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21:06:28

김인식/비판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인식
1. 개관2. 재활공장장의 허상3. 믿음의 야구에 대한 비판4. 투수 혹사
4.1. 부상 선수 혹사로도 유명
5. 입영연기 문제6. 빠가 까를 낳는다7. 반론8. 그 외 다른 비판

1. 개관

김인식 감독은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5년간 재임하면서 포스트시즌 3회 진출과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부임기간 중 3년 동안의 성적만 보자면 가을야구 3회 연속 진출과 한국시리즈 준우승 1회를 기록하는 등 3년동안(2002 ~ 2004)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팀을 다시금 정상가도로 올리며 분명 준수한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과정에서 소수정예의 불펜투수 운용으로 인한 몇몇 투수의 과부하, 특유의 베테랑 선수 선호로 인한 세대교체 지연, 2006년부터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고 있는 류현진의 혹사 등 부작용도 나타났다. 결국 한화는 김인식 감독 말년인 2009년에 꼴지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16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단 한차례를 제외하고는 하위권을 전전하는 약팀으로 전락했다. 이는 KBO 역사상 가장 장기적인 암흑기 사례로, 상당히 혹독하게 암흑기를 길게 겪은 구단으로 여겨지는 2000년대, 2010년대 중반부터의 롯데나 삼성이 겪은 길이의 약 2배를 암흑기로 겪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팀 암흑기를 연 김인식 감독은 한화 이글스를 비롯한 야구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의 윤규진, 2007년의 안영명, 2008년의 마정길, 2009년의 양훈황재규는 김인식 감독 체제에서 혹사를 당했다고 거론되는 구원 투수들이다. 김인식 감독은 이 선수들을 그 전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재활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복귀시키거나,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많이 던지게 하는 방식으로 선수생명을 갉아먹었다. 투수가 부상에 가장 시달리기 쉬운 상황은 바로 짧은 기간에 많은 공을 던지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많이 던지는 행동은 투구 밸런스를 무너트리기 쉽고, 곧 무너진 밸런스로 투구를 하는 행위 자체가 몸의 부상을 가져 올 확률을 매우 높인다. 이로 인해서 한화 주력 불펜 투수들이 혹사당했다고는 하나 총 이닝이 생각보다 적은 경우가 꽤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기간에 많이 던져서 탈이 나 나머지 기간 동안 빌빌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젊은 선수뿐만이 아니라 나이든 베테랑 선수조차 투타를 가리지 않고 심각하게 혹사 or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선수들도 충분한 재활 기간을 안주고 이른바 '당겨쓰기'를 마구잡이로 감행하면서, 그 선수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문동환, 구대성, 이영우 등등. 이런 요소들이 누적되면서 후임인 한대화 감독 재임기에는 쓸 만한 선수는 모두 혹사로 맛이 가거나 해외 진출, 타 팀 이적, 군 복무 등으로 빠져나가 1군의 양과 질이 타팀 2군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1]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초보 감독 한대화가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었던 승부사 김응용도, 한 때나마 야신으로 불리던 노장 김성근도 해결하지 못했다.[2] 그로 인해 한화 이글스암흑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우주의 기운을 받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초보감독이었던 한용덕에 의해 간신히 비밀번호를 탈출했으나, 이후 중간층 부재와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로 2020년에는 치욕스러운 18연패에 100패 위기까지 몰리며 오히려 더 큰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2. 재활공장장의 허상

과거 부상으로 오래 고생했거나 은퇴한 선수를 다시 불러다 쏠쏠하게 활용해서, 두산 시절의 조계현[3], 김호[4] 등을 비롯하여 2005~2006년 에이스로 활약한 문동환을 비롯[5],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생애 최고의 역투를 보여줬던 지연규[6], 그리고 '몸 만들고 기다려'로 유명한 조성민[7]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망주였다 부상으로 잊혀졌던 강동우[8]도 2009년 시즌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것 자체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이러한 김인식 특유의 운영 방식은 밑에서 언급할 신인 홀대와 겹쳐서[9] 주전 선수의 노쇠화로 인해 팀 리빌딩이 필요한 국면에서는 팀의 세대교체에 막대한 지장을 주면서 현재의 파국을 낳은 원인이 되었다.

이때 피봤던 젊은 선수들이 송광민, 연경흠, 최진행, 김태완, 김동영, 김강 같은 젊은 빅 뱃 자원들. 이들은 김인식의 노장선호 + 형편없다는 말로도 모자란 한화의 육성시스템 + 있기는 한건지 궁금한 수비코칭 시스템이 겹쳐서 제대로 물을 먹었다. 김태완과 송광민은 각각 08, 09시즌 주전들의 부상 혹은 이적을 틈타 기회를 받을 수 있엇지만 나머지는...그나마 최진행은 경찰청으로 군대라도 빨리 다녀왔지만 나머진 그러지도 못했다. 위 선수들 중 가장 잘 된 케이스인 송광민도 군 문제를 진작 해결시키지 않는 바람에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줄 법한 28~30살을 사회복무요원으로 보내면서 한창 때 커리어를 다 까먹었다.

3. 믿음의 야구에 대한 비판

선호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상당히 오랫동안 기회를 부여하면서 지켜봐주는 지도 스타일 때문에 흔히 믿음의 야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두산 베어스 시절까지는 이러한 노선이 상당히 성과를 거두었으며 김상호, 심정수, 정수근, 진필중, 홍성흔, 타이론 우즈 등의 선수들이 김인식 감독의 고집에 부응하면서 기량이 만개하였다. 1994 시즌까지 그저그런 타자였던 김상호는 1995 시즌 붙박이 좌익수로 전 경기 전 이닝 3번 좌익수 선발출장을 하는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홈런왕을 차지했다. 심정수 역시 8번 타순에 고정 배치되어 "삼진 걱정 말고 마음대로 휘둘러 봐"라는 김인식의 신뢰를 받고 그해 21홈런을 치면서 주전으로 부상했다.[10] 타이론 우즈의 경우에도 1998 시즌 중반까지 그저그런 성적으로 퇴출이 거론되었으나 김인식 감독이 고집스럽게 3번에 고정배치하면서 7월 이후 잭팟을 터뜨린 경우.

그러나 한화 이글스에 부임하면서부터는 노장에 의존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더 강해지면서 신인급 선수에게 믿음을 보내는 '모험'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한 한화 팬들의 불만은 적지 않아서 나이 많고 실력도 떨어지는 선수들이 주전 자리를 계속 꿰차고 있는 '철밥통 야구'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예컨대 '믿음'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불신의 야구'로서 출전이 제한받고 2군에서 썩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7년 시즌의 비범한 병살 기록을 세운 이도형과, 대주자로서도 대타로서도 가치가 영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1군에 들어앉아 있던 김인철의 계속된 기용 등이 있었다.

반면 신인들에 대해서는 '불신의 야구'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가뭄에 콩나듯 가끔 2군에서 올라오는 선수들이 어쩌다 선발에 올라와서 첫 타석에 삼진이나 병살 등을 기록하면 주저없이 다음 이닝 수비 때 교체해 버린다. 장타력이 좋았던 유망주 송광민의 경우 이런 패턴의 기용에 불만을 표했다가 짤없이 2007년 내내 썩어야 했다.[11]

2008년에 레귤러 자리를 차지한 김태완도 지명대타 포지션을 이도형이 차지하는 바람에 2007년까지는 변변찮은 출전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2008년에도 연경흠 등 자체 팜 출신 유망주보다는 두산 베어스에서 데려온 윤재국의 기용 빈도가 더 높았다. 당시 윤재국의 타율은 2할에 간신히 턱걸이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감독이 최진행, 김태완, 송광민, 연경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1군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고 2군에서만 썩어간 선수들은 결국 2군용으로 전락했고 여기에 한화 특유의 처참한 육성 시스템까지 더해지면서 2군에서도 절대 성장하지 못 하고 사라지고 만다.

4. 투수 혹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김인식 감독은 그 시절에 누구보다 먼저 투수의 어깨를 보호해야한다고 외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지우개론이었는데 투수 어깨는 지우개와 같아서 쓰면 쓸수록 닳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아껴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위원장은 “어린 선수를 혹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투수가 망가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자기 미래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투수 혹사 문제는 한화 탓할 것 없다. 그가 거친 모든 팀에서 그랬으니까. 해태 시절 김응용을 보좌한 탓인지 투수 운용이 상당히 흡사하며, 불펜에 상당한 과부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김성근이 갈아마신 불펜중에 끝까지 폼을 유지하며 금전적 이득을 취한게 정우람 뿐 이듯 김인식 밑에서 살아남아 금전적 이득을 취한 투수는 NPB를 다녀온 이혜천 뿐 이다. 두산 시절에는 이용호, 진필중, 이혜천, 차명주 등이 허구한날 등판했으며, 심지어 차명주에 대해서는 '매일 2이닝씩 던질수 있는 투수'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2][13]KBO 최고의 유리몸으로 꼽힌 박명환은 데뷔때만 해도 상당한 이닝이터였으나 3년간 미친듯한 혹사를 당한 끝에 망가져 버렸다. 2004 시즌 부활하나 싶었으나 신인때의 혹사로 이닝을 많이 못먹는 박명환을 200이닝 가까이 굴린결과 2007 시즌을 끝으로 퇴물로 전락했다.[14] 선발이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게 1995년 우승 때도 위에 언급한 김상진, 권명철, 송재용 선발 3명이 포스트시즌 내내 3일 쉬고 나왔으며 그 외 이경필, 구자운 등 특정 선수 혹사 문제는 당시 두산의 얇은 선수층과 맞물려 계속 지속되던 문제였다. 이 여파로 두산은 우승한 다음 해 곧바로 꼴지로 떨어지는 역대급 시즌을 찍고 말았다.[15]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이후에도 불펜중 뛰어난 구위를 보인 투수는 과도하게 기용하여 혹사시켰으며, 거의 해마다 한 명 이상씩 탈이 나서 이탈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의 휘하에서 망가진 투수만 해도 정병희, 윤규진, 안영명, 최영필, 구대성, 송창식, 문동환등이 있다. 송창식은 세광중-고교 시절[16]유승안 감독 시절 당시의 혹사, 혈행 장애로 장기간 재활이 필요했는데 조기에 복귀 시키는 바람에 자칫하면 선수 생명이 끊어질 뻔 했다. 2005년 전반기에 과도한 혹사를 당한 정병희김민재를 FA로 영입할 때 보상 선수로 SK 와이번스에 넘어간 뒤 다시는 부활하지 못한 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방출당했다. 2005년 후반기에 혹사한 윤규진은 오랜 재활 끝에 2008년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했으나 '불펜에 구위 좋은 투수가 있어야 한다'는 김인식 감독의 판단 아래 1경기에만 선발 등판하고 다시 불펜으로 전환했으며, 역시 이길 때 질때 가리지 않고 등판하다가 결국 어깨부상으로 시즌 아웃됐다. 이후로도 유리몸 기질을 보이며 시즌마다 시즌 종료 1~2달을 앞두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패턴을 보여주었다(...).

2006년 류현진의 뒤를 잇는 2선발로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 한화 이글스의 2006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이바지한 문동환은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에서 연이어 굴려지며 한국시리즈때부터 허리 부상의 징조가 보였고 재활 혹은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결국 2007년 6월 허리 부상이 도져 치명적인 허리디스크로 발전, 그 후로 2007년을 끝으로 기약없는 재활만을 반복하다가 2009년에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었다.

선발 요원으로 키워지다 2007년 불펜에서 혹사당한 안영명도 볼끝이 가벼워지며 2008년 들어 난타당했으며, 2009년에는 10승을 거뒀지만 34 홈런을 맞으면서 시원찮은 모습만 보여주었다.[17] 무릎 상태가 좋지 않던 노장 구대성도 팀 사정상…이란 이유로 2007년 내내 클로저로 등판시키다 40세의 나이에 무릎에 칼을 대야 했다.

2008년에도 특정 불펜 선수들을 이기고 지고에 상관없이 마구 등판시켜 악명이 높았으며, 오랜 부상 후 복귀한 윤규진은 다시 큰 부상을 걱정했다고 한다. 시즌 후반기에 들어서는 특히 마정길의 휴식일은 류현진의 등판일 뿐이라는 웃을 수 없는 상황(16경기 중 14경기 등판, 류현진 등판 경기에도 불펜에서 몸 품)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러고도 류현진 등판일 빼고는 모조리 졌다는 것이다.

물론 혹사문제는 이 나이대 감독들 중에 메이저 리그식 선진 투수 운용을 도입한 이광환 감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무죄 처분을 받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투수 혹사라는 용어조차 없고 선발과 패전처리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셋업맨, 원포인트 릴리프, 1이닝 마무리 등의 철저한 분업화와 투구수 관리로 한물 갔다고 평가받던 투수조차 살려내면서 우승을 차지한 1994년 LG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다른 구단에선 투수 분업화 시스템이 정착되었던 2000년대에도 한화에선 예전 시스템, 선발/마무리 겸업이나 중무리, 집중적인 불펜 연투가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다.

2009년 시즌에는 마정길이 4월 6경기 연속등판+5월 3연투 2번, 4연투 1번뒤에 6월에 점점 등판이 줄어들다가 7월 중순경에 2군 강등. 유일하게 이상군의 손을 타지 않은 양훈[18]은 1년 내내 이틀에 한번 등판하고, 매일 몸을 풀면서 실질적으로 매일 등판한거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 사이사이에 루키 대졸 투수 중 그럭저럭 쓸만하게 던지는 황재규를 심심할때마다 연투를 시키며 혹사. 후반기 들어서는 허유강을 새 혹사의 제물로 삼았다.

이 후유증으로 양훈은 2009 시즌의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 2011년에 선발 투수로 겨우 반등했고, 2010 시즌 황재규는 1군에 잠시 있다가 2군으로 내려가서 버로우, 2군에서 올스타전에 출전했지만 결국 시즌이 끝난뒤 공익으로 입대하여 복무를 마쳤다. 허유강도 1군에서 털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2011 시즌에서 버로우를 탄 후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19]

참고로 그 류현진 또한 19살 고졸 신인 역대 최초로 2년 연속 200이닝을 돌파하는 등.[20] 역대 최고의 천재적 재능이었지만 역대 최악의 혹사를 당했다. 포스트시즌, 국가대표까지 포함하면 +50이닝은 더 던졌으니 2시즌 연속 250이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상 현장에서 완전히 물러나다시피한 2021년에도 도쿄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하자, 자신이라면 조상우를 1이닝 더 던지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혹사 성향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4.1. 부상 선수 혹사로도 유명

한화에 오고부터는 부상 선수를 급히 복귀시켜 혹사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해졌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구대성이영우, 권감기권준헌이다.[21]

구대성의 경우 2007년 시범경기 때 무릎 쪽 인대에 부상이 생겼으나 그 소식을 들은 김인식 감독은 "구대성 없으면 시즌 포기"라는 식의 늬앙스를 풍기는 언플인터뷰를 하며 구대성의 복귀를 재촉…. 그러나 그 해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대성은 결국 부진했고 이 때 김인식 감독이 남긴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쟤만 똑바로 했으면 우리가 1등이야."(…)선수가 어찌되든 지 성적만 챙기니?

결국 2008시즌 전반기 내내 재활에 힘쓰다 시즌 중반에 복귀했으나 혹사가 문제되어서 또 재활군으로 갔다. 2009 시즌에 들어서 5월에 조기 복귀했으나 다시 부진…. 2010 시즌에는 스타팅 멤버에 들어갔으나 부상을 입은 부위의 통증이 더 심해지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22]

타자 쪽으로는 이영우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전역 이후 어깨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감독의 어명으로 수비를 하다가 결국 어깨가 박살나(!)[23] 2009시즌에는 1루에서 홈으로 송구도 못할 정도로 송구력이 저하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손가락 부상마저 있어서 이로 인해 컨택이나 파워가 심각히 줄어들었고. 2010시즌에 들어서는 급격한 파워저하로 인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재활을 담당했던 의사가 이영우의 어깨 상태를 보고 "이런 상태로 야구를 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 결국 2010년 9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5. 입영연기 문제

잘 쓰지도 않는 젊은 선수들의 입영을 연장시키면서 한화의 암흑기를 제공한 근본적인 원인을 만들었다. 한화 프론트의 무능력한 행정과 함께 충청도 팜의 열악함 등이 겹쳐 쓸 만한 선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쓰지도 않을 유망주들조차 백업 선수 구성을 위해서 군대도 안 보내고 계속 2군에서 굴려먹었다.

정작 1군에 올려도 노장 선수 -정확히는 자신이 직접 영입을 추진한 방출 선수들- 를 주로 쓰다가 대수비, 대주자용으로만 기용했다. 이로 인해서 성장 동력을 잃고 2군에서 헤매던 선수나 뒤늦게 기회를 받아 성장한 지금 한화의 주축 타선은 최진행을 제외하고는 다 군대를 갈 시기를 놓쳐서 김인식 감독 임기 이후로 2~3년 동안 줄줄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최진행 외에는 윤근영, 전현태 정도가 군 복무를 빨리 마친 케이스.

결국 2010년 한화 이글스는 총 14명 이상의 군 입대 예정자를 갖게 되었고 가뜩이나 없는 전력 속에서 군입대 선수로 인해 안 그래도 약한 전력이 더욱 약화되어 2009년 이후 얇은 뎁스의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대화 감독이 자신의 임기 동안 선수들을 군대 보내다가 끝날 거 같다고 말할 정도. 송광민이 시즌 중 영장을 받고 입대했다가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훈련소에서 퇴소당하고, 다시 공익으로 입대한 사례는 유명하다.

6. 빠가 까를 낳는다

노리타의 문제점을 먼저 보여준 사례. 그나마 건강문제도 있고해서 김성근만큼 외부활동이 활발한 감독이 아니라서 김성근 수준의 광신도들은 없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직후 위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팬은 인식까라 불리며 분란종자 취급을 당했고 김인식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지적도 용납되지 않았다.

또 대부분의 '인식빠'들은 WBC 이후에 팬이 됐다거나, 김인식을 따라 유입된 두산팬, 아니면 보수적인 관점을 지닌 팬들이 많았던 탓에 팀의 미래? 그건 먹는건가요? 우걱우걱의 태도로, 절대적인 김인식 믿음과 찬양의 태도를 유지했다. 따라서 비판하는 입장에선 말이 안 통하니 그야말로 복장 터질 노릇. 게다가 2006년에는 위에서 언급된 모든 투수 혹사, 베테랑 쥐어짜기, 군대 안보내기 등등으로 꽤 좋은 성적을 냈으니, 김인식이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24]

게다가 팬들 뿐 아니라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는데, 팀이 잘나가건 못 나가건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있는 동안 언론기사의 90퍼센트가 김인식 찬양이었다. 김인식 감독 시절 내내 기자들의 관심은 그가 무슨 밥을 먹고 무슨 농담을 했는지의 내용이었을 뿐, 한화 팀 자체에 대해선 무관심 그 자체였다. 팀의 어느 선수가 홈런을 쳤건, 부상으로 빠져있던 간에 팬들은 김인식이 점심으로 뭘 먹었다는 따위의 기사 밖에는 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비정상적인 김인식 인기 탓에 김인식은 예상보다 장기간 한화 감독직을 유지했으며 WBC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김인식이 이처럼 오래 한화 감독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 직전에 발생한 뇌경색 문제도 있었기 때문. 그런데 WBC 잭팟 이후 재임기간 말년까지 어떤 비판도 쉽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누적된 문제가 곪아터지면서 마침내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김인식이 위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의 원흉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존재 자체가 이 문제점들을 덮는 실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임 말년부터는 한화팬 대부분에게 이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주범은 김인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에 이르러 위와 같은 장문의 비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7. 반론

한화 이글스가 김인식 감독이 나간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하위권을 전전하면서, 이제는 김인식 감독뿐만 아니라 한화 이글스라는 팀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이 많다. 즉, 김인식 감독이 암흑기의 원인은 맞지만, 단순히 감독 한 사람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인식 감독 본인도 계약 마지막 해인 2009년에 한 인터뷰를 보면, 자신이 그렇게 팀을 운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항변하면서 구단을 에둘러 비판했다.

그러나 일단 투수혹사는 절대 실드칠 수 없다. 두산에서조차 그가 혹사시킨 투수가 선발, 불펜 합쳐 두 손 손가락을 채우니까. 시대 상을 감안해도 해도해도 너무한 케이스. 선수들에게 인격적인 부분에서 고평가를 받는 감독이었지만 그것도 야수에 국한된 부분이 많고, 투수에 대해서는 야구인 출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혹사 일변도로 일관했으며 그 과정에서 투수들에게 강요된 부담은 덕장이라는 인식까지 의문부호가 남게 만들 정도이다.

다만 한화 몰락의 원흉으로 뽑히는 것에 대해서는 김인식도 어느 정도 할 말이 있는 상황. 무엇보다도 당시 모기업이었던 한화그룹이 지금과는 다르게 야구단 투자에 대해 상당히 인색하던 시절이다 보니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한화의 선수 육성 시스템 역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육성의 중심이 되어야 할 2군 홈 구장 및 연습장, 클럽하우스조차 없었다. 이 당시 홈 구장도 없어서 연습할 공간조차 없었던 한화 2군 선수단은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1군 홈 경기가 없을 경우 거기서 훈련하거나, 그마저도 한밭야구장에서 홈 경기가 있을 때는 제2홈구장인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 대전고등학교 등 인근 고등학교 야구부 훈련장, 계룡대 내 야구장을 전전하는 등 떠돌이 생활을 해왔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미래를 위한 육성이 될 리는 만무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 2군은 2011년에 고교팀에게 졌다는 믿기 힘든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이 당시 한화 구단 및 모기업 역시 이러한 2군의 열악한 현실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한화는 2007년 초 대덕구 신탄진 인근에다가 2군 홈구장 및 연습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지자체와 양해각서까지 체결했으나, 수익이 전혀 나지 않는 2군 구장을 두고 대덕구 측에서 일을 질질 끌다시피 하는 바람에 행정적인 절차가 늦어져 결국 한화그룹은 신탄진에 2군 구장을 짓는 계획을 포기하고 서산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25] 이후 2012년 말 서산전용연습구장이 개장하면서 창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2군 홈 구장을 갖게 된다.

안 그래도 대덕구의 이러한 문제까지 있어 선수를 키울 환경이 타 구단보다 열악한데, 당시 한화 구단은 그 기회도 스스로 박탈했다. 2004년~2009년 동안 다른 구단이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행사했던 것과 달리, 한화 이글스의 경우에는 1년에 겨우 4~6명의 선수만 뽑고 나머지 하위 라운드는 죄다 패스했을 정도로 근시안적으로 팀을 운용했다. 물론 하위 라운드에서 지명된 선수들은 대체로 기대치나 역량이 낮고, 양의지같이 다른 팀에서 성공한 하위 라운드 선수들이 그때 한화에 갔다고 해서 똑같이 잠재력을 보인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선수가 아예 없는 상황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게 아닌가.

또,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연고지역 선수를 뽑는 1차 지명에서도 한화는 불리했다. 상대적으로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인 충청권 학교에서는 다른 지역처럼 좋은 선수가 나오지 않았고 있었다. 물론 북일고등학교 야구부가 있긴 하지만, 이미 김인식 감독 재임기에는 예전처럼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팀은 아니었다. 그리고 숨겨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북일고와 대전-충청권 내 타 학교 간의 문제가 심각했고, 북일고를 제외한 야구 풀이 열악해도 너무 열악했던 것. 당장 전국구로 유망주를 모으던 북일고는 전국대회 우승은 못 하더라도 명문팀이라 할만 했으나, 충남 지역에선 유일한 라이벌이 공주고밖에 없었는데 이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조차 여러 문제가 많았다. 충남지역예선을 가장 시설이 우수한 북일고 야구장에서 주로 개최했는데, 북일고는 공주고 야구부 버스를 야구장 안쪽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무거운 장비를 들고 덕아웃까지 이동하게끔 만든적도 있을만큼 페어플레이는 커녕 비매너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안 그래도 전력차가 있던 상황이라 공주고가 당해낼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2008년 경에는 공주고 교장이 야구부를 해체하려 했고, 안승민 등 학생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살려달라는 교내 시위를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안승민이 프로 진출한 것이 정말 기적일 정도였다. 실제로 2004년부터 NC 다이노스가 창단되는 2011년까지 충청권 신인 지명을 보면 갈 수록 처참해지는 충청팜의 수준을 볼 수 있다.[26][27]

이렇게 연고지명인 1차 지명에서 재미를 못 볼 것 같으면 전국지명인 2차 지명을 노려야 하는데, 그 2차 지명에서도 좋은 선수를 노리기에는 한화의 순위가 낮지 않았고, 앞서 말했듯이 그 2차 지명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팀은 자연스럽게 노인정이 되었다. 김인식 감독도 링크된 인터뷰에서도 유망주라 볼 수 없는 선수를 뽑아야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신인 드래프트나 선수 육성에서 문제가 있으면 외부 영입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 그러나 당연히 이때는 2군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2차 드래프트도 없었고, 결국 외부 FA 선수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허나 상술했듯이 이 때는 한화그룹의 야구단 투자가 미비했던 시절이다 보니, 2000년대 중반 한화의 외부 FA 영입은 2005년 내야수 김민재를 영입한 것 한 번밖에 없다.[28][29][30] 무엇보다도 김인식 감독은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위의 링크된 인터뷰에서 나올 정도로 전권을 부여받은 감독이 아니었다.[31] 이런 상황에서 김인식 감독도 팀의 추락을 맡기 위해 타 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을 잇따라 영입했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을 뿐, 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8. 그 외 다른 비판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백차승을 대표팀에 발탁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문제는 당시 백차승은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상태였다. 백차승 본인이 거절했고 기자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묻히기는 했지만 김인식 감독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한편 한국인 메이저리거(특히 자신이 지도하기도 했던 류현진)에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지나치게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입장에만 편향된 주장을 하고 야수가 류현진의 등판 시에 실수를 하면 자격이 없는 선수라고 하는 등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하였으며, 롯데의 프런트가 분명히 허문회와 소통을 시도하였으나 허문회의 고집으로 인해 결국 경질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며 프런트에도 책임을 돌리는 황당한 양비론을 꺼내들기도 하였고 이런 칼럼들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2021시즌 들어 류현진이 부진하기 시작하자 하이패스트볼을 요구하는 포수들이 문제라는 칼럼을 올렸다. 하지만 근래 '뜬공 혁명'으로 어퍼스윙이 대세가 되면서 오히려 하이패스트볼이 낮게 제구되는 공보다도 효과적인 무기가 된지 오래되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즉, 구시대적인 야구관이라는 것. 류현진은 어디까지나 구속과 구위가 떨어졌고 체인지업이 말을 듣지 않게 되면서 하락세가 시작된 것일 뿐 하이패스트볼과는 별 관련이 없다. 체인지업이 잘 들어가던 시절에는 체인지업과 하이패스트볼을 적절히 섞어가며 잘만 삼진을 잡았다.


[1] 어느 정도였냐면 한대화 감독 취임 직후에는 김민재의 은퇴와 한상훈의 사회복무요원 근무로 인해 주전 센터라인이 없어서 두산에서 방출된 정원석과 잉여 자원이었던 투수 2명을 두산으로 보내고 데려온 이대수가 주전 2루수와 주전 유격수로 나와야 했다. 그나마 정원석이 3할을 치며 중심타선을 이끄는(...) 성과를 내어주었고, 이대수는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 속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2] 특히 김성근 감독은 재임 초반 마리한화 열풍을 이끌기도 했으나 15년 후반부터 투수들을 보직, 나이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용하는 것이 드러났고, 재임기간동안 즉전감인 노장을 사오고 유망주를 타 팀에 보내버리는 등 되려 선수의 평균 나이는 올리고 부상자도 늘어나면서 오히려 한화 이글스를 망치고 본인 커리어에도 심각한 흠을 남겼다.[3] 해태 말년인 1997년부터 계속해서 성적이 떨어지더니 1999년에는 아예 11.51이라는 평균자책점을 내면서 은퇴의 기로에 몰렸다. 그러다가 김인식과 두산에서 함께하며 선발투수로 무난한 성적을 거두며 2000년에 재기했고, 1년 짜리 FA 계약까지 진행한다. 2001년에는 성적이 하락하지만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반지까지 하나 더 끼고 은퇴한다.[4] 성적 자체가 좋다고 보기엔 어려웠지만 내야 대수비나 대주자로서 적당한 활약을 했고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까지 한다.[5] 정확히는 유승안이 다시 불러다 재기까지 시킨것을 김인식은 그냥 혹사만 시킨 것이라는 비판이 존재한.[6] 구대성이 없어서 마무리 투수가 없던 2005년에는 아예 주전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7] 다만 이 쪽은 오랫동안 부상으로 신음하던 선수였던데다가 2002년 이후 개인사 등으로 인해 2년의 공백기간 까지 있어 결국 평범한 한화 투수 1 정도에 그쳤다.[8] 부상의 여파로 인해 입단하던 1998년이 커리어하이였다. 이후 2002~2004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는 백업 내야수 1 수준의 성적이었다. 그랬는데 2009년 김인식 체제에서 11년 만의 3할 타율과 생애 첫 150 안타를 쳤다.[9] 이 때 신인만 잘 키웠으면 왕조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가을 야구에 붙박이로 자리 잡는 강팀이 될 수 있었다. 물론 2군 구장조차 없고, 지명권 패스마저 남발하던 팀에서 그 누가 온들 선수가 키워졌을지는...[10] 물론 이혼 같은 개인사 때문에 잠깐의 조정기간이 있었지만, 이후 개인사를 극복한 후에는 심정수의 재능이 만개했다.[11] 사실 송광민이 이 때라도 군대를 다녀왔더라면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른다.[12] 차명주는 두산 베어스 시절 많은 경기에 등판했는데 99년 83경기, 00년 57경기, 01년 84경기, 02년 67경기, 03년 77경기에 등판했다. 물론 차명주의 성적이 점차 저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김인식은 아예 차명주를 원포인트 릴리프로 기용하게 된다.[13] 더 골 때리는 것은 차명주가 두산을 떠나 한화로 온 이후 감독이 김인식이었다는 것. 원포인트 릴리프로 기용했다고는 해도 04년에 유숭안이 32경기에 올리며 제법 상식적인 기용을 했던 것과 달리 05년에는 77경기, 06년에는 51경기에 등판시켰다. 05년의 무지막지한 혹사와 5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인해 거둔 모습 때문인지 한화에서는 차명주를 회의적으로 보고 아예 FA 재계약을 안 해서 은퇴시킨다.[14] 물론 박명환이 08년부터 부진한 것은 LG 투수코치였던 양상문의 책임도 있다. 수술하겠다고 한 박명환을 1군에 선발투수로 올렸다가 다 말아먹었기 때문. 그렇지만 박명환의 부상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하면 1차적 책임은 혹사시킨 김인식에게도 있는 셈이다.[15] 최근 이렇게 우승한 다음 해 꼴찌로 떨어지는 대참사가 나게 된다면 냉정하게 경질까지도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물론 그나마 감안해서 유임까진 가능하겠지만. 현 트렌드는 장기계약을 하더라도 성적이 처참할 정도로 나쁘면 경질될 정도로 감독임기가 짧다.[16] 팀의 에이스로 거의 혼자서 던지다시피 했다. 그 세대에서 송창식 혼자만 한화의 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세광고 야구부 그 자체였던 선수였다.[17] 이 시절의 혹사로 안영명은 KIA로 이적할 무렵에 오른팔에 경련이 일어나고 이두근을 사용할 수도 없는 상완신경총 손상이 왔다. 안영명은 초인적인 의지로 통증을 참으면서 무려 13년을 더 버틴 것이다.[18] 전지훈련에 가지 못하고 한용덕 코치와 비닐하우스에서 폼을 가다듬었다고 한다.[19] 이후 황재규는 김응용 재임기인 2013년에 1군에 올라와 21경기 34 2/3이닝을 던지면서 4.15의 평균자책점을 거두면서 다시 반등의 기미가 보이나 싶었지만 그게 회광반조였고 재활군에서 재활만 하다가 은퇴했다. 허유강은 군 복무 이후로 2년간 6경기에 올라와 10점대 평균자책점을 거두고 은퇴했다.[20] 김영덕 - 강병철 시기의 정민철이 상당한 혹사를 당했는데, 요미우리 입단 이전까지 8년간 1993, 1995, 1998년을 제외하고 전부 200이닝을 돌파했다. 1993년은 방위병 근무 때문에 홈 경기에만 등판했고(심지어 10완투도 했다!), 1995, 1998년은 부상으로 인해 휴식을 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말이 휴식이지 실제로는 규정이닝을 다 채웠다. 그래서 정민철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서히 어깨가 망가졌고 결국 일본 진출과 함께 하락세가 가속화된다.[21] 사실 이런 쪽으로는 KIA 타이거즈가 훨씬 선배다[22] 실제 사례, 은퇴선언 때 본인이 직접 말했다.[23] 실제로 2008시즌인가 2009시즌 초기 對 SK전 때 김성근 감독이 이영우의 어깨가 안 좋은걸 간파하고 SK 타자들에게 좌익수 쪽으로 타구를 보내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24]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장기적 관점의 육성이라든지 프런트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야구 팬들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진출 감독이니 누군가 나서서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거기에 이 당시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활성화가 덜 된점과 더불어 한화는 김인식 부임 이전 가을야구 연속 진출 실패의 암흑기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김인식이 한화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가을야구 3회 연속 진출에 KBO 한국시리즈 1회 준우승까지 달성하며 한화 감독 5년의 재임기간 중 3년 동안의 모습은 전성기 OB-두산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2008 시즌에 가을야구에 실패했으나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최고의 드라마를 쓰며 준우승의 쾌거를 기록했으니 라이트 야구팬들에게 있어서 김인식의 인기는 최상급이었다. 이러니 전문성이 있는 팬들이 아무리 비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25] 당시 대덕구청장이던 인물이 한나라당 - 새누리당 소속 정용기인데 이 사람은 대덕구청장을 내리 재선을 했고 구청장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국회의원을 내리 재선했다. 전반적으로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받을 수 밖에 없다.[26] 충청권 출신 고졸 선수들 중에 1차, 2차 지명을 받은 선수는 2004년 5명(북일고 1, 공주고 2, 청주기공 1, 세광고 1), 2005년 4명(북일고 2, 대전고 1, 청주기공 1), 2006년 3명(북일고 3, 청주기공 2), 2007년 8명(북일고 4, 공주고 3, 청주기공 1), 2008년 2명(북일고 1, 대전고 1), 2009년 1명(북일고 1), 2010년 7명(북일고 5, 대전고 1, 공주고 1), 2011년 6명(북일고 3, 대전고 1, 청주고 1, 세광고 1)이다.[27] 이 중에서 당연히(?) 한화그룹이 운영하는 북일고등학교가 가장 성과에서 우위에 있는데 북일고를 제외할 경우 나머지 학교들(대전고, 공주고, 청주고(청주기공), 세광고) 의 성과는 처참한 수준. 특히 북일고는 매년 최소 1명씩을 프로로 진출시키지만 대전고는 8년간 4명을, 공주고는 거의 8년간 6명, 청주고(청주기공)은 8년간 6명, 세광고는 8년간 2명을 선수들을 프로로 보내는 양상이다. 게디가 프로로 보낸 선수들이 전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화에서 포수를 보면서 수비로 밥 먹듯이 욕을 먹던 정범모도 충청권 출신 선수로서는 성공한 편에 속한다.[28] 해당 선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마저도 4년 14억이라는 저렴한 금액에 영입한데다 은퇴 후 코치직 보장 조건이 있는 소규모 계약이었다.[29] 김인식 감독도 두산에서 한솥밥을 먹던 홍성흔이 2008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을 때 홍성흔을 영입해달라고 구단에 요청했으나, 구단에서는 '이미 지명타자로 자리 잡은 사람인데 포수로써 어떻고 어깨가 안 좋다' 등 자꾸 딴지를 걸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화도 짠돌이 이미지가 강했던 롯데에 가려서 그렇지 절대 막 돈을 써서 영입하는 팀은 아니었다. 김민재 이후로 6년만에 영입한 외부 FA는 2012년에 LG에서 데려온 송신영인데 계약 규모에서 볼 수 있듯이 김민재와 비슷한 소규모 계약이다.[30] 박찬호, 송신영을 영입했다고 한대화 감독에게 우승 노리라고 했던 팀이었다.[31] 물론 코치진을 주도적으로 꾸리고 외부 수혈도 임기 말에 받은 김응용 감독이 있었고, 리빌딩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전권을 보장 받은 것은 이 사람이었으며 한화는 지금도 오너의 사람들의 영향이 크다는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