 저리가라 할 정도로 돈을 안 쓰는 구단이었다. 심지어 롯데도 있던 2군 구장이 한화는 없었다. 홍성흔의 성격 상 두산에서 버림받고 스승이 영입 요청을 해오는데 약간 손해보더라도 한화에 갔을 확률이 높았다.[29] 1998 시즌 종료 후부터 두산은 열심히 선수들을 팔았는데, 하락세가 보였다고는 하나 3년 전 우승의 주역이었던 에이스 김상진을 6억 5,000만 원에 삼성에 현금트레이드로 내보냈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대형 포수 유망주였던 진갑용도 4억에 삼성에 팔았다. 또한 LG에 김상호류택현을 묶어서 1억원에 현금트레이드 했다. 그리고 1999 시즌이 끝나자 신생팀 SK의 창단지원선수로 강병규를 10억원에, 2000 시즌이 끝나자 강혁을 6억 7,500만원에 현금 트레이드로 보냈다.[30] 결과적으로 김동주는 지켰지만, 2001 시즌이 끝나고 이도형강인권 + 5억원에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2002 시즌이 끝난 후에는 진필중손혁 + 김창희 + 10억원에 KIA 타이거즈로 보냈다.[31] 1998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19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로 연이어 탈락.[32] 물론 두산에게 2번 다 무기력하게 스윕당한 건 조금 문제가 있다.[33] 물론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1시즌 경기수가 지금(144경기)보다 20경기 가량 적은 126경기 체제였던 건 감안할 필요가 있다.[34] 참고로 이 때 한화가 영입한 외부 FA는 내야수 김민재 단 1명뿐. 그마저도 4년간 14억이라는 적은 금액에 영입한 건데다가 은퇴 후 코치직 보장이라는 조건을 걸고 영입한 거다. 반면 김성근은 FA로만 권혁(32억), 송은범(34억), 배영수(21.5억), 정우람(84억)이라는 외부 FA들을 선물받았고 내부 FA마저 김태균 84억에 눌러앉히고 외국인 선수도 에스밀 로저스윌린 로사리오 등 몸값이 100만 달러가 넘는 선수를 사 주는 등 김인식 때와는 다르게 지원을 빵빵 해줬는데, 그런데도 성적을 못 냈다.[35] 다만 한화 감독 재임 시절 이태양최영환 등 여러 유망주들에게 지속적인 기회를 주는 등 이러한 부분에서는 후임자 김성근에 비교되고 있다.[36] 다만 김세현은 백혈병이 있어서 약을 자주 먹어야 할 정도로 국대에 들어가기 애매하고 위험한 몸상태라는 점을 감안해서 안 뽑은 것도 있다.[37] MC와 게스트 역할이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병규가 말을 상당히 잘 했고 진행도 잘 이끌어 나갔다. 강병규 본인이 선수협 대변인을 맡게 된 계기를 처음 풀었는데, 송진우는 말을 버벅거려서, 이종범과 박정태는 사투리가 심해서 본인이 맡게 됐다고 했다.[38] 입 거치기로는 야구계에서 원탑인 정수근이 욕 한 마디 안 하고 차분하게 방송한 거의 유일한 방송. 나이 차이도 30살에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과의 대담인지라 더 언행을 조심했다.[39] 일부 팬들은 박명환야구TV와의 합방을 추진해보라고 적었다. 박명환은 스승님이 불러주시면 가겠다는 입장.[40]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41] 드림리그 1위, 전체 8팀중 승률 1위[42]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43] 드림리그 1위, 전체 8팀중 승률 2위[44] SK와의 준플레이오프 승리,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45]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승리,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46] 김인식은 서술했듯이 OB-두산, 김응용은 해태, 김성근은 SK 감독 시절이 최전성기였다.[47] 한국시리즈 우승 1회(OB-82), 통합우승 1회(삼성-85)[48] OB 95, 두산 01(같은 팀이다.)[49] 삼성 2번(05-06)[50] 롯데 2번(84, 92)[51] 해태 9번(83, 86-89, 91, 93, 96-97), 삼성 1번(02)[52] 현대 4번(98, 00, 03-04)[53] 삼성 4번(11-14)[54] 두산 3번(15-16, 19)[55] SK 3번(07-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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