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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9:31:01

윤승균

윤승균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두산 베어스 등번호 66번
이동은
(2001~2004)
윤승균
(2005)
김하람
(2006~2007)
두산 베어스 등번호 7번
정원석
(2005)
윤승균
(2006~2007)
오재원
(2008~2009)
두산 베어스 등번호 66번
김하람
(2006~2007)
윤승균
(2008)
안동현
(2010~2011)
}}} ||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8230093_00.jpg
윤승균
尹承均 | Yun Seung-gyun
출생 1983년 1월 7일 ([age(1983-01-0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수유초 - 신일중 - 신일고 - 홍익대
신체 184cm, 80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01년 2차 12라운드 (전체 90번, 현대)
2005년 신고선수 (두산)
소속팀 두산 베어스 (2005~2008)
1. 개요2. 선수 경력3. 사건 사고
3.1. 강간 사건
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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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두산 베어스 소속의 외야수로 빠른 발로 잠시 주목받았으나, 강간 사건을 일으키며 성범죄자로 전락했다.

2. 선수 경력

2001년 드래프트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2차 12순위 지명을 받은 후 홍익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빠른 발 외에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어서 현대 유니콘스에서 지명권을 포기했다. 결국 졸업 후 신고선수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신고선수로 입단했음에도 김경문 감독의 눈에 들어 시즌 내내 1군에서 활동, 116경기에 출전했다. 이 때 KBO 리그가 126경기 체제였으니 10경기 빼고 전부 출전한 것. 하지만 거의 대주자로만 나섰기 때문에 많은 경기수에도 불구하고 단 99타석에 들어서는데 그쳤으며, 타격 성적도 .189/.232/.244 1홈런에 볼넷 단 5개를 고르는 동안 삼진은 34개를 허용하는 등 초라했다. 그러나 도루와 베이스러닝 실력만큼은 리그 정상급이라 39도루를 기록해 박용택(43도루)에 이어 리그 도루 2위를 기록했다. 박용택이 전경기 출장에 500타석 넘게 들어선 점을 감안하면 전문 대주자로 저정도 도루 숫자를 쌓은건 경이적인 수준.[1][2] 심지어 도루실패도 12개로 성공률도 76.4%를 기록해 나쁘지 않았다. 발만 보자면 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에 하등 오류가 없었다.

김경문 감독이 윤승균을 1년차부터 꾸준히 기용한 것도 이 주력 때문이었다. 여기에 당시 두산 외야진은 정수근의 FA 이적, 장원진, 전상렬, 최경환 등 기존 주전 자원의 노쇠화, 강봉규, 김창희 등 백업 자원의 부진,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된 윤재국임재철의 공백[3], 성장이 더딘 채 상무에 입대한 유재웅 등 온갖 악재가 산적한 상황이었고, 김경문 감독 역시 잠재적으로 윤승균의 타격을 가다듬어 미래의 리드오프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2005 시즌 종료 후 하술할 강간 사건을 일으키면서 법정에 서게 되었고, 2006 시즌 초반에 잠깐 기용되었으나 여론의 반발 속에 5월 8일에 임의탈퇴되었다. 그러나 법적조치와 별개로 리그 차원에서는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고, 1년을 딱 채운 후 2007년 5월에 임의탈퇴가 해제되었다. 중간에 잠시 1군에도 등록되는 등 구단의 비호 속에 지속적으로 복귀를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두산 베어스 팬들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2군에서만 뛰다가 2008년 11월 30일 보류선수 명단 공시일에 다시 한 번 임의탈퇴되었다.

한편 두산은 윤승균이 강간 사건을 일으킨 후 외야 보강을 위해 김창희강봉규를 보내고 강동우를 받아왔으나, 강동우는 두산에서 실패를 겪고 두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 여기에 김동주의 장기부상이라는 악재도 겹치며 2006년 두산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혜성같이 나타난 이종욱이 첫 해부터 윤승균에게 기대하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더니 2007년에는 김현수민병헌이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순식간에 세대교체를 완성해 윤승균의 공백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4]

2010년 말 두산 베어스에서 임의탈퇴가 해제되자 2011년 초 KIA 타이거즈에 입단 테스트 요청을 하였고, KIA 2군에 합류하여 훈련하였다. 마찬가지로 발빠른 외야수 자원이 크게 부족했던 KIA의 사정상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입단을 눈앞에 뒀으나, 윤승균의 과거를 알아낸 KIA 팬들의 영입 반대 릴레이 끝에 구단에서도 입단 직전에 입단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면서 결국 그의 선수 복귀는 완전히 좌절됐다.# ##

3. 사건 사고

3.1. 강간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두산 베어스/사건 사고 문서
3.8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05년 12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운 후 강간하는 초대형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윤승균 본인의 커리어는 완전히 결단났다.

이후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성폭력 치료교육 40시간 이수의 처벌을 받았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보통 대주자 전문 선수는 루상에 나갈 기회 자체가 적은데다가, 대주자를 기용하면 그만큼 상대 배터리의 견제도 심해지기 때문에 어지간히 도루를 잘 해도 20개 정도면 상당히 많이 하는 편이다. 강명구가 대표적인 사례.[2] 참고로 이 해에는 유독 대주자 선수들이 도루 랭킹 상위권에 이름을 많이 보였는데, 윤승균 바로 다음 등수가 당시 대주자/대수비로 경험을 쌓고 있던 이대형(37개), 공동 8위에는 강명구(21개)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3] 둘 다 공소권 없음으로 처벌은 받지 않게 되었지만, 윤재국은 곧바로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되었고 임재철 역시 복무를 오래 미룰 수는 없었다.[4] 특히나 이종욱과 김현수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오며 병역특례까지 챙겼다. 민병헌은 2007 시즌 이후 주전에서 멀어졌다가 2010 시즌이 끝나고 경찰 야구단으로 입대했지만, 그동안 정수빈의 등장과 함께 임재철을 비롯한 다른 야수들이 주전으로 잘 활약하면서 큰 공백은 없었고 민병헌은 전역 후 리그 정상급 외야수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5] 동생 궈용웨이도 같은 팀에 있었다. 일반적인 대졸 야구성수의 커리를 타고 형보다 3년 일찍 프로에 진출.[6] 강간은 아니고 강간미수+주거침입이었다.[7] 물론 이는 서준원이 범죄를 저지른 대상이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인 점, 서준원이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수 개월 간 구단에 알리지 않고 은폐하다가 입건이 되고 나서야 알린 점 등 추가적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요인이 없었다 하더라도 윤승균이 사건을 일으켰을 당시의 반응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 이어졌을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