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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1:32:21

정원석(야구선수)

정원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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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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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리그 홈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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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2561>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김홍기
태평양 / 8개
길홍규
OB / 5개
김원근 외
4명(A)
5개
이전진 외
1명(B)
5개
이보형
OB / 8개
<rowcolor=#002561>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공의식
현대 / 14개
임노병
LG / 16개
안재만
LG / 12개
추성건
두산 / 12개
문희성
두산 / 14개
<rowcolor=#002561>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강병식
상무 / 9개
정원석
1명(C)
9개
장익현
상무 / 10개
김재구
상무 / 13개
최길성
LG / 13개
<rowcolor=#002561>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김상현
상무 / 23개
최형우
2명(D)
22개
박병호
1명(E)
24개
조영훈
경찰 / 24개
최주환
상무 / 24개
<rowcolor=#002561>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문선재
상무 / 21개
김회성
경찰 / 18개
최승준
LG / 19개
김사연
KT / 23개
한동민
상무 / 21개
<rowcolor=#002561>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이성곤
경찰 / 19개
윤대영
경찰 / 24개
이성규
경찰 / 31개
허정협
1명(F)
10개
이재원
LG / 13개
<rowcolor=#002561>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이재원
LG / 16개
김민혁
2명(G)
10개
홍성호
두산 / 15개
A: 김원근, 황대연(빙그레), 소상영(OB), 김성기(LG)
B: 이전진, 곽연수(OB)
C: 정원석(상무), 윤형국(SK)
D: 최형우, 곽용섭(경찰), 박석민(상무)
E: 박병호(상무), 조영훈(경찰)
F: 허정협(고양), 국해성(두산)
G: 김민혁, 홍성호(두산), 주성원(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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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등번호 40번
추성건
(1993~1999)
정원석
(2000~2001)
박영진
(2003)
두산 베어스 등번호 8번
정수근
(1995~2003)
정원석
(2004)
방승재
(2005)
두산 베어스 등번호 7번
윤상무
(2004)
정원석
(2005)
윤승균
(2006~2007)
두산 베어스 등번호 8번
방승재
(2005)
정원석
(2006~2009)
정진호
(2011~2012)
한화 이글스 등번호 8번
윤재국
(2009)
정원석
(2010~2012)
오재필
(2013)
}}} ||
파일:external/opds.joins.com/201107290801771101_1.jpg
정원석
鄭元碩[1] | won-seok Jeong
출생 1977년 3월 27일 ([age(1977-03-2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역삼초 - 휘문중 - 휘문고 - 동국대
포지션 내야수[2], 외야수[3]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6년 2차 2라운드 (전체 17번, OB)[4]
소속팀 두산 베어스 (2000~2009)
한화 이글스 (2010~2012)
지도자 광천고등학교 야구부 야수코치 (2017~2019)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2~2003)
응원가 허경환 - 있는데[5]

1. 개요2. 선수 경력
2.1. 두산 베어스 시절2.2. 한화 이글스 시절
2.2.1. 2010 시즌2.2.2. 2011 시즌2.2.3. 2012 시즌
3. 은퇴 후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선수.

현재 오산스포츠클럽 U16 (오산SC) 야구감독이다.

2. 선수 경력

2.1. 두산 베어스 시절

청소년 대표 출신으로 1996년 OB 베어스의 2차 2순위(전체 17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로 입학했다. 3학년 때 한대화 감독을 만났으니 나름대로 10년 후를 내다본 선견지명이다. 졸업 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엔트리에 포함될 정도로 유망주였으나 구단에서는 빠른 병역문제 해결을 위해 상무에 입단시킨다. 제대 후인 2004년 복귀하여 주전 도약을 노렸으나 두산이 기존 2루수 안경현과 FA 계약을 체결해 백업 선수로 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백업선수로 뛰다가 2007년 주전 기회를 잡았으나 시합 도중 왼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 파열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게된다. 비록 주전에서는 밀렸지만 내야 전포지션이 가능한 백업자원이라 쏠쏠한 활약을 했다. 2009년 연봉조정신청을 하고 구단에 찍혀 단 한 경기도 1군에서 뛰지 못하고 시즌 후 방출당한다. 그래도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던지라 우승반지는 하나 있다.

두산 시절 친 몇 개 안 되는 홈런들이 꽤 인상적인 홈런이 많았다. 2007년엔 현대 유니콘스전에 3대1로 끌려가던 경기에 7회말 동점 투런을 친적이 있고 2008년엔 당시 잘나가던 마무리 한기주에게 9회초 역전 솔로포,[6] 우리 히어로즈[7]전에 1점차 리드를 5점차로 만드는 만루홈런도 쳤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진기록은 한 투수가 한 타자 상대 최다 투구로 17개의 공을 이끌어 낸 적이 있다. 2008년 9월 24일 당시 우리 히어로즈장원삼을 상대로 얻어낸 것이다. 용규놀이 이전 원석놀이가 최다기록이었다.[8]

2.2. 한화 이글스 시절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입단 테스트를 받아 한화 이글스에 이적했다. 대학교 스승인 한대화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로 입단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한대화가 먼저 부른 것이 아니라 정원석이 자진해서 입단테스트를 요청한 것이라고 한다. 한화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기 전에는 KIA에서 먼저 입단테스트를 받았다고.

2.2.1. 2010 시즌

시즌 초반에는 5할 5푼 6리라는 타율로 정기계 등의 별명을 얻으며 칭송받았었다.

그러나 득점권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기만 하면 폭풍 삼진이거나 땅볼, 플라이 등을 치는 등 득점권에서는 전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반면, 주자가 없을 땐 귀신같이 안타를 쳤다. 타 팀 팬들은 팀에서 유일하게 3할대 언저리 타율을 유지하는 그가 왜 까이는지 몰랐을 정도.

팬들은 정원석을 보고 주자살인마(킬러), 득점권의 프레디, 정득병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원석이 주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타를 쳤을 땐 팬들끼리 엄청나게 난리가 날 정도.

그럼에도 계속 기용이 되어서 팬들끼리는 동국대 라인, 한대화 양아들 등으로 불렸다.

정원석 본인도 이런 비판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어서 이후 절치부심해서 득점권 타석에서의 지독한 부진은 털어버리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 5할에 육박하는 타격을 하면서 팀내 타율 1위로 자리잡았다.

7월 20일 롯데전은 정원석의 날이라 부를 정도로 대활약을 했다. 롯데 에이스 라이언 사도스키에게 내내 끌려가던 타선을[9] 김태완과 함께 이끌며 팀에게 승리를 안겼다. 2루타 2개, 3루타 1개를 때려냈으며 3루타는 9회말 3:2로 뒤지고 있던 주자 1루 상황에서 터진 동점 적시타였고 그 후 전현태의 묘한 타구의 내야안타가 나오자 홈으로 쇄도, 결승 득점까지 올렸다. 4타수 3안타 1타점으로 수훈선수가 되어 인터뷰까지!

3루타 후 바로 홈 쇄도를 한 상황이라 숨이 차 정신없는 상태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9회 상황을 설명하는 도중 "홈에서 쇼부하는 거 같아서…."[10]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쇼부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별명은 꽤나 흥해서 그 후 팬들은 정원석의 플레이를 말하는 데 '쇼부'라는 단어를 굉장히 자주 사용한다.[11]

이후 다시 타율이 하락했지만 2010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결국 3할 등극에 성공하여, 2010 시즌 한화 이글스 유일의 3할 타자이며 한화 이글스 2루수 최초의 3할 타자가 되었다. 팬들도 까다보니 미운 정이 붙어서 방출생들 중에서 가장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다.

2010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00 출루율 0.389 106안타 7홈런 43타점이다. 정규타석을 채운 3할타자가 테이블세터도 아닌데 43타점이라는게 심각한지 모르겠지만, 이는 팀내 3위 기록이며 정원석의 득점권 타율은 .278로 타율에 비해 낮지만 그렇다고 막장까진 아니다. 즉 팀이 침체기여서 그렇단 이야기. 좌투수가 나올때 1번, 2번을 치기도 했으나, 주로 5~7번까지가 정원석이 주로 기용된 타순이다. 안타, 홈런 모두 두산에서 7년동안 친 것보다 1년간 한화에서 친 것이 더 많다. 타점도 마찬가지.

2.2.2. 2011 시즌

3루수를 맡을 사람이 없고, 이범호 재영입에도 실패해서 2루수에서 다시 3루수로 전환했다. 어깨 부상과 2010년 부상당한 오른쪽 발목인대파열 재발로 도로 2루수로 돌아가 무난하게 플레이. 그러나 수비력이 약해져 이후 지명타자로 주로 나오고, 잉여스러움은 별반 다를게 없다.

재활을 병행하며 시즌이 진행될수록 각성했는지 수비 실책도 점점 줄어가고 무엇보다 더 이상 주자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편 주자만 죽인다! 27게임 연속출루와 12게임 연속 안타등 장성호가 복귀하면서 살아난 최진행과 드디어 정상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는 클린업트리오를 완성했다고 한화팬들은 설레게 하기도했다. 5월 들어서 팀이 상승세에 올라가자 본인도 같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 타율이 2할 8푼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득점권에서 더 이상 정득병이 아니게 되었으며 꾸준한 출루와 적절한 적시타로 자기역할을 해주고 있다. 5월 27일 다시 3할 타율로 복귀. 1루수로 보직을 옮긴 뒤에 갖은 호수비를 보여준다. 전처럼 삽질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어서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 거기다 필요할 때 딱딱 안타를 쳐주고 있어서 한화팬들에게 야구 볼맛을 나게하고 있는 선수 중 한 명! 이미 정득병이라는 별명은 아득히 멀어져버렸다. 6월 1일 삼성전을 기점으로 득점권 타율 1위. 0.405를 기록하고 있다.

6월 8일 LG 트윈스전, 5:6으로 한 점 뒤진 상황에서 3루에서 홈으로 쇄도하는 대담한 홈스틸을 시도 했으나 오심으로 그대로 아웃당하며 경기가 종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홈베이스를 밟을 때 조인성의 미트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홈스틸 이전에 임찬규가 보크를 저지른 상황이었다. 허나 주심을 포함, 4심이 모두 임찬규의 보크 동작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고, 4심합의의 보크판정은 번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웃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결국 이 날 경기는 LG의 승리로 돌아갔다.

경기 이후 심판진은 오심을 인정했고, 구단차원의 항의가 있다면 징계를 받겠다고 했다. 결국 심판진은 9게임 출전금지의 징계를 받았다.

6월 들어서 부상여파로 체력저하와 극심한 타격 슬럼프를 겪었다. 4월 타율 0.314, 5월 타율 0.293이었던 그가 6월 돼서 0.161, 7월엔 0.160. 결국 선발라인업에서 차차 빠지고 후반에 대타나 대수비로 기용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석에 들어서면 시원하게 선풍기질을 하고 대수비로 나오면 어이없는 송구 에러로 안좋은 모습을 보이자 결국 7월 17일 한대화 감독은 문책성 2군행을 통보하였다.

2군에서 절치부심하고 올라올 것으로 기대됐으나 8월 중순, 2군 경기 중 불규칙 바운드 된 공에 맞아 안와골절로 수술대행. 그대로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2.2.3. 2012 시즌

2011 시즌 후 전지훈련에서 외야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2012 시즌 시범경기에서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어 2012 시즌에는 주로 대타나 백업 요원으로 중요하게 쓸 수 있을거라고 생각됐지만...

4월 15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對 SK 와이번스전에서 대타로 출장해 우익수 수비를 들어가서 안치용의 뜬공 타구를 쫓아가다가 펜스에 크게 충돌해 바로 병원으로 후송됐고, 오른손 중수골 2개 탈골 진단을 받아 결국 수술을 받았다. 재활까지 2~3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알려져 전반기 출장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국 이 경기는 정원석의 1군 마지막 경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SK 팬들과 한화 팬들이 실려 나갈 때까지 서로 '정원석!' 을 외쳐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나이도 적지 않은 선수인데, 중요하게 쓰일만 하면 계속 부상이 발목을 사로잡았다.

결국 위 부상으로 인해 2012 잔여 시즌에 더이상 출장하지 못하였고, 2012년 10월 19일 신주영등과 함께 한화에서 방출되었다. 계속되는 부상과 재활로 발목을 잡혔고, 적지 않은 나이 또한 방출 사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각 구단들은 KBO의 지시에 따라 NC 다이노스의 20인 외 전력보강선수 지명이 있기 전까지 공식적인 방출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약 한 달 동안은 무적(無籍)선수 신분으로 있게 된다. 보류선수명단 공시일인 11월 30일에 정식으로 공시.

3. 은퇴 후

인터뷰를 통해 선수 생활 연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재활도 거의 끝났으며, 자신을 원하는 팀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스포츠서울 김경윤 기자의 트위터에 의해서 대전에 호프집을 창업했다는 게 알려졌다.

12월 13일날 올라온 김경윤 기자의 트위터.
스포츠서울 김경윤 ‏@bicycleyoun
정원석 전 선수가 대전 둔산동 1105번지 지하 puzzle 맥주창고식프리바를 개업했습니다.
많이들 찾아주시고 응원해주세요

맥주 바는 지금은 정리한 상태라고한다.

2013년 시즌 초 한화의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경기력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2017년 5월 창단 예정인 충남 홍성군광천고등학교의 야수코치로 부임하였다.[12]

4. 여담

응원가는 허경환의 있는데를 개사한 곡. 가사는 "한화에 정원석이 있는데~있는데~ 한화에 있는데~ 한화의 승리위해 날려라~ 한화에 정원석이 있는데~ 한화에 있는데~ 한화의 승리위해 날려라!"

따라 부르기가 좋고 흥겨워서 깔 때 응원가만 좋다고 까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역대 한화 이글스 소속 2루수 중에서 단일시즌 WAR이 6위이다.[13]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2000 두산 18 21 .190 4 0 0 0 0 2 1 5
2001 13 18 .167 3 1 0 1 2 2 0 3
2002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3
2004 54 41 .146 6 1 0 0 5 13 4 6
2005 15 13 .154 2 0 0 0 1 2 1 2
2006 67 106 .264 28 1 1 1 5 15 3 14
2007 78 62 .242 15 1 2 1 8 18 5 5
2008 90 107 .224 24 1 1 2 15 23 7 6
2009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2010 한화 118 353 .300 106 20 3 7 42 39 14 56
2011 82 248 .250 62 11 0 4 26 23 3 38
2012 7 2 .000 0 0 0 0 0 1 0 3
<rowcolor=#373a3c> KBO 통산
(11시즌)
542 971 .257 250 36 7 16 104 138 38 138

6. 관련 문서


[1] 2011 프로야구 연감[2] 주로 2루와 1루로 출전했으며, 2011년에는 3루수로 시즌을 시작하기도 했다. 수비력은 1루에서는 무난했으나 2루와 3루, 그 중에서도 특히 3루수비는 불안했다.[3] 2012년부터 외야수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다만 외야수로서의 모습은 뭘 보여주기도 전에 수비도중 부상당하면서 결국 은퇴까지 하였다.[4] 단국대 진학 후 2000년 두산(지명 당시 OB) 입단[5] 한화엔 정원석이 있는데 있는데 한화엔 있는데 한화의 승리위해 날려라 한화엔 정원석이 있는데 있는데 한화엔 있는데 한화의 승리위해 나알려어라~~[6] 08년 한기주의 유일한 피홈런이다.[7]키움 히어로즈[8] 이 기록은 2년 뒤 이용규에 의해 깨진다(박준수 상대 20구)[9] 3안타의 김태완과 1안타의 김경언을 제외하고는 한 명도 안타를 못 뽑아냈다.[10] 그 후 정우영 曰 "승부요…. 네네…."[11] 도루를 했을 때는 '포수2루수와 쇼부를 봤다.' 혹은 타율 3할 언저리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 결국 3할(0.300)로 시즌을 끝내자 '딱 3할로 쇼부봤다'든가….[12] 투수코치는 김민기다.[13] 1위부터 5위까지는 15 정근우, 21 정은원, 16 정근우, 14 정근우, 17 정근우다. 그러니까 정근우 영입과 정은원의 성장 이전까진 역대 1위... 참고로 17 정근우는 규정타석 미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