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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1 21:43:20

와타나베 히사노부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48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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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하마무라 타카시
(浜村孝)
오카무라 요시노리
(岡村佳典)
아라타케 야스히로
(荒武康博)
카와하라 아키라
(土屋紘)
히가시오 오사무
(東尾修)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이즈미사와 아키라
(泉沢彰)
타카하시 후미오
(高橋二三男)
요시다 요시노부
(吉田好伸)
나카지마 히로미
(中島弘美)
야마무라 요시노리
(山村善則)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타무라 타다요시
(田村忠義)
코가 마사아키
(古賀正明)
타치바나 요시이에
(立花義家)
에가와 스구루(6)
(江川卓)
모리 시게카즈(1)
(森繁和)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홍순기
(코노 준키)
(鴻野淳基)
이시게 히로미치
(石毛宏典)
이토 츠토무
(伊東勤)
노구치 히로미(1)
(野口裕美)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오쿠보 히로모토(1)
(大久保博元)
키요하라 카즈히로(1)
(清原和博)
모리야마 료지
(森山良二)
스즈키 켄
(鈴木健)
와타나베 토미오
(渡辺智男)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시오자키 테츠야
(潮崎哲也)
나가마 켄지(1)
(長見賢司)
타케시타 쥰(1)
(竹下潤)
스가야마 켄토(1)
(杉山賢人)
이시이 타카시(2)
(石井貴)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토미오카 히사타카(1)
(富岡久貴)
타카키 타이세이(1)
(高木大成)
타마노 히로마사
(玉野宏昌)
안도 마사노리(2)
(安藤正則)
마쓰자카 다이스케(3)
(松坂大輔)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카야마 히사시(1)
(高山久)
오누마 코지
(大沼幸二)
호소카와 토루(1)
(細川亨)
고토 타케토시
(後藤武敏)
야마자키 사토시
(山崎敏)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와쿠이 히데아키(3)
(涌井秀明)
스미타니 긴지로(3)
(炭谷銀二郎)
키무라 후미카즈(3)
(木村文和)
지명권 박탈(3)(A) 나카자키 유타(3)
(中崎雄太)
마츠나가 히로노리(2)(4)
(松永浩典)
키시 타카유키(2)(4)
(岸孝之)
히라노 마사미츠(1)(4)
(平野将光)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키쿠치 유세이(3)
(菊池雄星)
오이시 타츠야(4)
(大石達也)
토가메 켄(4)
(十亀剣)
마스다 타츠시(1) (4)
(増田達至)
모리 토모야(3)
(森友哉)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타카하시 코나(3)
(高橋光成)
타와타 신사부로(4)
(多和田慎之助)
이마이 타츠야(3)
(今井達也)
사이토 히로마사(1)(4)
(斉藤大将)
마츠모토 와타루 (4)
(松本航)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레이와 시대 ]
{{{#555555,#aaaaaa
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미야가와 테츠(1)(4)
(宮川哲)
와타나베 켄토(1)(4)
(渡部健太)
스미다 치히로(4)
(隅田知一郎)
히루마 타쿠야(4)
(蛭間拓哉)
타케우치 나츠키
(武内夏暉)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A) 이 해 세이부는 드래프트 지명 대상 선수들에게 영양관리비와 같은 명목으로 금전을 제공하는 등의 부정 스카우트 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어 고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박탈당했다.
(6) 지명 후 미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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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91919,#ffffff
<rowcolor=#ffffff> 1950 1951 1952~1953 1954 1955
키노시타 이사무 타케스에 요시마사 카와사키 토쿠지 오타 마사오 나가사카 마모루
<rowcolor=#ffffff> 1956 1957 1958 1959 1960~1963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카와무라 히사후미 시마바라 유키오 이나오 카즈히사
<rowcolor=#ffffff> 1964~1967 1968 1969 1970 1971~1972
타나카 츠토무 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시노부 이케나가 마사아키 타카하시 아키라
<rowcolor=#ffffff> 1973 1974 1975~1977 1978 1979~1981
가토 하지메 미우라 키요히로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시타 리츠오 히가시오 오사무
<rowcolor=#ffffff> 1982 1983 1984~1987 1988~1989 1990~1991
모리 시게카즈 타카하시 나오키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rowcolor=#ffffff> 1992 1993 1994~1995 1996 1997~1999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궈타이위안 신타니 히로시 니시구치 후미야
<rowcolor=#ffffff> 2000~2005 2006~2007 2008~2012 2013~2014 2015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마키타 가즈히사
<rowcolor=#ffffff> 2016~2018 2019 2020 2021~2023 2024
기쿠치 유세이 타와타 신사부로 잭 닐 타카하시 코나 이마이 타츠야
}}}}}}}}}}}} ||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파일:2008세이부.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감독
2008

파일:2008아시아시리즈챔피언.png
아시아시리즈
우승감독
2008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6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라이온즈)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이와노 히데유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곽태원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6, 1988, 1990년 퍼시픽 리그 다승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6년 퍼시픽 리그 최고 승률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5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파일: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초대
미야자키
파일:일본 국기.svg
(1950)
2대
미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1951~1959)
3대
카와사키
파일:일본 국기.svg
(1960~1961)
4대
나카니시
파일:일본 국기.svg
(1962~1969)
5대
이나오
파일:일본 국기.svg
(1970~1974)
6대
에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5)
7대
듀로셔
파일:미국 국기.svg
(1976)
8대
키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6~1977)
9대
네모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8~1981)
10대
히로오카
파일:일본 국기.svg
(1982~1985)
11대
모리
파일:일본 국기.svg
(1986~1994)
12대
히가시오
파일:일본 국기.svg
(1995~2001)
13대
이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2002~2003)
14대
이토
파일:일본 국기.svg
(2004~2007)
15대
와타나베
파일:일본 국기.svg
(2008~2013)
16대
이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2014)
17대
타나베
파일:일본 국기.svg
(2014~2016)
18대
츠지
파일:일본 국기.svg
(2017~2022)
19대
마쓰이
파일:일본 국기.sv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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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와타나베히사노부.jpg
<colbgcolor=#143D69><colcolor=#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GM
와타나베 히사노부
渡辺久信 / Watanabe Hisanobu
생년월일 1965년 8월 2일 ([age(1965-08-02)]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군마 현 기류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세이부)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4~1997)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8)
자난 루카[1] (1999~2001)
지도자 자난 루카 투수코치 (1999~2001)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4~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투수코치 (2005~2006)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 (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08~2013)
프런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GM (2018~)

1. 개요2. 학창~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우완 정통파 강속구 투수.

일본프로야구 이후엔 대만에서 플레잉 코치로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친정인 세이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2. 학창~선수 시절

파일:external/i.ebayimg.com/!Bdo02WwB2k~$(KGrHqYOKjYEq5UtEI26BK5zoJpRNw~~_35.jpg
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모델이 된 와타나베.[2]

중학교 때부터 무려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을 받았고, 그후 마에바시 공고에 입학해서[3]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코시엔 경험은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1차전에서 그해 하계 준우승팀 교토 상고에게 끝내기로 패했다. 그후 3학년 때 지역예선 결승까지 가서 코시엔 문턱까지 갔으나, 이때도 상대인 오타 공고에게 끝내기 패하며 결국 코시엔을 다시 밟진 못했다.

그후, 1983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다만 세이부에선 본래 타카노 히카루[4]라는 투수를 지명하려고 했으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한큐 브레이브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3팀과의 치열한 추첨승부 끝에 야쿠르트에게 교섭권을 넘겨주면서 대체 1순위로 츠지 하츠히코를 지명하려 했으나, 결국 꿩 대신 닭으로 와타나베를 지명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와타나베가 남아있다며 영입을 주장하면서 급하게 와타나베를 대체 1순위로 지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츠지 하츠히코는 세이부에 2위로 지명되었다.

신인 때부터 1군에 정착하고 속구와 포크볼을 무기삼아 3년차인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곽태원[5], 이시이 타케히로 등과 함께 선발 마운드를 지키며 세이부 왕조 시대를 지탱했다.

치밀한 제구력보다 강속구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투수였으며, 탈삼진을 많이 뺏어냈지만 반대로 피안타와 피홈런도 많이 허용했다. 이런 스타일의 투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노쇠화로 인한 구위의 약화가 나타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의 투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배 투수이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강속구가 통할 때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라는 충고를 했지만 성공에 이르진 못했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에서 방출 된 후, 노무라의 ID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 선수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서 '노무라 재생 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무라 감독 아래에서 부활을 기대했지만, 성적의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6]

이 이후 현역 은퇴를 결정하고, 야구 해설자 계약을 맺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추천에 의해 지도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7] 투수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곤란으로 인해 한때 세이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당시 대만프로야구계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곽태원(카쿠 타이겐)에게 통역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와타나베가) 스스로 던져 몸으로 가르치면 좋겠다" 고 조언을 받고 급히 선수 겸 코치로 현역에 복귀했다. 완급조절을 구사한 투구의 결과 입단 1년차에 18승을 거두며 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 부문 3관왕을 기록하고, 이듬해에도 15승 8패,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하며 에이스로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체중 관리 실패 및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로 인한 노쇠화를 극복하지 못하며 2001년엔 2승 7패 4세이브, 방어율 3점대로 부진했고, 이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8]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TV 해설자, 스포츠신문 평론가를 거쳐 2004년에 세이부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05년부터는 2군 감독을 겸임, 2007년부터는 2군 감독만 맡았다. 2008년 이토 쓰토무의 후임으로 1군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7년 B클래스로 추락한 팀을 취임 1년만에 퍼시픽리그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군 감독 부임 당시까지만 해도 와타나베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그도 그럴 듯이, 세이부 황금 시대[9]를 지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치고 받으며 퍼시픽리그의 강팀으로 군림하던 2000년대 초를 지나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기존의 리그 붙박이 하위팀이었던 치바 롯데 마린스[1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11] 등이 리그를 제패하기 시작하며 호크스 하나만 제끼면 우승이 가능하던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 때문[12]이다.

거기에 절대적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13]알렉스 카브레라[14]와다 카즈히로 등의 강타자들이 FA 등을 통해 이적을 하고, 이토 쓰토무 말년의 망가진 팀 분위기와 드리워진 '패배'의 그림자[15]를 과연 신임 감독으로 지울 수 있을까 하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선수에게 친근하게 접근, 칭찬과 동시에 목표 설정을 통한 의식 개혁으로 팀을 바꾸어 나갔고 유격수이자 팀의 간판으로 성장한 나카지마 히로유키[16]를 중심으로 카타오카 야스유키, 쿠리야마 타쿠미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17]으로 기용하였다. 또한, 장타의 소질은 인정하면서도 정교하지 못한 타격 때문에 번번히 기회를 잡지 못한 '오카와리군(한그릇 더)' 나카무라 타케야[18]에게 "삼진 200개 당하고 홈런 50개 치고 와"라며 레귤러로써의 위치를 확보해 주었고 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시즌을 보낸 나카무라는 시즌 중반 이후 폭발적인 타격을 보이며 46개의 홈런으로 커리어 첫 홈런왕이 되었다. G.G.사토같은 노망주도 중심타자로 자리잡았고, 투수진에는 노장 니시구치 후미야가 건재했으며 에이스로 성장한 영건 와쿠이 히데아키[19] 키시 타카유키[20], 좌완 팜볼러 호아시 카즈유키[21]가 선발진을 이끌었다.

요미우리와 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4승 3패로 우승을 차지, 모리 마사아키가 이끌고 본인이 선수로 활약하던 1992년 이래 16년 만에 페넌트 1위 -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였고[22] 같은 해 아시아 시리즈도 제패, 이러한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2008년 쇼리키 마쓰타로 상 수상자가 되었다. 세이부 역대 감독 중 1 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은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 이토 쓰토무 에 이어 4명째다.

그러나 2009년~2013년 기간 팀을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지 못하고 2013년 10월 사임을 표명하였다. 재임 기간 중 첫 해 우승에 이어 카타오카 야스유키, 쿠리야마 타쿠미, 나카무라 타케야, 아사무라 히데토, 아키야마 쇼고, 스미타니 긴지로[23] 등 젊은 야수진의 성장에 기여하며 리빌딩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세이부 감독 시절 평가는 괜찮은 편. 다만 투수 출신 감독이었음에도 고질적인 불펜 불안[24]을 임기 내내 떨쳐내지 못했고 와쿠이, 마키타 카즈히사 등 몇몇 투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것[25]은 아쉬운 점.

화 내지 않는 것을 지도 방침으로 삼고 있지만, 전문성이 결여 된 사람을 매우 싫어한다. 대만 시절, 신인이면서 소질이 충분해 연습하지 않아도 활약하여 경영진이 참견하지 않았던 투수를 불러내 꾸짖거나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하이파이브 하는 선수를 보고 호통친 적도 있다. 세이부 2군 감독 시절에도 "어엿한 야구 선수가 되기 전에, 우선은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젊은 선수들의 긴장감이 결여 된 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했다. 재미있게도 정작 본인은 현역 시절 엄격한 관리 야구를 추구했던 세이부에서도 다소 자기관리가 모자랐던 선수중 하나로 꼽혔었다.

4. 여담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db926bd4.jpg
현역 시절에는 큰 키와 슬림한 몸매, 잘생긴 얼굴로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26] 그러나 탈모가 시작되면서 여성 팬들의 인기는 점차 줄어버렸고, 말년에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만 포장마차 음식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체중관리에 실패하면서 지금은 전형적인 대머리 과체중 아저씨가 되었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훗날 감독 시절 선수들에게도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옛날에 꽃미남으로 알려졌다"고 자학적으로 농담을 했다. #

1980년대 후반, 리그 라이벌이었던 긴테츠 버팔로즈의 주포인 랄프 브라이언트에게 매우 강했다. 브라이언트도 은퇴 후 한참 지난 일본 야구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상대를 묻자 주저 없이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정도. 하지만 1989년 긴테츠의 시즌 우승을 결정 지은 세이부 vs 긴테츠의 더블헤더에서 나온 전설적인 '브라이언트의 4연타수 홈런' 중 세번째 홈런[27]을 얻어 맞아 한동안 크게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동점인 상태에서 경기 후반에 돌입하자 "기세를 타고 있는 브라이언트를 막을 자는 히사노부 밖에 없다"라는 심정으로 불펜에 투입한 것이기 때문. 이 경기와 바로 다음 경기를 연달아 패함으로써 세이부는 리그 5연패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이 해에 우승을 했더라면 85년부터 시작된 리그 10연패라는 기록이 가능했기에 세이부 선수단과 팬들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었을 듯.[28]


랄프 브라이언트의 대형 홈런과 멘탈 나간 와타나베 히사노부[29]

메르세데스-벤츠를 애용했으며, 당시 팀 내에는 프랜차이즈 최고참이던 도이 마사히로[30]히가시오 오사무 외에 벤츠를 타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그 룰을 깨고 벤츠를 구입했다고. 그 이후 후배 선수들이 잇따라 벤츠를 구입하여 "내가 벤츠 해금의 선구자가 됐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의 관리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본인조차, 관리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감독이되면 절대로 저런 관리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예전 팀 동료였던 쿠도 키미야스기요하라 카즈히로 한테서 "프로 야구 투수로는 최고의 존재"라고 높이 평가 받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흡연을 하는 등 자기관리가 썩 뛰어나지는 않았음에도 폐활량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근육도 강해서 한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져도 경기 후 전혀 마사지를 받지 않은 일화가 있는 등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야구를 했던 스타일. 기요하라는 팀 후배인 키쿠치 유세이와의 대담에서 와타나베 감독과 시오자키 테츠야 코치를 극찬했다.

프로 입단 다음 날 하라주쿠에서 쇼핑을 즐겼고 옷 구입비용으로 한달에 30만엔을 지출했으며, 디스코에서 춤추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등 이전의 프로야구 선수의 전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신인류' 세대 선수란 평을 들었다.

모리와 노무라는 라이벌이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고 평하고 있다. 모리는 선수들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잘 돌보며, 질책이 잘 통하는 선수와 통하지 않는 선수를 구분하여 대응하며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잘 플레이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실행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심리전에 능해 말빨로 선수들을 설득할 수 있고 '아!이 사람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에 존재했던 팀.[2] 왜 일본프로야구 사진이 미국 스포츠 전문지 표지에 실렸나면,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선수노조 파업 사태로 인해 이해부터 시행하기로 한(결국 95년부터 시행)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일정이 모조리 다 취소되어 버려서 미국 야구팬들이 볼 수 있는 가을야구라고는 일본시리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기도 했을 정도.[3] 다만 와타나베 본인은 본래 당대의 야구 명문고로 소문났던 키류 고교로 입학하려 했고, 입학 수험공부를 위해 가정교사까지 고용했으나.. 정작 본인이 공부를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3일 만에 입시를 포기해 버렸다[4] 4팀의 지명을 받고 추첨으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80년대 중반에 주축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한 것 외엔 특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통산 51승 55패 13세이브, 방어율 4.08, 642탈삼진의 성적을 기록하고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은퇴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1995~98년까지 2군 투수코치로 일했고, 이후 대만 프로야구 싼상 타이거스에서 1999년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나 1년 만에 팀이 해체되면서 무직이 되었는데, 이후 정신질환이 발병하며 그 후유증으로 결국 2000년 11월 5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대한민국과도 작은 인연이 있었는데 자살 직전인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이 있었다.[5] 대만 출신의 우완 강속구 투수, 동양의 놀란 라이언,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이름 곽태원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쿠 타이겐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8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3명의 대만인 투수 곽태원(카쿠 타이겐, 세이부), 곽원치(카쿠 겐지, 주니치), 장승웅(소 카츠오, 롯데)는 대만과 일본 야구계에서 '이곽일장'으로 불렸다. 이들 중 곽원치와 장승웅은 나중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6] 반면 세이부에서 먼저 이적한 츠지 하츠히코의 경우 1996년에 타율 0.333을 기록해 노무라 재생공장의 훌륭한 사례로 남았다.[7] 1997~2002년까지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별개로 존재했던 야구 리그. 약칭 대만 대연맹. 리그 개시 초기엔 당시 검은 독수리 사건 때문에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인기가 개발살난 상태라 상대적 이익을 얻으며 어느정도 잘나갔으나, 결국 갈수록 인기가 줄어들면서 2002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CPBL에 합병된다.[8] 와타나베가 은퇴한 이듬해인 2002년,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이 중단되면서 자난 루카는 해체되었다.[9] 80년대~90년대[10] 2005년 우승[11] 2006년 우승2007년 준우승[12] 이미 2002년만 해도 친정팀인 세이부도 리그 우승 겸 일본시리즈 준우승을 했었다.[13] 2006년 까지 리그에서 손꼽히는 투수 였으나 포스팅 시스템으로 MLB로 떠났다.[14] NPB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후에 약물 복용 전과가 드러났다.[15] 선수들과의 불협화음이 있다고 공공연히 들렸다는 썰이다. 그런데 이토 감독의 경우 선수층이 좋은 세이부 선수들과는 이미 선,후배 기강에는 문제가 없었고 부임 당시에도 반대하는 이들은 커녕 환영하는 취지였다.[16] 마쓰이 카즈오의 MLB 진출로 공석이 된 유격수 자리를 받는다. 그러나, 3년연속 실책왕 이라는 오명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3번의 골든글러브를 획득한다.[17] 이미 전임 감독이던 이토 쓰토무도 젊은 선수들을 많이 육성 하겠다는 방침을 세운적이 있었다.[18] 그 덩치와는 달리 주루 능력이 좋아서 고교 시절에는 "호타준족" 소리 까지 들었다고 한다.[19] 키시와 함께 팀의 프랜차이즈로 남길 원했지만 와타나베 감독의 투수기용 의견차로 인해 전임 감독인 이토가 있는 지바 롯데로 2013 시즌 후 이적해 버렸다. 와쿠이 데뷔 시절이 이토가 부임햇던지라 얼추 맞다.[20] 와타나베/이하라 후임으로 들어온 타나베 감독의 투수기용 문제로 2016 시즌 후 라쿠텐으로 이적[21] 세이부에서는 현역시절 괜찮았으나, 소프트뱅크 가서는 라이온즈 시절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22] 2004년에 이토 감독이, 오치아이 감독의 주니치를 4승 3패로 꺾고 우승했으나 정규 시즌은 2위 였기 때문에 '통합 우승'의 개념에서는 빠진다.[23] 현장에서 수비력은 괜찮은데 타율만 보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였다.[24] 세이부 중간계투를 대표하는 '오레타치' 밈이 탄생한 게 2009년이다.[25] 그래서 그런지 감독 본인이 믿었던 투수들 가운데는 선발 요원들을 갑작스럽게 중간계투로 돌리거나 선발로 다시 올리거나 하는 등 구위만 보면 괜찮은데 투구수 조절 실패를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26] 구단 기숙사를 떠나 아파트에서 자취를 시작한 뒤 어느 여성 열성팬이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밤새 기다렸다는 일화도 있다.[27] 더블헤더 첫번째 경기로 이 경기의 결승타였다[28] 참고로, 일본 시리즈에서는 85년 vs 한신 패배, 86년 vs 히로시마 승리, 87년 vs 요미우리 승리, 88년 vs 주니치 승리, 90년 vs 요미우리 승리, 91년 vs 히로시마 승리, 92년 vs 야쿠르트 승리, 93년 vs 야쿠르트 패배, 94년 vs 요미우리 패배 라는 성적을 올렸다. 요미우리 V9과 함께 NPB 역대 최강의 황금 시대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8~90년대를 꼽는 것이 무리도 아닌 것이다.[29] 첫번째, 두번째 홈런은 당시 선발이었던 곽태원으로부터 였다. 솔로 - 만루홈런의 순서[30] 긴테츠와 세이부에서 활약한 강타자로 통산 465홈런-2452안타를 기록했다. 삼성 라이온스, 세이부, 주니치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다. 세이부 타격코치 시절 본인과 같은 18세 4번타자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성장에 기여했다.