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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8:25:43

이와세 히토키

이와세 히토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2004 아테네 올림픽 로고.svg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2004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ffffff 1999~2000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1]릴리프 포인트(RP)라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한 중간계투 평가 수치였다. 릴리프 포인트에 관해선 홀드(야구)의 해당 항목 참고.]}}}
1998년
오치아이 에이지
(주니치 드래곤즈)
19.70RP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28.15RP(1999년)
26.20RP(2000년)
2001년
키즈카 아츠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8.40RP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ffffff 2003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2]릴리프 포인트(RP)라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한 중간계투 평가 수치였다. 릴리프 포인트에 관해선 홀드(야구)의 해당 항목 참고.]}}}
2002년
이시이 히로토시
(야쿠르트 스왈로즈)
34.60RP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31.15RP
2004년
오카모토 신야
(주니치 드래곤즈)
24.80RP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5~2006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 시상재개[3]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46세이브[A](2005년)
40세이브(2006년)
2007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6세이브[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9~2010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2008년
마크 크룬
(요미우리 자이언츠)
41세이브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41세이브(2009년)
42세이브(2010년)
2011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1세이브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2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2011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1세이브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토니 바넷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33세이브
2013년
니시무라 켄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42세이브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13번}}}
이노마타 타카시
(1983~1987)
이와세 히토키
(1999~2018)
하시모토 유우키
(2020~)
}}} ||
파일:李와세.jpg
이와세 히토키
岩瀬仁紀 | Iwase Hitoki
생년월일 1974년 11월 10일 ([age(1974-11-1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아이치현 니시오시
포지션 마무리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2라운드[역지명]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99~2019)[7]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2018)

1. 개요2. 커리어
2.1. 프로 입문 이전2.2. 데뷔 초창기2.3. 베이징 올림픽의 악몽
2.3.1. 베이징 올림픽 이전 국제대회에서의 이와세2.3.2.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이와세2.3.3. 이와세의 국제대회 통산성적
2.4.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3. 피칭 스타일4. 기타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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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좌완 마무리 투수로 동시에 소속팀이었던 주니치 드래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8]

불펜투수로서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경기 등판 기록(1002경기)[9]과 일본프로야구 통산 세이브 기록(407세이브)의 보유자이다. 동시에 2006년의 46세이브로 일본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기록자였다.[10]

2023시즌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한 투수 중 유일한 좌완이기도 하다.[11] 일본에서 주로 쓰이는 별명은 死神(사신)[12]

2. 커리어

2.1. 프로 입문 이전

아이치현립 니시오히가시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 시절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아이치대회에서 투수로 선발등판하여 노히트노런을 기록한적이 있다.

아이치대학에 진학이후에는 외야수로 활동하였고 3학년 시절에는 월등한 활약을 펼치며 대학 올재팬에 선출되며 타자로서 주목받고 있었다.

대학 졸업이후 NTT도카이에 입사하며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시 투수로 전향하였다. 사회인 야구 2년차인 1998년 도시 대항야구 대회에 신일본제철 나고야 팀에 잠시 임대되어 보강 선수로 선발등판하였는데 월등한 활약을 펼치며 당시 사회인 야구 최강의 좌완투수라고 평가되었다.

1998년 신인 드래프트 회의에 참가하여 고향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를 역지명하여 입단하게 된다.

2.2. 데뷔 초창기

프로 데뷔 후 줄곧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99년 이와세 히토키-오치아이 에이지-이상훈-선동열로 이어지는 황금 불펜진을 구축해 루키 때부터 한국팬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13] 2003년까지 계투로 뛰다[14]가 기존 마무리였던 오츠카 아키노리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이적하고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부임한 2004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였다. 물론 마무리로 지명되자마자 부상을 당하긴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하며 주니치와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하단에 후술하겠지만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발되기도 했고, 2004년과 2006년의 리그 우승, 그리고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15]이 되며 주니치 황금기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그렇게 2008년에도 알렉스 카브레라한테 프로 통산 첫번째 끝내기 홈런을 맞긴했지만 성적이 확실히 그 前 해 활약이 워낙에 좋았고 2008년 활약도 나쁘지않았기에 당연히 국가대표에 승선해서 베이징 올림픽에 나오게 되었다.

2.3. 베이징 올림픽의 악몽

2.3.1. 베이징 올림픽 이전 국제대회에서의 이와세

모두가 다 아는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이와세를 설명하기 전에 이와세의 이전 국제대회에 대해 설명하자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도 발탁되어 참가한다.
결론적으로, 이와세가 베이징 이전에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의 통산 성적은 9.2이닝 4피안타 12탈삼진 3사사구(2볼넷 1사구) 1실점(무자책) ERA 0.00[16]으로 사신이라는 일본 내에서의 별명에 걸맞은 엄청난 모습을 국제전에서도 보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2.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이와세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이와세는 팀의 기대를 걷어찼는데,

우선 본선 리그 한국전 첫경기에서 동점 상황에 중계 등판[17]했으나 대타로 기용된 좌타 김현수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역전, 3루수 무라타 슈이치[18]와 포수 아베 신노스케의 실책[19]과 더불어 3실점[20]으로 패전. 당시 이와세는 리그내에서 좌타자를 상대로 0할대의 피안타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산 피안타율도 고작 1할대로 자타공인 좌타 킬러다. 그야말로 좌타자에게는 저승사자같은 존재였던 셈. 다만 김현수가 좌타임에도 불구하고 좌완에게 강하다는 사실을 호시노 감독이 간과했을 뿐. 하지만 좌타에게 .300, 우타에겐 .396이었는걸... 좌완 낸건 당연한 거였음 당시, 포수였던 아베 신노스케도 대타로 좌타자 김현수가 나오자 갸우뚱했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21] 그래도 이때까지는 다들 '상대가 상대[22] 이기도 했고 야구하다 보면 질 수도 있지...'라는 반응이었다. 또한, 이와세를 위해 약간의 변호를 해주자면, 2사에 이종욱의 번트 타구를 플라이 아웃 처리해 무난하게 이닝이 종료되었어야 하나, 3루수 무라타가 낙구 지점을 잘못 포착하여 더듬는 바람에 3:2로 종료되었어야 할 스코어가, 이후에 아베의 '중견수 앞 안타'급 2루 송구 실책까지 겹쳐 5:2까지 벌어진 것이므로 어느정도 참작될 여지는 있다. 이후 9회말에 일본 타자들이 1점을 만회했으므로 수비수들의 실책만 아니었다면, '3실점 패전'이 '1실점 노디시전'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었던 셈.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첫경기는 이러한 이유들로 그렇다 쳐도 이후 경기들에서는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역대급 방화들이 터지는데...

그리고 리그전 종료[23] 후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한국. 이미 본선 리그의 4패 중 홀로 2패[24]를 기록할 만큼 부진한 지라 준결승에서 어떻게든 그 굴욕을 씻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8회, 2:2 동점 상황에서 후지카와 큐지의 다음 투수로 등판했으나 또다시 좌타자 이용규에게 안타를 맞고 1사 1루 상황에서 당시 국민역적이라 불리던 좌타자 이승엽을 만났다. 여태껏 이승엽과 상대한 성적이 상당히 좋았지만, 이 타석에서 역전 우월 투런 홈런을 헌납했다. 그리고 다음타자 김동주한테 안타 하나 더 맞고 결국 와쿠이 히데아키로 교체되었다. 그나마 첫경기는 3실점중 1실점만이 자책이었으나, 준결승전은 3실점이 모두 3자책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방화였다.

훗날 스톡킹에 나온 이진영은 이와세의 공이 위력적이지 않았고 슬라이더의 각도 작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습관도 다 읽혔다고[25]. 한국 타자들이 후지카와 큐지의 습관도 읽어냈다고는 하는데 후지카와의 직구 구위에 대해서만큼은 엄청난 호평을 해준 것과는 대조적. 결국 이후 G.G.사토고마워요 사토 실책성 플레이 등이 나오며 일본이 스코어 6:2로 패배했고, 일본의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다(…).

경기 후 그에 대한 양국 네티즌의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한국은 우리에게 귀중한 승리를 두 번씩이나 안겨 준 그에게 허용투수전주 이씨, 한국팀의 숨겨진 병역브로커의 칭호를 부여했고, 일본에서는 '저거 혹시 한국에서 보낸 스파이 아니냐?' 라는 뜻의 イ・ワセ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부여했다[26].

이와세의 베이징 올림픽 최종 성적은 4경기 4.2이닝 0승 3패 10피안타 10실점 6자책점 평균자책점은 자그마치 11.57.로 이 기록이 얼마나 처참한 위업이냐면, 일본팀의 총 전적이 4승 5패에 총 실점은 28점이다. 한마디로 팀 총 실점의 1/3 이상을 이와세 혼자서 내준 것이다. 그것도 마무리 투수가.

이 기록에는 미국과의 마지막 예선전 져주기 게임에 나와 일부러 타자들에게 얻어맞으며 4실점한 기록은 고려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져주기 게임 자체가 애초에 프로로서 불명예스러운 것이며 프로 정신을 망각한채 팬을 우롱하는 정신나간 행태이기에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를 비정상 기록이라 보고 제외해도 2.2이닝 6실점(4자책) ERA 13.5로 마찬가지로 처참한 성적이다(...) 즉, 절대적인 실점 수치는 낮아지지만 오히려 지표상 평균 자책점은 거의 비슷 하다는 것을 볼 때, 져주기 게임을 고려해서 그를 성적에서 제외해줘도 그의 베이징에서의 성적은 처참하다는 것.

2.3.3. 이와세의 국제대회 통산성적

베이징 대회 이후 이와세의 국대 커리어는 없다.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베이징에서의 처참한 모습 때문인지 2009 WBC, 2013 WBC같은 메이저 대회에서 발탁되지 못한다.

베이징 기록까지 포함한 그의 국제대회 통산 성적은 14.1이닝 14피안타 16탈삼진 7사사구(5볼넷 2사구) 11실점(7자책) ERA 4.4[27]로 베이징 기록만 고려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지지만, 베이징에서 워낙 처참한 성적을 남겼기에 안 나와주는게 팀에 더 도움이 되는 수준의 참혹한 통산 국대 성적이 되어버렸다.

물론, 평균 자책점만 보면 평범한 수준의 투수기록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실제 2021년 kbo의 평균 팀 방어율이 4.44로 이와세의 통산 국제대회 평균 자책점과 거의 비슷하다. 그렇지만, 국제전은 한점 한점이 아쉬운 상황이 많아 국가에서 최고 투수만을 선발하여 나가는 것이기에 오히려 평범한 성적은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애초에 평균 정도 되는 투수를 데리고 나가는게 국가대표 대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그내에서 위력적인 모습을 보인 투수를 데려가 그 모습을 재현해주길 기대하며 데리고 나가는게 국제대회다. 오히려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던 투수가 국제대회에서 평균 수준의 성적을 내면 오히려 마이너스다.[28] 더군다나 긴 이닝을 던지는 선발도 아니고 경기의 중요한 순간에 나와 1~2이닝만을 소화하는 마무리 중책을 맡고 있는 투수가 평균자책점 4점대라는 것은 경기가 중요한 중후반부에 실점을 많이 한다는 의미이므로 절대 평범한 성적이 아니다. 자국리그에서도 마무리 투수가 절반에 가까운 확률로 실점하면 신뢰를 엄청나게 까먹는 마당에 국제대회의 중요한 경기, 중요한 순간에서의 성적이 저러면 오히려 팀에 마이너스가 되는 수준인 셈.

또한, 긴 시즌을 보내는 한 시즌 리그의 평균 자책점과 접전이 많은 국제대회에서의 자책점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애초에 긴 시즌을 보내는 시즌 중에는 점수가 많이 나는 경우가 많으며 점수차가 일정 이상 벌어지면 경기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4점대의 방어율도 평범하다고 볼 수 있게된다. 하지만, 국제대회는 비슷한 수준의 국가가 맞붙을 때는 총력을 다하기 때문에 접전 상황이 많다. 일례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캐나다의 팀 방어율은 2.29, 쿠바의 경우 2.51, 한국의 경우 2.52, 일본은 2.54 였다. 2006 WBC에서 일본의 팀 방어율은 2.49, 푸에르토리코는 2.08, 한국의 경우 2.00, 멕시코가 2.77이었다. 즉, 리그에서 4점대 자책점은 평균일지 몰라도 국제대회에서 4점대 투수는 부진한 것이 맞고 오히려 평범하다기보다 팀에 마이너스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셈. 심지어, 이와세가 실점을 많이한 경기는 져주기 게임 논란이 있던 미국전을 제외하면 모두 중요한 경기였다. 중요한 경기, 한 점이 아쉬운 상황에 팀의 패배를 확정시키는 점수를 내주며 단기전에서 4점대를 기록한다는 것은 안 나와주는게 팀에 더 도움이 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NPB 리그를 호령한 이와세였지만 이후 메이저 대회인 2009 WBC, 2013 WBC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

2.4.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처참한 퍼포먼스의 영향이었는지 주니치 구단에 항의전화가 엄청나게 걸리기도 했으며, 경기장에선 야유도 받았으며, 심지어 악질 팬들의 협박 편지까지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을 정도였는데 그 영향인지 2008년에는 시즌 평균자책점이 2.94까지 오르면서 결국 통산 평균자책점이 다시 2점대가 되는 부진을 겪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리그 후반전에 이승엽과 재대결한 적이 있는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1루가 찬 상황임에도 고의사구를 지시해서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한 애처로운 에피소드도 있었다. 해설자들은 이와세의 트라우마를 염려한 감독의 배려라고 애써 변호하였으나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 일이다(…)

그래도 올림픽 때 불을 지른 걸 빼면 10년 연속 50경기 등판을 달성하기도 했고 포스트시즌에서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기도 하는 등 완전히 나쁘진 않았던 시즌을 보냈다. 시즌 종료 후엔 직전에 올림픽에서 난타당한 경험이나 구단에 대한 애착 등 여러 가지 영향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고 연봉 4억 3,000만 엔으로 계약하였다. 그후 2009년엔 2승 3패 1홀드 41세이브 평균자책점 2.12를 기록하여 2년 만의 구원왕 수상으로 다시 주니치를 대표하는 수호신의 위엄을 되찾았다.

2009년까지 기준으로 11년 동안 1점대 평균자책점만 6번 기록하고, 3점대를 기록한 시즌도 단 1번(2001년, 3.30)일 만큼 안정된 활약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데뷔 시즌부터 15시즌 연속 50경기 이상 등판 기록을 이어 왔으며 후술하다시피 끝내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1000시합 등판까지 달성환 철완이다.

2010년 이후에는 슬슬 노쇠화가 눈에 보여[29] 주니치에서 후임 마무리를 열심히 키웠...지만, 2014년까지도 주니치의 주전 마무리는 여전히 이와세였다.

이후 2010년 시즌도 세이브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구원왕을 차지하긴 했는데, 예년보다 블론세이브도 은근 많았고 평균자책점임창용에 비해 높은 편인 데다가 임창용의 소속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이와세의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결국 세이브 숫자를 제외하고는 임창용에게 밀렸다는 평가가 일본 내에서도 정설. 성적만 놓고 보면 2008, 2010 시즌이 그의 흑역사에 가깝게 된 셈이다.

이 시기부터 슬슬 노쇠화가 나타나면서 주니치에서 후임 마무리 투수를 찾을 시도도 해봤지만, 노쇠화가 왔다고 해도 아직 이와세 본인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던 데다 주축 셋업맨인 아사오 타쿠야를 제외하면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탓에 2014년까지 계속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2011년6월 16일소프트뱅크 원정경기에서 타카츠 신고를 제치고 일본 통산 세이브 1위에 등극했으며, 9월 4일에는 일본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2013년 4월 18일 야쿠르트와 치른 경기에서는 일본 통산 350세이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렇게 이와세가 기록의 사나이가 된 탓에 이와세가 은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사오 타쿠야는 영원히 마무리로 가는 길이 막힌 채 특급 셋업맨으로 남아있을 기세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2014년 7월 27일 요미우리전에서 일본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해에는 아래에서도 보이듯 정말 오래간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등판 경기 수도 30경기대로 줄어들었다. 결국 후반기에는 마무리 자리를 영건 후쿠타니 고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1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단 한 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의 2억 5000만엔에서 80%가 삭감된 5000만엔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상 이후 이와세의 커리어는 급격하게 꺾이게 된다.

2015 시즌 후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 중 미우라 다이스케의 뒤를 있는 최고령 선수 2위가 되었다. 시즌 시작 시점에서 이와세의 나이 순위는 11위였으나 미우라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시즌 종료 후 은퇴선언을 하였고, 주니치 팀 내 최고령자이자 무려 50세까지 뛰었던 야마모토 마사까지 은퇴하면서 이와세가 드디어 노인정주니치 팀 내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나이 40이 넘도록 아직 팀 내에 선배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주니치가 얼마나 세대교체가 더뎠는지를 대변한다.

2016년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1군에 등록된 선수 중에서는 최고령 선수였다.[30] 아직 미우라 다이스케가 1군에 등판하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5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2.00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으며 2군에 내려갔다. 그리고 미우라가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며 일본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프로 19년차이자 만 42세의 현역 최고령 선수로써 맞이한 2017년에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마무리 자리는 후쿠타니 코지를 거쳐 사이드암 투수인 타지마 신지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지만 주로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활동하며 간만에 50경기 등판을 넘길 페이스를 보여줬고 6월 23일 요미우리전에서 9회 1:0으로 앞선 2사 1,2루 상황에서 등판, 대타 카메이 요시유키를 2루수 땅볼로 잡아내어 세이브를 기록, 통산 세이브 기록을 403으로 늘렸다. 다만 방어율이 4점대까지 치솟는 등 그다지 안정적인 계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2017년 8월 6일엔 요네다 테츠야를 제치고 일본 신기록인 역대 최초 95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이 경기는 요미우리의 주루실수(...)[31]로 인해 이와세가 아베 신노스케[32]를 상대하지 않고 견제구만 2번 던져서 아주 쉽게 경기를 끝냈고 자신의 통산 404번째 세이브도 기록하게 되었다. https://youtu.be/Z5b1He8ew2I 시즌 종료 시점에서 954경기 등판, 57승 51패 404세이브를 기록하였으며, 컴백상 수상과 더불어 연봉도 2500만엔 증가한 7500만엔에 계약을 갱신했다.

2018 시즌부터 투수코치 직을 겸임할 예정이다. 시즌 뒤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코치직에 전념할 것으로 보이면서 서서히 본인의 커리어를 마무리해가는가 했는데, 뜬금없이 시즌 오프 때 도쿄스포츠[33]에서 닛폰햄에서 FA로 데려온 포수 오노 쇼타의 보상선수로 지정될 뻔했다는 충격적인 카더라가 보도되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구단에서 "선수 겸 코치까지 하는 팀 레전드고 이제 은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설마 데려가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와세를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는데 닛폰햄이 드래프트에서 마이웨이를 걷는 또라이 구단답게 진짜로 이와세를 보상선수로 선택했고, 규정에 따라 보상선수로 이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이와세는 "이제 와서 팀을 떠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며 강경하게 이적을 거부했다고 한다.[34] 그제야 발등에 불 떨어진 주니치는 다급히 닛폰햄에게 이와세의 의중을 전달하며 제발 보상선수 지정을 철회해 달라고 필사적으로 빌었고, 결국 규정상 보상선수 미선택 시에 받는 양도금에 웃돈을 더 얹어주는 조건으로 이적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이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땐 도쿄스포츠가 워낙 불확실한 찌라시 보도로 악명높은 데다 정보제공자에 대한 정보도 불확실한지라 다들 도쿄스포츠가 늘 그렇듯이 어그로를 끄는 말도 안되는 찌라시 기사를 냈다고 생각해서 반향이 미미했으나, 이후 산케이 스포츠[35] 등 다른 매체들도 도쿄스포츠와 동일한 내용의 보도를 하면서 이 카더라가 한때는 기정사실화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닛폰햄이 주니치로부터 보상선수 명단을 받았을 때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있는 명단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었고[36] 바로 보상선수를 지명할 것처럼 해놓고서는 해를 한참 넘긴 후에 고작 금전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발표에 다들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는데, 그 흥미있는 명단의 정체가 이와세였고 주니치 구단이 물밑에서 자신들의 삽질을 덮느라고 동분서주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는 얘기.

만약 사실이라면 주니치 드래곤즈 한 팀에서만 20여년을 뛰며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쌓아온 레전드가 평생을 몸바쳐온 구단에 말년에 뒤통수를 맞고 애먼 구단에 가서 커리어를 마감하거나 강제은퇴를 할 뻔한 사태로, 전체 선수단에게 미칠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인 대형 사건이며 현재의 주니치가 얼마나 답이 없는 구단인지 증명하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상술했듯이 워낙 불확실한 찌라시 보도를 자주 내는 도쿄스포츠 출처라는 점도 그렇고, 타 매체의 후속 보도들 역시 도쿄스포츠의 기사를 그대로 썼던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 해프닝이 진짜로 있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페퍼 씨, 어디 가려운 데 없수?[37]

어찌되었건 주니치에 남아 2018시즌을 맞이하게 된 이와세는 나이는 못 속이는지 시범경기에서 3구 연속 피홈런을 허용하는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개막 이후 주니치의 답 없는 투수진 때문에 계녹 1군에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5월 2일 야쿠르트와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경기에서 통산 405번째 세이브를 기록했다. 5월 24일 기준 평균자책점 2.25, WHIP 0.83으로 시범경기때의 부진을 털어내며 만 44세의 고령에도 주니치 불펜의 한 축으로 활약하고 있었으나.. 6월부터 갑자기 후임 마무리 타지마와 더불어 다량실점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며 평균자책점이 5점대까지 치솟아버렸다.

2018년 9월 16일 통산 998번째 등판이자 요미우리와의 도쿄돔 원정경기에서 7회 2아웃 만루 때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여 아베 신노스케에게 생애 첫 만루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날 주니치는 11:3으로 대패하며 6년 연속 루징 시즌이라는 치욕적인 구단 신기록을 경신하고 말았다. 은퇴시즌인데 답 없는 팀 때문에 개고생..

9월 26일 팀 동료 아라키 마사히로, 아사오 타쿠야와 더불어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9월 28일 NPB 통산 1000경기 등판을 달성했다!

2019년에 은퇴경기를 위해 임시로 육성선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3월 2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시범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1번 타자 이노우에 세이야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20년 간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칭해진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은퇴 후에는 중부일본방송주니치스포츠의 해설자로 활동 중에 있다.

3. 피칭 스타일

쓰리쿼터의 폼에서 나오는 최대 149km/h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다. 좌완 쓰리쿼터이기에 좌타자에게 특히 강해서 NPB의 대표적인 좌타자 킬러 투수로 여겨졌다.

물론 평균 140km/h 초반대에서 형성되기에 구속이 장점이라기엔 애매하고 이 선수의 장점으로 뽑히는점은 구속보단 패스트볼의 움직임[38]과 별명인 사신에서 나온 사신의 낫이라 불린 예리한 각의 슬라이더,[39] 정교한 제구력이다. 실제로 46세이브를 거둔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한자릿수의 볼넷을 기록할 정도

전성기에 내려온 이후엔 싱커,커터,커브 같은 변화구를 익혀 떨어진 구위를 커버했다.

4. 기타

의외로 대학 시절에는 뛰어난 타격의 외야수였다. 아이치 대학 리그 역대 2위인 통산 124안타를 기록했고, 0.323 9홈런 64타점을 기록하며 대학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정도. 다만 사회인 시절 완전히 투수로 전향했고 프로에서는 주로 구원 투수로 뛴 탓에 타격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로 통산 타격성적은 54타석 48타수 10안타(2루타 1개) 3타점 타 .208 출 .250 장 .229 OPS .479 으로 표본은 적으나 투수로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타격. 쓸만한 대타도 죄다 써 버린 후반전에 타석에서도 나름 쏠쏠하게 활약해 주었다.

신인 시절인 99년 로베르토 페타지니에게 빈볼을 던졌는데 페타지니가 달려들자 마자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진 페타지니였지만 이 때는 페타지니도 일본 리그 첫 해였기 때문인지 팀원들 대다수가 덕아웃에서 달려나와 말려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40]을 보였는데,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뜯어말리자 진정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시리즈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였는데, 통산 20경기 17.1이닝에 등판해 2홀드 6세이브 평균자책점 0.00[41]이고 현역 도중 생긴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 포함한 포스트시즌 기록은 39경기 36.1이닝 0승 2패 4홀드 16세이브 평균자책점 0.74(CS ERA 1.42)로 주니치의 든든한 가을 수호신으로 활약했다. 그 일본시리즈 세이브들 중 하나는 무려 선발 투수 야마이 다이스케의 퍼펙트 게임마저 제끼고 등판한 2007년 일본시리즈 5차전, 주니치의 53년만의 일본제일을 확정짓는 세이브였단 걸 생각하면 주니치 전성기 이와세에 대한 수뇌진의 절대적인 신뢰를 엿볼 수 있다. 포스트시즌 기록지, 일본시리즈 투구 영상 이처럼 리그에서는 큰 경기 울렁증 같은 것 없이 난공불락의 모습을 보여주던 투수였기에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우리 대표팀의 성과는 더욱 돋보인다.

2018년 11월 13일 은퇴식 도중 스즈키 이치로가 느닷없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깜짝 등장했다. 이 자리에서 이치로는 선물상자를 건네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는듯 어깨를 토닥이곤 곧바로 자리를 떳다. 나중에 이와세의 언급으로는 시애틀 유니폼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

주니치 드래곤스의 연고지인 아이치현의 로컬보이이자 원클럽맨, 그러면서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1000경기 등판이라는 꾸준함과 역대 일본야구 통산 세이브 1위라는 누적을 가졌다보니 웬만한 리그에선 영구결번이 지정될 커리어를 보냈지만 주니치의 까탈스러운 영구결번 눈높이[42]의 영향인지 영구결번이 되지않았다.[43]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홀드 세이브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HBP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이닝 WHIP
<colbgcolor=#dcdcdc,#222222>1999 주니치 65 10 2 - 1 1.57 67 3 22 2 24 73 16 13 74⅓ 1.20
2000 58 10 5 - 1 1.90 66 3 28 1 29 65 20 17 80⅓ 1.17
2001 61 8 3 - 0 3.30 51 3 16 3 19 62 23 23 62⅔ 1.07
2002 52 4 2 - 0 1.06 38 2 15 3 18 66 8 7 59⅔ 0.89
2003 58 5 2 - 4 1.41 47 3 12 1 13 69 10 10 63⅔ 0.93
2004 60 2 3 - 22 2.80 53 4 14 3 17 53 20 20 63⅓ 1.04
2005 60 1 2 2 46[44] 1.88 51 0 8 2 10 52 12 12 57⅓ 1.03
2006 56 2 2 5 40 1.30 40 3 8 0 8 44 8 8 55⅓ 0.87
2007 61 2 4 3 43 2.44 53 3 9 0 9 50 18 16 59 1.05
2008 51 3 3 5 36 2.94 55 2 10 0 10 41 16 16 49 1.33
2009 54 2 3 1 41 2.12 41 2 13 2 15 34 11 11 46⅔ 1.16
2010 54 1 3 3 42 2.25 47 1 13 2 15 41 12 12 48 1.25
2011 56 0 1 7 37 1.48 50 1 10 2 12 45 12 8 48⅔ 1.23
2012 54 1 3 6 33 2.29 44 3 13 2 15 30 15 13 51 1.12
2013 55 2 3 8 36 1.86 48 2 19 1 20 37 16 11 53⅓ 1.26
2014 34 1 2 4 20 3.52 37 1 10 0 10 18 12 12 30⅔ 1.53
2015 1군 기록 없음
2016 15 0 2 2 0 6.10 14 1 3 0 3 5 8 7 10⅓ 1.65
2017 50 3 6 26 2 4.79 37 2 14 1 15 28 19 19 35⅔ 1.43
2018 48 2 0 10 3 4.63 28 3 7 5 12 28 18 18 35 1.01
통산 NPB 19시즌 1002 59 51 82 407 2.31 867 42 244 30 274 813 274 253 985 1.13

6. 관련 문서




[1] 이때의 수상기준은 지금의 홀드가 아닌(이 당시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사용중이었다)[2] 이때의 수상기준은 지금의 홀드가 아닌(이 당시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사용중이었다)[3] 2004년 이후 세이브 포인트 제가 폐지되면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이 폐지되고, 1974~1975년까지(퍼시픽리그는 1976년까지) 시상하던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이 부활했다.[A] 센트럴리그 최다 시즌 세이브 기록.[A] [역지명] [7] 2019년 3월에 은퇴경기를 위해 육성선수 계약을 잠깐 맺는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9년에도 하루뿐이지만 주니치 소속인 셈.[8] 심지어 주니치의 연고지인 아이치현 출신이기도 한데 초-중-고-대학교까지 아이치현의 학교를 다녔다.[9] 아시아 프로야구 선수의 투수 최다경기 등판은 한국 선수인 임창용의 한미일 통산 1004경기였다가, 역시 한국인 선수인 오승환이 2023년 10월 14일 1027경기로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 외 아시아 단일리그 최다경기 등판 기록자인 정우람(1003경기)까지 아시아인 투수 1000경기 출장 기록자는 4명(한국 3명, 일본 1명)이다.[10] 현재까지도 2007년의 후지카와 큐지와 함께 일본인 선수 / 센트럴리그 기록. NPB 전체 기록은 2017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데니스 사파테의 54세이브에 의해 갱신되었다. 한국에서는 오승환이 2006년, 2011년 47세이브를 달성하였다.[11] 이와세 외에 사사키 가즈히로, 다카쓰 신고, 후지카와 큐지, 고바야시 마사히데, 데니스 사파테, 히라노 요시히사,야마사키 야스아키, 마츠이 유키가 가입되어있다. 참고로 에나쓰 유타카는 통산 193세이브로 이 클럽에 7개 차이로 가입하지 못했고 명구회 가입기준은 250세이브 이상이다. 2023시즌에 마츠이 유키가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하면서 유일한 좌완은 더이상 아니게 되었다.[12] 마침 이와세의 커리어를 따라간 등번호인 13번은 타로 카드의 아르카나에서 사신/죽음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유독 자주쓰이는 편이었다. 결정구인 슬라이더는 그의 별명을 따라 사신의 낫이라는 별명을 얻었을정도[13] 선동렬이 1999년 급격한 노쇠화를 드러내며 이름값으로 마무리 한다는 소리 듣다가 시즌 끝나고 은퇴, 1998년 무리한 선발도전으로 부진한 이상훈은 이해에 불펜에서 밥값하고 미국 진출 했기때문에 딱 한해만 볼 수 있었다.[14] 그때까지 선발투수로서 등판한 경기는 2000년 단 한경기였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NPB 공식전에 등판한 1천경기 중 딱 한 경기인 선발 투수 출장경기로 2000년 10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다. 결과는 7이닝 7피안타 1자책점의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되었으며 당연히 이는 이와세 커리어 유일의 선발승[45]이다. 이 승리로 데뷔시즌에 이은 2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는 것을 확정지었다.[15] 우승이 결정된 5차전에서는 8회까지 퍼펙트 피칭을 이어가던 선발 야마이 다이스케 다음으로 등판해 한 이닝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합작 퍼펙트 게임(비공식)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경기의 뒷이야기는 퍼펙트 게임2007년 일본시리즈 항목에 서술되어있다. 일본내에선 아예 2007年日本シリーズにおける完全試合目前の継投라는 제목으로 위키백과 항목이 따로 만들어져있을정도로 일본내에서 이와세 기용에 대해 찬반이 갈린 경기이기도 하다.[16] 즉, 베이징을 제외한 대회에서는 단 1실점만 했을 뿐이며 그마저도 본인의 자책점이 아니라는 것.[17] 정확히는 8회말 2사 2루 위기 상황에 등판해 이승엽을 삼진 처리한 뒤 실점들은 모두 9회에 터졌다.[18] 이종욱의 번트 타구를 낙구 지점 파악을 제대로 못하여, 공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다. 공을 더듬는 사이 3루 주자였던 진갑용이 홈에 들어와 일본은 추가 실점하였다.[19] 다만, 무라타가 놓친 이종욱의 번트 타구는 내야 안타로 기록되었다. 흔히 말하는 기록되지 않는 실책에 가깝다.[20] 3실점 중 1실점만이 자책으로 잡혔고, 나머지 2실점은 비자책으로 기록.[21] 그런 아베도 한국전에 무지하게 약한 것으로 유명하다.[22] 당시 김현수는 0.357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2008년 시즌 수위타자에 등극했다.[23] 그 와중에, 한국과의 예선과 준결승전 사이 미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다시 등판하여 4실점(2자책)을 기록하기도 했다.[24] 한국전과 미국전에서 기록.[25] 이 영상에서 보여준 심수창 해설위원의 반응 그리고 다른 인터뷰에서 당시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투수 윤석민이 내부에서 이와세의 공에 대해 되게 치기 쉽다고 평했다고 증언한걸 생각하면 쿠세가 읽혔던걸로 보인다.[26] 한국 이름을 표기하는 식으로 이 와세라고 쓴 것. 즉, 이와세더러 "넌 일본인도 아니다"라는 소리.[27] 베이징 예선 직전 호주와의 평가전 1이닝까지 포함하면 통산 15.1 이닝 11실점(7자책) ERA 4.11 기록.[28] 이런 선수들을 흔히 국내용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29] 물론 수준급의 실력이었다.[30] 심지어 같은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보다도 한 살이 더 많았다.[31] 호수비로 외야플라이가 잡히면서 안타일 줄 알고 뛰었던 1루주자가 2루를 밟고 지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시 1루로 돌아가며 2루를 밟지 않았다....??? : 반갑다 친구야 이 실책의 주인공은 외야수 시게노부 신노스케.[32] 이와세보다 이 상황을 먼저 눈치챘다.[33] 일본의 대표적인 찌라시 잡지로, 줄여서 도스포,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東スポWeb 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에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의 기레기들이 보통 '동스포'니 '히가시 스포츠'니 하는 식으로 오독을 하는 매체이다. 참고로 이 매체의 위상을 알기쉽게 비유하자면 NPB의 더 선이라고 보면 된다. 즉 산 더미 같은 '아님 말고'식 기사 속에 어쩌다 한줌 진실이 숨어있는 격.[34] 규정상 보상선수로 지정된 선수가 이적을 거부할 시엔 해당 선수는 실격선수로 지정되어 사실상 임의탈퇴 처리가 되며 이전 소속구단을 포함한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다.[35] 이 매체는 스포츠 쪽으로는 카더라 기사가 없다시피하다.[36] 당시 양팀 팬들의 반응은 노인정 구단에서 자리 못잡고 백업 역할만 하다가 어느덧 30줄에 접어들어 남 주긴 아깝고 데리고 있자니 애매해진 1군 벤치급 노망주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예측했었다.[37] 공교롭게도 2023년 한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나왔다. 김강민한화 이글스2차 드래프트로 이적한 것. 그리고 2024 시즌 와다 츠요시가 똑같이 이 사건을 재현했다.[38] 같은 주니치 출신인 카와카미 겐신은 은퇴후 본인 유튜브에서 이와세의 패스트볼 무빙에 대해 극찬했다.[39] 다만 상단에 후술되었지만 이진영이 각이 작다고 평한거 봐선 커터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는데 일본내에서 타자의 무릎뒤까지 돌아간다는 평까지 나온 슬라이더인걸 감안하면 아마 대회 당시 컨디션이 낮았던걸로 보인다.[40] 이 사건으로부터 11년 전에 주니치의 미야시타 투수를 실제로 줘팬 적이 있던 워렌 크로마티는, 그 사건 이후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이 주니치 감독 시절 투수들에게 빈볼을 맞춰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절대 모자를 벗거나 사과하는 모양을 보이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겼다.[41] 원조 '미스터 제로'인 타카츠 신고(11경기 16⅔이닝 2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0.00)보다 등판 횟수와 이닝 모두 많다.[42] 사실 말이 눈높이지 사실상 없는 수준으로 주니치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두 명의 선수는 당시 선수의 은퇴를 종용하기위해 지정된 영구결번이다...[43] 여담이지만 이와세와 같은 시기에 주니치에서 활동했던 카와카미 켄신은 "이와세씨가 영구결번이 되지않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니치의 영구결번은 만들어질수없다(岩瀬さんの背番号が永久欠番にならなければ、これから先、ボクが死んでも他には現れません。)"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44]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면서 아시아 프로야구 최다 세이브이었으나 2006년 1년만에 삼성 오승환이 경신했고, 2017시즌 소프트뱅크의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에 의해 경신됐다.


[45] 기록지, NPB 통산 5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선발등판이 아예 없는 투수는 이가라시 료타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