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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社会人野球
흔히 일본 야구계가 아시안 게임에 내보내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인 야구 소속 비선출 선수들이 아니라 고교, 대학 야구부 출신으로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에 소속된 '선출'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옛 실업야구단과 선수들[1]을 상상하면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도하의 주역들 역시 이런 레벨의 사회인 야구 소속 선수들이었다.
사회인 야구 선수 중 일부는 이미 프로에 갈 수 있는 수준임에도 원하는 팀에 가기 위해 소속만 사회인 야구인 경우가 있었다.[2] 후쿠도메 코스케는 일본생명, 후루타 아츠야는 토요타, 노모 히데오는 신일본제철, 코사카 마코토는 JR 동일본, 스기우치 토시야는 미츠비시 중공업, 초노 히사요시는 혼다 사회인 야구단, 우츠미 테츠야는 도쿄가스, 마츠나카 노부히코는 신일본제철 키미츠,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도시바 후추, 후쿠모토 유타카는 마쓰시타 전기에서 뛰고 프로에 입문했다. 이렇듯 일본의 사회인 야구에서는 대한민국과 달리 드물게도 NPB급 기량의 선수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인 야구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봐야 한다.
90년대까지는 올림픽에도 사회인 야구와 대학야구부가 중심이 된 아마추어 선수들이 대표팀으로 출장[3]했으나, 2003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부터는 프로 1군 주전 선수들 중심의 대표팀이 출장해왔다.[4][5] 그 외에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등 마이너한 국제대회의 경우 사회인 야구 연합팀 혹은 단일팀이 출전하는 경우가 많다.
2. 역사
1878년 신바시 철도국의 철도관계자들이 꾸려서 만든 신바시 스포츠 클럽(新橋アスレチック倶楽部)을 일본 최초의 야구단이자 일본 최초의 사회인 야구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신바시 사나가와에 보건장(保健場)이라는 운동장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야구장이라고 한다.이후 사회인 야구는 점차 성장을 거듭해 1927년에 출범된 도시대항야구대회(都市対抗野球大会)는 일본 최초의 실업야구대회로 규정되고 있다.
1951년에는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日本産業対抗野球大会)가 창설되었고 1971년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全日本クラブ野球選手権大会)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사회인 야구는 성장세를 이뤄나갔다.
3. 분류
- 기업 구단 또는 회사 등록 구단(会社登録チーム)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식 야구단. 옛 한국에 있던 실업 야구에 해당한다. 해당 기업에서 선수를 선발해서 운영하며 당연히 월급도 받으면서 야구를 한다. 드래프트에서 원하는 팀에 뽑히지 않거나 혹은 지명되지 못 했을 때 입단하며, 대부분 경식야구 대회는 기업 구단들이 싹쓸이하고 있기에 논란이 일기도 한다. NTT나 미쓰비시 같은 대기업들은 각 공장별로 야구단을 운영[6]하고 있으며 이러한 다수 팀을 운영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때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기업별 1팀만 참가 가능하도록 룰을 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도시대항야구대회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졌던 탓에 결국 이 규칙은 사라졌다.
프로 지망생이 많은 만큼 한 팀에서 오래 뛰는 선수가 많지 않다. 100년 가까이 되는 일본의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한 팀에서 10년 넘게 뛰면 기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20대 후반에 프로에 진출하는 노망주도 많다.[7] 오치아이 히로미츠,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쓰야같은 일본 야구계 레전드들이 거쳐가기도 했으며 초노 히사요시나 후쿠도메 코스케처럼 "특정 구단(대체로 요미우리) 아니면 다 X까!"라며 자기가 원하는 팀에 지명될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간혹 있다. 역으로 프로의 러브콜을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사회인 야구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 세계보다 최고 페이는 적어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인듯.[8][9] 은퇴 후에는 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일하게 되며[10] 대부분의 회사는 선수로 뛸 때도 오전에는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만 훈련 및 경기를 갖는다.[11] 실제로 단 100% 이런 것은 아니다.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은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와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가 있는데 보통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오전에 회사 근무를 하고[12], 오후에 야구 연습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야구를 그만두면 아예 회사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고용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야구에만 전념할 수는 있지만 야구를 그만두면 회사도 퇴사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13] 아마 프로를 노리는 선수들은 계약직을, 프로에 꿈이 없거나 프로에 갈 자신이 없는 선수는 정규직을 선호할 듯.[14][15] 월급은 대기업 팀들 기준[16] 초봉 30만 엔 정도에 일반적인 대기업 사원처럼 수당이랑 보너스 등이 들어온다고 한다. 또 대회에서 입상할 시 추가 보너스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일반적으로 프로에 가지 않고 사회인 야구에서 30대 중후반까지 꾸준히 야구를 하는 선수들의 경우 은퇴할 때 기준 35~40만 엔까지 월급이 올라간다고 한다. 나무 배트를 사용하고 대부분의 장비 및 규칙은 일본프로야구에 따르나 콜드게임이나 승부치기 제도[17]가 도입되는 등의 독특한 규칙도 존재한다.
일본 드라마 루즈벨트 게임이 기업 구단을 보유한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간혹 프로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여기 오기도 한다. 2018년 아시안 게임 일본 국가대표 중 유일한 프로 출신인 호소야마다 타케시가 바로 이런 사례. 이 선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학력도 나름 되고 야구 실력도 백업인생이더도 프로에서 나름 뛰었기 때문에 토요타 자동차 야구부에 정직원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18] 토요타에서 받는 연봉은 600만 엔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활동하였던 스다 코타, 마츠모토 케이지로는 팀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후 각각 JFE히가시니혼,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2019년 도시대항전 우승멤버[19]로 활약하였다. 이외에도 특이 사례로 프로에서 방출된 선수가 사회인 야구로 갔다가 다시 프로에 복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프로와 사회인 간 선수 빼내기 문제로 인해 터진 야나가와 사건으로 인해 현재 일본프로야구 출신 사회인 야구 선수는 두 시즌을 사회인 야구단에서 보내야만 프로에 복귀할 자격을 얻는다는 규정이 생겨서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물다. 야나가와 사건 이후 이런 선수는 딱 세 명 존재한다.[20] 그런데 그나마도 2명[21]은 프로 2기 때 처음 1군을 밟았고, 나머지 1명은[22]프로 1기 때만 1군을 밟고 2기 때는 2군에만 있었다. 즉 프로에서는 전혀 활약을 못 한 선수들이었다. 2022년 기준 고졸 1년차 때 2군 타격왕을 거머쥐었던 21세[23] 야마시타 코타(전 요미우리)가 이 테크를 노리고 미츠비시중공 East 경식 야구부에 입단했었다.[24] 이 기록의 보유자가 4명이 될 수 있을지도 관건. 야마시타 코타는 2021년에 방출 당해 2022년부터 사회인 야구에서 뛰므로 2024년부터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할 수 있다.
- 광역 복합 기업 구단(広域複合企業チーム)
'21세기형 클럽팀의 형상'을 모토로 2003년부터 시행된 기업 구단의 형태. 기업 구단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기업 구단과의 차이점은 팀을 대표하는 기업을 메인으로 두되 선수 수급은 해당 지역 인근에 있는 다른 기업의 선수들로 구성하며 급여의 경우 고용주. 즉 팀 대표 기업에서 급여 등을 부담한다. 이러한 형태로 운영되는 팀은 일본제철을 메인 기업으로 두는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 일본제철 토카이 REX가 대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형태의 운영도 결국 메인 기업이 받쳐 준다는 전제가 붙어 있어야 안정적으로 팀 운영이 가능하다. 당장 상기된 카즈사 매직과 토카이 REX는 일본제철이라는 굵직한 기업을 메인으로 두고 있어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페즌트 이와테라는 팀은 중소기업이 중심이 된 형태에다 야구부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광역 복합 기업 구단으로 시작한 터라 구단 운영에 점차 한계를 드러내면서 선수들이 퇴단하고 스폰서를 구하는데 난항을 겪었고 끝내 2015년을 마지막으로 폐부되어 사라졌다. 2024년부터 활동을 재개한 닛산 자동차 큐슈 야구부가 전신인 칸다 빅토리즈의 선수 채용 체계를 계승하기로 하면서 광역 복합 기업 구단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 클럽팀(クラブチーム)
기업 활동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인 유시에 의해 운영되는 경식 야구단. 이중에서도 기업들이 컨소시움을 만들어 운영하는 팀도 있으며 유명인사가 팀원들을 모아서 운영하는 팀도 있다. 하나의 기업 소속팀이 아니다보니 월급이 없고, 오히려 팀에 참가비를 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만, 후원회나, 지방자치단체등에서 후원금을 받는 팀도 있고, 여러 기업 사원들로 모인 컨소시엄 팀같은 경우는 각 회사의 지원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아래 풀뿌리 야구와의 차이점은 일본야구연맹에 정식 등록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야구 연맹이 주최하는 3대 대회(도시대항, 일본선수권, 클럽선수권)에 출장할 수 있고, 연식을 주로 쓰는 풀뿌리 야구와는 달리 이곳은 무조건 경식 야구라는 점이 다르다. 기업에서 창단한 클럽팀의 경우 해당 기업의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클럽팀에 비해 프로 진출이 조금은 용이하다. 퇴근 이후에나 연습 시간을 가질 수 있고 휴일에만 시합을 할 수 있는건 일반 클럽팀과 똑같지만 일단 고정적인 수입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 카야마 신야(소프트뱅크)의 사례를 살펴보면 카야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동산 회사에 취업했는데 마침 입단한 그 해에 회사에서 클럽팀을 새로 창단한 덕분에 그곳에서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뛴 후 기업 구단인 JX-ENEOS에 입사하여 1년을 더 뛰고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카야마 외에 이러한 형태로 프로에 진출한 사례로는 오카다 요시후미나[25] 모리 유이토 등이 있다. 실력은 천차만별이긴 하나 일반적으로는 기업 구단보다 전력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연습 환경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기량 향상 면에서 클럽팀이 불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 구단에서 프로에 간 선수는 못해도 매년 최소 몇 명씩은 나오지만 클럽팀에서 프로에 간 선수는 통산 31명에 불과하다.[26]
본래 기업 구단으로 시작했으나 모회사의 구조조정이나 야구부의 통폐합 등 모종의 사유로 야구부 운영이 어려워지면 클럽팀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JR 홋카이도 경식 야구 클럽이 대표적인 사례며 보통 이런 식으로 클럽팀이 되 버리면 얼마 못 버티다 폐부 수순을 밟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나 클럽팀으로도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가는 팀도 있고 회사 사정이 나아지거나 하면 다시 기업 구단으로 재전환되는 경우도 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클럽팀으로 활동하다 기업 구단으로 돌아온 미츠비시 자동차 쿠라시키 오션즈가 이런 경우다.
- 풀뿌리 야구단(쿠사야큐, 草野球)
한국의 사회인 야구와 같은 성격을 띄는 사회인 야구단을 말한다.[27] 그냥 동네 야구 수준에서 꽤 전문적인 수준까지 다양하다. 풀뿌리 야구단이 참가하는 대회들은 대부분 나무배트가 아닌 알루미늄 배트가 사용되며 주로 연식야구공[28]을 사용한다. 한국은 사회인 야구도 경식공을 주로 쓰는 경우가 많은것과 차이점이다. 연식 야구공을 사용해서 그런지 몇몇 팀은 타자가 헬멧을 안쓰고 모자만 쓰고 야구하는 팀들도 있다. https://youtu.be/hZrcp3ksxTg[29]
4. 리그
간단히 설명하자면 경식 야구공은 일반 프로 구단이 쓰는 야구공으로 경식 야구공을 쓰는 리그는 실업야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고 연식 야구공은 사회인 야구단이 쓰는 공으로 연식야구공을 쓰는 대회들은 순수 아마추어들이 출전하는 풀뿌리 리그, 한국의 사회인 야구와 같다.4.1. 경식 야구
4.1.1. 도시대항야구대회
해당 항목으로.4.1.2.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
社会人野球日本選手権大会본래는 1951년에 개최한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日本産業対抗野球大会)가 전신인 대회로 위의 도시대항야구대회가 사회인 팀들의 거점 도시를 대표하는 야구 대회였다면 산업대항야구대회는 사회인 팀들의 사업 분야를 대표하는 대회다. 때문에 출전팀 선발 조건도 지역별 선발이 아닌 사업 분야별로 선발했다.
그러던 것이 고도경제성장 시기가 끝난 1973년을 끝으로 대회는 완전히 막을 내렸고 이듬해인 1974년에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로 전면 개편되었다. 대회 자체는 산업대항야구대회를 계승하는 것이지만 대회 역사는 계승하지 않기에 산업대항야구대회 우승 기록과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 우승 기록은 별개의 기록으로 취급한다.
역대 모든 대회가 관서지방[30]에서 개최되었다. 마이니치 신문사가 일본야구연맹과 함께 주최하고 잇으며 스포츠닛폰, 쿄세라돔이 후원하고 있는 대회다. 다만 인지도나 인기면에서 도시대항전에게 밀리고 있고 관객동원도 저조한 수준이라 2006년에 참가팀을 26개팀에서 32개팀으로 늘리고 도시대항전과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 우승팀에게도 출전권을 부여하는등 흥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참고로 1991년부터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팀과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 우승팀이 맞붙는 전일본아마추어야구왕좌결정전(全日本アマチュア野球王座決定戦)도 존재했지만 1997년이후 폐지되었다.
4.1.3. 지구 연맹에서 주최하는 야구 대회
地区連盟主催大会4.1.4.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
全日本クラブ野球選手権大会도시대항전에는 엄청난 팀들이 몰려 대도시의 팀의 경우 예선을 뚫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때문에 1976년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 대회가 창설되었다. 2011년 기준 일본야구연맹에 소속된 클럽팀 259팀 중 16팀만이 출전하기 때문에 342팀 중 32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도시대항전보다 더 빡센 구멍을 자랑한다. 마이니치 신문과 일본야구협회, 일본야구기구가[31] 공동주최하며 미즈노가 스폰서로 참가하고 있다. 도시대항은 물론, 일본선수권보다도 인기가 없다.
4.2. 연식 야구
- 덴노배 전일본연식야구대회(全日本軟式野球大会)
- 국민체육대회 연식야구대회(国民体育大会 軟式野球競技会)
- 전일본연식야구대회(全日本軟式野球大会)
- GBN 전국동네야구대회(GBN全国草野球大会)
- 전일본여자연식야구선수권대회(全日本女子軟式野球選手権大会)
5. 사회인 선수의 프로 진출
사회인 야구는 프로 구단의 입장에선 좋은 선수 공급처이다. 대개 '즉시 전력감'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많이 포진된 곳이 바로 사회인 야구이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사회인리그에 진출한 선수보다는 고교와 대학을 모두 거친 뒤 사회인에 진출한 선수들의 기량이 대체로 뛰어나다. 신체능력이 가장 전성기인 25~26세에 프로 진출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많은 아마야구 지도자들을 거쳐오면서 육체적 및 기술적으로 완성된 선수들이 많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데뷔 첫 시즌부터 1군 주전 멤버로 뛰는 사례가 많다.[32]
하지만 그만큼 성적에 대한 압박도 많이 받게 되는데 일단 나이가 최소 20대 중반이니 고졸 선수마냥 성장을 바랄 수도 없는 처지고 애초에 육성해서 쓰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 구멍난 자리를 메우려고 데려온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1군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주지 못하면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게다가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으니 그만큼 전성기도 짧을 수밖에 없고, 자연히 에이징 커브도 빨리 찾아오게 되니, 선수생명을 길게 이어가기가 어렵다. 실제로 상위픽이라고 해도 성적이 안 나오면 몇 년만에 방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하위픽의 경우는 1~2년 내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칼같이 정리당한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지 않고 사회인에 진출한 선수들의 경우에는 당장의 성적을 내야 할 압박이 비교적 적다. 연령대가 대졸선수와 같다보니[33] 즉시전력감 평가를 받은 선수가 아닌 이상 1~2년 정도는 구단에서 시간을 투자해가며 추가적인 육성을 별도로 행하면서 1군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사회인 야구 출신 선수들은 주로 투수가 많으며, 야수의 경우는 거포보다는 주로 수비, 컨택, 도루에 치중한 똑딱이내지 툴가이 유형 선수가 많다. 사회인 야구는 대학야구에 비해서 스몰볼이 심하고 일본의 경우 아마추어의 파워히터 비율이 한국보다 낮다 보니[34] 진짜 훌륭한 파워히터들은 못해도 대졸 때 프로에 간다. 따라서 2020년 기준 사회인 야구의 파워 히터는 씨가 마르다 싶은 정도.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에 가기에는 급이 모자란 선수가 대부분이다.[35] 실제로 2010년대 사회인 야구 출신 야수 중 시즌 20홈런을 넘긴 선수를 대보라고 하면 이노우에 세이야와 미야자키 토시로[36]를 제외하고는 딱히 없었다가 2021년 스기모토 유타로가 시즌 최종 32홈런을 기록하면서 겨우 1명이 추가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5라운드, 미야자키는 6라운드로 중하위픽이며, 스기모토는 10라운드로 최하위 중에 최하위픽이다. 거기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1군 주전으로 정착했다.[37]
일본이 아무리 고졸에 비해 대졸을 선호한다고 해도 고졸로 프로를 지망한 선수가 프로 지명을 못 받아서 강제로 대학에 가듯, 대졸 선수 중에도 대졸로 프로를 가고 싶었으나 지명을 못 받아서 차선책으로 사회인 야구를 갔다가 프로에 진출한 경우도 꽤 있다. 이 중 미야가와 테츠(세이부)[38]처럼 1라운더로 뽑히는 경우도 있으니 나름 괜찮은 선택이다.[39] 그러다보니 指名漏れ(미지명)이라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대졸 사회인 출신 프로선수들이 꽤 많이 보인다. 이들 대부분이 대졸 때 지명을 못 받아서 억지로 사회인 야구에 간 사례.[40][41]
2020년대 들어서서 한국의 대학 야구 같은 느낌으로 일본의 사회인 야구 풀이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대졸에 대한 선호도는 아직도 높은 편이라 한국처럼 대졸에 대한 질적 저하, 비선호는 다행히도 없는데 대졸사회인의 경우 한국에서 대학+군대를 갔다온 거랑 별 차이도 없다 보니 더더욱 밀리는 추세. 이미 상술했듯 파워히터는 씨가 말라서 프로 기준에선 다들 공갈포 느낌이라 로또픽으로 간혹 들어오는 정도고 어지간하면 똑딱이 야수는 상위지명을 하지 않는 최근 트렌드까지 생기면서 사회인 야구 야수 상위픽은 이제 정말 손꼽는다.[42] 그나마 희망이던 투수들도 예전처럼 1라운더로 많이 뽑히지도 않는다. 물론 가장 최근 드래프트인 2022년 드래프트 때만 해도 대졸사회인+1년 드래프트를 재수한 요시무라 코지로[43]가 1라운더(야쿠르트)로 뽑혔으니 투수의 경우 아직은 한국 대졸보단 낫다.
지명 인원은 고졸 및 대졸에 비해 적은 편으로 이는 육성 지명으로는 사회인들이 오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육성 지명으로 받는 금액은 회사에사 받는 금액보다 적기 때문에 사회인들은 지배하 드래프트로만 지명하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자리잡은 터라 지명 인원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포기하고 경쟁의 연속인 프로야구를 선택하는 것은 도박수에 가깝기 때문에 프로의 지명을 받더라도 입단 여부를 심사숙고 하기도 한다.[44] 이런 점 때문에 사회인 선수들의 드래프트 지명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사회인 야구 선수들은 드래프트를 신청하지 않고, 전원 지명대상이 된다. 이는 예전 KBO와 동일하다. 이 때문에 종종 프로를 포기해서 전혀 프로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지명되어 지명 직후에는 입단 거부를 고려하다 뒤늦게 입단하는 선수들이 나온다.(특히 대기업+하위픽 조합이면 더욱.)
6. 사회인 야구단 일람
기업 구단만 서술. 취소선은 현재 휴부 중인 기업 구단.- 홋카이도 지구 연맹
홋카이도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항공자위대 치토세 | 홋카이도 지구 연맹 | |
일본제철 무로란 샤크스 | ||
홋카이도 가스 |
- 토호쿠 지구 연맹
토호쿠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자위대 아오모리 | 아오모리현 야구 연맹 | |
JR 모리오카 | 이와테현 야구 연맹 | |
토요타 자동차 동일본 | ||
JR 동일본 토호쿠 | 미야기현 야구 협회 | |
일본 제지 이시노마키 | ||
77 은행 | ||
JR 아키타 | 아키타현 야구 연맹 | |
TDK | ||
야마가타현 야구 연맹 |
- 호쿠신에츠 지구 연맹
호쿠신에츠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FedEx | 나가노현 야구 연맹 | |
바이탈넷 | 니가타현 야구 연맹 | |
JR 니가타 | ||
후시키 해륙 운송 | 토야마현 야구 연맹 | |
로키테크노 토야마 | ||
IMF BANDITS 토야마 |
- 칸토 지구 연맹
칸토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일본제철 카시마 | 이바라키현 야구 연맹 | |
히타치 제작소 | ||
JR 미토 | ||
일본 웰니스 스포츠 대학 | ||
이바라키 토요펫 | ||
이바라키 닛산 | ||
에이젝 | 토치기현 야구 연맹 | |
SUBARU | 군마현 야구 연맹 | |
일본통운 | 사이타마현 야구 연맹 | |
후카야 구미 | ||
올 프론티어 | ||
SUN 홀딩스 | ||
TS 테크 | ||
JFE 동일본 | 치바현 야구 연맹 | |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광역복합] | ||
JR 치바 | ||
사기노미야 제작소 | 도쿄도 야구 연맹 | |
JR 동일본 | ||
도쿄 가스 | ||
메이지 야스다 생명 | ||
NTT 동일본 | ||
일본 웰니스 스포츠 대학 도쿄 | ||
세가 사미 | ||
JP 자산 증권 | ||
혼다 | ||
ENEOS | 카나가와현 야구 연맹 | |
토시바 | ||
미츠비시 중공 East | ||
- 토카이 지구 연맹
토카이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야마하 | 시즈오카현 야구 협회 | |
오지제지 | 아이치현 야구 연맹 | |
JR 토카이 | ||
토카이 리카 | ||
토호 가스 | ||
토요타 자동차 | ||
미츠비시 자동차 오카자키 | ||
일본제철 토카이 REX[광역복합] | ||
제이 프로젝트 | ||
세이노 운수 | 기후현 야구 연맹 | |
혼다 스즈카 | 미에현 야구 연맹 | |
- 킨키 지구 연맹
킨키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르네스 코요 스포츠 유정 전문학교 | 시가현 야구 협회 | |
카나플렉스 | ||
시마즈 제작소 | 교토부 야구 연맹 | |
일본신약 | ||
니치다이 | ||
NTT 서일본 | 오사카부 야구 연맹 | |
오사카 가스 | ||
파나소닉 | ||
일본생명 | ||
리세이샤 국제 의료 스포츠 전문학교 | ||
미키하우스 | ||
일본제철 히로하타 | 효고현 야구 연맹 | |
미츠비시 중공 West | ||
고베 빌더즈 | ||
- 츄고쿠 지구 연맹
츄고쿠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시티라이트 오카야마 | 오카야마현 야구 연맹 | |
미츠비시 자동차 쿠라시키 오션즈 | ||
츠네이시 블루 파이리츠 | 히로시마현 야구 연맹 | |
하쿠와 빅토리즈 | ||
JFE 서일본 | ||
MSH 의료 전문학교 | ||
JR 서일본 | ||
일본제철 스테인리스 야마구치 시걸즈 | 야마구치현 야구 연맹 |
- 시코쿠 지구 연맹
시코쿠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JR 시코쿠 | 카가와현 야구 연맹 | |
아크 배리어 | ||
시코쿠 은행 | 고치현 야구 연맹 |
- 큐슈 지구 연맹
큐슈 지구 연맹 | ||
구단명 | 소속 연맹 | |
큐슈 미츠비시 자동차 | 후쿠오카현 야구 연맹 | |
JR 큐슈 | ||
오키 데이터 컴퓨터 교육 학원 | ||
사이부 가스 | ||
후쿠오카 의건 스포츠 전문학교 | ||
닛산 자동차 큐슈[광역복합] | ||
큐슈 종합 스포츠대 | 오이타현 야구 연맹 | |
일본제철 오이타 | ||
나가사키현 야구 연맹 | ||
혼다 쿠마모토 | 쿠마모토현 야구 연맹 | |
큐슈 공과 자동차 전문학교 | ||
선도 시장 경식 야구부 | ||
다이후쿠 로지스틱스 | ||
쿠마모토 골든 라크스[56] | ||
미야자키 우메다 운전학원 | 미야자키현 야구 연맹 | |
미야자키 복지 의료대 | ||
오키나와 전력 | 오키나와현 야구 연맹 |
7. 출신 선수
-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선수만 기재.
8. 논란
NPB의 프로 야구단, 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주니치 드래곤즈가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사회인 야구를 악용해 자신들의 팀에 1,2년 후에 영입되는 것을 전제로 사회인 야구단에 심어 뒀다가 국제 대회에서 그들을 주로 출전시키는 등 사회인 야구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경우가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88] 특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내야수들 중 2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NPB로 진출하는 등 사회인 야구를 프로 구단의 로스터 절약용 팀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과 비판이 따르고 있다.[89]9. 관련 문서
[1] 예를 들면 과거 한국엔 한국화장품 야구단, 포항제철 야구단, 한국전력공사 야구단, 롯데 자이언트 등 실업 구단과 한일은행 야구단, 상업은행 야구단, 농협 야구단 등 금융팀,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전신이 되는 육군 경리단 야구단, 공군 성무 야구단, 해병대 야구단 등 군(軍)팀 등이 있었다. 당대의 실업야구는 그 수준이 무시하기 어려운 정도였으며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대다수가 프로 야구단으로 넘어갔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고교 유망주들이 프로야구 직행 대신 대학 진학을 많이 하면서 대학야구도 수준이 높았다. 선동열도 해태 타이거즈 입단 전 한국화장품과 먼저 계약했을 정도다.[2] 1993 ~ 2006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 존재했던 역지명 제도의 영향이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거나 사회인 야구에서 3년 이상을 뛰면 선수가 스스로 원하는 팀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었다. 역지명제도는 2007년 폐지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팀에 들어가기 위해 사회인 야구를 방패로 삼는 경우가 많고, 구단과 모종의 커넥션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이 심해진 경우가 하술할 인천과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사건이다.[3] 하술할 스기우라 마사노리가 대표적인 사례다.[4] 프리미어 12와 올림픽 야구에는 일본인 메이저리거는 출전하지 않는다. 이건 한국도 똑같다.[5] 일본 위키에 따르면 1998년 프로선수가 포함된 한국 대표팀에게 힘도 못쓰고 패하는 것을 보고 프로팀이 출전해야 된다는 의견이 커졌다고 한다.[6] 예를들어 미쓰비시 중공업만 보더라도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등 산하 기업장 별로 운영되었다.[7] 일반적으로 대졸+사회인 야구 테크를 탄 선수는 한국나이 26세에 프로에 진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후쿠다 슈헤이, 이시카와 아유무(각 한국 나이로 27세 프로 진출), 모리와키 료스케, 셋츠 다다시(각 한국 나이 28세 프로 진출), 아베 쇼타(한국 나이 30세 프로 진출), 쿠사노 다이스케, 야마자키 타카히로(각 한국 나이 31세 프로 진출) 등의 극단적으로 늦은 나이에 프로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이런 선수들은 완벽한 즉전감으로 살아남지 못하면 얼마 못 가서 퇴출되는 경향이 크고, 즉시전력으로 1군에서 살아남는 선수도 에이징커브가 빨리 오다 보니 그렇게 프로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기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술한 쿠사노는 7시즌 629경기나 출장했지만, 야마자키는 4시즌 22경기 출장에 그쳤다. 셋츠도 2009년 신인왕, 2012년 사와무라상을 받는 등 소프트뱅크의 에이스였지만 2016년부터 급격히 기량이 하락하여 2018년 은퇴하였다.[8] 이 분야의 레전드로는 1992, 1996, 2000년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일본생명의 '미스터 아마야구' 스기우라 마사노리가 있다. 올림픽 야구 통산 5승으로 이 분야 세계기록 보유자. 특히 2000년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프로선수가 일부 포함되었음에도 대표팀에 선출되었다. 당연히 사회인 야구에서도 에이스였으며 도시대항 야구에서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연속 출장했다. 은퇴 뒤에도 일본생명 팀의 코치와 감독을 거쳤다.[9] 하지만 이는 프로야구 월급이 생각보다 적었던 과거의 얘기가 대부분이며 2010년 이후로는 이런 이유로 프로를 거부하는 선수는 드물다. 프로야구의 월급이 워낙 올라서 만년 백업으로 1군에서 한 10년 뛰어도 어지간한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에서 평생 벌 돈을 다 벌기 때문이다. 현재 대기업 야구단이라고 해도 본봉 1,000만엔 찍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나, 프로야구는 1군 최저연봉이 1,500만엔이며 1군 고정백업이면 그래도 2,000~3,000만엔씩은 받는다.[10] 단 은퇴한 선수가 회사에 남는다고 해서 무조건 일반 업무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인 야구단도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있기 때문에 정말 야구 능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은 일반 정직원 근무를 시키지 않고 야구부의 감독이나 코치를 시킨다. 따라서 나이를 먹은 후에도 계속해서 야구 관련 일을 하면서 회사에 남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감독이나 코치를 계약직으로 외부에서 고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것마저도 장담 불가.[11] 예시. 이 영상에 나오는 선수는 타케다 유라는 선수로, 1999년생이다. 메이지대학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하면서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 미츠비시 중공 West에 입사했다. 이후 2023년 드래프트에서 드래프트 재수를 했으나 구위와 구속이 이전보다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또 지명받지 못했다. 2024년 현재도 해당 팀에서 뛰고 있으며 드래프트 삼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터가 5월에 열린 2024년 도시대항전 예선 1차전을 참관하러 와서 구위와 구속이 회복됐다고 칭찬하는 코멘트를 남기며 프로 진출에 대한 희망을 아직 놓지 않고 있는 선수.[12] 이 업무는 회사마다 다른데, 아무래도 운동부 출신들이 연구직같은 전문 업무를 하기엔 어렵기 때문에 보통 생산직, 영업직, 사무보조 등으로 일을 한다. JR 쪽은 역무원을 시킨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아리요시 유키처럼 오전에는 야구를 하고 오후에는 회사일을 한 경우도 있다.[13] 단 소설 루즈벨트 게임에 나오는 회사를 보면 야구부 선수들이 계약직인데도 업무와 야구를 모두 하기 때문에 계약직이라고 야구만 하는 것은 또 아닌 듯하다.[14] 다만 프로를 노리는 선수도 사회인 야구에 가는 경우는 상당수가 프로에서 지명받지 못해서 간 경우라서 정규직으로 입사한 후 프로에 지명되면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원래는 은퇴하면 기업에 남으려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선수가 갑자기 야구에 뜻이 생겨서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후 회사까지 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세가사미의 타카시마 슈고 같은 경우. 그러나 타카시마는 결국 프로에 가지 못하고 독립 리그에서 뛰다 결국 야구를 접었다.)[15] 의외인 사실은 일부러/프로에 지명받지 못해서 사회인 야구에 쭉 남은 선수들 중 상당수는 정규직으로 입사했다고 해도 야구를 은퇴하면서 동시에 퇴사한다고 한다. 회사일이 적성과 안 맞는다고 생각하여 아마야구 코치를 하든 야구 레슨을 하든 야구로 돈을 벌고 싶어한다. 물론 회사마다 다른 것이 도시바의 경우 소속 야구선수들 중 70% 정도는 은퇴 후에도 회사에 남아 회사 일을 한다고 한다.[16] 당연히 기업 구단이라고 해도 작은 회사의 팀이면 연봉이 낮다.[17] 연장 13회까지 진행되었음에도 무승부가 되었다든지, 경기시간이 4시간 이상 된다면 승부치기를 시행해 승부를 가린다.[18] 일본은 고교/대학 야구부원들에게도 최소한의 공부는 시킨다. 전공도 원하는 전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법학부, 공학부 등을 졸업하는 선수도 꽤 많다. 그런데도 야구하느라 공부를 못해서 직장일에 애로사랑이 크다고 말이 나올 정도다.[19] 단 마츠모토는 보강 선수로 JFE히가시니혼에 들어온 임시 멤버였다.[20] 참고로 야나가와 사건은 1961년에 일어난 일이다. 즉 60년이 되도록 3명밖에 없었다.[21] 우노 마사미, 스기하라 요. 참고로 둘 다 1군 경험은 한 시즌이 끝이다. 우노는 통산 6경기 5이닝을, 스기하라는 통산 1경기 2.1이닝을 투구했다.[22] 와타나베 타카오. 유일하게 셋 중 복수의 시즌에 1군 경기에 출장했다. 그래봤자 통산 3시즌 4경기 출장이고, 4경기 모두 대수비 출장에 타석에 선 적도 없었다.[23] 2000년생.[24] 현재는 미츠비시 중공 West로 소속 변경.[25] 오카다의 경우는 꽤나 축복받은 경우인데 아시카가시로 내려와서 일반 클럽팀에서 활동했지만 팀이 아시카가시 관공서 관할이었던 덕분에 연습시설 구하기도 어려운 여타 클럽팀과는 다르게 아시카가 종합운동장 야구장을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시카가 가스의 촉탁 사원으로 입사하여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았고 프로 진출을 앞두고서는 프로에서 버티지 못해도 다시 재입사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만큼 오카다를 적극 지지해주었다.[26] 이 31명의 경우 드래프트 지명 당시 클럽팀 소속이던 선수만 한정한 것으로 카야마처럼 클럽팀에서 뛰다 기업 구단으로 이적한 경우는 더하지 않는다. 또한 이 31명 중 2024년 현재 현역은 모리 유이토 한 명뿐이다.[27] 다만 한국의 사회인 야구와 같은 성격을 띄는 경식야구 클럽팀도 있기는 하다. 일본의 순수 비선출 아마추어들이라고 연식야구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당장 와세다대학 아마추어 야구동아리에서만 뛰다가 요코하마에 지명된 카사이 타카마사의 사례만 봐도 대학의 공식 야구부가 아닌 아마추어 야구부 중에서도 경식 야구 동아리가 있다.[28] 고무등을 이용해 만든 공, 소프트볼과는 다르다.[29] 영상을 보면 타자들이 헬멧을 안 쓰고 타석에 들어선다.[30] 한신 고시엔 구장(1974~1979) - 오사카구장(1980~1989) - 홋토못토 필드 고베(1990-1996) - 교세라 돔 오사카(1997-현재)[31] 일본프로야구를 운영하는 기구[32] 이런 이유에서 대졸 사회인 출신 선수들의 경우 로또성으로 긁어본다고 해도 육성선수로 뽑기보다는 하위픽으로 뽑아준다. 긁어보는 지명이라고 해도 바로 프로에서 통하는 것이 아니면 얼마 못 가서 정리당할 나이이기 때문에 육성선수로 지명해봤자 큰 의미가 없고 지명 거부 가능성이나 높아지기 때문. 육성선수 계약금, 월급은 사회인 야구 시절과 별 차이도 없거나 연차가 쌓인 선수의 경우는 오히려 더 적은 경우도 존재한다.[33] 칼같이 프로에 가는 경우는 사회인 야구에서 3년을 뛰고 프로에 가다 보니 오히려 한 살 어리다.[34] 이는 일본 고교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면서 고교 선수들의 장타력이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고, 한국 야구의 공인구가 일본 공인구보다 반발력이 좋아서 파워가 덜해도 장타가 잘 나오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모두 확실한 근거는 없다.[35] 드래프트를 보면 사회인 야구 거포 유망주의 경우는 보통 하위픽인 경우가 많다. 프로에 지명된 후에서도 2군 본즈로 남거나, 극단적으로는 2군에서도 못 치면서 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6] 2018년에 28홈런을 치긴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시즌 평균 15홈런 정도를 기록하는 중장거리 교타자이며 거포형 선수가 아니다. 즉 플루크에 가까운 기록. 이후 2023년에 20홈런을 치면서 5년 만에 20홈런을 기록했다.[37] 스기모토는 아예 30대에 접어들고나서 1군 주전자리를 얻었다. 이노우에 세이야는 2021시즌 현재 타격 부진으로 다시 주전에서 밀려난 상태.[38] 조부대 재학 중 지명받지 못하고, 도시바에 갔다.[39] 애초에 프로야구를 지망하는 대졸 선수가 지명되지 못하면 사회인 야구, 독립 리그, 졸업 유예 정도밖에 선택지가 없다 보니 당연한 셈. 일본 대학야구는 졸업 유예자가 한국과 달리 공식경기에 나가지 못해서 스가노 토모유키 이외에는 유예를 한 경우가 없다. 독립 리그는 돈을 받긴 하지만 최저 연봉이 80만 엔, 평균 연봉이 120만 엔으로 상당히 열약하다. 무엇보다도 독립 리그 수준이 낮다보니 프로에서 저평가되기도 쉽다. 그래서 연봉 300만 엔 정도는 주고, 프로에 못 가도 회사에 남을 수 있는 사회인 야구를 제일 선호하는 것. 보통 사회인 야구 기업 구단에 못 들어가면 독립 리그로 간다.[40] 물론 대졸 때는 전혀 지명 가능성이 없어서 프로 생각 없이 드래프트에 참여도 안 해놓고 사회인 야구로 간 대졸사회인 프로야구 선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 저런 것은 아니다. 가끔 사회인 야구에서 급성장해서 뒤늦게 프로에 가기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으니.[41] 일부 사회인 야구 출신 선수 중에는 사회인 야구에서 드래프트 재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시카와 아유무(롯데), 모리와키 료스케(세이부), 후쿠다 슈헤이(오릭스)가 그 예시. 이중 이시카와는 아예 1라운드 중복지명까지 받았다.[42] 최대어라고 해도 1라운드 지명은 거의 못 받는다는 점에서 사실상 한국의 대졸 수준이나 다름없어졌다.[43] 고쿠가쿠인대-도시바[44] 히로시마에 입단한 스에카네 쇼타가 이런 경우로 지명 당시 가족들과 상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가 프로 입단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휴부] [광역복합] [휴부] [휴부] [49] 휴부 이후 13년이 지난 2023년 9월에 야구부 활동을 재개할 방침을 밝히며 팀 재건에 착수했다. 2024년부터 코칭스탭과 선수들을 소집해 최종적으로 2025년에 부활동을 재개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휴부] [광역복합] [휴부] [휴부] [광역복합] [휴부] [56] 슈퍼마켓 체인점에서 운영하는 팀이다 보니 선수들도 슈퍼마켓 관련 일을 한다.(심지어 바쁠 때는 가끔 시즌 중인데도 오후까지 종일 근무를 시킨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카츠키 료지(전 롯데)의 경우 고로케 튀기기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정말 고로케를 튀기는 게 본업이었다고 한다. 쵸노 히사요시의 오뎅장수 드립과 비슷한데 농담에 불과하고 실제 오뎅을 만들지 않았던 쵸노와 달리 이 쪽은 정말 고로케를 팔면서 야구를 했다는 점이 차이다.[57] 혼다 본사 야구부(도쿄도 소재)와는 다른 팀으로 미에현 스즈카시 소재. 혼다는 이 둘 외에도 쿠마모토 현에도 야구부를 하나 두고 있다.[영구제명] 검은 안개 사건 연루.[59] 현 NTT 서일본.[휴부] 2010년부로 구조조정상 휴부.[61] 참고로 이쪽은 2003년 "노모베이스볼 클럽(NOMOベースボールクラブ)"이라는 사회인 야구단을 창단해 직접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NPB에 5명의 선수를 1군 무대로 데뷔시켰다. 지금은 모두 현역이 아니다.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선수도 1명(스다 겐타) 있다.[62] 철강 산업 불황으로 인해 1995년부터 휴부. 이후 2008년에 해산.[63] 현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64] 이후 NTT 서일본 큐슈로 이름을 바꾼 뒤 2001년 해체.[65] 아래의 스미토모 금속 카시마(신일본제철 카시마, 이바라키현 소재)와는 다른 팀으로 와카야마현 소재. 1999년 폐부.[66] 2002~2005년 노무라 카츠야가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 2006년 해체.[67]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회사인 세이부 철도 계열의 회사이다. 모기업의 경영합리화 정책으로 2000년 야구부 해체.[68] 실제로 차장 자격증이 있다.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따 놓았다고.[69] NTT 사업부가 재편되면서 1998년 해체되었고 선수단은 NTT 동일본에 편입되었다.[영구제명] 검은 안개 사건 연루.[71] 원래 고졸로 프로에 지명되었으나 방출되고 난 뒤 사회인 야구를 전전하다 다시 프로에 복귀했다.[72] 1999년 해체, 토시바 본사 야구부에 편입되었다.[73] 아시카가시 내에 있는 기업이나 관공서 등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로 이루어진 클럽팀. 순수 클럽팀 가운데서는 가장 야구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팀으로 연습장 구하기도 쉽지 않은 다른 클럽팀과는 다르게 이 팀은 아시카가시 종합 운동장 야구장을 사용 할 수 있는 메리트가 있다. 이 덕분에 클럽팀이라면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에 2차례 진출하기도 했으며 클럽팀 대회인 전일본 클럽 선수권에선 11회 우승을 차지해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74] 이후 NTT 홋카이도로 개칭하였으며 1999년 NTT 그룹 재편에 의해 클럽팀으로 전환. 2006년 폐부.[75] 현재는 일본제철 카즈사 매직.[76] 은퇴 후 다시 이 팀으로 돌아와 플레잉코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77] 현 NTT 동일본.[78] 현재는 미츠비시 자동차 쿠라시키 오션즈.[79] 상술했듯 세이부 철도 계열의 회사로 모기업의 경영합리화 정책으로 2000년 야구단 해체. 이시게는 네모토 리쿠오 전무의 주도로 아예 작정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시킬 수 있도록 그룹 산하 사회인 야구단으로 빼돌린, 드래프트를 실질적으로 우회한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80] 1999년 부원의 감소와 NTT 산하 야구부 통합 문제로 클럽팀으로 전환. 2002년 해산.[복권] 검은 안개 사건 연루로 영구제명되었다가 35년이 지난 2005년 복권.[82] 니혼대에서 첫 번째, 혼다에서 두 번째로 드래프트 지명을 거부.[83] 현 일본제철 카시마.[84] 위의 닛산 본사 야구부(카나가와 현 소재)와는 다른 팀. 휴부 후 감독과 주요 멤버들이 '칸다 빅토리즈'라는 클럽팀을 중심으로 재결합했으며 2024년부터 이들 선수단이 다시 원 소속 구단으로 돌아오면서 광역 복합 기업 구단으로 활동을 재개했다.[85] 1999년 구조조정으로 폐부.[86] 일본프로야구를 건너뛰고 곧바로 MLB로 진출했다.[87] 현 ENEOS.[88] 이는 2군에 외국인 용병을 무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는 반면 그렇게 보유한 만큼 국내 선수의 로스터 보유 한도도 줄기 때문이다.[89] 특히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대놓고 1군 출전 경력이 있는 포수를 기용하거나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전 메이저 리거 투수를 데려다 쓰는 등의 행위는 일본 사회인 야구 협회에서도 좋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