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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0:38:39

홍우태

홍우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27번}}}
이진
(1989~1993)
홍우태
(1994~1997.6.29.)
박상현
(1997.6.30.~1997)
한화 이글스 등번호 29번
김성한
(1996~1997.5.24.)
홍우태
(1997.6.30.~1998)
임창식
(1999~2001)
한화 이글스 등번호 11번
지연규
(1994~1998)
홍우태
(1999~2001)
김병준
(2002)
KIA 타이거즈 등번호 83번
김종국
(2011~2012)
홍우태
(2013~2018)
김지훈
(2019)
}}} ||
파일:울산공고 홍우태.jpg
<colbgcolor=#0b1966><colcolor=#ffffff>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No.
홍우태
洪宇泰 | Woo-tai Hong
출생 1971년 11월 19일 ([age(1971-11-19)]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미성초 - 성남중 - 성남고 - 계명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4년 2차 1라운드 (전체 7번, OB)
소속팀 OB 베어스 (1994~1997)
한화 이글스 (1997~2001)
지도자 성남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5~2006)
성남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7~2008)
부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0)
KIA 타이거즈 3군 투수코치 (2013~2014)[2]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4~2017)[3]
KIA 타이거즈 2군 불펜코치 (2018)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9~)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12)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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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의 코치, 현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

서울 성남고와 대구 계명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포수 김성태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국가대표팀에서도 선발되었다. 그리고 1994년 OB 베어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지명 당시만 해도 죽을 힘을 다해 던져도 133km/h가 최고 구속이었던 아리랑 볼러였다. 그래서 프로 무대에서 상당히 험난한 경쟁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고, 지명 당시만 해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좌완도 아닌 우완이 133km/h가 최고 구속이었으니 당연한 지도...

그러나 홍우태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바이킹 수준으로 꺾이는, 속된 말로 죽여 주는 포크볼이었다. 그 각도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낙폭으로는 KBO 최고로 불리는 예술의 포크볼이었다. 고교와 대학 시절에 그 똥볼을 가지고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 포크볼이었다. 그래서 "홍포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1994년 깜짝 선발로 낙점받아 당시 해태의 에이스였던 이강철과의 맞대결에서 5월 4일, 첫 선발로 등판하여 156구 완봉승[4]을 거두었고, OB 베어스의 선발로 자리매김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는 8이닝을 투구하여 졌잘싸로 2:1 패배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 공 느린 투수의 성공으로 볼이 느려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여겨졌었다. 1994년에 규정 이닝까지 채우면서 완투만 여섯번으로 7승 1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52로 준수한 성적을 냈다. 여담으로, 스탯티즈에는 1994년의 홍우태가 평균자책점 10.35로 역대 한시즌 최저 WAR[5] 으로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ERA 및 WAR 모두 수정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 신인 때의 성적이 결국 커리어 하이였다는 것.

원채 구속도 떨어지고 가벼운 새털 직구에 포크볼 이외에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던 그에게 KBO의 무대는 방위 복무까지 겹치면서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6] 결국 신인 이후 별 볼일 없는 커리어를 남기면서 1997년 6월 30일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 박상현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고, 2000년도에 선수협 파동이 일어나서 앞장을 서고 불이익을 받았다.[7] 그리고 2001년 한화에서 은퇴하였다. 현역 때의 보직은 주로 패전처리. 그나마 선발 경험도 있어서 많은 이닝을 소화 가능해 패전처리로는 자기 몫을 해 주는 투수이기는 했다.

그래도 한화 시절 1999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며 우승 반지는 하나 껴보고 은퇴했다.[8]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는 모교인 성남고등학교에서 아마야구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이희수 감독 옆에서 코치로 일했다. 2006년 이희수 감독이 지도자 은퇴를 선언하자 2007년부터 성남고 감독을 맡아 그 해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전주고에게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9]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성남고 선수들에게는 포크볼보다 체인지업을 가르치는데 주력했는데 아직 성장중인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구질 위주로 익히게 한다는 게 철학이었다.

2012년부터 KIA 타이거즈에 영입되어 스카우트 직을 수행했고, 2013 시즌부터 프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KIA 팬들은 그의 현역 시절에 보여 주었던 사기적인 포크볼을 투수들에게 제대로 전수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규 시즌 시작 전에 뜬금없이 1군 불펜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이동되었다. 2014년 6월 KIA 투수진의 부진으로 김정수가 3군으로 내려가면서 이대진이 불펜코치에서 1군 메인으로 승격되자, 1군 불펜 투수코치로 콜업되었다.

이후 2018시즌이 끝나고 재계약에 실패했다.

진흥고 인스트럭터 시절 문동주에게 투수 전향을 권유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2019년부터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중이다.

4. 여담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4 OB 32 148⅓ 7 11 2 0 0.389 3.52 136 11 71 85 68 58 1.355
1995 3 7 0 0 0 0 0.000 2.57 10 0 3 0 3 2 1.857
1996 15 26 0 2 0 0 0.000 6.92 31 8 12 20 25 20 1.61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7 한화 5 9⅔ 0 0 0 0 0.000 7.45 11 1 6 4 8 8 1.655
1998 24 36⅔ 0 0 0 0 0.000 4.66 51 2 15 26 19 19 1.773
1999 31 43⅔ 1 2 0 0 0.333 6.18 52 8 22 39 38 30 1.603
2000 18 44⅓ 0 3 0 0 0.000 6.90 48 4 24 29 35 34 1.579
2001 25 29⅓ 1 4 0 3 0.200 7.06 46 1 12 14 24 23 1.943
KBO 통산
(8시즌)
153 345 9 22 2 3 0.290 5.06 385 35 165 217 220 194 1.548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4 5완투
(9위)
1완봉
KBO 통산 5완투 1완봉

6. 관련 문서


[1] 1990학번[2] ~6월 9일[3] 6월 10일~[4] 9이닝 기준으로는 KBO 기록을 세웠다.[5] -2.42[6] 방위병 시기 때 이종범과 같이 입대했다.[7] 1차 선수협 파동 당시 본인의 직책은 총무였고, 개인적인 것보다 후배들과 대의를 위해 앞장섰다고 밝혔다.[8] OB 시절이었던 1995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군입대로 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9]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진야곱은 최우수선수급 활약을 기록했으나 동료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모든 개인상을 다 양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