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6 | 1987 | 1988 | 1990 | |||||||||||||||||||||||||||||||||||||||||||||||||||||||||||||||||||||||||||||||||||||||||||||||||||||||||||||||||||||||||||||||||||||||||||||||||||||||||||||||||||||||||||||||||||||||||||||||||||||||||||||||||||||||||||||||||||||||||||||||||
1991 | 1992 |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 |
2008 |
아시아시리즈 우승감독 | |
2008 |
1986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라이온즈) | →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 →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
199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이와노 히데유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 → | 곽태원 (세이부 라이온즈)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승리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13승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24승 | 니시무라 유키오 오사카 / 15승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5승 노구치 아키라 도쿄세네터즈 / 15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4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19승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42승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38승 | 모리 코타로 한큐군 / 30승 | 노구치 지로 타이요군 / 40승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34승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와카바야시 타다시 한신군 / 22승 | 시라키 기이치로 세네터즈 / 30승 | 벳쇼 타케히코 난카이 / 30승 | 카와사키 토쿠지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 27승 | 빅토르 스타루힌 다이에이 / 27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사나다 쥬조 쇼치쿠 / 39승 |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 28승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33승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27승 |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 32승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30승 하세가와 료헤이 히로시마 / 30승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27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28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1승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27승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 29승 | 곤도 히로시 주니치 / 35승 | 곤도 히로시 주니치 / 30승 |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 30승 | 진 바키 한신 / 29승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5승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24승 | 오가와 켄타로 주니치 / 29승 |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5승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 22승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25승 |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 17승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26승 | 에나츠 유타카 한신 / 24승 | 마츠모토 유키츠라 주니치 / 20승 카네시로 모토야스 히로시마 / 20승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 20승 | 이케가야 코지로 히로시마 / 20승 | 타카하시 사토시 히로시마 / 20승 | 노무라 오사무 타이요 / 17승 | 코바야시 시게루 한신 / 22승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16승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20승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20승 |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8승 | 엔도 카즈히코 타이요 / 17승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7승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18승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7승 |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 18승 이토 아키미츠 야쿠르트 / 18승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0승 니시모토 타카시 주니치 / 20승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20승 |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17승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7승 | 이마나카 신지 야마모토 마사 이상 주니치 / 17승 노무라 히로키 요코하마 / 17승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19승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18승 | 사이토 마사키 발비노 갈베스 요미우리 / 16승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18승 |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 17승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20승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멜빈 번치 주니치 / 14승 | 후지이 슈고 야쿠르트 / 14승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17승 케빈 호지스 야쿠르트 / 17승 | 이가와 케이 한신 / 20승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17승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쿠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 15승 시모야나기 츠요시 한신 / 15승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17승 | 세스 그레이싱어 야쿠르트 / 16승 | 세스 그레이싱어 요미우리 / 17승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6승 타테야마 쇼헤이 야쿠르트 / 16승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승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18승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 18승 | 우츠미 테츠야 요미우리 / 15승 | 오가와 야스히로 야쿠르트 / 16승 | 랜디 메신저 한신 / 13승 야마이 다이스케 주니치 / 13승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 15승 |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 16승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7승 | 오세라 다이치 히로시마 / 15승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승 | 야마구치 슌 요미우리 / 15승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4승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13승 쿠리 아렌 히로시마 / 13승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13승 | 아즈마 카츠키 DeNA / 16승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15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26승 | 에토 하루야스 난카이 / 24승 | 노구치 마사아키 니시테츠 / 23승 | 카와사키 토쿠지 니시테츠 / 24승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26승 타나카 후미오 킨테츠 / 26승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24승 | 미우라 마사요시 다이에이 / 29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35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33승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38승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오노 쇼이치 다이마이 / 33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42승 | 쿠보 마사히로 킨테츠 / 28승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28승 | 코야마 마사아키 도쿄오리온즈 / 30승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자키 유키오 토에이 / 27승 | 요네다 테츠야 한큐 / 25승 | 이케나가 마사아키 니시테츠 / 23승 |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31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4승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나리타 후미오 롯데 / 25승 |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21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0승 카네다 토메히로 토에이 / 20승 | 나리타 후미오 롯데 / 21승 |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16승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히가시오 오사무 타이헤이요클럽 / 23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6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0승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25승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21승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22승 | 이마이 유타로 한큐 / 19승 무라타 쵸지 롯데 / 19승 | 쿠도 미키오 닛폰햄 / 20승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18승 야마우치 카즈히로 난카이 / 18승 | 이마이 유타로 한큐 / 21승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사토 요시노리 한큐 / 21승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6승 | 야마오키 유키히코 한큐 / 19승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5승 니시자키 유키히로 마츠우라 히로아키 닛폰햄 / 15승 | 아와노 히데유키 킨테츠 / 19승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18승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8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7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8승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17승 노다 코지 오릭스 / 17승 | 이라부 히데키 롯데 / 15승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킵 그로스 닛폰햄 / 16승 | 킵 그로스 닛폰햄 / 17승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15승 코이케 히데오 킨테츠 / 15승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13승 타케다 카즈히로 다이에 / 13승 쿠로키 토모히로 롯데 / 13승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6승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4승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15승 | 제레미 파웰 킨테츠 / 17승 |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 20승 | 이와쿠마 히사시 킨테츠 / 15승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18승 |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18승 | 와쿠이 히데아키 세이부 / 17승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21승 | 와쿠이 히데아키 세이부 / 16승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17승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7승 | D.J. 홀튼 소프트뱅크 / 19승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9승 |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 17승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24승 |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16승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15승 와쿠이 히데아키 롯데 / 15승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15승 | 히가시하마 나오 소프트뱅크 / 16승 키쿠치 유세이 세이부 / 16승 | 타와타 신사부로 세이부 / 16승 | 아리하라 코헤이 닛폰햄 / 15승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센가 코다이 이시카와 슈타 소프트뱅크 / 11승 와쿠이 히데아키 라쿠텐 / 11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8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5승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16승 | 이토 히로미 닛폰햄 / 15승 아리하라 코헤이 소프트뱅크 / 14승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승률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1.000 |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쿄진군 / 0.857 | 미소노오 타카오 오사카 / 1.000 | 미소노오 타카오 오사카 / .909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905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와카바야시 타다시 오사카 / .800 | 빅토르 스타루힌 도쿄쿄진군 / .760 | 모리 코타로 한큐군 / .789 | 히로세 슈이치 도쿄쿄진군 / .778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756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와카바야시 타다시 오사카 / .846 | 후지모토 히데오 도쿄쿄진군 / .778 | 미소노오 타카오 오사카 / .750 | 벳쇼 타케히코 난카이 / .722 | 후지모토 히데오 요미우리 / .774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오오시마 노부오 쇼치쿠 / .833 | 마츠다 키요시 요미우리 / .885 | 후지무라 타카오 오사카 / .806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818 이시카와 카츠히코 나고야 / .818 |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727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오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833 | 호리우치 쇼 요미우리 / .778 | 키도 요시노리 요미우리 / .708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690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711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677 | 이토 요시아키 요미우리 / .684 |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 .711 | 야마나카 타츠미 주니치 / .714 | 이시카와 미도리 한신 / .769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야마나카 타츠미 주니치 / .857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889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857 | 시마다 겐타로 타이요 / .700 |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 .815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824 | 사카이 카츠지 타이요 / .692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743 | 쿠라타 마코토 요미우리 / .667 | 마츠모토 유키츠라 주니치 / .690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 .773 | 카토 하지메 요미우리 / .789 | 니우라 히사오 요미우리 / .786 | 스즈키 야스지로 야쿠르트 / .813 | 후지사와 키미야 주니치 / .722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후쿠시 히로아키 히로시마 / .714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769 | 미야코 유지로 주니치 / .762 |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 .750 |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 .750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727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818 | 카와바타 쥰 히로시마 / .833 | 오노 카즈유키 주니치 / .818 | 니시모토 타카시 주니치 / .769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800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733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739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 .773 | 키토 마코토 히로시마 / .762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 .765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800 | 미우라 다이스케 요코하마 / .769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762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833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쿠도 키미야스 요미우리 / .706 | 이리키 유사쿠 요미우리 / .765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773 | 이가와 케이 한신 / .800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 .722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안도 유야 한신 / .688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708 | 타카하시 히사노리 요미우리 / .778 | 타테야마 쇼헤이 야쿠르트 / .800 | 디키 곤잘레스 요미우리 / .882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쿠보 야스토모 한신 / .737 | 요시미 카즈키 주니치 / .857 | 스기우치 토시야 요미우리 / .750 | 오가와 야스히로 야쿠르트 / .800 | 야마이 다이스케 주니치 / .722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마일스 마이콜라스 요미우리 / .813 | 노무라 유스케 히로시마 / .842 | 야부타 카즈키 히로시마 / .833 | 오세라 다이치 히로시마 / .682 | 야마구치 슌 요미우리 / .789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875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684 | 아오야기 코요 한신 / .765 | 아즈마 카츠키 DeNA / .842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833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노무라 타케시 마이니치 / .818 | 나카타니 노부오 난카이 / .875 | 유키 스스무 난카이 / .731 | 오오가미 타케토시 난카이 / .704 | 니시무라 사다아키 니시테츠 / .815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나카무라 타이세이 난카이 / .852 | 우에무라 요시노부 마이니치 / .792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854 | 아키모토 유사쿠 한큐 / .778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905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오노 쇼이치 다이마이 / .750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750 |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826 | 타나카 츠토무 니시테츠 / .680 모리나카 치카라 난카이 / .680 | 조 스탠카 난카이 / .788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하야시 토시히코 난카이 / .850 |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 .720 | 이시이 시게오 난카이 / .692 | 무라카미 마사노리 난카이 / .818 | 세이 토시히코 킨테츠 / .720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사사키 코이치로 킨테츠 / .773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786 | 사토 미치오 난카이 / .750 | 야기사와 소로쿠 롯데 / .875 | 타케무라 카즈요시 한큐 / .750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스즈키 케이시 킨테츠 / .786 노무라 오사무 닛폰햄 / .786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788 | 이나바 미츠오 한큐 / .739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818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808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733 | 마시바 시게쿠니 닛폰햄 / 1.000''' | 쿠도 미키오 닛폰햄 / .833 | 타카하시 나오키 세이부 / .813 | 이시카와 마사루 롯데 / .789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이시모토 요시아키 킨테츠 / .864 |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 .727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789 | 궈타이위안 세이부 / .813 | 호시노 노부유키 오릭스 / .714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692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842 |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 .833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833 | 궈타이위안 세이부 / .722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히라이 마사후미 오릭스 / .722 | 호시노 노부유키 오릭스 / .722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750 | 쿠로키 토모히로 롯데 / .591 | 시노하라 타카유키 다이에 / .933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오노 신고 롯데 / .722 | 타노우에 케이사부로 다이에 / .650 | 제레미 파웰 킨테츠 / .630 | 사이토 카즈미 다이에 / .870 | 이와쿠마 히사시 킨테츠 / .882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941 | 사이토 카즈미 소프트뱅크 / .783 | 나루세 요시히사 롯데 / .941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840 | 다르빗슈 유 닛폰햄 / .750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750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696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792 |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 .773 | 타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1.000 | 키시 타카유키 세이부 / .765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750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750 | 센가 코다이 소프트뱅크 / .765 | 마이크 볼싱어 롯데 / .867 | 야마오카 타이스케 오릭스 / .765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이시카와 슈타 소프트뱅크 / .786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783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750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727 | 이토 히로미 닛폰햄 / .737 |
센트럴 리그는 1973년부터 2012년까지 최고승률이 타이틀 시상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고, 퍼시픽 리그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최우수투수' 명칭으로 타이틀을 시상했다. 2013년부턴 양대리그 모두 13승 이상(2020년 한정 1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승률이 제일 높은 투수에게 '승률 제1위 투수'라는 타이틀로 최고승률을 시상하고 있다. 2013년 이전의 최고승률 기준의 경우 센트럴 리그는 규정이닝을 채운 선수 중 가장 승률이 높은 선수를, 퍼시픽 리그는 1985년까진 센트럴 리그와 같은 기준이었으나 1986년부터 13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승률이 높은 선수를 최고승률 선수로 규정했다.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 <rowcolor=#fff>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미야자키 카나메 (1950) | 미하라 오사무 (1951~1959) ★★★★ | 카와사키 토쿠지 (1960~1961) | 나카니시 후토시 (1962~1969) ★ | 이나오 카즈히사 (1970~1974) | |
<rowcolor=#fff>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
에토 신이치 (1975) | 키토 마사이치 (1976~1977) | 네모토 리쿠오 (1978~1981) | 히로오카 타츠로 (1982~1985) ★★★ | 모리 마사아키 (1986~1994) ★★★★★★★★ | |
<rowcolor=#fff>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
히가시오 오사무 (1995~2001) ★★ | 이하라 하루키 (2002~2003) ★ | 이토 츠토무 (2004~2007) ★ | 와타나베 히사노부 (2008~2013) ★ | 이하라 하루키 (2014) | |
<rowcolor=#fff> 16대 | 17대 | 18대 | 19대 | 20대 | |
타나베 노리오 (2014~2016) | 츠지 하츠히코 (2017~2022) ★★ | 마츠이 카즈오 (2023~2024) | 니시구치 후미야 (2025~) | ||
★: 일본시리즈 우승 / ★: 퍼시픽리그 우승 1951년부터 1952년까진 명목상으론 미야자키 카나메가 감독, 미하라 오사무가 총감독을 맡는 체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미하라가 단독으로 팀을 지휘했다. |
}}} ||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 Watanabe Hisanobu | |
출생 | 1965년 8월 2일 ([age(1965-08-02)]세) |
군마현 키류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3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세이부) |
소속팀 | 세이부 라이온즈 (1984~1997)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8) 자난 루카[1] (1999~2001) |
지도자 | 자난 루카 투수코치 (1999~2001)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4~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투수코치 (2005~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08~20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대행 (2024) |
프런트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GM (2018~2024) |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일본프로야구 이후엔 대만에서 플레잉 코치로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친정인 세이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 학창~선수 시절
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모델이 된 와타나베.[2]
중학교 때부터 무려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을 받았고, 그후 마에바시 공고에 입학해서[3]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코시엔 경험은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1차전에서 그해 하계 준우승팀 교토 상고에게 끝내기로 패했다. 그후 3학년 때 지역예선 결승까지 가서 코시엔 문턱까지 갔으나, 이때도 상대인 오타 공고에게 끝내기 패하며 결국 코시엔을 다시 밟진 못했다.
그후, 1983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다만 세이부에선 본래 타카노 히카루[4]라는 투수를 지명하려고 했으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한큐 브레이브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3팀과의 치열한 추첨승부 끝에 야쿠르트에게 교섭권을 넘겨주면서 대체 1순위로 츠지 하츠히코를 지명하려 했으나, 결국 꿩 대신 닭으로 와타나베를 지명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와타나베가 남아있다며 영입을 주장하면서 급하게 와타나베를 대체 1순위로 지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츠지 하츠히코는 세이부에 2위로 지명되었다.
신인 때부터 1군에 정착하고 속구와 포크볼을 무기삼아 3년차인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곽태원[5], 이시이 타케히로 등과 함께 선발 마운드를 지키며 세이부 왕조 시대를 지탱했다.
치밀한 제구력보다 강속구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투수였으며, 탈삼진을 많이 뺏어냈지만 반대로 피안타와 피홈런도 많이 허용했다. 이런 스타일의 투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노쇠화로 인한 구위의 약화가 나타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의 투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배 투수이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강속구가 통할 때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라는 충고를 했지만 성공에 이르진 못했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에서 방출 된 후, 前 세이부 단장이자 다이에 단장인 네모토 리쿠오가 와타나베한테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입단오퍼를 했지만 본인이 관동지역에 남고싶다는 이유로 다이에 오퍼를 거절하고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 선수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서 '노무라 재생 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무라 감독 아래에서 부활을 기대했지만, 성적의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6]
이 이후 현역 은퇴를 결정하고, 야구 해설자 계약을 맺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추천에 의해 지도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7] 투수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곤란으로 인해 한때 세이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당시 대만프로야구계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곽태원(카쿠 타이겐)에게 통역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와타나베가) 스스로 던져 몸으로 가르치면 좋겠다" 고 조언을 받고 급히 선수 겸 코치로 현역에 복귀했다. 완급조절을 구사한 투구의 결과 입단 1년차에 18승을 거두며 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 부문 3관왕을 기록하고, 이듬해에도 15승 8패,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하며 에이스로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체중 관리 실패 및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로 인한 노쇠화를 극복하지 못하며 2001년엔 2승 7패 4세이브, 방어율 3점대로 부진했고, 이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8]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TV 해설자, 스포츠신문 평론가를 거쳐 2004년에 세이부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05년부터는 2군 감독을 겸임, 2007년부터는 2군 감독만 맡았다.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7년 B클래스로 추락한 팀을 취임 1년만에 퍼시픽리그와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1군 감독 부임 당시까지만 해도 와타나베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그도 그럴 듯이, 세이부 황금 시대[9]를 지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치고 받으며 퍼시픽리그의 강팀으로 군림하던 2000년대 초를 지나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기존의 리그 붙박이 하위팀이었던 치바 롯데 마린스[1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11] 등이 리그를 제패하기 시작하며 호크스 하나만 제끼면 우승이 가능하던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 때문[12]이다.
거기에 절대적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13]와 알렉스 카브레라[14]와 와다 카즈히로 등의 강타자들이 FA 등을 통해 이적을 하고, 이토 쓰토무 말년의 망가진 팀 분위기와 드리워진 '패배'의 그림자[15]를 과연 신임 감독으로 지울 수 있을까 하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선수에게 친근하게 접근, 칭찬과 동시에 목표 설정을 통한 의식 개혁으로 팀을 바꾸어 나갔고 유격수이자 팀의 간판으로 성장한 나카지마 히로유키[16]를 중심으로 카타오카 야스유키, 쿠리야마 타쿠미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17]으로 기용하였다. 또한, 장타의 소질은 인정하면서도 정교하지 못한 타격 때문에 번번히 기회를 잡지 못한 '오카와리군(한그릇 더)' 나카무라 타케야[18]에게 "삼진 200개 당하고 홈런 50개 치고 와"라며 레귤러로써의 위치를 확보해 주었고 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시즌을 보낸 나카무라는 시즌 중반 이후 폭발적인 타격을 보이며 46개의 홈런으로 커리어 첫 홈런왕이 되었다. G.G.사토같은 노망주도 중심타자로 자리잡았고, 투수진에는 노장 니시구치 후미야가 건재했으며 에이스로 성장한 영건 와쿠이 히데아키[19] 키시 타카유키[20], 좌완 팜볼러 호아시 카즈유키[21]가 선발진을 이끌었다.
요미우리와 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4승 3패로 우승을 차지, 모리 마사아키가 이끌고 본인이 선수로 활약하던 1992년 이래 16년 만에 페넌트 1위 -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고[22] 같은 해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 이러한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2008년 쇼리키 마쓰타로 상 수상자가 되었다. 세이부 역대 감독 중 1 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은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 이토 쓰토무 에 이어 4명째다.
그러나 2009년~2013년 기간 팀을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지 못하고 2013년 10월 사임을 표명하였다. 재임 기간 중 첫 해 우승에 이어 카타오카 야스유키, 쿠리야마 타쿠미, 나카무라 타케야, 아사무라 히데토, 아키야마 쇼고, 스미타니 긴지로[23] 등 젊은 야수진의 성장에 기여하며 리빌딩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세이부 감독 시절 평가는 괜찮은 편. 다만 투수 출신 감독이었음에도 고질적인 불펜 불안[24]을 임기 내내 떨쳐내지 못했고 와쿠이, 마키타 카즈히사 등 몇몇 투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것[25]은 아쉬운 점.
화 내지 않는 것을 지도 방침으로 삼고 있지만, 전문성이 결여 된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대만 시절, 신인이면서 소질이 충분해 연습하지 않아도 활약하여 경영진이 참견하지 않았던 투수를 불러내 꾸짖거나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하이파이브 하는 선수를 보고 호통친 적도 있다. 세이부 2군 감독 시절에도 "어엿한 야구 선수가 되기 전에, 우선은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선수들의 긴장감이 결여 된 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했다. 재미있게도 정작 본인은 현역 시절 엄격한 관리 야구를 추구했던 세이부에서도 다소 자기관리가 모자랐던 선수중 하나로 꼽혔었다.
2018시즌부터 팀의 단장을 맡기 시작했고 2024년 5월 26일 성적 부진에 의한 휴양을 통보받은 마쓰이 카즈오 전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 대행을 맡아 11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뀔지언정, 본인이 감독 대행을 맡고난 이후로 팀은 더더욱 회생 불가 수준으로 가버렸고, 팬들의 반응은 당장 나가라는 반응이 많다.
결국, 시즌을 마치자마자 감독대행과 GM 두 직책에서 모두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4. 여담
현역 시절에는 큰 키와 슬림한 몸매, 잘생긴 얼굴로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26] 그러나 탈모가 시작되면서 여성 팬들의 인기는 점차 줄어버렸고, 말년에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만 포장마차 음식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체중관리에 실패하면서 지금은 전형적인 대머리 과체중 아저씨가 되었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훗날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도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옛날에 꽃미남으로 알려졌다"고 자학적으로 농담을 했다. #
1980년대 후반, 리그 라이벌이었던 긴테츠 버팔로즈의 주포인 랄프 브라이언트에게 매우 강했다. 브라이언트도 은퇴 후 한참 지난 일본 야구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상대를 묻자 주저 없이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정도. 하지만 1989년 긴테츠의 시즌 우승을 결정 지은 세이부 vs 긴테츠의 더블헤더에서 나온 전설적인 '브라이언트의 4연타수 홈런' 중 세번째 홈런[27]을 얻어 맞아 한동안 크게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동점인 상태에서 경기 후반에 돌입하자 "기세를 타고 있는 브라이언트를 막을 자는 히사노부 밖에 없다"라는 심정으로 불펜에 투입한 것이기 때문. 이 경기와 바로 다음 경기를 연달아 패함으로써 세이부는 리그 5연패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이 해에 우승을 했더라면 85년부터 시작된 리그 10연패라는 기록이 가능했기에 세이부 선수단과 팬들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었을 듯.[28]
랄프 브라이언트의 대형 홈런과 멘탈 나간 와타나베 히사노부[29]
메르세데스-벤츠를 애용했으며, 당시 팀 내에는 프랜차이즈 최고참이던 도이 마사히로[30]와 히가시오 오사무 외에 벤츠를 타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그 룰을 깨고 벤츠를 구입했다고. 그 이후 후배 선수들이 잇따라 벤츠를 구입하여 "내가 벤츠 해금의 선구자가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의 관리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본인조차, 관리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감독이되면 절대로 저런 관리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예전 팀 동료였던 쿠도 키미야스와 기요하라 카즈히로 한테서 "프로 야구 투수로는 최고의 존재"라고 높이 평가 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흡연을 하는 등 자기관리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음에도 폐활량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근육도 강해서 한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져도 경기 후 전혀 마사지를 받지 않은 일화가 있는 등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야구를 했던 스타일. 기요하라는 팀 후배인 키쿠치 유세이와의 대담에서 와타나베 감독과 시오자키 테츠야 코치를 극찬했다.
프로 입단 다음 날 하라주쿠에서 쇼핑을 즐겼고 옷 구입비용으로 한달에 30만엔을 지출했으며, 디스코에서 춤추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등 이전의 프로야구 선수의 전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신인류' 세대 선수란 평을 들었다.
모리와 노무라는 라이벌이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고 평하고 있다. 모리는 선수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잘 돌보며, 질책이 잘 통하는 선수와 통하지 않는 선수를 구분하여 대응하며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잘 플레이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실행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심리전에 능해 말빨로 선수들을 설득할 수 있고 '아!이 사람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에 존재했던 팀.[2] 왜 일본프로야구 사진이 미국 스포츠 전문지 표지에 실렸나면,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선수노조 파업 사태로 인해 이해부터 시행하기로 한(결국 95년부터 시행)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일정이 모조리 다 취소되어 버려서 미국 야구팬들이 볼 수 있는 가을야구라고는 일본시리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기도 했을 정도.[3] 다만 와타나베 본인은 본래 당대의 야구 명문고로 소문났던 키류 고교로 입학하려 했고, 입학 수험공부를 위해 가정교사까지 고용했으나.. 정작 본인이 공부를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3일 만에 입시를 포기해 버렸다[4] 4팀의 지명을 받고 추첨으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80년대 중반에 주축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한 것 외엔 특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통산 51승 55패 13세이브, 방어율 4.08, 642탈삼진의 성적을 기록하고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은퇴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1995~98년까지 2군 투수코치로 일했고, 이후 대만 프로야구 싼상 타이거스에서 1999년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나 1년 만에 팀이 해체되면서 무직이 되었는데, 이후 정신질환이 발병하며 그 후유증으로 결국 2000년 11월 5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대한민국과도 작은 인연이 있었는데 자살 직전인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이 있었다.[5] 대만 출신의 우완 강속구 투수, 동양의 놀란 라이언,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이름 곽태원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쿠 타이겐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8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3명의 대만인 투수 곽태원(카쿠 타이겐, 세이부), 곽원치(카쿠 겐지, 주니치), 장승웅(소 카츠오, 롯데)는 대만과 일본 야구계에서 '이곽일장'으로 불렸다. 이들 중 곽원치와 장승웅은 나중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6] 반면 세이부에서 먼저 이적한 츠지 하츠히코의 경우 1996년에 타율 0.333을 기록해 노무라 재생공장의 훌륭한 사례로 남았다.[7] 1997~2002년까지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별개로 존재했던 야구 리그. 약칭 대만 대연맹. 리그 개시 초기엔 당시 검은 독수리 사건 때문에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인기가 개발살난 상태라 상대적 이익을 얻으며 어느정도 잘나갔으나, 결국 갈수록 인기가 줄어들면서 2002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CPBL에 합병된다.[8] 와타나베가 은퇴한 이듬해인 2002년,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이 중단되면서 자난 루카는 해체되었다.[9] 80년대~90년대[10] 2005년 우승[11] 2006년 우승 및 2007년 준우승[12] 이미 2002년만 해도 친정팀인 세이부도 리그 우승 겸 일본시리즈 준우승을 했었다.[13] 2006년 까지 리그에서 손꼽히는 투수 였으나 포스팅 시스템으로 MLB로 떠났다.[14] NPB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후에 약물 복용 전과가 드러났다.[15] 선수들과의 불협화음이 있다고 공공연히 들렸다는 썰이다. 그런데 이토 감독의 경우 선수층이 좋은 세이부 선수들과는 이미 선,후배 기강에는 문제가 없었고 부임 당시에도 반대하는 이들은 커녕 환영하는 취지였다.[16] 마쓰이 카즈오의 MLB 진출로 공석이 된 유격수 자리를 받는다. 그러나, 3년연속 실책왕 이라는 오명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3번의 골든글러브를 획득한다.[17] 이미 전임 감독이던 이토 쓰토무도 젊은 선수들을 많이 육성 하겠다는 방침을 세운적이 있었다.[18] 그 덩치와는 달리 주루 능력이 좋아서 고교 시절에는 "호타준족" 소리 까지 들었다고 한다.[19] 키시와 함께 팀의 프랜차이즈로 남길 원했지만 와타나베 감독의 투수기용 의견차로 인해 전임 감독인 이토가 있는 지바 롯데로 2013 시즌 후 이적해 버렸다. 와쿠이 데뷔 시절이 이토가 부임햇던지라 얼추 맞다.[20] 와타나베/이하라 후임으로 들어온 타나베 감독의 투수기용 문제로 2016 시즌 후 라쿠텐으로 이적[21] 세이부에서는 현역시절 괜찮았으나, 소프트뱅크 가서는 라이온즈 시절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22] 2004년에 이토 감독이, 오치아이 감독의 주니치를 4승 3패로 꺾고 우승했으나 정규 시즌은 2위 였기 때문에 '통합 우승'의 개념에서는 빠진다.[23] 현장에서 수비력은 괜찮은데 타율만 보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였다.[24] 세이부 중간계투를 대표하는 '오레타치' 밈이 탄생한 게 2009년이다.[25] 그래서 그런지 감독 본인이 믿었던 투수들 가운데는 선발 요원들을 갑작스럽게 중간계투로 돌리거나 선발로 다시 올리거나 하는 등 구위만 보면 괜찮은데 투구수 조절 실패를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26] 구단 기숙사를 떠나 아파트에서 자취를 시작한 뒤 어느 여성 열성팬이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밤새 기다렸다는 일화도 있다.[27] 더블헤더 첫번째 경기로 이 경기의 결승타였다[28] 참고로, 일본 시리즈에서는 85년 vs 한신 패배, 86년 vs 히로시마 승리, 87년 vs 요미우리 승리, 88년 vs 주니치 승리, 90년 vs 요미우리 승리, 91년 vs 히로시마 승리, 92년 vs 야쿠르트 승리, 93년 vs 야쿠르트 패배, 94년 vs 요미우리 패배 라는 성적을 올렸다. 요미우리 V9과 함께 NPB 역대 최강의 황금 시대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8~90년대를 꼽는 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다.[29] 첫번째, 두번째 홈런은 당시 선발이었던 곽태원으로부터 였다. 솔로 - 만루홈런의 순서[30] 긴테츠와 세이부에서 활약한 강타자로 통산 465홈런-2452안타를 기록했다. 삼성 라이온스, 세이부, 주니치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다. 세이부 타격코치 시절 본인과 같은 18세 4번타자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성장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