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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1:48:33

송원국

송원국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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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64번
김정규
(1992~1997)
송원국
(1998~2004)
권영준
(2007~2008)
}}} ||
파일:중고차딜러 송원국.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안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No.
송원국
宋元國 | Song Won-Kook
출생 1979년 10월 26일 ([age(1979-10-26)]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 입단 1998년 2차 1라운드 (전체 4번, OB)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8~2004)
지도자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7)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8~2019)
안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9~)

1. 개요2. 선수 경력
2.1. 비극적인 교통사고, 그리고 은퇴
3. 은퇴 후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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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B-두산 베어스 소속의 내야수. 現 안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

전통의 야구 명문 광주일고 출신인데, 이 당시 광주일고 내야진은 미래의 올스타로 구성 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 당시 광주일고의 내야진은 1루수 최희섭, 2루수 송원국, 유격수 이현곤, 3루수 정성훈으로[1] 이루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막강한 내야진이었다.

다만 고교 졸업 후 1998년 신인 지명에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대신 OB 베어스의 2차 1라운드 전체 4번으로 지명을 받았다. 계약금도 1억 8000만 원으로 고졸 야수 치고는 꽤나 많이 받았을 정도로 기대되는 유망주였으나, 정작 프로 데뷔 후에는 팔꿈치 부상, 간염 등으로 인해 3년간 단 한 순간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했다. 실제로 이 때 몇 번이나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다가 그때마다 2군 매니저가 조금만 더 해 보자며 말렸다고 한다. 고교 시절의 위상과 다르게 점차 잊혀지는 유망주가 되는 듯 싶다가, 2001년 모든 것이 뒤집혔다.

당시 영상

2001년 6월 23일은 송원국에게 잊지 못할 순간일 것이다. 원래 2군에 있다가 김동주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겨 1군에 급히 콜업되면서 잠실로 올라와 1군 선수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날 SK 와이번스와 스코어 6:6으로 맞선 9회말 2사 만루, 김인식 감독은 대타로 송원국을 냈고, 그는 그렇게 프로 데뷔 후 첫 타석에 들어서게 되었다.[2] 타석에 들어선 뒤 SK 투수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쳐 끝내기 만루홈런을 만들어냈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즉, 1군 데뷔 첫 타석 9회 말 2사 대타 초구 끝내기 만루홈런이라는, 두세개만 붙어도 흠좀무할 수식어들이 동점 상황에 올라와서 어쩔 수 없이 빠진 역전만 제외하고 모두 모인 어마어마한 기록을 작성한 것. 여담이지만 당시 송원국이 데뷔 후 처음으로 1군에 올라왔다고 하자 어머니와 동생, 삼촌 등 송원국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잠실야구장까지 직관을 왔는데,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러한 대기록을 남겼다.

그러더니 8월 8일에는 현대 유니콘스와 스코어 5:5로 맞선 9회말 2사 2, 3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이렇게 해서 붙은 별명이 9회말의 사나이. 덕분에 200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면서 우승 반지도 하나 챙겼다.

팀에서 선배 안경현의 뒤를 이을 차세대 2루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도 이 시점 즈음부터였다. 발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단단한 체격에서 뿜어지는 파워 히팅 능력이 있었고, 2001년 당시에는 팀에 몇 없던 좌타자라는 점도 매력이었다.[3] 이런 상황에서 건국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좌타 거포 유재웅과 송원국은 큰 기대를 모으는 것이 당연한 판이었다. 그리고 2002년 5월 22일 잠실 한화전에서도 7회 말 정수근의 대타로 들어선 뒤 또 만루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타를 휘두르며 주전 자리를 꿰어차는 듯 했다. 그러나...

2.1. 비극적인 교통사고, 그리고 은퇴

그러나 잘 나갈때 즈음 발생한 교통사고가 그의 야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말았다. 때는 2002년 8월 9일, 팀 동료였던 유재웅과 함께 자신의 차를 타고 잠실야구장으로 출근하던 중, 송파구 풍납동 인근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뒤집히는 전복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송원국의 왼쪽 다리가 차에 끼는 바람에 결국 왼쪽 무릎 인대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이후 독일까지 가서 무릎 수술을 받고 약 2년간 재활에 매달렸지만 선수 생활을 하기에는 몸이 너무 망가져버렸고, 결국 2004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나이는 겨우 25세. 유재웅도 당시 송원국과 함께 교통사고에 휘말렸는데, 송원국에 비해 부상 정도가 경미했기에 어떻게든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4]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한동안 야구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자동차 판매 딜러, PC방 운영 등 개인 사업을 하며 야구와 전혀 연관없는 일을 하다가 2017년부터 홍익대학교 야구부의 코치를 맡으면서 오랜만에 야구계로 돌아왔다.#

2018년에는 모교인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2019년 9월부로 감독의 자살로 인해 공석이 된 안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5]

안산공고 감독으로 부임 후 그저그런 전력이었던 안산공고를 경기도 내 강팀으로 변모시키며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다. 오현석, 김용완, 박일훈 등 프로지명도 꾸준히 배출해내고 있으며 2022년에는 무려 16년만에 2개 이상의 전국대회에서 4강 진출이라는 업적도 달성하고 있다.

4. 기타

5. 관련 문서



[1] 반대로 이현곤이 3루를 보거나 정성훈이 유격수를 보기도 했다. 실제로 정성훈은 프로 데뷔 초기인 해태 시절까지만 해도 주로 유격수로 출장했다. 반대로 이현곤은 2009년 이전까지 주 포지션이 3루수였다.[2] 당시 두산 김인식 감독과 송재박 타격코치는 송원국을 대타로 내면서 변화구는 건드리지 말고 직구만 공략해서 치라고 지시했다. 팀 베테랑이었던 김호 역시 자신이 쓰던 배트를 송원국에게 줬다고 한다.[3] 물론 장타력이 있는 좌타자로 심재학이 있긴 했지만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2001년 이후로는 성적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4] 하지만 유재웅도 아마 시절의 기대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가늘고 길게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2012년 시즌 후 은퇴하였다.[5] 전임 감독은 성남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던 홍상욱. 당시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후원금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고,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1주일 뒤에 경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자살 직전 부인에게 혼자서 책임지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 야구장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