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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2:27:27

무라타 쵸지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파일:치바 롯데 마린즈 로고.svg치바 롯데 마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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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1px;"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드래프트 제도 미시행 오츠카 야스오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소노다 요시노리 무라타 쵸지 아리토 미치요 마에다 고스케 히에이 다다오미(5)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이노우에 케이이치 다테 야스지 사토 히로마사 박덕용(키쿠무라 토쿠요) 다나카 요시오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모리 시게카즈(5) 하카마다 히데토시 후쿠마 오사무(4) 다케모토 유키오(5) 아이코 다케시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이베 야스지 이시카와 마사루(4) 히가 요시토모(4) 가사하라 에이이치 이시다 마사히코(4)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세키 기요카즈 이라부 히데키 마에다 유키나가(4) 코미야마 사토루(4) 고이케 히데오(5)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요시다 아츠시 타케무라 준이치로 가토 다카야스(3) 사부로 사와이 료스케(4)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시미즈 마사우미(3) 와타나베 마사토 고바야시 마사히데(3) 다카하시 카오루(3) 다나카 료헤이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키타 타카시 니시오카 츠요시 우치 타츠야 쿠보 야스토모(3)
테지마 사토시(3)
야나기타 마사토시(1)
네모토 슌이치(2)(6)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오미네 유타(1)
코베 타쿠미(2)(6)
카라카와 유키(1)
핫토리 야스타카(2)(4)
키무라 유타 오기노 타카시 이시미네 쇼타(4)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후지오카 타카히로 마츠나가 타카히로(4) 이시카와 아유무 나카무라 쇼고 히라사와 타이가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사사키 치하야(4) 야스다 히사노리(4) 후지와라 쿄타 사사키 로키 스즈키 쇼타(4)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마츠카와 코 키쿠치 리쿠(4) 우에다 큐토(4) 니시카와 미쇼
(1) 고교생 드래프트
(2)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4) 하즈레 1라운더
(5) 지명 후 미입단
(6) 1순위가 아니지만 그 해 첫 번째로 지명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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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e5e5e5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3 1954 1955~1956
에바라 요시미 호시노 타케오 노무라 타케시 시미즈 히로카즈 아라마키 아츠시
<rowcolor=#ffffff> 1957 1958~1959 1960~1961 1962 1963
우에무라 요시노부 아라마키 아츠시 오노 쇼이치 사카이 카츠지 오노 쇼이치
<rowcolor=#ffffff> 1964 1965 1966 1967 1968~1969
호리모토 리츠오 코야마 마사아키 츠마시마 요시로 코야마 마사아키 사카이 카츠지
<rowcolor=#ffffff> 1970~1971 1972 1973 1974 1975~1982
키타루 마사아키 나리타 후미오 키타루 마사아키 나리타 후미오 무라타 쵸지
<rowcolor=#ffffff> 1983~1984 1985 1986~1990 1991~1994 1995
미즈타니 노리히로 후카자와 요시오 무라타 쵸지 코미야마 사토루 이라부 히데키
<rowcolor=#ffffff> 1996 1997~1998 1999~2001 2002~2003 2004~2005
소노카와 카즈미 코미야마 사토루 쿠로키 토모히로 네이선 민치 시미즈 나오유키
<rowcolor=#ffffff> 2006 2007 2008 2009 2010~2014
쿠보 야스토모 시미즈 나오유키 코바야시 히로유키 시미즈 나오유키 나루세 요시히사
<rowcolor=#ffffff> 2015~2018 2019~2020 2021 2022 2023~2024
와쿠이 히데아키 이시카와 아유무 후타키 코타 이시카와 아유무 오지마 카즈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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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36秋 1937春 1937秋 1938春 1938秋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0.79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0.81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48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52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05
<rowcolor=#ffffff> 1939 1940 1941 1942 1943
와카바야시 타다시
오사카 / 1.09
노구치 지로
츠바사군 / 0.93
노구치 지로
타이요군 / 0.88
하야시 야스오
아사히군 / 1.01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0.73
<rowcolor=#ffffff> 1944 1946 1947 1948 1949
와카바야시 타다시
한신군 / 1.56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2.11
시라키 기이치로
토큐 / 1.74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 1.84
후지모토 히데오
요미우리 / 1.94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오오시마 노부오
쇼치쿠 / 2.03
마츠다 키요시
요미우리 / 2.01
카지오카 타다요시
오사카 / 1.71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1.85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1.39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1.33
와타나베 쇼조
오사카 / 1.45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1.63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1.30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 1.19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1.75
곤도 히로시
주니치 / 1.70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1.20
카키모토 미노루
주니치 / 1.70
진 바키
한신 / 1.89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카네다 마사이치
요미우리 / 1.84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1.39
곤도 마사토시
한신 / 1.40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 1.94
에나츠 유타카
한신 / 1.81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0.98
후지모토 카즈히로
히로시마 / 1.71
야스다 타케시
야쿠르트 / 2.08
야스다 타케시
야쿠르트 / 2.02
세키모토 시토시
요미우리 / 2.28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아니야 소하치
한신 / 1.91
스즈키 타카마사
주니치 / 2.98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 2.32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 2.81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2.39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마츠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 2.35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29
사이토 아키오
타이요 / 2.07
후쿠마 오사무
한신 / 2.62
코바야시 세이지
히로시마 / 2.20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2.65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2.43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2.17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 1.70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62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17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2.44
나리타 코키
타이요 / 2.05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2.05
카쿠 겐지
주니치 / 2.45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테리 브로스
야쿠르트 / 2.33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36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 2.85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2.34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09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 2.61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2.46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2.22
이가와 케이
한신 / 2.80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60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 2.52
쿠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 1.85
타카하시 히사노리
요미우리 / 2.75
이시카와 마사노리
야쿠르트 / 2.68
천웨이인
주니치 / 1.54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2.21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65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3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2.10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33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크리스 존슨
히로시마 / 1.85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01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9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2.14
오노 유다이
주니치 / 2.58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오노 유다이
주니치 / 1.82
야나기 유야
주니치 / 2.20
아오야기 코요
한신 / 2.05
무라카미 쇼키
한신 / 1.75
타카하시 히로토
주니치 / 1.38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2.06
유키 스스무(1)
난카이 / 2.08
유키 스스무
난카이 / 1.91
카와사키 토쿠지
니시테츠 / 1.98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1.58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나카가와 타카시
마이니치 / 2.08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06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37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42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1.40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오노 쇼이치
다이마이 / 1.98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69
쿠보타 오사무
토에이 / 2.12
쿠보 마사히로
킨테츠 / 2.36
츠마시마 요시로
도쿄 오리온즈 / 2.15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미우라 키요히로
난카이 / 1.57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1.79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1.75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1.61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1.72
<rowcolor=#ffffff> 1970 1971 1972 1973 1974
사토 미치오
난카이 / 2.05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37
세이 토시히코
킨테츠 / 2.36
요네다 테츠야
한큐 / 2.47
사토 미치오
난카이 / 1.91
<rowcolor=#ffffff> 1975 1976 1977 1978 1979
무라타 쵸지
롯데 / 2.20
무라타 쵸지
롯데 / 1.82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28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02
야마구치 테츠지
킨테츠 / 2.49
<rowcolor=#ffffff> 1980 1981 1982 1983 1984
키다 이사무
닛폰햄 / 2.28
오카베 노리아키
닛폰햄 / 2.70
타카하시 사토시
닛폰햄 / 1.84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2.92
이마이 유타로
한큐 / 2.93
<rowcolor=#fff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76
사토 요시노리
한큐 / 2.83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41
코노 히로후미
닛폰햄 / 2.38
무라타 쵸지
롯데 / 2.50
<rowcolor=#fff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노모 히데오
킨테츠 / 2.91
와타나베 토미오
세이부 / 2.35
아카호리 모토유키
킨테츠 / 1.80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2.06
신타니 히로시
세이부 / 2.91
<rowcolor=#fff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이라부 히데키
롯데 / 2.53
이라부 히데키
롯데 / 2.40
코미야마 사토루
롯데 / 2.49
카네무라 사토루
닛폰햄 / 2.73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2.38
<rowcolor=#ffffff> 2000 2001 2002 2003 2004
에비스 노부유키
오릭스 / 3.27
네이선 민치
롯데 / 3.26
카네다 마사히코
오릭스 / 2.50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 2.83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2.83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2.90
<rowcolor=#fff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2.11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1.75
나루세 요시히사
롯데 / 1.82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1.87
다르빗슈 유
닛폰햄 / 1.73
<rowcolor=#ffffff> 2010 2011 2012 2013 2014
다르빗슈 유
닛폰햄 / 1.78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27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1.71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27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98
<rowcolor=#fff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2.24
이시카와 아유무
롯데 / 2.16
키쿠치 유세이
세이부 / 1.97
키시 타카유키
라쿠텐 / 2.72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95
<rowcolor=#fff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센가 코다이
소프트뱅크 / 2.16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39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68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21
리반 모이넬로
소프트뱅크 / 1.88
(1) 당해 수치상 방어율 1위는 같은 팀 소속의 핫토리 타케오(服部武夫, 155이닝 2.03)였으나, 당해 한정으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 대상을 소속 구단의 시합수+60이닝 이상을 소화한 선수로 규정하여 규정상 소화 이닝에 미달한 탓에(164이닝, 당해 난카이의 시합 수인 104시합에 60이닝 추가) 198.1이닝을 던진 유키가 대신 타이틀을 수상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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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다탈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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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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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rowcolor=#ffffff> 1936秋 1937春 1937秋 1938春 1938秋
나이토 코조
나고야킨코군 / 139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196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129
카메다 타다시
이글스 / 137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46
<rowcolor=#ffffff> 1939 1940 1941 1942 1943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282
카메다 타다시
쿠로와시군 / 297
나카오 히로시
도쿄쿄진군 / 179
노구치 지로
타이요군 / 264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253
<rowcolor=#ffffff> 1944 1946 1947 1948 1949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113
사나다 쥬조
퍼시픽 / 200
벳쇼 타케히코
난카이 / 191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 187
타케스에 요시마사
난카이 / 183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 1953 1954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233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33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69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29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273
<rowcolor=#fff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50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16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312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11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13
<rowcolor=#fff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84
곤도 히로시
주니치 / 310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 270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87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31
<rowcolor=#fff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05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07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25
에나츠 유타카
한신 / 401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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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츠 유타카
한신 / 340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67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33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 238
카네시로 모토야스
히로시마 /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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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 193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 207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 176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62
니우라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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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19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21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196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86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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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72
엔도 카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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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하라 히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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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구치 카즈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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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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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구치 카즈히사
히로시마 / 230
나카다 코지
한신 / 194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 247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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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87
사이토 타카시
요코하마 / 206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159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 241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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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카즈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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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187
이가와 케이
한신 / 206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194
이가와 케이
한신 /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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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도쿠라 켄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 177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194
이가와 케이
한신 / 194
우츠미 테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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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비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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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비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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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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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92
스기우치 토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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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 아츠시
한신 / 172
랜디 메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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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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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카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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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우치 토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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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우치 토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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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빗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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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빗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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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카 마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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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코 치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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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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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215
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216
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222
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187
센가 코다이
소프트뱅크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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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가 코다이
소프트뱅크 / 149
야마모토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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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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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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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이 타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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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무라타 쵸지
村田兆治
이름 무라타 쵸지 (村田 兆治)
출생 1949년 11월 27일
히로시마현 도요타부 혼고정[(現 미하라시)
사망 2022년 11월 11일[1] (향년 72세)
도쿄도 세타가야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후쿠야마 전파공업고등학교[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7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도쿄-롯데 오리온즈 (1968~1990)
지도자 경력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투수코치 (1995~1997)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5~1976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
1974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91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2.20(1975년)
1.82(1976년)
1977년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2.28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9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
1988년
코우노 히로후미
(닛폰햄 파이터즈)
2.38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2.50
1990년
노모 히데오
(킨테츠 버팔로즈)
2.91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5년 퍼시픽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1974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3세이브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13세이브
1976년
사토 미치오
(난카이 호크스)
16세이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1년 퍼시픽리그 최다 승리
1980년
키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22승
무라타 쵸지
(롯데 오리온즈)
이마이 유타로
(한큐 브레이브스)
19승
1982년
쿠도 미키오
(닛폰햄 파이터즈)
20승

1. 개요2. 현역 시절3. 은퇴 이후4. 사망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강속구와 폭포수 포크볼을 무기로 롯데 오리온즈의 프랜차이즈 투수로 활약했으며, 프로 선수로서 은퇴한 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꾸준한 트레이닝으로 현역 못지 않게 역동적인 투구를 보여주는 노익장으로서도 유명했다.

30대 초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선수 생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토미 존 수술과 충실한 재활로 부활에 성공하며 만 41세까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 현역 시절


전성기 때의 모습. 코라쿠엔 구장에서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친선경기에서.[3]


말년에 올스타전에 출장한 무라타.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후배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대결했다.

히로시마 출신으로 후쿠야마 전파공업고를 졸업하고 1967년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이후 팀명이 롯데 오리온즈로 바뀌는 동안에도 오리온즈에서만 22년을 뛰고 은퇴한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강철의 어깨를 가진 사나이. 선수 시절 팀 성적이 저조해서 1974년 일본시리즈가 유일한 우승이었지만 1981년 다승왕을 차지하고 1975, 1976, 1989년도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으며 1975년에는 구원왕 홀더를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 맹활약을 펼쳤다. 또한 1976, 1977, 1979년, 1981년 최다 탈삼진 1위를 기록할 정도로[4] 탈삼진 능력도 대단했다.

데뷔 초엔 마작 등 노는 것에만 몰두해 훈련을 소홀히 하기도 했지만 팀 선배이자 320승을 기록한 대투수 코야마 마사아키에게 "너처럼 좋은 재능을 가진 녀석이 그 재능을 썩히면 못 쓴다"는 충고를 듣고 정신을 차려 죽을 각오로 훈련에만 몰두해 정상급 투수로 거듭났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투수들처럼 선발 투수, 중간 계투,마무리 투수를 오가며 포지션을 안 가리고 마당쇠처럼 등판했는데, 특히 세이브 1위에 오른 1975년에도 선발로 11완투를 기록할 정도로 철완을 자랑했다. 카네다 마사이치 같은 전형적인 약팀의 슈퍼 에이스였던 셈. 실제로 카네다가 현역 시절 전반기에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카네다가 롯데 감독을 역임할 때와 겹치는데, 카네다가 현역에서 막 은퇴하고 해설자를 맡게 된 1970년에 롯데 캠프를 방문했을 때 3년차의 젊은 투수였던 무라타를 보고 "너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라고 격려했고 이에 감동받은 무라타가 자신감을 얻어 다음 해에 12승을 거두는 발판이 된 것이 두 사람의 첫 인연이었다. 카네다가 롯데 감독으로 취임한 후엔 카네다 자신도 현역 시절 철완을 자랑하던 투수였던 만큼 무라타에게 훈련 방식 등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무라타의 전매특허라 할수 있는 마사카리 투구, 즉 도끼투구법도 1971년 시즌을 앞두고 카네다의 조언을 받고 고안한 것이었다. 그만큼 카네다는 무라타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서 1974년 일본시리즈 당시엔 무라타를 적극적으로 기용해 우승을 이끌었고 2019년 카네다가 세상을 떠났을 땐 생전의 부탁으로 무라타가 조문을 읽었다고 한다.

현역 시절의 전매특허는 도끼 투구법에서 나오는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과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포크볼이었는데,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투구폼에서 나오는 강속구와 포크볼은 그의 뛰어난 탈삼진 능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물론 이 포크볼 역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무라타의 포크볼은 입단 초엔 실전에서 도저히 못 써먹을 수준이어서 당시 감독이자 무라타와는 같은 히로시마현 출신이라 그의 재능을 아낀 노닌 와타루[5]도 강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포크볼 연습을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무라타는 노닌의 눈을 피해서 포크볼 연습을 계속했고 혹여나 노닌에게 포크볼이 눈에 띄는 날엔 커브볼이라고 속여가며 연습을 이어가 마침내 위력적인 포크볼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6] 포크볼을 멋지게 연마한 후에도 포크볼을 잡는 오른쪽 집게손가락, 가운데손가락에 우유병, 혹은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을 끼워넣거나 문을 열 때 손잡이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여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포크볼 그립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덕분에 완력까지 좋아서 그의 부인에 의하면 무라타가 두 손가락으로 맥주병을 잡았을 때 부인이 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피나는 노력과 재능으로 무라타는 22년 동안의 긴 선수생활 동안 은퇴하는 날까지 하술할 부상을 제외하곤 1군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7]

물론 타고난 강골인 무라타도 부진이나 부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어서, 5년차인 1972년까진 선발로 풀이닝을 소화하다가도 부진으로 이닝이 줄어들거나 하는 등 성적이 오락가락했고 1982년엔 팔꿈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수술 외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지경이 되자[8] 선수 생명을 걸고 1983년에 미국으로 가서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토미 존 수술을 받고 3년 가까이 재활에 매진한 끝에 1985년 36세의 나이로 17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9] 2000년대에 들어와 토미 존 수술은 거의 강속구 투수의 통과의례로 생각될 만큼 보편적인 수술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의 토미 존 수술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선수 생활을 걸고 마지막 방법으로 시도해 볼 정도로 선수들도 꺼리던 수술이라 시술 사례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를 교체한다는 개념은 만화에서나 등장할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3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까지 가서 위험한 수술을 결심한 무라타에게 격려하고 응원하는 여론이 엄청나긴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재기가 불가능하니 동정을 보내는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팔꿈치 인대 이식을 통해 기적처럼 재기에 성공한 무라타에게 팬들이 받은 감동과 성원은 폭발적이었으며, 무라타의 복귀 등판을 지켜본 경기장의 관중들은 물론 TV와 뉴스를 통해 접한 사람들까지 감격에 겨워 눈물바다가 될 정도로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이 시기 부상 회복 때문에 선발등판 횟수를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정도로 줄이는 대신 한 번 등판하면 전력 투구를 펼쳤고, 그래서 '일요일의 남자', '일요일의 쵸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은퇴 전 해인 1989년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소화하며 선발로 22경기에 출장해 16완투 7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10] 그 해 평균자책점 2.50으로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리고 다음 해이자 현역 마지막 해인 1990년 시즌에도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통산 600시합 등판과 함께 시즌 10승을 기록하는[11] 유종의 미를 거두고 41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었다.[12] 1960년대에 데뷔한 선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은퇴한 선수이기도 하다.

특이한 면모가 하나 더 있다면, 포수에게 사인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13] 덕분에 무라타와 배터리를 짠 포수는 사인 없이 들어오는 강속구와 폭포수 포크를 맨몸으로 막아내느라 죽도록 고생했고[14], 무라타 역시 폭투 기록을 많이 수립했다.

주요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이닝 소화력과 탈삼진 능력을 갖췄지만 그만큼 많은 사사구를 내줬으며, 특히 폭투가 많아서 통산 148개로 일본프로야구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역으로 지낼 동안 시즌 최다 폭투를 기록한 게 무려 12번에 특히 1976년~1979년에 4년 연속으로 최다 폭투를 기록했다. 다만 폭투가 많은 건 그만큼 이닝 소화도 많았기 때문이며, 이닝당 폭투 허용은 22.5이닝당 1폭투 정도로 폭투 수 2위 이시이 카즈히사(18.7이닝당 1폭투), 3위 아라카키 나기사(10.7이닝당 1폭투), 4위 마에다 유키나가(18.8이닝당 1폭투) 등에 비하면 적다. 물론 투수로써 실점에 영향이 큰 사사구나 폭투는 피해야겠지만 좋은 성적을 오랫동안 꾸준히 내며 쌓은 것이라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전혀 아닌 것.

3. 은퇴 이후

은퇴 후 1995년부터 3년 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투수코치로 재임했다. 다만 당시 호크스가 20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 중이던 최약체 팀이라 코치로써의 활약은 별로 신통치 못한 데다 재직 중 심근경색이 생겨서 결국 1997년을 끝으로 퇴임했고 이후엔 사망할 때까지 프로에서 지도자를 맡지 않았다.

그런데 지도자보다는 마운드가 더 좋았는지 은퇴한 지 한참이 지나 손주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50대 중반에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에 출장, 무려 141km의 광속구를 뿌리며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 나이에도 평균 136 ~ 138km 정도는 우습게 뿌리면서 현역시절 리그를 평정했던 강타자들을 모두 침묵시켰다. 은퇴한지 얼마 되지않은 시점의 하라 타츠노리 마저도 삼진으로 돌려세웠을 정도. 그리고 현역때 전매특허였던 포크볼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60에 가까운 무라타의 마스터스 리그 투구영상을 볼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은퇴 선수들과는 달리 무라타는 타고난 강골과 유연한 몸, 그리고 한 번의 토미 존 서저리 이외에는 큰 부상으로 현역 생활이 중단된 일이 없었을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를 지닌 선수였고, 은퇴 후에도 현역 선수 못지않게 관리를 하고 훈련을 한 결과 여전히 최소 사회인 리그 레벨에서도 통할 구위를 보유하고 있었던것. 물론 나이가 나이라 연투나 완투는 힘들겠지만 어찌보면 만년 약체팀에서 고생하던 현역때보다 은퇴한 후 더 유명해진 케이스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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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0일 KBO 올스타전 사전행사로 펼쳐진 한일 레전드 매치에서 5회말에 등판, 6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투구를 보여주었다. 초반에는 거의 130km에 육박하는 구속(평균 124km 정도)과 구위, 그리고 주무기였던 포크볼을 멋지게 선보이며 감탄사를 자아냈다. 주자 만루 상황에서 당시 포수였던 두산 베어스의 코치 이토 쓰토무가 마운드로 올라갔지만 이 이닝을 마무리짓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결국 1이닝을 마무리 짓고 간지 미소를 보여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물론 1이닝 2실점하긴 했지만 이건 수비들의 실책 때문이고 2사 만루의 야구만화같은 위기 상황을 이기고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38투구 4K 최고구속 126km. 이 이닝에 상대했던 한국의 타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무라타가 선수생활을 시작할때 태어나지도 않은 선수들이었다. 그만큼 큰 나이차가 있었음에도 이종범, 양준혁같은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수들의 진땀을 빼게했다. 이닝을 마친 후 온 몸이 땀에 젖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많은 야구팬들이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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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서 구속을 겨루는 스피드킹 타임에서도 두번째 선수로 씩씩하게 등판. 8분 35초부터 12분 15초까지. 즉석에서 농군패션으로 옷을 가다듬고 승부욕을 보여주더니 장내 아나운서를 손쉽게 요리하는 쇼맨쉽으로 슬슬 지루해져가는 분위기를 환기시켰으며, 박정태이종범같은 비교적 젊은 선수와의 대결에서도 뒤지지 않는 구속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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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km을 외쳤는데 125밖에 나오지 않아 땅을 치며 김동엽류의 대통곡을 시전하는 쇼맨십 등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스피드킹 타임때 가장 큰 환호를 받은 건 쵸지 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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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마스터즈 리그 시합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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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일 레전드 매치에서의 역동적 투구.

이런 멋진에 SNS를 비롯한 인터넷 여기저기서 '한일전에서 일본팀을 응원하긴 처음' '열정이 부럽다' 등의 찬사가 이어졌고 일본 야수진을 깠다. 그 언어생활 지저분하다는 야갤에서도 '진정한 MVP', '할베라', 노르빗슈 등이라 칭하며 찬사를 보냈다. 무라타 옹의 나이를 잊은 야구혼에 국적을 초월해서 대동단결하는 훈훈한 분위기.

역시 135Km/h를 못찍으신게 한이 되신건지... 140km/h를 목표로 매일 팔굽혀펴기 500회, 윗몸 일으키기 1000회 의 트레이닝과 트레이닝을 거듭하여 2013년의 시구식에서는 결국 135Km/h를 찍어주시기도 하였다.

2015년 현재에도 사회인 경기에 꾸준히 출장하고 있다. 대신 나이가 나이인 만큼 몇 해 전까지 보여주던 역동적인 투구폼을 조금은 지양하고 다소 간결해진 투구폼으로 여전히 리그에서 던지고 있다.

2016년 1월 14일 거의 버라이어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야구광팬의 프로듀서의 삼고초려에 못이겨 아웃=디럭스 라는 토크 프로에 출연하였다. 66세의 나이에도 어마어마한 악력과 유연성, 복근의 근력을 자랑했다. 그래도 앞서의 어마어마한 트레이닝은 더 이상은 안한다고 한다. 상기의 동영상도 버라이어티 출연을 기념해 일본 팬이 만든 동영상이다.

6월 30일 시구를 했는데 최고구속 131km/h #

8월초 마스터즈리그에 참가하여 여전한 구속을 자랑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20년 8월 22일 경기에 시구를 했다. 이날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기념하며 이때의 유니폼을 배부하는 등 나름 행사를 치렀으나 팀은 3:2로 졌다.

2022년 9월 23일 하네다 공항 보안검사장에서 검사원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혐의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로 인해 사와무라상 심사위원 자리를 사퇴했다고 한다. #

4. 사망

2022년 11월 11일,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발생한 화재에 휘말려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연기 흡입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향년 72세.

당시 오전 3시 30분 경 "주택 2층에서 깨진 창문으로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퍼지고 있다"라는 신고가 접수되어 소방차 등 25대가 출동하였으나, 2시간 30분 후에야 진화가 완료되었다.#


[1] 73세 생일을 16일 남기고 사망했다.[2]킨키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3] 영상에서 2번째로 등장해 2루 땅볼로 물러나는 좌타자는 캔자스시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조지 브렛이다.[4] 다만 이 당시엔 연맹 표창이 없었다. 1989년부터 제정.[5] 장훈과 함께 히로시마 원폭 피폭수첩을 가지고 있는 야구인으로 알려져 있다.[6] 당시의 일화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 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는 조언을 받아 손가락에 공을 끼운 상태에서 줄로 동여매고 자는 것으로 무라야마의 가르침을 실천해 포크볼 그립을 몸에 익히려 했으나 꽁꽁 묶인 손이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던 탓에(...) 결국 첫 시도 이후론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다 포크볼을 던지던 다른 투수들에게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 포크볼을 깊게 잡아보려고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 사이를 칼로 찢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7] 현역 시절의 플레이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현역 후반기에 후배이자 자신의 전담 포수인 하카마다 히데토시와 연습 도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TV에 나온 적이 있었다. 여기서 무라타가 "(주자가 나왔을 때) 가장 좋은 것(아웃)은 뭐냐?"라고 묻자 하카마다가 "병살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하자 무라타는 다시 그 다음은 뭐냐고 물었고, 하카마다가 답을 떠올리지 못하며 고민하자 "가장 좋은 건 삼진이다. 바보! 병살실책이 나올 수도 있잖아."라고 가벼운 츳코미와 함께 답을 말해줬다. 투수에겐 타자와의 승부에서 삼진을 잡아내어 다른 변수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도 볼 수 있는 일화.[8] 여담으로 워낙 인기가 없던 롯데 오리온즈에 불만이 많았던 무라타는 이 해 후반에 트레이드를 자청해 팀을 나가길 원했고 실제로 이때 센트럴 리그 팀들이 이전부터 에이스로 이름 높던 무라타의 영입을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롯데그룹 회장 겸 구단 오너였던 신격호가 무라타의 트레이드를 단호히 거절해서 무라타 본인의 불복에도 결국 무산되었다고 한다.[9] 이때 1974년 신인왕 출신이자 무라타가 부상을 당한 같은 해에 은퇴한 팀 후배 미츠이 마사하루에게 재활에 관한 많은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미츠이도 팔꿈치 부상으로 1979년에 일본프로야구 선수들 중 최초로 토미 존 수술을 받아 수술은 성공했으나, 1군에 빨리 복귀하려고 무리하다가 구위가 악화되어 결국 은퇴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츠이가 선배인 무라타에게 자신의 수술 경험을 알려주며 재활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고 무라타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재활에 충실하게 몰두한 끝에 다시 성공할 수 있었던 것.[10] 다만 이 해 롯데가 꼴찌로 떨어진 여파로 승리보다 패배(9패)가 더 많았다.[11] 프로야구 초창기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 와카바야시 타다시 이래 2번째로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한 40대 투수가 되었다.[12] 통산 600시합 등판 기록을 세웠던 8월 24일 원정경기와 10승이 걸린 시즌 최종전 겸 본인의 은퇴시합인 10월 13일 홈경기가 모두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대결이었는데, 2번 모두 선발 투수로 출장해 완봉승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10월 13일 경기는 강우콜드로 5이닝만에 경기가 끝나서 5이닝 완봉이었다.[13] 이는 크게 휘두르며 21권에서 언급되었다.[14] 1972~1977년까지 롯데의 주전포수를 맡았던 무라카미 키미야스가 특히 그의 노 사인 포크를 잘 막아내기로 유명했다. 이후 1978~1981년까지는 모든 포지션 소화 기록을 가지고 있는 타카하시 히로시가, 마지막 전성기인 1985~1990년엔 호세이대학 졸업생에 같은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인 하카마다 히로토시가 전담 포수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